최근 어때. 가볍게 꺼낸 말이었으니 대답 역시 간단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누구와 뭘 했는지까지는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어떻다, 정도의 말이 나오고 그 중에서 적당히 다음으로 이어갈 화제를 고르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흐응."
레레시아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아스텔을 응시했다. 이전보다는 괜찮다던가 말할 때에는 얼굴을. 잔을 돌릴 때에는 그 손을. 그러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다시 얼굴로 시선을 옮겨가며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생각한다. 신기한 사람이다. 무엇이 어떻게, 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이윽고 그가 시선을 맞추며 얘기하길래 그녀도 슬슬 입을 열었다.
"미안할게 있나. 적당히 꺼낸 말에 너무 잘 대답해줘서 오히려 좋은데. 싫어하지 않아. 그런 얘기를 듣는 거."
정확히는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나도, 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그렇게 아이스러운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거든. 어릴 때는 툭하면 세븐스 조절이 안 되서 나가지도 못 하고 늘 라라랑 둘 뿐이었어. 그나마 라라가 있으니까 나았나. 그러다보니까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는 타인이나 바깥과 교류가 없었고. 줄곧 그 작은 방만이 세상의 전부였는데... 그, 여기 들어오고 시야라던가 많이 넓어지고 바뀌었지. 그래서 그 기분 이해해. 어색하고 불안하기도 하면서 신기하고 들뜬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분."
아스텔의 얘기를 들어서인지 살짝 흘리듯이 말하던 그녀는 중간에 아차, 하듯 말을 바꾸었다. 말을 바꾸며 당황한 것 같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렇지만 시선이 아스텔이 아닌 잔으로 내려가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춤이라면 네가 낼 수 있는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이면 돼. 상황은 나도 마찬가지니까 잘 알고 있고, 애초에 프로급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시간을 더 줄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니까, 만족스럽게 익히거든 꼭 얘기해. 춤 신청을 받아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잊으면 화낸다? 늘상 하던 말투로 떠들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분면 순한 신맛인데 입안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뭘까. 그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다음 말을 찾아 꺼내었다.
"그러, 크흠. 그러면 내 제안에 수락한 것도 그 교류의 연장선이었어? 내가 꺼낸 말이긴 한데. 뭔가 이유라도 묻지 않을까 했는데 그냥 수락하길래 뭐지 싶었거든."
짜다. 짠 것은 싫다. 담백한 것이 좋았다. 간이 세면 무엇이 들었는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잡스러운 것을 먹지 않는 연유 이곳에 있다. 가늠할 수 없으면 더욱이 경계해야 했다. 이곳에 있다는 뜻은 로벨리아가 뽑은 사람이고, 일단은 예민한 기감에 독 없음 믿고 먹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죽일 생각 만반하다. 씹는 순간에도 그리 날카롭게 생각했다. 제 속에서 증오 끓어넘치던 그날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피 토하던 날 끔찍하였다. 과거, 어쩌면 어제도. 혹은.
"그렇군. 움직이는 것 여간 귀찮겠지."
혀로 느릿하게 육즙 묻은 아랫입술 훑는다. 여전히 짜다. 고기 익는 냄새 뒤로 시즈닝 냄새 코를 찌른다. 간단히 후추 정도만 뿌리는 것 좋아하였기 때문인지 자극적인 냄새 여간 익숙하지 않다. 소시지 하나로도 속이 받쳐주지 않으려 든다. 남들 반의반도 못 먹기 때문인가. 이어지는 말에 눈 감는다.
"아니, 혼자 할 수 있으니 기다리게."
겨우내 삼킨 것을 뒤로 겨우내 삼킨 것을 뒤로 몸을 느릿하게 움직인다. 물 흐르듯 움직인 몸 나무 뒤로 가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 몇 번 난다. 나무에도 가려지지 않던 거대한 몸신과 살랑거리던 꼬리가 사라진다. 아니, 꼬리는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변신한 뒤로 머리끈 끊겼기에 미처 묶지 못한 긴 머리카락은 바닥을 느릿하게 쓸법하나 세븐스를 이용해 공중에 떠 허공을 걸어오듯 했기 때문인지 머리카락 더러워지는 일 없다.
"마저 대화나 하도록 할까. 그래, 제법 재밌는 발언이었어.. 이곳에서 훈련 겸 힐링이라. 하나 궁금하여 묻는 것이니 답하지 않아도 되네. 글라키에스 때문에 그런 건가?"
"...그래? ...어쩌면 제 0 특수부대에 온 이들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르겠네. 정말로 자유롭게 산 이는 그다지 없을테니까."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온 것일테고. 물론 그게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텔의 머릿속에 선우의 이름이 문뜩 떠올랐다. 전에 대화한 것에 따져보면 그는 상대적으로 꽤나 자유롭게 산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부러울 정도로. 허나 그것이 일반적인 삶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쩌면 이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인 인식이 그렇지 않던가. 답을 마치며 그는 괜히 블루 하와이를 다시 마시면서 1/4 정도를 남겼다.
"...노력해볼게. 알다시피 레지스탕스의 삶은 내가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이쪽의 삶이자 인생이기도 하고."
아직은 들키지 않았지만 내일 운 나쁘게 가디언즈에게 이 거점을 들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가디언즈는 이곳을 총공격할 가능성이 높았고 애석하게도 아스텔은 그 모든 공세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오리지날 보검이 있다고는 하나 저쪽은 7개이다. 그 7개를 자신 혼자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안타깝게도 제 0 특수부대원들이 다 힘을 합쳐도 다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곳의 삶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이내 그녀의 입에서 질문이 나오자 아스텔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야기했다.
"...억지로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내 교류에 대해서 상당히 물어보는 것 같은데. ...보통은 그다지 물을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굳이 억지로 뭔가를 물으려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먼저 한 후, 아스텔은 숨을 잠시 죽인 후에 레레시아의 눈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유를 물어봐야만 했던거야? ...그런 거 없이 그냥 마실 수 있으면 마시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역으로 내 쪽에서 무슨 이유가 있었냐..라고 지금 물어볼게."
뒤이어 아스텔은 티슈를 뽑은 후, 젖어있는 제 입술을 가볍게 닦아낸 후, 근처에 놓여있는 물을 다른 컵에 한 잔 따라서 그 내용물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내 이야기했다.
"...굳이 이유를 하나 더 말하자면... 단순히 교류만은 아니야. ...정확히 설명하기 조금 애매하지만... 그게 무엇이건 그냥 할 수 있을 때 이것저것 하고 싶거든.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인생이고, 어제 힘내자고 이야기를 한 이가 다음 날, 제 친구의 손에 죽는 것도 여럿 보았고... 내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일도 있었고... 그냥 그래서 술이건 밥이건 다른 무엇이건 할 수 있으면 미루지 말고 하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러니까... 그런거야."
>>465 엘리나:......이해불가능한 말입니다. 엘리나:......제 아버지는 소재를 알 수 없습니다. 당신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리나:......그러니까 그 제안은 불가능한 제안입니다. 엘리나:......무엇보다 데려가준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고민은 무언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궁리에 가깝다. 해결책이 없는가, 숙고해보고 그 고민 끝에는 그것이 최악이든 최선이든 답이 존재한다. 그러나 답이라는 게 없이, 그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닫으며 막을 방법조차 없는 상황에는 고민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가면 갈수록 몸이 망가지는걸 몸으로 느껴.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나는데, 난 벌써 죽어가는 중이야."
이걸 늦추려면 세븐스를 사용하지 않고, 그 반동을 겪지도 않으며 회복을 하거나 해야겠지. 하지만 이제 쉴 여유도 없는데다가 지금의 내 몸을 마법같이 회복시켜줄 그런 기적도 없다. 나는 작전을 거듭할수록, 작전 중에 사망하는 확률을 제외하더라도 저승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다.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그 전에 작전 중에 끝장나겠지만."
마치 이 녹슬어서 무너지는것만 기다리는 철탑처럼. 무엇하나 받치는 것 조차 고작인 채로, 시간이 지날수록 스러져갈 것이다.
눈앞이 그저 밝다. 한낮에 태양을 마주볼 적이면 하얀 빛이 두 눈을 태워버릴 것처럼 빛나는데, 지금은 꼭 그것을 영거리에서 느끼는 듯한 기분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밝은 빛을 앞에 둔 채 망연한 어둠이 찾아든다. 찰나, 의식의 암전.
……극심한 고통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살갗이 온통 화끈거리고 귓가에는 이명이 쨍하게 울려 댄다. 의식적으로 정신을 일깨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까무룩 뻗어버릴 것만 같아 필사적인 사고를 이어간다. 씨-*. 제대로 휘말리면 이런 기분이구만. 덕분에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역시나 목숨은 아깝다는 것. 특수부대원이라는 직책을 달았으면서 능력 조절을 삐끗해 사고사하는 것만큼 황당한 죽음도 없을 테다. 그래서 죽지만은 않을 정도로 조절하긴 했는데, 과연 너무 과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들었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이랬으니 할 말은 없지만서도. 통증으로 인한 불쾌감을 토로할 기운도 없어 그는 구태여 움직이려 힘쓰지 않고 그대로 주변을 느껴보았다. 등 뒤로 튼튼한 지지대가 느껴지며 하체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으로 보아, 이쪽은 날려가서는 아예 벽에 부딪치다 못해 박혀 버린 모양이다. 간신히 의식만은 붙들고 있는 게 용했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이런 무지막지한 짓거리를 벌일 마음을 먹은 덴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훈련장의 회복 기능은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다. 잠자코 숨을 고르며 기다리니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는 것이 느껴져, 그는 슬며시 눈을 뜨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쥬데카는 무사한 모양이다. 꼼짝할 정도는 되니 제 공격도 무리 없이 막은 듯하고. 소리내어 상대방을 부르려 했지만 아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에 전투 중 미처 사용하지 않아 바닥을 굴러다니던 탄환 하나를 작게 폭파했다. 주의를 끌 만큼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