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미션 이후 아스텔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전에 약속을 한 것이 있긴 하지만 바로 가는 것보다는 역시 조금은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는 굳이 레레시아를 찾아가진 않았다. 보아하니 그때 꽤 다친 것 같기도 했었으니까. 자고로 다친 상태에선 술을 먹으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일단 그 약속 수행은 조금 미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스텔은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기도 하고, 자신의 보검을 바라보기도 하며 그는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듣자하니 버스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던가. 에스티아가 모조용 보검에 심어놓은 세븐스. '사이버 엘프'인 루시아.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괜히 작게 숨소리를 내던 아스텔은 밖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 싶어 자신의 개인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레지스탕스인 이상 최대한 기지가 눈에 띄면 안되기에 기지를 지하에 만들어둔 것은 납득할 수 있었으나 역시 지상으로 올라가야만 나갈 수 있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조금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는 도중 아스텔은 딱 모퉁이에서 레레시아와 마주칠 수 있었다.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이던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 오른손을 살짝 올려 인사했다.
"안녕. ...몸은 괜찮아?"
/약속이 있으니 찾아가긴 했겠지만 부상을 입었으니까 찾아가지 않았을 것 같네요.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우연찮게도 딱 맞아떨어지는 공방 형태다. 이쪽은 열심히 버스트로 때리고 저쪽은 버스트로 막으면 되겠네. 그는 가뿐한 기분으로 보검을 꺼내들었다.
"뭐, 개같이 싸우면서 감 잡는 게 빠르지 않겠냐."
장난스레 씩 웃으며 끝낸 말과 함께, 보검이 해방되며 손끝으로부터 견갑과도 같은 무장이 뒤덮이기 시작한다. 드러나는 부분 하나 없이 견고한 무장이 갖춰지자 내내 고수하고 있던 느긋한 기색도 사라진다. 그는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 몸을 낮추었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은 탄성을 뱉고는 자세를 풀어버렸다.
"아, *. 너 씨* 준비운동 안 했지 않냐? 다 하면 말해라."
대뜸 한 판 붙자며 밀어붙인 것치고는 차분하다고 해야 하나. 다음 임무 때까지 몸 보전 잘 해야 하니 발목이라도 삐끗하는 일은 없어야지 않겠나. 그는 기껏 발동한 보검을 다시 돌려놓고서는, 그것이 작대기라도 된다는 양 대충 체중 실어 검에 기대고 있다. 정말로 준비운동 정도는 기다려 줄 요량인가 보다.
퍽 하는 소리가 숲속 깊은 곳에서 울려퍼졌다. 무엇인가가 나무에 찍히는 소리같아 누군가는 어디선가 벌목을 하는 중인가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연이어 계속해서 들려왔고 간간히 남자가 끙끙대는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가본다면 나무에 걸어둔 과녁에 손도끼를 던지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과녁에는 이미 숱한 칼질 자국과 화살자국, 간간히 총알의 흔적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과녁에 손도끼가 깊게 박힐 때면 이것을 빼기 위해 끙끙대며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훈련을 한 시간이 오래 되었는 지 그의 전신은 온통 땀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때 엘사녀와 싸울 때 총알이 다 떨어져 큰일이 날 뻔한 것을 생각해 보면 총이 아닌 것을 다루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엘사면 노래나 부르지 사람을 잡고 있어"
이내 탈진 했는 지 바닥에 쓰러져 멍하니 하늘을 본다. 선우가 그때 구한 아이들은 다른 부대에 맡겨져 정신 치료를 받고 있고 나중에는 다른 안전한 마을로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꾸 구하지 못했던 이미 죽어 시체가 된 아이가 떠올랐다. 가디언즈 여럿을 길동무로 보내주긴 했지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이라는 후회가 가시질 않는다.
"배고프다."
몸을 일으키고는 호숫가 근처에 가서 장작과 버너를 준비한다. 지난 번엔 훈련장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가 곤욕을 치뤘으니 이번에는 밖에서 먹는다. 두툼한 고기와 함께 각종 향신료를 꺼낸다.
너는 그의 말에 조금 들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가? 그냥 단순히 뭔가 분출할 만한 거리를 찾고 있던 건 아닌가. 물론 그런 생각은 그가 공격을 하려는 듯하다가 준비운동을 안한 것 아니냐는 말과 함께 자세를 풀어버렸다는 점에서 날아갔다, 어디까지나 훈련이다. 뭐 그런 생각이려나.
"준비운동이라, 으음."
자세뿐만 아니라 아예 보검 무장까지 풀어버린 그를 보며 뭔가 생각하던 네 눈이 접히더니 땅을 박차는 소리가 퍼진다. 상대는 비무장인 상태, 게다가 자세도 풀어놓았으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 다만 그가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기에 너 역시 무장을 착용한 건 아니었다. 그냥 맨 몸 그대로, 그의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내지르기 직전, 네가 하는 말은 들렸으려나.
"실전에는 준비운동이란 게 없잖습니까."
움직임이 빠른 편이었긴 해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공격, 뭣하면 무장으로 막아버려도 될 만한 선공이었다 모든 상황이 다 완벽한 실전이란 게 어디 있을까. 적어도 네가 겪어 온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복귀한 뒤로 레레시아의 모습은 기지 내에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하루는 머리끝도 보이지 않다가, 늦은 밤 쯤에야 몽실몽실 하얀 머리칼이 돌아다니는게 보였겠지. 복귀 직후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벌써부터 저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싶겠지만. 마주칠 때마다 인사도 잘 받아주고 보기에는 성했으니 그런 의구심도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오. 안녕."
아스텔과 마주친 것도 그렇게 평소마냥 돌아다니던 와중이었다. 모퉁이에서 딱 마주친 상황.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지금은 넋을 놓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고 마주 인사를 건네었다.
"몸이야 보다시피 말짱하지. 근육은 좀 욱신대는데 못 걷고 그럴 정도는 아니야. 빈혈기는, 뭐 어쩔 수 없고. 넌 어때?"
괜찮냐는 물음에 답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머리를 하나로 땋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 훈련장에 가려고 하거나 다녀오는 길이지 않았을까. 빈혈을 언급한 만큼 낯빛은 창백하지만 표정 만은 묘하게 밝아서 조금 위화감이 들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불길한 느낌은 아니었겠지. 넌 어떠냐며 되물은 레레시아는 아스텔이 온 방향과 가려는 방향을 둘레둘레 돌아보곤 앗,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새삼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임무 나가는 중이야? 또 뭐 생겼어?"
아무래도 아스텔이 가는 방향이 나가는 길이었으니. 큰 건 하나 처리하자마자 또 뭐가 생겨서 나가는가 싶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