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다던가. 전부 거짓일 뿐이었으니까. 나는 너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웃을 뿐이었다. 사랑받고 싶다던가- 하는건 분명 사실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랑을 받을 준비조차 되지 못했었지.
그리고 그 반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와버렸다. 내가... 내가ㅡ 지금 무슨 말을 한거지.
"아....."
예전부터 이랬다. 나는 누구를 좋아할때 무언가 엄청난 사건이 필요한게 아닌.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그냥 가벼운 일상속에서 정말 갑작스레 좋아 미칠거 같이 되버린다.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거 아닐까? 이제 겨우 한 발자국 뗄까 말까한 이야기에서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거지?
얼굴이 새빨개진거 같았다. 나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있어? 나, 나..
"어?"
그러나 예상외로, 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아. 역시 내가 너무 정떨어지게 말했나? 하지만 그 후의 행동은 더 예상외였고. 갑자기 구석에 들어가버리더니 쪼그려 앉아서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서 하는 말에.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알거 같았지만. ........... 알거 같았지만.
'어쩌지'
정말 미안하게도. 내가 지금 너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진지하지 않을거라서. 어쩌지 정말.
나는 지금 네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게밖에 보이지 않아.
내가 걱정한것은 네가 나에대해 전혀 그럴 감정이 없었을때지. 그 외의 요인은 겁나지 않았다. 있지, 나는 분명히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평소의 행동이 결코 연기인것은 아닌걸.
"뭘, 못해주는데?"
바닥만 훑고있는 너의 뒤에 다가가서는, 아니 같은 선상. 그러니까 너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나는 멀쩡한 손을 뻗었다. 그 손은 그대로 너의 뺨을 매만지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내 쪽으로 돌리며. 그대로.
"나한테 키스해주는거? 나를 만지는거? 나를 안는거? 어떤걸 못해주는데?"
키스하려 했습니다. 다만 네가 피하든 피하지 못하든. 진짜로 하지는 않고 코앞에서 멈춘뒤 다시 너를. 놓아줬겠지만. 나는 너를 바라보며 아까 네가 해줬던것처럼. 잡아달라는듯 손을 뻗었다.
"네가 나를 여자로 볼 수 없어서 안된다고 한다면.. 포기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도 여자로서 자존심이 있어. 이대로 물러날 생각도 없고."
그래, 만약에 날 받아줄 수 있는데. 그 외의 문제가 걸리는거라면. 나도 그저 부끄럽다고 넘길 수 없으니까.
심란하지만 그냥 고민일 뿐인 무언가. 심란과 그냥이 공존할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미 결론을 내렸다 여긴 문제에 다시 빠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뭐야. 할 건 다 하고 있었네. 어- 눈치는 채겠지만 그걸 굳이 묻지는 않지. 나 처음이라고? 무슨 일 있냐고 듣는거."
저번 임무 이후로 줄곧 이랬는데 직접적으로 물어본 건 아스텔이 처음이었다. 아니지. 여기 온 후로 처음일 지도. 라라시아는 어쨌냐고? 그 며칠 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피하듯. 피한 것처럼. 아무튼 이 자리도 그저 그렇게 넘겨보내려고 그녀가 먼저 비켜서고 밖으로 나갈 듯한 말도 했으나. 아스텔은 비켜준 길로 가지도 않고 호수 위치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해서 그녀의 표정이 다시 멀뚱해졌다. 의외라는 표정이었지. 잠깐은 눈을 흘겼지만.
"내가 아무리 그래도 나무에- 안 박을 거라고 말을 못 하겠네. 이런. 피곤할까봐 위치만 알려달라고 한 건데. 그렇게 말하면 나야 고맙지. 날아가는 경험도 궁금하고."
네가 데려다준다고 그랬다? 사실관계를 확인하듯 덧붙인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방향을 한 번, 아스텔의 방으로 가는 복도를 한 번, 돌아보고 어떻게 할 거냐 물었다.
"그래서, 어, 이대로 동행할까? 아니면 나 먼저 나가서 기다릴까. 난 따로 챙길게 없어서."
평소-보다는 조금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밖에 나가기는 무리가 없는 차림이었으니 그녀는 따로 방에 들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 같이 방에 들렀다 갈지 기지 바깥에서 다시 만날지를 묻고, 아스텔의 대답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 보통은 다 묻지 않나? 자신의 기준이 이상한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자신의 기준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기에 일단은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스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다음에 다른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묻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입구에서 기다려줘. 여유롭게."
굳이 자신의 방까지 동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스텔은 그 부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일단 낚시대를 챙기면서 마저 이것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금 있다가 보자고 하면서 아스텔은 자신의 방을 향해 모퉁이를 꺾어 안 쪽으로 들어섰다. 이내 그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손에 들고 있는 주스와 샌드위치를 마저 먹어치운 후, 방으로 들어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다. 그리고 방 저편에 세워둔 낚시대가 들어있는 가방을 챙긴 후에 밖으로 나왔다. 아마 레레시아 입장에선 아주 조금 기다리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이내 아스텔은 완전히 밖으로 나왔고 그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그녀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중간에 뭘 했다고 한다면 아마 기다렸을테고. 어쨌건 그녀와 합류 후에 아스텔은 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블러디 레드 때와 느낌은 비슷해. 바람은 내가 컨트롤 할테니까 움직이지 말고 그냥 몸을 맡긴다는 생각으로 있어줘. ...준비되면 이야기해. 세븐스 쓸테니까."
"뭘 또 미안하대. 신경 쓰이는 걸 봤을 때 왜 그러는지 묻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한 소리였어."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아스텔은 꼭 한 부분이 밍숭맹숭했다. 콕 집어 어디라곤 할 수 없지만. 어딘가 빈틈이 있어보인다고 할지. 그런 부분이 그가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간미- 라고 하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
입구에서 보자는 대답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여유롭게, 라고 했으니 가는 길에 방에 한 번 들를까 했다가 지나쳐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계단을 올라 슈퍼마켓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쌀쌀한 공기에 겉옷이라도 갈아입었어야 했나 싶었어도, 이미 나와버린 걸 다시 들어가긴 싫었다. 그래서 입고 있던 자켓만 꼭 여미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작게 허밍을 흘리고 있었다. 박자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거리다가 아스텔의 기척과 발소리가 들리자 멈추고 돌아보았다.
"음- 그 때라."
블러디 레드 때라면 아직 기억은 하고있으니 요령은 알고 있다. 그러니 바로 준비되었다고 말 할 법도 한데.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이제와서 날아가는게 무섭다던가 그래진 걸까. 머뭇거림은 곧 행동으로, 말로 바뀌었다.
"오늘은, 무장 안 쓰니까. 손 잡아주면 더 편할 거 같은데."
임무 때는 임무였으니까, 같은 말을 어설프게 덧붙이고 한 손을 슥 내밀어본다. 노란 눈이 힐끔 눈치를 보더니 옆을 보며 중얼거린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준비는 이미 다 했다면서 날아가라고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러다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면 편할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말에 아스텔은 두 눈을 깜빡이면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딱히 불편하진 않아. ...누군가를 잡고 날아가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니까."
임무를 수행 할 때는 자주 하는 행동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자신의 세븐스를 사용했다. 주변의 공기 움직임이 살짝 달라지는 듯 하다, 단번에 상승기류가 생겼고 그 바람은 이내 두 사람의 몸을 높게 띄웠다. 그 상태에서 아스텔은 떨어지지 않게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살짝 준 후에 바람을 컨트롤했다. 떨어지지 않도록, 마치 글라이더를 조종하듯 아스텔은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너무 빠르지 않게, 그렇다고 해서 또 너무 느리지 않게 속도를 조절했다.
"떨어지지 않으니까 겁먹진 말고. ...떨어지지 않게 조정할테니까."
자신의 세븐스는 공기의 흐름을 바꾸는 것. 공기의 흐름을 바꿈으로서 탄생하는 바람을 지배하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편의점도 지나가고, 서점도 지나가고, 민가도 꽤 지나가다 조금 더 날아거니 아랫쪽에 녹색 숲길이 또 보였을 것이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숲길을 공중으로 지나가니 머지않아 적당한 크기의 호수가 하나 그 모습을 보였다. 투명하면서도 맑은, 그러면서도 고요한 그 호수 근처에 도달하자 아스텔은 또 다시 세븐스를 조정해서 천천히 자신과 그녀의 몸을 아래로 내렸다. 떨어지지 않게, 발이 땅에 닿는 것을 확인한 후에 착지한 후, 아스텔은 호수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가 내가 낚시를 하는 호수야. ...뭔가 생각할 것이 많거나, 혹은 그냥 조용히 쉬고 싶을 때 오면 딱 좋아. ...고요하고, 평화롭고, 또 괜히 머리가 맑아지기 좋으니까."
물 구경을 하고 싶다면 편하게 하라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등 뒤의 낚시가방을 벗은 후, 그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그렇게 고급적인 느낌은 아닌 녹색 낚시대가 들어있었다. 미끼통이라던가, 바늘이라던가 있긴 했지만 오늘은 딱히 물고기를 잡아갈 생각은 없었는지 물고기를 담아갈 바구니는 없었다.
"...참고로 여기엔 신선한 민물고기도 많아서 회를 먹기도 좋지. ...뭐, 오늘은 먹거나 할 생각은 없어서 잡아도 바로 풀어줄거지만."
몰려드는 당혹과 감정의 격동을 피하는 방법은 언제나 이렇다. 자리를 피해 어디까지고 도망가거나, 시야를 틀어막고 숨어버리는 것이다. 유아적이고 미숙한 행동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더 나아질 자신은 없다. 나아지려면 문제를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해야 하며, 내면을 관조할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그는 차라리 자기 자신이 아낌 받을 가치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나 자신이 정말로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으면. 언제나 보답 받지 못했고, 기대할 자격조차 없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길 바라게 된다. 그런 이유라도 있어야 늘 외로웠던 홀로의 삶이 덜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온정은 그렇기에 두려웠다.
한참동안 바닥만 뚫어지게 보고 있으려니 익숙한 인기척이 다가왔다. 그는 스스로 고개 들어 멜피를 바라보았다. 뺨을 매만지는 손길 역시 별달리 피하지 않는다. 결혼하자는 얘기에 도망간 주제에 그 와중에도 만지는 건 싫지 않은 모양이다. 방어기제마저도 주인 닮아서 영 허술하고 엉망인데, 생각이 복잡해서 맹하게만 있던 그에게 불현듯 불꽃 같은 경악이 닥쳤다. 일순간, 숨이 가까웠다. 그는 펄쩍 뛰지도 그렇다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아닌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져서 완전히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는 거다. 잠시간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하더니, 뭘 못해주겠냐는 물음에 "아니, 씨*. 결혼하자면서."라고 투덜거렸다. 짐짓 불만스레 눈을 가늘게 뜨는 걸 봐선 그사이 평소의 불퉁한 듯 뚱한 기색을 되찾은 듯싶다. 이번에는 제게로 먼저 내밀어진 손을 그는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아, 이런 점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서로 손을 건네고 마주잡는다는 그 간단한 교류의 의미가, 늘 언제나 절실했다. 그는 손을 맞잡는 대신 그 손 안에 얼굴을 기대어 비볐다. "이런 것밖에 못하거든. 존* 개도 아니고." 뺨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온화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참 뜬금없이도 깨는 소리로 웃어 버렸다.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그걸 못 버텨. 그리고 연애는 존* 어떻게 하는 건데? 본 적도 없고, 경험도 없고, *. 난 너 좋아해. 근데 키스는 못해. ……그렇다고 그냥 호감은 아니지만, 씨*.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게 너랑 같은 건지 확신이 안 선다. 그리고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내가 널 그만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씨*놈이라서 실망하게 만들 것 같고."
푸념에 가깝도록 이어지는 말이 구구절절 길었다. 모두 말하고는 잠시 숨을 들이키더니, 그는 몸을 바로 세우고 색이 다른 두 눈을 올곧게 마주했다.
권리. 에델바이스는 가디언즈로부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다- 그녀가 이곳에 왔을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그것이였기 때문에 '권리'의 의미정도는 알고있었다. 태생에 관계없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만 하며, 그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런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그녀는 배웠다.
"그런가."
그러나 그런 '개념'이 지금에까지 적용 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