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눈이 마주친 건 그러니까. 유루였다. 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안녕? 하고 건네는 인삿말에 반응하기 위해 입을 연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러면... 유루 씨가 누구 없냐고 부른 걸까. 아마 그럴거라고 생각하면서 두어 발짝 움직여 주방으로 들어선다. 유루의 양 손에 가득 들린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이어진 도와주러 온 거냐는 물음에, 너는 망설임 없이 고갤 끄덕인다. 애초에 도움을 청하는가 싶어서 온 거였으므로.
"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순간에는 어떤 식으로 도움이 필요한지를 짐작할 만한 말이 이어서 들려왔기에 금방 도움을 줄 수 있다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됐다. 그러니까 칼질을 잘 하느냐는 질문.
"아, 네. 어느정도 다룰 줄 압니다."
칼을 오랜 시간 다루어온 사람처럼, 마치 제 몸처럼 요리하는 데 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저 조금, 조심스럽게 다룬다면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는 수준이겠지. 칼질에 담긴 또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는 일단은 액면 그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그 뒤에 주방 안으로 걸어들어가 유루가 만들던 게 무엇인지 파악해 보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조금 불편한 느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서서 답을 기다린다.
싱긋 미소지어 보이는 인두겁 자체는 온화하다. 속내는 그저 일꾼 한 명 낚아서 기쁜 것일 테지만… 무튼 당신이 칼은 어느 정도 다룰줄 안다는 답을 하면 그는 들고 있던 칼을 돌려, 손잡이를 당신 쪽으로 향하게 하여 건네주려는 제스쳐를 취한다. 그의 손은 손잡이에 느슨히 감겨 있었기에, 당신이 그저 와서 잡기만 하면 금방 손을 뗄 것이다.
“사과 썰어주면 그때 막아선건 깔끔히 잊어주지.”
‘그때’라면, 아마 블러디 레드 전투 때를 말하는 것일 거다.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고마워 해주지 못할 망정, 이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가치관이 있는것과 그걸 따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수로 널 찔렀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면 난 아군을 상해 입혔다고, 의미 없는 죄책감만 느껴야 했을텐데. 불쌍하지 않아?”
나도 깊은 생각 없이 튀어나간 잘못은 있지만. 그렇게 덧붙이곤 미간에 힘이 풀린 채로 당신을 응시한다. 가벼워진 말투와 뱉는 뜻과는 달리 경쾌한 목소리. 당신이 그의 말에 뭐라 대답하듯, 실눈으로 웃음짓고선 곧바로 화재를 바꿔버릴 것이다. 응답은 나중에라도 되돌이표를 찍으면 그만이니.
“아직 껍질 덜 깍은 사과도 있는데, 그것도 마저 깍아주면 고맙겠어.”
느슨히 치켜든 손가락은 반듯히 껍질이 깍여진 사과 두 알, 그리고 반쯤 깍다 만 사과 한 알이 놓인 도마를 가리킨다.
“과일 파이는 좋아하는 편?”
그렇게 묻고선 마땅히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몇개 더 굽자고 제안해 본다. 물론 사과는 당신이 깍고 썰어줘야 한다며 말을 끝마친다. 은은히 미소짓고 있는 꼴을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중이라 기분이 좋은겄도 있지만, 당신을 대하는 태도 자체도 개편된 걸 보면 어째 당신을 신뢰 하는듯 보이기까지 한다.
사과를 깎아주는 걸로 OK라면, 저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간에... 나쁜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더욱. 너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가 내밀었던 칼을 조심스레 잡았다. 이제 사과를 깎는 걸로 충분하겠지.
"그 부분은... 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깊은 생각 없이 움직인 건 그나 너나 마찬가지다. 나무랄 수 있을 리 없지. 어차피 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제 겨우 두어 번 쯤 마주한 것 뿐이지만, 대화는 그가 원하는 대로 시작했다가 멈추고 또 예고 없이 시작되고는 했다. 깊이 신경쓰지 않는 게 이 대화에서는 이로우리라.
" 네, 알겠습니다."
너는 칼을 잠시 내려놓고 소매를 걷은 뒤, 머리카락을 양 손으로 모아 뒤로 올려 묶었다. 평소라면 아래로 내려뜨리지만 요리를 하는 데 머리카락이 방해가 되면 안 되지, 그렇게 머리를 올려묶은 뒤 근처에 있을 머릿수건을 찾아 머리에 둘렀다. 이제는 손을 깨끗이 씻어야지. 양쪽 소매를 걷어올리고 네 손을 깨끗하게 닦아낸다. 그제서야 놓아두었던 칼과, 사과를 집어든 너는 조심스럽게 사과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음, 네. 달콤하니까요."
과일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몇 개 정도 더 굽자는 말을 건네는 그의 말에 너는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에 만드는 거 여러 개 만들어서 나눠주면 좋겠지. 말투는 딱히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으면서도, 뭔가 선뜻선뜻 제안해 오는 것도 그렇고, 묘하게 바뀐 듯한 태도에 너는 위화감을 느꼈으나 일단은 요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신이 건넨 음료수를 받으며 말한다. 입에 뭔가 넣을게 나왔기 때문인지, 코를 킁킁대던 것을 멈추고 바로 음료수를 마셔버리는 그녀였다.
"아마 엔의 코가 예민한 탓이다. 신경쓰이게 해서 미안하다."
감각이 워낙에 민감한 그녀였으니까.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중독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옆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담배냄새가 심한 것은 아닐테다. 그녀는 당신이 펼쳐준 메뉴판을 골똘히 보다가 "엔은 이거다." 라면서 손가락으로 툭 짚어보인다. 메뉴의 나열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곳에 배치 된 육회 사진이었다.
여기저기 정보를 파악하거나 혹은 선정찰을 하는 등, 아스텔에게는 따로 주어지는 일들이 많았다. 물론 쉬는 날도 있긴 했지만 아마 미션으로 며칠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이 더 많지 않았을까. 아무튼 3일전에 임무를 나갔던 아스텔은 근처의 분위기나 상황, 그리고 이런저런 정보를 파악하고, 김에 세븐스 몇 명을 구조하여 안전한 마을로 유도한 후에 다시 에델바이스의 거점인 마을로 돌아왔다. 워프 장치를 사용해서 돌아올까 했으나 안전한 마을에서 이 거점까지 그렇게 거리가 먼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빠르게, 최대한 추적당하지 않게 뱅뱅 돌아서 빠르게 마을로 잠입하듯 들어왔다. 가는 길에 보이는 편의점에 잠시 들려 햄과 치즈와 양배추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담겨있는 패트병을 구입한 후, 그는 방으로 돌아가서 쉴겸 기지로 향했다. 로벨리아가 급한 일이 없다면 보고는 내일 듣겠다고 했기에 오늘 하루는 적당히 쉬다가 잠들 생각이었다.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뜯고 한입 베어먹으면서 그는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선 후, 능숙하게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 1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는 와중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여 그는 살며시 발걸음을 멈췄다. 물론 누구인지 파악은 하지 못했지만 인사 정도는 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기다리던 그는 모퉁이를 지나는 이의 모습이 보이자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른손만 가볍게 들어올리고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 저번 임무는 고생이 많았다고 했던가. ...고생했어."
정말로 깔끔하게 안부 정도만 가볍게 묻는, 그다지 의미는 없는 인사였다. 허나 그 정도면 인사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다시 오른손을 슬며시 아래로 내렸다. 김에 주스도 빨대를 이용해 한 입 쪼옥 빨아마시면서.
가디언즈의 탈주병으로부터 USB를 회수하고 레이버와 글라키에스에게 쓴 뒷맛만을 남기고 복귀한 이후. 레레시아는 조금 이상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녀는 늘 어딘가 이상하지 않았냐고 하겠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티가 날 만큼,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걸으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아 사람에 벽에 부딪히는 건 기본에 물건을 사고 그냥 나와서 다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기지에선 훈련장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다른 대원과 충돌하고 임무 때도 없던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금방 나을 정도로 가볍긴 했지만. 느슨해보여도 처신만큼은 빠릿하던 평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눈치 챈 사람이 있었을까만은.
"...아, 어, 어. 안녕."
그러니 그 모퉁이에서도 아스텔이 먼저 멈춰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부딪히거나 혹은 그녀 혼자 벽에 박는 기행을 보였을 것이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아스텔의 존재를 인지한 레레시아도 어영부영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고도 멀뚱멀뚱 아스텔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덧붙였다.
"저번은. 딱히 고생이랄 거도 없었지. 몸 성한 거 보면 완전 얕보인거 같고. 어... 그러고보니 오랜만이네? 이제 복귀한 거?"
식사를 하기엔 좀 아닌 시간인데 샌드위치와 주스를 든 모습과 꽤 오랜만에 마주쳤다는 걸 생각하고보니, 별도의 임무를 나갔다가 이제 들어오는 길인가 싶었다. 이제 복귀했느냔 말을 하고 레레시아는 또 가만히 아스텔을 응시했다.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제게는 늘 성숙하고 능란하게만 보였던 멜피에게 무수한 배반의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타인을 믿지 못한다 했다. 그동안 가깝다고 여긴 상대의 모습이 처음부터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 아니다. 자신의 무관심함을 탓하고 자책하기 위한 죄책감 역시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이고 단순한 기분만이 들 뿐이다. 괴로움. 친밀한 대상을 향한 본능적인 동조이며 조금이나마 비슷한 경험을 한 동류로서의 공감. 그렇기에 손을 내밀고 말았지만, 그는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어쩌나. 오랫동안 품어온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들 것만 같다. 네 신뢰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돌아올까 봐, 그와 같은 인종의 믿음은 언제나 그랬듯 보답 받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마주잡힌 손의 온도가 유달리, 상상 속의 것처럼 따스하게 느껴진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로 뜨거웠던 건가? 그는 조금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손마디에 힘주어 굳게 쥔 채 그렇게 침묵이 길었다. 천천히 멜피의 어깨에 파묻은 얼굴을 든 그는, 처음 기꺼워하던 것과 반대로 잔뜩 가라앉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멜피의 말이 평소와 같은 농담이 아님을 직감한 탓이다.
"내가… 좀 이상한 짓 할 거거든."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 그는 벌떡 일어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벽면의 한구석으로 가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는다. 고개 숙인 모습 너머로 무어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었다. 머리가 빙빙 도는 듯 혼란스러웠다. 씨*, 나는 가치가 없어야 한다. 머리에 불이 난 것처럼 난잡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겠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만 싶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혹은 네가 한 말은 틀렸다고 지껄이고 싶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 줘야 하는데 제대로 수습되지가 않는 정신머리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조금 뒤에야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은 발치 근처의 바닥만 훑고 있다. 그는 제 머리를 거칠게 흩어대며 입을 열었다.
"씨*. 죽어버려야지. 미* 새*. 내가 멀쩡한 새*는 아니라서 이러거든. ……그러니까 네가 바라는 걸 해줄 자신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