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가 응답한다. 그때 갈궜었던 남자애의 목소리다. 그러고 보니 블러디 레드때 막아섰던 것에 뭐라 성질이라도 내고 싶었었는데, 어째 타이밍이 엇갈려서 지금은 그다지 화낼 마음이 없는 그. 당신이 주방 쪽을 살짝 들여다보면 그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그 쪽을 아까부터 주시하고 있었으니.
“안녕?”
어째 질문마냥 들리는 인삿말이다. 여전히 양 손은 가득 차 있는 상태이다. 아직 채 식지 못한 냄비에 필링이 탈까, 냄비를 든 손 쪽은 손목이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다.
“도와주러 온 건가?”
아까는 반말이였다가, 어째 하게체 비슷한 걸로 곧 말투를 바꿔버린다. 이유는 별거 없다, 애초에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말투를 휙휙 바꾸는 사람이다. 그보다도 아직 아무 말 안 한 당신 보고 하는 말이 이따위 라니, 당신은 아마 첫 단추를 잘못 꿴 듯 하다.
“칼질 잘 하는 편, 아님 조심스러운 편?”
번역하자면 사과 썰을테냐, 아니면 필링을 저을테냐 묻는 것이다. 아까의 물음의 연장선, 이것은 그 나름이 꼬드김이다. 이미 말을 이따구로 해 버린 시점에서 좋은 답 듣긴 글렀는데, 사람 좋은 미소만 걸치고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어 보라는 뜻인다? 이미 돕게 되어 있다고 매듭지어 버린 투이다만, 그냥 가 버린다면 아쉬워… 아니, 나중에 매정했다고 또 승질낼 것이다.
어째 ‘칼질’을 언급하며 그 단어에 무게를 싣는걸 보면 무언가의 비아냥 마냥 들리기도 할 것이다. 배신자는 등에 칼을 꼽는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여전히 웃는 낯 짝 이라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일수도 있겠다마는.
찌푸리듯 씩 웃는 낯이 상황에 맞지 않도록 장난스럽다. 계속 호구라고 말했는데 이제야 인정해준 걸 고마워해야 하나? 그는 사람에게 맹목적이다. 길거리를 떠돌다가도 내밀어진 손길에 배를 내놓는 개처럼. 그것이 천성인지 주어진 환경에서 강제되어 만들어진 습성인지는 구분이 모호하고 명확히 분리하기조차 어려우나, 그렇더라도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런 미천한 삶 속에서도 그는 답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이 순탄하게 끝나리란 보장은 없고 어쩌면 여정의 도중 죽어 나자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 된다한들 걱정해주는 사람 하나는 있으니 허황된 삶은 아니지 않겠나.
"그럼 씨*, 호구 안 잡히는 법 네가 가르쳐 주든지."
그러므로 그는 마음 편히 미련하게 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멜피를 좋아했다. 사람으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의 오랜 친애로. 그런 만큼 멜피가 자신 역시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은 분명 못 되지만, 그렇지만 먼저 말해줬으니까. 조금은 아프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문득 제 안면을 가로질렀던 상처의 아릿한 통증을 떠올렸다. 그만큼이나 처절했던 슬픔, 비분. 눈물을 대신해 끝없이 흐르던 피. 멜피의 말은 그때와는 달리 쓰릴지언정 서럽지 않다. 영영 아물지 못할 상흔이 아니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가오는 몸을 바라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네 편 하겠다니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는 잘 하는 주제에 우습게도 제 쪽에서 포옹하기는 익숙지 못해서 버벅거리는 거다. 그러다 자기가 먼저 멜피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는다. 멋쩍은 심정과 묘한 긴장감에 고개를 들 자신이 없다. 그러며 한쪽 손을 들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펼치는데, 찌르지 않을 거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이것이다.
"악수. 신뢰의 시작은 무장하지 않은 손 안을 보여주는 거란다. *, 잡아 줘."
실없는 소리인 듯 들리지만 그 역시 신뢰를 확인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긴장한 건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고작 악수 한 번에. 용기 낸 걸음의 시작점이 될 수는 있어도 든든한 인간상은 못 되는 그를 멜피는 어떻게 봐줄지.
물론 내가 너한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글쎄, 의외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비슷하더라지. 너의 얼굴의 상처를 보며. 당해봤을텐데 너는 어째서 그렇게 살 수 있는거냐고 생각해봤지만. 하지만 몇번을 생각해봐도, 정답을 안다고 한들. 그것이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일이란걸 알기에. 상처를 빤히 바라보던 눈을 깜박이고 미소지었다.
"그건 무리야. 그야 내가 횟수로만 따지면 너보다 많이 호구잡혔을걸."
나는 농담하듯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횟수가 많다고 내가 너보다 힘든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누구한테 알려줄 경험같은게 없단 뜻이었지.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그저 배신이 무서워 모든걸 거부하는것이지. 요령있게 넘기고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오히려 네가 나를 받아주다 다칠지도 모르지.
하지만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노력해서 나한테 파묻히는 얼굴이라던가. 펼쳐 보여주는 손바닥이라던가. -라던가.. 너의 모습이 기뻐서 흐려지지 않아 곤란한걸.
"..... 응."
널 위해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평소엔 거짓말을 술술 뱉던 입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짧은 대답과 함께 너의 손을 잡는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남이 보기에 별것도 아닌 한 발자국. 결코 로맨틱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입술이 떨리는건 왜일까. 너의 손은 따뜻할까, 아니면 차가울까. 확실한건 지금 내 손이 너무 뜨거웠다는 사실 뿐이었다.
알고있어. 겉으로는 입이 험해보여도 너는 누구에게나 자상하니까. 다른 사람이 아파하고 있으면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니까. 꽤 길게 알고 지냈지만, 아니 그렇게 알고 지냈기에 네가 나한테 그 이상의 감정이 아니란건 알아.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것을 환영해, 도전자.” “이곳까지 온 것은 네 실력… 정정하지, 운도 조금 따라준 듯 하네.”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전 이미 풍경화나 그리러 가 버렸을 테니까!”
어두컴컴해선 크기도 가늠할수 없던 방. 당신과 마주보는 끝자락 언저리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처음 운을 띄우던 어조는 차분했으나, 끝을 맺을수록 가히 경쾌해져 가는 울림. 당신은 그걸 들으면 선두로 내보낼 포켓몬을 담은 볼을 움켜잡을 테다. 그래, 이것은 당신이 지나쳐 온 수 많은 경기와 다름없는, 배틀의 서론일 테니까.
“소개는 지금부터 하지요. 전 이 체육관을 도맡은 관장, ‘유루’입니다!” “직속 트레이너들을 쓰러트려 오며 알아 차리셨겠다만, 이 체육관의 전문 타입은 - 없습니다!”
건물이 푸르길래 물 타입에 대응할 수 있는 포켓몬들로 파티를 꾸린 당신은 관장까지 오는 길을 막아섰던 트레이너들에게 봉변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뭐,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겼을 테지만.
“어때요?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전개, 재밌지 않았나요?”
중간에 있던 트레이너의 깔짝팟 때문에 아무 재미 없었다고?? 오면서 해 온 배틀들을 상기하며 어이 털린듯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는 당신을 그는 눈에 띄게 무시하고선, 제 할 말을 마저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당신과 체육관 관장 대 도전자식 배틀을 하긴 싫어요.” “관장은 도전자와 승부하는 것 뿐이 아니라, 가르침도 주어야 한다 - 라지만, 당신은 영웅급 인물이잖아요?”
방 전체에 환한 빛이 들이부어지듯, 갑작스레 어둠은 덮힌다. 당신은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찡그린 인상의 당신과 달리, 당신과 약 1미터 정도의 거리만 두고 서 있는 그는 세상 맑은 웃음을 띄고 있다. 남색 머리칼은 뻗쳐있는듯 하면서도, 끝자락은 부드럽게 어께 부근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 노란색 눈은 반쯤 웃음지어 접힌 상태에서도, 동공만은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끄집어내고, 나아가 가디언즈를 멈춰 세워 이 불공평한 사회 체제를 끌어내렸지요.” “혁명가에게 한날 전투광이 무언갈 가르치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그후 짤막히 들려온 웃음소리. 처음은 인위적인 거짓웃음 티가 물씬하더니, 끝으로 갈수록 진심에 잠식된다. 하관을 덮어 웃음기를 가리려던가 싶더니, 입가에 손이 닿자마자 즉각 반응하듯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 샛노란 눈은 음영에 가려지든 말든, 금속과 엇비슷한 차가움을 품을 뿐이다.
“저는 적당히 봐주면서 이미 저보다 우위인 분에게 훈수질 하기 싫습니다.” “부디 트레이너 대 트레이너로 싸우며, 제게 한 수 가르쳐 주시길.”
당신에게 등을 돌려, 방 끝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 발 내딛는 것에 무게가 실린게, 퍽 진중해 보이기도 하고, 긴장한 것도 같다. 끝에 다다르면 그는 반원을 그리듯 한 발을 중심삼아 당신을 마주보려 돈다. 어느새 손에 들린 슈퍼볼의 중심부를 누르면, 축소되었던 볼은 본래의 사이즈로 팽창한다.
“당신에게도 즐거운 배틀이었으면 좋겠으나, 이거 지루해서 하품 하시는건 아니시련지.”
농을 건네는 그의 모습은 깔끔한 차분함으로 도배되어서, 흘려 들으면 진담으로 들릴 수도 있는 애매모호함. 첫 타자는 짐 리더부터 내보낸다. 그는 트레이너 대 트레이너의 배틀을 하자면서도, 먼저 선두를 내비친다. 짐 리더의 얄량한 자존심일까, 아니면 고된 여정을 해 온 당신에게 해 주는 최소한의 배려일까. 어찌되었건 당신의 여정의 빛을 보려면, 당신은 그를 쓰러트려야 하니. 그저 당신에게 그의 팀을 쓰러트릴 만한 전력이 있길 빌 뿐이다. 여정은 거의 끝이 나 가지만, 끝을 향한 과정은 순탄치 않을테니. 그는 볼을 힘껏 던지며, 할 말을 찾으려던 듯 포켓몬이 나오고 나서 반 박자 후에야 무언가를 뱉어냈다.
“윔시! 힘 내요!”
볼이 완전히 팽창해 터지듯 열리는 경쾌한 펑! 소리, 그리고 보이는 날렵하게 근육이 잡힌 레파르다스 한 마리. 제 주인의 보기 드문 말투를 들은 레파르다스는 자그마한 동공으로 당신의 동태를 살필 뿐이다. 골반을 치켜들어 가벼이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그 레파르다스는 여전히 날이 선 시선으로 당신을 응시할 뿐.
[체육관 관장 유루가 승부를 걸어왔다!]
/그냥 포켓몬 게임 후반부에 나오는 관장if로 갈겨 본것 /다 쓰고 나니 너무 그뭔씹이네여(ㅋㅋㅋㅋㅋㅋㅋㅋ)스루해주셔도 갠차늠 /오...배경을 좀 들어가자면 유루가 칭하는 '당신'은 플레이어, 배경이 되는 지방을 구해준 영웅! 하위 계층민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던 가디언즈 세력에 맞서 싸우는 그런 충공깽 포켓몬 특유의 먼치킨 플레이어 입니다 (근데 그냥 여러분 캐한테 하는 말이라 들어주셔도 별 상관은 없습니당) - 포켓몬 게임을 하다 보면 악의 조직 거의 다 발라놓은 상태에서 스토리 진행하려면 관장전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예! 그런 상황입니다! /유루가 존대 쓰는 이유: 희열적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