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임무에서 운 좋게도 무사히 돌아온 덕에, 따로 휴식을 취하거나 부상의 치료를 할 필요 없었다. 그만큼 여유 시간이 늘어나니 매우 좋은 일이었다. 레레시아의 경우엔 쌍둥이 자매인 라라시아가 기어코 나가려면 회복 받고 나가라며 붙잡는 바람에 조금 귀찮았지만.
"아- 나 안 다쳤어- 안 아프다구우." "너 맨날 그래놓고 어디 다쳐있잖아. 닥치고 가만히 있어." "우엥-"
의무실에서 짧은 실랑이가 오간 끝에 레레시아는 해방되어 나올 수 있었다. 다치진 않았지만 회복을 받으니 피로가 풀려서 더 쌩쌩히 돌아다닐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면 뭐부터 할까. 모처럼 멀쩡히 돌아왔으니,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을 주워넘기며 기지를 나온다. 아. 나오기 전에 활동하기 편한 사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느긋하게 거리를 걸으며 산책하다가 지나치는 가게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 산다. 길게 올려주는 부드러운 마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가다가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주변을 돌아보자 가까운 곳에 공터가 있었고 거기에 애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같은 임무에 참가했던 사람이 그 한가운데쯤 있었다.
"흐-응."
공터 바깥쪽에 기대어 뭘 하나 들어보니, 그는 애들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는 중이었다. 그 중에는 임무를 각색한 내용도 있어서 저걸 저렇게 얘기해도 되나 싶었다. 그래도 중간에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애들이 다 나가고 나자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왠 빗자루질?
"임무 얘기- 밖에서 막 하면 안 될- 텐데에?"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날름날름 핥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각색은 했으니 그렇게 문제는 안 될거 같지만. 굳이 그렇게 얘기한 이유가 있나 싶었다.
"우리가 해치운 로봇 이름은 블러디 메리지, 천.하.무.적. 선지로봇이 아니잖아? 인간형 거대 로봇이었지, 방귀끼는 거대 지렁이 로봇이 아니었고."
블러디 메리가 아니라 블러디 레드지만 그는 상관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에게 농담을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닥에 아공간을 연 선우는 잘린 색종이 뭉치와 쓰레기, 먼지들을 한곳에 모아 그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느새 더러워졌던 공터가 대강 깨끗해진 것 같았다.
"내 동료들은 너와 다른 이들이지, 흥부 더 스왈로 나이트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야수 전사가 아니야."
"걱정마, 아는 사람만 웃으면서 알 수 있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못 알아들어"
그는 또 다른 아공간에서 물티슈를 꺼내 광대 분장을 지우며 자신의 이야기는 현실을 표절한 것이라며 웃었다.
"아이스크림 맛있겠네."
선우는 과자 두개를 꺼내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하나를 까서 먹었다.
"애들 나눠주고 남은 거야. 먹어도 돼."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다시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졌어."
그의 표정이 조금은 진지해졌다.
"우리들은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고통받고 있어. 아이들도 똑같아. 그러니 재미난 이야기와 공연으로 한순간만이라도 즐겁게 해줘야지."
"아쉽게도 난 많은 이야기들을 알지 못해.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 서점? 도서관? 웃기지도 않아. 돈이 있어도 이용을 못해. 그저 동네 버려진 책들을 몰래 읽는 게 끝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저번에 받은 봉제인형 ㅡ 어째선지 기스가 나있지만 ㅡ 을 머리맡에 장식해둔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리본으로 꾸며줬네요. 이제부터 네 이름은 메타승우라고 말하는것이 혼자 꽁트라도 하는거 같습니다.
"쪼아~ 오늘은 휴일이니까 들어눕는당."
그녀의 휴일은 지극히 간단해요. 그냥 쉽니다. 그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당신 "쉬는날에는 띵가띵가지."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있는걸까요. 아무튼 그녀는 이런식으로 가끔 혼자말을 할때 외엔 매우 조용히 쉬는편이랍니다. 자기 말로는 극한의 에너지 절약모드라던가요? 절약이 아니라 원래 그런 인간인거겠죠. "움.."
그러나 그렇게 있기를 8시간 정도 지나면 아무리 그녀라도 심심해집니다. 그 전에 심심해지는게 정상일걸요? 뒤적뒤적 괜히 무안해서 뭔가라도 하는척 그녀는 재밌는게 없을까 방안을 뒤져보았지만 딱히 쓸만한건 보이지 않네요. 안타깝지만 다시 눕기로 한거 같아요. 있을리 없죠, 이렇게 살풍경한 곳에. 그녀는 눈을 감으며 생각합니다. 내일은 귀여운 애들한테 부비부비하고 다녀야지... 하고.사랑하는척, 한심한건 언제까지 할건가요?
운명일까? 이스마엘은 잠시 수많은 선택 중 직접 움직이게 만든 순간을 곱씹어 본다. 그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평생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닐 테지만, 그 꼬리표가 있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이즈가 규칙적으로 움직였고, 그 몸짓에는 확신이 있었다. 운명은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하며, 스스로 개척한다고들 하던가.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개척할 것이다. 나아갈 수 있는 이정표를 찾고 끝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이미 이곳에 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으니 더욱이.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주변이 없다고 하기에는 이스마엘의 경험이 부족했다. 이스마엘의 주변에는 말벗을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있었고 대화는 자주 나눴지만 그걸로 현재 당신의 말주변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인터넷 루미큐브에서 매칭된 사람들도 대화라기엔 정해진 문구와 이모티콘을 클릭해 서로의 감정만 공유할 뿐이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지금 대화가 잘 된다는 것, 당신과 대화한 덕분에 이스마엘이 잠시나마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편하게 대해달란 말에 이스마엘은 다시금 고개를, 그것도 제법 열심히 끄덕였다. 아마 이것이 F로 시작해 D로 끝나는 위대한 단어의 시작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F-Word가 아닌 Friend 말이다. 드디어 내게 친구가 생기는 건가? 아, 장족의 발전이자 아름다운 세상이여! 의무실의 세븐스는 차트를 책상에 내려둔다. 허리를 숙여가며 의약품 중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나 확인했던 건지, 콧잔등에서 덜그럭대는 안경을 고쳐 쓴다. 타박상? 타박상이라— 중얼거리던 세븐스는 허공에 있던 홀로그램 차트를 끌어와 무언가를 입력했다.
"어디 보자.. 어지간한 거즈나 천 붕대는 다 남아있네요. 일단 필요한 것들은 이거 맞죠? 그리고…… Mx. 이스마엘?" "예, Dr. 스미스 씨." "안드로이드 수리점의 필립 씨가 화상연고를 달라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스마엘이 손을 노이즈 사이로 밀어 넣고 무언가를 훔친 뒤 뒷짐을 지는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피비린내. 이런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것은 당신도 있으나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의료진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세븐스는 안경 너머로 모난 눈을 했다.
"안 볼 테니까 여기 다 준비해드렸으니 꼭 치료하고 가세요."
스미스라 불린 세븐스는 다시금 차트를 챙기며 의약품 재고를 확인하기 위해 간이침대에서 멀어진다. 이스마엘의 주변에서 잠깐 노이즈가 지직 거린다. 당신을 돌아보는 듯한 모습이 어색하다. 이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만 치켜올린 손이 노이즈에 가려져 입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오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무언의 뜻이었다.
"잘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사의 눈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이후 이스마엘은 손목을 향해 손을 더듬었다. 칩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이스마엘의 주변에서 노이즈가 사라진다. 단발로 일정하게 잘린 흰 머리카락이 목을 덮은 것이 먼저 보였다. 숙인 고개를 들었을 때, 이스마엘의 눈은 분명 생기 가득한 녹색임에도 서슬 퍼렇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야가 제한돼 찌푸린 미간에 진 주름과 감긴 한쪽 눈의 탓이 컸다. 피 때문이다. 하관을 덮는 마스크 때문에 다른 부분은 지킬 수 있었지만, 적어도 연한 갈색의 뺨과 왼쪽 눈썹 위에 파편이 스쳤는지 피가 이제 막 굳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