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을 가르며 튀어나온 독액이 그녀의 전신을 감싼다. 눈 한쪽을 감으며 당신을 추격하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저 멀리 거리를 벌린 이후였다. 고기에 독이 스며듬에 몸이 서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모른다."
그리고 당신에게 돌아오는 건 그런 대답이다.
"엔이 그걸 원하는지는 엔도 모르고 있다."
모든 걸 삼키겠다- 라고 한 것치고는 어중간한 말이었다.
이유 없는 식욕. 그것은 잦아들 일 없고 부풀어만 간다. 무한의 탐식자. '먹어라.' '삼켜라.' '일부로 만들어라.' 그녀의 안에서, '너와 우리를 위하여.' '---을 삼켜라.' 의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다.
'그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다.' "하지만 엔에겐 이것이 전부다."
그녀의 세븐스는 당신과는 상성이 좋지 않다. 고기의 칼날로 날아드는 사슬들을 몇 개인가 솜씨 좋게 쳐내지만, 이내 얼마 안 가 몸이 갈고리에 꿰뚫리고 만다. 독의 영향인 탓이다. 그녀는 전해지는 충격에 작게 신음을 흘리며 한 쪽 무릎을 꿇는다. 그러면서도 표정없는 얼굴로 "엔." 하고 운을 튼다.
"일어나라."
고개를 숙이고 칼날 끝으로 바닥을 짓누르자, 지면이 울부짖더니 당신을 감싼 사방에서 고기 촉수들이 솟아오른다. 그 끄트머리에는 방금 그녀의 것과 같은 칼날이 달려있다. 그것은 저마다 제각기 춤추며 당신을 난도질 하기 위해 휘적인다.
그는 멜피의 칭찬에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그가 본디부터 자아도취에 빠져 대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워낙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 씨* 그러게. 그럼 뭐, 너무 이상한 거 부탁하지만 마라."
그렇게 말하는 본인 역시 아직까지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기도 했다. 이러다 나중에는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소원권 때문에 불 붙어서 열중한 것에 비하면 시큰둥한 태도다. 처음부터 대가 그 자체보다는, 대가를 걸고 노는 승부에 재미를 느낀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뭐가 됐든 재밌었으면 됐지. 그는 제 두 손을 마주잡고 위로 쭉 당겨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뽑기를 위한 몸풀기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인형이 떨어져내렸다. 쿠션 정도의 크기에 썩 귀여운 모양을 한 인형이다. 와 씨, 잘못했으면 진짜로 못생긴 거 뽑을 뻔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장난을 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속으로 안도하며 멜피와 인형을 주고받았다. 자신이 받은 쿠션을 몇 번 주물거리던 그가 감촉이 꽤 괜찮은지 씩 웃고 만다.
시간은 점점 늦어가고, 계획에 없던 놀음은 이제 끝이다. 슬슬 배도 고프니 식사 후에는 이 즉흥적인 만남도 파해야 할 테다. "아, 잠 깨고 좋네." 피곤하지만 기분만은 꽤 괜찮았다. 게임장 밖을 향해 걷다, 그는 불쑥 생각난 듯 멜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말끝을 길고 길고 길게~ 늘리며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별것도 아닌거에 소원권을 쓰지 않을까 싶네요. 한밤중에 불러서 불좀 꺼도. 하고 말이죠? 그녀도 소원권 그 자체가 고팠던것도 아니거니와, 당신이이랑 재밌게 놀았으니 어찌되도 상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채 당신을 보고 있었죠.
어차피 인형은 자신의 능력이 알아서 뽑아줄것이고, 당신이 사뭇 진지하게 인형을 뽑아주자 좋아하면서 자신이 뽑은 쿠션을 건넸습니다.
"고마워~"
뭐가 되어도 상관없었지만 또 귀여운애가 뽑혀서 기분이 좋아진듯 합니다. 그녀는 인형을 주머니에 쏙하고 넣고서는 당신과 함께 오락실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얼마정도 걷다가, 당신이 물어보는 질문에 살짝 놀란듯하다 미소지었습니다.
"신경써준거야? 우리 자기밖에 없네~"
그녀는 작게 웃으며 이제 괜찮다고 손사레쳤죠. 그리곤 밤공기가 차다는 핑계로 팔짱을 끼려했던가요. 그래서 어디.. 뭘 먹으러 갈지는 정했나요?
/ 적당히 먹고 헤어졌다~ 식으로 끝내도 좋구. 더 해도 좋지만 제가 승우주를 너무 붙잡고 있는거 같아서.. (땀땀. 흑흑 승우가 너무 커여운게 문제야! 승우주 추석 스케쥴도 잘 모르겠으니 편한대로 해주세요!
엔에 대해 파악한 것 중에 살짝 미스가 생긴 것 같다. 적어도 스스로의 욕망 정도는 확실하지 않을까 했는데. 목표만을 어중간하게 잡았을 뿐 그 외는 이것도 저것도 어중간하다. 이런 이런. 아무래도 레레시아의 역량으론 어줍잖은 짓거리만 하다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엔에게 그게 전부라면- 뻔하잖아? 그 전부가 원하는 것이 곧 네가 원하는 거야-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라고-"
어렵게 생각할거 없이 그 전부라는 것이 원하는게 곧 엔이 원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 말해주며 사슬을 휘두른다. 엔의 칼날이 튕겨낸 사슬은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몇 개는 엔의 몸에 갈고리를 박았다. 갈고리를 타고 주입되는 독은 어서 떼어내지 않으면 점점 몸을 찌릿하고 둔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우핫. 학습능력 하나는 어마어마한데-?"
재차 사슬을 휘두르려던 그녀는 칼날 달린 고기 촉수가 뻗어오는 걸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맞아줄 생각은 없었으니. 엔이 튕겨낸 사슬들을 바닥으로 늘어뜨리자 바닥에 퍼진 독액으로 녹아들어간다. 그리고 사방에서, 대련 중에 뿌렸던 모든 독액으로부터 제각기 사슬이 솟구치며 엔의 고기 촉수를 저지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래도 슬슬- 마무리를 지어볼까!"
사슬이 저지하는 고기 촉수 사이로 냅다 달려나온다. 피하지 못 한 고기 촉수의 칼날에 몸 곳곳이 베이지만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엔을 향해 똑바로 달려든다. 한 손은 바닥에 연결시켰으나 다른 손은 여력이 남았으니 그걸로 공격할 것 같았지만, 레레시아는 어느 간격 안에서 몸을 낮추며 동시에 엔을 향해 발길질을 시도한다. 긴 다리 역시 두터운 독액의 무장을 둘러서 타격 시의 무게감과 독으로 인한 추가타까지 완벽하게 방비한 상태다.
>>161 갠찮아~~~~~나도 잇다가 갑자기 늦을수도 있고 텀이 들쑥날쑥 하니까 편하게 해줘~~
유루는 스케쥴 따윈 없다 지금도 뭐든 하고있을수 있지() 정석대로 가보자면 점심 하는 김에 승우도 와서 먹으라고 할수도 있고..? 훈련 하러 가는 길에 승우도 끌어갈 수도 (그리고 대련하자고 꼬드김)..? 아니면 반대로 훈련하고 돌아오는데 지 방까지 가기 귀찮다고 승우 방 들어와서 바닥에 드러누울수도()
정석에서 벗어나자면 청승도 떨어줄수도 있고 도서관 가서 책 읽을수록 있고 진짜 뭐든 됨 캬 캐 굴리기 너무쉬워~
평소에도 기상과 취침이 일정치 못하다. 그러니 오늘처럼 바깥이 아직 깜깜할 시간에 눈이 떠진것도 그는 익숙하다. 잠을 더 청해보려 눈을 감아봐도 더 오질 않아, 설렁설렁 세안을 하고 아침을 대충 먹으려 해본다. 엊그저께 마트에서 세일을 해 들고온 크로아상 상자를 열고 하나 베어물어 본다. 오늘 아침은 입맛이 없네, 그런 따분한 생각을 하곤 한 입 뜯긴 크로아상을 도로 상자에 넣고선 닫는다. 남들 다 잘 시간에 아침이라니 어휘가 좀 이상하지만 일어날 때면 다 아침이다. 할게 마땅히 없어 딱히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을 운동이나 하러 잠옷 차림으로 훈련장에 가 본다. 운동을 한 것은 달리 묘사를 못 할 정도로 기계적이고 고리타분한 행동뿐,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낸 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점심시간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는 이제 달리 할 것을 생각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대충 걸음을 향하던 중 인상이 조금 풀린다. 변화는 미미하지만.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씩 잠이 다시 오기 시작한 것 아닌가. 어제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다 늦게 잠들었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났던 것도 한 몫 한듯 하다. 피곤해지니 자신의 방으로 가는 걸음거리의 폭이 조금 커진다.
그러고보니, 승우의 방이 이 근처였다. 그게 스치듯 생각나자 곧바로 걸음을 틀어본다. 방까지 가는데 귀찮은데 마침 지름길이라도 생긴 듯 하는 행동이였다. 바닥에 조금만 누워서 쉬다 생산적인걸 하러 가야지, 그런 추상적인 계획을 짧게 짜 보며 승우의 방문 앞에 다다른다. 해가 중천에 떴으니 소음 정도는 내도 괜찮겠지, 그러면서 문을 가볍게 두드려 본다.
"야, 나 왔어. 문 열어."
간결한 의사전달(이라기도 하기 뭐하다)을 하고선 혹시라도 문이 열려있나, 손잡이를 잡고 돌려본다. 때문에 들리는 무거운 덜컥임. 그보다 이따위로 문을 열려 들면 아까 노크한게 뭔 의미가 있을까. 덜컹거리던 것도 잠시, 누울 채비를 하듯 앞머리를 넘겨 고정하는 핀들을 빼서 대충 주머니에 넣는다. 앞머리가 눈을 덮듯 찌르는게 조금 불편하다만, 이미 손은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똑똑 문 두드리고 멋대로 열어보려 덜컹거리는 소란에도 불구하고 문 너머는 잠잠했다. 그렇다면 답은 둘 중 하나다. 방 주인이 안에 없거나, 있어도 없는 척 조용히 숨 죽이고 있는 것이다. 여승우는 평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느라 방 안에 박혀 있는 꼴을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니 전자의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왜 있겠나. 지금이 딱 그 날이라고, 하필 그는 할 일이 없어 오랜만에 방청소나 하는 중이었다.
"아오, 저 미*** 진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문을 바라보며 그가 조용히 뇌까린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도 별 볼 일 없이 두드리고 보는 걸 테다. 그럼 그냥 계속 없는 척해? 따지고 보면 굳이 짜증 내면서 안 열어줘야 할 이유도 없고, 사실 그는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왜 일부러 열어줄 생각 않고 있느냐면…… 그냥 괜한 반항심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청개구리 심보고. 누구에게나 저놈 뜻대로 되지 않도록 소소하게 말 안 듣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는 그 설명 불가능한 오묘한 심리를 유루 덕에 확실히 깨우친바 있었다. 문을 외면하고 잠시 다른 할일이라도 할까, 침대에 앉아 딴짓이라도 할까 했지만 그러려니 신경쓰여서 안 되겠다. 무엇이? 잘은 몰라도 양심적으로 찔리기라도 하나 보지. 그는 결국 터벅터벅 성의 없는 걸음으로 문 앞까지 가, 문고리를 돌려 방문객을 맞았다.
"개또라이 왔냐. 왜."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머리카락 대충 틀어 올려 느슨한 차림이고, 그 뒤로 보이는 방 안의 정경은…… 한 마디로 개판이다. 이런저런 물건이 여기저기 쌓이고, 치여서 널브러진 상태였다. 그나마 공간적으로만 엉망일 뿐 음식물이나 벌레는 없어 보이니 다행이다. 그는 아무래도 필요 없는 물건 안 버리고 여기저기 쌓아 놓다 개판을 치는 유헝으로 방을 어지럽히는 사람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