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해주기, 라는 말에는 그도 당당하게 못 들은 척을 한다. 당하는 것까지는 아무렇지 않아도 직접 하기엔 아니라는 걸까. 어디 가서 사기 당하진 않을 듯하다.
사실 처음부터 무장을 완벽하게 유지한 채 싸웠더라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풀릴 리가 있나. 중간중간 손을 드러내서 터뜨려야 할 물건이 생기고, 덜 날린 연기 속에 맨 얼굴을 들이미는 때도 있게 된다. 제 세븐스에 유감은 없지만 이런 방면에서는 동의한다. 한바탕 일 치고 나서 꼬질꼬질해진 기분은 둔감한 그가 느끼기에도 불쾌했으니. 이왕 세븐스로 날 거였다면 멜피처럼 깔끔한 능력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은 오래지 않았다. 그는 멜피가 내미는 제거제를 받아서 대강 뿌렸다. 아니, 기왕이면 많이 뿌릴수록 나을 테니 팍팍 써댄다. 그 모습이 어째 아직 파릇파릇한 청년보다는 털털한 동네 아저씨 같다면 기분 탓일까. "고맙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착실하게 인사까지 하며 물건을 돌려주었다.
"개 신기하네. 이런 건 어디에 갖고 다니냐?"
설마 저긴가? 그렇게 물으며 바라보던 시선이 슬쩍 멜피의 그림자를 향했다. 보기에는 짐 들어갈 물건이나 공간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은 와중에 나름대로 고심해서 내린 추론이다.
한편 기어코 뽀뽀하기에도 성공하고, 냄새 정도야 문제 없다고 답하는 멜피를 보려니 불현듯 의문이 든다. 그는 공연히 제 머리를 긁적이다 이렇게 물었다.
"근데, *. 왜 그 정도로 끌어안기를 좋아해? 난 존* 이유를 모르겠다. 욕은 아니야."
멜피의 이런 행동은 장난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장난으로라도 남에게 이렇게까지나 거리낌없이 대해지는 경험은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렵다. 손을 잡고 걷는다거나, 얼굴을 닦아준다거나. 어린애일 적에도 겪어보지 못한 호의와 돌봄을 외려 성인이 된 후에야 받는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나. 그것이 싫으냐 묻는다면 단연 아니라 하겠지만 새삼스레 궁금증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물었으면서도 그는 곧, "에휴, 씨*. 됐다. 말 안 해줘도 되고." 고개를 대강 저으며 가던 길을 마저 걷기나 했다.
오락실의 내부는 생각 외로 한적했다. 편하고 좋네. 가벼운 감상을 떠올리고선 그는 게임장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자주 오는 곳이 아니라 뭐가 재밌는지 모르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눈에 띄는 물건을 발견하고는 척 가리킨다. 잘 모르겠으면 가장 고전적이고 무난한 것으로 가자. 쭉 뻗은 손가락 끝에 걸린 물건은 사격에 쓰이는 게임용 총이었다.
물론 그만큼 이상적이진 못할 것이다.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세계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즐거운 내일이 기다리는 세상이, 더 좋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세계가 좋았다. 참, 깊게 침잠하여 떠오르지도 못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소년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낙천적인 생각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문득 소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녀가 그리고 싶어하는 세상의 그림. 하지만 소년은 묻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을, 세븐스를 위하는 방향이 아닐지 어림짐작을 할 뿐이었다.
"시간.. 아, 괜찮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계셔도 좋습니다. 당장은 두세 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제대로 그릴 생각인 만큼 하루안에 끝날 작업은 아니었다. 당일에는 대충 베이스를 잡고, 구도를 확정지은 뒤 인상과 느낌을 기억해둘 요량이었다. 며칠간 하루에 어느 정도씩 모델로 두는 게 소년에게 있어서는 편한 일이었지만 그들도 바쁜 만큼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에스티아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이 그 시간동안 가만히 있을지를 알 수 없었기에 로벨리아는 조금 당황하는 목소리를 냈다.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림의 모델이 되기 위해선 가능한 제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지 않던가. 미션 지휘 때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기에 로벨리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각오를 다지기로 하면서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해보도록 하지. 빠른 시일 내에 시간을 낼테니 너도 준비 제대로 하고 있도록. 우리 귀엽고 예쁜 에스티아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음. 책임을 묻진 않겠지만 좀 섭섭할 거야. 아마도."
이런 것으로 뭐라고 하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로벨리아는 괜히 그렇게 이야기했다. 애초에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잘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로벨리아는 가만히 쭈욱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 그렇게 약속을 잡도록 하고... 나는 바람을 쐬러 갈까 하는데 너는 어쩔거지?"
딱히 뭘 할 예정인지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별 의미없이 던진 물음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말을 덧붙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딱 그 정도의 물음을 던지며 로벨리아는 세혁의 답을 기다렸다.
물론 그녀가 필요할때 같이 있어야한다는 전제조건이지만...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작게 웃으며 당신의 감사인사에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누가 뭐라고한들 감사인사는 언제 받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적한테 받는것만 아니라면요. 그리고나서 당신이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아쉽다는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그러한 부가효과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멋진 여자란 말이지. 항상 비밀의 공간 있는거란다~"
그런게 있던가. 그녀는 돌려받은 물건을 또 어딘가에 슥 넣고는 미소지었습니다. 물론 특별한건 아니고 그냥 안 주머니 같은 느낌이므로 전혀 비밀의 공간이 아니지만. 본인이 밝히질 않으니까요..
"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누군가랑 닿는거, 사랑 받는거."
어쩌면 애정결핍에 가까운걸지도 모르죠. 그녀는 당신이 됐다고 말했음에도 평소에는 잘 말하지 않던걸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상대가 당신이라서일지. 아니면 지금 좀 텐션이 낮아져서일지. 아니면 둘 다 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븐스란게 필연적으로 애정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누가 자상하게 대해준적도 손에 꼽고 스킨십도 많을수가 없는게 보통입니다. 가족에게도 버림받거나, 가족이 먼저 죽거나 할때도 많고. 그럼에도 그녀는 그러한 '애정표현'이란걸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근데 누가 날 사랑해주진 않잖아?"
그녀는 조금, 아주 조금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가리킨 사격 게임쪽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타인에게서 받는걸 기대하지 못하면 자기가 움직이는게 정석이랬던가요. 뭐 그녀가 멋대로 생각한겁니다만. 당연하지만 그녀의 문제는 복합적이지만.. 굳이 여기서 고민상담을 할 생각도 없으므로 그녀는 표정을 바꿔 총처럼 생긴 컨트롤러를 쥐었습니다.
평소 한 번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반나절 정도는 거뜬한 소년이다. 그렇기에 두세 시간 정도에 말을 더듬는 그녀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겉으로 보이는 것도 그렇게 몸 쓰는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곤욕일 것이라는 예상이 들긴 했다.
"소년은 인물화를 좋아합니다."
현재 우울한 사람이라도 적어도 그림 안에서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다친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 회복시켜주는 일도 소년은 좋아했다. 그리고 그만큼 자주 그렸으며, 자신있는 분야였다.
"힘내겠습니다."
딱딱하다 싶을 정도의 경어였고 기계적이다 싶을 정도로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하는 말이 그림을 잘 그리겠다고 하는 것이고, 이 사람의 머릿속은 희망이 포기를 떠나보내고 있다는 게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도구 정리를 끝내지 않았으니, 방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사실 소년이 쓰는 도구들 중 몇몇은 직접 그려낸 걸 사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보충도 어렵지 않았지만.. 현재 쓰는 도구의 관리를 허술하게 할 이유는 아니었다.
자신은 밖으로. 그리고 그는 방 안으로. 그렇게 되면 자연히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수순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헤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그의 방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로벨리아는 먼저 가보겠다는 듯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당장은 임무가 없으니 그때까진 푹 쉴 수 있도록. 아마 다음 미션도 무엇이 되었건 상당히 위험한 것이 될테니까."
당연하지 않겠는가. 당장 블러디 레드와 관련된 임무만 해도 상당히 위험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제 0 특수부대를 만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로벨리아는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튼 조심해서 들어가보도록."
그렇게 말을 마치며 로벨리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먼저 옮겼다. 오늘 바람은 또 무슨 느낌일지. 괜히 궁금하다고 느끼며.
뭐라고 말할 만한 수준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곳 저곳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돌아다니길 약 1시간,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의 집 주변을 찾아내서 부모님까지 만났다. 다행히 별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이건만, 너는 간신히 손만 흔들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윽... 그, 괜찮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어째서 어릴 때보다 성장했을 때 더 무섭다고 느끼는 걸까, 이정도 높이도 높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되고, 이 높이에서 떨어지더라도 다칠 수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너는 조금 어지러운 듯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게, 이제 좀... 내려주시겠습니까?"
어쨌든 붙잡고 있던 그의 팔은 이제 막 개장한 롤러코스터의 안전바 같이 튼튼했기에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른 뛰어내려 버린다거나 하면 마음에 안 들었나 싶어서 상처받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 때문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너는 그에게 내려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