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을을 좀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좋든 싫든(싫은 건 전혀 아니었지만) 이 마을에서 꽤 오래 머물게 되었으니 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깊게 아는 건 좋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과 안면도 트고,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바로 사거나 하려면 적어도 헤메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이 마을 사람들은 세븐스에게 친절했다. 아니,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식적이지도, 일부러 더욱 배려하지도 않는 그런, 마치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이니, 그저 그렇게 대할 뿐이라는 듯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나는 영웅이라고 추켜세워지지도 않고, 쓰레기라며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그들과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햇볕이 따스한 오후, 우중충했던 하늘이 열리며 바닥은 조금 축축한 감이 남아있었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마르겠지, 그걸 보증하듯 이미 거리는 조금 패여 젖어 있는 곳 말고는 제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모처럼이니 햇빛을 피하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워잡는다. 걸으며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거나,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웃음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제 겨우 며칠 째 보는 얼굴임에도 그들은 어색한 기색 없이 받아들인다.
"후우... 이정도면, 얼추 다 돌아본 것 같은데."
얼마나 걸었는지, 슬슬 따스한 햇볕이 옷을 살짝 달구려고 하고 있었다. 어디 잠깐 쉴 만한 곳 없나.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보니 가로수 곁, 잘 마른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잠깐 쉴까, 싶어 다가가니 벤치 옆, 깨끗한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깨끗한 걸 보니 비가 그치고 한참 뒤에 가져다 놓은 모양인데.
"이게 왜 여기에..."
자세히 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혹시 길냥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뭐 그런 걸까 싶어 가만히 내려다본다. 햇볕도 따뜻하고, 상자도 깨끗하니 보송보송해서 잠이 잘 오는 걸까, 싶으면서도 혹시 누가 버리고 간 건 아닐까 싶어서 주변을 둘러본다. 뭔가 정성스럽게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누구든 데려가주세요, 라는 문구는 없지만 뭔가 그런 건 아닐까?
"...저질러 버렸다..."
어느새 그는 상자째로 안아든 채 에델바이스 본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혹시 규정상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혹여 고양이가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걷느라 속도는 매우 느리다.
갸르릉,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자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고양이가 깨서 기지개를 쭉 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참 유연한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어쩐지 기지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자를 들고 있으니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조심스럽게 옮긴다고 했는데 잠에서 깨버린 걸 보니 역시 흔들렸나, 하고 생각하며 조금 미안한 듯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야옹아, 깨워버렸나 보구나."
만져볼까? 상자에서 튀어나간다거나 하지는 않는 걸 보니 사람 손을 좀 탄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막 잠에서 깬 상태라 정신이 없는 것 같기도... 혹시 모르니 만지는 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나저나 어쩐담, 이대로 들고 가다가 갑자기 튀어나가거나 하면 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근처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귀여운 걸 보면 긴장이 저절로 풀린다. 고양이가 자신의 인삿말에 반응하듯 울음소리를 내자, 그는 눈웃음지으면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쓰다듬고 싶다... 그는 잠시 그렇게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어쩐담, 이제 일어났으니 배가 고프진 않으려나?
"야옹아, 주인은 없니?"
딱히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고양이가 장신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단 눈으로 살폈다. 누가 키우던 거라면 목걸이라든가 있겠지, 아까 확인했어야 하는데... 하고 혹시 주인이 찾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해 조금 불편한 듯 눈을 깜빡였다.
눈웃음을 짓는 모습이 무해해보인다. 비능력자라고 해도 자신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은 부대원인지 아닌지만 확인한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주인은 없냐는 말에 또 대답한다.
—야옹
그 말이 있다는 뜻인지 없다는 뜻인지. 마리는 뭔가 먹을 것을 찾는 남자를 보다가 이내 상자 밖으로 뛰어 나와 바닥에 섰다.
—야옹
따라오라는 듯 한 번 울고는 앞장서서 몇 발 가더니 또 울음소리를 낼 것이었다. 그가 잘 따라온다면 도착한 곳은 원래 그가 가려고 했었던 목적지인 슈퍼마켓이 있는 비밀기지일 것이었다. 마리가 그를 이쪽으로 데려온 이유는 이곳에 오면 스스로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을 것이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아, 마리에게 옆에 앉으라고 권하고, 대답이든 행동이든 반응이 나오길 기다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만약 마리가 그 말을 따라 순순히 옆자리에 앉아주었다면 아마 계속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혼란한 가슴속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건 머리를 반대로 기울이는 마리의 움직임과 청천벽력 같은 마리의 한마디였다.
"에, 어, 뭇, 무슨 말을 하는 걸까나, 까나아..."
일부러냐는 그 말에 보이지 않는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푹 박히는 것 같았지만 레레시아는 애써 침착하게 모르는 척을 시전했다. 있는 힘껏 시선을 피하고 손의 떨림을 감추려 괜히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를 빗어내리면서.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동요는 두 번 일어나기 쉬운 법. 기껏 피하고 있던 눈을 괜히 슬쩍 굴려 마리의 눈을 보았을 때, 그 붉은 눈에 담긴 순수한 호기심을 보고 말았고 레레시아는 그만 정신이 혼미..까지는 아니고 아 이건 안 되겠구나 싶었다. 끝까지 숨기려면 숨길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짧게 숨을 내쉰 뒤 평범한 말투로 말했다. 고양이에게 말을 걸 때처럼.
"맞아. 일부러 그러는 거. 여태 잘 숨겼는데 그만 방심했네."
내가 그렇지 뭐- 레레시아는 능청 떨기도 그만두기로 했는지 매만지던 머리카락을 휙 넘기고 벤치에 기대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다시금 옆자리를 향해 손을 휙휙 흔들었다.
모르는 척하는 레레시아를 빤히 바라보니 이내 다시금 평범해진 말투로 돌아온 레레시아가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조금 퉁명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마리는 레레시아의 모습을 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의문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벤치에 기대 다리를 꼬는 모습은 꽤나 편해 보였기에 방금보다아 보기에는 더 좋아보였다. 마리는 불편하다는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양반다리로 앉아 레레시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양새였지만. 아, 보이는 건 레레시아의 옆모습이겠지만서도.
“왜 그렇게 하는데?”
마리는 아직 호기심이 가시지 않은 듯 물었다. 마리로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길게 늘이듯이 말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