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거리긴 했어도 진심으로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성격이 나쁜 것처럼 굴지만 누가 먼저 때리지만 않는다면 널널한 구석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 뭐. 착하네."
이해한다는 말에 별 뜻 없이 그리 덧붙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얌전히 제 음식 끌어와 수저를 챙겼다. 어쨌거나 엔이나 그나 먹을 것 앞에 두고 길게 이야기할 성격도 아니고, 더 이야기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대충 기대던 깍지를 풀고 많이 먹어라 하며 손 흔들어 주려다 엔이 몸 돌려서 묻자 한쪽 눈썹을 까닥한다. 그러나 곧 "마음대로 해라."라며 설렁설렁 고개 끄덕거렸다.
그도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하는 짓에 비하면 예절은 얌전했다. 소리 나지 않도록 천천히, 차분하게 먹는 모습이 얼핏 점잖게 보이는 듯도 하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한동안은 그렇게 조용한 식사시간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같은 게 없었더라면 말이다.
"야, 갑자기 졸* 궁금해졌는데 너는 왜 엔이냐?"
사람 이름이 그런 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는 엔의 이름을, 프로젝트 같은 수식은 모르고 평범한 '엔' 정도로 알고 있었음에도 그리 질문하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데엔 이유가 있기는 했다. 원래 밥 먹는 동안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잘 들기 마련이다. 상대를 앞에 두고 혼자 딴생각을 하다, 그 생각이 ABCDEFG……까지 이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그는 쓸데없는 잡생각과 궁금증을 굳이 참을 만큼 예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 할 말만 하기엔 뭐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쪽으로 슬슬 굴리다 덧붙인 말은 있었다.
그녀는 당신을 말을 듣고서는 맞은 편의 자리에 앉는다. 다만, 식사예절이 점잖은 당신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녀이다. 처음에는 그런 당신에게 맞추듯 식기로 몇번 깨작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불편한지 그릇을 통째로 들어 얼굴에 파묻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건 엔이 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그다지 궁금증 해결에는 도움되지 않는 답변이다. 오히려 달리 이유가 있겠냐고 묻듯이 당신을 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로는 잠깐 들어서 기울였을 뿐인데 이미 절반 가량의 고기들이 날아가있는 그릇이 있다. 다른 곳으로 간게 아니라는 걸 티내는 것 마냥 그녀의 입가와 뺨에는 반들한 기름기와 고기 부스러기가 붙어있었다. 당신이 보지 못한 사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걸까.
"그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덧붙여 말하며 문득 고개를 사선으로 꺾는다. 시선이 향하는 그곳에는, 어쩌면 당신이 알아채지 못했을 후드 가슴팍에 달린 ID 카드가 있다. 증명사진을 가운데에 두고 상하로 바코드와 'Project n'이라고 하는 글이 각인된 물건이었다.
"돌림자가 무슨 뜻이지?"
그러더니 불쑥 당신에게 묻는다. 고개까지 기울여가며 "엔에게 알려다오."하고 말하는게 정말로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마리는 제 변신한 것 때문에 놀란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자신이 고양이였다가 본 모습을 보인 일들은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비능력자 앞에서는 변신 모습을 보인 적이 없고 능력자들은 세븐스의 힘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그러려니 하는 편이니 말이다.
마리는 레레시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크림색 머리카락도 따라서 옆으로 기울여졌다. 레레시아가 몸을 일으키며 자리에 앉아 옆자리를 손짓하고 앉으라고 권했음에도 마리는 이번에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갸웃 기울일 뿐이었다.
“말 끝을 늘이는 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며 묻는 질문은 다른 악의나 그런 것 없이 순수한 호기심만 담겨져 있을 것이었다. 고양이일 때에는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러고보면 쌍둥이인 라라시아도 평범하게 말을 하지 않았던가.
말투가 기본적으로 시비조라 비꼬는 듯 들리기도 하지만 순전히 궁금증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몇 번 수저를 들고 내리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거렸다. 그것도 오래지 않았다. 저런다고 누구한테 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는 감탄을 끝내고 다시 제 할일에 열중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그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긴 하지… 원래 이름은 남이 지어서 부르는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저만 해도 승우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여승우가 됐으니까 뭐. 원래 물어보려던 건 그러니까, 철자에 담긴 의미? 계기? 느낌 같은 것을 물어보려고 했었나? 워낙에 툭 내뱉은 말이라 본인도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걸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서 다시 물어 볼 말재간도 없었고. 애석하게도 엔의 시선이 ID카드를 향했을 때, 그의 눈은 생각하느라 허공을 향해 이리저리 돌며 엉뚱한 것을 쫓고 있었다. 무엇보다 보았더라도 그는 무신경하니 그 정도의 눈썰미가 없어 못 알아보았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적당히 옷에 붙은 장식이나 폼을 위한 문구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조금 생각하다 짧게 답했다.
"같은 세대끼리 이름에 같은 글자를 정해서 돌려 쓰는 거. 그러니까 나랑 부모가 같은 형제? 걔들도 이름이 승으로 시작해."
단순 설명이라 그런가, 이번에는 단 한 마디도 험한 말이 들어가는 부분이 없다. 하려면 이렇게 할 수도 있으면서 왜 평소에는 쓸데없는 단어를 못 넣어서 안달인지.
오늘은 마을을 좀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좋든 싫든(싫은 건 전혀 아니었지만) 이 마을에서 꽤 오래 머물게 되었으니 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깊게 아는 건 좋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과 안면도 트고,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바로 사거나 하려면 적어도 헤메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이 마을 사람들은 세븐스에게 친절했다. 아니,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식적이지도, 일부러 더욱 배려하지도 않는 그런, 마치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이니, 그저 그렇게 대할 뿐이라는 듯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나는 영웅이라고 추켜세워지지도 않고, 쓰레기라며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그들과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햇볕이 따스한 오후, 우중충했던 하늘이 열리며 바닥은 조금 축축한 감이 남아있었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마르겠지, 그걸 보증하듯 이미 거리는 조금 패여 젖어 있는 곳 말고는 제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모처럼이니 햇빛을 피하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워잡는다. 걸으며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거나,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웃음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제 겨우 며칠 째 보는 얼굴임에도 그들은 어색한 기색 없이 받아들인다.
"후우... 이정도면, 얼추 다 돌아본 것 같은데."
얼마나 걸었는지, 슬슬 따스한 햇볕이 옷을 살짝 달구려고 하고 있었다. 어디 잠깐 쉴 만한 곳 없나.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보니 가로수 곁, 잘 마른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잠깐 쉴까, 싶어 다가가니 벤치 옆, 깨끗한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깨끗한 걸 보니 비가 그치고 한참 뒤에 가져다 놓은 모양인데.
"이게 왜 여기에..."
자세히 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혹시 길냥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뭐 그런 걸까 싶어 가만히 내려다본다. 햇볕도 따뜻하고, 상자도 깨끗하니 보송보송해서 잠이 잘 오는 걸까, 싶으면서도 혹시 누가 버리고 간 건 아닐까 싶어서 주변을 둘러본다. 뭔가 정성스럽게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누구든 데려가주세요, 라는 문구는 없지만 뭔가 그런 건 아닐까?
"...저질러 버렸다..."
어느새 그는 상자째로 안아든 채 에델바이스 본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혹시 규정상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혹여 고양이가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걷느라 속도는 매우 느리다.
갸르릉,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자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고양이가 깨서 기지개를 쭉 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참 유연한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어쩐지 기지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자를 들고 있으니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조심스럽게 옮긴다고 했는데 잠에서 깨버린 걸 보니 역시 흔들렸나, 하고 생각하며 조금 미안한 듯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야옹아, 깨워버렸나 보구나."
만져볼까? 상자에서 튀어나간다거나 하지는 않는 걸 보니 사람 손을 좀 탄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막 잠에서 깬 상태라 정신이 없는 것 같기도... 혹시 모르니 만지는 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나저나 어쩐담, 이대로 들고 가다가 갑자기 튀어나가거나 하면 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근처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귀여운 걸 보면 긴장이 저절로 풀린다. 고양이가 자신의 인삿말에 반응하듯 울음소리를 내자, 그는 눈웃음지으면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쓰다듬고 싶다... 그는 잠시 그렇게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어쩐담, 이제 일어났으니 배가 고프진 않으려나?
"야옹아, 주인은 없니?"
딱히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고양이가 장신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단 눈으로 살폈다. 누가 키우던 거라면 목걸이라든가 있겠지, 아까 확인했어야 하는데... 하고 혹시 주인이 찾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해 조금 불편한 듯 눈을 깜빡였다.
눈웃음을 짓는 모습이 무해해보인다. 비능력자라고 해도 자신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은 부대원인지 아닌지만 확인한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주인은 없냐는 말에 또 대답한다.
—야옹
그 말이 있다는 뜻인지 없다는 뜻인지. 마리는 뭔가 먹을 것을 찾는 남자를 보다가 이내 상자 밖으로 뛰어 나와 바닥에 섰다.
—야옹
따라오라는 듯 한 번 울고는 앞장서서 몇 발 가더니 또 울음소리를 낼 것이었다. 그가 잘 따라온다면 도착한 곳은 원래 그가 가려고 했었던 목적지인 슈퍼마켓이 있는 비밀기지일 것이었다. 마리가 그를 이쪽으로 데려온 이유는 이곳에 오면 스스로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을 것이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아, 마리에게 옆에 앉으라고 권하고, 대답이든 행동이든 반응이 나오길 기다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만약 마리가 그 말을 따라 순순히 옆자리에 앉아주었다면 아마 계속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혼란한 가슴속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건 머리를 반대로 기울이는 마리의 움직임과 청천벽력 같은 마리의 한마디였다.
"에, 어, 뭇, 무슨 말을 하는 걸까나, 까나아..."
일부러냐는 그 말에 보이지 않는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푹 박히는 것 같았지만 레레시아는 애써 침착하게 모르는 척을 시전했다. 있는 힘껏 시선을 피하고 손의 떨림을 감추려 괜히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를 빗어내리면서.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동요는 두 번 일어나기 쉬운 법. 기껏 피하고 있던 눈을 괜히 슬쩍 굴려 마리의 눈을 보았을 때, 그 붉은 눈에 담긴 순수한 호기심을 보고 말았고 레레시아는 그만 정신이 혼미..까지는 아니고 아 이건 안 되겠구나 싶었다. 끝까지 숨기려면 숨길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짧게 숨을 내쉰 뒤 평범한 말투로 말했다. 고양이에게 말을 걸 때처럼.
"맞아. 일부러 그러는 거. 여태 잘 숨겼는데 그만 방심했네."
내가 그렇지 뭐- 레레시아는 능청 떨기도 그만두기로 했는지 매만지던 머리카락을 휙 넘기고 벤치에 기대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다시금 옆자리를 향해 손을 휙휙 흔들었다.
모르는 척하는 레레시아를 빤히 바라보니 이내 다시금 평범해진 말투로 돌아온 레레시아가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조금 퉁명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마리는 레레시아의 모습을 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의문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벤치에 기대 다리를 꼬는 모습은 꽤나 편해 보였기에 방금보다아 보기에는 더 좋아보였다. 마리는 불편하다는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양반다리로 앉아 레레시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양새였지만. 아, 보이는 건 레레시아의 옆모습이겠지만서도.
“왜 그렇게 하는데?”
마리는 아직 호기심이 가시지 않은 듯 물었다. 마리로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길게 늘이듯이 말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옆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자 그제야 마리가 움직였다. 일어나서 벤치에 앉는 걸 보고, 시선을 다시 위로 올린 레레시아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벤치 등받이에 기댔다. 조금 전만 해도 보이던 달이 그새 구름에 가려져 하늘이 어두컴컴하다. 그대로 하늘을 응시하다가 옆을 보니 그녀를 향해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마리가 보였다. 신기하게도 앉은 마리를 바라보던 레레시아는 이번엔 왜 그렇게 하냐는 물음에 피식- 웃었다. 약간 일그러진 웃음이었지만.
"별 것도 아닌 걸 궁금해하네."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한 마리의 눈동자를 보고 툭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불쾌함은 없었고 너 참 별나다, 정도의 어감은 있었다. 레레시아는 눈을 돌려 앞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공원, 그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러면 남들이 알아서 거리를 두거든. 아, 쟤는 좀 귀찮은 타입이구나, 하고."
말투와 행동이 조금만 유별나도 사람은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그건 사람이 사람인 이상 누구나 그랬다. 세븐스이건 아니건 누구라도. 정말 그것 뿐이라는 듯, 가볍게 대답을 하고나면 이제 레레시아가 물었다.
매번 감각에 날이 서 있는것이라면 별로 당기진 않지만. 굳이 덧붙이진 않고 속으로만 읆는다. 당신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도, 당신의 말을 끝마치고 나자 잠깐의 텀 후에 반응을 들려준다.
“눈이 좋다니, 그럼 나랑 궁합이 잘 맞겠네.”
왜 잘 맞을까, 정작 중요한 설명은 안 하고선 눈웃음 짓는다. 눈이 가늘어지면 동공도 그에 맞춰 웅크린다. 그와 같은 당연한 이치인듯, 그의 감정선도 일직선(이라고 쓰지만 실제 선으로 표현하면 털선이 아닐까?)을 달리다 궤적을 바꾼다.
“어쩔래, 아무래도 임무에서도 볼 사이인거 같네. 정신 혼미해지니?”
텐션이 높아진듯한 억양. 당신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언뜻 낮아보인다만, 그런건 제 알바 아니다. 팔짱을 끼곤 살폿 벽에 기대보는게 퍽 껄렁해 보일지도. 자신이 보기에도 당신은 잡생각이 많아보인다. 생각이 많은 사람한테 오감의 능력이라, 참 아이러니하네. 그저 당신을 좀 놀려보고 싶었던건지 이런 말을 하고서도, 당신의 질문에 답하는 투는 장난기가 팍 지워져있다.
“괜찮아. 딱히 불편하진 않거든.”
염력이라고도 할수 있겠다는 말에 굳이 부정은 안한다. 아주 넓게 본다면 염력 비스무리한게 맞으니까. 괜찮은 것도 맞다.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눈 얘길 해도 별 타격 없다. 어떻게 능력을 쓰냐는 당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고 답한다.
“활용도가 넓어서 때에 맞춰쓰는 편이야. 두뇌 돌리는 것에 영향을 크게 받고.”
애매한 답이지만, 실제로도 애매한 능력이다. 물체를 가루로 만들어 기관지를 막거나, 시야를 가리거나 하는 것부터 시작해 간이 무기 생성까지. 사용자의 창의력이나 상황 판단력에 따라 쓰임새가 갈리는 능력.
“원리가 궁금했던 거면 기력을 매개체 삼아 물체에 에너지를 쓰는 형식이야.”
그가 아는 자신의 능력은 여기까지다. 더는 능력에 대해 할 말이 없는듯, 가만 기대었던 자세를 고쳐 일어난다. 당신을 보는 눈빛은 오묘하다. 서늘하다면 서늘하지만, 연한 미소가 걸려있어 애매하다.
“네 능력에 대해서도 더 듣고 싶은데.”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대로 말하라는 뜻? 아니면 어느 정도로 동료를 신뢰하는지 확인하려는 것? 그렇게 묻고선 눈을 깜박여 본다.
말을 알아듣는 걸까? 자신의 말에 대답하듯 야옹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진다. 아마 다른 사람이 봤다간 놀림감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녹아내릴 것 같다. 귀여워. 쓰다듬고 싶다, 괜찮을까?
"앗, 어디 가니?"
그런 생각도 잠시, 상자 바깥으로 뛰어나가 바닥에 서서는 울음소리를 내자,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 싶었다. 물론 몇 발 가다가 멈춰서 또 울음소리를 내는 걸 듣고는 따라오라는 걸까, 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고양이가 가는 대로 따라가니 슈퍼마켓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아래에 에델바이스의 기지가 있는 곳이라는 걸 빼면 평범한 슈퍼마켓, 여기엔 왜 왔을까? 혹시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였나?
"여긴 왜 왔니? 먹을 게 여기 있나..."
아니면 먹을 거라는 말을 알아듣고 여기까지 왔다거나, 그렇다면 참 똑똑한 고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슈퍼마켓을 둘러본다, 고양이 먹일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조금 힘없이 당신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인 그는, 당신이 자신과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왜일까 하고 의문이 떠오르지만 묻지는 못한다. 그저 생각하는 게 있으니 그렇게 말했겠거니, 하고 웃을 뿐이다.
"그럴리가요, 미리 어떨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셨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유루 씨와 함께 다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언제든 능력을 사용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런 감상이었으니 그걸 항상 주의하고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닐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담 다행입니다, 아, 제가 이야기할 만한 문제는 아니겠죠."
실례했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능력의 활용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당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활용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섬세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만큼 규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제대로 쓸 수 없다, 정도라니 오히려 대단한 게 아닌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역량이... 뛰어나신 것 같네요."
그리곤 원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었지만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군요, 라고 답할 뿐이었다. 색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텐데 어떻게 파란색을 콕 집어서 컨트롤할까, 라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고이 묻어 두기로 했다.
"제 능력 말씀이시죠... 사실 아까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아시다시피 감각은 곤두세울 순 있어도 무뎌지게 만들긴 어렵죠, 의도해서는 더욱."
즉 항상 예민하다는 이야기.
"제가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감청, 감시, 그리고 생화학 공격의 대비, 그 외에 불특정한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알려드리는 것 뿐입니다."
극한 상황에 몰릴수록 더 예민해진다며 덧붙이곤, 언젠가 코피가 터졌던 경험을 조금 장난기 섞인 투로 이야기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의도대로 슈퍼마켓까지 따라 쫓아왔다. 이내 슈퍼에 도착했으니 뭔가 자신에 대해 알아채거나 단서를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가 말하는 건 이곳에 먹을 게 있나, 하는 말 뿐이었다.
마리는 내심 힘이 빠져서 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말이다. 마리는 슈퍼마켓 안쪽 코너를 돌면서 그 남자의 사각지대를 돌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갑자기 고양이가 코너로 사라지고 나서 뒤에서 한 여자애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그리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에 익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같은 대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냥 마을에 사는 비능력자인 걸까? 마리는 조금 경계심을 드러내는 눈을 조금 깜빡거리면서 그 남자를 살폈다. 아마 왠만한 사람이었다면 고양이의 색이 이 소녀의 색과 같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터였다. 마리가 앞의 남자를 보았을 때 외형으로만 보면 제 또래인 것 같아서 같은 부대원이라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낮의 하늘은 밝고 맑다. 몽실몽실 뜬 구름은 하늘하늘 날아다니고, 태양은 쨍쨍하게 빛나며 땅을 달군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훌륭한 날씨, 하지만 이런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백화점 옥상에 앉아 있었다. 자리는 맨 뒷자리. 저 너머 맨 앞의 무대에선 코스튬 히어로들이 응원해줘서 고맙다며 손을 흔든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왁자지껄 소리를 내며 아이들은 방금 본 쇼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들끼리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활기찬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훌륭해...]
아까 전 일어난 쇼- "싸워라! 가디언즈 V 히어로 쇼! 신전사, 바이올런스 퍼플의 등장!"에 대한 정보를, 제이슨은 잡지를 보고 알아낸 뒤, [히어로 쇼도 재미있어 보이네.]라며 나름의 변장을 한 채 나온 것이다. 기계 외피를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놀랄테니. 그리고 그 결과로- 아주 훌륭한 것을 보았단 개운한 표정을 한 채로 있는 것이다.
[연기가 훌륭했어. 직접 보는 것이라서 CG는 없었지만 저런 연출도 가능했군. 그리고 그를 매꿀 수 있도록 큰 화면에 효과를 넣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바이크 효과음과 연기를 활용해서 바이크를 이용해 도착했단 묘사를 주는 게 나쁘지 않았어. 무엇보다 호응 유도와 힘을 얻어 물리친다는 전개... 으음...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군...]이라며, 중얼거리며 독백을 하던 그는, 문득 주변 사람들이 전부 일어난 것을 보고 자신도 일어섰다.
괜한 농담이나 헛소리가 아닌 진심이다.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소중하니. 저 상태로 남한테 벅벅 닦는 것만 아니라면야 수저로 먹든 얼굴도 먹든 상관 없다. 그는 많이 먹어라― 하며 휘휘 손짓을 해대고는 다시 제 음식이나 신경 쓰기로 했다. 그리고,
"푸학."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결론에 그만 먹던 음식을 뱉어버릴 뻔했다.
"야이 씨, 흐흐흑. 아니거든."
황급히 씹던 걸 삼키고 대꾸를 하려는데 자꾸만 웃음이 샌다. 대충 삼켰더니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답답한 느낌에 잔뜩 인상을 쓰면서도 낄낄거리는 모습이 썩 괴상했다. 물 한 잔을 들이키고서야 숨을 고른 그는 아직까지도 웃음기 서린 낯으로 말했다.
"이야, 간만에 존* 웃긴 소리 들었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전통, 대충 그런 거라고 쳐."
그게 그렇게까지 웃긴 소린가 싶지만 여승우는 그렇단다. 아, 진짜 웃기는 소리이긴 했다. 내가 걔랑?
백화점에 들린 것은 살 것이 있기 때문이다-당연한 소리 중- 그 말 그대로 목에 좋다는 환상의 음료수 로보페퍼를 한정 판매한다길레 찾아왔건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완판되버린 것이다. 운이 없네라고 생각한 순간 미션 때 본 이 중 제일 독특하다고 생각한 이 제이 뭐시기였던 이가 옥상에서 내려오는게 보인다. ...설마 히어로쇼 본거야?
'안녕하세요'(필담)
그녀는 당신 앞에 나아가 필담을 보여준다. 동료간의 우애를 다지면 손해볼 것은 없기에 터프해보이는 사내를 보며 그녀는 그리 생각했다..
마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계의 빛을 띄던 눈동자는 순식간에 평범한 호의를 가진 눈동자로 바뀌었을 것이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지난 회의 때 봤었던 사람이었구나. 왠지 눈에 익더라.
“나는 마리 그린우드, 당신은?”
마리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나는게…. 혹시 생각보다 나이가 더 많으면 어떡하지? 레레시아야 나이를 알고 있어서 반말로 말을 트기는 했지만 외양만 보고 성급히 또래라고 결정한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조금 우물쭈물하게 작은 목소리로 이어 묻는다.
쥬데카 뷔스카리오. 그 말을 듣고는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기억이 날듯 말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나이는 스물 넷. 세 살차이는 또래라고 할 수 있나?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또래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봤다. 레지스탕스 아저씨들은 내가 또래랑 어울릴 필요가 있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또래라고 하면 +-3살 정도면 또래인 걸까? 그럼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이름이 쥬데카이고 성이 뷔스카리오 아니야? 그런데 왜 애칭을 성에서 따오는 거야?”
뭔가 데자뷰 같은데. 꿈에서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마리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어릴 적 쥬데카와 처음 만났을 때도 리오라고 부르라는 그 말에 그렇게 반문했었더랬다. 그만큼 마리에게는 이름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아리아에게도 성과 이름을 물어보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던가.
“나는 스물한살이니까, 또래잖아. 말 편하게 해도 괜찮아.”
고양이에게는 안 그러더니 사람이 되니까 존칭을 쓰는 것에 마리가 편하게 말하라는 뜻에서 이야기했다.
당신이 문득 폭소를 터트리자,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자각도 없이 고개를 비틀어 기울이면서 의문을 드러낸다. 진정된 당신에게 얼떵뚱땅 넘어가는 대답을 듣고나서도 "그런가." 하고 대답해준다. 물론 완전히 이해가 된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로벨리아든 에델바이스의 동료이든 다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당신의 말대로 그렇게 치기로 한 거다. 그녀란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니까.
"엔에게는, 엔과 동등한 세대나 가족이라고 칭할 수 있는 개체가 없어서 이해가 힘들었다. 미안하다."
그렇게 첨언하고는 식사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식기가 아닌 접시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물론 이번에도 방금처럼 통째로 삼킬 생각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곧장 파묻지는 않고 왠지 멈칫거리고 있다. 이제와서 체면이나 예절같은걸 신경쓰는 건 아닌 것 같고. 따지자면 기억을 더듬는 중인가. 그런 그녀가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한다.
"그건... 이름에서든 성에서든 사실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아직 거리감이... 있다고 할까요."
아직 서로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였다. 사실 그녀와 그는 그럴 만한 관계였지만, 그는 애써 그렇게 대답했다. 저 말까지, 거의 비슷했던, 아니 똑같았던 예전의 말이 떠오른다. 그땐 좀 더 앳된 목소리였지. 갑작스럽게 이런... 온갖 정보가 밀려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두 우연일 거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어떻게든 충격을 완화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존대가 입에 붙어서요, 듣기에 좀... 별로인가요?"
예삿말이라, 예전에는 어땠더라? 사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시작한 존대였다. 그런 이유를 지금 말할 수 있을리 없지, 그녀가 자신의 생각 때문에 신경을 쓰지는 않기를 바랐으므로.
"그, 어쨌든... 그래서 리오라고 말한 거랍니다. 성과 이름을 전부 부르거나, 성만을 부르는 것보다는 좀 더 가까운... 느낌이니까요, ...그린우드 양."
하마터면 마리라고 부를 뻔 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슬픈 듯 웃었다.
가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은 들은 쪽도 조금은 숙연해지는 게 보통이고, 상대방이 듣고 난감해질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꺼내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당연하게도 방금의 발언은 둘 다 무시한 처사다. 하지만 화자나 청자나 상식인 축에 드는 인간은 아닌지라 상관 없다는 걸까. 그는 실실거리며 식탁 위에 한쪽 팔을 얹고 상체를 비뚤어지게 기울였다. 이제야 예절이 해이해졌다. 그러다 엔의 말을 듣고 아리송한 표정이 된다.
그런가? 진중하게 사는 편은 당연히 아니고, 나름 자주 웃는다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이렇게 폭소할 만큼 우스운 일은 드물긴 했다. 그런데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보다도 그런 표정 더 보기 힘든 사람이 바로 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흠, 고민하는 티를 내더니 곧 이런 소리를 했다.
"나만 웃기 개 억울하네. 너도 ** 아무거나 해봐."
말하는 투만 봐서는 양아치가 따로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시비가 아닙니다……. '그러고보니 나도 네 웃는 모습은 본 적 없으니 웃어 달라'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 것도 재주다.
거리감이 있다는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친해지기 전에는 이름을 불리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그것도 나름 합당한 이유이기에 마리는 더이상 말을 가져다 붙이지 않았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냐, 그게 편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것과 마찬가지로 존댓말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할 이유도 없었고. 몇 없는 또래였으니까 서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리오라고 불러달라고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뒤에 붙은 그린우드 양이라는 말에 조금 낯빛이 흐려진다.
“음, 알겠어. 리오. 그런데 나는 마리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그린우드라고 불리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살짝 바닥으로 향한 시선이 깜빡깜빡였다가 다시금 쥬데카를 바라본다. 쥬데카, 그러고보니 제 친구랑 이름이 비슷하네. 쥬드라는 이름은 흔하니까 종종 볼 수 있는 이름이지만서도. 마리는 기억이 오래되어 쥬드가 애칭이 아니라 이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오랜 기간을 생각하면 헷갈리는 것도 당연할 만큼 시간이었으니.
"그래. 그래. 잘했어. 잘했어. 혹시나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차후 실험에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문제없이. 알고 있지?"
모니터에 비치는 것은 진한 갈색 콧수염이 상당히 인상적인 누군가의 실루엣이었다. 목소리로 보아 중년 남성인 것은 분명해 보엿지만 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자신의 콧수염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중년 사내의 실루엣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가디언즈의 멤버들이었다.
"그럼 어떻게 이송하면 좋을까요?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차량으로..."
"차량으로 이송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리잖아. 번거롭게 왔다갔다 해야하고. 그곳에 조만간에 블러디 레드를 보낼테니까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블러디 레드. 그 이송 열차 말입니까? 확실히 그 열차라면 빠르게 이송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블러디 레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진 알 수 없었지만 말투로 보아 심상치 않은 것임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사람을 이송하는 것으로 쓰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별 상관없다는 듯 실루엣의 주인공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 오버하는 감은 있지. 허나 냄새를 맡은 파리들을 이참에 한번 정리해둘까 싶어서 말이야."
"파리라고 하면?"
"내 실험체를 빼돌리려고 하는 고약한 파리들이지. 안 나타난다면 그것으로도 상관없지만 나타나서 실험체를 빼돌리는 시도라도 한다면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그럴게 뻔하잖아? 그러니까 혹시나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런 파리들을 일망타진 해둘 필요아기 있다는 거지. 케헬헬"
참으로 특이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실루엣의 주인공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어 웃음소리가 조금 줄어들었고 실루엣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실험체를 이송함과 동시에 차후에 이것저것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 테러리스트들을 쓸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이 천재의 천재적 발상이지. 자. 그럼 블러디 레드를 보낼 때까지 실험체들이 다치지 않게,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잊지 마렴. 알겠지?"
기분 나쁘내고 물으니 단박에 대답이 돌아오길래, 그러냐고만 했다. 이해해서 하는 말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태클만 걸지 않는다면 서로 언성 높일 일은 없었다. 지금이 그랬고, 잔잔한 밤공기는 여전히 평화로울 수 있었다.
허공을 보고 있는 레레시아의 얼굴 옆으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져온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마리가 그녀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서로 얼굴 안 보게 하려고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저렇게 앉을 줄은 몰랐지. 그래도 얼굴을 아예 돌린다거나 하진 않아서 옆얼굴의 미미한 표정 변화 정도는 마리에게 다 보였을 것이다. 그다지 극적인 변화는 없었겠지만.
"잘 모르겠다."
마리의 시선을 받으며 마리의 얘기를 쭉 들은 끝에, 레레시아가 꺼낸 말은 그랬다. 잘 모르겠다. 그녀는 처음부터 세븐스였으며, 일부러 말투와 행동을 바꾸면서 그로 하여금 남들이 어떻게 느낄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르고 속아도 그만이고, 알면서 모르는 척 해도 그만이다. 그녀가 원치 않는 거리만 지켜준다면.
"나는 아니지만, 라라는 너랑 비슷한,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기도 해. 라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 하지 세븐스냐 아니냐로 구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라 만의 생각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적인 생각. 그렇기 때문에 라라시아는 그녀 이외의 사람에게 그 생각을 꺼내거나 심지어 가족인 레레시아에게조차 동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신경 안 쓰거든. 그런 나한테 그런거 물으면 곤란하지. 정 궁금하면 직접 부딪히는 수 밖에 없어.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네."
나라면 현상유지 할 거야. 짧게 덧붙이고 다리를 풀어 반대로 꼰다. 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쳐 늘어지려는 몸을 받치고, 그 팔에 머리를 적당히 기대며 그리고, 라고 말한다.
"이름 부르다 혀 꼬이지 말고. 레시라고 불러. 요전에 훈련실에서도 그러라고 해줬잖아."
첫 인사를 나눌 때의 얘기다. 레레시아는 언제 누구와 통성명을 하더라도 늘 그렇게 말해왔으니, 마리에게도 분명 그렇게 말한 걸로 기억했다. 레시- 라고 불러- 라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널 모르는 듯했다. 너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면서도, 마음 한 켠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까. 아니면 네가 그녀의 기억에 자리잡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전혀,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야 할 목 뒤가 쓰라렸다. 타는 듯한 통증, 저절로 인상이 쓰일 것만 같은 그 통증에 그는 살짝 고갤 돌리고 모자를 쓰며 표정을 가렸다. 좀 나아지길 바라면서.
"네, 고마워요. 벌써 꽤 오래... 이렇게 말을 해왔거든요."
그래도 나름 편하게 대하기 위해서, 그녀에게는 최소한 딱딱한 말투는 피하기로 너는 결정했다. 그녀가 그걸 알아채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조금씩 가라앉는 듯한 작열통에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너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달라지는 걸 눈치챈다. 뭔가, 말실수를.
"아, 아...! 미안해요, 그.. 아니 마리, 정말로 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어요."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너는 안일했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조금 가라앉는가 싶었던 통증이 다시금 되살아나듯, 너는 본능적으로 네 목 뒤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자극을 주다 보면 나아지는 일도 있었으니까. 너는 정말 미안하다며 거듭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가정사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니, 그녀는 전혀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만들어버린 상황에 너는 가슴이 아팠다.
"마리, 뭐라도 좀... 마실래요?"
분위기를 좀 바꾸기 위해서 너는 서투르게 음료를 권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씹을 거리라도 있으면 좀 기분이 가라앉지 않을까 싶어서.
쥬데카는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서로 이름을 부르고 말을 편하게 놓고 하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지 않던가. 전에 있던 곳에서도 어린 자신에게도 존댓말을 해주던 이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자신의 말에 그런 줄 몰랐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모습에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그 모습은 정말로 괜찮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그립기는 하지만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이런 사회가 문제였고 나쁜 것이었으니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마리는 이곳에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죽어서 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죽음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응. 차가운 이온음료로. 안에 들어가서 마실래?”
안이라고 하면서 기지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가리켰다. 여전히 밖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은 불편하고 꺼려졌다. 기지 안은 안전하니까 괜찮지만서도.
“자판기 고장났더라.”
휴게실에서 봤던 자판기가 고장나있는 게 생각나서 이야기했다. 휴게실에서 뭔가 마시려면 여기서 사서 내려가는 게 맞았다.
입단한 이후 레레시아와 라라시아의 호의로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호의가 이어지곤 했다. 여벌의 옷을 지원해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금전적인 지원도 있었다. 이스마엘은 수중에 든 것이라곤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의가 한두 번 오가는 것은 괜찮지만 모 동방예의지국의 정을 넘어선 일이 계속 되니, 이스마엘은 도망치듯 산책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렇지만 도망 나온 곳에도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이스마엘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누굴까? 지금까지 인사한 사람은 많았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스마엘은 당당히 인사를 건넸다. 기계음 그 자체인 목소리가 이질적이다. 꼭 안드로이드 같다. 그렇지만 안드로이드에겐 없는 것이 이스마엘에겐 있었다. 활기차고 긍정적인 어조 말이다.
대화를 하는 듯, 혹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듯,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레레시아는 선문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모습으로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게 거진 2년 만이니 그럴 것이다. 늘 얼굴을 가리던 무언가가 없어진 것처럼- 조용히 반대쪽 손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부드럽지만 거친 장갑의 감촉이 얼굴 위를 지나갔다.
"그래."
그녀가 해준 말에 대해 그래보겠다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이 들렸지만 이번에도 짧게 중얼거릴 뿐이다. 레레시아의 말이 어찌되었든 마리의 생각은 결국 마리 본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 거기에 이견도 의견도 표할 자격은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호기심은 적당해야 현명한데."
레레시아의 머리가 비스듬히 돌아가 샛노란 눈동자를 마리에게 꽂았다. 아까처럼 고개를 기울인 마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 없이 비어있었다. 텅 빈 눈동자는 되려 섬찟하다.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잠시 가늘게 좁혔다가 원래대로 뜬다. 하- 한숨 같은 날숨을 내뱉은 입술이 움직였다.
"같은 팀원인 이상 필요한 교류는 할 거야. 도움을 요청하면 내가 가능한 선까진 들어줄거고 지금처럼 적당히 어울리는 것까진 그럴싸하게 해줄 수 있어. 막역한 사이가 될 정도로 친분을 쌓을 생각이 없는 것 뿐이야."
그런 거라며, 마리의 물음에서 교묘히 빗나간 대답을 돌려준 후 레레시아가 반문했다.
"넌 그런게 왜 궁금한데?"
왜 라고 물었으니 왜 라고 돌려주기- 까진 아니었지만. 어쩌면 보이지 않는 선 긋기를 하는 걸지도.
당신은 그릇으로 얼굴이 가려진 그녀에게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덕분에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단지 먹는 것에 열심이던 엔은, 마지막에 한 번 높게 그릇을 치켜들더니 테이블 위에 천천히 내려다 놓았다. 그것은 텅 빈 그릇이다. 단 두 번 접시를 입에 가져다 댄 걸로 그 많던 고기가 전부 사라진 거다.
"하지만 승우와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돌림자를 쓰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신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돌림자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혈연관계간에 가질 수 있는 무언가라고 이해하는 것 같았다. 단순한 이유다. 그녀는 이번에도 부주의하게 손등으로 입가를 슥슥 문지르다가 당신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무거나?"라면서 의문을 나타낸다.
아무거나라고 해도, 당신이 어떤 요구를 하는 건지 그녀가 알리는 만무하다. 당신의 말에 내포된 맥락을 해석해서 웃어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방금까지도 이름의 관계나 점잖은 식사같은건 모르고 있던 그녀이기에- 허공으로 향해있는 검붉은 눈동자는 꼭 그렇게 고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엔이 문득 펼친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가져다 대었다. 그 손들을, 접었다 피길 두어번 반복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뚫어지게 응시하는 건 그저 눈만 깜빡였으나, 이후에 한 말에는 어쩐지 아쉬워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길 바란다고 레레시아가 생각하는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랑은 상관 없어.
"됐어 그럼. 선 넘진 않았어."
레레시아가 돌려준 물음은 너무나 싱거운 대답으로 돌아왔기에 그럼 됐다며 더이상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저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렇게 말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이후에도 같은 주제로 물고 늘어진다면- 그 땐 그 때다. 그러지 말아주길 바라긴 하겠지만. 눈썹을 늘어뜨린 마리의 얼굴을 그녀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조용히 보고 있다가,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글쎄다. 뱀독이라면 독에 대해 공부할 때 좀 알아둔게 전부고. 뱀은 그냥 동물이라고 생각해."
앞선 질문들은 의도가 얼핏이나마 보였다면 이번 질문은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 뱀독에 관해서라면 레레시아보다 라라시아가 좀 더 전문적으로 알고, 뱀은 실물을 본게 한 번이나 되던가. 애시당초 동물을 찾아서 보거나 유별나게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조금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자면-
으, 그가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럴 생각까지야 없지만. 돌림자 쓴다는 얘기는 제 쪽에서 먼저 한 거고, 이름 자체에 큰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름이 있어도 그다지 불리질 않았는데 의미가 있기나 할까. 그는 깔끔하게 비워진 엔의 접시를 보고선 저도 남은 것들을 대충 끌어모아 처리해버렸다. 엔이 먹는 것만큼 빠르지는 않아도 마시는 것과 엇비슷한 정도는 되었다.
여승우는 제 말투의 의미전달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전보다 비속하게 바뀌어 가는 걸 알면서도 고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때로 의미전달에 실패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남을 탓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한쪽 입술을 픽 끌어올렸다. 눈썹 끌어올리며 짓는 표정이 썩 짓궂은 감이 있었다.
"재주 좋네.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
그러다 금세 고민하는 기색을 되었다. 음, 어쩐지 기분이 묘한 느낌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이게 정확히 어떤 감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이 저보다 어린 누군가를―정신적인 면에서― 어여쁘게 여기는 심리라는 걸 그는 몰랐다.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니까 몰라도 상관 없겠지. 그는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좋은 TMI나 이 작품 맨 처음으로 스페셜 스킬의 이름이 나온 아스텔의 경우. 컷씬이 만약 나왔다고 한다면 살짝 몸을 왼쪽으로 비튼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고 왼손으로 검집을 잡고 있고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이제 검을 뽑는 중의 자세라서 오른손과 뽑힌 검이 얼굴의 일부를 가리고 있어서 감고 있는 눈과 닫혀있는 입만 얼굴에서 보이는 그런 컷씬이 될 것 같네요. 당연히 검에는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고. 대충 그런 느낌?
수심 한 점 생기지 않을 환한 날이다. 지난밤 시원하게 내린 비가 열기를 식히고, 무더위가 정점을 찍는 여름 중반을 넘겨 그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하다. 하늘은 맑고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롭다. 저마다의 일로 바깥을 나서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을 흘리게끔 하는, 아름다운 늦여름의 정경.
그런 세상은 모르는 자리가 있다. 동떨어진 곳, 벽은 어두운 회색이고 천장에는 전등이, 바닥에는 침구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방. 공간은 넓지만 든 것은 하나 없이 휑했다. 온통 칙칙하고 건조한 빛으로 칠해진 공간이 살풍경스럽다. 공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널찍한 방은 통일성조차 없었다. 한 가운데에 놓인 티 테이블은 자못 생뚱맞게 보일 정도였고, 찻상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테이블 위에는 차 한 잔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문제쯤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 앞에 나란히 앉은 사람이 둘이다. 그중 남푸른 빛 머리의 소녀가 픽 웃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을까, 아직은 어린 티가 더욱 많이 남은 얼굴이 실소하듯 가벼이 샐그러진다. 맞은편에는 그보다 작은, 아직 소아라 일러도 될 나이의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마주보는 남자아이의 차림새는 괴상했다. 꼭 그가 이 공간에 속하는 이질물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바깥은 여름이건만 손목까지 틈 없이 덮는 장갑을 끼고 신발은 발목 위에 닿는 긴 것을 신은 채였다. 쾌적하지만 아직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목 끝까지 오는 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숨결조차 감추려는 양 마스크를 써 눈만 보이는 얼굴이다.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삐죽삐죽 잘려 엉망이었는데, 모자가 조금 들려 있다는 걸 깨달은 그가 후드를 깊이 당겨 누르자 이제는 머리카락 한 올 함부로 내보이지 않게끔 단단히 잠근 차림이 되었다. 사람을 쪄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냉방을 돌리고는 있었지만, 계절에 맞는 평범한 옷을 입은 소녀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강도가 그리 세지는 않았다. 열이 오를 만한 옷차림에 땀을 흘리면서도 그는 발간 얼굴로 즐거이 웃으며 조잘거리기만 했다. 한껏 신이 나 다리를 동동거리면서도 얌전하려 노력하는지 행동이 과하지 않았다. 괴상한 방, 음침한 구석. 장소에 반해 이야기 주제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다만 대화의 양상이 이상했다. 소녀가 한 마디를 하면 남자아이가 매번 되묻는 것이다. 어절 하나마다 말을 자르는 대화방식은 그다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테다.
"그래서 제나한테 책을 빌려줬는데─" "제나가 뭐야?" "사람 이름." "빌려주는 게 왜 싫어?" "그 애는 물건을 험하게 쓰거든. 지난번에도 책 빌려줬다가 끄트머리를 찢어놓고 돌려줬단 말이야." "찢어지는 거 왜 싫은데? 난 저거 찢어, 가끔. 재밌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가리키는 것은 방의 한쪽 구석, 칙칙하게 덧발라진 회색빛 벽지였다. 벽면은 상태가 엉망이었다. 넓은 면 하나가 다 해지고 떨어져 벽면 일부가 드러나 보였다. 그 짓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닌지 뜯어진 벽지를 덧댄 장수가 열 겹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소녀의 표정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그는 말을 고르려다 그만두었다. 무어라 설명을 해 줘야 하겠지만 귀찮다는 기색이다. 한창 예민할 나이에 자꾸만 귀찮게 구는 정상도 아닌 어린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엔 피곤하기도 하고. 가끔 들러 이야기 정도는 나눠 주지만 그는 보모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 싫어.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게 다 다르거든." "그렇구나. 승현이는 방 좋아해?" "……아니."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짤막하게 답한 소녀의 시선이 사방을 향했다. 방에는 입구 뿐이다. 그마저도 평상시엔 굳게 잠겨 있다. 창문이 없어 그 사실을 의식할라치면 매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승현이 아무리 그래도 창문 하나조차 없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며 바꾸어 달라 부탁했을 때는 기각 당했고, 자신이 방문할 때마다 불편해서 싫다고 사정을 하니 그제야 알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여닫는 건 불가능할 거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수긍했다. 이 녀석의 방에 직접 공사를 하는 건 불안하니 잠깐 다른 방에 빼놓은 다음에 창문을 만들 거라 하던데, 저건 다음주에 무슨 일 있는지 알기나 할지 모르겠다.
"나는 좋아. 여기에서 저기까지, 응."
그런 것도 모르고 남아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영락없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자랑하는 투였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랬다. 이야기는 늘 두서 없이 제 말만 하는 형식이고, 실 연령에 비해 수준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상식은 전무하고 나이가 차 가면서도 그동안 제대로 된 대화 상대 하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처음부터 말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는 점과, 늦게나마 시작한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게 다행일까. 저가 저것 만나는 일을 허락한 것도 그렇고, 그래도 사람이라고 완전히 짐승 키우듯 할 생각은 없었나 보지. …아니, 차라리 집에서 기르는 개가 저것보다는 더 호사를 누릴 거다. 그 생각을 하려니 승현은 문득 제 처지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 상대로 아는 척하는 게 뭐 좋다고 이러고 있담. "갈게." 기분이 영 나빠져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게 끝나야 했을 텐데, 내내 평온하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싸늘히 가라앉은 건 그때였다. 승현이 흠칫 걸음을 돌리려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았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손끝, 아주 미미할 정도의 손짓. 장갑 낀 작은 손이 테이블 위를 짚은 제 손과 얼핏 닿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지 그것은 저조차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순간 낮아진 목소리가 으르렁거린다.
"누굴 죽이려고……."
일갈하며 테이블 아래를 걷어차니 손이 떨어졌다. 아, 가뜩이나 나쁘던 기분이 더 상했다. 그는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 할 말을 찾았지만, 한소리 듣기가 무섭게 침울해진 얼굴을 보니 김이 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제 심기를 거스른다면 '다음'이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아챈 것이리라. 이상하게도 그 꼴을 보니 꼬여가던 심사가 풀어지는 듯했다.
"미안." "됐어. 화난 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저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우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량이다. 적선이라 해도 맞을 테다. 승현은 자신이 차버린 테이블을 다시 끌어와 돌려놓고, 그 위에 손 얹어 가벼이 몸을 숙인다.
"이건 비밀인데, 다음주에 널 잠깐 옮길 거야. 그때 나갔다 오자."
뭐, 그래 봤자 정원 흙이나 밟으면 다행이겠지만. 원래 일탈은 되든 말든 재밌는 것이라지 않나. 그는 드물게 실소가 아닌 얼굴로 다정하게 웃음지었다.
푸른 하늘과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도로 위를, 아이들은 만면에 웃음을 띈 채로 달린다. 아이들의 손에는 사과나 참외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뒤를 수염난 중년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는다. 그 가운데 있는 사내아이... 이스마엘 도련님. 나의 변치 않는 친구.
"제이슨! 어서 문 열어!"
[뭐 하시는겁니까 도련님. 그거 돌려주고 오세요.]
"에에-!?"
[지금 시대에 와서 농작물 서리라니, 그거 범죄에요 범죄. 자, 사과하면 봐주실거라구요.]
저 소년과 대화하고 있는 상대는, 하얀색에 보라색 패턴이 인상적인 지프 차다. 그래! 바로 나, "J"! 도련님은 제이슨이라 부르지만, 사실 나는 "세븐스"라 불리는 인공지능의 일종이다. 지금 시대는 많은 일이 AI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는 AI 시대. 나는 도련님의 아버지가 특별히 제작한, 초 고성능 AI가 탑재된 높은 스펙의 머신이다.
어이쿠, 더 설명해주고 싶지만 도련님이 아무래도 많이 급한 모양이군. 나는 차의 문을 열어 도련님을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다음엔 안 도와드릴거에요.]라고 말하는 의 차 시트를, 도련님은 삐져버린건지 콩콩 찬다. 그래도 딱히 아프진 않은데 말이지. 천천히 액셀을 밟아서 도로 위로 나선다. [안전 벨트를 매셔야죠.] 내가 말하자, 도련님은 궁시렁대며 벨트를 차 주셨다.
"제이슨, 다음에도 그러면 타이어에 구멍을 뚫어 버릴거야."
[그건 좀 봐주시죠! 하나에 얼마나 든다고 생각하시는거에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벙글 웃는 도련님을 태운 채로, 난 우리들의 집인 이스마엘 저택으로 향했다. 이야, 오늘도 정말 멋진 하루로군.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고, 이대로 갈 수 있기를...
이스마엘: 239 꽃다발 선물에 대한 생각은? 꽃이다! 홀로그램 꽃이 아니네? 냄새도 좋다! 어떻게 보관하지? 오래 보존하는 방법은 없나?
절대 연애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식부족 직진스마엘..이지? 꽃은 꽃으로 받아들이는..
199 캐릭터는 어떤 타입에게 약해지나요? 인간은 모두 멋진 존재입니다 하는.. 맑눈광이 가진다면 가장 무섭다고 알려진 인류에 대한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에게 약해짐........
161 거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요? 머리가 정말 반듯하게 잘렸다! 마음에 든다!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익숙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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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에게 드리는 오늘의 캐해질문!
1.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을 때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가?」 "약속시간보다 일찍 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모범적인 행동이니까요! 주변을 둘러볼까 합니다!"
2.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아직 아무도 모른다면?」 "솔직하게 말할 겁니다. 당장 미움받더라도 한 순간에 팀의 궤멸로 이어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3.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해하고자 하는 걸 안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필시 내분을 일으키려는 겁니다. 이상향을 저지하는 사냥꾼의 행태입니다, 그 무리가, 그 악마들이!! 두터운 신뢰의 벽을 무너뜨리고 그 틈새를 비집어 추악한 작태를 보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 이상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단 말이다, 이 간악한 마귀야!!"
문을 열어드리자 도련님은 길게 기지개를 펴시더니, 저벅저벅 걸어서 마트 안으로 들어가셨다. 정말이지, 이상한 군것질에 돈을 안 쓰시면 좋을텐데. 잠시 기다리고 있자... 왠지 복면을 쓴 3사람이 불온한 걸음을 마트 쪽으로 옮기는 걸 볼 수 있었다. 난 라디오를 튼 채 잠시 쉬고 있었고... 녀석들이 뭘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엎드려! 강도다!"
[뭐!?]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 가게 안을 살핀다. 복면을 쓴 놈들이 총을 든 채로 도련님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게, 내가 있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가게 안으로 이대로 들이박는다! 라고 하고 싶었지만, AI가 그런 짓 하면 바로 삭제행이라고. 정말이지...! 재빨리 전화를 연결한 나는 경찰에게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콰앙!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형체가 마트를 덮쳐 거대한 흙먼지가 일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재빨리 투시 모드로 카메라를 돌려 살펴보자...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로봇인가!? 인공지능을 이용한 테러용 병기!? 집 한채만한 로봇은 마트를 부수며 사람을 찾는듯한 행동을 취했고, 그 끝에는... 이스마엘 도련님이 있었다.
[도련님이 목적인가. 그렇겐 안 된다!]
도련님을 향해 뻗어진 손을 향해 재빨리 달려, 몸통 박치기로 시간을 번다. [어서 타세요!] 라고 외치자 도련님은 허겁지겁 달려, 차 안에 탑승하고 벨트를 맸다.
퍼-엉!! 폭발이 일어나며, 나와 도련님은 차째로 데굴데굴 구르며 날아갔다. 미사일이라고!? 저런 병기를 탑재하고 있다니, 대체 뭐 하는 로봇이야! 전쟁에나 쓸 법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어쩌라는 건데!
이런 나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저 납치범 로봇은 봐주지 않고 조금조금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아까의 공격으로 타이어 축이 빠진건지 앞으로 나가질 못하겠어!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지만, 어리석은 내 몸뚱이는 조금도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 때, 거대 로봇이 뭔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븐스...>
"뭐, 뭐라고?"
<세븐스는, 받아가겠다!>
거대 로봇이 양손으로 나를 들어올려서, 힘을 주기 시작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격통이 느껴진다, 몸체의 외장이 조금씩 찌그러진다! [우와아앗!!]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움직이려 해보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길. 놈의 목적은 내 AI인가!? 하다못해 도련님만이라도...
그 때, 도련님이 차고 있던 팬던트가 빛나기 시작한다. "뭐, 뭐지?" 그 팬던트를 열어보자, 도련님의 아버지, 즉 큰 도련님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들아, 이 메세지를 듣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적이 습격해 왔다는 뜻이 분명하겠지. 이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도록 하마. 하지만, 그 후에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건 수많은 무서운 싸움일거다. 두렵다면, 제이슨의 AI를 그냥 넘겨주고 도망쳐도 된단다... 하지만 싸우겠다면...'
날 그냥 넘겨줘!? 이런 인간도 아닌 녀석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뭐, 그렇게 하라면 난 그렇게 할거다. 나에게 있어 날 태어나게 해주고, 나와 계속 함께 해준 도련님의 가문은 일생의 은인이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난... 당연히 싸울거야!"
[도련님?]
"제이슨은 내 친구야... 난... 제이슨을 지키고 싶어!"
[...젠장... 좋습니다! 그게 뭔지 몰라도, 해봅시다!]
그리고, 도련님은 팬던트를 높이 치켜든채로 크게 외쳤다. "체인지! Let's Bomber-!!"
큰 소리로 도련님이 외치자, 땅에서 굉음을 내며 거대한 머신이 나타났다! 지반을 무너뜨리며 나타난 그것은, 거대한 드릴이 달린 탱크! 탱크는 그대로 돌진해 로봇에게 부딫혀, 로봇의 자세를 무너뜨려 내가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때, 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군! 이걸 쓰는건가!
[체에에에에에에에인지-!!]
나의 구호에 맞춰서, 드릴 탱크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변하기 시작했다! 동체 부분이 아래로 내려가고, 포 부분이 어깨로 가며... 그렇게, 인간형의 구조로 탱크가 변형했다. 하지만 텅 비어있는 가슴 부분을 보고, 난 있는 힘껏 뛰어올라, 그 가슴 부분에 꼭 맞는 형태로 스스로 변형했고- 마치 원래 이곳에 있었어야 했다는 듯이 하나로 합쳐지자, 그 위로 머리가 솟아나고, 페이스 가드가 장착되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
[만월에 우는 백랑..."J-BOMBER"-!!]
쿠우웅-!! 굉음과 함께 내려앉은 그것은, 백은의 갑옷을 두른 거인. 빛나는 외장과 당당해 보이는 풍채. 양 어깨에 달린 대포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가슴의 드릴이 변형해 만들어진 늑대 머리에선 우렁찬 포효가 뿜어져 나왔다. 굉장한 힘이 느껴져... 이게 정말로 나인가? 당황하고 있을 새도 없이, 적의 로봇이 순식간에 달려왔다, 위험해!
"제이 봄버!! 액셀 해머야!!"
[...! 좋았어! 액셀 해머-!!]
그렇게 외치자, 등 쪽이 열리며 거대한 철구와 쇠사슬이 사출되어 나의 손에 들렸다. 그렇군, 이것이 내 무기인가! 원심력을 활용해 있는 힘껏 해머를 돌리자, 철구 부분에서 부스터가 분출되며 회전을 시작한다. 이거라면 할 수 있어! 있는 힘껏 로봇에게 해머를 던지자, 녀석은 받아내지도 못하고 가슴에 맞으며 쓰러졌다!
"지금이 찬스야!" [아아!]
액셀 해머를 휘둘러 놈에게 휘감아 버린 뒤, 사슬을 양손으로 잡고 붕붕 휘두른다. 녀석은 버티지 못하고 나의 힘에 휘둘려 붕붕 돌아가다가, 이윽고 내던진 해머와 함께 하늘로 날아갔다! 그 때, 나의 운전석 부분에 도련님이 팬던트를 대자-나의 양 어깨의 포에 힘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필살... "초전하광자포"-!!]
엄청난 발사음과 함께, 양 어깨에서 발사된 광선은 그대로 공중의 로봇에게 적중하고- 그대로, 로봇은 빛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역시 폭발하는거였나? 하마터면, 도련님이 위험할 뻔 했는걸... "해냈어 제이슨...!" [해냈다고, 도련님!] 자세한 일은 모르겠지만, 눈 앞의 적을 물리치자 잘 모르겠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구만, 적들이 계속 나와 도련님을 노리고 처들어온다 이건가?
그렇다면... 전부 해치워 주겠어! 도련님과 나... 그리고 이 '제이 탱크'가 있는한... 우리들은, 무적이니까!!
「비능력자 보호 법령은 완전히 미친 법안이다. 당장 문 밖에만 나가도 사람들 얼굴에는 그림자와 불신으로 가득하고 서로 눈치들만 보고있다. 세계연합평화기구라는 것들이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꼴이다. 새로운 군대라는 가디언즈는 또 어떻고? 세븐스나 비능력자 할 것 없이 반기를 드는 사람이라면 닥치는대로 신나게 죽이고있다. 그냥 공식적으로 살인 면허가 발급 된 마피아나 다름이 없다. 거기다 놈들은 전원 세븐스라고! 세븐스가 지금 사회의 주된 골칫거리는 맞다지만, 이대로는 이 하나 잡자고 집을 태우는 거 아닌가. 설마 U.P.G는 정말 그걸 원하고 있단 말인가? 다들 제정신이 아닌게 틀림 없어. 그렇다 해도 생명연구소 밥을 먹고 있는 엔지니어일 뿐인 내가 이런 사회에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내가 살아가는 일생 매일매일에 회의적인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얼마 전 통신망을 우회하고 있는 사설 딥 네트워크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다. '분열 된 사회의 화합에 대해 밤새 열띈 토론을 나눌 깨어있는 혁명가들을 모집합니다.' 라는 내용이다. 지금 세상에서 이정도의 레지스탕스의 모집이나 활동 정도는 이제 흔한 것이 됐다. 그러나 이 글의 정말 흥미로운 건 조건이다. '일정 학위 이상 취득자 혹은 학업 종사자들만' 구성원에 끼워준다는 거다.
이해가 안 된다. 하얀 가운입고 뻐길 줄이나 아는 양반들끼리 대체 무슨 저항 활동을 한다고? 미리 적어두지만 나는 레지스탕스같은 건 딱 질색이다. 지금의 세상이 마음에 안 드는건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목숨을 국가에 헌납하는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마리는 쥬데카가 다가와 건네는 음료를 받았다.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저 같이 가자고 기다렸을 뿐인데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쥬데카는 친절하고 다정한 편인 것 같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마리는 쥬데카가 준 음료를 손에 들고 쥬데카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쥬데카와 대화하면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뭔가 익숙하다고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역시 변성기가 온 이후의 쥬데카와 기억 속의 쥬드를 일치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렇구나. 나도 동물로 변신하면 감각에 예민해져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애."
마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럼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있어?"
나름 동료로서 묻는 질문들이다. 전투 방식에 대해 알아두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나도 온 지 한 달도 안 됐으니까 선배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야."
마리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지만 쥬데카가 웃는 모습은 미음에 들었기에 마리의 표정도 조금 더 부드러워질 것이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나는 변화는 아니었겠지만.
어느새 휴게실에 도착했고 마리는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쥬데카를 살피다가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면 캔을 따서 목을 축였을 것이었다. 밖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혹시 누군가 공격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나름 트라우마 같은 것이었다.
대화가 능력 쪽으로 넘어간 이후, 대답을 나름 성실히 하고 있었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깔끔히 정리해서 들려준 한마디에 이해가 탁 트였다. 그래. 고양이로 변했는데 다른 동물이라고 못 변할까. 앞으로 있을 임무를 생각한다면 한 번쯤 나올 법한 제안이긴 했다.
"그런 거 였나."
레레시아는 알겠다는 의미로 중얼거리고 곧바로 대답을 이어갔다. 일부러 꺼내준 말이 무색하게도 레레시아에겐 오래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다룰 수 있냐 없냐로 따지자면 가능하긴 해. 네가 뿜어낸 독에 내 독을 섞으면 그건 내 제어 안에 들어오게 될 테니까. 이미 주입한 독은 내가 그 적에게 내 독을 씌우면 합쳐지겠지."
마리의 얘기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긴 했으나 빈틈이 여럿 있었다. 그것들 중 몇 개를 예시로 들며 나름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헌데 굳이 외부에서 독을 조달하지 않아도 나는 거의 무한하게, 여러 형태로 독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내 독에 완전 면역이지만 넌 아니야. 뱀독 같은 건 장난 수준일 독이 네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그리고 네가 만든 독에 되려 네가 당할 수도 있으니. 독을 쓰는 건 추천하지 않아. 나처럼 선택지가 그것 밖에 없는게 아니고서야."
거기까지만 말하려던 레레시아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말을 조금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는 말과 함께.
"네가 누군가와 합을 맞추려면 물리적 위력, 혹은 방어적인 측면으로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좋지 않을까. 거기에 새로운 무기를 이용하기에 따라 고려의 폭은 더 넓어질 거라고 생각해."
이쯤 하면 충분할까. 말을 마무리하고 마리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로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건넨 음료를 받으며 잘 마시겠다고 이야기하는 마리에게, 너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능력에 이어서, 주로 쓰는 무기가 있냐는 질문에는 으음... 하고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떠려나요, 딱 손에 맞는 무기는 찾지 못한 것 같아요. 톤파 정도는 열심히 쓰는 법을 배웠으니... 톤파로 할까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약간 농담하는 듯한 어투로 너는 말꼬리를 올렸다. 이런 무기도 쓸 수는 있다~ 정도의 느낌이었겠지. 따지자면 무기를 가리지는 않았다, 어떤 무기가 가장 잘 어울릴까 하는 생각으로 많이 써봤고, 그만큼 연습도 했었으니까.
"마리는 어떤가요? 주로 쓰는 무기가 있어요?"
동물에게는 몸 자체가 무기인 경우가 많으니,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물로 변신하지 못했을 때 무기를 쓸 수도 있겠다 싶어 묻는다.
"그래도 시간이란 건 무시할 게 못 되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보다야 훨씬 나을거라 생각해요."
휴게실에 도착해 소파에 앉는 그녀를 보곤,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는 너였다. 그리고 그녀가 음료를 마시면, 그제서야 너도 캔을 따서 음료를 한 모금 넘겼겠지. 차가운 음료가 언제나 열감을 띈 식도를 식히며 넘어간다.
"...실례지만, 마리. 에델바이스에는 왜 온건가요?"
음료를 넘기고 잠시 동안 침묵하던 너는, 그 일이 있었던 뒤의 그녀의 모습이 어땠을지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으음…. 내가 무기를 쓴다는 건 한 번도 생각 못했었어. 동물로 변신해서 공격한다고만 생각해서. 뭐라도 배워두는 게 좋을까?”
세븐스 능력이라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동물로 변신하지 못할 때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탓이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해본 적도 이전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그런가? 그럼 리오는 나보다 3년을 더 살았으니 리오한테도 많이 배워야겠다.”
마리는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는 꽤 시원해서 좋았다. 어느순간부터 이 지하기지는 마리에게 편안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공간을 제공해주었으니 마리도 에델바이스를 위해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침목하던 쥬데카가 던지는 질문에 마리는 응? 하고 묻더니 쉽게 대답했다.
“에델바이스는 능력자하고 비능력자하고의 화합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목적이 나랑 맞는 것 같아서 입단했어. 리오는?”
설명이 부족했나. 그녀의 말을 되내이는 마리를 보고 이걸 어떻게 더 설명해야 하나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천천히 굴리며, 전술적인 얘기를 하는 마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덩치 큰 동물로 변해서 탱킹이라. 보기보다 전투에 적극적인지, 아니면 그것이 가장 유용하다고 여겼는지. 등받이에 걸친 팔을 내리며 자세를 바꾼 레레시아가 말했다.
"탱킹을 할 거라면 방어구는 포기하고 그만큼의 출력을 변신 쪽으로 바꿔도 나쁘지 않을 걸. 어정쩡한 맹수 말고 확실히 치명적인 무언가를 시도해보면 어때. 네 능력, 꼭 실제 동물로만 변신할 수 있는 거라면, 보검이 그 한계치를 뚫어줄 지도 몰라. 그러면 현존하지 않는 전설이나 신화 속 마수를 구현하게 될 수도 있고, 만약 그렇게 해서 시도가 성공적이 된다면 네가 모두의 보조가 될 수도 있겠지."
지금까지의 대화로 생각해보건데, 외형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마리라면 보검으로 방어구를 하는 것보다 능력의 질을 높이는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것 역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었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들을지는 마리에게 맡길 뿐이다.
"내가 모두의 능력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은 사적인 영역이라 그거까지 대답해주기는 곤란한데."
누구와 합을 맞추면 좋겠는가. 잠시 마리의 질문 의도가 헷갈려 그렇게 답을 했다. 그랬다가 재차 질문이 돌아오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을 듯 해, 앞서 말했다.
"나는 어쩔거냐 묻는거면, 난 누구와도 합을 맞출 생각이 없어. 내 독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으니. 너도 내가 능력을 전개하고 있을 땐 거리를 두는게 좋아. 애먼 독에 다치고 싶지 않으면."
그쯤 떠들고나니 슬슬 몸이 피곤해진다. 레레시아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했다. 겨우 잠들 수 있는 컨디션이 된 건가. 타이밍을 놓칠새라,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겉옷 주머니에 양손을 푹 꽂고 마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겨우 잠들 거 같으니 난 돌아가련다. 넌?"
지금 간다면 동행이 될 것이고, 아니라면 가는 길도 혼자가 되겠지. 예의상 던진 물음에 감정은 전혀 없었다.
톤파를 잘 모르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너는 손짓을 섞어가며 톤파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쓰는지를 간단히 설명했다. 상대방을 제압하기보다는 제 몸을 지키는 데 더 중요하게 쓰이는 것, 지난번엔 무심코 검을 집어들었지만.
"무기가 필요 없다면 좋은 일이라곤 생각하지만... 뭔가 배워두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동물의 무기라는 건 결국 신체의 일부니까요."
무기가 망가지면 상처를 입는 게 가장 큰 흠이 아닐까, 쉽게 망가질 것 같지는 않지만서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만약 그녀가 어떤 무기를 쓰는 게 어울릴지를 조금 떠올려 본다.
"하하... 뭔가 가르쳐줄 게 있다면 그렇게 할게요."
궁금한 걸 물어보면 적어도 아는 수준에서는 대답해 주겠다면서 웃은 너는, 캔에 담긴 음료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좁은 입구 너머로 그림자 때문에 검게 보이는 음료가 찰랑인다. 그러다 에델바이스에 입단한 이유를 그녀가 말해 주자, 그런 일을 당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하며 조금 감탄 섞인 표정을 짓다가 반대로 질문이 돌아오는 것에 조금 곤란한 듯이 미소지었다.
"저는... 음, 도망쳐왔다고 해야 할까요. 절 받아준 곳이 에델바이스 뿐이었으니까요."
어째서 에델바이스에 왔느냐, 그건 에델바이스가 날 받아줬기 때문이다. 비겁한 답이었다. 어째서 에델바이스에게 널 받아달라고 청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야할 텐데, 너는 그 말 대신 조금 말장난하듯(어투는 장난스럽지 않았지만) 질문을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비겁하게.
"마리는... 방관하는 비능력자들과, 같은 세븐스면서 우릴 없애려 드는 가디언즈가 싫지 않은가요?"
//밥먹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이제는 소화시킬 겸 가볍게 운동을 하러 나가보겠습니다...
마리는 쥬데카가 설명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들으며 톤파에 대해 이해했다. 그런 무기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했다.
“음, 리오 생각에는 어떤 무기가 좋을 것 같아?”
벌써부터 물어보는 게 잔뜩 생겼다. 톤파에 대해서도 듣고 이번에는 무기 추천까지 묻고 있으니까 말이다. 상대방이 곤란하다고 말할 때까지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마리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어디서 도망쳐 왔는데? 쫓기는 중이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쥬데카의 인상은 선한 느낌이 있어서—마리의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쫓기고 있다는 것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긴 쫓긴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지금 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것도 쫓기는 입장이기는 하기에.
“으음, 밉지…. 밉지만…. 있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내가 세븐스가 아니라 비능력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럼 나도 그들하고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을까? 굳이 목숨을 걸고 능력자들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 거 같애.”
지금 사회라는 게 그랬다. 세븐스를 도와준다는 것은 비능력자들의 경우에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마리는 시선을 내리깔며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계속 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내가 세븐스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차별을 반대하다가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거야. 가디언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운이 나빴다면 가디언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부모님이 즉결처형 당한 뒤 가디언즈로 끌려가는 자신을 구해준 레지스탕스가 아니었다면, 아니면 부모님을 인질로 잡고 가디언즈로 활동하라고 협박을 받았다면. 과연 자신은 이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마리는 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으음…. 그러니까, 체스를 할 때 상대편 체스 말이 내 체스 말을 잡아먹었다고 해서 그 체스 말이 나쁘다, 문제가 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문제는 체스 말이 아니라 체스 말 끼리 싸우게 하는 체스라는 그 게임 자체가 문제인 거니까. 그러니까 판 자체를 부수기 위해서 온 거야. 그게 반란군(레지스탕스)이잖아.”
비능력자들과 가디언즈가 싫지 않냐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이 길고 길게 나왔다. 어쩌다보니 다시금 왜 에델바이스에 들어왔냐는 질문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마리는 혹시 제 말이 길어져서 지루하진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쥬데카를 힐긋 바라봤다. 그리곤 이내 말을 마무리했다.
“나는, 만약 내가 죽어서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죽겠다는 각오로 왔어.”
“아하, 리오는 긍정적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걸 예상하고 한 말이였는데.”
조금 감탄사 같은 짤막한 웃음, 그리고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 자신이 당신의 처지에 처했더라면 아마 부대 전체의 능력에 의심이 가질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하자 있는 인물도 끼워주는 곳이라니, 긍정적으로 보자면 친화적이다만, 경계를 좀 해본다면 이런 인물을 은퇴시켜주지도 않다니, 의심이 갈 만 하다. 뭐, 본인은 자발적으로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만.
“괜찮아. 앞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어디야.”
운이 좋아서 색만 안 보이는 것이지, 그때 일이 더 꼬였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도 지금은 기분이 좋은지라, 평소대로라면 느꼈을 찝찝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역량은 그냥 남들만큼만 있지. 상황도 많이 타는 능력이고.”
겸손하려는게 아니고 진짜다. 전투 시 물감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이면 달리 할수 있는게 없다. 푸른색을 또 찾아보려 해도 그의 눈엔 비슷한 농담이면 다 거기서 거기. 가벼운 투로 답하고선 당신이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걸 가만 듣는다.
“대단하네. 감이 좋은건 정말 부러워.”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예상할수 있다면 좌절하지도 않는다고.”
짤막한 반응, 당신을 가만 보면 옛 친구를 닮은 것도 같다. 당신을 이루는 회색의 조합을 보자하면 그 친구의 색을 조금 닮은 것도 같고. 아니다, 안 닮았다. 그 애가 조금 더 짙었어. 과거 회상은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가벼움이였다, 찰나도 안 될 짧은 텀 후에 옅어지는 추억. 당신의 경험담을 듣고 있는 표정은 조금 슬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더 듣고 싶은데, 들려줄수 있어?”
남의 과거를 캐묻는건 예의 없는 짓이다, 그러나 되도록 덤덤한 표정을 지으면 연민이라 퉁칠수 있다. 괜한 궁금증은 어디에서 온 걸까.
조준하고 손가락을 당기기만 하면, 사용자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상관없이 충분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 그렇지만 역시 숙련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근력도, 거리와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감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는 직접 손에 쥐거나, 자신의 신체와 가장 가까운, 마치 제 몸처럼 쓸 수 있는 무기가 좋겠지. 그게 아니라면...음.
"그건... 말하기가 조금 어렵네요, 미안해요. 마음을 좀 더 정리하고 말씀드릴게요."
가디언즈에서, 라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것도 배신해서 도망쳐왔다는 걸, 가디언즈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도망쳐왔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어서였고, 그걸 말하기가 두려웠다. 너는 또 비겁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는 한, 아마 절 찾아내지는 못하겠죠. 어쩌면 한참 전에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저는 그렇게까지 힘을 들여서 쫓을 만큼 중요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마치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실은 네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누렸던 특권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그리운 게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네요, 마리의 말을 듣다 보니, 저 역시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만약 그렇게 살아가다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 세븐스였다면, 나는 갈등했을까,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너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묘하게 우울해지는 감정을 애써 떨쳐냈다. 그리고 그녀가 '운이 나빴다면' 가디언즈에 있었을거라는 이야기를 하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네요, 마리는."
감상은 짧은 말 두 마디. 조금 피곤한 듯, 정말 대단한 네 앞에 있는 나는 이렇게 초라하구나, 하고. 그렇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너는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자신의 능력을 이야기해 줬다,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부분, 즉 약점까지도. 이건 신뢰일까, 아니면 그저 별 이유 없는 이야기였을까. 적어도 너는 조금의 신뢰라고 생각했으니, 신뢰에는 신뢰로 답을 한 것 뿐이라고. 그런 느낌을 실어 이야기했다.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팀원들이 함께 있는 거라고도... 생각하니까요."
그게 팀이라고 너는 생각했다. 혼자서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무리짓지 않겠지. 적어도 너는, 그리고 네가 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이라도 둘, 셋이라면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자신은 그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 좋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뭐든지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 마찬가지로 단점이 두드러진다고 한다면 장점 역시 충분히 두드러질 수 있다. 너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하고는, 네 경험에 대해 계속해서 묻는 그의 눈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더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갑자기 선을 긋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신과 같은 레지스탕스와 맞붙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폭격과도 같은 공격 속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죽어가는 모습과 그 공격의 충격을 피부가 찢어질 듯이 느꼈다는 걸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용기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짓밟는 자리에, 짓밟는 사람들 중 하나로 서 있었다는 걸.
할 수 있다면 계속한다. 이스마엘에게 있어 놀라운 일이다. 이런 문화생활이 계속된다는 것도, 세븐스가 그 문화생활의 주축이 된다는 점도. 세븐스라는 존재는 원래 탄압받고 사는 것이 정상이지 않던가! 이렇게 세븐스가 가디언즈의 길을 걷지 않은 채, 자신을 드러내고 환호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상향의 첫걸음이나 마찬가지다.
"Rice cake? 아! Reiskuchen!"
라이스 케이크, 그건 안다. Reiskuchen! 그걸 떡이나 모찌라고도 하는 건가? 신기하다! 신체가 떡처럼 변한다니, 오늘 새로 알게 된 사실만치 신기한 세븐스다. 떡 하나? 고개를 기울였는지 노이즈가 움직인다.
"정말 받아도 됩니까..?"
손에서 떠오른 떡. 이스마엘은 제법 놀랐는지 작은 탄성을 뱉었다. 신기하다. 세븐스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왜라는 질문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듯, 너는 당연하게 이유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말문은 그대로 막혔다. 죽지 말아야 한다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너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무슨 이유였을까?
너는 그녀의 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세븐스였기 때문에 세븐스의 차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건 세븐스 전체의 신장이라는 목적 앞에, 그들의 딸이 살아갈 세상, 그러니까 결국 딸이 차별받지 않았으면 하는 갈망이 있었을 터, 만약, 만약에, 그들에게 모든 걸 버리고 떠나 차별 없이 셋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러니까 그런 말은 안 하는게 좋겠어요, 살아서 화합하는 모습을 봐야죠."
각오의 표현이라면 말이 조금 다르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기에 너는 굳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니, 마리에게는 스턴건이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작은 건 숨기기에 좋으니 방심을 유도할 수 있고, 봉 형태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쓸 때 유용하겠죠."
저지력은 뛰어나지만, 살상력은 떨어지는. 그러니까... 강하지만 상냥함이 담긴 무기라고나 할까. 스턴건에 쓰러지는 사람을 생각하면 상냥하다는 말에 조금 의문이 생기기는 했지만 인체란 가벼운 전류에도 경련하는 법, 결국 목숨을 빼앗지는 않으니 상냥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너는 생각하며 웃었다.
아스텔을 보내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현재 특정 지점에서 죄없는 세븐스 다수가 붙잡혔고 그 세븐스 다수는 조만간에 열차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듣자하니 붙잡은 시기는 꽤 이전인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송을 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로벨리아로서는 이송되게 둘 순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대원들을 파견해서 다 구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로벨리아는 잠시 작전을 떠올렸다. 이런 정보가 쉽게 세여나오는 것은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첫번째는 아스텔이 너무나 뛰어나서 이런 기밀 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올 수 있다거나, 혹은 두번째는 일부러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던가. 첫번째라면 역으로 기습을 할 수 있으나 두번째는 오히려 기습을 당할 수도 있는만큼 그 움직임을 신중하게 정해야만 했다.
"좋아. 정했어."
노트북을 바라보며 여러 방향으로 작전을 짜던 로벨리아는 마침내 계획을 마치고 쭈욱 기지개를 켰다. 이어 일단 바람을 쐬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하 1층에 있는 자신의 방 밖으로 나와 계단을 통해 슈퍼로 나왔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 노을이 지는 것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걷는 와중, 엔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좋은 저녁이야. 엔. 뭐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딱히 의도는 없었다. 그냥 길을 가다가 발견한 것이 그녀였으니까. 가볍게 묻기 위함이었다.
그저 그가 생각하기에 알아 마땅한 것이었기에 말해준것 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어째 신뢰가 섞여있는듯한 당신의 답이 싫진 않은듯 하다. 당연할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의심받아 좋아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그게 취향이면 몰라도. 요점은, 아마 당신도 의심받는걸 탐탁치 않아하겠지. 그런 생각이 든 그는 자신이 꼬인 걸까, 조금 의문이 드는 듯 하다.
“네 말도 맞지. 발목 잡을까 조금 떨려도 팀이 있으면 괜히 든든하기도 하고.”
가벼운 말투, 진실성이 없어보인다. 말의 끄트머리에 연한 웃음소리가 섞여 나온다. 생태계에서도 약한 생물들은 무리지어 다니지 않던가. 그렇게 생존을 거듭해왔고. 팀의 존재의의에 대한건 이런 이과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혼자는 외로우니까. 그러니 좋아하는 것이다. 동시에 혼자서는 할수 있는게 별거 없다는 것에 조금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가도 사라진다.
“그래? 그런 대답은 조금 의심스럽네.”
당신의 대답후, 자신의 눈을 잠시 바라보는 당신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리고서 들려오는 당신의 거절. 눈썹을 가늘게 치켜뜨고선 툭 던지듯 뱉는 말.
“트라우마 때문에 말 못하는 거라면 미안.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받아주는 곳이 제한되어 있잖아?”
이곳 같은 레지스탕스나, 가디언즈 같은. 굳이 입으로 말하진 않지만 말엔 뉘앙스가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당신이 스파이일 거라는 의심? 사실 별로 안 든다. 대장은 멍청한 인물이 아닐 터.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일 뿐, 의심하는 척은 그것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이다. 무표정은 담담하다가도, 곧이어 눈이 조금 가늘어지며 표정이 싸늘해진다.
“긁어 부스럼 만들긴 미안하지만, 나도 내 안위에 대한 걱정은 있어.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네.”
미안함은 안 느껴지는 말이다 (그보다 지가 시작해놓고 지 입으로 화내지 말라고 말하는건 뭔심보일까). 당신을 내려다보면 보이는 것은 연한 회색의 머리통. 잠시 침묵 후, 표정은 풀어지고 희미하게 미소가 보인다. 그 미소는 비소였을까.
“됐어. 누구나 숨기고 싶은 과거는 있는 법이잖아. 괜한 소릴 했네.”
호기심이 사라진 것일까, 태도가 홱 바뀌어 버린다. 아까 자신을 따라 음료수를 벌컥 들이마시던 당신을 덧그려보니 조금 미안해진다. 아주 조금이지만. 이제 슬슬 들어가야 할 때가 된것 같아, 당신의 말에 뒤늦게 반응을 해본다.
당신이 엔을 부르자, 마켓의 간판 위에 걸터 앉아있던 그녀가 고개를 움직여 당신의 존재를 인지한다. 이윽고 그녀는 "대장." 하고 소리내며 땅으로 몸을 떨어트렸다. 꽤 높이가 있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다. 착지한 이후에도 단지 옷을 툭툭 털뿐으로 당신의 앞으로 금방 다가왔다.
"엔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당신의 키가 조금 더 높기 때문에, 고개를 올려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그런 그녀가 아어서 "이 시간의 하늘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첨언하고는, 냄새의 근원을 추적하듯양 바람소리를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대장은 엔에게 뭐든지 물어봐도 된다."
당신은 그저 가볍게 인사한 것 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방금 그것이 본격적인 설문같은 거라고 받아들여졌던 모양인지. 왠지 기다리는 눈을 하고서 당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녀다.
쥬데카를 보며 깜빡이던 눈동자는 이내 그가 부모님을 언급하자 이내 흐릿해지며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동자였다. 아니면 부모님이 살아계셨던 그 시절, 차별받았지만 괴로운 일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행복한 일들도 많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행복이라는 거 잘 모르겠는 걸. 누군가 희생을 해야한다면 가진 게 없는 나같은 사람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게 하는 말은 그 전에 했던 말과는 달리 조금 웅얼웅얼한 목소리로 나왔을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 있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자신은 더이상 슬퍼해줄 사람이 없으니 조금 더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이들이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었고.
이내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 같아 고개를 털듯이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거니까.”
마리는 괜찮다는 듯 쥬데카를 보면서 작게 웃었을 것이었다. 이내 목이 탔는지 음료수를 다 마셔 비웠을 것이다.
그 저택을 불태우고 날 가로막던 새장을 부수고 나온 후 어느덧 시간이 적절히 지났다. 화재 보험도, 생명 보험도 들어져 있었는지 유일한 상속자인 내게 그 돈들은 넘어왔다. 수사 기관도 내가 세븐스기에 네가 죽인 것 아니냐?했으나.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찾을까. 사이코메트리라 불리는 세븐스도 보지 못할 정도로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텐데.
"...그럼 뭘 해볼까"
돈은 많다. 단적으로 내가 지낼 원룸을 구매하고 필요 물품을 사고도 돈이 흘러넘칠 정도로. 마약? 정부에서 그런 것을 허락해둘리 없지. 성적인 것...이것도 의미없군. 여차하면 내가 병에 걸릴테니까 넘기자. 게임. ...나는 게임에는 재능이 1도 없는 모양이다. 튜토리얼에서 죽다니. 노래. 노래인가..
"...좋네"
그 녀석이 금지하던 사항인 노래를 한다면 앞으로 재밌게 살수있을 것 같네. 겨우 주어진 내 인생이다. 내 자유다. 이젠 즐기면서 살아보자고. 그럼 노래를 할려면 목을 아낄 필요도 있을테고.. 아, 보컬 트레이너라던가도 고용해야겠군.
"우선은 패드부터 살까."
그리 말하며 인터넷을 키고 대충 비싸보이고 평가가 좋은 것을 구매하기->일시불을 눌러 처리한다. 후후 웃음이 나오는구만. 이게 자유인가... 그렇게 미소짓던 그녀는 아직 몰랐다.
이 시간대라면 어딘가에서 저녁을 준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레지스탕스 내에서도 저녁밥이 준비되고 있을테고.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은 뭐였더라.비프 스튜였던가. 또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아무렴 어떻냐는 표정으로 로벨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뭐가 나오더라도 다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일단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야. 물론 입맛에 완전히 맞냐는 또 별개지만 이런 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은 이미 포기했기에.
한편 자신에게 하는 말에 로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든지 물어봐도 된다라는 말을 자신의 말과 연결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가. 그런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로벨리아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그렇게 받아들인다라.
"어디까지나 방금 것은 그냥 가벼운 인삿말이야. 신경쓰지 마. 딱히 의미가 있어서 물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뭐, 굳이 묻고 싶다면 그건 있지. 모조 보검은 손에 잘 맞나? 30% 정도의 출력밖에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만큼 부작용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모두에게는 다 레플리카 보검을 나눠준 상태였다. 레플리카이기에 온전한 것은 아니었고 그 형태로 바꿀 수 있지만 결국 구조는 비슷했다. 등록한 세븐스를 강화시키는 것. 그렇기에 그 힘에 익숙해져있는지 로벨리아로서는 궁금한 것이었다.
"조만간에 제 0 특수부대에게 임무가 주어질 거라서. 그때까진 가능하면 다들 익숙해졌으면 싶지만... 역시 조금 어렵군. 이 문제는."
그러니 결국, 이야기를 해 줬다는 건 충분히 좋게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너는 웃었다. 어쨌든, 신뢰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네, 제가 확실히 하지 않았으니, 그 부분은 감수할 생각입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고 돌아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심한다고 해도, 직접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결국 심증은 심증일 뿐, 그게 네 능력이 비효율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신뢰를 떨어트리고,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지금 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니 조금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네 상황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비밀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물론 침묵 끝에 그가 미소를 띄우며, 물론 환한 미소는 아니었지만서도 미소와 함께 신경쓰지 말라는 듯 이야기하자 너 역시 옅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씁쓸함은 남았지만.
"그게... 죄송하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다 보니..."
어쩌다 보니 변명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대화를 통해서 봤을 때, 그는 이 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가? 잘은 모르겠다.
당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그런가." 하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빗긴다. 말 뜻은 이해했지만 나름 기대하고 있던 건지 눈알이 또륵 굴러가는게 보인다. 그러다가도 금세 당신이 물어오자 그녀는 다시 눈을 마주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부작용은 없었다. 하지만 그 모조 보검은 엔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구조였다. 그래서 엔은 모조 보검을 삼켜서 엔과 같도록 만들었다."
엔의 모조 보검은 단순히 힘을 해방시키는 물건일 뿐 아니라, 고기가 붙어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물이 되었을 것이다. 삼켰다는건 분명 그런 의미겠지. 그녀를 알고있는 당신이라면 그 뜻을 금방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해도 보검의 원래 기능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기준으로 엔에게 여러가지를 시켜보고 있다."
이정도라면 답이 되었을까. 마치 그렇게 말하듯 그녀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무한한 신용이 느껴진다고 해야할지. 그런 그녀가 당신의 말에 "임무?" 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엔은 준비 되어있다."
그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한 순간 그녀의 주위를 감고있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느슨했던 공기가 경직된 듯 한.
"엔은 대장이 원할때 움직일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다."
훈련이었다고는 했지만 명령에 아스텔도 주저없이 공격했던 그녀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당신이 그럼 여기서 그 힘을 보여봐라- 라고 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보검을 불러낼 기세다.
부모님을 잃고 난 뒤 구출된 이후에도 꽤나 오랜 시간을 멍하니 보냈던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하고. 그래도 시간은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해주었지만서도 여전히 마리에게 있어서 인생은 회색빛이었다. 레지스탕스 언니들과 아저씨들은 그게 내가 또래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서도. 사실은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초면에 생각보다 좀 무거운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쥬데카의 미소를 보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쥬데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다음에 봐."
마리는 빈 깡통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총총총 휴게실을 나갔다. 나가려다 한 번 뒤를 돌아 쥬데카를 바라봤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을 것이었다.
"그 에스티아도 분석하지 못한 물건이야. 솔직히 나도 어떻게 만들었는진 모르겠어. 그 비법을 아는 이는 오직 하나. U.P.G의 총장. 그 사람 뿐이야."
쉽사리 분석할 순 없을 거라고 로벨리아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그 보검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연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보검 때문에 많은 피가 흘렀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진 않으면서 그녀는 쓰린 속을 꿀꺽 집어삼켰다.
아무튼 엔과 같도록 만들었다는 말에 로벨리아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것저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은 자신이 판단할 사안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유용한 느낌이라면 그것으로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레프리카니까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던 거였고.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유용하냐였다.
"서두르지 마. 아스텔이라면 모를까. 너희들은 아직 단체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 벌써부터 임무를 혼자서 보내거나 하진 않아."
딱히 그녀를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보검이 있는 이상 그 힘은 어지간한 세븐스보다 훨씬 강화되었을테니까. 허나 제 0 특수부대는 팀이었다. 아직은 팀으로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 조금 더 중요했다. 각자의 연계 및 능력 활용, 그리고 판단력 등등. 모든 것이 검증이 안된 이 상황 속에서 그녀만 혼자서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녀도 혼자 보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무엇보다 한동안 아스텔은 별개로 움직이게 될 거야.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너무 앞서가진 않도록."
아주 가볍게 이야기를 하나 그것은 꾸짖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무리하지 말라는 정도의 말이었으니까.
모처럼 그녀가 당신의 말뜻을 그대로 이해했다. 아마도 에스티아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에델바이스의 개발 총괄인 그녀는 무엇이든 뚝딱 만들고 도움이 되는 설비들을 제공해준다. 이를테면 지하의 훈련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단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기계를 잘 모르는 걸 넘어 일단 입에 넣어보고 생각하려고 하는 엔의 안에서, 에스티아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었다.
"엔은 숙지했다."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겠다." 그렇게 말하자 경계를 허물듯, 순간 곤두섰던 주변의 공기 또한 가라앉는다. 당신의 속깊은 생각은 잘 모르긴 몰라도, 팀으로 움직이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테다. 그러고보면 생각나는 것도 하나 있다.
처음에는 5퍼센트가 고작. 3년을 연구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지금의 30% 정도를 구현하는 보검이었다. 그렇다면 100%는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지.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일단은 1/3의 힘 정도라도 사용할 수 있으니 그것이라도 보급하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요소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번 첫 미션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무리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한편 아스텔의 이름이 엔의 입에서 나오자 로벨리아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스텔처럼 되고 싶다라. 그 말에 바로 대답을 하진 못하나 이내 로벨리아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스텔이 그 말을 들으면 절대로 자신처럼 되면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겠지."
물론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있었다. 아스텔은 강했다. 허나 그 강함의 뒤에는 뭐가 있는가.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실력이 있는가. 그 사실은 그녀의 입에서 마음대로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신은 알고 있었다. 지금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단지 그것을 남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말을 하지 않는 것 뿐.
"그리고 나 역시 그 생각엔 동의해. 아스텔처럼 되면 안돼. 너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물론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강해지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말이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아스텔에겐 미안한 이야기였으나 그녀는 대원들 중 그 누구도 아스텔처럼 되지 않기를 바랬다. 진심으로 진지하게, 마음을 다해서.
당신의 말이라면 곧바로 대답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왜인지 바로 수긍하는 일 없이 깜빡거리던 눈을 사선으로 돌렸다. 그런 그녀가 조금의 뜸 뒤에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아스텔은 가끔씩 힘든 것처럼 보인다."
비단 아스텔뿐 아니라, 에델바이스의 모두에겐 각자 저마다의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를 채우고 잠을 잘 곳만 있으면 되고, 모두가 있는 에델바이스만 있으면 되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무엇이 진정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그녀는 알기 어렵다.
"엔이 그 부담을 덜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엔에게 있는 재주는 삼키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아스텔처럼 강해져서 모든 걸 삼켜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고기와 살점처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가끔씩 힘든 것처럼 보인다라. 만약 그것을 파악했다고 한다면 그녀의 관찰력은 상당히 대단한 것이라고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아스텔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조금 서투른 면이 있는 편이었다. 거기서 그런 것을 읽었다고 한다면...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며 로벨리아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내 말을 잘 듣는 것도 좋지만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로서는 더 좋은데 말이야."
그녀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허나 언제까지나 자신이 모든 것을 지시할 순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이것저것 지시를 할 수도 있겠으나, 이 에델바이스가 언제까지나 영원할 순 없었다. 모든 숙원을 이루는 날엔 저절로 해산하게 될테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전에 전멸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세상이 평화로워보이지만 평화로운 것이 아니었던만큼.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고 그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필시 모두가 좋아하겠지. 허나 나로서는... 그런 것보다 네 행복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데. 모두가 기뻐한다가 아니라 네가 기뻐하는 그런 삶 말이야."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로벨리아는 애써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답을 찾을 수 있냐도, 그리고 그 길을 가느냐도 결국 그녀의 선택이었다. 자신이 명령해서 그렇게 하라고 할 순 없었으니까.
>>709 에델바이스에 들어온 멤버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리더인 로벨리아가 다 직접 만나고 몇 번이나 신중하게 (아스텔이나 에스티아나 다른 정보원들을 통해서) 조사를 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로벨리아는 다 신뢰하고 있어요!
>>710 아무래도 로벨리아를 단순히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그런 것을 넘어서서 완전히 부정하거나 에델바이스를 부정하는 그런 말들이 되겠네요. 이건 상당히 무거운거고, 가벼운 쪽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이라면... 낚시를 하는 호수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가 될 것 같고요.
>>699 그런 거창한게 있을리가!() 유루는 솔직히 에델바이스가 성공적일거란 확신이나 믿음은 없습니다 다른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기에... 그래서 지가 해봤자 뭐 바뀔리가<<같은 썩은 마인드인데요 이루고 싶은것도 그래서 없습니다 그저 갈곳 없고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이 이런것밖에 없어서 온 것 뿐...근데 이렇게 써봐도 이분 변덕쟁이라 나중에라도 목표 생길수 있을걸요..?
>>700 와 멜피 들이대 주나요!!!! 유루 좀 아싸짓해도 미워하지 말아줘요 오너는 멜피 사랑함 귀염둥이 오쪼쪼
무엇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삶인지. 싸워라 가디언즈 V를 봐도 혼나지 않는 삶. 영원히 배가 불러서 허기가 지지 않는 삶. 어딜가도 고기가 있는 삶. -여러가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게 아닌 것 같았다. 그건 와닿을 듯 하면서도 가물가물 한 것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엔은 그렇게 해보겠다."
당신의 말대로 자신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그걸로 자기를 칭찬해준다면, 그녀는 좋을 것 같았다.
>>717 집착이라기보다는.. 음. 이쪽은 아무래도 아스텔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풀려야 설명이 되겠지만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아스텔에게 있어서 로벨리아는 정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 물론 연애적이라던가 그런 것은 아니고 좀 더 복합적인 느낌이 될 것 같네요. 아무튼 충성심은 상당히 높아요.
>>717 제가 친절하다뇨 그저 극한의 설정충일뿐 (하하) ㅋㅋㅋㅋㅋㅋㅋ 유루는 저도 모르겠음 그냥 "니 능력으로 만든 칼이 내거보다 강할까"<<이거일듯 (근데 독에 페인트 녹지 않을까 미안 몰름) 오 선관 너무좋징~~~~~~~ 아침에 임시스레 갈래?? 지금은 내가 좀 휘끼휘끼해서.. 젠장 귀여운 레시랑 빨리 썰풀고 싶은데~~~~
아마 보검의 사용법을 익히기 위한 대련이라면 아스텔이 조금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어떻게 보면 실력 차이가 있기에 의외로 상성이 좋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아스텔은 보검을 이전부터 다뤄온 이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해수로만 따지자면 약 10년 이상. 이제 막 보검을 든 이들과는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 무적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네가 생각하고 요청하는 거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너무 무리는 마. 아직 부작용은 없지만, 그래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보검의 구조조차 아직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것을 어설프게 따라한 수준이 바로 모조 보검이었으니가. 생각도 못한 부작용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허나 그것에 대해서는 엔도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다시 산책길을 가야겠군. 힘내라."
이내 로벨리아는 가벼운 격려를 하면서 다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보검을 좀 더 다루고 싶다는 것은 훈련. 그 훈련에 방해가 될 순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로벨리아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조금 빠르게 그 자리를 떴다. 조금 더 바람을 쐬고 싶었기에. 그리고 귀여운 부하의 훈련이 잘 되기를 나름대로 기원해주고 싶었기에.
/아무래도 막레적 상황인 것 같으니 막레로 받을 수 있도록 써봤어요! 물론 더 잇고 싶다면 이어도 괜찮아요!
아무튼 아스텔은 일상에서 나왔다시피 자신처럼 강해지고 싶다고 한다면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어요. 그리고 대련은 해주지만 자신이 직접 가르치는 것은 꺼리는 편이에요. 자신보다 더 낫고 도움이 되는 그런 이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유는.. 언젠간 나오겠죠! 뭐!
다행스럽게도 단어는 안다. 이스마엘이 읽은 책에서 몇 번 언급됐기 때문이다. 아직 먹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쌀로 이루어진 식량이며, 케이크와는 다른 식감을 가졌다는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그 식감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머뭇거린다. 감사히 받겠다곤 했지만 역시 떡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미지의 것에 대한 긴장이 한 번에 와닿았다. 그렇지만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며 예의가 아니니 떡을 받아들였다. 물렁물렁하니 신기한 감촉이다.
"쫄깃..하다?"
씹는 느낌이 색다른 건가? 껌과 같은 식감이거나 젤리같은 식감인 것 같다. 이스마엘은 잠시 고민하다 떡을 한입 먹어보기로 결정했다. 노이즈 너머로 손과 떡이 사라졌다. 잇새로 베어문 뒤로 이스마엘은 보이지 않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신기하다, 꼭 비거니즘 젤리를 먹듯 묵직하게 물리는데, 씹는 느낌은 젤라틴으로 이루어진 젤리와 껌을 뭉친 것처럼 독특하다. 한입, 또 한입. 그렇게 조그마한 떡을 제법 실속있게 먹어치운 이스마엘이 감탄을 뱉었다.
"맛있습니다! 식감도 신기합니다. 이런 음식이 있었습니까..?!"
짧은 감탄을 뒤로 들린 질문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페이스 재머를 쓴 겁니다, 기술의 힘이지요! 제 세븐스는 염력입니다!"
이스마엘은 잠시 고민하다, 점퍼 주머니 속에 그나마 하나 들어있던 동전을 꺼내 튕겼다. 동전은 다시 떨어지는 일이 없이 이스마엘의 주변에 떠있을 뿐이다.
이유도 모르게 어두운 방,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이가 누군가를 향해 전화기로 공손이 이야기한다. 마치 비극이 이용당한 것처럼. 목소리 건너편이 뭐라고 하자 보이지도 않는 이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알고 있습니다. 화재 사고의 범인이 딸이다는 너무 자극적이니 불행한 상속자 정도로 굳히고, 이후 '습격'으로 처리하는 것이군요"
민중은 개돼지다. 하지먼 너무 자극적인 것을 주면 그 것을 기반으로 저항하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철저히 안전주의적인 발상. 마치 '위'의 누군가가 그리 지시한 것일까. 전화를 끊그 그 인물은 담배를 후하고 핀다.
"스메라기 아리아렜던가. 그 녀석도 불쌍하구만"
학대당했다는 사실은 감춰졌다. 부유한 비세븐스가 자기 딸임에도 불구하고 세븐스를 탄압했다는 사실이 퍼지면 저항 세력이 더 들고 일어날테니 그냥 사고로 감춰라. 그렇게 이야기하여 수사기관에 압박을 넣어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위장. 철저히 비공개 수사로 한 다음 원인은 '가스 폭발'로 축약. 그리고 세븐스인 당사자는 이후 세븐스 혐오 단체에 슬쩍 인적 사항을 넣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시킨다라.
"세븐스가 아니었고, 상납금을 거절한 스메라기 가문이 아니었다면 오래 살았을텐데 말이야 크큭"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먼저 바로잡을 거야?" 이스마엘: 조금 더 과거로 가서 세븐스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지만, 혼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겐 바로잡는다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가 없습니다!
"처음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누구였어?" 이스마엘: 없습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그만큼 증오한다는 뜻이지만, 나는 아직 증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인은 이상향에서 평등합니다. 이는 내가 그 아래 있는 만물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초능력을 얻고 싶어?" 이스마엘: 이미 초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하늘도 날 수 있습니다!
>>833 물론 있습니다만! 자세한 부분은 캡틴에게 어느정도 선수도 받아야 하고? 일단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분명 친한 사람이 몇몇은 있었을 거에요. 그 중에는 쥬데카와 마찬가지로 가디언즈에서 탈주했다가 처분된 사람도 있었다...라는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가디언즈에서 한창 활동할 때의 쥬데카는 지금과는 좀 달랐으니까요, 그다지 소심한 느낌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834 겁은 평범하게 있는 편이에요, 점프스케어에는 좀 약하지만 그게 무섭다고 덜덜 떨면서 굳는 느낌은 아니고요. 예시를 들자면 귀신의 집에 들어가면 꽤 잘 놀라기는 하겠지만 기절하거나 그러지는 않고, 안도하면서 멀쩡하게 나오는 유형입니다! 의외로 공포물에는 흥미가 있지만 놀라는 종류보다는 분위기 자체가 으스스한걸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오늘은 아스텔에게 그 어떤 지령도, 임무도 없는 날이었다. 요 근래 여러 임무를 수행해서 그런 것일까. 오늘은 쉬라는 명령에 아스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딱히 무리해서 이것저것을 수행할 생각은 없었다. 무리한 임무수행은 컨디션 저하로 이어지고, 컨디션 저하는 미션 실패로 이어지기 딱 좋았으니까.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할까. 아니면 들판에 가서 누워서 낮잠을 잘까. 그것도 아니면 가볍게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쉴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 오늘은 몸을 좀 풀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아스텔은 지하 3층에 있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쓰지 앖는 것이 상당히 조용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이 정도면 조용히 훈련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았다.
검의 기본은 휘두르기였다. 자신이 차고 있는 진검을 뽑아들고 그는 자세를 잡은 후, 양손으로 잡고 가장 기본자세, 아래로 휘두르는 동작을 반복했다. 대충 200번 정도 한 후에,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혹은 에스티아에게 연락해서 움직이는 표적을 세워놓고 실전처럼 움직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을 하나 지금은 우선 휘두르기를 끝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면서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자세를 계속해서 유지했다. 그 모습은 정말로 능숙하고 유연했다. 적어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아마추어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
아주 살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굳이 아스텔은 시선을 두진 않았다. 누군가가 훈련을 하고 온 것이겠거니 생각을 하나, 일단 자신의 트레이닝이 먼저였기에.
혼자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던 레레시아의 방을 누군가 두드렸다. 누가 온 줄 모르니 늘어지는 말투로 대답을 하자 라라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늘어지는 대답을 하니, 문을 열고 들어온 라라시아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체 언제까지 저럴 건지." "에- 아마 죽을 때 까지-?" "됐고. 나와. 훈련장 가게." "지그음?" "그래. 지금. 자 일어나. 걸어." "으에엑."
라라시아는 침대에 늘어진 레레시아의 뒷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잠시 목 졸리는 소리를 내던 레레시아는 냉큼 일어나 걷기 시작했고, 쌍둥이는 나란히 지하 3층의 훈련실로 향했다.
"근데 라라- 갑자기 훈련장은 왜에?" "너 최근에 뭐 하고 있었잖아. 그거 보여줘." "아 그-거- 그런데 그냥 보여주면 재미 없는데에." "무기 보여주는데 무슨 재미를 찾아."
말투는 다르지만 톤은 똑같은 쌍둥이의 목소리는 훈련장의 문을 열고도 잠시 더 울렸다. 먼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본 라라시아가 어라, 하는 표정을 짓고 뒤따라 얼굴을 내민 레레시아가 앗,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쪼르르 들어와 휘두르기 중인 아스텔을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뒤에 들어온 라라시아도 같이 서서 바라본다. 방해가 되지 않게 서로 소곤소곤하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겠지. 아스텔의 휘두르기 한세트 끝날 무렵 레레시아가 말을 걸었을 것이다.
"아스텔- 지금 훈련 중-?"
돌아보면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의 쌍둥이가 (ㅇㅅㅇ) 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친다. 똑같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모습으로.
들려오는 발소리는 두 개였다. 당연하지만 그쪽을 보고 있지 않은 아스텔은 두 사람이 서로 단련하려고 왔나보다 정도로 생각을 하며 계속 휘두르기에 집중했다. 중간에 끊어지면 안한 것만큼 못하기 때문에. 이내 그는 마음 속으로 수를 세면서 눈을 감고 자세를 끝까지 유지한 후에 휘두르기를 끝냈다. 아직 이마에서 땀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에 열이 조금 오르는 것 같다고 느끼며 다음 세트로 옮기려고 하던 와중,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그에 따라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두 사람. 일단 한는 제 0 특수부대원 중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의료진 쪽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고개를 기울이면서 빤히 바라보는 그 모습을 눈에 담다 그는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였다.
"응. 훈련 중이지. 오늘은 딱히 임무가 없어서."
그렇기에 가볍게 몸을 푸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 후, 아스텔은 살며시 옆으로 거리를 띄웠다. 아무래도 그 둘도 훈련을 하던지, 아니면 뭘 할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이겠거니 생각을 하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훈련장은 말 그대로 지하 3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 공간이기에 상당히 넓었다. 자신이 이동을 한다고 해도 공간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는 너희들도 여기에 왔다는 것은 그런 목적이겠지? ...의료진 쪽에 있던 이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다만. 구급법 훈련이야?"
심폐소생술, 이송, 붕대감기 그외 기타 등등. 의료 쪽에서도 다양한 훈련이 있다고 생각을 하기에 딱히 여기에 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추측을 하며 아스텔은 다시 뒤돌아선 후에 쭈욱 기지개를 켰다.
"...조만간에 대장이 임무 관련으로 소집할지도 몰라. 훈련도 좋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으로 해둬. ...뭐, 무리는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훈련 중이냐, 고 물으니 아스텔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늘은 딱히 임무가 없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럼 평소에 안 보일 땐 임무 중인 걸까. 그런가봐아. 쌍둥이는 서로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그냥 훈련 중이라면 말 못할 것도 없지.
"아, 나는 그냥 보러 온 거야. 얘를 이대로 현장에 내보내기엔 좀 걱정되서." "그치- 라라는 구경 온 거구우. 나는 훈련이라면 훈련이고- 아니라면 아니고-"
애초에 무장을 꺼내서 선보이기만 할 것이었으니까. 훈련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때마침 아스텔이 있었으니 선보이기 이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레레시아는 뒤돌아선 아스텔을 쫓아가 그의 앞에 짠 하고 얼굴을 내비쳤다. 니히.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한 레레시아가 대뜸 말했다.
"있지있지이. 그냥 훈련 하는 거면- 나랑 대련 해주지 않을래애?"
뒷짐을 지고 선 레레시아는 트레이닝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허리장식을 차고 있었다. 멋들어진 벨트처럼 보이기도 한 그것이 무엇인지 아스텔은 아마 알 수 있지 않을까. 레레시아는 뒷짐을 지고 서서 조잘조잘 말했다.
"소집 전에- 한 번 제대로 써봐야 할 거 같아서어. 여기선 다쳐도 나가면 다 낫잖아-? 아스텔이라면 다치지도 않을 거 같지마안?"
우연히 마주쳐서 꺼낸 제안이었지만, 아마 그녀의 상대로 아스텔 이상은 없지 않을까. 여차하면 압도적으로 제압해줄 수 있을 테니. 그래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서 그렇게 덧붙인다.
다음 트레이닝을 시작하려고 하려는 찰나, 레레시아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비추자 아스텔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볼일이 있다는 의미인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우선 아스텔은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들려오는 것은 대련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자연히 보이는 검은 허리장식.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아스텔은 일단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나라고 해서 딱히 무적인 것은 아니야. 그렇다고 쉽사리 다치거나 할 생각은 없긴 하지만."
일단 그녀의 실력이 어떤진 알 수 없었으나 세븐스는 지난 번 훈련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기에 어떤 느낌인진 알고 있었다. 독과 관련된 세븐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세븐스였고 그런 세븐스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도 다칠 수도 있었기에 그는 다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에 살며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튼 대련을 하자는 것이 그녀의 제안이었기에 그는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와 대련을 한다고 해서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혼자서 트레이닝을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상관없어. ...다만 대련 상대는 할 수 있지만 뭔가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어. 내 방식은 누군가에게 가르칠만한 것은 아니라서. 그래도 괜찮다면 상관없어."
기본적인 움직임이나 조언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문적으로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은 자신에겐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전투법은 철저하게 한 쪽으로 치우쳐있었고, 그것을 굳이 남에게 가르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조건을 내건 그는 이내 숨을 약하게 내뱉으며 그녀와 살짝 거리를 띄워서 제대로 섰다.
"아무튼 그 조건 하에서 이쪽에서 맞춰주었으면 하는 조건이 있으면 얘기해줘. 내 쪽에서도 조건은 맞춰줄테니까."
이를테면 보검의 유무, 보검을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의 출력으로 싸울지 등등. 일단은 그녀의 조건에 맞출 수 있을 것은 맞춰보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난 모의 전투 때 능력을 보아서인가. 아스텔은 그가 무적은 아니라며 말하길래 레레시아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멀리서 대화를 듣고 있던 라라시아로부터 볼멘 소리가 툭 던져지고, 그쪽으로 보며 혀를 길게 내밀었다 집어넣는 레레시아가 있다. 이러니 저러니 불만은 있어도 둘 중 누군가 다친다면 제대로 치료해줄테니 부상의 걱정은 덜해도 괜찮을 것이다.
"와- 아스텔이랑 대련이다-"
레레시아는 아스텔이 고개를 끄덕인 것만으로도 기쁜 듯 했다. 역시나 말투만 그랬지 표정은 맹하니 그대로라 이질적이었겠지만. 뒷짐지고 있던 팔을 풀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아스텔의 말을 들은 후 괜찮아- 라며 선뜻 말했다.
"가르쳐달라는게 아니라- 실전을 대비한 감각을 익히고 싶은 거니까아. 아스텔은 아스텔의 방식대로 해애. 거기서 뭘 배울진 내가 알아서- 배울 테니까."
아스텔을 스치는 눈이 잠깐이지만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히히. 소리 뿐인 웃음을 흘리고 그녀도 몇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그러네- 조건- 음- 처음 몇 수는 맨손으로 하고, 내가 보검 무장을 갖추면 같이 보검 무장으로 맞서줬으면 하는 거- 정도일까나아. 보검의 출력은 저번보다- 약하게? 15%라고 하면 되려나-? 그렇게 부탁할게에."
30%도 단체로 덤벼야 제압했던 걸 어떻게 혼자 버틸 생각인지, 가면 같은 얼굴로는 진의를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조건은 그것 뿐이라며 자세를 잡던 레레시아는 아 이거 깜빡했다, 라며 몸을 살짝 숙였다가-
"모처럼이니 즐겁게 하자?"
빠르게 거리를 좁혀 아스텔에게 다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긴 다리를 휘둘러 아스텔의 옆구리를 노리고 걷어차기를 시도한다.
생크림이나 초콜릿, 둘 다 끌리는 조건이다. 다행스럽게도 이스마엘은 단 것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시험작을 이것저것 만들어 조율하는 일도 하겠지?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은 마음도 있다. 떡이라는 건 제법 괜찮은 식량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스마엘은 "알겠습니다." 하고 짧은 답을 남겼다.
"네! 보겠습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의 일이더라도. 보고 말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이스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금 당장은 무리였던 것이, 지나가던 단원 하나가 이스마엘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아, 이스마엘. 대화 중에 미안한데, 서점의 주인이 네게 할 말이 있다는데 가보는 건 어때? 이스마엘은 당신을 보고 노이즈를 바꿔 웃는 이모티콘을 만들어 보이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즐거웠습니다, 아담스 씨! 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요! 공연 때, 뵙겠습니다!"
이윽고 이스마엘은 서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듯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도 생각한 것은 세븐스에 대한 것이다. 세븐스로 이렇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데, 어째서 핍박받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지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공포를 극복할 순간이 생긴다면 인간의 인식은 바뀌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처럼 선행이 지속된다면 공포는 호의로 바뀔 수 있는 것인가……. 다만 한순간의 실수가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다. 이는 제도를 통하면 되는 일이니.. 여러모로 좋은 출발이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가벼웠다.
// 막레 줄게, 늦게까지 돌려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 츄이랑도 잘 지내야지~ 잘 부탁해~!!
실전을 대비한 감각.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 또한 실전처럼 해도 된다고 보면 되는 것일까. 어차피 이곳은 세븐스의 힘이 발동하고 있어서 다쳐도 머지 않아 치료가 되는 공간이며 라라시아도 있으니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살짝 뒤로 물러서서 일정거리를 유지한 후, 아스텔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의 끝을 레레시아에게로 향했다.
"보검이 없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보검을 15% 정도의 출력으로만 사용한다고 해도 실전 감각을 원한다면 봐주는 일은 없을거야. 그쪽이 네가 바라는 거겠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먼저 움직이지 않고 레레시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즐겁게 하자는 그 말에 아스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움직임에 집중할 뿐.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아스텔은 빠르게 몸을 뒤로 피하면서 그녀의 걷어차기 공격을 가볍게 회피했다.
"보장은 못 해."
짧게 대답하며 아스텔은 단번에 세븐스를 이용해 자신의 뒤쪽에서 바람을 가볍게 일으켰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폭발적으로 앞으로 몸을 날렸고 왼손으로 검집을 들고 단번에 그 검집으로 그녀의 목을 향해 휘두르려고 했다. 만약 명중했다면 아마 그 즉시 날카로운 검날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지나갔을 것이다. 마치 팔 한쪽을 빠르게 무력화시키려는 듯이. 물론 이런 장소였으니까 설사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큰 부상은 생기지 않았겠지만. 만약 회피했다면 그 상태에서 아스텔은 다시 자신의 세븐스를 이용해 앞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뒤로 거리를 띄우려고 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건 그의 공격은 크다기보다는 빠르게 파고드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에 이어 상대의 행동을 빠르게 무력화시키려는 움직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평범히 밥을 먹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 생각하며, 식당에 들어선다. 메뉴는 뭐가 좋으려나.하고 구내 식당을 둘러본다. 몇몇 이들이 먹는 것이 보이고, 메뉴가 다양해보이는 것을 보아 저렴하고 맛있는 곳일까. 메뉴표를 보니 '특제 아스텔이 오늘 낚아온 생선 회' ...신선도는 좋다지만 랜덤아닌가? 그리고 그 다음은 '에스티아 강추 로봇 요리' ...로봇이 만드는 음식인가? 그 외엔 몇몇 특이한 이름들의 메뉴들을 넘어 카레라이스를 주문한다. 가격은 ..음 저렴하네.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볼까하던 중 창백해보이는 피부를 가진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외엔 먹을게 많다고 느껴지는 양일까. 앞자리에 앉는다 그럼,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며 잡담을 나눠볼까. 하고 필담을 개시한다.
보검을 쓰건 안 쓰건, 출력을 어떻게 조정하건 봐주지 않는 것. 아스텔이 핵심을 딱 짚자 순간이지만 레레시아의 얼굴에 미소가 뜬다. 히죽- 입술도 눈도 가늘어지는 미소는 어딘가 오싹하다. 그 직후 표정을 바꾼 레레시아가 선공에 나섰고, 아스텔은 너무도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뭐어 아무렴-"
누구는 즐기고 누구는 아니어도 이미 시작한 이상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스텔이 걷어차기를 피하자 레레시아도 빠르게 태세를 정비한다. 다시금 생긴 거리는 곧 세븐스를 사용한 아스텔에 의해 좁혀졌다. 검과 검집을 동시에 들고서 파고들어 먼저 검집으로 목을 노리는 그 일련의 과정이 무섭도록 빠르고 매섭다. 레레시아는 독액으로 막고 반격을 할까 했으나 순간의 판단으로 몸을 깊게 낮춰 뒤로 빠지는 회피를 택했다. 몸이 앵간히 유연했으니 망정이지. 긴 머리카락만이 아스텔의 검집을 놀리듯 스치고 뒤로 휘릭 날아간다.
"우와, 무셔- 역시 진짜는 무섭네에."
공격을 피하며 회피하는 와중에도 입은 잘만 살아서 나불댄다. 휘익. 짧은 휘파람까지 분 레레시아는 몸을 일으키며 바닥에 뭔가 던졌다. 얄팍한 그것은 검은 장갑이었고 레레시아의 두 손은 날 것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슬슬 재미는 있을- 지도!"
맨손을 내놓은 그녀가 재차 빠르게 달려 아스텔에게 달려든다. 이번엔 손을 쓸 듯이 팔을 앞으로 뻗자 시퍼런 독액이 왈칵 뿜어져 나오며 아스텔의 양 팔을 뒤덮으려 한다. 짙은 색만큼이나 묵직하고 끈끈한 독액은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비효과가 있는 독이니 피부에 닿으면 저릿저릿한 통증이 이어질 것이고. 레레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다음 행동을 잇는다. 이번엔 무릎을 높게 차올려서 아스텔의 복부 정중앙을 타격하려 한다.
놓쳤나. 속으로 조용히 생각하며 아스텔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면서 무섭다고 이야기를 하며 재미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장갑을 벗었다는 이야기는 슬슬 뭐라도 보여주겠다는 의미인 것일까.
"...싸우는 것을 좋아하나? 넌?"
한편 독액이 뿜어져나오고 그것이 자신의 양 팔을 뒤덮자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지릿지릿한 통증이 이어지는 것이 신경독 비슷한 무언가일까. 팔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며 아스텔은 표정을 찌푸렸다. 이내 자신의 복부 정중앙에 타격이 들어가자 아스텔은 이를 꽉 악물었다. 분명히 맞긴 했으나 무슨 소리를 내진 않으려고 하며, 그 대신 몸을 크게 움찔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보검으로 만들어낸 무장에 타격을 일부 가한 정도의 세븐스."
이내 그는 기합을 넣었고 바람을 불어일으켜 제 팔에 묻어있는 독액을 쓸어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쓸려나가건 쓰려나가지 않건 그는 팔을 움직여 그 검 끝을 레레시아에게로 향했다.
"가라. 에어로."
그의 앞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자신의 세븐스를 이용해 움직임을 봉하고자 함이었다. 거센 돌풍이 불면 자연히 사람은 두 다리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움직임이 봉되는 것을 노리며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춘다면 아마 이번엔 오른쪽 다리 쪽을 노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깔끔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화려함과 눈부심과는 거리가 먼, 어떻게 보면 그의 전투방식은 확연히 특정한 목적을 위한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던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단지 훈련을 하고 있을 때, 대련을 하고 있을 때면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몸이 힘들면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 때만큼은 편안했기에. 그렇기에 훈련량을 과도하게 늘려 쓰러진 적도 있었더란다. 하지만 임무에서 그렇게 폭주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거 칭찬-? 기쁘네-"
양 팔에 마비독을 맞고 복부를 차였음에도 신음 하나 없이 말하는 아스텔을 보며 레레시아도 말했다. 전혀 기쁜 티 나지 않는 말투로. 그리고 올렸던 다리를 내려 아스텔의 다리를 걸려고 했으나, 시도하기도 전에 거센 돌풍으로 움직임이 멎는다. 우와. 그 상태로 팔을 움직이네에. 레레시아는 돌풍에 주춤거렸으나 곧 손을 들어 아스텔의 어깨를 짚으려 했다. 그리고 돌풍을 되려 타고서 몸을 위로 띄우는데, 타이밍이 늦었는지 오른쪽 다리에 타격이 스치듯 들어온다. 그러나 레레시아 역시 비명이나 흠칫거림 없이 그대로 몸을 아스텔의 뒤로 날리며 내려오는 도중에 등을 향해 걷어차기를 시도한다. 공격이 성공했건 아니건 레레시아는 한 발로 착지하자마자 빠르게 뒤로 뛰어 거리를 확보했을 것이다.
"그러네에. 그런 실력이면 남들 가르치기는 별로겠어-"
단 몇 수일 뿐이었지만, 아스텔이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하는 걸 사양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진짜 보검을 갖고, 그런 실력을 가졌다면, 그리고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아스텔의 성격이라면. 레레시아는 조용히 눈을 가늘게 접었다가 뜨며 상체를 낮추고 재빠르게 아스텔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의 통증은 거의 무시하는 수준의 움직임으로, 이번에도 짙푸른 독액이 손에서 흘러나와 사선으로 아스텔에게 흩뿌려진다. 시야를 어지럽게 만드는 독액의 흩날림 뒤로 맨손을 움켜쥔 레레시아가 아스텔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주먹을 뻗는다.
식기 위에 부담스럽다고 느낄 만큼의 양의 음식이 있다.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부 육류다. 땅, 바다, 하늘, 종류를 가리지 않고 현재 에델바이스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고기가 있다. 당신이 바로 오기 전까지도 그녀는 홀로 그것을 해치우고 있었다. 사실은 당신이 필담을 보여준 지금도 그렇다.
우물우물. 그녀는 당신의 글을 본 다음에도 반응이 없이 그저 입 안에서 고기를 씹고있었다. 보지 못한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원채 생각을 알기 어려운 눈을 하고 있는 터라, 햇갈릴 만큼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렇지도 않다."
고기를 꿀꺽 삼킨 그녀가 마침내 그렇게 입을 열었다.
"엔은 원래 이것보다 더 많은 양을 먹어야 한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고기를 보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 더 아래. 여전히 모자르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메라기 아리아?"
그런 그녀가 도로 당신에게로 시선을 주며 고개를 기울인다. 말은 왜인지 의문형을 띄고 있었다. 호명, 이라기 보다는 확인하는 식의 물음 같았다.
불어오는 돌풍으로 인해 그의 팔에 묻어있는 독액이 씻겨나갔고 그는 제대로 팔을 움직일 수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잡고 걷어차기를 시도하는 움직임에 맞춰 아스텔은 그녀를 뿌리쳤다. 그리고 단번에 불어오는 돌풍에 몸을 맡기면서 단번에 거리를 띄웠다. 그녀가 거리를 확보한 것처럼. 이내 그는 세븐스 발동을 정지했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지만, 뭐 됐어."
자세한 것은 입에 담지 않으면서 그는 다시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짙푸른 독액이 사선으로 흩뿌려졌고 자신을 향해 거리를 좁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내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 역으로 앞으로 달렸다. 이번엔 세븐스를 사용하지 않은 맨 몸의 움직임이었다. 자신의 상반신을 노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며 아스텔은 몸을 아래로 숙이면서 슬라이딩을 하며 그녀의 오른쪽으로 낮게 빠졌다. 그 상태에서 검을 잡고 그녀를 스쳐지나가는 느낌으로 몸을 굴린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검 끝을 향했다.
"참으로 성가신 능력이야. ...내가 가디언즈였다면 아마 너는 최우선 제거대상일 정도로."
독이라는 것은 자고로 참으로 번거롭고 여러모로 귀찮은 능력이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며,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킬 수도 있지 않던가. 그런 능력자가 적으로 있고 싸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정면승부는 여러모로 성가실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아마 실전이라면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고. 살짝 침을 삼킨 후, 그는 빠르게 몸을 굴린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시 검 끝을 그녀에게 향했다.
"거기다가 센스도 나쁘지 않아."
뒤이어 그는 왼손에 쥐고 있는 칼집을 다시 허리춤에 빠르게 채운 후,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리면서 거리를 좁히려고 했고 팔->다리->몸통->그리고 목 순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은 끊어짐이 아니라 마치 칼춤을 추는 것마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피했다면 빗나가는 순간,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자세를 잡고 뒤로 빠지려고 했을 것이고, 명중했다면 그 흐름이 끊어질때까지 그 움직임을 유지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어두고 일단 슬슬 졸려오니 저는 자러 가볼게요! 당연하지만 그냥 회피처리하셔도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모두들!
다른 이유? 아스텔이 직접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니 문득 그게 뭘지 궁금해졌다. 어째서? 그는 진짜 보검을 갖고 있으며 왜? 그는 이런 전투력을 갖고 있는 걸까. 지금 아스텔의 실력이 전력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의문은 점차 크기를 키워간다. 대련 도중에 딴 생각에 빠지는 건 레레시아가 곧잘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했다.
"으왓."
순간 집중을 흩뜨린 탓인가. 내지른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아스텔의 몸은 바닥을 슬라이딩하며 그녀의 뒤로 빠졌다. 철퍽. 허공에 흩뿌려졌던 독액은 레레시아의 하얀 머리와 옷 위로 떨어졌다. 그녀에겐 그저 물과 같은 독액을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거- 최고의 과찬인데-? 부디 그들도 그랬으면 좋겠다아."
나를 최고로 성가시고 눈엣가시로 여겨줬으면. 희미한 미소만큼이나 희미한 광기가 묻어나는 말을 흘리고 접근한 아스텔과 대치한다. 춤을 추듯 휘둘러오는 칼이 팔과 다리를 스치자 트레이닝복이 갈라지며 틈새로 독액이 피처럼 왈칵 쏟아진다. 한없이 검은색에 가까운 독액이 울컥울컥 쏟아지더니 그녀가 뒤로 한발짝 회피함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독액으로 된 벽이 솟구친다. 독액은 그저 벽을 만들 뿐이었는지, 아스텔을 뒤덮거나 하지 않고 무너진 후 바닥에 고여 레레시아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잔잔한 독액의 표면에 선 레레시아는 뒤로 물러나면서 풀었는지 허리장식을 한 손에 쥐고 늘어뜨리고 있었다.
"있지, 있지? 아스텔- 이제부터 내기 하나 어때-? 이 대련의 끝에 누가 서있을지. 소원권? 명령권? 뭐 아무거나 하나 걸고-"
아하하하! 이번엔 소리만이 아닌 웃음이었다. 레레시아는 웃으며 허리장식을 독액 위로 휘둘렀다. 그러자 독액이 허리장식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이내 형태를 갖추었다. 검고도 검은 독으로 이루어진 무장과 금방이라도 검붉은 독액이 떨어질 듯이 표면이 일렁이며 길고 날카로운 검이 무장을 두른 손에 쥐어졌다. 그녀가 한 발 내딛자 금속과 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제 2라운드 시작이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레시아는 거의 도약 수준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들고 있는 검의 간격에 들자마자 아스텔의 왼쪽 어깨를 노리며 찌르기를 시도한다.
반응이 늦지만 먹느라 신경쓰면 그 정도 늦은 것은 있을수 있기에 느긋하게 기다림을 가진다. 아직 카레라이스도 안 나왔고. 더 많은 양을 먹어야한다라. 위장이 얼마나 넓은 것이람. 그리 생각하며 그 것은 굳이 입 밖으로..아니 이 경우에는 손 밖으로라고 해야할까. 자신의 배를 보는 엔을 보며 먹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 것인지..
'네, 스메라기 아리아랍니다. 스메라기든 아리아든 원하는 쪽으로 불러주시길'(필담)
상대가 의문형으로 자신의 이름을 묻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필담으로 답한다. 정신 나이가 좀 어린 것이려나? 길거리에서 가끔 보고는 했다. 뭐, 여기에 들어온 것을 보아 길거리의 그들과는 달리 판단 능력은 좋은 것 같지만.
'이름이 엔..이셨던가요'(필담)
짧아서 이름이 외워지기 편했다라는 심플한 이유를 뒤로 한채 확인차 묻는다. 뭐 틀렸다면 상대가 정정해주겠지 그럼 무심히 생각하며 당신을 무표정하게 쳐다본다. 느긋하게 당신을 지켜보자, 짧은 백발과 창백하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나와는 정반대네라는 짧은 감상이 지나갈뿐. 천진난만해보이는 당신의 표정과 무표정한 내 표정을 비교하면 으음 정반대 타입의 사람인가?
다가오지 못하게 독으로 벽을 만든 것을 파악하며 아스텔은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빠졌다. 이내 허리장식을 풀어내린 그녀를 바라보며 아스텔은 호흡을 조절했다. 아까부터 보였던 저것. 저것은 틀림없이. 그리고 저것을 꺼냈다는 것은 슬슬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내 아스텔은 검을 왼손으로 바꿔쥐고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녹색 빛이 이전처럼 그의 손에 모여들었고 길다란 검의 형태가 되어 거의 손에 쥐어졌다. 이내 그가 기합을 주자 그 검에서 녹색빛이 솟구쳤고 그 빛은 아스텔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 녹색 빛이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이전 훈련때도 보여준 적이 있는 아스텔의 보검 해방 후에 장착되는 무장의 모습이었다. 이전에 부스터가 부서지긴 했지만 보검의 힘을 해방하면서 다시 복구가 되었는지 부스터도 확실하게 달려있었다.
"소원권과 명령권? ...너는 나에게 소원을 빌거나 명령을 하고 싶은 게 있는거야?"
이 대련 자체가 그런 것을 원해서 시작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하고, 자신은 소원을 빌고 싶은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스텔은 잠시 생각했다. 허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라는 결론에 도다르며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있어선 제 0 특수부대원 중 하나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원이야 적당히 음료수 하나 사달라고 말해도 될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녀가 자신과 거리를 좁히면서 찌르기를 시도하자 아스텔은 날개 무장을 펼쳤고 빠르게 부스트를 가동시켜 그녀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뒤이어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그녀의 위치에선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의 손에는 녹색 에너지 덩어리가 모여있었다.
"네 보검은 진짜 보검의 약 30% 정도의 힘을 낼 수 있고 나는 딱 15% 정도. 출력이나 세기는 네가 더 강해."
즉,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을 남기면서 그는 그 에너지 덩어리를 폭발시키려고 했다. 회피할 수 없었다면 아마 등 뒤에서 강한 풍압과 함께 돌풍이 몰아치며 단번에 벽으로 날려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딱히 칼바람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풍압이 터지면서 생기는 바람인만큼 어느 정도는 아프지 않았을까.
임시 스레에서도 설명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이 스레의 엔딩은 총 4개에요. 중간중간에 알게 모르게 분기점이 들어가고 그 분기점에 따라서 이후 전개나 최종보스도 달라질 예정이에요. 물론 일단은 정사인 진엔딩 루트도 있긴 한데 이쪽으로 가면 확실히 진엔딩이긴 하지만 그만큼 루트에 들어가게 되면 난이도가 높고..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는 루트도 있지만 이 루트로 가면 난이도 자체는 상당히 쉬울 것 같네요.
가벼이 맞받아치는 그의 어조는 참 평안하게도 들린다. 조금 심심한 대답일지도 몰라도, 지금 그의 머릿속에 돌아가는 회로는 별로 없었다. 그저 옳은 말을 들었기에 긍정할 뿐. 웃고 있는 당신을 보곤 조금 의아해진듯, 눈을 몇번 깜박인다. 아무리 그래도 아까 대놓고 불신한다는 티를 냈었는데 웃음이 나올까. 그는 말을 잇는다.
“당연한 소릴 하고있어.”
아까까진 조금 느슨하게 말을 풀던가 싶더니, 냉랭히 짜인 한 마디를 뱉는다. 아까와 같은 평안한 어투라 딱히 화난듯 들리지는 않겠다만 그건 듣는 사람 나름이지. 자신이 한 짓에 책임을 진다.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 그러기에 이런 대답을 한 것 뿐.
“전우의 의심을 사야하는게 대가라니, 비밀 한번 크네. 비밀 한번 더 생겼다간 내 목을 따겠어.”
비꼬는 듯한 말마디. 옅게 웃는 당신을 보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굳이 더 털 이유는 없다. 당신이 스파이라면 싸우고, 아님 함께하면 그만이다. 어찌되어도 좋다는 마인드가 아닌, 그보다 더 형이상적인 감정과 이성의 중간체이다. 아마도.
“편해지는것도 빠르네. 적응력도 오감의 영향을 받는거야?”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을 위한 질문이다. 말에 의미는 별로 두지 않은듯, 그저 캐묻기만 한다. 당신의 말에 답을 듣게 되면 짧은 의성어를 뱉곤 발걸음을 돌릴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숨이 멎는 건 이쪽이겠지, 너는 그의 말에 조금 곤란한 듯 말하면서도 미소를 유지했다. 이미 의심을 사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라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변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확언하지 않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아니면... 상대의 확신이 현실이 될리는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기보다는... 언제까지고 계속 불편해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가디언즈에서도, 도망자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건 에델바이스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불편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조금, 스스로를 무뎌지게 할 뿐이지. 그가 짧게 의성어를 내뱉고 돌아서는 것을 보며, 대화는 끝이구나. 하고 잠시 시선을 네 발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