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옆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자 그제야 마리가 움직였다. 일어나서 벤치에 앉는 걸 보고, 시선을 다시 위로 올린 레레시아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벤치 등받이에 기댔다. 조금 전만 해도 보이던 달이 그새 구름에 가려져 하늘이 어두컴컴하다. 그대로 하늘을 응시하다가 옆을 보니 그녀를 향해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마리가 보였다. 신기하게도 앉은 마리를 바라보던 레레시아는 이번엔 왜 그렇게 하냐는 물음에 피식- 웃었다. 약간 일그러진 웃음이었지만.
"별 것도 아닌 걸 궁금해하네."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한 마리의 눈동자를 보고 툭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불쾌함은 없었고 너 참 별나다, 정도의 어감은 있었다. 레레시아는 눈을 돌려 앞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공원, 그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러면 남들이 알아서 거리를 두거든. 아, 쟤는 좀 귀찮은 타입이구나, 하고."
말투와 행동이 조금만 유별나도 사람은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그건 사람이 사람인 이상 누구나 그랬다. 세븐스이건 아니건 누구라도. 정말 그것 뿐이라는 듯, 가볍게 대답을 하고나면 이제 레레시아가 물었다.
매번 감각에 날이 서 있는것이라면 별로 당기진 않지만. 굳이 덧붙이진 않고 속으로만 읆는다. 당신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도, 당신의 말을 끝마치고 나자 잠깐의 텀 후에 반응을 들려준다.
“눈이 좋다니, 그럼 나랑 궁합이 잘 맞겠네.”
왜 잘 맞을까, 정작 중요한 설명은 안 하고선 눈웃음 짓는다. 눈이 가늘어지면 동공도 그에 맞춰 웅크린다. 그와 같은 당연한 이치인듯, 그의 감정선도 일직선(이라고 쓰지만 실제 선으로 표현하면 털선이 아닐까?)을 달리다 궤적을 바꾼다.
“어쩔래, 아무래도 임무에서도 볼 사이인거 같네. 정신 혼미해지니?”
텐션이 높아진듯한 억양. 당신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언뜻 낮아보인다만, 그런건 제 알바 아니다. 팔짱을 끼곤 살폿 벽에 기대보는게 퍽 껄렁해 보일지도. 자신이 보기에도 당신은 잡생각이 많아보인다. 생각이 많은 사람한테 오감의 능력이라, 참 아이러니하네. 그저 당신을 좀 놀려보고 싶었던건지 이런 말을 하고서도, 당신의 질문에 답하는 투는 장난기가 팍 지워져있다.
“괜찮아. 딱히 불편하진 않거든.”
염력이라고도 할수 있겠다는 말에 굳이 부정은 안한다. 아주 넓게 본다면 염력 비스무리한게 맞으니까. 괜찮은 것도 맞다.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눈 얘길 해도 별 타격 없다. 어떻게 능력을 쓰냐는 당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고 답한다.
“활용도가 넓어서 때에 맞춰쓰는 편이야. 두뇌 돌리는 것에 영향을 크게 받고.”
애매한 답이지만, 실제로도 애매한 능력이다. 물체를 가루로 만들어 기관지를 막거나, 시야를 가리거나 하는 것부터 시작해 간이 무기 생성까지. 사용자의 창의력이나 상황 판단력에 따라 쓰임새가 갈리는 능력.
“원리가 궁금했던 거면 기력을 매개체 삼아 물체에 에너지를 쓰는 형식이야.”
그가 아는 자신의 능력은 여기까지다. 더는 능력에 대해 할 말이 없는듯, 가만 기대었던 자세를 고쳐 일어난다. 당신을 보는 눈빛은 오묘하다. 서늘하다면 서늘하지만, 연한 미소가 걸려있어 애매하다.
“네 능력에 대해서도 더 듣고 싶은데.”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대로 말하라는 뜻? 아니면 어느 정도로 동료를 신뢰하는지 확인하려는 것? 그렇게 묻고선 눈을 깜박여 본다.
말을 알아듣는 걸까? 자신의 말에 대답하듯 야옹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진다. 아마 다른 사람이 봤다간 놀림감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녹아내릴 것 같다. 귀여워. 쓰다듬고 싶다, 괜찮을까?
"앗, 어디 가니?"
그런 생각도 잠시, 상자 바깥으로 뛰어나가 바닥에 서서는 울음소리를 내자,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 싶었다. 물론 몇 발 가다가 멈춰서 또 울음소리를 내는 걸 듣고는 따라오라는 걸까, 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고양이가 가는 대로 따라가니 슈퍼마켓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아래에 에델바이스의 기지가 있는 곳이라는 걸 빼면 평범한 슈퍼마켓, 여기엔 왜 왔을까? 혹시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였나?
"여긴 왜 왔니? 먹을 게 여기 있나..."
아니면 먹을 거라는 말을 알아듣고 여기까지 왔다거나, 그렇다면 참 똑똑한 고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슈퍼마켓을 둘러본다, 고양이 먹일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조금 힘없이 당신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인 그는, 당신이 자신과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왜일까 하고 의문이 떠오르지만 묻지는 못한다. 그저 생각하는 게 있으니 그렇게 말했겠거니, 하고 웃을 뿐이다.
"그럴리가요, 미리 어떨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셨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유루 씨와 함께 다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언제든 능력을 사용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런 감상이었으니 그걸 항상 주의하고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닐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담 다행입니다, 아, 제가 이야기할 만한 문제는 아니겠죠."
실례했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능력의 활용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당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활용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섬세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만큼 규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제대로 쓸 수 없다, 정도라니 오히려 대단한 게 아닌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역량이... 뛰어나신 것 같네요."
그리곤 원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었지만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군요, 라고 답할 뿐이었다. 색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텐데 어떻게 파란색을 콕 집어서 컨트롤할까, 라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고이 묻어 두기로 했다.
"제 능력 말씀이시죠... 사실 아까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아시다시피 감각은 곤두세울 순 있어도 무뎌지게 만들긴 어렵죠, 의도해서는 더욱."
즉 항상 예민하다는 이야기.
"제가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감청, 감시, 그리고 생화학 공격의 대비, 그 외에 불특정한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알려드리는 것 뿐입니다."
극한 상황에 몰릴수록 더 예민해진다며 덧붙이곤, 언젠가 코피가 터졌던 경험을 조금 장난기 섞인 투로 이야기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의도대로 슈퍼마켓까지 따라 쫓아왔다. 이내 슈퍼에 도착했으니 뭔가 자신에 대해 알아채거나 단서를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가 말하는 건 이곳에 먹을 게 있나, 하는 말 뿐이었다.
마리는 내심 힘이 빠져서 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말이다. 마리는 슈퍼마켓 안쪽 코너를 돌면서 그 남자의 사각지대를 돌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갑자기 고양이가 코너로 사라지고 나서 뒤에서 한 여자애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그리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에 익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같은 대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냥 마을에 사는 비능력자인 걸까? 마리는 조금 경계심을 드러내는 눈을 조금 깜빡거리면서 그 남자를 살폈다. 아마 왠만한 사람이었다면 고양이의 색이 이 소녀의 색과 같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터였다. 마리가 앞의 남자를 보았을 때 외형으로만 보면 제 또래인 것 같아서 같은 부대원이라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낮의 하늘은 밝고 맑다. 몽실몽실 뜬 구름은 하늘하늘 날아다니고, 태양은 쨍쨍하게 빛나며 땅을 달군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훌륭한 날씨, 하지만 이런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백화점 옥상에 앉아 있었다. 자리는 맨 뒷자리. 저 너머 맨 앞의 무대에선 코스튬 히어로들이 응원해줘서 고맙다며 손을 흔든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왁자지껄 소리를 내며 아이들은 방금 본 쇼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들끼리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활기찬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훌륭해...]
아까 전 일어난 쇼- "싸워라! 가디언즈 V 히어로 쇼! 신전사, 바이올런스 퍼플의 등장!"에 대한 정보를, 제이슨은 잡지를 보고 알아낸 뒤, [히어로 쇼도 재미있어 보이네.]라며 나름의 변장을 한 채 나온 것이다. 기계 외피를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놀랄테니. 그리고 그 결과로- 아주 훌륭한 것을 보았단 개운한 표정을 한 채로 있는 것이다.
[연기가 훌륭했어. 직접 보는 것이라서 CG는 없었지만 저런 연출도 가능했군. 그리고 그를 매꿀 수 있도록 큰 화면에 효과를 넣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바이크 효과음과 연기를 활용해서 바이크를 이용해 도착했단 묘사를 주는 게 나쁘지 않았어. 무엇보다 호응 유도와 힘을 얻어 물리친다는 전개... 으음...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군...]이라며, 중얼거리며 독백을 하던 그는, 문득 주변 사람들이 전부 일어난 것을 보고 자신도 일어섰다.
괜한 농담이나 헛소리가 아닌 진심이다.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소중하니. 저 상태로 남한테 벅벅 닦는 것만 아니라면야 수저로 먹든 얼굴도 먹든 상관 없다. 그는 많이 먹어라― 하며 휘휘 손짓을 해대고는 다시 제 음식이나 신경 쓰기로 했다. 그리고,
"푸학."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결론에 그만 먹던 음식을 뱉어버릴 뻔했다.
"야이 씨, 흐흐흑. 아니거든."
황급히 씹던 걸 삼키고 대꾸를 하려는데 자꾸만 웃음이 샌다. 대충 삼켰더니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답답한 느낌에 잔뜩 인상을 쓰면서도 낄낄거리는 모습이 썩 괴상했다. 물 한 잔을 들이키고서야 숨을 고른 그는 아직까지도 웃음기 서린 낯으로 말했다.
"이야, 간만에 존* 웃긴 소리 들었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전통, 대충 그런 거라고 쳐."
그게 그렇게까지 웃긴 소린가 싶지만 여승우는 그렇단다. 아, 진짜 웃기는 소리이긴 했다. 내가 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