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데카 뷔스카리오. 그 말을 듣고는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기억이 날듯 말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나이는 스물 넷. 세 살차이는 또래라고 할 수 있나?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또래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봤다. 레지스탕스 아저씨들은 내가 또래랑 어울릴 필요가 있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또래라고 하면 +-3살 정도면 또래인 걸까? 그럼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이름이 쥬데카이고 성이 뷔스카리오 아니야? 그런데 왜 애칭을 성에서 따오는 거야?”
뭔가 데자뷰 같은데. 꿈에서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마리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어릴 적 쥬데카와 처음 만났을 때도 리오라고 부르라는 그 말에 그렇게 반문했었더랬다. 그만큼 마리에게는 이름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아리아에게도 성과 이름을 물어보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던가.
“나는 스물한살이니까, 또래잖아. 말 편하게 해도 괜찮아.”
고양이에게는 안 그러더니 사람이 되니까 존칭을 쓰는 것에 마리가 편하게 말하라는 뜻에서 이야기했다.
당신이 문득 폭소를 터트리자,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자각도 없이 고개를 비틀어 기울이면서 의문을 드러낸다. 진정된 당신에게 얼떵뚱땅 넘어가는 대답을 듣고나서도 "그런가." 하고 대답해준다. 물론 완전히 이해가 된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로벨리아든 에델바이스의 동료이든 다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당신의 말대로 그렇게 치기로 한 거다. 그녀란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니까.
"엔에게는, 엔과 동등한 세대나 가족이라고 칭할 수 있는 개체가 없어서 이해가 힘들었다. 미안하다."
그렇게 첨언하고는 식사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식기가 아닌 접시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물론 이번에도 방금처럼 통째로 삼킬 생각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곧장 파묻지는 않고 왠지 멈칫거리고 있다. 이제와서 체면이나 예절같은걸 신경쓰는 건 아닌 것 같고. 따지자면 기억을 더듬는 중인가. 그런 그녀가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한다.
"그건... 이름에서든 성에서든 사실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아직 거리감이... 있다고 할까요."
아직 서로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였다. 사실 그녀와 그는 그럴 만한 관계였지만, 그는 애써 그렇게 대답했다. 저 말까지, 거의 비슷했던, 아니 똑같았던 예전의 말이 떠오른다. 그땐 좀 더 앳된 목소리였지. 갑작스럽게 이런... 온갖 정보가 밀려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두 우연일 거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어떻게든 충격을 완화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존대가 입에 붙어서요, 듣기에 좀... 별로인가요?"
예삿말이라, 예전에는 어땠더라? 사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시작한 존대였다. 그런 이유를 지금 말할 수 있을리 없지, 그녀가 자신의 생각 때문에 신경을 쓰지는 않기를 바랐으므로.
"그, 어쨌든... 그래서 리오라고 말한 거랍니다. 성과 이름을 전부 부르거나, 성만을 부르는 것보다는 좀 더 가까운... 느낌이니까요, ...그린우드 양."
하마터면 마리라고 부를 뻔 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슬픈 듯 웃었다.
가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은 들은 쪽도 조금은 숙연해지는 게 보통이고, 상대방이 듣고 난감해질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꺼내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당연하게도 방금의 발언은 둘 다 무시한 처사다. 하지만 화자나 청자나 상식인 축에 드는 인간은 아닌지라 상관 없다는 걸까. 그는 실실거리며 식탁 위에 한쪽 팔을 얹고 상체를 비뚤어지게 기울였다. 이제야 예절이 해이해졌다. 그러다 엔의 말을 듣고 아리송한 표정이 된다.
그런가? 진중하게 사는 편은 당연히 아니고, 나름 자주 웃는다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이렇게 폭소할 만큼 우스운 일은 드물긴 했다. 그런데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보다도 그런 표정 더 보기 힘든 사람이 바로 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흠, 고민하는 티를 내더니 곧 이런 소리를 했다.
"나만 웃기 개 억울하네. 너도 ** 아무거나 해봐."
말하는 투만 봐서는 양아치가 따로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시비가 아닙니다……. '그러고보니 나도 네 웃는 모습은 본 적 없으니 웃어 달라'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 것도 재주다.
거리감이 있다는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친해지기 전에는 이름을 불리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그것도 나름 합당한 이유이기에 마리는 더이상 말을 가져다 붙이지 않았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냐, 그게 편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것과 마찬가지로 존댓말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할 이유도 없었고. 몇 없는 또래였으니까 서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리오라고 불러달라고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뒤에 붙은 그린우드 양이라는 말에 조금 낯빛이 흐려진다.
“음, 알겠어. 리오. 그런데 나는 마리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그린우드라고 불리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살짝 바닥으로 향한 시선이 깜빡깜빡였다가 다시금 쥬데카를 바라본다. 쥬데카, 그러고보니 제 친구랑 이름이 비슷하네. 쥬드라는 이름은 흔하니까 종종 볼 수 있는 이름이지만서도. 마리는 기억이 오래되어 쥬드가 애칭이 아니라 이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오랜 기간을 생각하면 헷갈리는 것도 당연할 만큼 시간이었으니.
"그래. 그래. 잘했어. 잘했어. 혹시나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차후 실험에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문제없이. 알고 있지?"
모니터에 비치는 것은 진한 갈색 콧수염이 상당히 인상적인 누군가의 실루엣이었다. 목소리로 보아 중년 남성인 것은 분명해 보엿지만 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자신의 콧수염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중년 사내의 실루엣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가디언즈의 멤버들이었다.
"그럼 어떻게 이송하면 좋을까요?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차량으로..."
"차량으로 이송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리잖아. 번거롭게 왔다갔다 해야하고. 그곳에 조만간에 블러디 레드를 보낼테니까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블러디 레드. 그 이송 열차 말입니까? 확실히 그 열차라면 빠르게 이송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블러디 레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진 알 수 없었지만 말투로 보아 심상치 않은 것임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사람을 이송하는 것으로 쓰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별 상관없다는 듯 실루엣의 주인공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 오버하는 감은 있지. 허나 냄새를 맡은 파리들을 이참에 한번 정리해둘까 싶어서 말이야."
"파리라고 하면?"
"내 실험체를 빼돌리려고 하는 고약한 파리들이지. 안 나타난다면 그것으로도 상관없지만 나타나서 실험체를 빼돌리는 시도라도 한다면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그럴게 뻔하잖아? 그러니까 혹시나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런 파리들을 일망타진 해둘 필요아기 있다는 거지. 케헬헬"
참으로 특이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실루엣의 주인공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어 웃음소리가 조금 줄어들었고 실루엣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실험체를 이송함과 동시에 차후에 이것저것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 테러리스트들을 쓸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이 천재의 천재적 발상이지. 자. 그럼 블러디 레드를 보낼 때까지 실험체들이 다치지 않게,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잊지 마렴. 알겠지?"
기분 나쁘내고 물으니 단박에 대답이 돌아오길래, 그러냐고만 했다. 이해해서 하는 말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태클만 걸지 않는다면 서로 언성 높일 일은 없었다. 지금이 그랬고, 잔잔한 밤공기는 여전히 평화로울 수 있었다.
허공을 보고 있는 레레시아의 얼굴 옆으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져온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마리가 그녀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서로 얼굴 안 보게 하려고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저렇게 앉을 줄은 몰랐지. 그래도 얼굴을 아예 돌린다거나 하진 않아서 옆얼굴의 미미한 표정 변화 정도는 마리에게 다 보였을 것이다. 그다지 극적인 변화는 없었겠지만.
"잘 모르겠다."
마리의 시선을 받으며 마리의 얘기를 쭉 들은 끝에, 레레시아가 꺼낸 말은 그랬다. 잘 모르겠다. 그녀는 처음부터 세븐스였으며, 일부러 말투와 행동을 바꾸면서 그로 하여금 남들이 어떻게 느낄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르고 속아도 그만이고, 알면서 모르는 척 해도 그만이다. 그녀가 원치 않는 거리만 지켜준다면.
"나는 아니지만, 라라는 너랑 비슷한,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기도 해. 라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 하지 세븐스냐 아니냐로 구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라 만의 생각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적인 생각. 그렇기 때문에 라라시아는 그녀 이외의 사람에게 그 생각을 꺼내거나 심지어 가족인 레레시아에게조차 동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신경 안 쓰거든. 그런 나한테 그런거 물으면 곤란하지. 정 궁금하면 직접 부딪히는 수 밖에 없어.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네."
나라면 현상유지 할 거야. 짧게 덧붙이고 다리를 풀어 반대로 꼰다. 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쳐 늘어지려는 몸을 받치고, 그 팔에 머리를 적당히 기대며 그리고, 라고 말한다.
"이름 부르다 혀 꼬이지 말고. 레시라고 불러. 요전에 훈련실에서도 그러라고 해줬잖아."
첫 인사를 나눌 때의 얘기다. 레레시아는 언제 누구와 통성명을 하더라도 늘 그렇게 말해왔으니, 마리에게도 분명 그렇게 말한 걸로 기억했다. 레시- 라고 불러- 라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널 모르는 듯했다. 너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면서도, 마음 한 켠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까. 아니면 네가 그녀의 기억에 자리잡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전혀,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야 할 목 뒤가 쓰라렸다. 타는 듯한 통증, 저절로 인상이 쓰일 것만 같은 그 통증에 그는 살짝 고갤 돌리고 모자를 쓰며 표정을 가렸다. 좀 나아지길 바라면서.
"네, 고마워요. 벌써 꽤 오래... 이렇게 말을 해왔거든요."
그래도 나름 편하게 대하기 위해서, 그녀에게는 최소한 딱딱한 말투는 피하기로 너는 결정했다. 그녀가 그걸 알아채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조금씩 가라앉는 듯한 작열통에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너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달라지는 걸 눈치챈다. 뭔가, 말실수를.
"아, 아...! 미안해요, 그.. 아니 마리, 정말로 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어요."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너는 안일했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조금 가라앉는가 싶었던 통증이 다시금 되살아나듯, 너는 본능적으로 네 목 뒤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자극을 주다 보면 나아지는 일도 있었으니까. 너는 정말 미안하다며 거듭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가정사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니, 그녀는 전혀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만들어버린 상황에 너는 가슴이 아팠다.
"마리, 뭐라도 좀... 마실래요?"
분위기를 좀 바꾸기 위해서 너는 서투르게 음료를 권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씹을 거리라도 있으면 좀 기분이 가라앉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