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방긋 웃으며 그래도 자기 몸이 그 정도로 딱딱하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습니다. 다만 상대쪽이 지금 농담을 받아줄만한 느낌이 아니긴 했는데요.. 하지만 그녀는 그런걸 크게 신경쓰지 않고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당신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긴가민가.. 했는데. 확실히 그녀가 모르는 얼굴인거 같네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일까요? 경계를 풀어주기 위해 일단 그녀는 접어서 팔에 걸어두었던 제복을 살짝 풀어서 에델바이스를 상징하는 마크를 보여주었습니다.
"갑자기 귀엽다고 해서 미안, 남자애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
내가 귀여운걸 좀 좋아해서~. 그녀는 별거 아니니 넘기라는듯 말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버린 당신과 눈을 맞추기위해 슥하고 자세를 낮췄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해보시지! 란 분위기.
"살짝 부딪힌걸로 다칠만큼 연약하진 않다구? 그러는 소년은 어디 다친걸까? 계속 눈을 피하는거보니 아픈걸까?"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던지는 농담은 피식할 정도였지만 그렇게까지 반응이 나올 정도로 여유롭지가 않았다. 아니면 농담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 어느쪽이든 이렇다할 반응 없이 그는 그녀가 보여주는 에델바이스의 제복과 마크를 눈에 담았다. 아, 이제부터 동료...라고 해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렇담 더 큰일 아닌가? 벌써부터 정신을 놓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볼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담 곧바로 쫓겨나려나? 아니지, 위치를 알고 있으니 가둬놓을지도, 그게 아니면...
"그, 괜찮습니다. 좋은 뜻...일테니."
놀리려는 의도로 한 말은 아닐 터, 말투로 모든 걸 구별할 수는 없지만 꼭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말이었기에 악의는 느낄 수 없었다. 정도 이상의 장난기도. 그랬기 때문에 그는 조금 껄끄럽기는 해도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지금 처한 상황이 그다지 양반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아, 아닙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갑자기 몸을 숙여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아니지, 피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혹시 시선을 피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뜨끔한 듯 움찔한다.
주제와 어긋나는 엉뚱한 소리는 아니지만 서로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생경하다. 이스마엘에겐 쌍둥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매체로 볼 수 있는 쌍둥이라는 존재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우애가 깊어 보이는 점이 또 신기하기도 했다. 얼굴이 드러났다면 자칫 무례할뻔했다. 이스마엘은 본인의 행동을 깨닫고 신기한 듯 쳐다봤다는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했다. 언젠가 물어보면 술술 불겠지만. 대신 한마디 덧붙였을 뿐이다. "사이가 좋아 보입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간식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니니 다행이다. 신성한 시간을 방해받는 것만큼 조심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덜렁거리는 머리에서 애써 시선을 피하고 이스마엘은 웃는 낯의 이모티콘을 유지했다. 천사링이 뜰 적 다시금 들려오는 탄성에 어째 자신의 이 얼굴이 신기하게 보이는구나 싶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뭐 어떤가, 이스마엘도 쌍둥이의 우애를 신기하게 봤으니 그걸로 셈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제, 제 머리는 여립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 끄트머리에 걸터앉기 편하게 자리를 내어주고, 불길한 가위소리가 들릴 적엔 식겁한 듯 표정을 바꿨다. 😨. 뇌파에 따라 표정이 바뀌는 건 편하지만, 이따금 보이고 싶지 않은 표정이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절이 덜렁거리는 머리채는 제법 고운 결이었다. 그래도 완벽하다기엔 이리저리 상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적어도 아무렇게나 방치하거나 뒷골목을 배회하며 살던 사람의 머리는 아니었던 듯싶다. 오히려 결이 제법 괜찮고, 푸석한 면이 없는 걸로 보아 괜찮은 집안이나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는 자제가 가질 법한 머리라면 모를까.
"잘 부탁드립니다!"
쾌활하게 재잘거리던 이스마엘의 페이스 재머가 이젠 아무런 표정도 띠지 않고 노이즈로 돌아간다. 머리를 손에 쥐는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집중하도록 도와야지, 아니면 기껏 보여준 성의를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눈치는 있는 것 같다.
"음.. 단발로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기를 여지는 남겨둬야 할 것 같거든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 피같이 귀하게 여긴 머리카락과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참 열심히 길렀지만 어쩔 수 없다. 이스마엘의 긴 머리는 이미 한 번 들킨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젠 재머에 가려질 정도로 짧게 치는 수밖에.
"혹시, 일자로 자를 수도 있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스마엘이 나직하게 물었다. 일자. "제게 습관이 있다 보니 각이 생기는 걸 좋아합니다." 덧붙인 말에 총기와 웃음이 어려있다.
익숙한 광경이었습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것처럼, 그리고 대다수의 동료들을 처음 만났을때처럼, 여유가 없는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세븐스, 이곳에 모이는 이들은 다들 크고 작은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밝아보여도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환경에 긴장하기 마련이죠. 거기에 나이나 성별같은 사소한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겁준거려나?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지 말라구 소년. 어차피 나랑 1개월? 정도밖에 차이 안나는걸."
그녀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조금이라도 당신의 경계를 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놀란듯한 당신에게 살짝 거리를 두어주며 무해하다는듯 양손을 펼쳐보이며 웃었습니다.
"다친건 아니라도,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뭐라도 먹으러가지 않을래, 소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고.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타이밍으로 그녀는 당신에게 미소를 띄워둔채로 제안했습니다. 부담갖지 말라는듯 뒤이어 싫은건 싫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덧붙였죠.
이 세계에서 세븐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레지스탕스는 에델바이스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지금 한 여성을 추격하고 있는 있는 '와일드 팽' 역시 레지스탕스 단체 중 하나였다. 철저하게 세븐스를 탄압하는 이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모인 이들은 상당한 과격파였고 그 활동이 보통 과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디언즈에 소속된 세븐스 중 몇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야말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목덜미에 꽂아넣겠다는 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추격하는 여성을 집요하게 뒤쫓았다. 도망치는 여성은 그들에게 잡히지 않겠다는 듯, 여기저기로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으나 가는 길목마다 함정이 발동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폭약이 터지기도 했다. 허나 그 함정과 폭약은 직접적으로 그녀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거나 바로 근처에서 발동하면서 그녀를 일정 포인트로 몰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웨이브 형태로 앞머리가 어깨를 넘어 가슴 가까지 내려오고 뒷머리 역시 비슷한 웨이브 형태로 등까지 내려오고 있는 여성은 표정을 찌푸렸다. 허나 자신의 푸른빛 눈동자에 주변 지형지물을 담으며 그녀는 조금도 넘어지거나 속도가 줄어드는 일 없이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 달리고 달렸다. 숲길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넓은 평야가 있었으나 이내 그녀는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 총을 들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모두 와일드 팽의 멤버들이었다. 미리 설치한 함정과 폭약을 이용해 일부러 이 평야까지 유인한 후, 매복된 인원들과 뒤에서 쫓는 이들이 합류해서 단번에 제압하거나 죽일 계획이었을까? 검은 빵모자를 쓰고 있는 158cm 정도의 키를 지닌 여성은 푸른빛 눈동자를 돌려 잠시 주변을 바라봤다. 그 수가 절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어림잡아 50~60명은 될까.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만 어쩔 참이지? 가디언즈."
"제 아무리 가디언즈라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많은 이를 상대할 순 없지. 안 그래?"
그녀를 뒤쫓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나왔고 총을 장전하는 철컥 소리가 여기저기서 조용히 울렸다. 그녀의 몸에 붉은색 레이저 점이 박혔고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그녀의 몸은 벌집이 되리라.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실성? 아니.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너무나 여유만만한 표정을 보였다.
"와일드 팽의 멤버는 이게 다 맞아?"
"그걸 너에게 대답해줄 이유가 어디에 있지?"
"아니. 없으면 전원 다 오라고. 고작 이 정도 수로 뭘 하겠다는 거야. 패배자들은 정말 머리가 안 돌아가도 진짜 안 돌아간다니까."
"과연 이 이후에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총알이 박히고 네 몸에 바람구멍이 나도 벌집이 되어도 과연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자신김이 대단하시군? 가디언즈."
"첫째. 너희는 정보력이 너무 없어. 아니. 당연히 우리의 얼굴은 그다지 공개가 되지 않았으니 진짜 자세하게 알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당연하긴 해."
한편 여성은 여유만만하게 오른손으로 숫자 1을 표현한 후에 태연하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와일드 팽 멤버 중 하나가 그녀를 매섭게 노려봤고 총알을 발사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고 누가 멀릴 틈조차도 없었다. 허나 여성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숫자 2를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뭔가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멀쩡하게 서 있었다. 빗나간 것일까? 아니면...
"둘. 상황파악도 전혀 못 해. 당연히 여유를 부릴 수 있지. 승리자는 언제나 여유로운 법이야. 그리고 피가 말리는 것은 너희 패배자들이지."
이어 그녀는 오른손을 높게 위로 들었다. 푸른빛 눈동자를 눈꺼풀 뒤로 숨기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는 푸른빛들이 특정한 형태를 그렸다. 그것은 길쭉하게 생긴 검의 모습이었다. 이내 그 특정한 형태, 정확히는 검 형태로 모인 빛은 검으로 바뀌었고 그 검은 정확하게 여성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에서 푸른빛이 번쩍였고 그 푸른빛은 이내 그녀를 집어삼켰다.
"셋. 너희가 몇 명이 모인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조차도 몰라."
차가운 냉기가 몰아쳤다. 많은 것들이 얼어붙으며 투명하게 바뀌어갔다. 모든 것은 정말 눈깜빡할 사이에 벌어졌고 그 어떤 숨소리도, 정확히는 여성의 숨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얀 연기가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투명한 얼음 속에 갇혀버린, 아니. 어쩌면 그 상태로 꽁꽁 얼어버린 와일드 팽 단원들의 모습이었다.
"그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너희는 죽는 거야. 알겠어? 테러리스트 여러분? 패배자가 몇 십명이 모여도 승리자가 되진 않아. 비참하기 짝이 없는 패배자들의 집단이 될 뿐이지."
대체 무엇이 지나간 것일까. 딱딱한 것을 갈아버리는 잔혹한 소리가 잠시 울렸고, 뒤이어 얼음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서 땅바닥에 흩뿌려졌다. 이내 여성은 자신의 근처에 떨어졌던 총알을 무릎을 굽힌 후에 잡았다. 얼어붙은 총알에 얼음결정이 맺혔고 그것은 이내 고드름 형태로 점점 그 크기가 커졌다. 뒤이어 그녀는 그 고드름을 뒤로 힘껏 집어던졌다.
"그게 이 세상의 룰이야. 기대도 안 하지만 지옥에서라도 명심하고 잘 살아가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는 세븐스의 뒷쪽으로 아직 깨지지 않은 얼음이 관통된채 천천히 그 형태를 잃고 무너져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