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은 동급생 중에 신경쓰이는 이가 한 명 있다. 분명 렌은 누군가에게 관심을 많이 주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꽤나 다른 이들을 관찰하거나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에 대해 예민하곤 했다. 그래서 아마 더 미즈미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미즈미는 2학년에 들어서서 마주칠 때마다 시시콜콜 시비를 걸었는데—공을 던진다거나 등등— 이상하게도 여름의 수학여행 때 마주친 이후로 이제는 자신을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이 미즈미에게 무언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미즈미에게 확실하게 들었고, 또 자신이 싫은 이유가 딱히 없는 것—있기는 한 것 같았지만 제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에 좀더 렌은 당당해지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미즈미가 시비를 걸면 맞대응을 할 생각이었는데 피해다니거나 가끔 투덜대는 말만 하는 터라 적당한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중 미즈미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한참 스키를 타고나서 잠시 쉬려고 잠시 장비를 정리해둔 채 지나가던 길에 나무 아래 서 있는 미즈미를 발견한 것이었다.
마침 그 나무는 눈이 잔뜩 내려 무거워하고 있는 중이었고, 렌은 장난기가 발동해 미즈미의 뒤로 돌아서 접근했다. 그리곤 나무를 발로 차고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후드득 나무가 몸을 털며 무겁게 지고 있던 눈을 쏟아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난 렌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겠지만, 나무 아래에 서 있던 미즈미는 눈을 잔뜩 맞았을 터였다.
미즈미가 뒤를 돌아보면 흰색에 검정 체크가 크게 들어간 스키점퍼에 아래는 검은 스키바지를 입고, 목에는 검정 넥워머를 머리에는 검정색 심플한 털모자를 쓰고 있는 렌이 보였을 것이었다. 그렇게 단단히 무장을 한 채로 머리에는 흰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고글을 이마에 걸친 채 딴청을 피우고 있다. 스키복을 입고 있지만 머리는 땀에 젖어있고 신발은 운동화 차림인 것이 스키를 타다가 이제 쉬러 가는 차림이었다.
/ㅋㅋㅋㅋㅋ 꼬장 부려도 오케이라구 ㅋㅋㅋㅋ 그런 두 사람의 모습도 너무 귀엽지 않냐 이말이야~ 과연 언제쯤 친해져서 연애상담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런지…ㅎㅎ…. 답레는 천천히 줘도 오케이야~
입술에 입술이 닿는 감촉은 뺨에 입술이 닿는 것과는 달랐고, 조금은 촉촉하기도 하고 겨울 바람의 차가움이 묻어있기도 했다. 하지만 잠깐 닿았을 뿐인데 금방 뜨거워져서 렌은 조금 성급히 입술을 떼어버렸다. 충동적이고 어설픈 마음에 불이 붙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을 꼭 감았던 코로리가 이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봤을 때 렌은 웃었던가 아니면 멍청한 표정을 지었던가. 그건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코로리가 바로 다시금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렌이 붉어진 얼굴로 코로리가 붙잡은 대로 엉성하게 몸을 숙이고 있다가 코로리가 입술을 떼면 잠시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리곤 코로리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꽉 안아버릴 것이었다. 렌의 몸은 겨울답지 않게 뜨끈뜨끈힐지도 몰랐다.
“…많이 좋아해요. 정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만큼. 머릿속이 눈밭처럼 하얗게 되버릴 만큼. 차마 닳을까 손대기도 어려울 만큼. 가끔은 집어삼켜버리고 싶을 만큼요.”
코로리가 살짝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은 그 몸에서는 앓는 목소리가 나왔다. 성급하고 바보같이 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리 앞에서는 늘 이리저리 휘둘리며 끈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코로리가 잠의 신이기 때문에 마치 꿈결처럼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는 걸까.
“…코로리 씨도 그런가요?”
코로리에게 속살거리듯 묻는다. 나만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마찬가지로 코로리 또한 나를 많이 많이 좋아해주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요즘 날이 부쩍 추워진터라 나는 행동이 뜸해졌다. 원래 물과 뱀은 날이 추워질 수록 활동이 줄어든다더니, 딱 그 꼴이다. 때문에 나는 내 머리색과 퍽이나 잘 어울리는 눈송이 사이에서도 몸이나 부둥키고 있었다. 나는 요즘 인간들에게 가식하기도 그만뒀고 예전만큼이나 인간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도 있었고, 이미 애인이 있는지라 한눈 팔기 싫다는 마음도 한 몫 했다.
때문에 요즘들어 인간 보기를 돌보듯 하고 있다만... 그게 제 손자격 되는 인간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최근들어 녀석을 볼때마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피하기를 반복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내 친구의 애인이 내 손자고 내 손자의 애인이 내 친구인데 둘 다 그 사실을 모르고 나만 알고 있으니 갑갑하기 짝이 없는 게 아닌가. 참으로 인생사가 미묘하다.
그런데 이놈은 복잡한 내 마음도 모르고 이게 왠 날벼락이냐. 나는 차디찬 눈을 뒤집어쓰고 너무 놀라 등을 돌렸다. 근데 웬 걸. 방금까지 날뛰었을게 뻔한 옷차림으로 뻔뻔하게 서있으니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불쑥 튀어나는 말을 참지 못하고 만다.
"예의 없기는! 채통머리도 없어!"
하며 부르르 떨자, 내 몸에 있던 물기며 눈덩이가 전부 사라졌다. 아차하는 마음에 나는 눈 털기 장인인 척 뻔뻔스레 몸을 마구 털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 뻔뻔스러운 낯이 재수없어서 눈뭉치를 들어 그대로 던져버렸다. 퍽, 얼굴을 향해 날라가는 눈은 내 의지를 잘 따라주는 모양이다. 나는 재수없는 걸 알면서도 이죽거렸다.
목도리를 매어주는 척 하면서 뺨에 몰래 입 맞췄을 때도, 손등에 욕심껏 입 맞춰버렸을 때도, 지금도 똑같았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는 자그마하고 오늘만 벌써 세번째 입맞춤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세번째에 닿은 곳은 입술이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누가 더 붉고 덜 붉고 할 것이 없어서, 코로리는 말을 하지 못 했다. 나도 해버렸다ー! 하고 웃어버릴려고 했는데 꾹 눌러뒀던 말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힘들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못 하고 있었고, 정 이 말을 하고 싶다면 렌에게 허락이라도 구해보자고 생각했다. 입을 열려고 하니, 그러기 전에 렌이 꽉 안아온다.
"렌 씨 머릿속이 눈밭처럼 하얗게 돼도 좋아해. 난 렌 씨 손에 닳아도 좋고, 집어삼키는 건… 조금 더 작아져볼게!"
숨 쉬기가 조금, 조금 불편했다. 그렇지만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렌을 꼭 마주안은 코로리는 고개만 폭 젖혀서 렌을 바라보려고 했다. 렌이 코로리를 보고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은 그냥, 저를 많이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랑스러운 인간을 눈에 한 번 더 담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도 된다고, 괜찮다는 듯이 렌을 안고 있던 손이 등을 쓸어주듯이 토닥거린다.
"응, 많이 좋아해. 많이 좋아해서, 아무것도 모른 척 렌 씨랑 엄청 많이 긴 시간을 약속해버리고 싶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근데, 렌 씨한테 너무 무겁고 무서울까봐 안 된다 하게 되고, 말 못 하게 돼."
스스로 조금 더 숨 쉬기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미 렌이 꽉 끌어안아주고 있는데 꼭 마주안은 걸로도 모잘라서 똑같이 꽈악, 렌이 안아주고 있는 힘만큼 똑같이 안아주려고 스스로를 렌의 품 속에 묻어버린다. 그렇게 긴 시간을 흘러보내왔으니까 기다리는 건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쿵쿵거리는 심장의 그림자는 전부 욕심이다.
조금 더 작아져본다는 말에 렌은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을 뱉고 말았다. 제 욕심 가득한 말이 코로리 앞에서 귀엽게 바뀌어버리고 말아서, 그럼에도 그것이 좋아서 웃어버린 것이었다. 꽉 안았던 것도 이내 느슨하지만 단단하게 바뀌었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따뜻해서 좋았다. 코로리는 마치 제 모든 어리광같은 걸 다 받아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잠의 신인 걸까. 잠의 신이란 모든 이들의 잠투정을 다 받아줄 정도의 아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리가 제게 하는 말들이 눈더미처럼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코로리는 제 생각보다 더 나를 좋아하는걸까. 진심 어린 목소리로 전해오는 말에 렌은 방금의 입맞춤보다 지금이 더 어지럽다고 생각해버린다. 코로리가 꽉 끌어안아오는 몸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코로리한테 이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냐는 그 말에 렌은 차마 말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심장이 울렁울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울컥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덜컥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섭지만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코로리 씨는 저를 사랑하나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그마하게 되묻는 것은 코로리의 입으로 저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말을 듣게 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렌이 조금 느슨하게 안아주면, 코로리는 렌의 품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렌과 마주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냐는 욕심이 덕지덕지 묻은 질문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눈 보고 이야기해주고 싶으니까! 조그맣고, 작게 떨리는 렌의 목소리에 마음이 저려왔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렌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참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렌 씨는 나 사랑해? 하고 수줍고 떨리는 마음으로 되묻지 않을 것이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버렸다고 생각하니까.
"응, 사랑해."
드디어 입 밖으로 내버리면 말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정말, 정말 많이 좋아해서ー"
눈을 꼭 맞추고, 환하게 웃으면서 사랑을 속삭이다가 그 웃음이 일그러질 것 같아서 다시 꼭 렌에게 안겨버린다. 나도, 내가 인간이었으면 좋을 만큼 사랑해. 그런 말은 할 수 없으니까, 이런 말들까지 쏟아져 나오지 않게 속에 갈무리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도 이미 렌에게는 버거울텐데, 그래서 인간이길 바랄 만큼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얼마나 더 버거울지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코로리는 속이 너무 뜨거워서 따끔거리고 욱신거렸고, 아픈 만큼 렌을 꽉 안으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인게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