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스레는 에반게리온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스레입니다. ◉ 설정 및 스토리는 완전 창작이 아니며, 스토리 분기에 따라 TVA+EoE / 신극장판 기반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 스토리는 총 4개의 페이즈로 나뉘어있으며, 페이즈4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나면 엔딩입니다. ◉ 진행 시간은 평일엔 상시 진행으로 운영되며, 대사도전 진행일경우 주말 밤 10시~11시부터 12시~01시까지 진행됩니다. ◉ 사전에 참여불가기간을 말해주시지 않고 14일 이상 진행 참여가 없거나 미접속시 해당 시트가 정리될 수 있습니다. ◉ 당신의 캐릭터가 사망 및 부상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본 스레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심의 규정(17금)을 준수합니다. 기준 등급은 2-2-3-2 입니다.
내 집은 식사를 전제로 설정된 공간이 아니다. 내 집은 오로지 보관을 위한 공간이다. 나의 물건들, 그리고 나의 육체를 보관하는 공간. 일단 집을 지은 사람은 집이라고 부를 건덕지가 필요하니 부엌 비스무리한 것은 만들어 두었지만, 그걸 사람이 써야 말이지. 라면 하나나 겨우 끓일 수준의 자재들이다. 아니면 독립적으로 각자도생이 가능한 약간의 군것질거리들?
"양념반 후라이드반 하나요."
KFC는 전쟁통에도 살아남았다. 값은 더 올랐지만. 아무튼 자본주의 만세. 바삭바삭한 기름 냄새와 새콤달콤한 양념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남녀노소 좋아하는 맛이다. 하룻밤 저녁을 땡치는 음식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집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한번에 닭 두 마리를 산 것은 처음이라고. 집에서 치킨을 먹으려면 혼자였으니까. 좁은 나의 집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은 나에게 낮선 것이다.
사오리 씨의 집에서도 식사 준비는 대체로 내가 했었으니까, 여기서도 자연스럽게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꽤 당황했다. 부엌이 있기는 하지만 뭔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텅 빈 부엌이라고 할까... 사오리 씨 집은 방심하면 이것저것 쌓여서 금새 공간이 사라진다면 이쪽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절제된 느낌이라고 할까... 장을 봐와도 뭘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만들려면 조리도구부터 사야할 것 같은 느낌인데, 집주인 동의없이 그런 짓을 해도 될지 모르겠고... 부엌 앞에 서서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며 어떻게 할지 막막하던 그 때,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나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아, 후카미즈 씨, 다녀오셨어요.“
수면실에서 마주쳤던 걸 기반으로 아마 야근을 하셨던 거겠지, 오늘도 야근하실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빨리 퇴근하셨네. 고개를 꾸벅 숙이며 후카미즈 씨를 맞았다. 맞았다라니, 집주인도 아닌데 말이지.
"다행이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왜 고민했을지는 아마 집주인께서 더 잘 아시겠죠... 슬쩍 부엌 쪽을 곁눈질하던 시선을 치킨 쪽으로 돌렸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고 있다. 치킨이라니, 이것도 먹은지 좀 됐지.
흑막의 발톱 첩보부의 사악한 계획. 노조 뽀개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어다닌 혼돈처럼 몸을 바짝 낮춘 채 사이버 세계에 촉수를 뻗어서 더듬는다. FBI였나 CSI였나. 누가 공식 석상에 나와서 말했다. SNS가 발명된 이후로 첩보기관에는 꿈같은 세상이 열렸다고.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기 정보를 거기에 올린다고 말이다.
"일이 순조로워서."
건조한 벽 사이로 집을 돌아다니는 노란색 머리가 확 튀었다. 국화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저녁이라니? 보통 중학생이 오늘 저녁을 고민하나? 오늘 저녁 왜 이래! 하면서 투정은 부려도...
"여기선 라면밖에 못 끓이죠. 보다시피 그냥 창고 같은 곳이니까."
종이 등을 보관하는 책장, 의류를 보관하는 옷장, 육신을 보관하는 침대. 귀중품을 보관하는 금고. 이렇게 생각하니 내 집은 정말로 깔끔한 창고와 같았다. 으레 거기서 나는 곰팡이의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후카미즈 씨는 첩보부니까.. 첩보부의 일이 순조롭다는건 음, 그... 잘 모르겠지만 좋은 거겠지. 덕분에 저녁을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컵라면이 아닌 치킨을 먹을 수 있게 됐으니까. 후카미즈 씨도 일찍 쉴 수 있으시고. 아무튼 좋은 일이 맞겠지. 응.
"아 네, 좋아해요. 치킨이잖아요?“
치킨을... 싫어할 수도 있나...? 그런 뜻을 담아서 되물었다. 그나저나 집주인 공인으로 창고라는 발언이 나왔다. ...물론 딱 보면 그렇게 보이기는 하지만. 창고라고 해도 관리가 잘 된 창고처럼 보이는 집이다. 퀴퀴한 냄새도 쌓인 먼지도 없는, 하지만 집이라고 하기엔 삭막한 느낌이 드는... 그런 집. 싫은 건 아니지만, 내가 들고 온 곰인형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 이상한 기분이 든다.
"뭐어... 집에서 식사를 잘 안하신다면 이런 것도 나쁘지 않죠. 깔끔하고... ...그래도 앞접시나.. 그런 건 있죠...?“
그, 앞접시 없이 그냥 먹는..? 그런 건가요? 테이블도 있는...거죠...? 집주인인 후카미즈 씨를 보는 시선에 간절함이 섞인 걸로 보인다면 딱히 틀린 건 아니다. 그냥 바닥에 펼쳐놓고 먹으라고 하면 뭐, 그렇게 하긴 하겠지만...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황폐해진 나라를 돌아보며 백성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닭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겠노라 선언하였다. 그리고 왕은 좋은 정책들을 펼쳐서 정말로 프랑스 백성들에게 1주1닭을 선사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조가 닭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미담 아닌가. 지금의 황폐해진 세상에 앙리 4세가 부활한다면 그는 다시 사람들에게 치킨을 안겨줄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하였다.
"앞그릇이... 햇반그릇 모아둔게 있는데 잠시만요? 뼈는 거기다가 담고.."
겉옷을 벗어서 옷장에 걸어두고 벽을 향해 걸어갔다. 누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치킨 놓을 곳이 저기에 있다는 사실을. 벽에 살짝 들어간 부분을 눌러주면 딸깍. 공간 절약하기 좋은 벽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가 숨어있답니다. 첩보요원의 집이라고 책장 뒤의 비밀 공간이 있는 건 아니지만서도, 이런 건 가지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치킨이 든 종이상자를 그 위에 얹었다. 미묘하게 락스 냄새가 나던 집이 노릇노릇한 기름냄새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진지하게 책장 뒤 공간 필요하지 않아? 나 조금 위험한 비밀을 캐는 중인데. 서랍 몇 개를 드륵거리면서 생각했다. 물로 씻어놓은 햇반 그릇을 찾았다.
"여기 불편하진 않았어요? 시간 보낼만한게 많이 없을 것 같은데요. 참고로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xxxxxxxx에요. 그리고 충전기는 저기 데스크에."
가출 청소년에게 집과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기는 커녕 치킨을 사주고 와이파이 비밀번호와 충전기를 제공하는 나 글러먹은 어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