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의념의 폭풍 속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사자왕의 할버드였다. 코끼리의 상아를 그대로 쥐여 휘두르는 듯한 오우거와의 힘싸움을 꺾고, 그 목을 깔끔히 베어버린 사자왕은 손을 뻗어 게이트의 흐름을 부쉈다. 빠르게 점등되기 시작하는 세계 속에서 전리품을 챙기듯 이빨을 어깨에 걸친 채, 게이트가 무너졌다.
[ 이야.. 회장님. ]
샤를은 스크린에 :D 같은 얼굴을 띄우며 사자왕에게 다가갔다. 추정 레벨 61. 대결형의 게이트를 단신으로 들어간 사자왕은 불신을 부수기라도 하듯, 완벽히 적을 격퇴해내곤 그 전리품을 챙겨온 것이다.
[ 대단하시네요. 별로 어렵지 않으셨던 거려나? ] " 오른쪽 옆구리. "
샤를이 화면에 ?를 띄웠다.
" 오른쪽 옆구리를 맞았다. 힘겨루기로 이기긴 했다만. 여전히 쓰리군. "
평범한 인간이라면 경악할 만한 이야기에도 샤를도, 사자왕도 평온했다. 사자왕에겐 당연한 이야기였고, 그를 곁에서 지켜본 샤를 역시 그가 패배하는 상상을 할 수 없었으니까.
" 이정도면.. 그들과 상대하더라도 밀리지 않을 수 있겠군. " [ 글쌔요? 당장 제가 만났던 분은 회장님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 " 그가 특이할 정도로 약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나. "
힘이 모든 것은 아니니 지휘부 정도일 수도 있겠지. 하고 사자왕은 옆구리에 건 수통을 빼들었다. 의념의 힘으로 여전한 냉기를 유지하던 찬물을 벌컥거리고, 남은 물을 머리에 흩뿌려 땀을 흘려낸 그는 샤를을 바라봤다.
" 샤를. 준비는? " [ 모두 끝났죠.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
샤를의 의뭉스런 표정에도 사자왕은 묵묵했다. 혼자 움직이겠다. 지휘는 샤를에게 맡기겠다는 그 말에 샤를은 크게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단지 그의 실력을 보자거나, 그런 의미로 들었지. 진심으로 대운동회의 지휘권을 샤를에게 넘기겠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니까.
" 애초에 나는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혼자가 편해. " [ 그렇더라도 최소한 호위라도.. ] " 내가 그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
그 말에 샤를은 침묵하여 고갤 끄덕였다. 영월에 존재했던 CCTV. 그 곳의 파편에서 보았던 거대한 불꽃의 일격. 특별반이 그런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영월 기습 작전을 성공시킨 것도 이해가 갈 법한 일이었으니까.
" 내가 그들을 상대한다. 그들을 상대하는 동안 네가 지휘한다면 베니온도 이길 수 있다고 믿으니까. " [ 하하 참.. ]
멋진 이야기를 한다며 샤를은 피식 웃었다. 앞의 남자는 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절대 패배하지 않고, 언제나 그 등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만드는 왕.
[ 명을 받듭죠. 전하. ]
샤를의 생각은 하나로 굳혀졌다. 이 남자를 왕좌에 앉히겠다. 그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사자왕은 그런 샤를의 생각을 모른 채, 먼 발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미약한 희열이 있었단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숙소에서 관찰하다가 기괴한 열기가 느껴지길래 산책겸 걸어나왔더니, 상상 이상으로 괴이쩍은 놀이가 이뤄지고 있다. 걸어다니는 수박들로 경주를 시키고 거기에 돈을 건다고? 이 놈들은 단체 광기 증상이라도 빠진건가? 세상이 평화롭다보니 한가함을 주체 못하고 미친짓을 하는 젊은이들이 나옴에 나는 한숨을 절레 절레 내쉬었다.
"이런 곳에 전재산을 다 잃는 멍청이가 세상 어디에 있...."
쯧쯧 하고 혀를 차며 누가 듣지도 못할 한탄을 한 뒤에 지나칠 계획이었으나... 그 순간 전재산을 다 잃은 멍청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심지어 아는 녀석이었다. 반짝 반짝한 금빛 뿔과 꼬리. 얼마전 알게된 하프 드래곤 하유하 아닌가.
고민은 깊어져만 간다. 무력하단 것이 이만큼 슬픈 때가 없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눈이 끝없는 지평선을 살펴본다. 회장의 눈은 먼 곳을 살피고 있었지만, 그 눈이 닿는 곳은 이 넓은 미리내고의 전체까지였다. 이길 수 있다. 확률에 기댈 수 있지 않냐고 당당히 말하던 회장은 여기 없다. 단지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몸을 떨고 있는 소녀 유혜나가 있을 뿐이지.
" 잘도 참으셨군? "
그런 두려움에 이죽거리며 민혁은 그녀에게 물었다.
" 장난 아니더라고. 해봐야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겠어 했는데, 시작부터 맥을 치고 나가려고 할 줄은 몰랐어. " " 그 특별반의 반장이라고 했으니까. 예상은 했어. "
물론 처음보다 이후에는 예리한 면은 적었지만 혜나는 그것도 그의 모습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꽤 날카로울 수 있는 주제를 꺼내고, 그 뒤 부족하듯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해주며 적당히 두 세력을 공존한다. 그 과정에서 아마 주도권을 쥐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꽤 순순히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자율권을 주었을 뿐이다. 같이 움직일 뿐, 어떻게 보면 따로 행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도록. 많은 것을 양보했고, 만약 승리한다 하더라도 특별반에 스포트라이트가 더 몰리겠지만 그정돈 감내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히 승리할 수 없을테니까.
" 그래도 우리 회장님도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
체스말 모양의 초콜릿을 흔들거리면서 웃는 민혁의 얼굴에 회장은 고갤 끄덕였다.
" 말 그대로야. 15%란 확률은 은근 적어보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확률은 아니야. 무엇보다도 우리는 3학년이 대규모로 이탈한 상황에서 계산한 거잖아. 3학년의 이탈을 특별반이라는 요소로 채운다. 물론.. 그래도 승률은 30%가 넘지 않긴 하지만. 이제 꽤 유의미한 확률이 되지. "
1/6 미만의 확률과 1/3 미만. 그 수의 차이는 적어보이지만 극명하다. 조금 더 운과 요소에 기대어볼법한 확률. 그 수를 내밀며 웃는 이민혁에게 회장은 고갤 끄덕였다. 숨을 내뱉고, 마시는 숨에 자신감을 채운다. 그 주위로 안정되듯 미온한 분위기들이 천천히 그녀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그녀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포근한 온기가 그녀로부터 풍겨나왔다.
" 최고의 무력과, 최고의 전략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아야만 해. 그런 면에서 회장님이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에라도 생각을 해보자고, 사자왕이나 천자가 우리 회장이었다면 특별반과 융화되지 못했을 거야. 오히려 그들을 집어삼키려 했던지,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려 했던지. 둘 중 하나겠지. 그런데 우리 회장은 아니시잖아? "
초콜릿을 건네면서 웃은 민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에 보이는, 웃고, 화내고, 슬퍼하며 자리를 뜨는 수많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 저 말썽쟁이들을 포옹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으니까. 우리 미리내고의 회장인거야. 그런 당신이 승리하도록 만드는 게 우리 학생회와, 학생들의 역할인거고. 걱정하지 말자. " " 응. "
즐겁게 웃는 회장을 바라보며 이민혁은 주머니 속 손으로 주먹을 질끈 쥐었다.
전력차는 극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지 않는다. 우리는 균열이 없으니까.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저 하늘 위 수없이 흩어진 은하수처럼 우리들은 쉽게 빛을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