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뒤로 머리를 질끈 묶으며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미 수 년 전에 있었던 대운동회의 영상이 한참이나 재생되고 있었다.
" 벌써 대운동회라. 베니온도, 황서비고도 선수를 뺏기기 싫단 얘기일까요? " " 간단하지. 배가 아픈 거야. "
남자는 수많은 서류더미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받는다. 그런 그의 옆에 여성이 커피 한 컵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내려준 커피를 마시면서 살피는 서류에는 얼핏 보이는 글자들이 있었다. '사자왕', '천자', '특별반' …. 셋 다 현재 헌터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주제였다.
" 흔치 않지. 가만히 두더라도 준영웅급의 포텐셜이 보장된 열아홉살의 사자왕, 그 중경 한가의 사생아 출신으로 깐깐한 황서비고를 휘젓곤 지배한 천자, 거기에 다윈주의자들의 앞마당에서 검성을 불러낸 특별반…. 하나같이 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만한 주제니까 말야. 그런 상황에서 특별반의 영월 기습 작전은 상당히 매력적인 수였어. 왜 자신들이 특별취급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자신들의 수준과 실력으로 그걸 증명했다. 그런 얘기니까 말야. " " 하지만 그 배경에 신 한국의 대형 길드들이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요? " " 미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남자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 그들을 끌어들인 것도 실력이야. 간단하게 설명해보자고. 황서비고의 '천자'가 중경 한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들 그것에 대해 뭐라 할 길드가 있다고 생각해? " " 없겠죠? " " 바로 그거야. "
마치 여자를 놀리는 것이 즐겁다는 듯 손을 맞부딪혀 짝 소리를 내는 남자의 표정을 살피다가,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 그건 그들의 실력이고, 그들의 배경이 그만큼 탄탄하단 얘기겠지. 별로 중요한 게 아냐.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월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다는 것. 그리고… 검성의 인정을 받았다. 그게 가장 중요한 얘기지. "
스크린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수 년 전에는 당대의 슈퍼 루키라 불렸던 이들, 현재에도 각 길드의 중추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에이스들의 싸움이 스크린의 여러 부분을 나뉘어 송출되었다. 남자는 손끝에 잡히는 서류들을 만지작거리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건 보이지 않는 왕좌와 같았다. 어느 학교가 최고의 헌터 양성 기관인가? 그런 게 아니라. 누가 차세대의 헌터들을 이끌 만한 실력이 있는가. 그걸 증명하는 자리란 이야기였다.
결국 모든 헌터들의 이상은 최초의 헌터, '헨리 파웰'의 후계자를 노리는 것이다. 누가 차세대의 헨리 파웰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그 헨리 파웰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가를 살필 기회가 바로 대운동회의 자리였다.
" 수 년간 비어버린 왕좌의 주인이 생길 때도 된 거야. "
비어버린 왕좌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상해에 앉아 일어날 때를 노리고 있던 용의 것이 될 것인지.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굳히고 있던 사자의 것이 될 것인지. 아니라면 서울의 하늘을 지키는 은하수의 것이 될 것인지.
판은 무료하다. 이미 짜여진 판 위에서 춤추는 것만한 광대놀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한 적과 싸울 때,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 때의 무료함. 승기를 쥐었다는 고양감 따위로는 채울 수 없는 지독한 무료함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수들이 맞물려 돌아간다. 최선을 찾지 않는다. 단지 지독하더라도 승리하는 수. 그로 하여금 완전한 승리를 노리는 수를 찾아내는 것이 천자의 역할이고 이기는 방법이었다. 전대 회장을 물리치고, 학생회란 조직을 와해시켜 사실상 자신만이 그 왕좌를 굳혔다는 것부터 그의 능력을 추측할 수 있었다.
" 회장님. "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고갤 숙였다.
" 준비가 끝났습니다. "
이번 대운동회를 예견한 것도, 두 학교에 의견을 표현한 것도 그였다. 첫 그림을 그려내어 그 다음의 그림을 완성시킨 것도 그였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이 많았지만, 이 곳에 있는 모두는 그가 당연히 그걸 해내리란 것에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최악에서 시작한 그가 단 일 년의 시간만에 역사의 황서비고를 지배한 것은 황서비고의 이들이 능력이 부족하단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지 저 존재가 운명과, 실력 면에서 뛰어났을 뿐.
" 준비한 인원수는 모두 맞춰두었겠지. " " 네. 각 부의 부장들, 일부 상장들은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를 채우기 위한 인원들 역시 가장 뛰어나다 할 법한 이들로 모두 채워두었습니다. " " 아니. 그게 아니야. " " 예? "
천자는 다가온 이의 어깨에 손가락을 올려 툭, 툭, 툭, 리듬 있게 두드렸다.
" 얼마나 맞물리게 돌아갈 수 있는지. 얼마나 내 이야길 잘 풀어갈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 너희들은 내 수고, 내 패여야 하지. 패와 수에 자아가 있어봐야 지휘에 혼란을 줄 뿐이야. "
유기적이지 않고 무기적이게, 자아와 감정을 내려두고 자신을 따르라는 말. 지독히 오만하지만 확신 있는 단어. 그걸 통해 승리를 이끌어낸 존재다운 말이었다.
" 사자왕과 특별반. 그 둘을 경쟁하게 만든다. 나머지는 내가 이끌어내도록 하지. 너희들의 역할은 그정도면 충분해. 날 따라오기만 해. 승리는 너희들이 모두 즐길 수 있게 해줄테니까. "
거대한 텔레포트 게이트의 불빛이 점화되고, 문의 입이 커다랗게 벌려졌다. 미리내고등학교로 향하는 문 앞에서 '천자'는 고민하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