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조라를 밤산책에서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나를 유령이라고 불렀다. 유령, 어째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희디흰 피부와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사실은 그녀가 정말 유령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요조라는 유령이 아니다. 유령이라면 이렇게 피부를 빨갛게 물들이면서 고장나지는 않을테니까. 내가 그녀를 꼭 안아주자 그녀도 마주 안아온다. 요조라가 내 품을 파고드는 모양새가 되었고 손은 내 옷깃을 잡아 오고 있었다.
" 내 밤하늘에서 가장 소중한 별님이니까요. "
띄엄띄엄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 나는 목덜미에 느껴지는 뜨끈함에 소리 없이 웃으면서 끌어안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길게 쓸어준다. 좀 더 가까워지려는듯한 그녀의 몸짓에 나도 더욱 끌어안아주는 것으로 답한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도시락을 먹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고민하다가 귓가에 속삭였다.
"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래요. "
자주 못보니까 한번 볼때 많이 채워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놔주지 않고 잠깐을 더 안고 있다가 천천히 팔을 풀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테니까. 너무 딱 붙어있나 싶었지만 보는 사람도 없으니 펴고있던 다리를 접고 바로 앞에 도시락을 열었다.
" 막 거창하게 싸온건 아니에요. "
샌드위치, 유부초밥, 오니기리, 치킨샐러드와 약간의 과일로 되어있는 도시락이었다. 가져온 식기들을 세팅하고서 모래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도시락 가방을 끝까지 열어서 세워두면 먹을 준비 끝이다. 나는 먼저 먹지않고서 그녀가 먹기를 기다리며 방글방글한 웃음을 지은채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다고 해주면 좋을텐데.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이 간질간질했다. 보통은 렌의 키가 더 크니 코로리가 머리카락을 만지기 힘든 높이었으나 둘다 물 속에서 평등하게 튜브에 매달려 있는 형태였으니 코로리가 아무래도 젖은 머리카락을 쉽게 만질 수 있었다. 렌은 그것이 부끄럽기도 했으나 기분 좋은 것을 감출 수 없어 코로리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말들은 또 렌을 부끄럽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도대체 코로리는 제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좋다는 고백을 몇 받은 적은 있었으나 제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은 처음이라 많은 것들이 낯설다. 코로리는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지만 제가 그렇게 알려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렌은 뒤이어 제 뺨을 감싸는 두 손에 홀린듯이 코로리를 바라봤다. 뺨에 닿는 온기에, 그리고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좋아한다는 그 말에 렌 또한 코로리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결국 렌은 스르르 튜브에서 미끄러져 바닷물 안에 머리 끝까지 밀어넣어 잠수해버린다. 눈을 꼭 감은 채 열이 올라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꾹 누르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물 속에 꼬르르 잠겨 있다가 이내 다시 물 위로 고개를 든다. 축축히 젖은 바닷물을 고개를 좌우로 푸르르 털어내고는 코로리의 튜브에 몸을 기댄 채 부끄러움에 시선도 맞추지 못한 채 말했다.
“저도 코로리 씨 이름이 어떻든 좋아해요. 그래도 이름이 없었던 것보다는 있어서,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해요….”
이내 부끄러운지 이번에는 튜브를 돌려 반대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방금보다 더 빠른 속도였을 터였다. 부끄러우니까 말걸지 말아달라는 것처럼. 언제쯤 코로리의 말에 부끄럼을 안 타게 될 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밤하늘에서 가장 소중한 별님, 이라는 말이 요조라를 다시 고장낼 뻔 했다는 걸, 아마 코세이는 모를 것이다. 그저 옷 쥔 손 조금 더 힘주어 쥐고 내적 비명으로 참아내었으니까. 안겨있지 않았다면 얼굴이 터질듯 붉어지던 말던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제대로 보여줬겠지만, 아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랬으면 두고 두고 생각나서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고비 잘 넘겼나 싶었는데, 예고 없이 들려온 속삭임에 요조라는 그만 작은 소리를 내어버렸겠지. 읏, 하고.
"그, 그럼 조금만, 더..."
그 조금 더가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요조라도 잠깐이 얼마가 되었든 더 안겨 있었다. 코세이가 팔을 푸는 움직임이 느껴지고서야 요조라도 팔을 풀고 천천히 떨어진다. 손끝이 떨어지기 직전, 옷깃을 살짝 쥐었다 놓는 걸 과연 눈치챘을까. 그 순간 아쉬운 시선 보내는 건 알았을까. 그래도 코세이의 도시락을 먹기 위해서라고 자신을 달래며, 요조라도 옆에서 세팅을 돕는다.
코세이가 도시락을 열어둘 동안 파라솔이 바람을 막도록 살짝 움직여두고, 텀블러를 가져와 컵 겸용인 뚜껑에 에이드를 따라 세팅이 끝난 도시락 옆에 내려놓는다. 그제야 보게 된 도시락의 모습에, 요조라는 눈에 띄는 반응은 하지 않았다. 먹음직하게 담긴 음식들과 자신을 보며 웃는 코세이를 번갈아 보고, 머뭇거리다가 물티슈를 꺼내 손을 살짝 닦고 먼저 샌드위치를 집어든다. 아무래도 먼저 먹길 기다리는 것 같았으니까.
"잘 먹을게요..."
짧게 중얼거린 요조라는 샌드위치의 내용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잡고서 제법 야무지게 귀퉁이를 물었다. 한입 뜯어 열심히 씹어 삼키더니, 말없이 또 한입 먹는다. 코세이는 이전에 봤으니 알 것이다. 요조라가 말이나 행동은 느려도 먹는 속도는 보통이라는 걸. 그러니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는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먹는 내내 말도 표정변화도 없던 요조라는 역시나 조용히 유부초밥에 손을 뻗는다. 손에 묻는 걸 개의치 않고 유부초밥을 먹고서 오니기리도 집어드는 걸 보면, 보기보다 먹성이 좋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야금야금 집어드는대로 먹다가 문득 이건 아닌데, 싶었는지 뺨의 오물거림이 멈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으로 코세이를 보지만 뺨이 볼록하니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씹어 삼켜 입안을 비우고서, 에이드로 입가심 한번 하고, 먹던 오니기리를 든 채로 말한다.
겉으로 말 태연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먹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고 또 새로운 고민 했다는 걸 코세이는 알 길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눈치 채지 못 하게 하려고 얼른 유부초밥 하나 집어서 코세이 앞에 내민다. 아- 해요, 같은 낯부끄러운 말은 못 했지만,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것 만으로 말을 대신하긴 충분했다.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제가 갖고 있던 온기보다 훨씬 따뜻해, 온기라기보다는 열기같기도 했다. 기분탓인지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리는 조그맣게 웃을 뿐이다. 정말로 렌 씨, 빨강이 됐어. 그랬다. 좋아한다고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콩닥거린다. 렌의 말을 꼭 기억하고 있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심장도 뛰고, 덥기도 하다던 말을 기억해서, 렌을 좋아해서, 렌에게 콩닥거린다는게 좋았다. 그러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일까. 렌 씨 파랑에 빠졌어?!
"렌 씨?!"
렌이 물 속으로 사라졌다! 물이 맑아서 렌을 볼 수 있었지만 갑자기 물 속으로 꼬르륵 잠수하니 눈 동그랗게 뜨고 어쩌지를 못 했다.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코로리는 그만, 코로리도 퐁당 튜브 아래로 꼭 잠수해버렸다. 물 속에 있던 꿈을 떠올리고 있었고, 빠졌다기보다는 스스로 잠수한 것이니 겁먹지 않았다. 발도 분명 닿고 있고, 코로리는 눈 꼭 감고 숨 참은 채 물 속으로 꼭 들어왔다. 보통 물에서 눈 뜨는 것도 겁내기 십상이지만 꿈 속에서 자주 떠봤으니 깜빡 눈을 떠버린다. 잘 안 보여! 물 속 너머 시야는 흐렸다. 가까이, 앞에 있는 렌도 흐려서 조심히 손을 잡으려고 했다. 제대로 잡았는지도 모르면서 살랑살랑 흔들어보려고 했다. 렌 씨 진짜로 인어왕자님 된 거야? 하지만 렌이 물 위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가야했는데, 코로리의 숨이 짧았기 때문이다. 꿈과는 달리 참고 있는 숨을 다 써버리면 물 위로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프하ー"
조그맣게 숨을 트고서 고개를 양 옆으로 털어낸다. 폭 젖어버렸다. 젖어버린 가디건은 입고 있던 이유와 어긋났고,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두손으로 꼭 얼굴의 물기를 훔쳐내고 아직도 물 아래에 있는 렌을 바라보면 드디어 물 위로 올라온다. 코로리는 렌이 왜 그랬는지도 몰랐지만, 물 먹었다거나 하는 기색 없이 무사히 물 위에 올라와서 방긋 웃었다.
"응, 이름 바뀌어도 좋아해줘야 해. 나 이름 바뀔지도 모르잖아."
조금 개구지고 많이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작았지만, 또렷하기도 했다. 렌이 정말로 신이 되고 싶어한다면 확실하게 이루어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는 부인이 남편의 성을 쫓더라. 물론 아직 렌에게 이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모두 만약을 가정하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리고나서는 코로리는 작게 놀랐다. 빨라졌어?! 이번에도 튜브 말고 렌을 꼭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