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가 끝나고서 밤하늘과 그녀를 번갈아보고 혹여나 앞에 돌부리가 있어서 넘어지지는 않을지 계속해서 확인하면서도 두 명 사이에 말은 없었다.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신비한 밤의 숲길은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고 그 길의 끝을 알리는 신사도 조금씩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신사에 거의 도착하자 요조라는 방향을 틀어서 신사쪽으로 향했다. 뭐라도 빌려는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향한 곳은 신사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나무 사이로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일 것이었고, 그 별들은 새까만 그녀의 눈 안에서 마찬가지로 빛나고 있었다.
" ... 확실히 겁쟁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
그녀의 말대로 단순히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서 서로의 마음을 포기하는건 정말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 말대로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 지금까지 너무 겁만 집어먹었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지어진다. 딴청을 피우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생각해보니 아까 들었던 얘기가 궁금해졌다.
" 근데 아까 신과 인간이 맺어졌다는건 어떤 얘기인가요? "
일단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교장 선생님 ... 청룡신님을 빼고선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일단 나도 신의 입장이니까. 근데 그 이전에 하나 더,
" 요조라는 ... 신의 존재를 믿나요? "
문명의 발달은 신의 존재를 흐리게 만들었다. 신의 기적에 기대지 않아도 기적을 구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들은 기댈 존재가 필요할때만 신을 찾게 되었다. 물론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새로 신격을 품은 신들도 생기고 있으니까 우리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눈 앞의 이 소녀는 신을 믿을까, 그게 궁금했다.
출근 준비 하면서 잠깐 접속해서 얘기하는 거지만 아오노미즈류카미는 교장이 아니라 이사장이에요. 교장은 이사장과 엄연히 다른 존재에요. 전부터 교장 교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설정상으로 이사장이라는 것만 정정할게요. 어차피 나올 일도 없으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우선은 세밤이었다. 세밤은 악몽을 꾸지 않게 톡톡톡. 딱히 세번 두들겨야만 세밤이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암시하듯 횟수로 몇밤인지 명시하는게 조절하기 익숙했다.
"응, 약속이야!"
시든 꽃같단들 금방 화색이 돈다. 알겠다며 끄덕거리는 고개에 흔들리는 모란 꽃이 빠질까 염려스럽다. 그만큼 방글거리는 건 친구하고 싶어서 모른 척 하는 것도 힘들구, 일하고 나서 친구 못하게 되는 것도 힘들잖아! 그만큼 저울질이 싫었던 것이다. 만약 저울질을 계속 해야했더라면 하룻밤뿐일 악몽이라도 내버려두지 못했을 거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럴 일 없다! 악몽과 관련된 일은 코로리도 힘들어하는 업이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사랑하는데 사랑받구 있으면ー 사람들이 그 사랑을 축하해주면 주인공이잖아!"
멋지게 차려입은 둘이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는데, 가족부터 친구같은 지인들도 축하해주는게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사랑을 맹세하며 입맞추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과 인간의 혼인 의식에서는 손등에 둘만의 문양이 생긴다지만, 그저 증표일 뿐이라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인간의 결혼식이 더 동화같이 느껴지는 건, 코로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딧불이들은 만나고 싶은데ー"
호랑이든 용이든 튀어나올 거 같잖아! 동굴 안에 고위신의 기운이 이렇게 가득할 줄 알았을까! 코로리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발을 떼었다. 반딧불이들 만나려고 눈 딱 감기로 했다. 맹수 앞으로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고위신이라고 주눅든달지, 딱히 혼나는 건 아닌데도 인간들로 따지자면 대표이사님 사무실에 들어가는 말단 사원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동굴의 안쪽은 역시나 고위신의 기운이 가득했고, 좀 좁고 낮았다.
다행히 코로리의 얼굴은 금방 환해졌다. 이제 렌도 편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었다. 결혼식이나 혼인 의식이나 자신에게는 영영 먼 일처럼 느껴진다. 그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어렴풋이 떠올릴 뿐이었다.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가정은 이제 뿔뿔히 흩어져 제 자신도 이리 거의 혼자 살듯이 하고 있다. 그게 불만이라는 점은 아니었지만.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코로리에게 결혼이란 굉장히 긍정적인 모습인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이젠 동굴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코로리는 아무래도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저 동굴에 들어가기 싫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딧불이를 만나려면 이 동굴을 지나가야했다. 렌은 잠시 뺨을 긁적였다가 말했다.
"그, 손 잡을래요? 아니, 동굴 안쪽은 바닥이...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무섭냐는 말이나 왜 그러냐는 말 대신 엉뚱한 이유를 붙인다. 괜히 이유를 말하기 싫을 수도 있지 않는가. 어쨌든 렌은 코로리에게 손을 내민다. 손을 잡지 않는다면 머쓱하게 손을 주머니에 넣어버리겠지만.
렌은 동굴 속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겠지만 꽤나 신비로운 느낌을 가질 것이었다. 생각보다 동굴은 낮고 좁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힐 듯 했다. 하지만 코로리가 한 주의의 말이 차마 끝이 나기도 전에 렌은 어디에 정신이라도 팔린 것인지 툭 튀어나온 돌에 머리를 쿵 찧었다.
가벼이 웃으며 고개를 돌리던 그가 토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한순간 궁금증 어린 표정이 스친다. 대답이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때에는 으레 예의로라도 괜찮냐는 물음을 건네야 마땅한데, 분명히 상태가 좋지는 않았을 얼굴을 보았음에도 걱정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 다음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연희를 관조하는 간객의 기대감 같은 것이 엿보인다. 이야기의 가치를 살피는 감상자의 눈이다. 마치 이 흐름을 뜯어보며 관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 뒤늦게 그가 아차하고 정신을 차린다.
"앗, 큰일입니다.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일부러 이렇게 군 것은 아니었다. 이는 아마츠코토시로가 언제나, 줄곧, 아주 많은 것을 지켜보는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행동을 한 달만 반복해도 습관이 들기 충분한 노릇인데 몇백 년 이상 이어온 행동이 관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큰일이라고 말하는 것치곤 그다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정도로는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정말 큰일이라고 한들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뻔뻔한 심보였다. 아, 아니지. 그래도 걱정은 된다. 같이 여기저기 구경해야 하는데 그럴 컨디션이 안 되면 재미가 없어지잖는가. 혼자서 눈치 없이 산뜻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꾹 눌러 내린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의 일정을 단축하기로 했다. 샘물에 손 담가 시원한 기분만 내고 나머지는 생략한다. 조금 더 여유롭게 있고 싶었지만 내년에도 시간은 있으니 상관 없다. 좋게 생각하자, 올해에 너무 열심히 놀면 휴가에 빨리 질릴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아쉬움은 있어야 했다.
"동굴 안이라 답답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나갑시다. 부축이라도 해 드릴까요?"
부축이란 말을 꺼내는데 어쩐지 우쭐한 기색이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해주기까지 한다! 라는 자찬의 발로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그다지 마음결 고운 신이 아니었다.
빤히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이. 색은 다르지만 그 때의 눈과도 닮.. 그 때가 언제였지? 그리고 그게 누구였지? 나의 친인척들은 전부 다 파랗잖아? 하지만 그건.. 헉 하는 숨 들이킴을 하면서 마이리를 잠깐 보고는 애써 미소짓습니다. 숨을 들이키면서 봐도 뭔가 신성해보이는 샘이고 동굴입니다. 스스로가 멀리 떨어뜨린 것이니까요. 그런 걸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합의는 용케 했네요. 일단은 걱정..과 비슷한 걸 하고 있는 분에게 말을 합시다.
"조금 멍하긴 한데... 이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지도 모르겠네요" 회장님이 여기서 뭔가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 엔돌핀이라도 좀 나오겠지요. 라는 말을 하는 토와입니다. 회장님의 명예를 위해서 자세한 상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영하려던 사람이랑 아까 춤을 추던 거랑 갭이 너무 큰데..? 약하게 큭큭거리며 웃다가 저 때문에 나온 거라면 조금 죄송해지네요. 대신 고급 호텔 디저트 뷔페 무료 이용권 2인용 같이 가기라도 할래요? 라고 약간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부축은 괜찮다고 사양하려 합니다.
"그래도 호타루마츠리인 만큼 반딧불이 떠다니는 풍경이 메인이지 않으려나요?" 호타루-인 만큼 바다에 떠다니는 등불도 호타루라고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메인이겠다만은. 이라고 생각하네요. 동굴 옆쪽의 신사를 흘깃 쳐다보네요. 저기는 특이한 신사인가?
자기 생각이라며 이것저것 말했지만, 불과 얼마 전의 요조라였다면, 생각은 해도 말로써 꺼내지 않았을거다. 아니, 그 이전에 누군가의 얘기에 귀기울이지도 않았을거고, 듣지 않았으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얼마 전과 지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시작이었을까. 요조라는 다만 코세이를 흘끔, 볼 뿐이었다.
"믿어요, 존재라면... 신앙은, 없지만요..."
코세이는 물었다. 아까의 얘기는 무엇인지, 요조라는 신의 존재를 믿는지. 요조라가 듣기에도 왠지 두번째 물음부터 대답해야 할 것 같아,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그리 대답한다. 신의 존재는 믿지만, 특정한 신앙은 없다, 라는 짧고도 간단한 대답이다. 그렇게 말하고 요조라는 코세이의 손을 살짝 당겼다.
"그 얘기는, 가면서, 할게요..."
느릿한 걸음을 떼며 요조라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옛날 옛날에, 라는 진부한 정석으로 운을 뗀 얘기는 내용 역시 진부하다면 진부했다.
오래전, 어느 마을에 한 남자가 살았다. 그는 전형적인 한량 같은 사내로, 일해서 돈을 벌기보다 허구헌날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면서 살았다. 돈이 궁해지면 조각이나 그림을 그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더란다.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로 살았으니 그 집에 시집 올 처자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그는 일평생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걸로 족하다며 홀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보기 좋게 기운 달을 보며 떠오르는대로 시를 읊고 있으니, 어디선가 고운 꽃향 나더라. 아닌 밤중에 무슨 조화인가 돌아보니 왠 꽃다운 처자가 술병 들고 옆에 앉아있지 않은가. 처자는 지나가는 길에 그의 시 읊는 소리 듣고 잠시 들렀다며, 시구절이 참 마음에 들었다고 그에게 들고 있던 술 한잔을 권했다. 그는 사양도 없이 술을 받았고, 그 날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취기에 서로 시를 짓고 그것을 평하며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고 어느새 잠든 그가 퍼뜩 일어나보니 처자는 온데간데 없었고, 꿈이었나 싶었지만, 며칠 뒤 밤, 처자가 다시 술을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같이 마시고 놀다 그가 잠들면 처자가 사라져버리는 일이 몇번인가 반복되었다. 늘 밤에 찾아와 그가 잠들면 사라져버리는 처자에게 그는 어느샌가 연정을 품게 되었고, 고민 끝에 처자가 찾아온 어느 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참 멋도 없는 청혼 했더란다. 그에 처자 대답하길, 자신은 인간이 아닌 신이라며, 그와는 다른 시간을 사는 이라, 먼저 떠날 그를 어찌 보아야 하느냐 하니,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내 일생을 주어 부족하다면, 후생까지도 주겠노라, 오래도록 곁에 있을 방법이 있으면 기꺼이 따를테니, 처자 내키는 만큼이라도 함께 해 달라고 했다. 단호하고도 올곧은 그의 진심에 처자, 아니, 신은 청혼을 받아들였다.
긴 얘기를 하며 신사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으니, 어느새 등불을 띄우는 해변가에 다다른다. 해변가에는 등불 띄울 준비와 등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다. 파도가 닿지 않는, 그러나 등불을 보기엔 적당한 곳에 다다를 쯤, 요조라의 얘기는 마무리된다.
"그와, 신의, 나중이, 어땠는지... 그건, 잘 모르지만... 그의 재주를, 좋아했던, 신의 축복... 덕분에, 그의 후손들은, 종종, 그쪽 재능을, 타고나게, 됐다네요..."
잘은 몰라도 후손까지 있으니 아마 나름대로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는게 요조라의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요조라는 짧게 숨을 한번 내쉬고, 저 앞에서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본다.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 흐르며 등불이 하나둘 바다에 띄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코로리는 덥썩덥썩 손을 잘 잡았고, 손 닿는 거리면 머리 쓰다듬어 자장자장 재우는 일도 많았다. 저번에 수학여행에서 만났던 여자아이에게는 초면에 무릎베개도 내어줬다. 그 아이가 잠꾸러기에 조금 단내가 나서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언제나 코로리가 먼저 다가간 거여서 누가 먼저 내어준게 낯설었다. 코로리는 내민 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느릿하고 살며시 부드럽게 쥐고나면 이 손은 아까 전 손가락을 쥐었던 그 손인데 조금 어색했고, 손을 잡았을 뿐인데 기분이 조금 나았다. 렌씨 손 커다랗다. 바오밥나무 생각나. 한 번 고쳐잡듯이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였다. 고위신의 기운은 여전히 느껴지지만, 동굴 안 속으로 걸어가도 잡고 있는 손만 더 의식됐다. 남들보다 체온이 낮아 손도 찬 편인데 왠지 손이 더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름이라서 그런거겠지.
"렌 씨?!"
강력한 고위신의 기운이고 뭐고 신경쓰일 겨를이 없다! 렌이 걸음을 멈출 때 코로리는 앞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잡은 손이 뒤로 당겨진다. 뒤에서 아파하는 소리도 들렸고, 바로 뒤돌아온다. 눈 동그랗게 뜨고서 렌의 표정부터 살폈다가 조금 더 위로 시선이 향한다. 머리 조심해야겠다고 조금 더 일찍 말할걸! 상처났으면 어떡하지이. 누가 보면 코로리도 돌에 쿵 찧은 줄 알겠다. 제가 다 아프다는 듯이 찡그린 표정이 걱정스러워 한다.
"아픈 거 아픈 거, 날아가라ー¹ 痛いの痛いの、飛んで行けー" ¹ 일본에서 '엄마 손은 약손' 과 비슷하게 쓰이는, 아이가 아파할 때 아프지 말라고 해주는 말.
코로리가 손을 잡자 기분이 묘했다. 생각보다 손이 작은 탓도 있었고, 자신은 이런 저런 운동 때문에ㅡ수영이라고 해도 근력운동도 병행한다ㅡ 굳은 살이 박혀있는데 코로리의 손은 아무래도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조금 불편해 보였던 코로리의 표정도 조금 나아졌으니 그래도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았던 것이 언제였는지. 너무 오랜만이라 간질간질 신경이 쓰였다. 제 손에서 꼼지락거리는 손이 싫다기 보다는....
어쨌든 머리를 부딪힌 건 이래저래 정신이 팔려서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코로리를 잡은 손에도 살짝 더 힘이 들어갔을 것이었다. 렌은 조금 머리를 숙이며 코로리를 잡지 않은 손으로 부딪힌 부위를 눌렀다. 앓는 소리를 희미하게 내며 아픔을 삭이는데 코로리가 놀란 목소리로 아픔아 날아가라 하며 말을 해준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아픔보다 손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것에 신경이 쏠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벌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 했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숙였던 몸을 동굴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히 피면서 조금 찡그려졌었던 표정도 펴려고 한다. 머리를 감쌌던 손을 보니 피가 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픔이 좀 가시자 흐릿하게 미소도 지어낸다.
"...덕분에 괜찮아진 것 같아요. 피가 나거나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세게 부딪히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머쓱함에 다시 가자며 걸음을 옮긴다. 민망함에 잡지 않은 손은 목덜미에 머문다. 이후로는 부딪히는 일 없이 동굴을 빠져나왔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아주 커다란, 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넓은 호수같은 샘과 맞닥뜨린다면 렌은 아마 작은 탄성을 내었을 것이었다.
신의 존재는 믿는다니. 내가 아는 요조라라면 단칼에 그런게 어딨어요? 하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래서 눈이 살짝 커진채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대로 손을 잡아 당겨져서 천천히 남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길을 걸어가면서 해준 이야기는 옛날의 한 사내의 이야기였다. 신과 만나 사랑에 빠진 그가 선택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선택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 해피엔딩이네요. "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니 반딧불이 머물던 숲길은 거의 끝나가고 어느새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해안가에 와있었다. 등불의 준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바다 위엔 등불이 아직 떠있지 않았지만 돌아다니는 인원을 보니 그 준비는 거의 끝난 것 같았다. 이윽고 잔잔한 음악과 함께 바다 위엔 등불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마치 바다 위를 날아가니는 반딧불이처럼 등불들은 파도를 따라 넘실거리며 그 수를 더해가고 있었다.
"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했죠? "
모여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짝을 짓기 시작했다. 연인은 연인끼리, 부부는 부부끼리, 어린 아이와 손을 잡은 부모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로 부딪힐 것 같기도 했지만 워낙 넓은 해안가라 솜씨 좋게 충돌을 피하며 춤을 추는 그들을 바라보았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만약에 ... 내가 신이라면, 요조라는 어떨 것 같아요? "
그 누구에게도 해보지 않은 말을 지금 옆에 서있는 소녀에게 나지막히 해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은채로 물어봤지만 미소와 함께 스려있었던 장난스러움은 하나도 묻어나지 않는다.
장난의 신 같은 존재가 짓궂은 장난을 친 거라거나, 여기서 계속 느껴지고 있는 기운의 주인되는 신이 몸소 친 장난일 수도 있는 거라면 모를까. 코로리는 후링이라는 것부터 칭찬이었다도 알려주었는데도 렌이 벌 받았다거나 하면 속상하단 듯이 입술 삐죽였다. 잘못한게 무엇이 있다고 벌 받았다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칭찬에 인색해! 렌 씨 완전 칭찬 구두쇠ー. 벌 받을거면 이 좁고 작은 동굴이 벌 받는게 낫겠다.
"그래도, 이따가라도 다시 아프면 말해줘야 해? 또 해줄게!"
찡그리고 있던 렌의 표정이 펴지면, 코로리도 아프겠다며 걱정되어 찡그리고 있다가도 덕분에 괜찮아졌다는 말에 작게 웃었다. 코로리는 치유의 신 같은게 아니라 그럴 리가 없겠다. 하지만 렌이 흐릿하게라도 웃어보이니까 몇 번이고 다시 해줄 수 있었다. 방글 웃고서는 다시 가자는 렌과 발을 맞춘다. 동굴 안에서 샘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 길이 끊기면서 곧 발견할 수 있었다. 걸리버가 와서 샘이라고 부른거야?! 크기로 보나 깊이로 보나 샘보다는 호수 같은데 누가 샘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위신의 기운도 여기서 제일 짙어진 것만 같다. 단순히 렌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좀 더 신경쓰여서 무감해졌다가, 샘을 보고서 퍼뜩 다시 고위신의 기운을 느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째서든 코로리는 무심코 렌의 손을 꼭 쥐었다. 용한테 잡아먹히는 꿈 꿀 것 같아ー 내 악몽은 아무도 못 지켜주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 얘기는 명확한 끝맺음이 없었다. 신을 사랑한 인간과 그 사랑을 받아들인 신이 행복했는지 어땠는지는, 마치 그 둘만의 일이란 것처럼 쏙 빠진 채 그들의 후손에 대한 것만 짤막히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요조라는 그 얘기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옛날 얘기는 옛날 얘기이고, 당사자가 아닌 이상 기분도 감정도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니, 그냥 그랬구나, 하는 이 전개가 제일 마음에 든다. 아니었으면 이렇게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밤공기를 살랑이는 음악과 함께, 천천히 바다 위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등불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짝을 짓는다. 어른도 아이도, 서로 마주보고 손을 잡고서 제각기 빙글빙글 춤을 춘다. 바다 위를 수놓는 등불과 춤추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 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코세이와 함께 그 풍경을 바라보던 요조라는 옆에서 들린 말에 힐끔, 시선을 굴린다. 등불의 빛이 해상의 별처럼 담긴 검은 눈은 또다른 별세상 같다. 그 눈이 평소와 같은 미소지만 장난기는 싹 뺀, 그런 코세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자신이 신이라면 어떨거 같냐는 물음에 요조라의 눈은 한번, 두번, 깜빡이고, 곧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말한다.
"딱히, 아무것도...? 지금까지 본, 이자요이 코세이, 라는 모습이... 전부, 가짜라면, 모를까... 그대로라면, 상관없어요... 뭐, 무슨 신, 인지... 궁금은, 하겠지만..."
신의 존재는 믿지만 신앙심은 없다. 그러니 지금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이가 신이라고 해도, 요조라의 태도가 크게 달라질 건 없다. 달라질 요소라 하면, 여태 만나고 대했던 모습들이 꾸며낸 가짜인 경우일까. 그것도 사정이나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코세이가 신인건 요조라에게 별거 아닌 일이라는 의미다. 문제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며,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 끄덕일 뿐인 일이다.
"아, 그거라면, 사양이에요... 신관...? 무녀? 가 되라던가... 신도가 되라던가... 그런 소리, 하면, 라인 지우고, 앞으론 상대, 안 해줄... 거니까요..."
그저 자신이 싫은 일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그런 요조라의 대답은 진지한 코세이의 표정에 비해 가벼웠을 것이다. 가벼운 진심이었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