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왕 된 사람은 누가 무슨 번호를 들고 있는지 알고 있는거 아닐까. 다 보고서 미션 할 사람을 고르는게 아닐까. 하지만 자신을 뽑아서 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렇지만 이게 우연이라면 또 무슨 우연이란 말인가...
5가 적힌 막대를 바닥에 떨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으으, 앓는 소리 난 듯도 싶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떨리는 손으로 코로리에게서 고양이귀 머리핀을 받아온다. 주섬주섬 머리를 매만져 두 갈래로 나누고, 각각 묶어서 양갈래로 만든 다음, 고양이귀를 반듯하게 펼쳐서 머리핀을 그럴듯한 위치에 딱딱 착용한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표정에 생기는 없었으며 눈빛 역시 흐릿했다.
머리를 다 묶고선 역시나 죽은 눈으로 토와를 본다. 그래, 이 사람도 같은 처지긴 해... 그리고 말없이 손을 내밀어 토와의 손을 잡는다. 얌전히 잡고 있다가 턴이 바뀌면 얌전히 놓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아키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물론 방금 전의 그것보다는 좀 나은 것 같긴 하다만, 지령이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이거 나를 가지고 서커스를 시키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다시 한 번 시미즈가의 이름을 걸고 (Ver.모 소년탐정) 그는 이 지령을 수행하기로 했다. 물론 잠시 자신에게 지령을 내린 렌을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긴 했지만.
아무튼 이자요이 코로리. 같은 반 여학생이기도 한 그녀의 모습을 아키라는 잠시 조용히 바라봤다. 이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그녀를 가푼하게 자신의 등으로 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 업히는 것은 조금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금방 끝낼테니까요."
별명도 그렇고, 전의 행동도 그렇고. 잠시 그런 것을 떠올리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아키라는 코로리가 떨어지지 않게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3번 반복했다. 아마 대충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이어 빠르게 끝을 낸 그는 약하게 숨을 내뱉고 다시 한 번 균형을 잡고 코로리가 떨어지지 않게 오른쪽으로 두 번 돌았고 잠시 그녀가 어지럽지 않게 텀을 줬다가 왼쪽으로 세 번 돌았다. 한 번에 많이 도는 것이 아니었기에 비틀거리는 일은 없었고 마지막으로 휘파람을 세게 휙 불면서 그는 코로리를 아래로 내려줬다.
"수고했어요."
이어 그는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두 손을 탈탈 턴 후에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쉬지 않고 한 번에 돌라는 말은 없으니까 이 정도는 세이프지 않겠는가.
"아. ...이걸로 전에 비행기 태워주기로 한 약속은 지킨거예요."
물론 일어나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거 아니겠냐는 식으로 생각하며 아키라는 싱긋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키라가 잠시 조용히 바라볼 때 괜히 지레 겁먹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런 벌칙을 수행시키도록 한 왕을 바라보는 건 그럴 수 있다지만 나 아무짓도 안 했는데 왜 나한테도 그래! 한숨까지 쉬구! 억울해서 업으려고 할 때 발버둥쳐버릴까 생각했지만 업으려는 쪽보다야 업히는 쪽이 엉덩방아 찧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았다.
"학생회장님, 삐진거면 가자미라구 불러버린다."
코로리는 얌전히 업혀있기만 하면 끝나는 벌칙이라 안 그래도 조금 미안한가 싶었는데, 이런 말을 들어버리니 너무 못되게 굴었나 싶어졌다. 착하고 마음 넓은 신인 내가 용서해줄까! 앉았다 일어났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허술하게 잡고 있다가 제대로 붙잡았다.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때도 잘 잡고 있다가 휘파람 소리가 나면 그때부터 내려갈 준비를 했다. 업혀있는 동안 저번의 약속을 이걸로 지켰다고 할까 싶었다. 레고 밟는 정도의 악몽보다는 약한 거 같기야 했지만, 나 착하고 마음 넓은 신이니까!
"회장님이 수고했ー"
뭐야! 난 그렇게 하라구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키라가 먼저 비행기 태워주기로 했던 약속 이야기를 하며 웃어버렸다! 코로리는 어이가 없어졌고, 말하던 것도 끝맺지 못하고 끊겼다. 멋대로 비행기 태운 거라고 하면 반칙이라며 따지고 들기에는 다들 함께 게임 중이었던 거니까, 자리에 돌아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코로리가 아키라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얍삽해!
과정이야 어떻든 주의를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니 된 것이겠지. 후미카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시금 조용히 발을 내딛는다. 천천히 가는 게 좋지 않냐 말한 것치곤 여전하게도 본인에게는 힘든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앞질렀던 걸음도 옆에서 동행하는 모양으로, 다시 엇비슷한 위치로 맞추어졌다.
"그래."
정확하게 필요한 대답만을 하고 묵묵한 걸음만을 옮길 뿐이다. 이번에도 후미카는 조금 뒤에 뜸을 들이다 물었다.
"너는 혼자 다니니?"
직접 묻긴 했지만 조용한 자리를 찾는다 했으니 그렇겠거니 생각한다. 제 경우엔 같이 다닐 친구가 있다. 하지만 인간 친구의 경우 느릿느릿하게 구경하려는 자신의 박자에 맞추지 못할 테고, 신의 경우엔…… 저부터가 워낙 혼자 나돌길 편해하는 성격이니, 서로 성격이 어떤지 아는 사이이니 알아서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상황에 이르렀다. 걸으며 고개 들어 완만하게 뻗은 산길의 윗자락을 살펴본다. 꼭대기까지 그리 멀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제 기준에서일지 모르지만.
날것을 잘못 삼켜 고생하는 거랑 비슷하다는 말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부러 태클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느낀다는데 뭐라고 할 말도 없었고. 그런데 대뜸 좋아하는 사람을 묻는다. 렌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미즈미를 본다. 그러고보니 아키라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가. 아니, 그건 마츠리를 같이 가고 싶은 이에 대한 물음이었던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소중하다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가족이나 친구들도 있을 수 있는 건데."
렌이 조금 샐쭉한 표정으로 미즈미를 보았다. 장난치는 것을 다 아는 모양새이다. 그런 장난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렌은 도리어 저에게 또 물음을 던지는 것에 눈을 깜빡였다가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이내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야 네가 먼저 우리 어머니에 대해 물어봤잖아. 아냐, 됐어."
렌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런 생각을 애써 떨쳐내려고 했다. 어머니가 신이든 신이 아니듯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캐고 싶지도 않았고, 이 여학생이 수상하게 구는 것도 굳이 파헤쳐서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괜히 시비 걸지 마. 또 그러면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초등학생처럼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할테니까."
렌은 답지않은 심술을 부린다.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그저 다음부터는 건들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별 타격은 없지만서도 그냥 생긴 모습이나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소하게 시비를 걸리는 것도 썩 기분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슬슬 시간이 끝났는지, 안내원이 안내를 하기 시작한다. 다시 발을 씻을 물을 주고 발을 닦으라는 타월도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