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카의 머리가 코로리의 무릎 위로 닿으면, 금방 잠이 쏟아지게 될 것이다. 잠의 신으로서 눈 깜빡할 때 눈꺼풀이 다시 걷히지 못하고 까무룩 잠에 들게 하는 것쯤이야 간단했다. 코로리는 아미카가 잠에 빠져들었다 싶으면, 몸에서 힘을 뺐다.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겠다 싶어져서 긴장이 풀렸다. 안 들켰다아! 짧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무릎에 닿아 흐트러져있는게 간지러웠다. 물론 잠꾸러기의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로리는 아미카가 충분히 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잘 되지는 않았다. 코로리 또한 원래 밤에 일을 하고 낮에 잠을 자서 지금은 자야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
"아미쨩, 딸랑딸랑이야!"
코로리도 깜빡 잠들었다 일어났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는 아미카가 얼마나 잤느냐에 따라 다르겠다! 코로리는 꽃단내가 맡아지지 않아서 손등으로 눈을 부빗거렸다. 플라네타리움 안에서는 계속해서 밤하늘이라 시간 감각이 흐렸다. 만약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면, 숙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 혼난다는 생각에 아미카의 잠을 깨우려고 해본다. 톡톡 손바닥으로 아미카의 팔뚝에게 노크를 해보았다. 똑똑똑, 일어나! 가야 해!
테츠야가 생각한대로 그래 보인다는, 대놓고 하는 말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경우엔 그런 일을 일일이 신경쓸 만큼 불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안 마셔도 되니? 많이 더워 보이는데 말이야."
아직 입 안 댄 것이란다. 그렇게 첨언하며 후미카는 딴소리로 말을 돌렸다. 테츠야의 질문에는 별달리 대답이 돌아가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하루 온종일 일하거나, 며칠 몇 달을 거쳐 산맥을 넘는 일 쯤이야 옛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그 비슷한 생활을 했으니 그런 것에 지칠 리 없다.
그러다 상대의 영문 모를 행동에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테츠야가 던진 주사위를 따라 아래에서, 그리고 소년의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해석하기 쉬운 눈빛을 하고 있다. 언어로 치환하자면 '이건 무슨 의미니?' 정도의 의미다. 후미카는 곧 시선을 거두고 가방을 뒤적거리다―이번에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 출처 불명의 짐이 아니었다― 곧 물건 하나를 꺼내 상대에게 내밀어 보였다. 액티브 아일랜드의 안내 팜플렛이었다.
"우리 위치는 이곳이고, 산으로 가려면 이렇게 이동해야 해."
이렇게, 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산까지의 거리를 쭉 표시한다. 지나치게 멀지는 않지만, 번거로움과 더위를 감수하고 갈 만큼 가깝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다.
렌은 친구들과 무리지어 다니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원래부터가 혼자있는 것을 더 편해하는 타입이다보니 놀이동산에 와서도 애들과 열심히 다니다가 잠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쉬고 있었다. 잠시 그늘진 벤치에 앉아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롤러코스터를 한 번 더 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ㅡ친구 중에 롤러코스터를 무서워하는 친구가 있어서 한 번 더 타자고 더 권하지 못했다ㅡ 롤러코스터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보통 놀이기구를 짝을 지어 타고 오는 터라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 중에 롤러코스터를 잘 타는 친구를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친구들은 귀신의 집에 가겠다고 하고 갔으니 따로 부르기도 뭐한 것이었다. 사실 귀신의 집에 간다기에 잠시 쉰다며 빠져나온 것이 맞았다. 무서운 것을 엄청 못견디는 것은 아니지만ㅡ맞다ㅡ 굳이 가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든지 있지 않던가.
혹시 가는 길이나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 일단은 가보고 없으면 혼자라도 타야지, 하는 심정으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마침 요조라를 발견한 것이었다.
“호시즈키 씨, 안녕.”
렌이 반가운 표정으로 요조라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요조라는 늘 학교 수업에 빠지니 늘 혼자인 느낌이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자신도 혼자 였으니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러고보니 요조라도 흰색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이것도 마찬가지인 셈인가? 렌도 마침 흰색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 옷장 윗옷 중에는 거의 흰색이 대부분인데다가 흰티에 청바지 조합은 무난한 조합이니 그저 우연이었지만.
아직 목이 마르진 않으니 괜찮았다. 상대방이 목이 마를 수도 있기도 했고. 가지고있는게 그것 뿐 이라면 일단은 아껴두는게 좋을 것 같다. 아직 산 근처에도 오지 않았어.
던진 주사위를 다시 회수해 옷에 있는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런 행동을 의문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말대로 오해할 수 있으니 말을 해야한다면 아무말도 듣지 않았는데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알려주는건 오해의 소지가 있을테니까.
여러 말을 했지만 그냥 심술이었다.
가방을 뒤적여 팜플렛을 꺼내는 모습에 '어라, 저 물통은 어디에서 꺼냈더라?' 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럼 가자. 어차피 저녁까지 할 일도 없어."
그녀가 알려준 길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먼 거리도 아니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도착하겠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푹 잠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미카는 머리를 흔들며 애써 정신을 차렸고 보니까 시간은 꽤 지난 것 같았다.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아 감사합니다. 아직 숙소까지 가는데 걸릴 시간은 적절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사실이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아 너무 잠들어있었죠.."
아미카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선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기분은 이상했다. 확실히 개운했다. 피로가 풀린듯한 느낌? 꽤 오랜만에 느낀 것 같았다.
학생부에 대한 좋은 평에 아키라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학생회장이고, 학생부의 멤버이자 대표였으니까. 그런 자신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 좋은 평을 받고 있으니 어떻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 괜히 작게, 소리없이 웃던 그는 표정을 관리하며 롤러코스터의 끝자락에 줄을 섰다. 아무래도 롤러코스터는 대대로 인기가 좋은 놀이기구였기에 조금 줄이 길긴 했으나 빠져나가는 속도를 보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나름대로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이대로라면 다다음번 정도면 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구경하고 뭐고... 애초에 호타루마츠리는 저희 시미즈 가문에서 개최하는 마츠리니까요. 구경 이전에 준비도 하는 측이에요. 전."
사실 자신이 해야 할 것에 대한 교육 등은 이미 수학여행에 오기 전에 모두 끝내긴 했으나 그래도 또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이 수학여행이 끝나고 돌아가게 되면 이것저것 준비를 할 것을 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이 해야 할 것에 대한 절차에 복습할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호타루마츠리가 끝나기 전에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아마 첫날에는 저도 마츠리를 즐기게 될 것 같지만요. 집에서도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이럴 때는 즐기라고 했으니. ...적당히 둘러보고 구경하고 즐기고. 그런 느낌이 될 것 같네요."
적어도 자신에게 잡혀있는 약속은 없었다. 그렇다면 첫날에 적당히 두리번거리다가 아는 이가 있으면 같이 둘러보자고 제안을 해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줄어드는 줄의 속도에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가만히 롤러코서트를 바라봤다.
"이타니 씨도 재밌게 즐기길 바랄게요. 다른 것은 몰라도 호타루마츠리니까 반딧불은 실컷 구경해야 하지 않겠어요?"
놀이공원 안은 제법 사람이 많았지만, 천천히 걸으면 부딪힐 일은 없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시선이 마주칠 일도 없으니 괜히 어색하게 지나칠 일도 없, 을 거라고 요조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면 아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요조라가 롤러코스터 쪽으로 가던 중,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부르며 인사를 해오는 지금처럼 말이다.
"...안녕..."
원래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정확히 이름을 불렸기 때문에 요조라는 무시하지 않고 시선을 힐끔 움직였다. 목소리로 어렴풋이 떠올렸던 이미지가 눈 앞에서 맞춰진다. 한번 도와줬던 걸 계기로 아침에 인사 정도는 하게 된, 같은 반의... 세이 렌, 이다. 요조라와 마찬가지로 교복 아닌 사복 차림인 렌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거리낌이라곤 없다. 그렇다고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확인차 봤다는 느낌이다. 요조라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고 나자 곧장 시선을 돌려 지도로 향했다. 넓게 펼치고 있던 지도를 딱 지금 걷고 있는 부분이 나오게끔 접어서 한 손에 들고, 이제 앞을 보고 걸으며 말한다.
"아무거나, 가까운 거..."
그림을 도와줄 때와는 전혀 딴판으로, 건성인 대답을 내놓으며 요조라는 렌이 아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피했다기보다 거기 뭐가 있는지 보기 위해서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긴 레일이 위압적으로 펼쳐진 롤러코스터가 제일 먼저 보인다. 그렇다며 이대로 가며 저걸 탈 수 있는 곳이 나오는 걸까. 방금 자신이 한 말대로면, 중간에 다른게 있지 않는 한 저걸 타게 될 듯 싶다. 뭐, 간만이니 괜찮겠지. 요조라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지도 든 손을 까딱여 롤러코스터 레일을 가리킨다.
"아마, 저거."
놀러온 것 치고 이렇게나 감흥도 즐거움도 없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요조라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직접 물어보지 않아서인지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주사위를 던지고 결정을 한 듯하니 점이라도 친 걸까 생각했다. 개인적인 액막이 방식일 수도 있겠고. 그러다 테츠야의 말에 무덤덤하게 즉답했다.
"난 같이 가겠다고 한 적 없단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딱 잘라서 말한 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10여초 후에 제 발언의 문제점을 깨닫는다. 테츠야를 거부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저 동행하겠다 말한 적 없고 호되게 발 밟은 사람이니 좋은 기억도 없을 텐데, 자연스럽게 같이 가는 걸 상정하니 의문이 들었기에……. 후미카는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며 팜플렛을 집어넣었다. 조금 늦게 말이 덧붙는다.
"……하지만 싫다는 뜻은 아니란다. 그래."
이곳 지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 방향만 맞으면 찾아갈 수 있으니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길을 헤매진 않을 테다. 산에는 그리 특별할 게 없을 것 같아 원래는 산으로 갈 계획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된다면 가서 나쁠 것 없다. 혹시 모르지, 관광지이니 산에도 무언가 설치해 두었을지도 모르고. 더하여 괜찮다 말했지만 무리를 하게 되면 테츠야의 발이 다시 아파올지도 모르니 따라가기로 했다.
아니, 그럼 산이 있다고 말을 하지 말던가. 물도 준비해뒀는데 당연히 가는거 아니었냐고. 아아아, 부끄러워. 이런 착각을 하다니 도대체 이 끓어오르는 혈압을 어떻게 진정시키라는거야! 아니다, 이건 상대방의 잘못이다. 말을 헷갈리게 했으니까 내 잘못이 아니다! 결단코 내가 저 사람이랑 어떻게든 산에 같이 동행하고싶다는 의사표현을 한 것은 아니다! 팜플렛까지 들고 세세하게 설명을 하는데 어떻게 같이 가는가 아니라는걸 알겠느냐고!
아아아아아아. 죽고싶다. 역시 사람은 믿을게 못된다. 특히 나이가 비슷한 여성은 더더욱! 얼마나 제멋대로인건지!
"그, 그래."
이래서야 상대방이 불쌍한 나를 위해 '어쩔수없이' 같이 가주는 양상이다. 비참하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비루하다. '웨이ㅡ' 거리며 시끄럽게 구는 것들을 피해서 오는 결과가 이거라니!
"싫으면 안 와도 상관없다고?"
그래. 어차피 갈 생각도 없었다는데. 저렇게 무덤덤하게 말하는걸 보면 열명이상의 썸을 타는 사람처럼 놀리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게 더 마음속에 상처가.
자신이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과장하는 티가 날 정도로 난감해하거나 황급히 아니라고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후미카는 아직 그 정도의 사회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이 사과해야 할 때라는 건 안다. 아니, 달래주어야 하는 때인가? 그는 테츠야를 졸졸 따라가며 말했다.
"싫은 것 아니래도. 네가 날 안 좋게 생각하는 줄 알고 그랬단다."
달래듯이 말하는 폼이 후미카치고는 다소 서두르고 있다. 착각으로 마음과 자존심이 상해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10대 남자아이의 까칠한 반응은 묘한 데자뷰를 불러 일으킨다. 꼭 사춘기 아들을 보는 기분이 이렇겠거니……라고 생각하기엔 풍어신의 아들은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얌전했지만. 아무튼 후미카는 테츠야 달래기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노력과는 별개로 그 기술이 모자란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삐쳤니?"
삐진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면 시비 거는 것밖에 안 된다. 일부러 놀려먹으려 이러는 것이 아니라 더 절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