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화가나도 자신에게 그 화가 난 눈을 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냥 trpg인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검술에 진심인거야. 설령 가상이라고 해도 검을 든 이상에는 승리해야한다 이건가!
"...회피.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성공."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살기가 증가하는 것 같은데 기분탓인걸까. 혹시 다음 주사위의 결과가 이 조용하고 아담하고 소중한 부실의 미래를 결정하는게 아닐까? 불안하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는 언제나 사람에게 불안감과 희망을 동시에 부여한다. 그런데 왜 난 불안감밖에 느껴지지 않는거지.
"당신은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의 궤적을 읽었고, 가까스로 그 화살을 피해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허벅지에 화살이 스쳐 따끔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상처가 벌어지면 출혈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동이란말이지. 내가 플레이하는게 아닌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걸까.
"이동.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그녀가 던진 주사위가 순간 하늘을 날았고 데구르르 굴러서 그 결과를 알려주었다.
18.
"성공. 당신은 상처입은 다리를 이끌어 모든 고통을 무시한채로 적을 향해 달려갔고, 간신히 상대방이 화살의 시위를 당기기전에 그의 앞으로 도달했습니다. 다음행동을 선택해주세요."
"사람만큼이나 신도 많은게 여기 특징 아니겠나요? 그래도 그런 존재들 역시 이런곳에서 살아숨쉬고 있다면 좋겠네요~"
세상에는 분명 인지를 초월한 일들이 일어나기에, 그것은 도무지 사람이나 자연 자체의 능력으로선 있을수 없기에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곤 절대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그들을 신봉하며 추앙했다. 그렇게 억지로 자신과 급의 차이를 두어야 믿고 의지할 것이 생기거니와, 좋은일이나 나쁜일이 일어나면 그들이 도왔다 하거나... 그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할테니까. 누가 그랬던가? 하늘은 만물아래 평등하거늘 인간은 변덕이 죽끓는듯 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만약 신들이 정말로 살아숨쉬는 존재라면... 마냥 허상이 아니라면 자신들처럼 고뇌하고, 슬퍼하며, 기뻐하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펼치곤 했다.
이름난 가문의 자식이건, 유명한 회사 사장의 2세이건, 그런건 사람을 사귀는데에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입장에선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런 사회적 위치가 누군가에게 길을들이는데 부가적인 요소일뿐, 필수조건이랄게 되던가?
어느덧 큰길로 들어서 횡단보도를 지나고 있었을때즈음, 불현듯 생각이 난건지 이름을 물어오는 그에게 그녀는 생긋 웃어보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딱히 격식을 차리고 싶다거나 혹은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온 습관이었고 자신의 말버릇이었다. 물론 거기서 더 들어가자면 조금 더 이유가 있었지만 굳이 그런 것까지 이 후배에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며 일단 그녀의 말에 그는 대답했다.
"아니요. 이키노네 씨라고 부를게요. 물론 이름이 더 짧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발음으로만 따지자면 크게 차이도 없고, 그냥 제 말버릇 같은 것이거든요. 요비스테는... 잘 안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조금 선을 긋는 느낌처럼 보인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굳이 성에다가 씨를 붙이면서 나름의 호칭을 유지했다.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하물며 정말로 친한 소꿉친구에게도 이름으로 부르기보다는 그냥 성으로 부르면서 반말로만 대하는 정도이니. 물론 그에 대한 이유도 상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지금껏 가족과 친척을 제외하고 그에게 요비스테로 불린 건 단 한 명뿐이기도 했으니 더더욱.
"제가 호칭을 이렇게 정하는 것처럼, 이키노네 씨도 편한대로 불러도 괜찮아요. 너무 이상한 별명만 아니라면야."
그래도 보통은 시미즈 선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며 그는 살며시 옆으로 다시 틀어 조금 한적한 길가로 들어섰다. 그러자 저 편에 커다란 료칸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시야에 들어왔다. 그보다 조금 더 옆에는 제법 큰 크기의 일본의 전통 저택 느낌의 건물이 있었다.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크기의 마당이 있으며 2층 크기의 저택은 상당히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저 료칸 건물이 바로 가미즈미 온천이에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제 집이자 가미즈미 온천을 운영하고 있는 시미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저택이기도 하고요. 그와 동시에 제 집이에요."
말 그대로 자신은 집으로 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다시 한 번 료칸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 료칸으로도 쓰고 있긴 하니 숙박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온천으로서도 이용할 수 있어요. 편할 때 얼마든지 이용해보세요. 물이 정말로 좋거든요."
아무래도 그가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데에는 격식이나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기보단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아니면 자신만의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단호하게 말한다면 그녀 역시 강요할 이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말할 이의 선택사항일 뿐더러 이름을 묻는 이에겐 늘상 해오던 말이었으니까,
그렇게 두고 보자니 굳이 성씨를 고수하는 이유도 궁금하긴 했지만 당연스럽게도 그럴만큼 낮이 익은 상대도 아니니 그 질문을 굳이 꺼내진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아는 재미로 남겨두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을까?
"이상한 별명만 아니라면야, 라고 하시니까 괜시리 더 이상한 별명을 붙이고 싶기도 하네요~ ...그래도 지금 당장 생각나는건 없으니 나중에 정하는걸로 하고 지금은 선배님 정도로만 부르는게 더 재밌겠네요~"
프렌치엔젤피쉬는 단 하나의 반려만 들이는 올곧은 물고기지만 그만큼 저만의 고집이 있었다. 그것은 제 외모가 바뀌고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사항이었고, 그런 생태가 보면 볼수록 그와 겹쳐보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안내하는 길을 따라 다다른 곳에는 확실히 커다란 료칸이 있었고, 그 옆에 위치한 꽤 큰 크기의 전통가옥도 있었다. 역시 관광지답게 저택의 모습도 본격적이구나, 라고 생각하던 그녀에게 그가 설명을 달아주었을까?
"아하하. 가능하면 생각으로만 해주세요. 안 그래도 요즘 생각도 못한 별명으로 불리는 일도 있어서."
이를테면 키라키라쨩이라던가. 따스한 봄날에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한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키라는 괜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물론 별명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키라키라쨩이라니. 정말 잊을래야 잊기 힘든 임팩트였다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괜히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튼 료칸과 전통가옥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키라는 무슨 말이 나올지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야했고, 가미즈미 온천을 알고 이용해주는 고객이 하나 더 늘어난다면 저로서도 나쁜 것이 아닌걸요. 김에 가족 분들에게도 홍보 좀 해주면 고맙고요. 아. 물론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물론 진심으로 해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좋게 봐주시고 이용 많이 해주세요 정도의 비즈니스적 말과 미소를 보이면서 아키라는 다시 한 번 쭉 위로 기지개를 켰다. 일단 집으로 가서 오늘은 수면을 푹 취하면서 몸에 녹아있는 이 피곤함을 풀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막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이어 대답했다.
"그리고 온천이건 회사건 오래 가려면 이용해주는 고객 분들이 좋은 분이어야 하는 법이고요. 가미즈미 온천. 많이 이용해주세요. 많이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좋은 곳인지 아닌지는... 직접 이용한 후에 느껴봐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시미즈 집안의 사람인 제가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보다 직접 물을 경험해보고 느껴보는 것이 효과적이잖아요?"
나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아키라는 슬슬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스즈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의 의도가 어떠했던 상대방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작은 행동들 하나하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스즈는 눈 앞의 작은 소녀가 알고보니 자신의 선배였다는 것에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다가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연륜에 금방 그렇구나- 하고 순응했다.
" 좋게 봐주니까 기쁘네. 선배님이 좋게 봐주니까 더 기쁜 것 같아~ "
조금은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였을까. 스즈는 살짝 몸을 낮춰 눈을 마주보곤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행동한 스즈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싸우기 싫고, 무섭다. 도망치고 싶지만 이 성격탓에 그랬다간 몇 날 며칠이고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몸이 먼저 반응했을 뿐이었다.
" 응~ 만반잘부에요~ "
순간 머리를 쓰다듬어 줄 뻔 했다. 다시 몸을 일으키곤 일전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 혹시라도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말야, 나한테 알려줘! 사실 그런 놈들은 별 거 없어~ 한 대 때려주면 된다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