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속을 파해쳐진듯한 기분이 들어 아키라는 살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아니. 내 얼굴이 그렇게 읽기 쉬웠나? 나름 포커페이스를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그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 허나 한가지 확실한건 그 역시 전 애인과 마냥 좋게 깔끔하게 헤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아키라는 어느 쪽이 더 쓰린가..같은 것을 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잴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너무하다는 말을 하지만 아키라는 역으로 비밀은 지킬거니 별 문제는 없다고 두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마츠리는 친구들끼리도 자주 오는 것이니 설사 자신이 본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없지 않나 하는 마음이 더 크기도 했고.
"사실 온다고 해도, 저는 전교생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래봐야 저희 반 멤버들과 몇몇 아는 다른 이들 정도만 알 것 같네요."
학생회장이 모든 전교생을 다 외우는 것은 사실상 만화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은 그 정도 능력은 아니었기에 괜히 웃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 이내 그가 기숙사로 가야한다고 말을 하자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들어가보려고요?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당첨 많이 된 거 축하하고요."
이어 그는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토와에게 작별인사를 보냈다. 또 학교에서 보자는 말을 하면서.
양호실에서 코로리를 만나고 난 뒤로 시간이 꽤 지났다. 그 때는 봄이었는데 벌써 여름이던가. 아직 초여름이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에 벌써부터 여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코로리와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이전에 상담을 받고 싶다고 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고, 어쩌다보니 주말 느즈막한 오후에 약속을 잡게 되었다.
사실 상담을 받는다고 했어도 그냥 학교 내의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외곽의 카페까지 오게 된 것에 조금 민망함도 있었다. 마치 데이트 신청같은 느낌이지 않던가.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상대는 신님이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을 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일찍 출발한다는 코로리의 연락에 렌은 너무 거리가 있는 곳으로 약속 장소를 잡은 것이 아닌가 고민하며 렌 또한 일찍 집을 나섰다. 흰색 무지티에 짙은 갈색의 면바지를 입은 렌은 생각보다 더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해버려서 카페에 양해를 구하고 안에 들어와서 코로리를 기다렸다. 이내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카페 창 밖으로 코로리의 모습이 보였다.
일어나서 문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코로리가 먼저 전화를 했는지 렌의 휴대폰이 웅웅 울렸다. 코로리 씨, 라고 적힌 휴대폰을 받는 대신 문을 열면서 렌이 코로리에게 인사했다.
“저 여기 있어요. 좋은 오후네요, 코로리 씨.”
렌이 작게 웃으면서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었다. 코로리가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어 물었을 것이었다.
“집이 여기서 먼 편인 거에요? 좀더 학교랑 가까운 편이 좋았으려나요.”
렌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학교랑 가까우면 또 학생들을 마주칠까봐 일부러 먼 곳으로 온 것인데 그것 때문에 불편했다면 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또 딸꾹질이야ー! 첫만남이 어땠는지 상기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폰 너머에서는 착신음 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들려온 렌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버렸다. 일부러 일찍 나섰고 약속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렌은 그것보다도 더 일찍 도착해서 카페에 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리 없다! 놀라서 폰을 놓치지 않게 꼭 잡았고 딸꾹질 소리가 새지 않게 입을 틀어막았다. 딸꾹거리는 몸까지는 숨길 수 없었고 코로리는 동그란 눈으로 렌을 바라본다. 양호실에서와 다른 점이라고는 옷 정도였다. 교복의 하얀 셔츠 대신 하얀 원피스다.
"후링ー 렌 씨, 안녀엉."
또 딸꾹질 해버리고, 렌의 상담이라는게 어떤 건지는 몰라도 신한테 하는 상담인 건데, 나 오늘도 위엄 바닥이잖아! 멋진 신처럼 보이는 연습이라도 해야했었나 싶고, 존경받는 신이 어딨는지라도 수소문해서 찾아가 겉흉내라고 내볼 것 그랬다 싶다. 지금 코로리가 할 수 있는 건 생글생글 눈웃음 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뻔뻔한 척이었다! 카페 안으로 걸어들어갈 때 딸꾹거리지만 않았다면 안 들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를만큼 훌륭한 뻔뻔함이었다.
"아냐! 그ー"
오는 길게 귀여운 뜨개 장식을 걸어둔 가게를 봐서 구경을 했다거나, 크게 그늘을 펼친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나뭇잎 틈새로 비치는 햇빛이 파랗게 반짝이는게 예뻐서 멈췄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있었다. 다만 오는 길에 어떤 아기가 악몽을 꾸다 낮잠을 설쳐 울길래, 몰래 악몽없이 다시 잠에 들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카페에서도 외진 곳에서 속삭거리는게 아닌 이상 선뜻 입을 열지 못했고 그저 딸꾹거렸다.
"후크 선장을 무찔렀어."
렌이 코로리가 웬디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해서, 아마도 신이라는 정체와 관련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고 예측하길 믿었다.
렌은 코로리가 딸꾹질을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자신이 갑자기 문을 열어서 놀란 건가?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딸꾹질을 들킨 것은 늦었다. 그래도 열심히 숨기려고 하는 모습에 렌은 놀래켜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민망한 웃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워주었다. 코로리는 오늘 교복이 아닌 흰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그것을 보니 희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또 떠올랐다. 그 날 이후로 흰 색만 보면 종종 코로리가 떠오르곤 했다. 아무래도 인상깊었다보니.
카페 안으로 들어오면서 코로리가 후크 선장을 물리쳤다는 그 말에 뭔가 어린아이같아서 웃음이 났다. 만나자 마자 놀라 딸꾹질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정체를 들켰다고 울음을 터트렸던 모습도 그렇고. 사실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꿈속에서 코로리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코로리가 직접 신이라고 말을 했어도ㅡ그럴일은 전혀 없겠지만ㅡ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고생하셨습니다. 피터팬 씨.”
자신을 웬디라고 칭했던 것이라면 본인은 피터팬인 걸까. 그렇다면 후크선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을 하다 왔다고 해석하면 될까. 의문이 남았으나 어떻게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ㅡ점원이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ㅡ 농담처럼 웃으며 코로리의 말에 대답했다.
카페 안은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 시원했다. 인적이 드믄 곳에 있는 카페라서 사람도 적고 조용했다. 매대 앞에서 어떤 메뉴를 골라야할까 고민하다가 렌은 금방 정하고는 코로리에게 물었다.
“어떤 걸로 주문하실 건가요? 오늘은 제가 낼테니까요. 음, 저는 블루레몬에이드로요.”
제가 상담을 신청해서 제가 불러낸 것이니까 제가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렌이 먼저 말을 꺼내며 지갑을 열어 계산할 준비를 했다. 미리 자신의 것도 주문을 하며 코로리가 어떤 것을 주문할지 잠시 기다렸다.
이번 마츠리에 나오는 노점은 저번과 다르게 할 생각인지 기대할건 없을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어떤 점이 다를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게 자체의 맛은 정말 뛰어나니까 어떤 것이 매대에 나오더라도 맛있을 것이란 기대를 안할 수는 없다. 창가를 보던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나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가 핸드폰을 한번 확인한다. 이렇게 메세지가 와있는 경우는 꽤나 드문 경우라 뭔가해서 열었더니 스팸 메세지, 자연스럽게 삭제를 하며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 아, 바다. "
생각해보니 가미즈미 마을은 바다에 인접한 마을이라 바다를 구경하기 정말 쉬운 곳이다. 하지만 그 가까운 바다를 지금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더위에 약한 체질인 이상 바다에서 오랫동안 노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차라리 집에서 뒹굴거리는게 100배는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바다에 간다는 말에 약간 설레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바다 정도는 지겹도록 봐왔는데 말이다.
" 제대로 바다를 가본적이 없어서 기대 되네요. "
지겹도록 봐오기는 했지만 그저 스쳐지나가듯이 본다던가, 망망대해를 보는게 전부였기에 이렇게 바닷가를 제대로 가보는건 처음이다. 별거 아닌 일이라곤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신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버스는 달리고 10분여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하차벨이 울린다. 내가 복도쪽에 앉아있기에 먼저 일어섰고, 먼저 차에서 내린다. 주변은 민가 몇개만 보일뿐 대부분의 시야를 숲이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도로와 인도는 제대로 깔려있었기에 걷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 걷기 좋은 곳이네요. "
민가가 별로 없고 이렇게 울창한 숲이 있는 곳은 맑은 공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별을 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곳의 밤은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겠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옆에서 천천히 발을 맞춰서 걷는다. 느릿한 걸음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답답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런 곳을 되게 잘 알고 있네요. "
역시 이곳에서 오래 자라온 사람들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따라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듯한 기분. 하지만 또 새로운 곳을 알았다는 생각에 그저 방긋방긋 웃으면서 둘러본다.
에엗?! 강한 것?! (동공지진) 음. 아키라는 자신과 시미즈가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를 싫어하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너는 너고 시미즈 가는 시미즈 가잖아. 집에 얽매이지 마! 라는 말을 하면 아키라에게 "제가 집에 얽매여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쪽의 자유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제 자유인건 이해하고 계시죠?" 라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