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미의 놀라 쩍 벌린 입을 보면, 제복이든 드레스든 갖춰 입고 여왕님에게 예를 표하던 코로리는 다시 교복 차림의 학생이 돼 버린다! 안 그래도 제 행동이 낯간지러워 웃어버렸는데, 놀란 표정까지 보면 이 상황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초면이라거나 초면이 아니어도 쉽게 받아들일 장난이 아니란 건 코로리의 머릿속에 없었다. 땅을 딛고 서있는 척 발이 닿지 않아 경계가 모호했고 누군가를 대할 때도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장난을 치고 웃었다. 그리고 여느 장난꾸러기들이 그렇듯, 장난에 당한 상대의 반응이 클수록 좋았다! 코로리는 미즈미가 벚꽃을 털어준 것도 좋았고, 장난에 돌아오는 반응 하나하나가 확실한 것도 좋았다.
"제일은 해줄 수 있어! 제일제일 달면 잠만 잘까봐, 제일제일 쓰면 잠을 안 잘까봐 안ー돼!"
잠과 꿈은 파스텔톤 마시멜로우처럼 마냥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잠을 도피처로 삼아버리거나, 매일 잠드는 걸 꺼려한다거나 미움받는 건 인간도 신도 싫어한다구. 녹아내린 마시멜로우 같은 부분이 있었다. 끈적거리고 달라붙는다.
"밋쨩, 삭 됐어?"
달이 뜨지 않거나, 거의 뜨지 않은 삭은 달님이 숨어버린 거니까! 미즈미를 아침달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코로리는, 삐졌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삐진 탓에 코로리와 만나기 싫어서 꼭꼭 숨어버리고 싶느냐는 뜻이다. 고개를 갸웃이며 물어보니 여름 냄새를 머금기 시작하는 봄바람이 살랑인다.
"응, 잠에는 영원한 잠도 있지이."
무서워할 거야? 코로리가 말을 주고받을 때는 엉뚱한 소리를 하기는 해도 오선지 위 음표를 징검다리 건너듯 했는데, 이번에는 우물거리듯 답했다. 눈썹이 조금 더 처진 것도 같은게, 무서워할까봐서 그러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되묻는걸 보니 거리를 둘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뻗었다. 다행히 코롯쨩 하는 미즈미의 목소리가 코로쨩 이라고 하던 목소리와 똑같이 겁에 질린 것 같지는 않아 표정이 금방 풀릴 수 있었다.
"밋쨩, 이거."
소근소근, 코로리는 셔츠 소매를 잡아당기는 미즈미를 부른다. 손가락 끝으로 콕콕 미즈미를 찔러서 주의를 끌었고, 뒤돌아본다면 붙잡힌 소매 쪽의 손을 가리켰다. 잼잼 쥐었다 펴보이는 손은 아까 전 벚꽃잎을 잡았던 손이다.
"손 잡아도 돼."
/ 미즈미주 답레 쓰기 어려우면 말해줘, 코로리 말하는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아서 ( ´∀`)
봄의 끝자락. 풋풋함이 녹아들던 쌀쌀맞은 바람도, 한창 무르익던 축제의 열띈 공기도, 미친듯이 춤추며 몰아쳤던 벚꽃의 음두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신기루처럼 여겨지기 시작하며, 스러지고 있는 시기. 교실의 창 밖은 어느새 알림의 벌레가 유생하듯 하늘 아래의 풍경에 푸른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게 안에 있느냐."
―드르륵. 그 속에서 문을 먼저 밀어젖히고 묻는, 작은 체구에 비해 그렇지 못한 당찬 풍채. 명백의 소녀. 입 밖으로 낸 말과는 달리 물음 따윈 덧없다고 생각하는 듯 입을 굳게 다문 당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봄의 마지막에 TRPG부실 안으로 들이닥친 자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못한 버릇이라는 것은 알고있지만 스즈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눈 앞의 이 소녀가 잘 쳐줘야 중학생 정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고 여려보이는 모습이라서 스즈의 정의감이 더 불타올랐는지도 모른다. 3학년이라는 말을 듣고나서도 스즈는 이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기 위한 장난의 일환인지 판단하겠다는듯 고개를 잠깐 기울였다.
" 우와아- 선배님이었구나. 가미즈미고 2학년 B반! 미나미 스즈임당! "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조금은 나이 들어보이는 말투도 이해가 간다. 3학년이라 치더라도 지나치게 올드해보이는 말투였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설명이 된다는 것이었다. 가업이 그런 쪽이라서 그걸 잇다보면 말투도 자연스레 옮게될테니까. 고서를 다룬다거나, 역사와 관련이 깊다거나 아니면 다도나 교양에 관련된 쪽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 에? "
스즈는 이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미즈미. 그러니까 미-쨩도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투였다. 유행에 뒤쳐지길 싫어하고 빠르게 그에 적응하고 사용하는 스즈였기에 이따금씩 이런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들어 빈도가 조금 잦은 것이 아닌가. 가미즈미 마을 여고생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다. 다들 유행에 너무 둔감하다. 말세야, 말세.
" 응. 만나서 반갑고 잘 부탁한다는 뜻! "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스즈는 이제야 기운을 차린듯 휴~ 하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분홍색 벚꽃, 흩날리는 쓰레기는 이제는 다 치워져 없고 이제는 더 이상 부실 앞의 커다란 나무에서 그 꽃잎이 흩날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열어둔 창밖에서 부실로 들어오는건 여름이 오기전의 산들바람밖에 없었고,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그 부실에서 그는 책상에 엎드려 한때의 단잠을 청하고 있었다. 바람소리만 들린다고 하기에는 2층의 부실에서 나는 여러가지 소리와 부실에 켜진 구닥다리 컴퓨터에서 냉각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제는 자고있는 그에게 그것은 더 이상 소음이 아니었다.
"응.."
'게 안에 있느냐' 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이지 않은 그는 안에 있느냐고 물으면서도 거침없이 문을 열어 들어온 무례한 사람이 과연 누굴까, 잠이 덜 깨 어지러운 상황에서 상상했다. 음성의 높낮이와 말투로 봐서는 평소에 오는 사람은 분명 아닐텐데..
"스르릅.."
자는 사이에 침이라도 흘린거겠지.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를 내며 겨우 내 일어난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조, 졸려..
"무, 무슨일로."
오셨나요. 같은 뒷 말은 하지는 못했다. trpg부에 오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을 한 여성이 눈 앞에 보였으니. 저 사람은 분명.. 검도부의 사범선생이었다. 내가 trpg부라는 말은 안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앗."
뭔가 그 자리에서 앉아서 그녀를 배웅했다가 천둥같은 일갈을 들을 것 같은 예감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의문형으로 높게 올라가는 스즈의 목소리 톤에 도검 신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꼿꼿히 펴올리는 것으로 반응한다. 그렇게 하면 제 자그마한 몸집이 조금 더 커보일 줄 아는 것 처럼. 그리고는 위협당하고 있을 때에도 내내 감고있었던 눈을 한쪽이나마 떠올려 스즈를 바라보는데. 그 눈은 또 샛붉은 것이다.
"그렇구나... 만반잘부..."
스즈가 밥먹듯이 쓰는 그 말을, 마치 처음 들어본다는 양 생소히 중얼거리고 있는 그 아이. 하가네가와 시로하. 당초 지금껏 도검 신이 연을 트고 대면하는 인물들이라곤 하나같이 신의 계보를 타고난 이들이나 칼에 미쳐사는 도공들밖에 없었으니, 경우가 다른 것이다. 그러다 들려오는 사과의 말에 괜스러운 일이라며 말하는 그녀. 이런 모습이니 오해를 받는 일은 쉬이 있다.
"아니, 체면치레하려 고개를 숙이는 가식스러운 자들보다 낫구나. 게다가 그대는..."
은인 아니더냐. 그 모습, 가련하다고는 해도 확실히 은인이다. 분명 듣기로는 가미즈미의 신들 중에선 몇 번이고 학교를 졸업하는 자들도 있다고 하나 도검 신에게는 이번 입학이 처음이었으니. 그 전에, 글방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아예 완전히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미즈미 고교의 졸업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치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는 소리 -지금도 휘두르긴 했다- 가 청룡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면―
'날붙이 신의 위상이 서질 않지 않느냐!"
스즈가 땀을 닦아내고 있을때, 도검 신은 또 다른 의미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괜히 헛기침을 뱉어 호흡을 돌리는 도검의 신.
"아, 아무튼. 나도 그대가 가미즈미 고교 재학생인줄 몰랐던 것은 마찬가지구나. 그러니까 만반잘부...인게다."
방금 스즈가 알려준 그 말은 분명 서너번 정도를 되뇌였으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억양이 잇따라, 전혀 입에 붙지 않는듯 보였다.
분명, 잡아먹으려 했었을 것이다. 테츠야의 기억 속에서는 말이다. 체험을 하러 왔다가 잔뜩 일갈만 받고 돌아갔던 그 때. 붉은 눈을 번뜩이고 스산히 머리칼이 일렁이던 그녀의 모습은 흡사 검도의 악마였을 것이다. 한 편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눈, 아직도 입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침을 보며 '졸았던게냐.' 하며 시로하는 묻는다.
"헌데, 부실이라기에 조금은 기대했거늘. 생각보다 좁은 곳이구나..."
닫은 문 안으로 마침내 천천히 발을 밀어 걷는 그녀가, 눈을 감고 있음에도 훤히 보인다는 듯이 말한다. 있는 것이라곤 책상, 낡은 파소콤. 다른 부에는 가져다 놓는다는 찻장도 없고. 심지어 냉난방 기구라고는 보이지 않으니, 칼을 안치시키기엔 더없이 최악의 장소라는 생각이 도검 신에겐 자연히 들었다. 그나마 풍수지리는 괜찮은 것이 그나마의 위안일 정도인가. 가미즈미의 축복이니 말이다. 마침 또 창 밖에서는 여름의 내음이 섞인 기분 좋은 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