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막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진 않았으니까 친구가 되면 좋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만큼 첫인상으로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파악하는건 적중률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니까. 모은 무릎 위로 턱을 괸채로 시무룩해있는 리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준다. 사실 오늘 가장 놀란건 역시 내 동생일테니까.
" 이럴때만 보고싶은 오빠지? "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짓궂은 답변을 남기고선 머리카락을 한움큼 잡아서 천천히 빗어준다. 애초에 좋은 머릿결이라 엉킬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아프지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빗어주던 나는 리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레몬사탕은 잘 나눠주지도 않는다. 내가 먹을 것도 부족한데 뭐. 머리 정리하는 것도 하도 많이 도와주다보니 이젠 도가 터버려서 빗질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준이 되어버렸다.
" 신계로 돌아간다거나 하는 걱정은 안해도 돼. 너가 인간계에 있고싶어하는 이상 ... 나도 계속 있을테니까. "
누군가는 동생을 돌보는게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본적도 있다. 부모신이 있는 사람들은 부모님이 돌봐주거나하지만 나는 눈을 떴을때부터 내 동생과 함께였다. 조금 천방지축이라는 생각도 든적이 있었지만 돌봐주는게 피곤하다고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의무는 아니지만 ... 내가 아니면 누가 챙겨주겠어.
" 오늘 저녁은 볶음밥이야. 집에 재료가 많이 없더라구. 혹시 내일 먹고싶은거 있어? "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마트를 들러서 재료를 살 생각이었다. 요즘엔 레시피도 보기 쉽고 어려운 음식은 밀키트를 활용하면 금방 만들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좋은 세상이야.
검도록 깊은 해저를 닮은 새까만 눈이 다시금 깜빡여진다. 아주 제대로 놀라버린 듯 괴상한 소리를 낸 신은 대경한 와중에도 양동이를 챙겼다. 그러며 날카롭게 외치는 반응이 그로서는 다소 낯설 정도의 노기가 담겨,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생각에 열중해야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저 이름 모를 신이 쏘아대듯 한 말에는 엄연히 틀린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미카가 이 낯선 신을 도둑이라 의심하게 된 정황은 단순히 낌새가 수상하다는 심증 뿐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심증에 근거는 있었다. 일반적으로 학교 시설은 교내의 공공재이니 함부로 훼손해선 안 되며, 그것을 화분도 아닌 양동이에 퍼가며 주변 눈치 보는 행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도둑이라 단정해버리면 몰아가는 형국이 되니…… 대화를 더 해봐야 알 것 같았다. 후미카는 무릎에서 손을 떼고, 사뿐히 혐의 모호한 이 신 옆에 쪼그려 앉았다. 잔뜩 화가 난 누구와는 달리 저 혼자만 태연하고 자약한하기만 한 표정이 얄미워 보일지도 모른다.
"행색이 꼭… 급히 말썽 저지르고 떠나려는 사람처럼 보였단다. 오해였다면 미안하구나."
도둑이 아닐 가능성을 인정하므로 사과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네 행색이 수상해서 그랬다고 대놓고 말해선 사과가 아니라 도리어 꼽 먹으라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풍어신의 사교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이런 때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후미카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파헤치는 동작을 가만 두고 보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흙을 찍는 손을 살며시, 그러나 힘 있게 붙잡아 멈추게 하려 했다.
"대지의 신이라 할지라도 화단에서 멋대로 꽃을 퍼갈 권한은 없다고 안단다. 여기는 우리의 권역이 아닌 청룡신의 학교잖니. 학교에 들어오며 바깥에서의 사사로운 권위는 내려놓기로 하지 않았니?"
모로 보고 정正으로 살펴도 이 신은 부정이 뭉친 요괴에 더욱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풍어신도 이미 눈치채었다. 하지만 불길한 신이라 하여 대지의 신이 아니리란 법은 없으니, 그렇다 하여 신으로서의 격을 부정할 생각은 없는지 모두 사실로 여기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풍어신은 사람 속을 잘 헤아리지 못할 뿐 논리가 뒤지는 신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도 이 의심스러운 신의 주장에는 군데군데 엉성한 데가 많았다. "이렇게 마구 파대면 뿌리가 다쳐 꽃이 죽어버릴 수도 있단다. 대지의 신이 땅에서 난 것을 이리 험하게 대한단 이야기는 초문이구나."라는 말에는 제법 예리한 통찰이 들었지만, 조목조목 짚어가며 훈계를 하는 모습이 꼭 잘못한 아이 붙잡고 이러면 안 된다 일러대는 고리타분한 어른 같았다…….
장황한 논박이 끝나자 풍어신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꺼지라 말하지 않았더라도 마침 꺼지려고 했었다. 정확히는 교무실로 꺼져버리려고 했다. 이 자리에서 네가 수상하니 마니를 따져봤자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고, 상대가 본인이 신위를 걸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그것을 함부로 부정하거나 의심하기는 꺼려졌다. 그러니 후미카는 논쟁하지 않으면서도 이 상황에 결착을 낼 방법을 찾기로 했다. 바로 교무실에 가서 직고하면 되는 것이다. 내도록 이건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며 따분한 말을 얹어대던 신이 "그래, 알겠단다."라며 순순히 일어나 꺼지는 행동은 지나치도록 산뜻해서 연유 모를 찜찜함이 여운처럼 감돈다.
그렇게 왔을 때와 같이 존재 흐리도록 조용히 몇 걸음 걸은 후미카는, 곧 뒤돌아 이렇게 말하였다.
잠의 신이라서, 잠 잘 자면 일단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었다! 나 귀한 줄 모르면 다 바보니까, 반대라면 똑똑한거구! 코로리만이 할 수 있는 첫인상 판별이었는데, 쌍둥이 보기에도 좋은 인상이 남았다면 이제 친구하는데 장애물은 없다. 입막음을 위해서라는 점이 다소 목적은 불온했지만 무섭게 안 할거니까! 놀라서 히끅히끅 딸꾹질하던 것도 수그러들었고, 다시금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조금 표정이 살아난 코로리다. 시들시들 추욱 처지던 식물이 하루종일 햇빛을 쬐고 물을 받은 것처럼 생기가 돈다.
"세이는 늘 같이 있었구, 같이 있을 거잖아."
사락사락 머리 빗는 소리를 듣는다. 머리카락을 만지면 기분이 조금 진정되고는 했는데, 남이 만져주면 효과가 더욱 배가 된다! 머리카락 때문에 정체를 들켰었는데, 쌍둥이가 머리카락 빗어주니 사건이 일단락되는 기분이 오묘했다. 어떻게 들켰는지랑, 얼만큼 들켰는지는 쉬잇ー 해야겠다. 숨기겠다기보다는 다시 아까처럼 분위기가 가라앉는게 싫어서였다.
"별님이라서 반짝반짝한 건지, 반짝반짝해서 별님인건지 모르겠어."
세이같은 오빠 있는 신이나 인간?! 없지?! 부모라는 존재를 기대하거나 그리워한 적도 없다. 그만큼 코세이가 가족의 역할을 전부 다 해낸 것이다. 쌍둥이인데도 동생이랍시고 철 들려면 한참 남은 코로리는 코세이처럼 하지는 못하더라도, 곧잘 따르는게 코세이였다.
"내일은 세이데이, 세이가 먹고 싶은 거 먹자."
기분이 풀린듯 방글방글 웃으면서 눈을 맞춘다. 역시 동생 달래기 경력이 몇백 몇천년이 넘어가는 오빠는 다르긴 하다. 저녁을 먹고나면, 요리는 코세이의 몫이었으니 설거지는 코로리의 몫이겠다. 집안일 분업도 쌍둥이가 반반 나누기, 내일은 코로리가 저녁을 차리겠다고 고집 부릴지도 모르겠다.
/ 막레로 받을 수 있게끔 써왔어~! ( ´∀`) 세이같은 오빠 있는 리리..... 부러워~!
내가 너에게 손을 내민 까닭은, 여왕님이 되기 위한 여정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요, 우리의 목표를 약속하는 악수를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너는 어쩐지 내 손을 끌어당겨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경천동지할 일이라 입을 쩍 벌리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코에 닿을 듯 너의 얼굴까지 끌려간 내 손등에는 너의 속눈썹 팔락이는 바람짓마저도 쉽게 느껴진다. 뭐지. 진짜 뭐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너를 이리 저리 칩떠본다. 연기마저 잊은 얼굴에 생기 불어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채였다.
...얘, 나 좋아하니? 그도 아니면 인간 꼬시기 연습 상대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요즘 애들(아님)은 이러고 다닌단 말이냐? 나는 이 세상이 너무 발랑까진 터라 눈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내가 눈 감고 있어 빙글 도는 눈 가릴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으음- 왜요? 환상이라면 현실보다 달고 써야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친해지면 해주나요?"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라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린다. 기왕 끌어올려야한다면 빈 광주리 박박 긁어 바닥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너무 질척거린다 싶어 나는 쿨하게 굴기로 했다. 박수 칠 때 떠냐야 아름다운 법 아니겠는가. "됐어요. 필요 없어요." 말이 조금 억세게 나갔지만 나는 결코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다... 결단코!
"엥? 맞았어요? 혹시 잠의 신이라는 말씀이... 영원한 잠의 신이란 뜻이었나요?"
나는 깜짝 놀라 너에게 묻는다. "좋아요. 다음부터는 죽어-! 라는 느낌으로 코롯쨩-!이라고 불러드릴게요."
벌 같은 거 안 받냐는 너의 말에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그다지도 모범적이지 않은 나는 도망에도 일가견이 있는 편이다. 잽싸지는 못하지만 그늘 속 낮도깨비처럼 구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몹시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에 재능이 있단 소리기도 했다. 나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 입술 가까이 대고는 교무실 창문을 힐끔거렸다. 나의 인간 선생은 업무를 보느라 여념이 없어보인다. 나는 슬금슬금 교문을 향했다. 물론 너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기에, 너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긴다.
타인이 느끼는 요조라의 분위기는 요조라 본인이 두르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거절로 느껴지는 건 요조라 탓만은 아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신에게 이롭지 않을 것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건드렸을 경우의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 할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피하는거다. 어려서는 그걸 격렬한 거부나 부정으로 드러내지만, 조금만 자라도 사람은 유연하게 피해가는 법을 깨우친다. 그걸 아는 사람은 요조라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게 된다. 극히 드물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기지만.
그 '극히 드문 경우'에는 지금 같은 상황도 포함이다. 정말 드물게, 요조라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다. 말투는 딱딱하고, 살가운 기색이라곤 솜털만큼도 없지만, 평소의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져 있다. 숨 막힐 듯 사방을 거절하던 분위기에 약간의 틈이 생긴 느낌일까. 다소 느슨한 자세로 책상에 기대어 있던 요조라는 자초지종을 듣고 그리는 중인 그림을 슬쩍 보았다. 해바라기, 들판, 인가. 스케치부터 원근법 따위는 무시한 그림에 뭐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한다. 특기가 아닌 이상은 저게 보통임을 알고 있다. 요조라는 눈을 깜빡임과 동시에 시선을 학생의 얼굴로 돌렸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인사한 적도 없는데 요조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별나게도.
"복도... 저기, 교실 앞 복도... 인데, 한밤중, 인 걸로..."
까딱, 턱짓으로 가리키는 쪽은 말한 그대로 복도 쪽이다. 그런가보다 싶을 수 있지만, 주제가 '보고싶은 풍경'이었던 걸 다시 생각해보면 왜? 라는 의문이 들 만도 하다. 그러나 그 의문을 물어볼지 말지는 이 학생이 정할 일이다. 요조라는 별다른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가려는가 싶더니, 대뜸 말한다.
"도와줄게, 그거..."
그거, 라는 건 되물을 것도 없이 그림이다. 요조라는 팔을 위로 들어 쭉 당기는 식으로 기지개를 느긋하게 했다. 굳었던 근육이 풀리는 감각에 힘 빠진 숨을 내쉬고, 옆자리 책상으로 성큼 다가간다. 창가를 등져 역광을 드리운 채 옆자리 학생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요즘... 잠을, 잘 자서... 기분이, 좋거든... 제출, 시간, 정도는... 맞추게... 해줄, 수 있어... 싫으면, 거절해..."
그냥 나가줄게, 까지 말한 요조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으로 응시한다. 잘 잤다기엔 꽤나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운 그 눈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