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나? 렌은 어느새 포근한 물 속에서 잠이 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렌은 눈을 떴다.
눈 앞에 있는 것은 방금 보건실에서 만났던 그 소녀였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물 속에서 퍼져있고, 제 어깨를 잡은 손 때문에 거리가 꽤나 가까웠다. 렌은 잠에서 덜 깬 기분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순간 자신의 어깨를 잡은 그 팔뚝을 잡았다.
‘위험해.’
물 속은 위험하다. 렌에게 있어서 물은 안전하고 평온한 것이었으나, 렌이 지켜본 물은 타인에 대해서는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물은 사람을 잡아먹었고, 렌은 종종 그곳에서 사람을 구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깊은 물 속에서 보호장구 없이 같이 빠져있는 이 사람은 위험했다.
꿈의 주인이 그렇게 생각하자 물결이 거세지며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었다. 꿈 속에서 장면이 전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개연성이 없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꿈이니까.
여름의 뜨거운 햇살, 왁자지껄한 소리, 종종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 신나하는 사람들이 있는 워터파크 파도풀장의 한 가운데에서, 렌은 코로리의 팔을 잡고 나왔다.
렌의 옷차림은 워터파크 안전요원의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렌은 파도의 밖으로 나오자 코로리의 팔을 놓아주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파도 풀장 내에는 구명조끼를 입고 들어가셔야 해요. 생각보다 파도가 세고 위험해요.”
바닥에 닿는 감촉은 모래가 아닌 모래를 흉내내 거칠거리는 바닥이었고, 렌은 자신이 물 속에서 데리고 나온 코로리를 보더니 마른 세수를 했다. 참, 이거 꿈이었지. 꿈 속에서는 원래 정신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착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저, 잠들어 있는 건가요? 여기 꿈 속이고?”
갑자기 커다란 바다에서 워터파크 파도 풀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꿈속이라는 것이 더더욱 확실해지는 것이었다.
/이대로 깨우기 아쉬워서 장면을 전환했는데 괜찮을런지 모르겠다아. 문제 잇으면 마음대로 바꾸어 서술해도 괜찮아! 치료 고마워~~!!
아침부터 학교의 아이들이 분주하게 학교를 뒤지고 다니기에 뭔가 했더니 이런 이벤트가 있었구나. 시니카는 게시판을 바라보다가 홀연히 발걸음을 던졌다. 딱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게 있으면 스캔해보기나 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눈에 띌 만한 것들이 있으면 이미 다 다른 누군가가 스캔한 뒤겠지만, 상관없나.
그때 시니카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잡아보니 QR 코드가 찍혀있는 조그만 쪽지였다.
안 되는데?! 꿈에서 깨었어야 했는데, 꿈에서 깨는게 아니라 자각몽이 되었다! 꿈에서 깨었더라면, 그대로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른 척 선생님이 없기에 손의 상처만 치료해줬다며 보건실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 잠의 신 코로리가 꿈에 관여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잠을 방해하는 심한 꿈이 아닌 이상 잘 관여하지 않기도 했고 자각몽은 이야기가 달랐다! 꿈의 주인이 의식해버린 이상 마음대로 했다가는 들킨다. 속이려고 재워버린 건데! 초대받지 못한 요정님이었는데, 나!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는 거야?"
대답이 너무 늦었다! 꿈 속의 엑스트라인 척 하기에는 코로리는 워터파크에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물기 하나 없이 뽀송했다. 분명 물 속에서 함께 있었는데, 꿈의 영향을 빗겨나간다. 옷이라도 수영복으로 바꾸고, 머리카락도 옷도 젖은 채 누가 보아도 워터파크에 놀러온 것처럼 굴어볼까 했지만 역시 그것도 늦었다. 코로리는 후링씨, 약속 잘 지킬까? 를 올려다보았다. 울상이었다! 쌍둥이에게 엄청 혼날 것이고, 최악은 인간계에서 다시 신계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처음 인간계에 내려오게 된 것도 코로리의 고집 때문이었으니 이런 대형사고를 쳤다면 그럴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인간계에서 친하게 지내게 됐다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해보고 싶다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 된다. 바닷물만큼 짠 눈물이 동글동글 떨어지고 말았다. 딸꾹질 다음은 울어버렸어ー 하나도 신 안 같은데, 신이라고 믿지 말아줘어ー. 고개를 푹 숙이고 발 밑을 바라본다. 우는 소리는 안 내려고 입은 앙 다물었다. 모래를 흉내낸 워터파크의 바닥이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보였다가, 눈물이 추락하는 것과 함께 선명하게 보였다.
"후링씨, 피노키오해야 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이번에는 손가락 끝이 닿는 것보다 좀 더 필사적이었다. 후링씨가 거짓말쟁이해줘야 하는데에. 의 손가락을 쥐려고 했다! 물기 촉촉한 눈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마주하니 더 눈물이 날 것 같아졌다. 신이라는 걸 숨겨보겠다고 무슨 난장판을 벌여놓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보건실 침대에서 자고 있고, 후링씨가 꾸는 꿈 속이야."
내가 너무 많이, 길게 재워버려서 깨우러 들어왔어. 말해야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이라는 이실직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나서 할 수 있다.
/ 코로리 하찮은 신이 모티브라서 우네.... ( ´∀`)..... 난장판에 휘말린 건 렌인데..... 놀라지마 코로리는 괜찮아~!
인간의 걸음으로 돌아온 뒤로 네 실수하는 일은 없던 겁니다. 여덟 팔자 그리는 걸음 사라지고 굽이진 길을 걸을 적, 네 들어본 대답은 얇은 생 산 자라면 당연할법한 것이라지요. 아무렴 긴 삶 살아도 먹어보지 못하는 것 많고 세상 뜨는 자 많은데, 고작 약관도 채 못 된 나이가 많은 것 입에 대어봤겠습니까. 네가 유달리 특이한 겁니다. 지나치게 오래 살았지 않습니까. 질릴 것임에도 꾸역꾸역 먹고사는 것도 용한 게지요.
"식도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면 당연한 법이죠. 이 기회에 먹어보면 되는 일 아니겠나요."
지역의 명물은 지역이 아닌 곳에서 먹어도 되는 일, 현지의 감흥은 없겠으나 먹어본 적 없다면 이곳에서 즐겨보면 되는 일 아니겠는지. 네 그렇게 굽이진 길의 골목 접어들 적엔 또 질문의 답을 위해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려 보이더랍니다. 고민하는 표정은 아니나 잠시간의 침묵이 묘합니다. 자주 찾는다기엔 네 그만큼의 그리움이 없을 터인데. 아무렴 어떠합니까, 지금은 과정에 집중하는 걸로 셈 칩니다. 침묵은 길지 아니한 겁니다.
"즐겨 먹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편이지요."
어째서 좋아한다 답했습니까? 어째서 즐겨먹지 않는다 합니까. 어째서 네 교토와 이곳의 맛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먹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도 제지를 안 하는 곳이라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던 순간을 기억하답니까. 의문은 뒤로 미뤄두고, 네 가게 안으로 들어섭니다. 자주 들리는 가게가 아니란 말엔 "이곳은 구석자리니까요."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덤덤한 모습을 흘긋 보다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버선발로 맞이하는 것을 보더랍니다. 쪽진 머리요 정갈하게 차려입었으니 전통적인가 싶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이 들었더라지요. 그럼에도 나이 젊은 아이들이 왔다 하여 예의를 덜 갖추거나 하지 않더랍니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예, 앉을 자리로 부탁합니다." "엄마, 자리 안내 부탁할게요!"
가게에 한 사람 더 있었으니 이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노파입니다. 세월을 직면하여 제법 노쇠하였으나, 아직 정정하긴 한 것인지 가게의 일을 도우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노파 어디선가 바쁜 걸음으로 걸어와 너와 어린 인간의 앞에 설 적, 잠깐 노파가 멈칫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더랍니다. 그리고 아니겠지 싶어 애써 표정을 갈무리합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미안해요." "무슨 일이신지." "내가 젊을 적 학생과 아주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거든요. 세월이 50년은 넘게 지났는데, 나도 참.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50년밖에 안 지나서 기억하는구나. 네 응어리진 고민이 풀렸습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고 유도후를 주문하며,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입니다. 네 아무런 말 없이 먼저 두부를 떠서 어린 인간에게 건네주고, 어린 인간이 먹으면 네 드디어 먹기 시작하고, 그리고 기본 두부를 먹어보고, 그다음 옅은 간장을 얹어 먹어보며. 그 일련의 과정이 50년 전과 동일하였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곁에 인간이 있었단 점이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쳤을 적, 네 계산을 일방적으로 마쳐버리며 나가기 전 말했던 것은 별거 없지요.
"그대, 가미즈미 고교의 학생이지요? 나와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네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은 스치는 인연이기 때문이기에. 두 번 마주하는 날엔, 네 소개를 하겠지요. 사쿠라마츠리는 그리 순조로이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네 그저 어린 인간과의 스치는, 평안한 인연이면 좋았을 텐데.
네 오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은 어린 인간과의 대면 때문이 아닌 질림 때문이렵니다. 늘 그렇듯 넌 인생에 회의감을 짙게 느끼는 신 중 하나였고, 변덕이 제법 심한 신이었으며, 무엇보다 오늘은 달 뜨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더 그럴 지도 모릅니다. 네 어린 인간을 만난 것은 어디였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었을지.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시간이었으며 어떤 모습이었던 간에. 어린 인간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개의치 아니하고. 걸음 여덟 팔자 그리며 다가가려 했던 게지요.
>>689 맨발????? 방울???? 세상에... 이런말하기 부끄럽지만 나 사실 맨발캐 좋아해... 뭔가 신성하잖아 맨발로 다녀도 더러움 하나 안 묻을것만 같은 느낌 ㅋㄱㄱㄱㄱ방울소리 안난 건 우웃 붙잡고 코로리 산책시키고 싶다 ㅋㅋㅋㄱ 새삼스럽지맛 코로리...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구나...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주냐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눈을 깜빡였다. 꿈이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주냐는 뜻인가? 하지만…. 워터파크에서 교복을 입고, 방금 물 속에서 나왔는데도 뽀송뽀송한 옷과 머리카락은 영 이질적인 것이라서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 더 이상한 지경이기는 했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울상인 얼굴로 여자애는 자신을 올려다 보더니 이내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렌은 갑작스러운 눈물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코로리 씨…? 저….”
우는 여자애는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걸까. 렌은 이러한 상황이 한 번도 없어서 쩔쩔 매고 있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손이 허공을 배회하는데 눈물을 닦은 코로리가 제 손가락을 꼭 쥐며 올려다봤다.
“피노키오…요…?”
후링 다음은 피노키오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간절하게 올려다 보는 얼굴은 뭐든 들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영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렌은 잡힌 손가락을 뿌리치지 못하고 잡히지 않은 손으로 뒷목을 쓸어내렸다.
“아…. 역시….”
꿈이 맞구나. 하긴 꿈이 아니면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리고, 자신이 뭔가 이 소녀를 난처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 그렇지 않던가,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존재는 인간에게 정체를 들키면 큰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니까. 아마, 이 앞의 존재도 그런 것이 아닐까. 문제는 렌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앞의 존재가 인간은 아니라고 각인되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음, 일단 울지 말고요. 그 제가 했던 질문이 코로리 씨를 곤란하게 한 것 같으니까, 아무 것도 안 물을게요. 미안해요.”
렌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사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왜 보건실에서 자신이 자고 있는지, 꿈 속에 코로리는 왜 나와서 울고 있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이 앞의 소녀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었다.
렌은 이 상황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영 감을 잡을수가 없어 코로리에게 잡힌 손가락을 내려다봤다가 다른 손으로 머리만 긁적였다. 일단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하고.
>>691 나는.. 싫어해.. 아니 급전개는 진짜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그런 급전개를 못 따라가는 느려터진 내 뇌를 싫어해 83 사쿠라마츠리가 끝나고 다른 날에 다시 만난 상황인거지?
>>시점도, 상황도, 히키의 모습도 자유롭게<<
나는... 싫어해....... 아니 선택지가 주어지는 건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이런 선택지를 못 따라가는 내 판단장애를 싫어해 83.....!!! 답레는 일단 써보겠지만 자고 일어나서야 완성할 수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답레 기다리지 말구 자러가 :3 이런 불성실한 참치와 계속 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83
밑도 끝도 없는 고백이나, 도검의 신에겐 친구가 없다. 가미즈미 고교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에 친구가 없다, 라고 단언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맡길만한 정도의 인복은 일찍이 없었다. 친구라고 할만한 자들은 나름대로 있으나 그 친구라는 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좀처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때에 방금 저 불한당 놈이, '친구'를 언급했다. 앞 뒤 재지 않고 불합리한 상황에 끼어들어 '여기는 내게 맡겨'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친구라는 말인가? 그 자가 전혀 면식이 없음에도? 그렇다면, 장본인 중 하나에게 조금은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도 과연 친구인 것이느냐고. 이런 상황이니 기회가 아닌가. 무릇 탐구심은 검을 더욱 예리하게 만드는 법이렷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어라? 그렇다면 이 반응은.
'...나, 깔끔하게 무시 당했구나?'
그리 여겨 조금은 불만스러운 마음에 감겨있던 한 쪽 눈을 가벼이 뜨니, 전란말기 때보다도 더러운 다툼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앞에 나서서 이쪽에게로 미소를 보내는 스즈에게서 온전히 느껴지는 것은. 근육과 호흡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극도의 불안함.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누군가 들어올린 손이 속력을 붙이고 있었다.
이래서 요즈음의 젊은 피들 사이의 다툼은 어울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벼려진 칼날보다도 예민하고, 주제에는 꺾이기가 쉬우니 다루기가 까다롭다. 단칼에 베어버릴 수도 없으며, 흘려버리자니 질척하게 감겨온다. 사쿠라마츠리에서 평화를 빈 것이 엊그제 같거늘. 벌써 이런 일이 되다니. 아아, 정말이지―
"무엇들 하느냐."
시간이 멎은듯 갑작스레 덮쳐온 이질적인 적막. 그 속에서 날카롭게 잘그럭 거리는 소리만이 흐른다. 어느새인가 벗겨진 천 안에서는 도검만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자루 위에 얹혀진 손은, 아직 날을 뽑지 않은 채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 될 것이다.
"지금, 그녀가 꽁무니를 빼도 묻지 않겠다며 자비를 배풀고 있지 않더냐."
하지만 어째서일까. 스즈를 제외한 그 무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 부근에 내려앉은 섬짓함과, 역류하는 강처럼 머릿 속을 흐르는 과거의 기억들에게서 근본적인 무언가의 공포를 느꼈다고.
"신세를 졌구나."
멀어져가는 뒷모습들을 마지막까지 바라보던 시로하가 그리 말하고는 땅에 떨궈진 검은 천을 들어올려 도검을 감쌌다. 그녀가 이번의 '부조리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여자아이'이다. 지금 그녀는 감긴 두 눈의 새하얀 그 얼굴은 무엇도 겪지 않은 것처럼 잔잔하고, 후일의 근심을 넘어 잔심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왜인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스즈에겐 제대로 보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