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서 나온건 4개의 편지지와 리본으로 꾸며진 상자였다. 그걸 보고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편지! 아시는구나! 엄.청.정.성.스.럽.습.니.다. 아니, 부담스럽다. 이 숫자를 보아하니 분명히 선물을 받을때마다 실시간으로 편지를 적은게 틀림없다. 어째서! 그냥 와서 감사합니다! 하면 끝인게 아닌걸까? 그리고 분명 마지막편지는 저 상자 안에 같이 동봉되어있겠지!
아아아, 어째서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대실패 다이스처럼 딱 맞는걸까! 이정도면 거의 러브레터도 아닌 공개고백이다! 분명 같은 반 사람들도 '엥? 저딴게 고백을 받고있다고?' 하면서 지켜보고있을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정도의 성의. 반드시 받아야만한다!
"당연히 혼자 볼 거에요."
이런걸 돌아가서 그 자리에서 본다면 분명 여러 사람들에게 습격을 당할테니까. 분명 연애이야기를 좋아하는 일부 여자애들이 평소 친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가십거리를 위해 친한듯이 말을 걸겠지! 정말 비겁한 사람들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이렇게 선물을 받게될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고마움이 느껴지는 웃음과 괴로운 이 상황이 느껴지는 살짝 찡그리는 표정이 조화를 이루어 웃는데 우는, 그런 기이한 표정이 되었다.
[ㅇㅇ : 그 옷 뚱뚱해보임] [ㅇㅇ : 왜 이렇게 치렁치렁하게 입음?] [ㅇㅇ : 노래 개못하네] [ㅇㅇ : ㅋㅋ]
생각해보니 열받네. 하지만 시이는 그런 채팅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편이었다. 니가 그런 말을 하니까 모쏠육수에서 나아가지 못한다던가 하는, 그런 팩트 기반의 반박을 하면 조용히 시청자수가 감소했다. 생각보다 많이 감소했단 게 문제지만.
당연하다, 광역기니까. 일반공격이 전체공격에 2회공격인 스트리머인데, 힐링하러 들어왔다가 우울해져서 떠난다고. 무엇보다, 노래는 정말 못한 게 맞았다. 정말로, 정말로. 구렸다.
하여튼. 시이가 거기에 초연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이는 신이니까. 시-인이니까. 어린아이에게 잘 드는 칼을 들려준 상태와 같은 것이다. 들고 팔을 팔랑거리며 걸어다니는 통에, 괜히 해코지를 하러 오면 베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키보드 키, W자가 재기불능으로 먹통이 된다던지 하는 재액이 랜선을 타고 착불로 왔겠지. 하지만 그 이유 뿐만은 아니었다.
"그치만, 무관심보단 악플이 낫잖아? 난 그 말에 적극 동의하는 편이야- 무관심 받을 바에는 날 무서워 하는 게 좋아. 관심받을 수 있다면 옥상에서 시위도 할 수 있다구. 생각해봐.
네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이름을 불러도 아무도 못 듣는다면. 다들 자기를 못 보고 없는 사람 취급한다면. 그런데도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간다면... 그건 분명, 끔찍할 거야. 이해심을 발휘해서 생각해보라구. 투명인간은 슬픈 일이야-"
-10점 다음에 꽝?! 이건 도대체 말이 안된다. 누가 신을 농락하기 위해서 이런 불경한 짓을 벌이는게 틀림없다! 심지어 청룡신님이 막아놨는지 점성술도 통하지를 않는다. 처음엔 관심조차 없던 것에 이렇게 몰두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혈안이 된채로 QR쪽지를 찾아서 한번 더 찍어본다.
태어난 이래 세상은 미지의 보고와도 같았다. 비단 신이 된 이후에 한정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부터 하여 가장 하등한 단세포의 생물에게까지, 본디 세상에 난 모든 존재들은 누구나 미지에 몸 던져 그 치열한 생을 살아가지 않는가. 풍어신은 자신의 생애가 시작된 날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었다. 축축한 모래땅을 파헤쳐 나와 첫 숨을 들이켰던 때, 별빛에 의존하여 자신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짠물 속에 몸을 던졌던 순간. 환희도 무엇도 느끼지 않았으나 그 순간 자신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살아가는 일은 그와 같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생명은 숨이 멎을 때까지 그저 무지한 채 달려야 한다. 모르는 것은 그저 그뿐인 것.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면 모르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인 일이다.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 하여 불안해하는 일은 그에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구태의연하게도 구차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 후미카는 고개를 저으며 제 옷소매를 쥐어오는 시이의 손을 붙잡았다. 떨쳐내려는 생각은 아닌지 가만히 그런 채 고개를 젓는다.
"불편하고 고단하지만 싫지 않아. 내가 이곳에 있기로 한 것은 온전한 내 선택이니."
어떠한 강요도, 떠날 수 없으리만큼 간절한 한도 없다. 다만 그것이 옳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주 긴 시간이 걸렸음에도 후미카는 점차 변해가고 있다. 맞지 않는 일을 언제까지고 하겠다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스스로 바라서.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로 인해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도 일평생을 바쳐 여기에 있으려 한단다."
배는 천천히 흘러 멀리로 나아가, 어느덧 축제의 조명보다 보트의 등이 더 밝아지게 되었다. 등불이 내내 고요하기만 한 그의 감정에 반발하듯 일렁여댄다. 후미카는 붙잡았던 손을 슬며시 놓고 하늘을 공연히 올려다보았다. 달이 더 밝았더라면 좋을 텐데. 지금껏 한 이야기들과는 영 관계 없는 엉뚱한 감상이 들었다. 후나가츠히메는 언제나 그런 신이었다. 제 일도 남 일 보듯 무념한. 그런 그가 어떠한 다짐을 하게 만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