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멘의 부재료를 만드는 과정은 길었지만, 본 요리로 들어가는 과정은 간단합니다. 커다란 그릇에 담겼지만 생긴 것만큼은 여타 라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네 좋은 냄새가 가득 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으니 회가 동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라멘을 좋아했더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완벽한 음식입니다.
"아, 요즘 렌 군의 눈치가 너무 빨라서 걱정이에요. 장난을 곧이곧대로 받아줄 때 참 재밌었는데."
네 농지거리를 하며 덧붙입니다. "알지요, 물론." 그리 말하며 본 것은 커다란 그릇에 담긴만치 제법 많은 양입니다. 다만 두 사람이 먹는 양이 양이기에 이 정도면 딱 적당한 정도임을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껏 너와 어린 인간에 의해 깨진 점보라멘 챌린지가 몇 개인데요. 아무렴 네 웃으며 먼저 수저를 듭니다.
"잘 먹겠습니다."
요리의 신에게 감사를 올려야 하나? 친분도 없는데 딱히 올릴 필요는 없겠죠. 욕망스럽게 차슈를 올린 라멘의 국물을 먼저 맛본 네 표정은 여전히 은은하나, 점점 미소가 길어지는 걸 보니 네 마음에 제법 든 모양입니다. 따스하고 적당히 기름지며, 짭짤한 국물.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도 절대 나쁘지 않습니다. 되레 더 마음이 편해집니다. 거기다 고기에, 야채에, 탄수화물까지.
"정말 맛있네요. 라멘집에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렌 군도 어서 드셔야지요."
면도 적당히 익었으니, 씹는 맛이 있습니다. 네 만일 조금만 더 과장적인 사람이었다면 벌써 뺨 위에 손을 얹고 달뜬 한숨부터 쉬었겠지만, 너는 정적이고 고요한 사람이었기에 계속 먹는 것으로 답할 뿐입니다. 숙주 한 번, 면발 한 번, 차슈에 숙주를 감싸 한 번.. 기어이 부처 미소가 올라오고야 맙니다.
앞에 놓인 것은 그저 달콤한 양갱이 아니라, 네게서 처음으로 받은, 온기로 가득한 것. 저를 향한 네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마치 신물(神物)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일까. 누구일까. 너와 나는 조금이나마 아는 사이일까. 아니면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인, 모르는 사이인 것일까.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으니, 너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할 수 있는 건, 어떤 것이 더 좋은 선물 일지 진심으로 고민하며, 고르고 골랐을 너를 상상하는 것뿐. 그리고 그런 너를 상상할수록 자꾸만 웃음이 나는 걸까. 이 선물을 보낸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에니시는 도시락파도, 급식파도 아니었다. 직접 싸온 도시락이랍시고 정체불명의 검은 것... 이 담긴 도시락을 꺼내기도 하고, 바람 불듯 유유히 나가 급식을 받기도 하는 굉장한 회색분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오늘은 매점파가 되어보기로 했습니다. 에니시는 양팔에 과자 안은 채 옥상 문을 뻥! 양아치가 그렇게 하듯 찼다. 다행은 문짝이 떨어지거나 흠집이 나지는 않았다는 것, 오히려 얌전한 자태로 알아서 닫혀주기까지 했다는 것과, 이렇다 할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도 없었다.
보드란 바람. 내리쬐는 봄볕. 과자 씹으며 광합성하기 딱 좋은 옥상이다. 에니시는 폴싹 앉고 감자칩부터 양손으로 잡아 팍 하고 뜯었다. 옥상 문이 두 번째로 열리고, 에니시는 신경조차 쓰지 않다가 오니기리 무는 모습에 흘금 시선을 주었다. 하얗고 검은 오니기리... 먹은 지 좀 되었나.
하늘은 파랗고, 코세이의 시야에 여러 겹의 감자칩이 불쑥 내밀어졌다.
"JK의 제안이야. 점심 교환하지 않을래."
어느새 곁에 앉은 에니시는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권태스런 낯에 진지가 얹히다니, 참 요상한 광경이다.
나는 가디건 어깨 부분을 쭉 들어 위로 올렸다. 잘 짜인 천이 하늘하늘 바람에 나부꼈다. 음! 여름에 입기 딱이겠는 걸. 나는 빙그레 웃었다. 보는 사람 없는데도 그래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안목이 좋다. 나는 잠시 가방을 어깨에서 떼어내고 가디건을 몸에 둘렀다. 원래 내 옷처럼 딱 맞으니 어색하지 않고 입은 것 같지 않으니 참으로 가벼워서, 경장輕裝이라 칭할 수 있겠다.
"고마운데..."
장한 것을 본다는 듯 작게 감탄한다. 세상천지 값진 것을 품에 안아도 고마워할 줄 몰랐는데 정작 이 작은 선물을 받고는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나는 소매로 부터 툭 튀어나온 손가닥으로 가디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로 잡지.'
........... 누구인지 감히 추리할 생각도 없이 결혼할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빈 것을 바라보는 것은 즐겁습니다. 기실로 즐겁냐 묻는다면 즐겁다 해야 할지. 아직도 가끔, 무너지는 것들을 보면 의심을 품곤 하지만 그마저도 잊고 무너진 이후의 순간까지 바라보게 되니 아무렴 네 즐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물가에 둥둥 떠다니는 텅 비어버린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지켜보는 것이 네 하는 일입니다. 네 그 작은 무언가를 건드리지 않지만, 이 신기하고도 기이한 것들은 바람결에도 쉬이 흔들려 차있던 물마저 다 비워내고는 손바닥 밑에 굴러떨어지고 다시금 물가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가라앉아, 평생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보던 것이 너임에도, 어째 눈앞의 빈 것은 네가 지금껏 봐온 것들 중 최근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는 쉽게 굴러떨어지고, 지금도 그런 것이 가장 많이 보였으나, 요즈음 이런 것이 늘어납니다. 속에 추라도 있는지 속의 물을 죄다 비워내도 굴러떨어지진 않고 손바닥 위에 있는 것. 그러면서도 물기는 남아있어 점점 부식되고, 기어이 손 위에서 썩어버리는 것. 너는 이제 그 부스러기를 털어내지 않습니다. 털어도 손에 잔재 남기 때문이요, 그리하면 손이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손 한 번 더럽혔을 때를 떠올립니다. 끔찍합니다. 이제 또 손이 더러워지면 같이 나이 먹은 동문 중 유독 이 썩은 것도 사랑하는 것들이 떽떽대며 또 인간에게 손을 대었냐 시끄럽게 굴기 때문에, 직접 물 밑에 담가 흩어지게 두는 편이었지요.
하여 바로 거두지 아니하고 인두겁을 쓴 이유는 네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이 어린 인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식되는 철일지, 쓸어내면 먼지 몇만 묻을 뿐 끄떡없을 광물일지. 너는 지금 허무에서 깨달음 얻을 충분할 시간을 주었으나 이 인간은 모르겠지요. 차라리 모르면 좋겠습니다. 나는 일부를 봐놓고 전체를 본 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마주하면 나도 너를 마주 봄은 너희가 안다고 자부하는 것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단다. 나도 나를 채 다 마주하지 못하는데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마주 보겠더냐.
"…할아버지? 혹 내 나이가 많아 보이나요?"
자, 속내는 그만 들여다봅시다. 네 깊은 곳 보여주어 무엇합니까? 네 다시 원래 생각으로 돌아옵니다. 방금 전까지 속으로 이 어린 인간을 흥미롭게 지켜본 것과는 달리 겉으로 뱉는 말은 차분합니다. 그러면서도 잠깐 네 인두겁에 대해 심오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 인두겁이 늙어 보이나? 최대한 젊어 보이게 꾸몄는데, 심오하게 고민하다가도 요즘 아이들은 유도후를 안 좋아하나? 로 생각이 이어지는 겁니다.
…요즘 애들은 유도후보다 스키야키인가? 아니면 나베? 애들은 사케를 못 마시니 나베에 의미가 있긴 한가? 고민은 길지 않습니다. 네 잔을 매만지며 은은한 미소 길게 유지합니다.
"좋아요, 나를 따라오면 돼요."
음, 요즘 말로 츤데레인지 뭔지 하는 건가 봅니다. 빈 것은 역시 재밌습니다. 아직도 살기 위해 츤이라는 걸 담아둔 것 아닙니까! 네 한 걸음 앞으로 나섭니다. 한 걸음, 여덟 팔자 그리던 걸음 우뚝 멈추더니, 잠깐의 정적 이후로 보통의 아이처럼 걷기 시작합니다. 조신하고, 얌전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차분한 걸음으로.
오늘의 옥상을 점거한 것은 나와 또 다른 학생(혹은 신)뿐이었기에 어떤 말소리도 없이 그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느긋한 점심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니기리를 한 입 베어물었을때 그 상상은 무참하게도 깨져버렸다. 자신을 JK라고 소개하며 점심을 교환하자는 말소리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진지한 얼굴이 눈에 띈다.
" 교환은 딱히 생각 없지만. "
이거 하나 먹는 것도 억지로 입에 쑤셔넣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하나 더 있는건 그냥 줘도 무방했다. 도시락통 뚜껑에 오니기리를 하나 담아서 그녀에게 건네주고서는 말없이 손에 들린 것을 한입 더 먹어버린다. 리리한테 싸준건 명란젓이 들어간 것이지만 내것은 우메보시가 들어간 것이다. 사고보니 명란이 부족해서 그냥 대충 만들어버렸다.
" 요즘 JK들은 감자칩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그런가보네요. "
근데 자기 자신을 뜬금없이 JK라 소개하니 나도 딱히 부를 호칭이 없다. 피곤해서 뻑뻑한 눈을 반쯤 뜬채로 앞머리를 쓸어올린 나는 옆에 두었던 물을 한모금 마시고서 말했다.
" 뭐, 여기서 본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 만나서 반가워요. "
이 익숙한 기운은 역시나 상대방이 나와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밤이라면 좀 더 살갑게 맞이해줬을테지만 낮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