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들큰함 때문에 골이 아팠다. 나베를 담아준 그릇을 내팽개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최악은 아니었다. 건더기는 두부가 좀 많은 것을 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국물 맛도 좋았다... 아니 좋았을 터였다, 원래라면. 감미료 듬뿍 들어간 감칠맛에, 맛술과 향신료로 균형을 잡은 국물맛이 나와야 했는데, 그 씁쓸하고 들큰한 맛이 좀 많이 거슬렸다. 아니 국물뿐이라면 야미나베치고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감수하고 참아넘기고 먹을 만했다. 그러나 그 풍부한 건더기들의 마지막 숟가락에, 두부와 버섯 사이에 숨어있던 복병이, 채 다 녹지 못하고 열에 엉겨붙은 홍삼정 덩어리가 이빨 사이에 제대로 씹혀버린 것이다. 국물 맛을 감수하고 앞서 먹었던 식재료들의 향이며 촉감이 입안을 가득 메우는 씁쓸한 들큰함 때문에 죄다 지워졌다.
그걸 씹자마자 얼굴이 사색이 돼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시니카는 식기를 황급히 반납하고 천막 밖으로 나와 수풀 사이에 자신이 씹은 것을 퉤 하고 뱉었다. 그리고 주변의 가장 가까운 노점을 찾아 달려들다시피 해서 동전닢을 제대로 세지도 못하고 500엔짜리 두 닢을 건네어주고서는 얼음을 탄 버진 상그리아 한 잔을 받아들 수 있었다. 노점상 아저씨는 갑자기 흉살맞은 노기가 등등한 얼굴을 하고 달려든 눈빛 매서운 여고생에게 놀란 가슴을 누르며 거스름돈을 내밀었으나, 일단 거스름돈을 받기보다 이게 먼저였다. 빨대를 통해 시큼털터름하고 새콤한 포도향과 시트러스향을 균형있게 머금은 차갑고 달콤한 액체를 입 안에 한가득 쏟아넣고서야, 시니카는 그 액체의 힘을 빌어 입안에 남은 끔찍한 맛을 간신히 씻어낼 수 있었다.
"야미나베가 좀 이상했나 봐요?" 노점상 아저씨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들려온다. "지뢰를 밟았어요." 아직 채 다 펴지지 않은 표정으로 시니카는 대답했다. "놀래켜드려서 죄송합니다."
후우...
시니카는 심호흡을 했다.
토할 뻔했다.
역시, 사쿠라마츠리는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야. 하고 시니카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아마 그 씁쓸한 걸 넣은 사람이 누군지 알면 진심으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쁜 생각은 빨리 머릿속에서 지우자. 하고 시니카는 시선을 들었다.
입안을 씻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문득 우연히 들어올린 시선 가운데에 걸린 것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보다 눈높이가 조금 더 낮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보였다. 시니카는 아마 자신과 같은 것을 씹었겠거니 짐작했다. 신기에 일절 관련 없던 삶이었기에 관련된 내막이라곤 전혀 알 리 없으니, 그 이름모를 이가 겪는 고초가 인간이 겪을 것보다 더 독한 것도 모를 테다.
'모처럼 예쁘게 차려입고 나왔는데... 가엾게 됐네.' 시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히키의 등을 툭툭, 아프지 않게 그러나 힘있게 두들겨주는 것이 있었다. 히키가 안에 남은 것들을 게워내기 쉽게 도와주는 것이다. 움직임은 호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나 닿아오는 손길은 옷 위로도 냉랭하다. 몇 차례, 토기가 잦아들 때까지 그 손은 히키의 속에서 메슥거리며 올라오는 것이 있을 때마다 등을 두드리며 히키의 속에서 거슬리는 것들을 게워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히키가 정신을 차리고 등을 두들겨준 이가 누군지를 돌아보면, 히키보다 조금 키가 더 큰 소녀가 거기 있었다. 머리는 짧고 눈빛은 차가웠지만 이목구비가 곱고 치마를 입고 있으니 소녀겠지. 가미아리 학원의 2학년 교복을 입고, 그 위에 육각 패턴이 군데군데 수놓인 자색의 스카잔을 걸치고 있는 소녀가 히키에게 빨간 액체가 반쯤 채워진 잔을 내밀고 있었다. 비린 기색 없고 상큼한 포도와 과일 기색만 있으며 무엇보다 잔 안에 채워진 얼음들과 과일들이 투명히 비쳐보이니 피는 분명히 아니겠다.
"좀 가라앉으셨으면..." 초점만 맞춰진 채로, 텅 비어있는 듯한 보라색 눈동자가 히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이라도 하나 드세요."
땡땡이를 쳐 사라진 아이들을 잡아오라는 체육 선생의 지시에 따라 흩어진 아이들 중 한두 명이 체육 창고의 불을 밝혔다. 매트리스 위에 덩그러니 있는 검붉은 소녀와, 그 옆의..... 쭈굴쭈굴한....? 순간 우당탕 소리와 함께 탁구공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시선은 무지비하게 흩어진다. 무지한 아이들은 어, 어? 쥐? 소리를 내며 구르는 탁구공들을 피하기 바쁘다. 히로는 많고 작은 탁구공들이 순식간에 몸 위로 테구르르 떨어지는 것에 저 바보, 하려다 오히려 칭찬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다. 히로는 튀어오르 듯 빠르게 몸을 굴려 열린 체육창고 문 뒤로 기어가듯 사각지대에 숨어든다. 아무래도 이성끼리 어두운 체육 창고에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테다. 그래서 히로는 가만 숨을 죽여보지만 탁구공을 줍느라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보니 일이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것 같다.
"야, 들키기 전에 빨리 주워"
선생이 알았다간 잔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판단을 마친 행동력 빠른 아이가 서둘러 탁구공을 마구잡이로 줍기 시작했고 바닥에서 줄어가는 탁구공들을 보며 히로는 아이들이 눈을 돌렸을 때 빠르게 빠져 나가려 했다, 만. 어느새 히로의 발치까지 굴러 온 탁구공을 쭈그려 앉아 줄줄 따라 줍던 남학생과 눈이 충돌한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연스레 입이 벌어지고 동시에 비명을 지르려는 제스처에 히로는 빠르게 몸을 굽혀 남학생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지만 히로의 힘과 무게를 견디지 못한 학생은 몸이 뒤로 고꾸라져 결국 균형이 무너진 히로와 좁은 구석에서 데굴 엉킨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아이가 주웠던 탁구공들은 도로 바닥에 흩뿌려지고. 서로 바닥에 부딪혀 둘은 신음한다.
"너 뭐야 언제부터.."
마주친 적 없는 얼굴에 같은 학년은 아니라 판단한 3학년 남학생이 인상을 구기며 히로를 노려보자 히로는 건조한 눈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손을 건네어 그를 일으켰다. 잘못한 건 맞지 뭐.
"나도 방금 왔어."
탁구공이 어지럽길래. 체육창고 밖까지 흘러나간 탁구공을 가리키며 히로는 손에서 탁구공을 슥 내보이곤 어깨를 으쓱한다. 그들을 잡으러 왔던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히로는 아무렇지 않게 탁구공을 품에 쓸어담아 제자리에 넣었다. 쏟아지는 아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일을 묵묵히 하곤 있었으나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게 꽤나 애를 쓰고 있었다. 그 근처에 있었을 코로리와 눈이 마주쳤다면 한순간 눈이 녹아내리듯 휘어진 눈썹으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안절부절한 강아지처럼. '이제 어떡하냐.' 라는 말을 전하는 것 마냥. 그리고 시선이 서로 떨어지면 다시 무심한 얼굴로 구석까지 굴러 들어간 공이나 주우러 휙 가버리는 것이다. 반박할 여지가 그다지 없었으니 상황은 어영부영 넘어가게 되고 아이들의 빠른 행동력 덕에 탁구공은 얼추 모두 주워 담았으나, 이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겠다.
"어쨌든 이자요이. 선생님께 가 봐."
쏟은 탁구공 파티에 대해선 나중에 청구하겠다는 듯 선량한 학생 두 명은 멀리 서 있는 선생 쪽으로 눈짓을 하고, 멀거니 서있는 히로에겐 긴가민가한 의심의 눈총을 보낸다. 이자요이라는 이름을 대충 새기고 있던 히로는 눈총에 못이겨 구석자리로 어떻게 설렁설렁 열에 맞춰 있는 아이들 틈으로 끼어들어 보지만 과연 조용히 넘어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히로의 땡땡이를 눈치 챈 몇몇의 아이들이 조그만 소리로 수근거린다. 그는 무성의하게 반쯤 뜬 눈으로 귀나 후비적 거릴 뿐이다.
//히로도 같이 걸렸다~라는 전개도 완전 환영이야 >:3 다른 내용이 떠오르면 그렇게 이어도 되고. 시간이 꽤 흘러서 흐름이 좀 흐릿해진 거 같지만 ㅠωㅠ 잘 부탁해!! 고마워
그걸 직접, 이라고 하는 걸 보니 봤나보다. 별일이다. 보통 위쪽은 안 보고 지나칠텐데. 딱히 보라고 걸은게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못 봤어도 요조라는 상관없었다. 요조라에게 그림은 그저 그려내는 것,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니 그걸 보고 예뻐서 좋았다느니 감동적이었다느니 말해도, 와닿지 않는다.
"그러신가요..."
요조라는 이번에도 통상적으로 하는 대꾸를 하며 반응을 흐린다. 시선도 줄곧 떨어지는 꽃잎이나 나무를 보기만 한다. 어차피 자신이 질리면 떠날 사람이다. 요조라는 필요 이상으로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앞서 꽃잎을 털어주는 것까진 갑작스러웠으니까 허용했지만, 이번에 이마로 손이 오는 건 요조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손이 미처 머리카락이나 이마에 닿기 전에 고개를 뒤로 기울여 피하고 그 움직임으로 꽃잎을 떨군다. 그리고 다시 한걸음 떨어져서, 그 무심하고도 퀭한 검은 눈으로 코세이를 힐끔거렸다.
코세이가 새삼 자기소개를 할 것도 없이, 요조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였다. 알면서 모른 척 굴은 건. 그러면 대부분은 더이상 간섭해오지 않고 떠났고, 요조라에게는 그게 편했다.
"별... 자주, 보긴... 하죠... 밤엔, 늘, 깨어... 있어서..."
별은 요조라의 체질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함께 있어준 세상의 일부였다. 검푸른 밤하늘과 우윳빛 달, 온 하늘을 수놓은 별은 한낮의 해보다 더 친숙했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에도 별과 달이 있으니 싫어할 리가 없었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대답해줄 의리는 없었다. 때문에 요조라는 심드렁한 대답을 하고 그 나무 앞을 떠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보내거나 태워야죠. 마음이 멀어진 상대와 몸도 멀어졌지만 인연을 완전히 끊고 싶지는 않다- 정도네요. 아 그러니까 사진을 보내는 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 정도의 안부인사 정도라는 건가요?
"상승기류 없이도 벚꽃이 느릿하게 떨어지는 방법은..." 신의 권능 정도는 될까요? 라고 말하며 가미즈미 마을이니까.. 마츠리마다 신이 돌아다닐지도 모르는걸요? 라는 말을 하는 토와입니다. 얼굴만 봐선 신 그런 건 없어. 라고 할 법한데도. 밤에도 빛을 낼 것 같은 선명한 에메랄드 색 눈이 야사이를 바라보다 빙긋 웃으며 접힙니다.
"장신구를 파는 노점상은 잠깐 구경한 적 있지만.. 본격적으로 즐기는 건 야사이 군이 처음이네요" "의외로 게임은 많이 해본 적 없어서요" 잘 못할 걸요? 라는 말을 합니다. 제가 아무리 공부는 잘해도 한번도 안해본 걸 바로 잘하진 못해요? 라네요. 어디 국경없는 의사회에라도 들어가면 호신용 사격이라도 배울지도 모른다지만(?)(국경없는 의사회에 무슨 망언이야)
"다만 게임적 사고는 잘 할 수 있지만요?" 그러니까.. 한정된 hp를 유지시키며 빠르게 처치를 끝낸다는 개념의 이해라던가요? 라는 말을 손가락으로 본인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합니다. 금붕어 뜨기에서는 종이가 찢어지기 전에? 라는 생각을 하며 링고아메를 파는 곳.. 그러니까 음식 노점 쪽으로 향합니다.
링고아메.. 토와주는 작은 사과를 탕후루같이 하는걸 생각했으나. 찐 사과라는 걸 알고.. 놀랐었나?
온몸이 비명을 지릅니다.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고통에 인간의 껍질을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더니, 한 번 속이 크게 불타자 그 생각마저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성적인 사고마저 잃어버리니 세상이 빙글 돕니다. 불현듯 신관장의 딸과 함께 보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얼굴 없이 가면만 쓰던 검은 요괴가 욕심에 잠식되어 온천의 직원이고 음식이고 전부 먹어치우다, 주인공이 건넨 쓴 경단을 먹고 토해내며 주인공을 쫓던 그 장면. 그 경단이 얼마나 썼는지는 몰라도 요괴의 구토는 물론이요 몸이 녹아내리던 장면을 그 당시에는 감흥 없이 봤건만, 막상 비슷한 처지가 되니 몸이 녹아내리던 장면이 과장이 절대 아니었거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생리적인 현상으로 발생한 눈물인지, 아니면 몸이 녹아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뚝뚝 무언가 흐르는 것이 느껴지는 흐린 시야 속에서 누군가 냉랭한 호의로 등을 두들겨줬을 때, 보통이면 재액이 옮는다며 거절했을 텐데도 얌전히 받아들입니다. 네 모시는 신관의 피가 흐르니 힘 닿지 아니하는 하나비겠거니 생각한 겁니다.
등 두드려주니 다행스럽게도 일말의 이성이 유지되어 몸이 녹지 않았음을 체감할 수 있었으며, 게워내는 일은 한결 쉬웠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속 가라앉는 것은 아니요, 인간의 위에 응당 있어야 할 쓴 물까지 토해내고 몇 번을 더 헛구역질을 하고 나서야 그나마 속에 담겨있기에 느껴지는 통증 가라앉더랍니다. 그간 숨 제대로 못 쉬어 힉힉대는 소리 내며 몸 허물어질까 겨우 나무 붙잡고 고개 겨우 돌립니다. "하나비..?" 하며 보니, 감긴 눈이나 상대 확실히 볼 수 있으니, 어라. 하나비는 아닌데..
"아, 그, 그게..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그만.."
그런 네 바라보기에 시선 맞지 아니하고 조금 더 큰 소녀 있으니,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것은 교복 보고 알 수 있으며 그 위에 육각 무늬 자색의 스카잔 덧입은 것으로 제 나름 꾸미었더랍니다. 손에 들린 것은 붉은 액체 반쯤 채워진 잔이니 인간 육신 덧썼다 한들 본체 짐승 모습이기에 예민한 코는 어느새 소다수와 과즙 느끼었습니다. 저마저도 피였다면 심약하지는 않으나 필히 이 육신은 버티지 못하여 기절하였을 텁니다.
"가, 감사합니다.."
남모를 고통 견디어도 이리도 차분한 것은 이미 몸에 흡수된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버티다 보면 괜찮아짐을 알기 때문이요, 버틴다고 이 몸 사라지는 것도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얻지 못하고 제 발로 피안 들어가지 않는 한 사라지는 몸도 아니고 말입니다. 손 뻗으며 잔 받았을 적 본 것은 텅 비어버린 듯 공허한 눈동자요, 네 경황이 없어 속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고개 돌리어 잔 조금 허공에 떼어 기울이더랍니다. 구순 닿지 않고 약간의 음료와 작은 얼음 데굴 굴러 입안으로 떨어지며, 단맛이요 상큼한 맛이며 온갖 싱그러운 과일 향과 차가움이 가득합니다. 다만 이대로 삼키기 애매하여 잠시 머금고 있다 천천히 고개 돌려 뱉어내니, 입 헹군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제야 네 할 말을 할 수 있던 게지요.
"어찌 답례를 해야할지.."
나직한 목소리는 아마 소년일 것이요, 이 상황에서도 기력은 없으나 차분하여 제법 몽롱하니, 꿈결 거니듯 합니다. 네 속 비웠다 한들 하오리니 유카타 운 좋게도 흔적 없이 깔끔하며, 그만치나 깔끔한 자세 유지하더랍니다. 조금 창백하지만 토한 사람.. 아니, 신 치고는 멀끔합니다. 고로, 작은 인간에게 받았으니 베푸는 것은 의무 아니겠습니까. 이행할 시간이지요.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반응이 영 시원찮기는 했지만 신경은 별로 쓰이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보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그녀도 하고싶은 얘기를 할 뿐이니까. 남이 보면 대화의 핀트가 이상하다고 느껴진다고해도 그건 3자의 시선일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차분한듯, 들뜬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 뭐야, 기억하고 있었네요. "
손가락이 다가가니 고개가 뒤로 빠진다. 아, 하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다시금 작게 웃고서는 내 머리 위에 떨어진 꽃잎을 털어냈다. 눈이 쌓이듯이 소복하게 쌓이는 벚꽃잎들은 역시나 장관이었다. 학우들이 본다면 항상 피곤해하고 매사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낮과 아예 다른 모습에 놀라겠지만.
" 물론 정말 시간을 멈출줄 아는건 아니지만 ... "
시간의 신도 아마 시간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멈출 수 있는 능력은 있겠지만 그걸 사용하기는 엄청 힘들겠지. 근데 일개 별의 신인 내가 그럴 능력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별의 신이기에 할 수 있는 것중에 하나는 ...
" 이 근처에 별이 정말 잘 보이는 곳이 있는데. 혹시 관심 있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요? "
별의 운행을 살피다가 지루해질때마다 산책을 나왔고 한창 같은 루트로 다니기 지겨워서 다른 길로 갔을때 발견한 곳이었다. 물론 거기도 다른 곳보다 엄청 잘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심에서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별들도 어렴풋이 보이는 수준이니까 좀 더 나을 것이다.
"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도 있다니까요. "
한쪽 눈을 살짝 감으며 하늘을 가리킨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벤트를 열어줄 계획이었다.
후미카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가_주로_먹는_아침_식사_메뉴는 -🤔 글쎄... 무난하게 정갈한 가정식?
작년에_산_옷이_맞지_않다면_자캐반응 - 신이라는 특성상 설정해늫은 외모에서 키가 커졌다거나 체중이 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세탁 문제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옷 입을 때만 옷에 몸을 맞춰서 입거나(찐) 중고품 가게에 내놓거나 할듯!
자캐의_애교방식은 - 팔이나 소매 같은 걸 붙잡고 가만히 올려다 봐. 가마아아안히...... 이건 기선제압용이 아니라서 기가 죽진 않겠지만 이렇게 보면 부담스럽긴 하겠다... 그래도 안 되면 "안 되겠니?" "부탁이야." 같은 말 하고…… 애교라기보단 요구성 행동에 더 가깝겠네...ㅋㅋㅋㅋㅋㅋㅋㅋ
조금 시큼하지만 흠잡을 정도는 아닌 산미는 우유거품 속으로 사라지고, 짙은 커피향이 조연의 선을 넘지 않는 헤이즐넛 향과 함께 코로 올라온다. 편두통이 한결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다. 억지로 얼굴에 빳빳하게 걸어놓았던 무표정이 한결 느슨해지며 편안한 것이 되었다.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찢어지는 것만큼은 면했다. 시니카는 조금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문득 미즈미를 흘끔 바라보았다. 씹는 것도 여유롭다. 아니 여유롭다기보다는.. 여유롭게, 무언가를 흉내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시니카가 그것에 대해 더 꼬치꼬치 파고드는 일도 없다. 오물거리는 미즈미의 입에 머물러있던 시선도, 미즈미가 활짝 웃을 때면 다시 카푸치노로 내리깔린다.
그러다, 신에게 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라고 대답하는 미즈미의 말에 문득 시니카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걸린다. 힘없는 미소를 건 채로 미즈미를 바라보면, 어느샌가 거의 다 비워진 접시를 두고 활짝 웃고 있는 미즈미의 얼굴. '씹는 것을 흉내내고 있는 것 같은' 미세한 위화감 따위는 잊게 만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행복해보이는 미소다. 오므라이스 한 그릇으로 저렇게나 행복해보이는 얼굴이라니- 나도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문득 카푸치노가 유독 쓴 것 같았다.
시니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쓸 리가 있나. 컵은 이미 다 비워진 채다. 저런 웃음이라니. 이제 와서는 필요없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시니컬한 시니카 양은 평온하게 살고 싶습니다.
시니카는 식기를 그릇 위에 올려둔 미즈미를 따라 일어섰다. 예의상, 인사치레를 했다. 오히려 흉내라면 이 쪽이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요조라에게 뻗었던 손이 이후 어디로 갔는지 무얼 했는지는 관심없었다. 그것을 포함하여, 요조라는 늘 일정하게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타인이란 그저 멋대로 와서 멋대로 가는, 계절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앞서 가버리는 사람들보다 그 뒤에 남는 풍경만이 요조라의 눈에 비쳤다. 그저 보기만 하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내기 시작한 건 하늘이 몹시도 맑은 어느 날이었더랬지.
"네에, 그러시겠죠..."
코세이가 정말로 시간을 멈출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기 때문에, 그날 밤 했던 말이 빈말이라 해도 요조라에겐 그저 그럴 뿐이었다. 그러니 못 한다고 해도 적당히 대꾸하며 요조라는 제 갈 길만 갔다. 느릿느릿, 자박자박, 행여라도 보이지 않는 나무 뿌리에 걸리지 않게 조심히 걷는다. 걸으면서 했던 대답에 재차 대답이, 아니지, 이번엔 동행 요청일까. 같이 가지 않겠냐는 말에 힐끔, 특별한 이벤트가 있다는 말에 가리킨 하늘을 힐끔, 본 요조라가 입을 열었다.
"이, 근처, 라면... 언젠가... 산책, 중에... 찾을 수도, 있겠네요... 저 혼자... 서도..."
근처에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만 알아도, 언젠가 찾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 곳이라면 굳이 지금 갈 필요는 없다. 지금은 다음 그림을 위한 꽃과 나무 관찰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싶은 요조라였다.
이만하면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고, 요조라는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일행인 사람도 아니었고 제안이 그렇게 솔깃한 것도 아니다. 이쯤 하면 슬슬 가겠지. 그럼 다시 혼자 느긋하게 꽃을 볼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들을 내딛는 걸음마다 흘리다가 가까이에 빈 벤치가 보이자 요조라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벤치에도 쌓인 꽃잎을 유카타 소매로 대강 쓸어 자신의 자리만 만들곤, 그 자리에 앉아 주변과 반대편에 보이는 풍경을 천천히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