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나마 고민을 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손사래를 쳤다. 뭐랄까, 내가 아는 코로리 누나라면 정말 문방구에서 하나 사와서 콩!하고 찍어줄거 같달까. 이참에 하나 장만해서 서점에 쿠폰제를 도입해보는건 어떻냐는 우스개소리를 던졌다. 정말 도입된다면, 손님의 대부분이 단골이거나 혹은 한 번 온 뒤로 절대 오지 않는 이 서점에 제법 극단적인 마케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콩? 그 땐 그랬을진 몰라도 이젠 나한테 코로리 누나하고 하루나가 언니 까망콩, 동생 까망콩으로 보여. "
둘 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동글동글한 뒤통수 덕에 뒤에서 보면 정말로 자매 콩 같아 보일때가 가끔씩 있었다. 특히 머리를 짧게 두 갈래로 질끈 동여맨 하루나는 더더욱.
" 그래, 책이 다 젖어버리면 막대한 손해라구. 할아버지가 현명하셨네. "
화려한 축제를 보며 정말 신난 코로리 누나, 하루나, 그리고 나 스스로를 보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점상의 밝은 조명 때문만일까, 모두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말았다.
손목의 각도를 조금 더 꺾을걸 그랬나? 괜히 아쉬움에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그래도 2번째로 좋은 경품을 땄기 때문에 꽤나 만족할 수 있었다. 상품을 고르기 전에, 누나가 던지는 것을 구경했다.
" 와... 대단해. 내가 벚나무 신님이 들어준거였다면, 누나는 어쩌면 벚나무 신 그 자체? "
짝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옆에서 하루나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깔끔하게 터져나간 풍선들 덕에 아까보다 다트 노점이 휑해보였다. 물론 주인이 곧 새 풍선으로 갈겠지만.
인형을 고르고 싶어하는 하루나를 읏챠, 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올려 높은 선반 위의 인형들 하나하나 잘 보이게 해주었다. 누나는 무엇을 고를까, 나중에 생일 선물 같은 걸 줄 때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여겨 보았다.
본디 공허와 쾌락은 한 끗 차이나 그 이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필히 상반되기 마련입니다. 비슷하다 한들 의미는 물론이요, 가지고 있는 힘도 상성이니, 네 공물을 바친다는 의미로 나베를 끓인 결과물에서 쾌락의 피를 발견하던 순간 여간 곤란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
본디 먹지 아니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무녀가 죄 먹으라 한 것과, 네 달관하여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라 한들, 쾌락신이 그 신념을 무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이라는 점과, 공물로 자신을 바칠 정도의 정성이 갸륵한 점까지 셈해보니 그 이유 제법 합당하기에 그릇을 노려보길 그만두고 먹었더랍니다.
그래도 맛은 나쁘지 아니하다 할 수 있는즉, 초반에는 괜찮았더랍니다. 다만 상성이요 독인 것 먹었으니 맛보다 더 중한 것이 체질 아닌지요. 네 오랜 세월 버티었듯 버텼으나 성수로 구마 당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제대로 체험하였더랍니다. 공허였기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것은 제 속에 있는 신체의 부속품인데, 그 부속품이 어디에 있으며 지금 어디가 타오르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얼마나 빠른지 확실히 체감하고 마는 것입니다.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으니, 너는 결국 그릇을 내려놓고 은은한 미소 지어내며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사람 한적할 숲길 근처로 걷습니다. 이 와중에도 뛰거나 하는 모습 없는 것은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였다가 그르칠 것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어찌 되었느냐 묻는다면 현재 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 죽겠다고 답하겠습니다. 본모습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발버둥 치면 좋겠다 생각했거늘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인간 모습 그대로, 근처 나무 붙잡고 몸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듯 벌벌 떠는 겁니다. 이래서 젊은 것들에게 혈기가 왕성하다 하는구나, 젊은 것들이란 무섭기 그지없다! 이후로는 시야마저 희뿌얘져 짐승마냥 제대로 된 사고 하지 못하고 헛구역질 하며 토해내야겠단 생각만 들었을 뿐입니다.
아무렴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구역질 하며 숨 헐떡이는 것은 창조된 이래 신으로 살며 유례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구내를 축축히 적시는 냄새는 과연 어디서 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침으로 질척거리는 입점막을 대충 갈무리한다. 앙-소리가 나도록 입을 양껏 벌려 오므라이스를 입에 집어넣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인간의 몸으로는 저작운동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숫자를 센다. 입에 있는 음식물을 넘기지 않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아직 이 쌀알과 계란, 각종 재료들이 충분히 작지 않아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을 해야 했다. 끄덕이는 몸짓이 씹는 것만큼이나 느렸다.
그래. 시간을 들인다면 저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 저 얼굴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날이 올테였다. 나는 쇠숟가락으로 그릇의 빝바닥까지 싹싹 긁었다. 플라스틱 그릇인지라 거슬리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묘기라도 부리듯 숟가락을 들어 구강에 전부 털어놓았다. 흩어져있던 밥알들이 전부 내장속으로 떨어지는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너의 물음은 교묘하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지라 나는 또 모르는 척 한다. 너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으면 네 표정이 한결 나아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말에는 힘이 깃들어있대잖아. 우리가 신에게 빌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배를 쓰다듬었다. 배가 불렀다. 나는 웃으려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오고 포만감이 드는지라 실제로 기분도 좋았다. 어찌되었건 너의 분위기도 아까보다 나아진 걸 봐서는 상황이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나, 의외로 인간이랑 잘 지내고 있는 것 아닐까? 없던 자신감도 샘솟아 올랐다. 처음에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여서 걱정이 들었다. 말라 죽어 새까만 고목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지금 심정으로는 사랑이고 우정이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맥없는 확신으로 차오른다. 내가 오만하게 굴고 있는건지, 아니면 낙관적으로 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나는 고민 대신 행동으로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배도 불렀겠다 몸이 굼떠졌으니 오수나 즐기고픈 마음뿐이다. 연애 사업도 의식주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쑥쑥 성장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치며 시니카에게 작별인사를 남겼다.
"그럼 집가서 푹 쉬어, 시니카. 내일 학교에서 보자! 복도에서 보면 인사해주고."
//시간도 늦었구 내가 너무 질질 끈 것 같아서 막레각 잡아왔어~~~~ 미즈미 철딱서니 없는 애랑 놀아줘서 넘 고마웠어~~~~
"야호! 정답! 으음, 그건 아직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네요. 그래도 누군가 받을 사람이 있는 사진을 찍으려 하는 거죠? 그렇다면 그거 좋은 선물이에요. 사쿠라마츠리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한 장면을 골라 담는다면 언제이든 받는 사람이 누구라도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받는 사람이 좋아할 거란 말을 입에 담으면서 그걸 상상하는 자신이 더 즐거운 양 소년은 미소짓는다. 보내고 태운다는 건 남겨두지 않는다는 말일까, 사진에 마음이 담긴다면 그것은 보내버린 마음을 지워버리는 일이 아닐까, 말장난 같은 걸 조금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큰일로 여기지 않는다.
"너무 빠르지 않아요? 이 사쿠라마츠리의 벚꽃잎들은 눈 내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공중에 머물러 느긋하게 떨어지는 편이니까 상승기류는 크게 받고 있는 것 같고, 초속 1미터보다는 조금 느리지 않을까요... 앗, 안경에 묻은 것도 떨어져요!"
초속 5cm보단 빠를 듯한 느릿한 속도로 다른 꽃잎더미 위에 내려앉는 안경에 붙었던 꽃잎을 가리키며 소년은 키득거린다. 그래도 떨어지는 건 같아서 금방 눈으로 쫓기도 힘들어지고 다른 꽃잎 사이에 묻히고 만다.
"사줘... 아니, 사드리고 싶은 건 제 쪽인걸요. 그렇지만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죠. 링고아메는 제가 대신 먹을게요~."
일단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이지만 기왕이면 베풀고 싶은 것이 소년의 마음이다. 그러나 상대가 바라지 않는 일에 베품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고, 나눠 먹는다 쳐도 좋을 것 같진 않다. 옛 이야기에도 신에게 바칠 공물에 손을 댔다 저주받은 이야기가 있는데, 자신은 그런 걸 바라지 않지만 '받는다'와 '종족차'의 개념 같은 것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은가? 소년은 싫어, 하고 생각했다. 대신 약속한 건 혼자서라도 링고아메를 먹겠다는 것. 소년은 아직 모른다. 링고아메는 그저 단단한 설탕 안에 사과가 들어 있을 뿐이란 걸... 계란후라이는 계란을 깨트려서 구운 것이라는 수준의 설명이지만 정말 말 그대로라는 것을...
"정말로요? 해냈다─아!"
아까 전까지 주절주절 길게 말한 것과 대조되게도 끄덕임에 대한 이번 리액션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정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고, 벚꽃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던 얼굴의 홍조가 앞으로의 즐거움을 기대하기에 그런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소년은 한 손에 머리카락 뭉치의 끝부분을 꾹 쥐고 다른 손을 파이팅! 하듯 들어올리는 어정쩡한 해냈다 포즈를 해보았다.
"좋겠다아~ 다 다니기엔 오늘 해가 지고도 남겠어요. 과분한 행복이 넘쳐흐르네요... 으응, 안 가본 척 해야 하는 건가요? 일일이 그런 걸 신경쓰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할 텐데요. 그치만 이 마츠리엔 너랑만 제일 먼저 놀러온 거야─라는 건 뭔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을 것 같긴 해요. 그러고보니 저는 이번에 토와 선배님과 올해의 마츠리를 제일 먼저 즐기는 거네요─."
또 들떠서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벚꽃잎이 툭툭 떨어내지는 것에 소년은 말을 끊는다.
"앗, 감사합니다. 저도..." / 그러며 토와의 머리카락에 묻은 꽃잎을 이쪽도 떼주려고 하다가, 멈칫하고 손을 돌려놓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는다. 머리카락에 묻은 건 타인이 아니면 안 보이니까, 이대로 떼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게 더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한 것일까. 금방 자신이 받은 쪽에 의식이 간다. 생각보다 섬세한 손으로 벚꽃잎을 털어내는 것은 왠지 덤불에서 꽃을 따는 손길 같다. 마음 속으로 한 비유가 마음에 들어 소년은 겉으로 또 웃음을 드러냈다.
"토와 선배님은 따는 거 잘 할 것 같고, 사격을 해봐도 좋을지도..."
그러나 마음 속에서 한 생각에 연상까지 거듭해 설명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놓는 건 어지간히 들뜬 탓이 아닐까 싶고. / "링고아메는 어디일까요─." / 하고, 소년은 당신을 자연스럽게 음식 노점 같은 것들이 있었던 곳으로 이끌어가려 한다. 당신이 어디든 먼저 가려 하거나 더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그에 따르려 할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보통 저렇게 취미 수준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림을 잘 그리던데. 무언가를 엄청 잘하는 사람치고 으스대는 사람을 못보았기에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그렇구나, 하는 짧은 대답만 내놓았다. 꽃잎을 털어내자 무언가 역장이라도 있는듯이 한걸음 멀어지는 그녀를 보고선 작게 웃음을 터뜨린 나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 아, 그걸 직접 그린거에요? "
노점에 들어가기 전에 천막에 그려진 그림을 살짝 엿보았다. 밤하늘을 그려놓은 것이 참 수려하게 아름다워서 어디서 구한 것일지 궁금했는데 그걸 직접 그린거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취미 수준이라고 했으면서 정작 그렇게 잘 그리다니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개인적으로 밤하늘을 참 좋아하는데, 그림이 예뻐서 좋았네요. "
솔직히, 조금 감동적이었어요. 눈웃음을 지으며 소녀쪽을 바라보았다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무를 바라보았다. 벚나무의 꽃잎들은 작은 봉오리에 매달려 자태를 뽐내다 하나씩 바람에 흩날려가고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뿐이 아닌 이곳의 모든 벚나무들은 그렇게 수백, 수천장의 꽃잎들을 다함께 흩날리고 있다.
" 아 맞다. 이제 봤죠? 나는 귀신이 아니라는거. "
저번의 만남에서 귀신으로 오해 받았던게 이제야 생각났다. 분명 이마에 손까지 대줬는데도 귀신이라고 오해했단 말이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일부러 그런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러다 그녀의 이마에 날아든 꽃잎을 보고선 나는 다시 한번 손을 가져가 이마의 꽃잎을 쓸어주며 말했다.
" 까먹은 것 같아서 다시 소개할께요. 내 이름은 이자요이 코세이, 혹시 ... 별 보는거 좋아해요? "
아침이나 낮이었으면 절대 나오지 않을 텐션인데. 괜시리 신나서는 상대방 눈치도 안보고 이것저것 얘기하고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이런건 어쩔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