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품 안쪽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남이 떠먹여주는 것을 삼켰고, 남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았고, 남이 느끼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저택에서 루힐은 몇 년간 그렇게 컸다. 그리하여 완성된 은빛 머리에 황금을 품은 듯한 두 눈. 루힐의 외양은 마치 부호가 소장하고 있을 것 같은 인형 같아서, 성질이 못돼먹은 몇몇 종들은 지 부모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은을 발라주고 눈에 넣을 수 있는 귀한 금덩이를 구해다 준 거라며 조롱했다. ……그럴 때마다 루힐은 자기 연민으로 빈속을 유장히 채워나갔다.
모종의 이유로 루힐은 비복 다섯과 함께 공기 좋고 한적한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적응도 덜 된 채 어영부영 흘러버린 하루, 이틀. 아직 곳곳을 다 둘러보지도 못한 루힐은 우렁잇속 같은 마음에 켕기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고 있을 때, 귓가에서 들린 목소리. 혹시 도련님은 양을 좋아하세요?
“그 애, 분명히 동생이 있을걸.” 하는 주변의 추측은 잘만 들어맞았다. 릴리벳에겐 동생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지금도 어리지만—더 어렸을 때에는 남들 예상에 딱 들어맞는 재미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언짢기도 했지만, 지금의 릴리벳은··· 글쎄. 특별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동생들이 제 방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은근하게 세심한 구석이 있다. 머리 위로 조용히 떨어진 낙엽을 떼어주거나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손에 묻은 흙을 호호 불어주는 일을 쉽게도 했다. 그대로 조용히 한 번 씨익 웃어주었다면 제법 신비한 구석이 있는 여자애로 기억이 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릴리벳은 참지 못하고 꼭 한 마디씩을 덧붙였다. 잔소리로 여겨 질린 얼굴을 하는 걸 보고서도 말은 목구멍 뒤로 넘어가질 않았다. 딱히 각 잡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도 은연 중에 제 말 받아치곤 까르르 웃어주는 애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이사온 지 겨우 한 달. 생일이 지나기도 전에 낯선 곳에 떨어진 탓에 미묘하게 심기가 불편하다. 가끔은 이번 생일은 외톨이로 보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지만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 아프니 입을 꾹 다물어보기로 했다. 불안할 때에는 눈물도 나지 않으면서 코를 한 번 훌쩍이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또 넘어진 우는 아이에게 손을 뻗고, 칠칠치 못하게 물건 흘린 아이 불러다 가방까지 잠가주고 나면, 또 제가 던진 한 마디에 웃어주는 한 명쯤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53cm, 그닥 크지 않은 체구와 아직 앳되어보이는 얼굴 탓에 한두 살 어리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은 단정하게 땋아내린 고동색 머리카락과 선명한 호박색 눈. 짙고 선명한 눈매 덕에 똘똘하게 생겼다는 말도 꽤 많이 듣곤 한다.
거대양 사람들이 대체로 친절하니까 인상이 나쁘지는 않겠죠 🤔... 근데 릴리벳 성격에 사춘기까지 겹치다보니 거대양 종교 자체에는 관심 없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그냥 좀 특이하네 싶은 정도? 거기 소속된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꺼리진 않아도 어울리기 위해서 발 담가보려는 시도는 안 할 것 같습니다!
깜찍하게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기차에서 소리쳤다. 통통한 손가락으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소리쳤다. 루힐은 조금 놀란 탓에 몸을 움츠렸다가, 시선을 최대한 바닥으로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
“아 귀여워. 도련님, 저 여자애가 도련님 가방이 마음에 드나 봐요! 저번에 마님이 주신 거 맞죠?”
말 많은 여종의 귓속말. 기차가 출발하려는 소리. 그 여자애가 뒤뚱뒤뚱 걸어오는 소리. 너무 시끄러웠던 루힐은 양쪽 귀를 다 막으려다가, 여종이 자신의 오른쪽 귀에 대고 얘기하고 있어서 왼쪽 귀만 막았다. 왼쪽 귀가 금방 울긋불긋해졌다.
“······응.”
루힐은 여자애가 지나가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고서 여종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루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건지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 여종은 창밖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 루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루힐은 방금 여자아이가 지나가면서 중얼거린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좋겠다.” 최대한 그 여자애가 하는 말은 안 들으려고 했는데 들어버리고 말았다. 뭐가 좋다는 건지.
덜컹대는 기차 안. 수마가 몰려온 루힐은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여기서 얼마나 가야 된다고? 두 시간. 아, 드-럽게 오래 걸리네. 음흠흠- 야! 넌 노래 좀 그만 불러! 아직 깊게 자고 있지는 않았으니, 루힐의 귀로 온갖 잡음이 들어갔다.
“안 자시죠?”
루힐의 바로 옆에서 또 누군가 속삭였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 도련님은 양을 좋아하세요?”
루힐이 눈을 떴을 때는 하늘의 색이 주홍색이었다. 잠시 멍해진 루힐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아까의 엄청 시끄럽던 분위기와 딴 판으로 다들 축 늘어져 자고 있었다. 루힐은 차분히 감긴 눈 10개를 번갈아보면서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를 상기시켜보았다. 두통만 얻고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루힐과 5명이 기차역에서 내려 마을까지 걸었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웬 사람 한 명이 무척이나 반가운 듯 팔을 휘적이고 있었다. 루힐은 조금 떨떠름했지만 그 사람과 인사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집의 열쇠를 받는 것은 다 자신의 몫이 아니었기에 늘 그랬듯 조용히 있었다. 루힐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려 그 사람을 보았다. 파리한 낯에 더러운 몰골. 움직일 때마다 나는 쉰내에 루힐은 그만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티 내면 예의가 아닌데. 루힐이 그 사람의 눈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당혹과 함께 황망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리면서, 그 사람의 넝마 같은 옷에 그려진 양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