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수사를 할 때 필요한 정도급만 아니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소라는 정말 가볍게 대답했다. 애초에 자신이 수사를 하면서 추리영화나 추리만화에 나올법한 트릭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후는 다를지도 모른다. 익스퍼들은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런 초능력 자체가 트릭으로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차후 어떻게 될지 아주 약간의 불안감이 솟아올랐으나 그녀는 애써 거기서 눈을 돌렸다.
"좋아요. 그러면. 나중에 딴 거 볼 걸 하고 후회하기 없기에요. 아. 걱정 마요. 스포일러는 안할테니까요."
상대가 괜찮다고 하니 자신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자신은 히어로 영화를 좋아했으니 손해보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이끌려고 하는 그의 행동에 맞춰주듯 그녀는 발을 옮겼다. 팝콘과 콜라를 사는게 좋을까. 잠시 생각을 하다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팝콘과 콜라 필요해요? 저는 콜라면 충분하긴 한데."
오히려 팝콘은 잘 안 먹는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대답을 한다면 아마 이번엔 자신이 계산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영화표는 이미 그가 계산을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친구로서의 사이는 딱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취향이 맞다면 정말로 재밌을 거예요! 아. 영화 다 끝나고 영화 이야기 조금 하는것이 예의인건 알죠?"
장난스럽게 윙크를 보내면서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아마 시작 시간이 되면 입장하려고 했을 것이다.
/영화내용까지 다 묘사할 순 없으니 스킵해도 좋고 이미 시간대가 스토리 이후가 되었으니 영화 잘 보고 헤어졌습니다 하고 막레 처리하셔도 되고 그래요! 그 부분은 자율에 맡길게요!
주스를 들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외관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사실, 사실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본인이 성인이라고 하는데 못 믿을 이유는 없기도 하고... 성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소라가 스카웃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유우카구나. 반가워."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캔과 잔이 부딪히고는, 캔 안의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러고보니 아까 네 큐브웨폰... 내가 맞게 본 거라면, 아마 네가 휘두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맞아?"
아까 큐브웨폰을 보급받을 때 보니, 유우카의 무기는 다름아닌 태도였다. 그것도 그녀의 몸의 절반을 넘는 크기의. 아무리 봐도 저 가녀린 팔과 작은 체구로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웠을까.
유우카가 고개를 가로로 휘휘 저으며 반박했다. 자신의 머리칼에 비하면 한참 반짝반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염색에 의해 변색한 것이라면 꾸미기라도 했을텐데. 어느샌가 머리칼에 번져버린 착잡한 자색은, 남이 볼때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에겐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색으로밖에 비춰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 앞에 있는 그녀, 키라는- 그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비록 서구권의 이름이지만.
"그런... 그런, 감상은 처음들어요..."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서 이름이 귀엽다는 말을 들었을때, 그 창백한 뺨에 조금은 붉은 기가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쑥스러움이 아니라, 정말로 23년 내내 타인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였다. 물론 흔한 이름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지만, 귀엽다는 어감과는 한참 엇나가 있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화려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아무리 빈말이라도 고맙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드물게도 조금 들떠서 '알려드릴까요... 제 이름, 쓰는 법...?' 하고 말해보기도 한 것이다. 한자라는걸 쓸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러네요..."
한국에 왔을때 가장 놀란 점이라면, 도로가 반대라는 사실이었다. 버스가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가까운 나라인데도 다르다니... 하고 가장 처음 놀라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비슷한 부분이 많아 실수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건배사 이후로 순식간에 건물 내부는 왁자지껄 해졌다. 예열된 불판 위로 고기가 올라가 맛있게 익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근사한 냄새가 가득 찼고, 너나 할것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도 별 다를바가 없었지만 제일 나중에 고기를 집었다. 애쉬는 고기를 바싹 익혀먹지 않는 타입으로, 겉면만 적당히 익힌 고기는 혀위에서 춤췄다. 바베큐 파티는 여러번 열었지만 이렇게 먹어본 기억은 손에 꼽는다. 보통 야외에서 먹거나, 이렇게 먹기 위해서는 한식당에 직접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제로콜라로 입가심을 할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일이 온 모양이다. 그는 핸드폰을 흘끔 내려다 본다. 연락하는 건 동생 뿐이다.
제목: 존경하는 형님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일 때문에 지금 NY에 있어요. 조만간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그때 뺨을 때렸던 건 죄송해요. 저도 그땐 경황이 없었어요.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더보기)
그는 핸드폰 상단에 뜬 알림을 손가락으로 스와이프 해서 넘겨버리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는다. 아무래도 술을 마셔야겠다. 그는 잔에 무작정 소주를 따라내려다, 빈 잔을 발견하고는 사람 좋게 미소를 지었다. 취했다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르니 주변에서 같이 친해지고 제지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소주병을 들고 옆사람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려 했다.
챙- 유우카의 조용한 꾸지람에 뒤이어 잔과 잔이 부딪혔다. 조금은 꿍한 표정같기는 했지만 -애초에 표정 변화가 적다- 그렇게 상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유우카에겐 새로운 사람을 10명 만난다면 7명에게는 당연히 듣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맞아요... 아, 보셨..어요..."
변형 당시 능숙히 다루지도 못했고, 자신에 비해선 무지막지한 크기라... 그걸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럽게 느껴졌다. 괜스레 애꿎은 잔 속의 주스만 들이키게 된다. 그래도 원샷은 무리였다고 한다. 유우카는 이어서 말했다.
"큐브 웨폰은... 사용자가 원하는 무기로도 변하지만, 사용자의 내면을 형상화 한 무기라고도 들었어요... 제가 큐브를 쥐었을 때, 큐브는 그런 검으로 변했죠..."
한 숨 쉬고, 유우카의 손가락이 탁상 위에서 원을 그렸다.
"저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비록 지금은 디루기 힘들지만... 무엇이든, 처음에는..."
처음에는 힘든 법. 설령 총기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제대로 다룰 것 같지는 않았다. 미니건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소총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매그넘 리볼버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시끌시끌한 회식 자리는 아직까지 큰 문제 없이 화기애애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기가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소리와 더불어 다들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케이시는 자리에 훌륭하게 섞여 들어가 있었다.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비교도 안 되게 많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사소한 점은 문제거리도 되지 않았다. 새로 만난 사람과 안면을 트고, 대화를 하며 친해지다 보니 어느새 불판 위에 놓인 고기는 맛있게 구워져 있었고 앞에는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자신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럼 나야 고맙죠."
미소지으며 빈 잔을 내밀었다. 잿빛 머리칼의 남자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애쉬, 맞죠? 아까 자기소개 할 때 들었어요."
전 케이시예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렇게 말하며 빈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