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자 눈부신 해가 거미줄에 맺힌 이슬을 비췄다. 새벽에 맺힌 차가운 이슬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고, 풀잎은 푸르렀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인만큼 하늘은 푸르고 아침부터 보이는 구름은 한폭의 명화같다. 그는 창문을 열고 근사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은 호밀 토스트에 무화과로 만든 잼을 발라 먹을 것이다. 어떤 멋진 일이 그를 기다릴 지 아무도 모른다. 그도 모르기 때문에 오늘도 발길 닿는대로 걸을 예정이다. 그러다보면 인연이 생길 것이고, 인연이 이어져 하나의 큰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누군가와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편이 생긴다는 막연한 만족감이 생기면 어느 순간 서로간의 신뢰가 끈끈하게 구축된다. 토스터기에 넣은 호밀빵이 튕겨져 나오자 그는 잼 나이프로 무화과 잼을 한큰술 크게 떠 빵에 펴발랐다. 지금 시간은 7시 25분이다. 15분 뒤면 그가 인연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올 것이다. 낡은 가죽 끈이 리드줄이지만 개와의 사이가 좋아 어디로 도망치는 법이 없다. 개와 보폭을 나란히 해서 걸을 것이고, 아마 지나가다 누군가 흘린 간식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주인은 개에게 '맥시, 그런 건 먹는 게 아니야!' 하고 다그친 뒤 뱉어내게 할 것이다. 그 순간에 그가 나타나 지나가듯 얘기하면 된다. 오, 저런. 개가 뭘 먹었나요? 하면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도 마요.' 라며 장황하게 얘기를 꺼내겠지! 그리고 개에 대한 주제로 돌리다 통성명을 나누고 즐거웠다 할 것이다. 완벽한 하루의 계획이다. 그는 토스트를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이후로는 일주일 동안 또 공을 들일 생각이다. 그러면 그를 집에 초대할 것이고, 그의 원대한 계획은 영광의 첫걸음을 딛을 것이다.
살인은 처음이라 떨리지만 누구나 그렇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체를 보는 건 익숙한 일인데 전혀 그렇지만도 않다. 이제는 시체만 봐도 그때 생각이 나서 위험하다. 그래서 안식년을 핑계로 도망치기로 했다. 한국이 좋을 것 같다. 이미 비행기 표도 예약해뒀다. 충동적인 결정이지만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다. 당분간 푹 쉴 것이다. 아무도 그를 모를 것이다. 이미 거기서 쓸 이름도 생각해뒀다. 그의 이름은 지금부터 애쉬다.
"초면이라고 나누지 말란 법 있습니까? 하하, 기냥 내 드리고 싶어 드리는 거니까요. 정 어색하면 '이 사람이 잔여 커피 처리할 곳이 없어 내한테 이래 꼼수를 치는구나~!' 생각해주심 됩니다. 응응."
실수로 두 개 주문한 것은 맞고, 처리할 곳이 없다는 건 거짓이다. 어차피 다 제 입에 집어넣을 수 있고 그 밖 호출할 지인이라도 차고 넘치니까. 마침 이렇게 연이 닿았고, 마침 이렇게 맛을 궁금해 하니 옳다구나 하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은 예성이 받아가자 만족스럽게 빙긋 웃었다. 그리고 저도 빨대를 꽂아 마시려 하는데, 사실 명함이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 하고 양손이 가득차 어쩌지 하는 살짝 어벙한 모습을 보인 그녀는 머지않아 깨달은 얼굴을 하고선 빈 캐리어를 쥔 손으로 명함까지 받아들었다. "대가 내노라고 쫓아가는 사람 아인데, 나." 하고 농담하며 웃은 신은 명함을 훑었다. 그리고 직위를 확인했을 때 검은 눈을 동글게 떴다. 그때 이미 예성은 커피에 대한 감상을 얘기하고 있었고, 그래서 신은 자연스럽게 마시려다 만 커피를 빨대로 빨아들이기로 했다. 맛있다. 인연이란 건 늘 신묘하고 말이다. 그래서 신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명함과 캐리어를 쥔 손가락 끝이 커피를 톡톡 두드렸다.
"이야~ 경위님이 안목이 있으시네. 내 생각에도 꽤 괘안은데요, 여기. 자주 들러야겠습니다. 그래... 마침 새로운 직장 바로 밑에 있기도 하니 말입니다."
제 할일을 떠넘긴거 같아 아쉬운듯 웅얼거리던 당신을 보며 조금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웃음에 금방 소극적이 되어버린 반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이상해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걸요? 음... 굳이 이상한 사람을 꼽자면 이런거 들고 다니는 어른이 더 이상하잖아요?"
어린애들이 놀이터나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만들며 가지고 놀법한 장난감을 달랑달랑 들고 다니는 어른이란, 그녀 특유의 외모가 아니었다면 곧장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만큼은 자신의 외모가 이점이었는지, 참 사람 기준은 알다가도 모를것 천지였다. 마치 그냥 먹어도 되는 사탕을 이렇게 가루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오오오? 아주 왕도적인 샌드위치네요? 사실 거기에 들어가는 계란이 일반적인 프라이인지, 스크램블일지, 매쉬일지도 취향에 따라 나뉘겠지만... 토마토도 꽤 괜찮은 선택이네요~ 게다가 음료를 곁들인다면 거기에 맞는 속재료가 또 갈리니까요~"
당신의 말대로 딸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는 커피와 함께 먹기엔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크림과 치즈, 딸기만 들어간 샌드위치라면 얼추 어울릴 수도 있다지만. 꽤 확고한 취향의 이야기는 느긋하게 걸어가는 지금 상황에 알맞게 어우러져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느긋한 하루도 좋겠지. 지금껏 너무 바쁘게 살아온 시절만 기억에 남다보니 결국 그녀 자신은 그대로인 채, 시간만 훌쩍 넘어가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 사람마다 취향이란게 있는 법인데 누가 뭐라 할까요~ 가령 저처럼 매일 삼시세끼중 한끼는 햄버거 두개쯤 먹어야 한다던가, 흔한 일이잖아요?"
물론 그 취향에 햄버거 두개는 좀 이질적일 수도 있었다. 요즘은 버거가게에서 커피와 맥주도 파는 모양이다만 그녀는 가급적이면 탄산음료, 그리고 평소에는 그나마도 없이 햄버거나 물 정도만 마시는게 끝이었다. 탄산음료로 입가심을 하자니 햄버거의 맛이 오래 남지 않는데다 조금은 비릿한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까,
"음. 왁머핀처럼 재료가 재료라서 그럭저럭 커피랑 어울리는 것도 있는 모양이지만요~"
하지만 그건 햄버거라고 하기엔 어딘가 애매했다. 차라리 햄버거를 닮은 샌드위치에 더 가깝다 해야 할까,
"?"
어느새 조용해진 것 같던 당신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도 돌연 음소거한듯 다시 사그라들자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본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고민하는듯 하면서도, 채 말해내지 못하던 문장이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자 살짝 의아한 표정이었던 그녀는 바로 씩 웃어보이고선 그 물음에 천천히, 당신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차분한 속도로 대답해주었다.
"키라에요~ 키라 패닝, 앞쪽이 이름, 뒷쪽이 성. 이쁜 언니 이름은 뭔데요?"
외모만 보면 언니라고 하기엔 어딘가 좀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서 풍겨져오는 분위기와 감이 자신보다는 어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으로 와닿았다.
새로운 직장 바로 밑이라는 그 말에 예성은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카페 안이 아니라 밖인만큼 그저 1층의 천장만이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한 층 위로 올라가면 거기서부턴 앞으로 익스퍼 범죄자들을 전담하는 경찰들이 모이는 전용 서만 있을 뿐, 다른 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인만큼 새로운 직장 바로 밑에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상은 넓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좁은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군요. 당신이... 선배가 스카웃한 이 중 하나."
소라가 정말 여기저기 스카웃을 하긴 했으나, 적어도 예성은 누가 스카웃되었는지 들은 것이 전혀 없었다. 허나 그녀의 말을 토대로 그녀가 스카웃된 이 중 한명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우연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섭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커피를 마시며 그 시원함으로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크게 표를 내진 않았으나 크게 놀란 감정을 가라앉히기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소개를 하는 것이 맞겠지요. 차예성 경위입니다. 당신과 같은 곳에서 근무할 예정입니다."
정말로 깔끔하고 가볍게 자신의 소개를 한 이후, 예성은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일종의 악수의 표시였다.
"아직 팀이 결성된 것은 아니니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만났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죠. 잘 부탁합니다."
/일단 신주에게 이 일상은 킵을 요청할게요! 시간도 시간이니 슬슬 자러 가야 할 것 같아요! 8ㅅ8
한국말에 존댓말을 섞어서 쓰는 것은 조금 어색한지 이상하게 존댓말을 쓰는 그였던가. 존댓말을 쓰면서도 뭐가 틀린지조차 몰랐겠지... 그것과는 별개로 제 또래처럼 보였다는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남의 호감을 사려고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뺨이 살짝 부풀어올랐다 이내 바람이 빠지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더니, 살짝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후회하실 거에요, 이제 위그드라실 내에서 사격 1위는 내가 될 거니까."
괜히 스카웃했나. 라는 농담에 그 역시 가볍게 말하며 맞받아쳤다. 물론 이것 역시 농담에 가까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거니까. 사격 1위 같은 소리를 내뱉기엔 아직 실력에 미숙한 부분이 있었을까. 그러다가 다시 뚱한 표정을 소라가 지으면, 잠시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마주보았겠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선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죠? 당황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내가 어떤 부탁을 할 줄 아시고."
생긋. 입꼬리만 미약하게 올라온 그 모습은, 확실히 승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알데바란이 소원을 패스하는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을 거라고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부러 소라를 긴장하게 만드려는 듯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그럼 나랑 친구해줄래요?"
손을 가볍게 내밀며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아니, 아까의 그 생글생글한 웃음기 있는 모습보단, 어쩐지 이 무표정으로 하는 말이 더 진심처럼 느껴졌을지도.
"전 지금 친구가 없거든요. 그래서 좀 많이 외로워.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리 쉬 것도 아니라서. 그런데 그 와중에 소라가 제 친구가 되어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은데요?"
"야, 친구 하자!" 히네노 나기토: 허어억 좋아요! 먼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사실은 저도 그 말을 할까 했는데 만난지 얼마 안 된 사이라 부담스러우실까봐 참고 있었거든요~ 저희 통했네요! 그럼 친구 된 기념으로 다음에는 더 재밌게 놀아야 해요? 아~ 물론 저는 오늘 하루도 정말 즐거웠지만요! 앗, 그런데 OO씨는 제가 말투를 그대로 쓰는 게 좋으신가요 아니면(중략)
"지나가는데 일부러 발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히네노 나기토: 왜 그런 짓을 하시는 걸까요😔 사람들 다치는데! 그렇다면 저도 일부러 걸려주겠지만 안 넘어지겠어요. 그럼 무승부죠?😌(?)
"네가 극도로 행복할 때 하는 행동은?" 히네노 나기토: 아하하~ 이거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데!☺ 말이 많아져요. 평소보다 속도도 빨라지고! 자제를 좀 하려고는 하는데 흥분하면 그게 좀 어렵더라구요~
밝고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는 건 예상대로였지만, 이 사람-나기토-의 페이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촬영자에서 피사체로 순식간에 신분교체(?)가 되어버린 여명이 멍-하니 요구하는 자세를 취하고 나니, 어느새 만족할 만한 사진을 건진듯한 나기토가 사진을 보여준다. 예쁘다. 잘 꾸며진 밤거리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밤중에 난립하는 수많은 불빛 사이에서도 여명 자신의 모습은 신기할 정도로 선명하다. 도시의 조명 아래에 서 있는 백발의 앳된 청년은, 카메라 쪽을 보면서 나쁘지 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구나, 사진 찍을 때 웃고 있었구나.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기토와 함께한 사진 찍는 시간은 즐거웠던 모양이다. "아... 사진 진짜 잘 찍으시네요! 2장 다 보내주세요오!" 진심 100%로 말한 뒤 잠시, 메세지를 통해 사진, 그리고 놀랄 정도로 앙증맞은 이모티콘이 도착했다. 이 새로 만난 인연의 이름을 저장하고, 프로필 사진을 변경하고, 밝게 대답한다. "네 얼마든지 연락하세요! ...그으런데 제에가 뭔가 일 있으면 답장 늦을수도 있으니까 고려해주세요오오..." 아니, 정정. 대답의 뒤로 가서는 그리 밝지는 않았던 거 같다. 뭐, 그래도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날 수 있는 거니까. 나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걸 나기토 씨와 같이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뭐, 여러모로 특별하고도 기분 좋은 외출이다아. 좋네에.' 크윽 받아줘요 나기토주 내 최후도 아니고 파문도 아닌 일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