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410 이름 없음 (h8nc82J1lw)

2022-05-26 (거의 끝나감) 00:51:02

>>407

처음이었다면. 참 복잡한 한 마디 말로, 지금 내 소파 위에서 모포를 뒤집어쓴 한 명의 상처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있게 된거같다.
그 정도나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종류인지만 알아도 처치가 비교적 쉬워진다. 내가 간밤에 응급처치한 상처처럼 말이다.

"저도 그 마음을 모르는것도 아닙니다. 국가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국가, 국민... 뭐 그 외에 이것저것. 그들을 위해 손을 더럽히고 몸을 혹사시키는 대가로 더 나은 삶을 기대해볼 수 있었다. 서로가 믿어야만 했던 체계에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멸시와 함구 뿐이었다. 내 권리와 믿음을 지키려 발버둥치고, 또 나를 도와준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신당한 뒤에 손을 내미는 사람이 꼭 사기꾼이라는 법도 없더라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영원히 나를 책임져줄리는 없다. 그러나 한 때의 인정으로, 상호간에 호의를 나누는 친구로써는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려 하고, 그들은 나를 위해 애도해주기도 했다.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상적이라 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도 딱히 아니다.

배터리를 슬슬 갈 때가 되었는지 요상하게 왜곡된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단골 피자집의 배달원이 친근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일용할 양식과 함께. 나는 피자 값 밑에 팁을 얹어서 건넸고, 서로 좋은 하루가 되라며 인사를 나눴다.

"자, 신뢰니 배신이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피자 타임.
군침도는 향기가 잔뜩 풍기는 뜨끈한 페퍼로니 피자를 테이블 위에 얹었다. 아마 이 유혹을 이기는 사람은 최소한 잘 훈련된 특수부대원 정도일 것이다. 나도 이건 못 이기니까.

411 이름 없음 (tZcw0GkSUg)

2022-05-26 (거의 끝나감) 02:26:05

>>410 으음. 아무래도 답레각이 안 잡혀서 여기까지 해야 할 거 같네. 며칠간 이어줘서 고마웠고 재밌었어.

412 이름 없음 (aK01mzJptM)

2022-05-26 (거의 끝나감) 15:20:18

아이는 발 끝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떼었다. 발이 바닥에 닿고 떨어질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인형이 걷는 것처럼 옷차림도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도록 움직임 하나 하나가 신중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 있던 하인들 또한 소리 없이 미닫이 문을 닫는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방 안에서 아이는 옷자락을 끌어모으고 무릎 꿇어 앉는다. 줄곧 고개는 숙인 채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떠는 티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늘부로 새로 하가의 신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가의 신수는 성격이 고약하여, 영험하다 불리는 신수라면 응당 할 수 있다는 인두겁을 쓰지 않고 짐승의 모습으로 지낸다더라. 털 빗는 손길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박에 목을 물어뜯어 죽어나간 이들이 수백을 웃돈다니,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린다- 하는 소문이 전국에 유명하였다. 아이는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하씨 가문에 속하게 되어서, 몸종일지 언정 열심히 노력하여 주인 어른을 모시는 좋은 하인이 되어보고자 했는데 어째서인지 신수를 뫼시게 되었다. 아이는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하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노라 마음 먹었다.

"감히 빗질을 해드려도 불편하지 아니하실까요."

# 동양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썼고, 가문마다 모시는 신수가 있단 느낌이야. 신수가 강할수록 권위 높은 가문! 신수는 신비한 힘을 가진 덩치 커다랗고 영험한 동물 정도로 생각했어~

413 이름 없음 (1ILs8tCZ0s)

2022-05-26 (거의 끝나감) 17:28:58

불법 카지노가 불법 카지노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윗선에서 딜러한테 자꾸 손기술 쓰라고 강요하고 있다던가.
다행히 남자의 손기술은 천재적이었기때문에 한 번도 걸린적은 없지만, 앞에서도 (아마) 칼을 겨누고 있고 뒤에서도 (이건 확실히)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재주를 부려야 하는 상황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난 그냥 정직하게 게임하고 싶단말야!'

하지만 불법 카지노인 이 곳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늘 그랬듯이 들키지않기만을 바라며 남자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카드를 돌렸다.
실수는 없었으니 문제도 없을것이다.
아마.

#맥커터만 아니면 환영이야!

414 이름 없음 (gsmu/v89jc)

2022-05-27 (불탄다..!) 03:38:57

땀방울이 지저분한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채 묶여 올라가지 못 한 잔머리가 그 길로 따라붙었다. 꽤 기분 나쁜 찝찝함이다.

반파 직전의 폐허, 묵직하게 내려앉은 먼지층. 굳이 들어와 살피기에는 누가 보아도 적합하지 않은 곳.
그럼에도 굳이 이리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만큼 무리에서 떨어져 잠깐 혼자 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발치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 얼마나 묵었는지도 모를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난다. 휙, 휙, 대충 손을 휘저어 그것을 흩어내고, 자신도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벽에 등을 기대곤 스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이나 엉덩이가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은 이미 한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거쳐 온 길에는 깨끗한 물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는 곳도, 그럴 만 한 여유도 충분치 않았으니.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소낙비라도 오면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몸에 내려앉은 티끌 정도는 가볍게 걷어낼 수 있었으니까.

아주 조금, 고단한 몸에게 휴식을 주고 나니 급작스럽게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온다. 배낭을 뒤져 찾아낸 물병에는 아주 조금, 밑바닥을 겨우 적실 정도의 물방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것을 탈탈 털어 입술을 적셔 보려고는 해도ㅡ 버석거릴 정도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시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하고. 젠장, 더 감질나기만 한다. 텅, 터덩, 텅텅.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 500ml짜리 플라스틱 물병. 때 끼고, 구겨지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이런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걸까?
흘러나온 한숨과 함께 시선을 옮기며 눈을 감았다 뜬 그 사이로. 가방 안에 반쯤 구겨진 사진 한 장. 너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나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지저분한 손 끝으로 구겨진 부분을 서투르게 매만져 펴댄 탓에,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더럽혀지고 말았다. 쯧. 마뜩잖은 얼굴. 소매를 끌어다가 벅벅 문질러 닦아 보아도, 제 손과 다를 것 없이 꾀죄죄한 천조각으로는 깨끗하게 지워질 리 만무하다.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군. 신경질적인 손놀림과 천 스치는 소리는 곧 멈추고, 고개가 맥 없이 벽에 툭 기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아, 죽고 싶다.

부서진 천장 너머로 반짝이는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시린 푸른 색.
삶이라는 한 마디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울림보다도 핏빛같은 잔혹함으로 다가오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라! 머리가 아프도록 귓가에 맴도는 스러진 자들의 단말마가 무색하게도,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죽음이었다.


무언가의 이유로 대부분이 죽고, 몇몇만이 살아남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라는 느낌..... ㅇ)-(
그게 좀비인지 전염병인지 핵 때문인지는 몰?루. 자유롭게 설정해도 OK!
나참치 머릿속에서는...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휴식하고 있다. 그런 느낌입니다.

415 이름 없음 (nySQkIrIZk)

2022-05-30 (모두 수고..) 00:11:50

사람이었다가도 동물로 변한다. 체력이 동나든, 정신적으로 피곤하든 피로가 쌓이고 휴식이 필요해지면 동물로 변하고 만다. 푹 쉬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마를 빡빡 치고 싶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내 가방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나는 참새다. 하필 참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니 주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다. 길고양이에게 사냥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늘따라 좀 피곤하다 싶더라니, 하교하던 길에 결국 변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는데! 욕하고 싶다. 해도 아무도 모른다. 짹짹. 내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제발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랐다. 이 동네 아는 얼굴이라도 지나가면 좋겠는데. 아무리 소리쳐봤자 지저귀는 소리만 난다. 짹짹. 지겹다.

# 맥커터 사절~

416 이름 없음 (OG6EDBtqaE)

2022-05-30 (모두 수고..) 00:33:06

>>415

학교에서 발표에 걸리고, 계단에서 넘어지고, 이어폰을 놓고와서 등하교를 할 때 노래조차 못 듣는 사소한 불행들이 있는 이상한 날. 아, 젠장. 오늘은 진짜 뭐라도 마가 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나는 괜히 길가의 돌멩이들을 발로 차면서 하교하기 시작했다. 무릎에는 반창고가 따끔거리는 상처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원래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이어폰 하나 없다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던가.

...........라고 생각하던 그 때, 나는 듣고 보고 말았다. 짹짹거리는 참새의 소리를. 그것도 누군가의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하..?"

뭐야. 누가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가방을 내팽개치기라도 한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 옷이랑 가방....우리 반 애 거 아니던가? 등하원 할 때 동네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던?

"....너 혹시 이거 주인 어디갔는지 알아?"

옷가지와 가방을 살피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를 보며 물었다. 참새가 알 리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물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으니까.

417 이름 없음 (yC/4Pp3dO6)

2022-05-30 (모두 수고..) 10:09:00

>>416

같은 반의 얼굴 알고 이름 모르는 아이. 다들 이상하게 보고 지나가기 여념 없는데 관심을 가져주다니, 복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까치는 아니지만, 은혜 갚는데 참새가 중요하고 까치가 중요할 것 같진 않다. 나는 이것의 주인이 나라고 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리로 가방 지퍼를 물어서 당겨 열고, 그 다음은 필통과 공책을 가방 밖으로 잡아 끌었다. 공책을 펼치는 것도 몇 장 물어 포로롱 날아오르며 넘겨야했고, 필통도 또 지퍼를 부리로 물어 당겨 열어야 했다. 컴싸 뚜껑을 여는 건 얼마나 어렵던지, 발로 펜을 움켜잡아 고정하되 부리로 뚜껑을 물어 당겨야했다. 나는 이 펜을 발로 움켜쥐고 날갯짓 파닥거리며 글씨를 적었다. 내가 이렇게 악필이 아닌데.

'나야'

두글자 적는데 억만년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418 이름 없음 (xq1G4S1E2A)

2022-05-30 (모두 수고..) 12:31:02

>>417

"허? 하? 허?"

이상한 소리가 나도 모르게 마구 튀어나왔다. 아니, 당연하잖아. 참새가 내 질문을 듣더니 갑자기 부리로 가방 지퍼를 열고 필통과 공책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그걸 보고 누가 안 놀라겠어?

"야, 그거 함부로 꺼내면..!"

하지만 안된다고 말리기도 전에, 참새는 날아오르더니 공책을 넘겼다. 게다가 필통을 열고 컴싸 뚜껑까지 열었다. 참새한테 말을 거는 나도 이상하겠지만, 그걸 듣고 저렇게 사람처럼 반응하는 참새가 더 이상해..! 아,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건가? 그런건가..! 오늘 진짜 이상해..!!

"..........하.....?"

하지만 참새가 글을 쓴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아니, 정말로? 설마, 혹시나, 싶긴 했는데, 아니, 진짜로? 꼬부랑거리는 단 두글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도 억만년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저주라도 걸린거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원래 참새였냐, 인간으로는 못 돌아가냐, 등등의 수만가지 질문을 뛰어넘고 참새, 아니지, 너에게 물었다. 이 나이 먹고 동화에 빠졌냐고 비웃어도 할말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상한 날이고, 참새가 되었다는 너도 이상하니, 나도 이상한 소녀 감성에 좀 빠져봐도 뭐 더 달라지겠어? ........달라지겠어?

# 참새 씨의 성별이나 이름 정해졌으면 알려줄 수 있을까?

419 이름 없음 (1Gx0JoVu6c)

2022-05-30 (모두 수고..) 16:35:34

>>418 나 >>417인데 미안해, 내가 설명이 부족했던 듯해 ㅠㅠ 이어준 >>416 보고 설마 했는데........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물로 변한단 설정이었어... 이어줘서 고마운데 정말 미안해 ㅜㅜ

420 이름 없음 (5pviNl0Plo)

2022-05-30 (모두 수고..) 18:04:35

>>419 모든 사람들이 동물로 변한다는 설정이었구나........ 내가 착각해서 미안 ㅠㅠ 그럼 혹시 너참치만 괜찮다면 같은 반+동네 이웃 설정만 유지하고 다시 이어올까 아니면 그만할까? 편하게 말해줘~

421 이름 없음 (xLcqZj1dBM)

2022-05-30 (모두 수고..) 18:10:07

>>420 헉 아냐아냐 ㅠㅠ 내 설명이 불충분했던 건데 너참치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다시 잇고 싶다면 편하게 이어줘. 그리고 >>418 질문에 답하자면 이름은 없고.... 성별은 여자아이일 거 같은 느낌.........? 캐릭터를 구상하고 쓴 건 아니라서.

422 이름 없음 (noVPcjkjQw)

2022-05-30 (모두 수고..) 18:56:00

>>421 너참치에게 정말 미안........ 다시 이으려고 했는데 설정이 좀 바뀌니 글이 안 써진다 ㅠㅠ 아무래도 더 못 이어갈 것 같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었어. 고마워~

423 이름 없음 (V6qJa31Rb6)

2022-05-30 (모두 수고..) 19:00:44

>>422 괜찮아, 미안할 필요 없지. 재밌었다니 오히려 고맙고, 이어줬어서 더 고마워. 안녕.

그럼 음, >>415에 잇고 싶은 참치가 있다면 편하게 이어줘. 🙃

424 이름 없음 (3A7X2RWsBQ)

2022-05-31 (FIRE!) 10:02:35

"야, 아줌마가 이거 가져가래!"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형해 달리다가, 네 뒷통수가 보이자마자 그곳을 향해 던졌다. 상쾌하고 푸른 하늘 아래 아침 공기도 산뜻한데, 이 풍경에 있는 단 하나의 오졈을 조준한다. 체육복 든 가방인데, 이것에 맞든지 잡든지 그건 네 몫이다. 하늘에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는 저걸 못 잡는 것도 재능이겠다. 나는 오늘 3교시 체육인 거 까먹었냐고 빈정대는 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집 산다는 이유로 지겹게 보는 사이인데 고등학교 올라오며 같은 반까지 되었고, 이제는 내가 아침 등교길에 심부름질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까 아줌마가 매일같이 날 딸 삼고 싶다하는 거다.

425 이름 없음 (KMjuitzuKw)

2022-05-31 (FIRE!) 10:26:41

>>424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온다. 사람 마음이라는게 이런 날씨에 갑갑한 교실에서 창문으로만 내려쬐는 햇빛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사람도 별로 없는 한적한 길가를 걸어가고 있으니 뒤에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 아, 고맙다~ "

뒤를 슬쩍 돌아보자 체육복이 들어가있는 가방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다. 한 손을 번쩍 들어서 낚아챈 나는 너가 빈정대는 말에 그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 사실 오늘 학교 안가려고 했거든. 너도 같이 빠질래? "

이런 날씨에 학교에 갇혀서 낭비하는건 아깝지 않냐고, 되물었다.

426 이름 없음 (1avsveeBFk)

2022-05-31 (FIRE!) 11:22:51

>>425

"고마우면 이따 점심에 매점이나 쏘셈."

하복을 입고 가만히 수업만 해도 쪄 죽겠는데, 3교시 체육? 아침부터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이미 체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분명 난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니 날 심부름꾼으로 쓴 저 녀석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뜯어먹어야겠다. 나는 네 옆 즈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 자전거 속도를 줄이고 멈춰섰다. 네가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누구 챙겨다주겠다고 체육복 들고 왔더니 학교를 안 가려고 했다는 말이 귀에 날아와 박혔다. 나는 최대한 욕설을 걸러낸다.

"너 아줌마한테 이른다."

욕설말고 할 말이 없었다.

427 이름 없음 (cSJ3dBKHuc)

2022-05-31 (FIRE!) 15:01:06

>>425

" 돈 없다니까 맨날 뜯어먹네. "

투덜대며 텅빈 지갑을 보여주었다. 물론 정말 돈이 없는 것은 아니고 실제론 카드를 쓰니까 현금이 없는 것이지만. 이미 쟤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 별로 의미가 없는 반항이다. 그리고 내 말에 너의 자전거가 우뚝, 멈춰선다.

" 그래도 이런 날 학교 가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 "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 더운 여름날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학교에 가기엔 아까웠다. 그래서 너에게 좀 더 가까이 붙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 하루쯤은 너도 일탈해도 괜찮잖아? "

씨익 웃음지으며 얘기했다.

428 이름 없음 (c7TjVKe1Rw)

2022-05-31 (FIRE!) 16:08:12

>>427

"허, 참내. 누가 보면 몇십만원 어치 뜯어먹은 줄."

아이스크림 하나가 얼마나 한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여태 뜯어먹은 것들을 모아 가격을 계산하면 꽤 클 것 같기야 하지만, 이유없이 뜯어먹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아예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끌고가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이 좋았다면 이 자전거를 번쩍 들어 정신차리고 헛소리 작작 하라고 이 녀석을 한 대 치기라도 할텐데, 그 정도 힘은 없어 다행이다.

"붙지마, 더워 멍청아."

나는 학교까지 끌고가야할 짐이 두개나 되었다. 하나는 자전거고, 하나는 이 녀석이다. 이 새끼라고 하려다 그간 봐온 정을 생각해 녀석으로 순화시켜줬다. 난 머리끄댕이를 잡을지, 귀를 잡아당길지, 목덜미를 붙잡을지 고민하다 소매를 붙잡기로 했다. 피한다면 어쩔 수 없이 머리끄댕이를 잡아야겠다.

"넌 학교 가기 안 아까운 날이 있긴 하냐?"

429 이름 없음 (cSJ3dBKHuc)

2022-05-31 (FIRE!) 16:33:21

>>428

너의 말에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선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간다. 그러자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서 내 옆을 나란히 걸어가는 네 모습을 힐끗 바라본다. 덥다며, 붙지말라는 너의 말에 슬쩍 거리를 두자 소매를 붙잡아온다. 너의 언행불일치에 다시 한번 슬쩍 바라보고선,

" 재미없잖아. 학교 같은거 안가도 모의고사는 항상 잘 나오니까. "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혼자 공부해서 터득한 것들이었다. 학교 생활에도 크게 흥미가 없으니 그저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서 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소매를 잡은 네 손을 뿌리치지는 못해서 그대로 걸어간다.

" 솔직히 니가 끌고 가는거 아니었으면 이틀에 한번 꼴로 안갔을듯. "

이걸로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알고 있지만 재미 없는 일을 강제로 하는 것은 힘드니까. 그래서 일부러 너를 붙여놨는지도 모른다.

430 이름 없음 (9FR2GdjcOg)

2022-05-31 (FIRE!) 17:48:44

>>429

"와, 역대급으로 재수없어."

자전거를 한손으로 끌려고 하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놓았다가는 오늘 등교하는 건 나 혼자일 것 같다. 이건 최소 아이스크림 두개 뜯어먹어야 한다. 아니다, 세개가 좋겠다. 잘난 척이 매우 재수없으니 세개 뜯어먹어야겠다. 가운데 손가락 곧게 펴고 싶으나 나는 잘 참아냈다.

"3년 동안 이래야 되냐, 나?"

안 그래도 빡센 대한민국 고등학생 라이프가 더 꼬이는 기분이다. 고3이 되어서도 이러진 않겠지. 아니, 이 새끼라면 정시로 간다고 할 것 같으니 고3 되고서도 그럴 것 같다. 아줌마에게 정말로 날 딸로 들이고 우리 집에 쟬 줘버리는 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431 이름 없음 (KMjuitzuKw)

2022-05-31 (FIRE!) 18:32:54

>>430

"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 "

흔히 영재, 천재라고 불리우는 종류의 사람에 속해있는 나는 이미 고등교육까지의 과정은 모두 끝마친 상태다. 그래서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중학교까진 학교를 잘 다녔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그마저도 흥미를 잃었다.

" 내일부터 학교 잘 다닐테니까 걱정 안해도 돼. "

라고 말한게 32번째이다. 매일매일 같은 레퍼토리로 이어지는 대화라서 당연히 너의 반응도 예상이 된다. 소매를 붙잡힌채로 질질 끌려가듯이 학교를 가다가, 문득 네가 잡고 있는 자전거가 눈에 띄었다.

" 자전거 줘, 내가 끌어줄테니까. "

그럼 너도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거 아니야.

432 이름 없음 (JH1dFyuqv.)

2022-05-31 (FIRE!) 18:48:37

>>431

"아니, 난 달라. 내가 제일 재수없어 하고 있으니까."

당연하다. 옆집 살며 매번 보는 얼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주 보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친한 사이인 만큼 우리 가족도 너를 안다. 나도 공부한다고 하고 있고, 낮은 성적은 아닌데 옆에 있는 놈이 하필 천재인 걸 어쩌라고. 얘한테 좀 배워보라는 잔소리는 귀에 딱지앉도록 들었다. 근데 어쩌나, 이 자식은 학교 쨀 생각만 하는데.

"그래그래,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가볍게 비아냥거렸다. 이 말도 32번째 정도 한 것 같다. 나는 자전거 달라는 말에 선뜻 앞바구니에 있는 내 책가방을 들쳐메고 자전거를 넘겼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까지 태워달라 하고 싶은데, 이 녀석이 끄는 자전거가 학교로 향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진 못했다.

433 이름 없음 (KMjuitzuKw)

2022-05-31 (FIRE!) 21:05:02

>>432

" 그럼 너가 대장이네. "

가장 재수없어하고 있다니. 하지만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너인만큼 가장 재수없어한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다. 너희 부모님이 너를 잘부탁한다고 하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럴때마다 웃으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 태워줄까? "

너의 비아냥거리는 말도 그냥 웃음으로 넘긴다. 너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걱정 되니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너를 바라보며 물었다.

" 학교로 무사히 갈테니까 걱정마. "

새끼손가락을 들어서 너에게 보여주며 얘기했다. 이렇게 손모양을 하고서 말하는건 무조건 지켜야한다고 어릴때 약속했던 그것. 사실 너한테 잡힌 이상 학교를 빠지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434 이름 없음 (WSj7PgM9bk)

2022-05-31 (FIRE!) 21:45:59

>>433

"적은 가까이 두랬어."

뭐, 정말 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봐왔으니까 이런 말도 쉽게 하고, 서스럼없이 대하면서 웃을 수 있는 거다. 그게 좋은 점이지. 가족들이 비교하는 건 좀 스트레스 받긴 하지만 그게 얘 잘못도 아니고. 그래도 학교에서는 내가 얘보다 훨씬 더 많이 예쁨 받는다. 난 모범생이니까.

"오키, 너 찍었다."

새끼손가락 들어보이면서 말하면 나도 새끼손가락을 갖다대고는 했다. 버릇으로 굳어서 남들은 약속이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있을 때, 난 새끼손가락을 마주대고는 한다. 지금도 그렇게 새끼손가락끼리 마주닿았고, 바로 자전거 뒤 짐받이칸에 올라타 앉는다.

435 이름 없음 (9o.zaNpSFo)

2022-06-01 (水) 00:25:18

>>434

" 뭐야, 너 내 적이야? "

웃으면서 살짝 거리를 뒀다가 다시 돌아온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런 말 정도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 네가 내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찍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자 나도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예전부터 하도 많이 태우고 다녀서 그런지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꽉 잡아. "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페달의 저항이 많이 약해질때쯤 자전거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뒷자리의 너를 흘끗 바라본 나는 페달을 빠르게 밟기 시작했다. 조금씩 빨라지는 자전거는 빠르게 학교로 향하고 있다.

" 아, 오늘도 같이 갈꺼지? "

예전엔 항상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각자의 약속이 있어서 그런가 같이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436 이름 없음 (UFKVGd4NhQ)

2022-06-01 (水) 12:38:40

>>435

"이제 앎?"

별 대수로운 소리를 하고 있단 듯 받아치고, 네가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자 허리에 팔을 감아 붙잡는다. 꽉 잡으라는데 두 손으로 붙잡을 것까지 있겠나 싶다.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간을 보니 지각하진 않겠다. 이내 자전거가 달려나가고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남이 태워주는 자전거 개꿀.

"어- 나 오늘 뭐 있었던 거 같은데."

일정 정리를 제대로 안 해놓은 과거의 내 잘못이다. 카톡에 들어가 톡방들을 뒤져보는 수 밖에 없다. 공지나 연락이 와 있을테니까. 나는 한 손으로 톡톡 휴대폰을 뒤진다. 학교 쨀 궁리만 하는 누구와는 다르게 일이 많단 말이지. 학생회든 동아리든.

"기다려줄 거?"

437 이름 없음 (9o.zaNpSFo)

2022-06-01 (水) 13:00:09

>>436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느낌은 언제 느껴도 좋다. 네 팔이 내 허리를 둘러오자 자전거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고 얼추 시간 계산을 해보면 지각은 안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같이 하교할 생각으로 말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 바쁘게 사네. "

너와는 다르게 학교에서 수업만 들으니까 이런 스케줄적인 부분에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넌 학생회라던가 동아리라던가 열심히 하는 편이니까. 그래서 오늘도 그냥 집에 혼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내가? "

살짝 웃으면서 반문하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있다. 너의 그 질문에 내가 다른 말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니까.

" 그래. 천천히 할 일 다하고 와. "

지금처럼 너를 뒤에 태우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어릴적부터 너무 붙어다녀서 그런가 이젠 네가 없는게 더 어색할 지경이라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면서 학교로 향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니 학교는 금방이었고 학교 앞 자전거 보관대에 세운 나는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 도착했습니다요. "

438 이름 없음 (y.m1m9bsC2)

2022-06-01 (水) 13:15:53

>>437

톡방을 확인해보니 학생회 쪽 일정이 오늘이었다. 공지에 적힌 걸 보아하니 기억난다. 오늘 회의는 학기마다 한 번 정기적으로 하는 전체 회의인데, 오히려 빠르게 끝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각 반 반장들과 부반장들도 부르고, 학급 회의에서 나온 안건들을 정리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학생회 하는 애들이 거의 다 반장, 부반장도 하고 있는데다 학급 회의 시간에 회의가 진행되는 경우도 적으니 겉치레 같은 느낌이다.

"생기부 빵빵하게 채워서 대학 가야지. 대학에선 떨어지자?"

설마 대학도 같은 곳 가겠어. 재수없는 자식, 얜 당연히 인서울할텐데 난 모르겠다.

"오늘은 금방 끝나."

학교 앞 자전거들이 늘어서 있는 자전거 보관대 옆에 내 자전거도 멈춘다. 나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체육하기 정말 싫게 날씨가 좋다. 왜 째고 싶다는지 알 것 같기도.

439 이름 없음 (9o.zaNpSFo)

2022-06-01 (水) 18:05:37

>>438

" 고3 까지 같은 반이면 대학도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

그 정도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너와 같은 대학을 갈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는데 너와 다른 대학교가 된다면 그것도 찜찜한 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른 학교를 가고싶으면 다른 반이 되기를 비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 그럼 기다릴께. "

금방 끝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자전거를 보관대에 묶어놓는다. 아 정말 날씨 좋은데, 이런 날에 학교를 오다니 정말 아깝다. 잠시 하늘을 바라본 나는 네 뒤를 따라서 학교로 들어간다. 어차피 같은 반이라 가는 길은 똑같으니까.

" 아 맞다, 오늘 엄마가 집에 저녁 먹으러 오래. "

맛있는거 해놨다더라.

440 이름 없음 (p7MGH9wn7U)

2022-06-01 (水) 18:53:10

>>439

"야, 야. 자제해.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얜 지겹지도 않나,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반 갈리든 학교 떨어지든 옆집이라 주구장창 봤는데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라니, 말이 되나. 그렇다고 막상 옆에 늘 있던 애 없으면 기분 이상할 것도 같긴 하다. 얘만큼 편한 친구 만들 수 있으려나.

"끝나면 전화함."

교문을 지나친다. 학교 째면 뭐하고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집이랑 학교 둘 다 발칵 뒤집힐 걸 생각하면 제대로 놀지도 못 할 것 같은데.

"진짜? 오늘 점심 굶어야겠다."

농담이지만 아줌마 요리 엄청 맛있으니까. 어차피 저녁에 갈 거면 그냥 집 가서 씻고 옷만 갈아입은 다음에 바로 넘어가 있어도 되겠다. 얘 집이 우리 집이고 우리 집이 얘 집이지 뭐.

441 이름 없음 (2dYOOOnAT6)

2022-06-01 (水) 19:11:06

>>440

" 끔찍하다니. 나는 진지해. "

너가 나와 같은 대학에 가지 못할 것 같으면 하향지원할 생각도 만반이었다. 그래도 너가 그렇게까지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닌걸 아니까 그럴 걱정은 그다지 없었다. 뭐 정말 싫어하면 그럴 생각은 없지맠,

" 어차피 반에 남아있을거라. "

학교가 다 끝나고 따로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네가 올때까지 반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전화해도 안받으면 비어있는 반에 누워서 잠이나 자고 있을거다.

" 오늘 점심 맛있는거 나오던데? "

오늘 너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는 날이었는데 점심을 굶는다니. 급식실 아주머니들이 정말 슬퍼하시지 않을까싶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금방 반에 도착할 수 있었고 우리는 정말 공교롭게도 나란히 옆자리에 앉는 관계이기도 했다.

" 어제 밤새 게임했더니 졸리다. 점심시간쯤에 깨워줘. "

자리에 앉자마자 능숙하게 잠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엎드리며 얘기했다.

442 이름 없음 (SZsVEvEUH.)

2022-06-01 (水) 19:48:27

>>441

"진심? 그럴거면 니 머리 떼 줘."

누구는 오늘도 책가방이 한짐인데 얄미워 죽겠다. 아이스크림 삥 뜯어먹는 걸로 참아주는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

"뭐야, 급식 외우고 다니냐고."

학교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졸리다, 오늘 급식 뭐냐, 집 가고 싶다 기타 등등이라 오늘 급식 메뉴가 무엇인지 알 리가 만무한 나다. 어차피 학교만 가면 칠판에 적혀 있든 학급 게시판에 붙어있든 애들이 떠드는 이야기 중에 들리든 하니까. 학교는 째려고 안달났으면서 급식 외우고 있는 이유가 뭔가 싶어 물어보기나 한다. 그냥 한 번 보면 외워진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내 가운데 손가락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다.

"아오씨, 내가 알람이냐."

담임쌤이 출석 부를 때 좀 깨워보라고 하다가 이제는 포기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도착한 반, 나도 자리에 가방을 걸고 앉는다. 아, 집 가고 싶다.

#여기서 마무리하면 될 거 같아요, 이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443 이름 없음 (ZDjB2g.00A)

2022-06-02 (거의 끝나감) 18:04:38

요즈음 초등학교에 가서 장래희망이 무엇이냐 물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히어로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저도 작고 희망찬 어린 시절에는 그런 꿈을 꾸었지요. 제 초능력이 히어로가 되기에 볼품없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요. 결국은 작은 편집사에서 월급 받아먹고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면 잡일 담당입니다. 아직 입사한지 반년도 못 채운 신입이라서 그런걸까요? 제가 편집하고 디자인한 작업물을 보고 싶은데 무슨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을 해도 혼나기만 해요. 아차, 이야기가 샜네요. 아무쪼록 그런 평범한 회사원인 제게 지금 좀 큰일이 생긴 것 같아요.

"…살아계세요?"

집으로 가고 싶은데, 길에 뻗대고 누워있는 이 사람 때문에 못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은게 요새 뉴스에도 나오고 유튜브에도 나오는 유명인사 같습니다. 복장도 일반인이라면 절대 입지 않겠구나 싶은 것이 히어로 혹은 빌런인 것 같은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적당히 옆으로 밀고서 112를 부른 다음 저는 그냥 집으로 들어가버려도 괜찮을까요?

# 히빌세계관이야! 뻗대고 누워있는 사람이 히어로나 빌런이라는 것만 생각해뒀어

444 이름 없음 (nir2MCcIwo)

2022-06-02 (거의 끝나감) 19:10:37

>>443

"네, 살고 있는 중이에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힘은 없었지만 침착했습니다. 뉴스나 유튜브를 자주 본다면 익히 알 법한 목소리와 복장이었습니다. 미스테리한 옛날 마법사 같은 긴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가면까지 써서 얼굴을 가린 가장 비밀스러운 히어로.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만약 목소리를 낸다 하더라도 일부러 중성적인 톤으로 내어 그 성별이나 정체마저 알 수 없는 히어로. 그것이 저였습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세상에서는 절대 죽지않는 불사의 히어로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저는 이미 수없이 죽었고 수없이 살아났으니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초능력 때문에요. 그러나 저는 저의 초능력마저 비밀로 숨겼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브 안에서 새는 피가 숨기지도 못하고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 정도의 치명타를 입어서 저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주세요."

그래서 저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445 이름 없음 (0m152XbomU)

2022-06-02 (거의 끝나감) 19:51:31

>>444

살고 있는 중이라는 대답에 힘이 없습니다. 맥아리 없는게 저는 휴대폰을 꺼내들었습니다. 112든 119든 불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인지 기억하려는 한 편 머릿속은 피곤해하고 있습니다. 퇴근길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될 수가 있나 싶은 것입니다. 저는 한 때 히어로를 꿈 꿨을지언정 지금은 그저 평범하고 두드러지는 부분 하나 없는 소시민입니다. 평균 중에서도 평균이 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저에게 이런 이벤트가 있을 줄 알았겠나요? 이제야 검붉은 웅덩이가 보입니다. 피 비린내가 나요.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잠시만요, 곧 경찰이든 구급차든… 네?"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은 지금 이 상황은 꿈일지도 모릅니다. 꿈이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줍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가 그 말에 놀라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얼굴 따위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의 복장. 이제야 불사의 히어로라는 기사 제목이 기억났습니다. 못나게도 저는 안심해버렸습니다. 불사라면 이 사람이 이만큼 핏웅덩이를 만들고도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히어로라고 한들 다친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금방 생각을 쫓아냅니다.

"…부축해드리면, 걸을 수 있나요?"

이곳에서 가까워 금방 이동할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가 사는 집입니다. 저의 목적지. 저까지도 없어야 한다면 잠시 집 밖으로 나가있으면 되겠지요. 히어로가 시민의 집에서 무언가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단지 지금 걱정되는 것은 핏자국입니다. 길에서부터 집까지 이어질 핏자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리고 저 히어로가 입고 있는 피 묻은 옷. 피얼룩은 찬물에 손세탁해야하는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446 이름 없음 (P4tZ2wT/QQ)

2022-06-02 (거의 끝나감) 20:37:18

>>445

"경찰이든 구급차든 됐어요. 괜찮아요."

저는 어차피 불사의 히어로. 이런 상처 정도야 혼자서도 극복해낼 수 있고, 그래야만 했습니다. 신고해주려는 그 선의는 고마웠지만 경찰이든 구급차든 제 초능력보다 큰 도움은 안될 것도 뻔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힘 없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대답했습니다. 꾸며낸 목소리마저 점점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았습니다.

"걸을 수 있어요."

아마도였지만 가능은 할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혼자서 어떻게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기어가기도 했으니까요.

"피는 신경쓰지마세요. 제가 연락해서 지워달라고 할테니."

어쨌든 민간인에게 이런 피는 별로 좋은 광경은 아닐테니 잊을 수 있게 안심시켜주려고 했습니다. 히어로 본부에서 비밀스럽게 뒷정리를 담당하는 다른 히어로나 직원들에게 부탁하면 이런 핏자국 정도는 금방 지울 수 있으니까요. 옷 역시 본부에 말해서 새로 교체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어서 데려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방금 전의 전투 때문일까요. 피곤했습니다. 지쳤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했습니다. 살아있어야 했습니다.

447 이름 없음 (VO/1zBO.1w)

2022-06-02 (거의 끝나감) 21:25:24

>>446

떨어트린 휴대폰을 집어들었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책상머리 앞에 앉아있는 것이 일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게 크게 다친 사람을 무사히 부축할 수 있는 힘이 있느냐면, 그러길 바랐습니다. 히어로로 추정되는 이 사람의 팔을 들고서 전 그 아래로 위치합니다. 어깨동무 비슷한 자세입니다. 다만 저도 똑같이 어깨동무하듯이 어깨 위로 팔을 두르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의 등에 손을 받칩니다. 허리나 옆구리를 받치는 것이 맞지 않느냐면, 상처에 손이 닿을까 겁났습니다. 불사의 히어로라고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독심술도 쓰세요?"

핏자국 생각하는 것을 들킨 것 같습니다. 말한 적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이전에 생각했던 무례한 생각까지 들으셨을까 겁납니다. 다른 생각을 해야겠어요. 그래, 목적지 이야기를 해볼까요. 다행히 집은 정말 가까웠습니다. 나름 신축 오피스텔이라고 엘리베이터도 있으니, 3층까지 올라가는 길은 험난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전세 대출로 얻어 벌써 4개월 째 제 보금자리가 되어준 집은 여기서 2분 거리였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이게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을 무시하기에는, 못 본 척 하기에는 그것도 찜찜합니다. 나는 숨을 흡 들이쉬며 일어납니다.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일 없이 무사히 집에 간다면, 당신을 겨우 현관에서만 살짝 안쪽으로 들여놓고 겨우 현관문을 닫을 것 같습니다.

448 이름 없음 (oP1e9GYZ8E)

2022-06-02 (거의 끝나감) 22:09:52

>>447

이 낯선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듯 부축하자 힘 없는 제 몸이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의외로 덩치가 작은 제 몸을 이 사람에게 들키게 되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허리가 아닌 등에 손을 받쳐주는 배려는 썩 고마웠습니다. 이미 힘들게 일어서는 것만 해도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으니까요. 불사의 히어로라고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간인들에게 피는 무서운 거니까요."

고통을 참고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히어로나 빌런이 아닌 이상 이런 피투성이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더이상 목소리를 내기에는 한계였습니다. 조금만 참으라는 말에 정신을 붙잡고 겨우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걸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의외로 신축 오피스텔이었습니다. 설마 이 사람의 집일까요? 어두운 숲 속이나 인적 드문 뒷골목 등을 예상한 저로서는 이 선의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지금은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초면에 이런 말하기 죄송하지만…"

닫힌 현관문에 털썩 기대앉으며 숨을 헐떡였습니다. 그리고 숨겨진 초능력을 발동시켜야 하나 고민하며 현관문 밖에 있을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사람 죽여본 적 있어요?"

아님 사람이 죽은 걸 봤다거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습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갔습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평범한 사람의 집. 그리우면서도 낯선 공간 속에서 저는 피 묻은 저의 손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449 이름 없음 (.PxuxcQJmc)

2022-06-02 (거의 끝나감) 23:29:01

>>448

상냥한 히어로인 것 같습니다. 정의의 편이라는 히어로가 상냥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요. 아니면 직업 의식일까요? 저는 히어로일지라도 팀장님에게 상냥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능력이 뛰어났더라도 히어로가 될 재목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렇게 생사를 오갈 것 같은 부상을 입고서 민간인이니 일반인이니 하며 신경쓸 자신이 없습니다.

"…네?"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퇴근길이었으니까요. 이미 그랬던 제가 피 흥건한 사람을 마주하고, 그 사람을 집까지 부축해 데려왔다니 완벽히 한도 초과입니다. 이런 이벤트는 한 번이면 만족합니다. 아니, 없어도 괜찮습니다.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을 하루라도 더 영위하는 것이 제 인생입니다. 가끔 월급날 갖고 싶었던 옷을 산다거나, 좀 값나가는 음식을 사먹거나 하는게 행복인 그저 그런 삶입니다. 특출나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전 현관문을 닫고서 복도에 있습니다. 문 너머로 들린 말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부터 문까지 핏길이 이어져있습니다. 저한테도 묻어 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눈을 질끈 내려 감고, 현관문에 기대 무릎을 모으고 앉았습니다. 이웃이 나오면 무어라고 설명해야 하는지가 지금의 고민인 저에게 얼토당토 않는 질문입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사람을 돕는 건 좋은 일인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상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핏자국과 그 냄새만으로도 이렇습니다. 독심술을 못 써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혼자 두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450 이름 없음 (UA3Op43hvU)

2022-06-03 (불탄다..!) 00:00:08

>>449

"…역시 그렇겠죠. 미안해요. 쓸데없는 말 해서."

힘 없는 웃음소리가 나왔습니다. 이제 정말 한계입니다.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이상 이 낯서고도 선한 사람의 평화로운 집을 이딴 피로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일반인과 히어로의 차이는 그것이었습니다. 빛나보이는 히어로의 뒷면에는 빌런과 다름없는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 저는 품 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들었습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 문을 열지 마세요. …끔찍한 기억을 심어줘서 미안해요."

저는 현관문 밖에 있을 당신에게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사과했습니다. 힘을 다한 마지막 중얼거림은 중성적이었던 목소리 대신 원래의 목소리로 나왔습니다.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익숙하지만 언제나 두려웠습니다. 저는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집어들고 그대로…

현관문 밖에 서있던 당신에게는 쿵 하고 쓰러지는 큰 소리가 들렸을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말을 들어서 문을 열지 않았다면 잠시 후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제 말을 듣지 않아서 문을 열었다면 심장에 단도가 꽂혀있는 저를 발견했을 것 같습니다.

451 이름 없음 (76wWIPVNV6)

2022-06-03 (불탄다..!) 15:15:59

>>450

저는 처음 일았습니다.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극도로 공포감에 휩싸이면 저지할 새도 없이 눈물이 나온다는 것을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하는 줄 알았는데,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모두 진실이었어요.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서,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했지만 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쓰러진 것이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오늘, 너무 많은 오지랖을 부렸습니다. 그 죄인 것이지요. 현관문을 다시 열고, 집으로 들어서지도 못 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아, 으………."

구역감이 솟구칩니다. 토를 할 것 같았어요. 아니, 필사적으로 참고 있습니다. 아까부터도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쿵쿵 뛰었는데, 지금 절정을 달했습니다. 한 번 최고점을 찍은 후에는 밑도 끝도 없이 곤두박질칩니다. 몸이 차갑게 굳는 것 같았습니다. 죽었을까요? 죽은 것일까요? 불사의 히어로가? 응급처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히어로로서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끝내고 싶었던걸까요? 민간인에게 피는 무서운 것이라며 신경써주었던 상냥한 사람이, 그 민간인의 집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존재, 가령 빌런같은 자가 여기까지 뒤쫓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초능력이 있으니 불가능할 것은 없겠지요. 응급처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곳은 분명 심장일 것입니다. 칼을 제거하고 지혈을 하면 될까요? 오히려 칼을 빼서 과다출혈이라던지, 아아. 얄팍한 지식들은 부정확하여 오히려 혼란을 야기합니다. 이제는 경찰이든 구급차든 불러야할 것 같습니다. 눈물로 얼룩져 뿌연 시야와 덜덜 떨리는 손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휴대폰을 가방에서 찾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군요.

452 이름 없음 (KbZg9qrL1s)

2022-06-03 (불탄다..!) 18:03:10

>>451

불사의 히어로.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치유 초능력으로 그 어떤 상처들도 낫게 한 후 다시 싸운다는 의미로 그렇게 불리고는 했습니다. 그것도 반은 맞았습니다. 치유 초능력도 어느 정도는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다른 초능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상은 회복하는 데에 치유 초능력으로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히어로. 빌런들을 막기 위해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는 늘 살아있어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운이 좋았고, 운이 나빴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운이 좋은 것은 도움을 주려는 선한 당신을 만난 것이었고, 운이 나쁜 것도 도움을 주려는 선한 당신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칼에 찔리는 엄청난 고통 후 저는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시야에는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관문을 연 당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저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울면서 휴대폰을 찾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아름다운 불과도 같은 무언가가 제 심장에서부터 새어나와 순식간에 제 몸을 휘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던 저는 서서히 죽었던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로브가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습니다.

"…………"

순식간에 불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모르던 불사의 히어로의 정체. 그것을 처음으로 드러내며 저는 황금색의 눈동자로 울고있는 당신을 마주보았습니다. 꿈이 아니었군요. 저의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미안해요. 잊어버려요."

저는 바닥에 고인 핏자국들과는 상관 없다는 것처럼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몸을 움직여 당신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습니다. 저의 손에서는 아까와는 다르게 미약한 피 냄새조차도 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다시 살아나자마자 한 말은 당신에게 전하는 사과였습니다. 선한 당신에게는 죽었던 저의 피를 묻히고서 이런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될 죄는 없었는데.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저는 히어로같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 빌런일지도 몰랐습니다.

453 이름 없음 (DSLZeOltzA)

2022-06-03 (불탄다..!) 19:16:32

>>452

불길이라기에는 불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빌런의 초능력인 줄로만 알고 놀라서 굳어버립니다. 불을 끄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 혹은 산소 차단일텐데, 저것이 빌런의 초능력이라면 그런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저 앉아있어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없고, 저 불을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굳어버린 몸이 꼭 남의 몸에 들어온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단지 놀랐기 때문이라고만은 못 하겠습니다. 불꽃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하면 다들 저에게 미쳤다고 하겠지요. 미쳤다고 한대도 위험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손을 뻗어 닿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요. 이상합니다. 빌런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겁에 질려있는데 불꽃에 닿고 싶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살아계세요?"

놀라면 몸이 굳는다는 표현, 비단 몸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눈물도 놀라 떨어지다 멈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움직였을 때, 불길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과를 받기보다는 안심하고 싶었습니다. 빌런이 없다든지, 당신은 살아있는게 맞다든지 하는 말로요. 심장을 찔리고 불탔다면, 그전에도 핏웅덩이를 만들만큼의 치명상을 입었다면 살아있지 않는 것이 정상일테니까요. 불사의 히어로라는 말을 이해합니다. 불사라는 것이 죽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없던 듯 되돌릴 수 있다는 뜻도 되나봅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요.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들로 저는 처음 물었던 말과 같은 것을 소리내고, 눈을 감았습니다. 의미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깨끗한 손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제 손은 피투성이로 끈적거립니다.

454 이름 없음 (G00Erd8keI)

2022-06-03 (불탄다..!) 20:28:38

>>453

당신은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니, 당신의 눈물마저도 멈춘 것 같았습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면, 당연히 놀라서 굳어버리겠지요. 그러나 그 죽은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기는 싫었습니다. 아니, 당신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습니다. 히어로로서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요. 히어로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결코 빌런에게 져서도 안 되고, 죽는 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혼자서 저를 죽였고, 혼자서 저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습니다. 죽인 것은 저였지만, 저를 살린 것은…

"네, 살아있어요."

당신의 똑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일부러 내는 중성적인 목소리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로브와 가면마저 떨어진 상황에서 목소리 따위는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겠지요.

"당신 덕분에요."

당신은 죽어가는 저를 도와주려 했고, 아무도 없는 곳에 버리고 갈 수도 있었음에도 저를 당신의 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 죽은 저를 보며 울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선의를 가진 당신은 분명 저보다도 더 히어로에 걸맞은 사람이겠지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더이상 위험하거나 무서운 일은 없을테니 안심하세요. 핏자국들도 제가 연락해서 금방 지워드릴테니까요. 원하신다면 당신의 기억도요."

당신의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로 끈적이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깨끗한 손에 다시 피가 묻었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제 정체를 들키게 된 불안보다도 당신을 우선 안심시켜주고 싶었습니다.

455 이름 없음 (.d76PcAgow)

2022-06-04 (파란날) 12:51:48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제 아무리 생명이 가득한 땅이라고 하더라도 이내 죽음의 향이 섞여있는 삭막한 분위기로 바뀌기 마련이었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던 마을은 당장 내일의 목숨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어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빛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인 인간족과 어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인 마족은 정말로 사소한 싸움을 시작으로 이제는 살벌하게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허나 전쟁이 길어지면 그에 회의를 느끼고,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는 법이었다. 그 분위기를 온전히 무시할 순 없었으며 처음엔 자존심을 위해서 싸우던 이들조차 회의감에 사로잡히면 평화를 위해 협상을 하기 마련이었다.

마족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대표이자 마족 측의 가장 큰 제국을 이끄는 황제는 인간족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대표와 중립지역에 만나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어느 한 쪽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정치적인 싸움을 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두 측 모두 전쟁을 이 이상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기에 협상은 치열한 감은 있었으나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족측 항제의 아들이자 황자는 마족들의 가장 큰 특징인 등에 달린 검은색 날개를 접고 중립지역에 만들어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생명들이 가득한 지역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도 있었건만,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확연하게 줄어들었고 그 때문인지 정원을 바라보는 황자의 눈빛이 아련함으로 가득했다. 그들 역시 파멸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종족이었기에 생명을 바라보는 눈빛은 다른 종족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발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이름 모를 작은 꽃을 구경하던 사내의 눈빛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는 눈빛에 기품이 가득 쌓여있었고 적대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을 몰래 해치기 위해서 온 이라면 그 눈빛에 살벌함과 살기가 가득하겠으나 아직은 확인단계였기에 그런 살기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싸움이 금지되어있는 중립지대에 자신처럼 인간족의 대표를 따라서 온 이가 있는지, 아니면 자신 측에서 데리고 온 호위일지, 그것도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일지. 어느쪽이건 평화로움 속에서 담소 대상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상대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갑자기 자객을 보냈습니다! 같은 것이나 꿈이니까 일어나! 류의 맥브레이커만 아니면 오케이!

456 이름 없음 (dD62PoLPuk)

2022-06-04 (파란날) 23:04:38

>>454 늦어서 미안. 답레를 어떻게 이어야할 지 모르겠어서… 참치가 준 답레가 문제라는게 아니라 이쪽의 평범한 직장인 캐릭터가 어떤지 잘 상상이 안 가. 안심해서 눈물 흘리고, 기억 지워달라고 할 것 같다고 대략적인 큰 행동만 상상해둔 채 세세하게 감정선이라든지의 묘사가 어렵네. 돌리는 동안 즐거웠어서 꼭 이어주고 싶었는데… 다시 한 번 미안해.

457 이름 없음 (YTxjLrAt2s)

2022-06-05 (내일 월요일) 06:37:34

>>456 괜찮아. 돌리는 동안 즐거웠다니 다행이다. 혹시 내가 너무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있나 싶어서 걱정했거든. 나도 돌리는 동안 즐거웠고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458 이름 없음 (OmK1/v7XmI)

2022-06-06 (모두 수고..) 02:12:12

스승님, 스승님. 어디로 가는 거야? (가방을 고쳐메며 한달음에 옆으로 쫓아와 붙는다. 가방은 척 보기에도 제 몸집보다 커다랗고 잡동사니가 많이 들어있겠구나 감이 오는 모양이다. 걸음마다 잘그락 달그릭 거리는 소리도 튕긴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태평하고도 나른하여 기대감이 드러난다.)

459 이름 없음 (LO43b9L5D2)

2022-06-06 (모두 수고..) 19:07:29

>>458
아직은 제자가 아니라니까, 애송아.(대조적으로 짐이라곤 없고 옷도 한량처럼 널널하게 입고 있다. 성가셔하는 투로 대꾸하면서도 노곤한 표정을 잠시 흐뭇한 미소가 덮고,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다.) 정식 절차를 밟기 전까지는 일단, 어디서 대뜸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좀 마라, 참... 짐은 그렇게 이고서 용케도 서 있구나. 목적지는, 아마... 바다가 있던가...(턱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린다.)

460 이름 없음 (RON/IslUP.)

2022-06-06 (모두 수고..) 19:31:35

>>459
스승님 말고 달리 부를만한 것도 없잖아. (투덜거리며 오리부리마냥 입술을 쭉 내밀었으나, 가벼운 쓰다듬에 간지러워하는 성 싶더니 곧잘 말간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작게 부를게. (가방을 고쳐메듯이 한 번 통통 어깨를 뛴다. 이 정도 쯤이야 가뿐하다는 퍼포먼스였다. 이내 목덕지에 바다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듯 하기에 기대어려 바라보나, 말끝을 흐리기에 체념한 듯 불퉁히 말한다.) 좋아, 가는 곳에 바다가 없어도 돼. 그럼 가는 길에 바다는 있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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