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359 이름 없음 (rbjc/bjMAA)

2022-05-06 (불탄다..!) 21:50:31

>>358

힘과 의식을 취하기 위한 행위라는 말에 그는 말없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자가 또 다른 블러디 데몬이 되어서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저 힘을 취하고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싸움을 희망하지 않고 싸울 마음이 없는 마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방식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상대 종족을 무조건 멸하려 하는 섬멸이 아니었으니까. 빛의 뒤에 어둠이 있고, 밝음 뒤에 그림자가 있듯이 수많은 종족들은 결국 어떻게든 연결되어 조화를 이뤄야하는 법이었다.

"복수. 힘없는 내 부모님과 친구들을 죽인 이를 죽였으니 이제 여한은 없어. 누군가에겐 어리석을지도 모르고 개인만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한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나 혼자서 그 녀석과 결판을 낸 거였고."

물론 살아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동료 중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면 같이 따로 여행을 가자고 한 이도 있었고 재건한 마을에 가서 조용히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복수를 했으니 이대로 가족과 친구들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서로서로 날카롭게 있진 말자고. 이것만 대답해. 그걸 다 먹고 힘과 의식을 얻고 나면 어쩔 참이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나도 방해하지 않겠어."

허나 그 힘으로 다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동료들을 공격하러 간다면 활시위를 당길 뿐이었다. 그 화살은 마를 멸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쫓아갈테니까. 단 한 방에 죽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부상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약간의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약간의 시간끌기가 자신의 동료들에겐 필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어차피 마왕은 내 동료들의 손에 쓰러질거야. 그렇다면 굳이 힘겹게 다시 서로서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360 이름 없음 (o8CNoXgSnE)

2022-05-08 (내일 월요일) 06:24:48

>>359 /기껏 이어놓고는 미안한데 연휴라 괜찮을 줄 알았더니 나 일이 바빠졌어
/중단해도 괜찮을까?

361 이름 없음 (Xfe7y2tonY)

2022-05-08 (내일 월요일) 10:15:02

>>360 괜찮아! 괜찮아! 바쁘고 그러면 어쩔 수 없는거지!

그럼 >>353으로 다시 구해볼까! 혹시 저걸로 다시 잇고 싶은 사람은 이어도 돼!

362 이름 없음 (FyHRxC/6T.)

2022-05-10 (FIRE!) 14:54:52

아직도 3시가 안 됐다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등받이에 무거운 몸을 뉘인다. 모니터 속에 기어들어갈듯이 구부정해있던 척추, 어깨, 목이 좀 펴지는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든다. 은은한 두통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고, 블루라이트 차단에 뭐 이것저것 좋은 옵션을 추가하여 만들어 렌즈만 돈 십만원 넘는 안경은 제 기능을 하긴 하는건지. 눈도 뻑뻑하고 공기도 탁한 것 같다. 아니, 탁했다. 여기서 살아숨쉬는 건 나뿐이라 나만 아는 이야기라 한탄할 곳도 없다. 이번 망자만 접수하고 바람 좀 쐬러 가야겠다.

"대기번호 573번 망자 호출합니다."

제발 무난한 망자이길. 난동을 피워 구속당해 오는 망자는 사절이다.

363 이름 없음 (eu0hz8FrXc)

2022-05-13 (불탄다..!) 00:46:33

"당신들을 구속하겠습니다!!"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이야기였다.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내의 전방의 지형은 모두 꽁꽁 얼어붙은 상태엿다. 지금이 한겨울이라면 그런 지형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으나 지금은 더위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5월 중순이었고, 땅 지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녀 한 쌍의 주변을 감싸고 있듯이 얼어붙어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남녀 한쌍은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허나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그 하얀 검 끝을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능'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내는 그런 자들을 막아서는 '이능'을 지닌 멤버 중 하나였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출난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던 사내는 다른 팀의 멤버들이 오자 붙잡아두고 있던 범죄자 두 명의 신병을 인도했고 두 명은 구속되었다. 이송되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던 사내는 뒤로 돌아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조금 쉬는 분위기인 듯 했으니 이렇게 혼자 달을 구경해도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하며 사내는 아주 살짝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거리를 띄웠다. 딱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냉정한 성격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열정적이고 열혈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아주 살짝 관심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이능을 가진 범죄자가 있고 그것을 이능을 지닌 팀이 막아내고 체포하고 잠시 쉬는 타임이라는 느낌이야. 누가 와서 어떻게 이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중2병 연극 그만. 이라는 식의 꼽이라거나 맥을 박살내는 맥 브레이커 같은 것은 없었으면 해. 그 외에는 갑자기 내 캐릭터를 죽여버리는 거 아니면 자유롭게 잇기 가능이야.
개인적으로는 약간 과거 모카고 같은 느낌을 떠올려서 썼으니 분위기에 참고를 해도 좋을 것 같고?

364 이름 없음 (2tu3LRqfzk)

2022-05-14 (파란날) 16:25:58

ㄱㅅ

365 이름 없음 (hU8uvS588w)

2022-05-16 (모두 수고..) 12:33:51

>>363
"OO 씨, 잘 쉬었어요?"

사내의 뒤로 다가와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넨 이는, 172cm의 결코 작지 않은 신장에, 살집이 붙어 겉으로 보기에는 둥글둥글한 체형의 몸 위로, 전투로 인해 구겨지고 더러워진 하얀 제복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로 질끈 묶은 여성으로, 그의 직장 선배인 도라희였다. 정규직이 된 건 좋은데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갈 지 모르겠다니까. 그나마 비정규직일 땐 범죄자만 잡아서 넣으면 됐는데 이제는 범죄자랑 씨름한 직후엔 서류 작업 해서 윗 분들한테 보고해야 하잖아. 피의자 신상에. 범죄 목록에, 추적 경로랑, 체포과정까지... 써서 내고 끝나기만 하면 몰라. 윗분들이 절차, 서류 그런 거 빠지면 사람 혼 빼먹을 기세로 뭐라고 해대니까 업무시간 상당부분을 종이씨름에 할애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어. 근데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해도 결재를 못 받고 반려되기 일쑤고,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피드백도 엄청 느려터져서 한 숨 돌렸나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하고... 가끔은 윗 분들이 범죄자보다 더 끔찍하다니까. 그 새끼들은 암만 날 굴려대도 체포도 못 하잖아. 에휴, 됐다. 솔직히 불만거릴 본격적으로 따지자면 이 실용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금방 더러워지는 제복부터 시작해도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럴 시간은 없지. 일해야 하잖아. 라희는 일터에선 뱉지 못할 불만을 웃는 얼굴 너머로 삼키곤 스스로를 타이르며, 가벼운 태도로 후배를 재촉했다.

"이대로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야 저도 태산같지만 윗 분들한테 보고 해야하잖아요? 숨 다 돌렸으면 얼른 서류 작업하러 가자구요."

그래도 국민연금에 건강보험료도 반이나 대신 내주고, 급여도 안정적으로 나오는 정규직이 훨씬 좋지.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거지만 우리 귀요미 발레 학원도 내년에는 꼭 끊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짧은 시간도 아닌데도 착하게 잘 기다려주고 있으니까 나 힘들다고 배신할 수는 없지. 우리 와이프도 고된 거 참아가며 힘 내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찡찡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고. 그래도 복지 더 나은 곳 있으면 확 그냥 이직해 버릴테다. 후배를 재촉하는 김에 스스로도 타이르며, 그는 어서 오란 투로 후배를 향해 손짓했다. 밤은 깊었지만 오늘 안에 퇴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이름이 안 나와있어서 부득이하게 OO로 처리했어:) 이름 알려주면 다음 턴부터 반영할게!

366 이름 없음 (sQr06crF06)

2022-05-18 (水) 00:29:16

왔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쓰레기더미나 다름없는 잿빛 공터의 철근 위에 앉아 당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인다. 마치 농구 기술을 선보이듯, 제 등 뒤로 팔을 꺾어 무언가를 당신에게 향해 던진다. 빵이 든 봉지는 먼지가 좀 묻어있지만, 빵은 깨끗하다. 당신을 향해 흔들어보이는 손 아래, 널널한 소매에 가려진 팔에 주삿자국이 여러개 찍혀있는 것이 보인다.) 헌혈차는 방금 갔어. 31구역으로 간다더라. 저번에 맡았다던 일은 어떻게 됐어? 할 만해?

367 이름 없음 (N59eG87gLU)

2022-05-18 (水) 15:04:00

>>366 31구역? 빨리도 가네, 원. 손님 모자라서 아쉬울 일 없으니 이해는 간다만.(투덜거리면서 봉지를 살짝 열고, 빨대 하나를 슬며시 꺼내 집어넣은 다음, 코끝을 대고 살짝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냄새 좋네. 오늘 들어온 밀로 구운 거지? 니미럴, 이런 상등품 하나면 보름은 빠릿빠릿해진단 말이야. (더 볼 것도 없이, 봉지를 뜯은 다음 대강 뜯어서 조금 맛본다.) 맡았던 일? 말도 마. 꼬일 대로 꼬여서 지금도 슬래셔 갱들이랑 한판 하고 오는 길이야. (옆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더니 아수라장같은 공터의 그나마 적당할 법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궁시렁거린다.)막 착수하려고 수건이고 안무고 준비 다 해서 갔더니만, 여기 건은 자기네들 봉사라는 거지. 돼지같은 것들. 온 동네 양로원이 다 지들 나와바리인줄 안다니까.

368 이름 없음 (sQr06crF06)

2022-05-18 (水) 20:02:08

>>367
최근에 31구역 자경단 내분이 일어나서 마약 공급로가 채식주의자 혈관처럼 뚫려버렸대. 신종 마약도 들어와서 장난 아니라더라. (빵을 맛보는 당신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이 빵을 받아라, 내 피이니.’라고 덧붙인다.) 슬래셔 애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다 보네. 기업의 애완견 화장지 대용품이었던 애들이. 원래 못먹던 애들이 한 번 맛 본 건 아득바득 안뺏기려고 애쓰잖아. (마찬가지로 빵 봉지를 뜯어 크게 한 입 베어문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입만 우물거리며 뿌연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빈 하우스 빌딩에 살던 맥퀸 부인, 어제 죽었대. 약물 과다복용으로. 맨날 사탕이니 뭐니 주셨었는데.

369 이름 없음 (nGc0/JwOj6)

2022-05-18 (水) 20:41:24

>>368
그 치들도 말야, 곤궁은 한 모양이지? 약물 계통이 꿈틀댈 때는 말단부에서 변화가 올라오는 건 절대 아니란 말이야. 약팔이 새끼들은 다 약쟁이들이라고. 돈 생기면 사먹고 돈 없으면 팔고, 그러다 죽을 병신들.(신경질적으로 빵을 쑤셔넣다가 잠깐 목이 매여서 꺽꺽거린다.) ......아무튼, 31구역 시끄러운 건 애초부터 마약 건일 게 뻔하지. 따라가보면 부랑자 놈들 상대로 신상품 쇼케이스 벌이고 싶은 큰 손 하나 있을 거라고. (당신의 손에 있는 빵봉지에도 우악스럽게 손을 집어넣으며, 겨우 조금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따지고 보면 슬래셔 그 거렁뱅이들도 대가리가 없는 것들은 아니야. 결국 개사료도 고기니까, 먹고 싶다는 호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지. 급한 새끼들은 헌혈차나 양로원이나 똑같다니까, 노인네들 지옥 보내주는 싸구려라도 꽉 잡아놓는 게 나름의 수완이겠지. 그것밖에 안 남은 거지새끼들. (그러다 당신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내색은 않지만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중독자는 다 단두대에 목 걸어놓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입맛만 버렸구만.

370 이름 없음 (sQr06crF06)

2022-05-18 (水) 23:28:48

>>369
그래도 약팔이 중에서도 괜찮은 애들도 몇몇 있어. 쏜 디키빈, 마그네스, 록커...셋 중 둘은 죽었네. 진짜 이상해. 록커의 노래는 끔찍했지만 칼림바는 끝내줬는데, 재능도 못살린다는게.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다, 당신이 꺽꺽거릴 때 등을 토닥여준다.) 그렇겠지. 그래서인지 네이밍도 끔찍해. 정적 낙원이래. 근육수축제 성분도 같이 들어있어서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는대. 풀릴 때도 소변 다 봤을 때처럼 기분 좋다나. 야! (빵봉지를 빼려해보지만 역부족이라 그냥 당신 얼굴을 향해 던진다.) 너무 부조리해. 이 거리의 노인들은 모두 과거에 훌륭한 어른들이었단 말이야. 센트럴 실버타운, 그 건만 공중분해되지 않았더라면. (그러다 당신의 말을 듣곤 노려본다.) 맥퀸 부인은 딱한 사람이야. 과거 교수에, 자식들이 죄다 변호사에 검사인데도 얼굴 한 번 안내비쳤잖아. 그냥, 이 거리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371 이름 없음 (HD5CPcnXLg)

2022-05-19 (거의 끝나감) 07:34:47

>>370
록커는 병신이었어. 병신이었다고. 동네에 널린 게 운반책인데, 지가 뭐라고 건수마다 기어나와? 잠자코 오디션이나 보러 갈 것이지......(텅 빈 봉지에서 부스러기나 긁어모아 입에 털어넣는다.) 그래도 마그네스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걔는 진짜로...... 좀 정상적인 곳에서, 의류 브랜드같은 거라도 운영했으면 좋았겠지. 큽!(안면을 후려친 빵봉지를 잡아 대충 근처에 내려놓는다.) 뭐, 결국 책임은 본인들에게 있다는 거지만, 나도 동정은 해. 맥퀸 부인도 그렇고. 진통제 떨이로 전락할 프로젝트에 홀려서 재산이고 뭐고 다 포기한 건 그 여사님 잘못이지만, 그래도, 실수 한 번에 망가져도 상관없는 볼품없는 인생은 아니었을 거야.(조용히 자기 손바닥을 펴고 응시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린다.) 휴, 그리고 뭐, 알라시도 그랬고.(말을 꺼내놓고는, 슬쩍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372 이름 없음 (w6ecSNXhaU)

2022-05-20 (불탄다..!) 01:01:27

>>371
...야, 오디션까진 아니야. 걔 오디션 나갔으면 극단적 선택 했을걸. (푸하하, 알맹이 없는 웃음을 흘린다.) 맞아. 결국 운반책 애들도...나쁘지 않다곤 못하겠지만, 그냥...어쩔 수 없는 놈들이었다고. (습관적으로 손등을 긁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당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다, 뒤에 나온 이름에 눈이 커진다.) 아니. 알라시, 걔는...걘, 실수 같은 거 한 적 없어. 너도 알잖아. 그런 꼴을 당해도 싼 애가 아니었어. (손등을 긁던 손이, 점점 손목의 흉터로 옮겨간다.) 내가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왜 하필 그 때 난...씨발. (아무리 그라 해도 욕을 지껄일 수 밖에 없다.) 경찰들은 아무도 안믿어줘.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지만 알라시가 어떤 앤지 알면서. (몇 번이고 했었던 말을 다시금 중얼거린다.) 분명 타살이야. 꼭 잡아낼거라고. 근데, 너무 무력해...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길고 무거운 숨을 뱉는다.)

373 이름 없음 (baXJa7Yf0I)

2022-05-20 (불탄다..!) 09:34:55

>>372
하기야, 악기도 무슨 지처럼 모자란 걸 해가지고, 우리같은 부랑아들이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힙합이나, 메탈이나, 보통 그런 쪽이지. 그래도 나는 걔 연주 좋아했지만. (침을 꿀걱 삼키고, 괜히 바닥을 본다. 당신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쉰다.)자꾸 긁지 마, 피부 벗겨질라. (약간 후회스러운 어투로)이거 괜한 화제를 꺼냈구만. 그때 이후로...... 바뀐 것도 없고, 여전히 하루 하루는 지랄같고, 나도 답답......해서 말야.(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쉼 없이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으면 다 잊혀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책임 있다면, 하필 이런 개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는 거지. 쓰레기장에 꽃이 피어 봤자, 몇 번 주변에 휩쓸리면 결국 구분이 안 간다고, 우리가 꽃은 아니겠지만. (잠시 고민하듯 눈빛이 흔들리다가, 지긋이 당신을 보고 조심스레 말한다.)이 말 하면 내 아구창이 남아날지는 모르겠지만, 난 역시 자살 같았어. 그...... 후.(깊은 한숨.)

374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02:26:50

내 인생은 시작부터 운빨망겜 그 자체였다. 돈과 권력, 그리고 빌어먹을 능력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운이 없었다. 그런 세상에 하룻밤 장난질로 생겨난 것도, 부모 모두에게 버려진 주제에 죽지 못 하고 살아남은 것도, 천운이 아니라 천악이었다. 어느 멍청한 집시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 날 그 쓰레기장의 차가운 봉투 속에서 죽어버렸을 텐데. 그랬다면 여태 살아, 아득바득 살다가 이렇게 괴로운 최후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운이 없다. 그래도 이제야 끝나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25년이나 이렇게 살았으면 충분하지...

"쿨럭, 커흑..."

어두운 골목길에 내 밭은 기침 소리 울린다. 입에 고였던 핏물과 새로 솟은 핏물 뒤섞여 바닥에 흘뿌려진다. 새벽이 깊은 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길 한구석, 차가운 벽과 바닥과 오물 뿐인 이곳이 나의 마지막 잠자리가 될 곳이라니, 마지막만큼은 좀 멀쩡한 곳으로 갈까 싶어 몸을 일으키다가 포기했다. 다리는 없는 것마냥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베인 옆구리에선 이미 피가 바닥에 늪을 만들 기세로 흘렀다. 움직여봤자 몇분이 고작이겠지. 그럴 바엔 편안히 잠이나 들어버리자고,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쉬자며 몸을 굴러 벽에 기댔다.

아아, 정말 엿 같은 인생이었어. 꽃다운 계집으로 태어나, 남들 다 하는 거, 사랑도 놀이도 한 번 못 해보고, 그저 살다가 가는 인생이라니. 부디 다음 생은 없길 바라며 점점 무거워지는 눈커풀을 움직인다. 깊은 밤, 빛이라곤 희미한 달빛 뿐인 골목길, 그 끄트머리에 처박힌 내 쪽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한 채였다.

//맥브레이커 사절.

375 이름 없음 (UAJJsecazA)

2022-05-21 (파란날) 03:23:44

>>374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끝 맺히고 싶은가요? 대단원에 이른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그 발소리의 주인은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어색할지도 모르는 인물 이였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 이던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그 인물은 지금의 상황에서 결국은 그렇게 되도록 된 경위를 이야기, 우화에 비유하는 듯이 말하며 건넸습니다. 그 억양 속에 담긴 것은 마치 여러 번 보았다는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그럴 뿐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으슥한 곳에서 위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 이러한 비유법을 들면서 태연이 말을 건넨다는 행위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저의 시간 역시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허리를 넘어서 닿는 긴 흑발에 검은색의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이런 흐릿한 달빛 만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도 조차도 검은 양산을 손에 쥔 위고 아래고, 전부 검은색의 투성이로 그렇기에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다른 색이라면 옷에 가려지지 않는 부분인 흰 얼굴과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듯한 선명한 색의 눈동자 뿐인 소녀가 이번에는 눈웃음을 한번 지으며 이어서는 이번에도 애매모호한 말로서 물음을 건넵니다


그녀는 그 앞에 인물의 바로 곁에서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돌아 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그대로 멈춰 서서는 바라보았습니다

376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05:37:02

>>375 이어줘서 고맙지만.. 내용이 내가 생각한 흐름이랑은 맞지 않는거 같네. 스루할게. 미안.

377 이름 없음 (atpR9LS59.)

2022-05-21 (파란날) 07:55:07

>>374

내겐 자비심도, 감정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온 지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스스로의 그런 '나약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이제 그 절반도 덜 되는 수준이다. 나는 온정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났으니, 무기에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늦은 밤이다. 내 삶에서 의미가 있던 날들중 대다수는 다른 이들이 잠드는 이 밤에 존재했다. 부모님께서 헤어진 것도 밤. 홀로 남게 되어버린 것도 밤. 스스로의 신분을 국가에 맡기기로 한 것도 밤. 소중한 전우들을 잃은 것도, 총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소중한 그녀를 만나고, 잃은 것도. 전부 밤이었다.

오늘 밤은 그녀를 잃은 지 3년이 지난 밤이다. 그녀의 친구들이자 곧 나의 친구들인 이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존재를 기리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익숙한 향기가 골목 한 구석에서 풍겼다. 본능과 이성이 한꺼번에 경보를 울렸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냥꾼이 아닌 사회를 누리는 시민으로써.
그곳엔 내가 있었다.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성별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겠지만,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이 광경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상처를 입고 세상을 원망하는 눈은 분명히, 그 때의 나 자신과 같았다.

"세상에."

욕설조차도 하지 못하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랜 공포는 아직도 내 뇌 한 구석에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피를 흘린다는 상황을 지나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보통 허리춤에 권총집을 찰 때, 나는 작은 가방을 찼다. 그곳에서 꺼낸 간단한 도구라면 분명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그 때 구해내지 못한 내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았다.

"우선 상처, 아니 출혈을... 잠깐만요."

너무 급해서 그런지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다친 사람의 환부를 확인하려 들었다.
가로등 불빛도 없이 희끄무레한 달빛 밖에 닿지 않는 골목길 구석에서,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존하여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는 멍청한 짓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전에 이어진 것을 스루했다면 혹시 이걸로 이어봐도 될까!

378 이름 없음 (V7gUo0Mu4c)

2022-05-21 (파란날) 07:55:46

>>374

기름 두른 팬 위를 널뛰는 옥수수 낟알처럼 소란스러운 거리가 싫어서 피하고 피한 것뿐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요란스럽던 소리가 죽으면서 흘린 붉음일까 싶어 눈을 비비면 한 명의 사람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축록에 사냥당한 산짐승처럼 베인 허리로부터 생명의 증거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누군가. 웅덩이를 만드는 흥건함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마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그 냄새가 퀘퀘 묵은 지난날의 상흔을 아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고 마는 것은 모른 척, 못 본 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속삭이는 양심을 등진 이성의 꼬드김 때문이다.

지난 삼십 년의 평화를 깨부수는 짓은 삼가고 싶었다. 사건을 모르고 사고를 잊은 척하며, 한 번 궤도를 벗어났던 삶을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 되돌려놓았다. 그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고한 피해자는 없다며 세상만사에 삐뚠 태도를 보이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도움의 손길을 망설이는 내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 뜨거움을 직접 데어봐야만 아는 멍청이였냐며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가라고 내 엉덩이를 걷어찼겠지. 생면부지 타인,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은 것이 분명한 사고 물건에 어디 손을 대려 하냐면서 윽박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달빛을 반사해 빛나는 붉은 피가 내게는 건널목의 적색등처럼 보였다.

더는 다가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이 보였다.

"아가씨. 돈 있어?"

// 도전!

379 이름 없음 (V7gUo0Mu4c)

2022-05-21 (파란날) 07:56:50

오 젠장. 못 보고 올렸네. 제 꺼 하이드 부탁합니다!

380 이름 없음 (Mx6oRjfhOo)

2022-05-21 (파란날) 08:42:28

핏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한때는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등등. 정말로 다양한 종족이 서로의 생존과 이익관계 등으로 싸웠지만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던 '흑막'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흑막이야말로 자신들이 평화를 위해 처치해야 할 존재라고 인식된 수많으 종족들은 이내 모두 힘을 하나로 합쳐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모든 것을 뒤에서 지배하고 남 모르게 조종하던 흑막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고 이제는 서로 더 싸우지 않도록 평화협정을 맺음과 동시에 제대로 된 평화가 찾아왔다.

바로 전날만 했어도 전쟁에 차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은 이들의 표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막과 싸웠던 이들 중 한 명인 인간족의 젊은 사내는 정말 유유자적하게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성스러운 검을 들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세계에 평화를 되찾아온 주역 중 한명인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평화를 즐겼다. 세간에 떠도는 소설을 보면 보통 자신 같은 케이스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며 많은 부와 명예가 주어질지도 모르나 현실은 마냥 그렇진 않았다. 물론 왕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대우를 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을 세간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친분이 있는 이들이야 대단해!! 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럼 오늘 이 축제만 즐기고 슬슬 다른 곳으로 가볼까. 뭔가 계속 여기에 있기도 애매하니 말이야."

수도 출신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작은 마을 출신이었던 그는 슬슬 여길 떠나 고향, 혹은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아닐까 생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수도 생활이 불편하다거나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검이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시리어스한 장면이나 컷! 아. 배우님. 다시 제대로 해주세요! 같은 맥브레이커만 아니면 오케이!

381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17:19:08

>>377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겨간다. 이제 몇번,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앞을 보고나면 내 의식은 완전히 끊겨버릴... 터였다.

"ㄴ, 누구, 야..."

의식이 희미해서였는지, 나는 누군가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 했다. 스마트폰 플래시 특유의 빛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죽어가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어도 몰랐을거다. 그러나 그는 멍청하게도 플래시를 켰고 그 빛은 가라앉던 내 의식을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불쾌한 각성의 감각과 마지막을 방해받았다는 짜증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

"오지랖, 떨지 말고... 꺼져. 털어갈 것도, 없으, 니까..."

갈린 목으로 억지로 쥐어짜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소음 그 자체다. 말하느라 목이며 몸 곳곳에 힘을 준 탓에 잊어가던 고통이 새롭게 밀려와, 신음으로 낮게 목을 울리자 짐승의 그것과 흡사한 소리가 난다. 그 뿐이랴, 메마른 목을 울렸으니 마른 기침 터지는 것도 있다. 커흑! 크흑. 온몸을 울리는 기침 몇번 하자 몸이 파르르 떨리고 슬슬 굳어가던 옆구리로부터 뜨끈한 피가 또 한웅큼 왈칵 솟구친다. 내 아까운 피, 이 이상 쏟으면 안 되겠다는 본능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를 짚지만 힘없는 손으론 지혈도 뭣도 안 된다. 다만 차게 식어가는 손에 갓 흐르는 피는 뜨겁다고 느끼며, 괴로운 숨을 몰아쉰다.

"내버려, 둬... 이제, 이제야... 쉴... 거라고... 나는..."

비몽사몽에 가까운 감각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접근을 허락치 않듯 몸을 웅크렸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뜯어진 테크웨어 한벌만이 내 수의가 되어주면 족했다. 이제와서 도움 따위, 누군가의 도움 따위는...

//물론 오케이지!
>>378도 이어주려해서 고마워.

382 이름 없음 (atpR9LS59.)

2022-05-21 (파란날) 22:27:10

>>381

이 거리의 또 다른 그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아마, 이 사람에게도 이렇게 되어버린 사연이 있겠지. 특히나 단순한 사고가 아닌, 흉기 등으로 노려진 듯한 모습을 보면 더더욱.
이 사람과 엮이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머리 속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지나칠 수 없었다.
기사도 정신 따위나 군인 정신 같은게 아니다. 이건 두려움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모든 것에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같아 보였다.
출혈과 그것을 가리는 손을 바라보고선, 조심스레 그 손을 옮겼다. 웅크린 틈새로 잡은 피투성이 손목은 차가웠다.
출혈도 많고, 체온도 잃고 있다. 의식을 잃지 않도록 조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간단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을 물어가며, 상처 부위의 옷을 조금 걷어올렸다. 날붙이로 인한 절상인가? 확실히 그냥 사고로 인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목숨이 빼았기는 것은 이제 사절이다. 특히나 내 눈 앞에서.
망설임 없이 소독 거즈의 포장을 뜯고서, 거즈를 환부에 대고 꽉 누른다. 물론, 상태를 보면 지혈만으론 부족하겠지만 일단 피를 멈춰야 한다. 후송은 그 다음이야.

구급대를 불러야 하나? 아니. 어쩌면 그랬다간 허사가 될 수도 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몇몇 상황에선 더 무력한 경우가 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들어올려 조금 고민하고 있다가, 본인에게 묻기로 했다. 자칫하면 구급대를 기다릴 틈도 없이 이동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요?"

383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23:40:03

>>382

그만, 그만 날 내버려둬. 이 이상 나를 이 거리에 붙잡아두지 마. 더 이상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지 말라고. 나는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빠져나간 피의 분량만큼 체온을 잃었기에, 절대 춥지 않은 이 계절에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신을 엄습한다. 아, 젠장, 진작에 정신을 잃었으면 이런 한기는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저 불청객 때문에 내 마지막 가는 길도 영 개운치가 않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반항을 할 수 없는 내가 더 한심스럽고, 짜증이 났다.

"두라고, 좀, 손 대지마..."

다 죽어가도 욕지거리는 입에 베여서 술술 튀어나온다. 그러면 뭐하나, 날 건드는 저 손 하나 쳐내지를 못 하는데. 간신히 뜨고있는 눈으로 이 정체 모를 인간을 노려보면서 잇새로 연신 거친 소리 내뱉는다. 그러다 목이 메여 다시 기침하고, 머리가 핑 돌아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숨만 겨우 쉬는 지경에 이른다. 시익시익, 내 숨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이명과 숨소리가 뒤섞여 머릿속을 채우는 와중에, 내 옆구리에 뭔가를 대고 손을 얹은 그가 물었다. 이름, 나이, 당연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질문들에 크흑 하는 괴로운 웃음소리 흘렸다.

"있겠냐, 그딴거... 나는, 언제나, 대용품... 이었다고..."

나이도 날 주운 집시로부터 들어서 추정했을 뿐이고, 이름 역시 조직의 코드번호 이외는 없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희미하다. 그야 몇번 불리지도 않았지, 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으니까...

"없어... 아무도... 다 죽였어... 내가... 아무것도... 없어... 이제..."

누군가에 쫓기고 있냐는 말에 나는 떠올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조직의 내부를, 전부 새빨갛게 물든 그곳을. 그나마 기다리던 사람도, 돌아갈 곳도, 모두 없어졌다. 내 손으로 없앴다. 그리고 이제 와서 혼자는 싫다.

"내버려 둬... 제발..."

한기로 턱을 떨면서도 중얼거린 나는 더이상 눈커풀을 잡고 있지 않기로 했다. 스르륵,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이 무거우면서도 이제 겨우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쉬운 것도 같았다. 내 손이 늘어져 툭 기댄 그의 손이 따뜻했으니까.

384 이름 없음 (UDGFlMPLhw)

2022-05-22 (내일 월요일) 01:27:30

>>383

손을 대지 말라는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발악은 듣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나는 지금 이 행동을 순전한 연민과 자비만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기 만족이었다. 그냥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지나쳤다간, 두고두고 또 내 정신이 나를 괴롭힐 것 같아서.
복잡한 감정이다. 인간은 원래 복잡한 감정으로 만사를 행하는 법이다만.

의식을 잃지 않도록 물어보는 일이, 의외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인적 사항의 말소. 소모성 인적 자원에, 추격자를 전부 처치했다...
흐려져가는 의식 중에 말하는 횡설수설일수도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꽤나 귀찮은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직, 혹은 기관. 절대 소규모의 집단과 연루되어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구급대를 불러선 안된다. 오히려 일이 더 틀어질것이 뻔하다.

출혈 자체는 어느정도 통제가 되고 있다. 피에 절어버린 거즈 위에 하나를 더 얹고, 꽉 누른채 천천히 그녀를 안아올렸다.

"걸을 순 없어보이니, 이대로 갈겁니다."

조심스레 무릎 아래에 팔을 대고, 등을 받쳐서 일어선다. 다리나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그나마 거처가 근처라서 다행이었다. 집세가 싼 동네에 사는 게 이런 도움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이후로, 나는 집이 굳이 넓을 필요가 없어졌다. 살던 집을 팔고, 지금의 치안도 너비도 보장되지 못하는 아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스스로를 내던진 벼랑같은 곳으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역설이 참 우스웠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나마 양심상 달려 있는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고, 우선은 그녀를 낡은 소파에 눕혔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근처 도로의 차량 소리가 뻔히 다 들리는 이곳이 내 집이자 무덤이다.

385 이름 없음 (aiVpxnKJoQ)

2022-05-22 (내일 월요일) 02:33:38

>>384

그가 데려가겠다며 들어올렸을 때, 내 정신은 이미 끊겨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지고 입은 힘없이 벌어져서, 게다가 피범벅이기까지 했으니 꼴불견이었겠지. 그렇게 데려가지는 내내 나는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목숨이란 어찌 그리도 질기던지, 그의 집에 도착해 낡은 소파에 내려지고서도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살아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향하는 손은 언제나 악의와 살기로 가득찬 것 뿐이었다. 뾰족하고 날선 감정들은 나를 사정없이 찌르고, 후비고, 베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비껴나가 살아남았지만, 그 감정들은 흉터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이 없을 땐 온 몸을 감추는 옷만을 입게 되었다. 오늘도, 조직에서 지급했던 새까만 테크웨어로 온 몸을 감싸고, 다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조직원들을 전부, 내 손으로...

"큭, 커흑..."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내 상태가 나아질 리는 없었다. 들고 옮겨진 후폭풍과 점점 가까워지는 생사의 경계에 무의식 중에도 몸서리를 치며 기침과 피를 토한다. 갓 터진 피는 그의 낡은 소파를 더럽히고 바닥에도 튄다. 이제 정말 끝이 코앞이구나, 싶을 때, 기침의 충격으로 닫혔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흐릿함을 넘어 색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뭉개진 시야에 곧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이제 눈에서도 피가 나는가, 아니, 아니다, 이건 눈물이다.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진심이었나, 순간 그렇게 중얼거려버렸다.

"죽기, 싫어... 죽고싶지... 않아..."

아, 인간이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지, 그토록 죽음을 바랐으면서 정작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니 두려워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살고 싶다고, 나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보려해도 팔은 들리지 않고 손만 겨우 부들거릴 뿐이다. 그마저도 지금의 내게는 힘이 부치는 일이었기에, 곧 다시 의식을 잃었다.

386 이름 없음 (v5chgsZ58.)

2022-05-23 (모두 수고..) 00:09:30

>>385

"동감입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보자 측은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숨을 쉬는 것이 평소보다 더 수고로워졌다.
전부 포기해버리고 놓고 가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 피가 순전히 이 사람만의 피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의 피도 섞여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길이다. 후자인 편이 안위에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구하고 있는 사람이, 무고한 이들을 수도 없이 해친 살인마라면?
그리고 내 손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 다음 희생자를 찾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일어나는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나를 찾아내 책임을 묻는다면...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가진게 너무 부족하고 제한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흘린 피를 메꿔줘야 하는 것인데 수혈팩은 고사하고 이쪽의 혈액형도 모르는 상황인데다, 제대로 된 처방이 필요한 항생제가 아닌 상비약 정도밖에 없다.
몸을 씻기는 것도 필요할텐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정신을 잃은 이성에게 멋대로 그런 짓을 하고싶진 않다.

"...갈아입힐 옷도 없고 말이지."

그나마 내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것은 따뜻한 모포 정도가 끝이다. 나머지는 그저, 손으로나마 체온을 전해주는 수 밖에.
상의를 조금 끌어올려 거즈를 갈고, 새 습포를 덧댄 뒤 붕대를 감는다. 그리고 그 위에 모포를 목 아래까지 덮은 뒤, 가만히 곁에 앉아서 손을 잡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약한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지나쳤을 때의 후회보다는 낫겠지.

387 이름 없음 (XCFUZkJPNM)

2022-05-23 (모두 수고..) 02:06:59

>>386

피를 닦아낸 내 얼굴은 몇군데 찰과상을 제외하면 큰 상처는 없었을 것이다. 끈적해질만큼 묻어있던 피가 전부 내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거칠게 손질된 검붉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있다가 젖은 수건에 밀려 옆으로 흘러내린다. 그렇게 드러난, 옅어진 핏자국 아래 하얀 피부나 얼굴의 생김이 앳되어 쉬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다. 잠긴 것처럼 굳게 감긴 눈은 얼굴에 수건질을 하고 옆구리에 새 처치를 해도 열리지 않았다. 모포를 덮어주고 손을 잡아주었을 땐, 차가운 손에 닿은 그의 체온이 뜨거운 것처럼 흠칫하지만 곧 잠잠해진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으면서도 가늘게, 희미하게 숨을 이어가며 내 생은 이어진다.

그대로 푹 잤으면 좋으련만, 피가 너무 흐른게 문제였는지 겨우 서너시간 지나서 정신이 깬다. 영원할 것 같던 새벽이 거의 지나 창밖이 흐릿하게 밝아지려 하는 시간이었다.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리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 역시 낯설다. 순간적으로 패닉이 올 뻔 했으나, 공교롭게도 내 정신은 적응과 이해가 빨랐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는 일의 전말에 탄식과 같은 숨이 입술 사이로 토해진다. 하-...

"젠장..."

죽음의 문턱에서 생을 구걸하는 꼬라지라니. 누구보다 죽고 싶어하는 인간은 사실 누구보다 살고 싶어하는 인간이라는게, 그게 나였을 줄이야. 기가 차서 헛웃음도 안 나온다. 아니, 목이 말라서 말이고 뭐고 못 하겠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이 집의 주인, 날 데려온 오지랖 넓은 남자, 그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ㅇ, 어이... 이봐."

원래 목소리가 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는 내 귀로 듣는 것도 별로다. 그래도 말을 안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겨우 겨우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끌어낸다.

"물... 물 좀, 줘 봐..."

죽지 못 했다면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나. 일단은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물 좀 달라고 하고, 그새 자극받은 목 때문에 마른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숨이 빠질 때마다 느껴지는 피맛은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줘서,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젠장, 다시 중얼거린 건 당연했다.

388 이름 없음 (U8lVilf86o)

2022-05-23 (모두 수고..) 10:46:06

"나, 어떻게 생각해?"

적막을 깬 한마디에 무게가 실려있다. 남성은 당신쪽을 보지도 않고선, 묵묵히 교장실 구석의 미니선풍기를 응시한다. 방금 치고박고 싸운 흔적이 남아있는 그의 상기된 얼굴에선 피 비린내가 나는듯 하다.

남성은 이 이후로 말을 잇진 않았다, 그저 애꿎은 미니선풍기만 바라볼 뿐.

/편하게 이어줘~ 상대캐 설정은 아무렇게나 해도 돼!

389 이름 없음 (v5chgsZ58.)

2022-05-23 (모두 수고..) 11:16:48

>>387

피곤한 하루와 그것보다 배는 더 피로하고 긴장되었던 하루의 끝자락 탓인지, 잠시 체온을 건네주려 손을 잡고서는 그 자리에서 나도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따스하다기보단 따가운 햇살이 등짝을 두들기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기척이 느껴지자 코를 골아대며 잠들어 있다가도 펄쩍 뛰듯이 깨어나, 잠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깨어났다. 새하얗고 앳된 얼굴이 눈을 뜨고서 무어라 하는 것을 보자, 비밀스러운 무엇인가 혹은 최소한 옆구리에 절상을 입고 피칠갑을 할만한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물... 아, 그래. 물."

자다가 금방 깨어난 지라 정신이 없었으나, 이내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요구하는 지 알아채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굉장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밤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걸어가,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를 꺼내들고 가져가려다가 아차 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행여 힘이 없어서 마시지 못하고 쏟지 않을까 싶어, 빨대를 하나 꺼내 열린 페트병에 꽂아서 소파로 걸어왔다.

"여기요. 체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체력의 보충을 위해 음식물을 섭취할 수도 있을테니까.
약도 먹을 수 있겠지. 한 시름을 놓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페트병에 꽂힌 빨대를 입가에 가져다 준다. 들고 마시기엔 힘들지 모르기에, 당장은 이런 간호를 해줄 필요가 있을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지금은 회복이 급선무다.

390 이름 없음 (gD8h2r62qg)

2022-05-23 (모두 수고..) 12:55:41

>>388

당신의 옆쪽에 미동없이 앉아있던 여성은 눈동자만 굴려 당신을 바라보다,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적막. 교장실 구석의 미니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너? 말썽쟁이. 멍청이. 바보."

여성은 톡 쏘듯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신랄한 대답 끝에, 여성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걱정만 끼치는 놈."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파우치에서 물티슈와 반창고를 꺼내었다. 여성은 익숙하다는 듯, 당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왜 싸웠어?"

/ 캐릭터가 학생인 것 같아서 일단 상대캐는 같은 반 반장으로 설정했어~ 설정오류면 말해줘!

391 이름 없음 (awo1YlitAY)

2022-05-23 (모두 수고..) 15:05:05

‘반려인간 구합니다. 숙식 제공 가능합니다. 010-0000-0000’

흡혈귀, 뱀파이어, 드라큘라.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들은 존재했다. 반려 인간과 짝을 지어 평생 그 한 사람만 흡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자리 잡은 지금은 딱히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송곳니가 날카롭고 귀가 뾰족한 그들은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갖고 있고, 반려 인간에게 그 힘의 일부를 내어준다. 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는 반려인간 공고 전단을 돌리고 있다. 귀가 둥근데 전단지 내밀며 웃는 것을 보아하니 이는 날카롭다. 당신에게도 종이 한 장을 건넨다.

392 이름 없음 (xnNjr8UxtE)

2022-05-23 (모두 수고..) 15:33:14

>>391

장밋빛 인생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나만 빼고 다른 모두들은 쉬운 인생을 살아가는게 아닐까. 오늘도 겨우 이자만 갚을 수 있었고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그저 한달을 겨우 풀칠할 수 있는 돈이다.

그렇게 내일을 걱정하며 걸어가던 중 전단지를 내밀어오는 손이 쑥 앞으로 들어온다. 반려인간, 인간과 그것들 간의 평화적인 협상 이후 새롭게 정착된 제도로 누구나 할 거 없이 피를 빠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상대만 흡혈할 수 있는 제도.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건강한 상대를 찾기에 나는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 ... 혹시 다른 조건은 안보시나요? "

하지만 당장 내 인생이 절벽 끝자락에서 반쯤 발을 내밀고 떨어져? 나 떨어진다? 라고 협박하는 와중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일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받은 전단지를 잠깐 바라보고 이것을 나누어주는 여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본 것이다.

" 숙식 제공만 해주시면 어떤걸 시키셔도 상관 없습니다. "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내 인생이.

393 이름 없음 (lyYmX5pEjg)

2022-05-23 (모두 수고..) 16:58:53

>>392

“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지만 전단지가 효과 있을거란 기대는 했다. 전단지에 적어둔 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다니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본다. 정말로 반려 인간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조건에 대해 말해주는게 맞다. 전단지로 얻어맞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서 말한다.

“불쾌하실 수도 있는데… 미인이요.”

인간도 이왕 먹을 것이라면 보기 좋게 예쁜 것을 좋아하는데 인간의 피를 먹는 흡혈귀도 보기 좋게 예쁜 인간의 피가 먹고 싶을 수 있는 거다. 이 여자는 취향이 너무 확고해서 문제다. 안 그래도 반려 인간 구하기는 까다로운데 이 때문에 더 고생하고 있다. 전단에 미인만 연락해달라고 적으려다 아무래도 욕 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니 지금 욕 먹을 차례라 생각하며 당신을 흘끗 바라본다.

394 이름 없음 (RPjS6ejax2)

2022-05-23 (모두 수고..) 18:23:57

>>393

상대방도 분명 잘 구해지지 않으니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계산도 분명히 깔아두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수는 많은데 비해서 그것들의 수는 적기 때문에 반려인간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이다. 본인에게도 무언가 제한되는 사항이 있는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

" 네? "

내건 조건이 미인이란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게 그들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인가보다. 예상치도 못한 조건에 나도 모르게 놀라긴 했지만 ... 그 정도 조건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다.

" 그 ... 제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 나름 봐줄만 하거든요 ... "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하게 얘기한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도 모 엔터테인먼트의 대형 사기극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으로 데뷔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이것저것 돈을 가져다 바치다가 결말은 대표의 잠적. 덕분에 빚만 늘어난 나는 지금까지도 이런 시궁창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 ... 그래도 안된다면 그냥 갈께요 ... "

허나 그것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는 별개의 문제, 결국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먼저 물러나려고 했다.

395 이름 없음 (XCFUZkJPNM)

2022-05-23 (모두 수고..) 20:12:00

>>389

주변을 보았을 때, 날 데려온 그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부터 비치는 햇살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고단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 와중에 날 줍다니, 인생 참 힘들게 사는 부류일테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깨지 않게 배려를 한다던가 했겠지만, 내게 그런 마음씀씀이는 없었다. 가차없이 그를 불러 깨우고, 뻔뻔하게 물을 요구했다. 퍼뜩 잠에서 깬 그가 물을 가지러 가고서야 나는 내 손이 그에게 쥐어있었음을 알았다. 손이, 허전해졌으니까.

그는 물이 든 페트병에 빨대를 꽂아서 가져왔다. 자력으로 일어나지 못 하는 나로서는 참 고마운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싶다. 멍청한건가, 다른 속내가 있는 건가. 일단은 물부터 마셔야 할 것 같아, 천천히 마시라는 말에 알아서 할거라고 대꾸하고 고개를 돌려 빨대를 문다. 입술로는 고정이 되질 않아 끝을 약하게 물고 조금씩 조금씩 물을 빨아들인다. 이런 상태에서 뭔가를 먹는 요령은 이미 터득한지 오래였다. 처음엔 입 안을 적시고, 충분해지면 약간씩 목으로 흘려넣어 적시고, 잠시 쉬었다가 한모금씩 넘겨 본격적인 수분 보충으로 이어간다. 작은 페트병의 반 넘는 양을 그렇게 마시고서 물고 있던 빨대를 퉷, 뱉었다. 급격한 물의 섭취로 잠시 호흡이 가팔라졌지만, 정신이 든 지금은 스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신진대사가 돌며 새롭게 느껴지는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만다.

"아, XX, 개같이 아프네, 젠장. 그 XXX들. 죽이려면 제대로 찌르던가."

누가 고문 전문반 아니랄까봐, 통증이 오래갈 부상만 입혀논 듯 하다. 그 중 제일 심한게 옆구리인가. 겨우 손을 움직여 옷 위를 더듬어보자 두툼한 붕대와 거즈로 추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인간이 해놨겠지. 내 시선은 절로 옆으로 굴러가 물통을 대주던 그에게 향했다. 금방이라도 짜증과 불평을 쏟아낼 듯한 눈빛이었지만, 이제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한숨을 내쉰다. 결국 마지막에 목숨 구걸을 한 건 나였는데, 남에게 짜증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짧게 들이키고 내쉬며 한풀 기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아니, 해가 질 때까지만 누워있다 나갈 테니까, 이 이상 나한테 신경쓰지 마. 더 해줘봤자 줄 돈도 없어."

만약 나가서 '까마귀' 녀석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얼마의 돈 정도는 생기겠지만 앞으로 살면서 들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그마저도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내게 지금 있는 건 이 몸뚱이와 걸친 넝마 한 벌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니 내게 베푼 친절을 금액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말해주고 고개를 돌린다. 고개만 돌렸지 다시 잘 생각은 없었다.

396 이름 없음 (ETeCDUJKt2)

2022-05-24 (FIRE!) 02:00:39

>>395

반 정도 비어버린 물병을 테이블 위로 치웠다.
그녀가 물을 마시고 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내뱉은 말은 욕설이었다. 물론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강한 어조의 욕설이 갑작스레 나온다면 누구나 거기에 동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욕설이 나올거라 예상을 한 사람들일테니까.

그나저나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처입어 죽음의 문 앞에서 벌벌 떨던 그런 사람이 욕설을 하며 투덜거리는 모습이란 참 복잡한 광경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구해다 준 사람에게 봇짐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러모로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나도 남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안식을 얻었었다.
이 사람에게 올 삶의 평화는 과연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내가? 아니. 난 그럴 자격은 없을 것이다.

"돈을 노렸으면, 치료를 하진 않았겠죠."

끔찍한 이야기다만, 거리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하고 사례금을 받는 것 보다는 인질로 납치해서 뒷세계에 팔아치우거나 신체부위를 매매하는 것이 돈 자체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정의로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악랄한 짓을 할 정도로 탐욕스럽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사례금이 되었든 그런 더러운 돈이 되었든 그런것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도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상태를 보면 훤히 믿지는 못할 이야기지만, 내 통장 잔고는 명백하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언제 나가시든 상관 없어요. 하루, 뭐 일주일. 평생만 아니면 됩니다. 남는 방을 쓰시면 되니까."

남는 방! 그래. 이 허름해보이는 아파트도 남는 방이라는게 있었다. 싸구려지만 구색은 다 갖춘 집이지만, 나 자신이 특별히 방을 여러개 쓰는 성격도 아닌지라 대충 손님 방 용도로 쓰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서 마시면 미적지근하게 된 맥주도 맛이 난다며 종종 친구들이 오기 때문이다. 혹은 본인들의 배우자로부터 잠깐 피난을 오거나. 그래서 나는 손님이 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거동이 힘든 환자라면야, 편의를 더 봐줄 의향 정도는 있다.

397 이름 없음 (CECijBQdw2)

2022-05-24 (FIRE!) 06:23:31

>>396

"돈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할 만큼 팔자가 좋나보구만."

사례비 같은 건 못 준다 하니, 그는 돈을 노린게 아니라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잇새로 힘 좀 줬다고 칼같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근육통에 XX을 비롯한 욕지거리가 튀어나간다. 이대로는 저녁이고 나발이고, 며칠은 디비져 누워있어야 할 지도 모를 거 같다. 아주 환장하겠네. 이럴 바엔 차라리 그 골목길에서 딴놈들 눈에 띄어 조각나는게 좀더 편안했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욱신거리는 통증은 피폐해진 정신을 차츰 갉아들어간다. 살아있어봤자 변하지 않는 현실은 순간 순간 내 머릿속을 뒤집는다. 에휴 XX. 짧은 욕 한번 내뱉은 나는 참 여유 넘치는 친절 어린 말에 날카로이 가시를 세웠다.

"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그런데 혹시 알아. 잡아뒀다 뒷골목에 수배 떨어지면 냉큼 갖다 바칠지. 저지른게 많아서 모가지에 수배금 꽤나 걸릴 거거든."

전부 시켜서 한 짓들이었고,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내가 양지 쪽에 수배 따위 걸릴 일은 없겠지만, 음지 쪽엔 내가 저지른 일에 원한을 가진 놈들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들이 작정하고 수배를 내린다면 잡히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벌이를 할 수는 있겠지만... 또다시 찾아온 현실의 무게가 내 입에서 헛웃음을 일으켰다. 푸흐, 흐흐흐. 자포자기의 기운이 역력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댁이 갖다 바치든, 잡혀서 들어가든, 어차피 갈 곳은 그 쪽 뿐이네. 그래. 쥐새끼가 살던데서 어떻게 멀어지겠어. 그나마 내 발로 들어가면 덜 힘들겠지..."

시궁창 쥐새끼는 죽을 때까지 시궁창 쥐새끼고, 골목길 고아는 죽을 때까지 뒷골목 고아일 수 밖에 없다. 쥐구멍에 볕 들 날은 사실 쥐를 잡는 불꽃의 빛 말고는 없는거다. 나는 내가 일으킨 불에 스스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어정쩡하게 데여 꼴불견으로 살아남지 말았어야 했다. 분함에 주먹 쥐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더 분해, 버릇이 된 욕지거리를 재차 씹어뱉는다. 이젠 당연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린 나는 싸늘히 식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이. 약값 안 받을거면, 진통제 두통이랑 물 한통만 내 줘. 하루고 일주일이고, 오늘 당장 해만 떨어지면 나가줄테니."

온종일 진통제라도 씹어먹으면 적어도 통증 정도는 느껴지지 않게 되겠지. 그렇게만 되면 칼같이 나가주겠노라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398 이름 없음 (ETeCDUJKt2)

2022-05-24 (FIRE!) 10:26:03

>>397

"철이 들자마자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모래를 씹다보니, 이 나이 되어서도 팔자가 좋아졌죠."

진부한 이야기다. 어차피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똥덩어리보다 아주 미세하게 나은 정도인 국가라지만, 그래도 만리타향 건너가서 사람을 죽이고 온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준 게 있긴 하다. 물론 그것만으로 해결했다기보단 조금 더... 관련 경력을 살린 일을 해 온 결과라고나 할까. 아, 물론 단타성 주식 매매도 한몫 했고.

수배라. 만약 이 사람이 정말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악인이라면 건네주기야 해야겠지. 악독한 범죄자라도 일단 법의 판결 정도는 받아봐야 한다. 물론 그 법이 충분히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엔, 누군가 대신 처벌해주길 바래야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기 때문에 나 홀로 이 사람에게 벌을 주느니 어쩌니 하는건 할 생각 없다. 대신 경찰이 이 사람을 찾는다면, 고려는 해 봐야겠지.
법 집행관들의 눈 밖에 나 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다. 특히나 나같이 살인마 취급이나 받는 퇴역 군인이라면 더더욱.

"그야 상황 따라 다르죠. 세상이 당신의 처벌을 원하고 적법한 절차를 밟는다면, 저같이 법을 지키는 소시민은 건네 드릴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적인 무언가부터,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녀석들이 개인적인 비즈니스 때문에 찾아온다면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순식간에 몸뚱아리에 납덩어리가 처박히는 경험은 살면서 그다지 해보지 않는 편이 나을테니까.

"제가 약사 면허가 있는건 아닌데, 척 봐도 진통제만 먹으며 버티다 나갔다간 그냥 평범한 옥시코돈 중독자, 혹은 그런 삶을 잠시나마 살았던 것으로만 끝날거 같군요."

잠시 화장실로 가 찬장을 뒤지더니, 작은 약병을 두어개 정도 꺼내온다. 그러고서 주방을 들러 생수를 한 병 꺼내와 테이블 앞에 늘어놓는다.
항생제와 진통제. 상처의 감염 위험도 큰 상태에서 진통제만 씹으며 버티다가 패혈증으로 또 드러누울 수도 있으니까.
어쩌다 이런 가엾고 딱한 감정이 슬슬 벗겨져 나가는 인물의 주치의가 되어버린건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구한 이상 최후까지 보살피긴 해야지.

399 이름 없음 (Cl0MATRLOI)

2022-05-24 (FIRE!) 13:51:57

"아까 식량 팔러 온 그 여자애, 너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탁자 위, 얼마 없는 땔감으로 끓인 생강차의 향이 좁은 은신처를 가득 메웠어.
예전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날 위해, 네가 항상 끓여주곤 했었지.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건 고맙지만 글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너도 잘 알텐데.

"그냥 만나주지 그랬어. 굳이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굴 이유는 또 없잖아?"

애써 내 말을 모른 척하는 네게 나는 따지듯 물었어.
여전히 갑갑한 녀석. 맘 같아선 그대로 펀치를 한 대 꽂아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이제 와선 그런 간단한 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네.

"이 얼간아."

왜냐하면 작년 이맘때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그 날.

"너도 이제 그만, 니 삶을 살아야지."

난 좀비가 됐으니까.

바로 네가 보는 앞에서.

//학생 때부터 연애해 온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 (여자 쪽이 선배)
졸업하고 결혼까지 했는데,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지고 남자만 살아 남게 됨.
그래서 지금 남자가 보고 있는 여자는 남자의 환상이라는 설정.

400 이름 없음 (qX3m1dwL2.)

2022-05-24 (FIRE!) 14:59:24

그인가? 아니면 그녀였나? 하여튼 상관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서 화면을 토닥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무언갈 쓰고 싶군. 그는 생각했다. 그래. 써야겠어. 하지만 어떤 걸 쓰지? 그는 자신의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두칙칙하고 재미없는 과거에 대해서도. 그 다음에는 별 것 없는 연애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했더랬지. 마침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이거야. 그 사람에 대해 써야겠다. 의욕을 찾은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첫 문장을 채 쓰지 못하고 지우고, 썼다가, 또다시 지우는 군.

손가락이 굳었다.

역시 이건 아니야. 혼자 글을 쓰면 재미가 없는 걸. 보아 줄 사람도 없고 말이지.

그는 자유상황극에 올라온 글들을 쭉 살펴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퀄리티 높은 글에 내가 감히 무언갈 달 수 있으려고! 그의 안에서 냉엄한 심판자가 소리쳤다. 너는 그냥 구석에서 혼자 네 걸레 조각 같은 전자 찌꺼기나 끄적이라고!

결국 그는 돼지가 씹다 뱉은 사료 부스러기 같은 것을 주절대다가 한숨을 쉬며 작성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401 이름 없음 (CECijBQdw2)

2022-05-24 (FIRE!) 20:29:44

>>398

내가 뒷골목을 구르면서 깨달은 몇가지 중에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사정이란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나 재력이나 권력 따위는 재쳐놓고 인간적인, 개인적인 사정이 하나쯤은 있었다. 하지만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누가, 어떤 사정을 안고 있건, 나는 내게 주어진 일만 했다. 그들의 숱한 비명과 절규에 귀가 먹먹해져도 그저 내가 휘두르는 나이프의 끝만 보며 달렸다. 겨우 연명하는 지금도, 내 시선이 달리 향하는 일은 없다.

"거참 부러운 삶이시구만."

그러니 그가 무슨 고생을 했던 어떤 삶을 살았던 내겐 중요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멀쩡히 이름이 있고, 신분이 있으며, 낡았어도 자신의 집이 있는 민간인이자 이 도시의 시민이다. 그에 반하면 나는 투명인간이다. 이름도 신분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유일하게 가진 이 몸뚱이도 지금은 짐일 뿐이다. 밑바닥에도 그 아래가 있다는 것 역시 살면서 깨우친 몇가지 중 하나였다.

"아이고, 애국심 그득한 소시민 납셨네 아주. 적법한 절차? 세상의 처벌? 웃기고 자빠졌어... 크흑."

나는 약을 가져온 그의 말에 이 악문 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신음이 터질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정신이 멀쩡한 지금은 입술을 깨물어서라도 버틸 수 있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은 나는 소파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순식간에 이마와 등을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지고, 눈앞이 핑 돌았지만 다년간의 경험은 어떻게 해야 이걸 가라앉힐 수 있는지 알았다. 잠시 모포를 쥐어뜯을 듯이 쥐고서 통증과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그가 가져다놓은 약병에 손을 뻗었다. 악으로 고통을 견디기는 해도 손의 떨림까지 막기는 어렵다. 그 탓에 약이 정량보다 많이 나왔지만 그딴거 일일히 샐 여유 따윈 없다. 항생제와 진통제가 여러알 굴러나와 손바닥에 얹어지자, 일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은 그 다음이다. 이번엔 물통의 입구를 입에 대고 조금씩 물과 약을 흘려넘긴다. 빈 속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약을 다 넘긴 나는 물통을 닫아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약병을 집어들었다. 아직 약기운이 돌기 전이었지만, 해도 지지 않았지만, 여길 나갈 생각이었다. 소파에서 다리를 내려 바닥을 딛고서 조금이라도 약기운이 돌기를 바라며 그에게 말한다.

"내가, 이대로 나가서 약쟁이가 되든, 약에 쩔어 어디서 뒤지든, 당신이 뭔 상관인데. 어? 댁이 내 남은 인생 책임져줄거야? 아니잖아? 그럼 좀 싸물어. 날 줏어온 시점에서 자기만족은 다했을거 아니냐고. 이제 뒤져도 최소한 댁 눈 앞에서 뒤지진 않을테니까, 그 엿 같은 주둥이 닫고 살던대로 살아. X 같은 오지랖 두번 부리지 말고, 댁이 그렇게 애끼시는 법 안에서 XX 안전하게 평생 살으시라고."

눈알을 굴리기만 해도 눈가가 뜨끈한 걸 보니 아마 실핏줄이 거하게 터져있겠지. 안 그래도 시뻘건 눈이 더 뻘개져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밑바닥 아래의 나락에서 저 위를 원망하는, 그런 눈빛. 일어나며 깨물었던 입술은 그새 터져서 피가 맺혔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가를 슥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떨렸지만 어떻게든 설 수 있었고, 설 수 있다는 건 걸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고작 일어선 것만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숨은 천천히 고르면 된다. 날 덮고 있던 모포가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다시 주워놓을 생각도 않은 채, 욱신거리는 다리를 다그쳐 걸음을 옮긴다.

402 이름 없음 (mnesxaDp.I)

2022-05-25 (水) 00:24:58

>>401

"훌륭한 삶이죠. 만리타향에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모래가 들어오고, 그 모래먼지 뒤에는 내 목숨을 노리는 반군들이 득실거리고."

이런 삶을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삶이 부러운 애국자거나, 그것마저도 가지지 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순전히 비꼬는 경우거나. 지금은 뒤의 두개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쩌면 두번째겠지.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지만 구급차도 부르지 못하고 골목길에 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법이 절 보호해주고 있으면, 저도 법을 준수해야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의 삶은 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알고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일어나, 빈 속에 약을 복용하는게 아니라 그냥 들이키는 사람을 보며 이대로 뒀다가는 내가 우려한대로 정말 '약쟁이었던 것'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삶을 살다가 죽어가는 꼴이 되도록 놔둔다면, 내가 주워온 의미도 퇴색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뭔가를 제공해주는 수 밖에.

"어차피 행보를 보면 남은 인생이 그렇게까지 길어 보이지도 않는데, 끝까지 책임 한번 져 보죠."

솔직히 그랬다. 세상에 적이 꽤 많아 보이는 인물인지라 언젠가 불가항력으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뇌리에 꽂혔다.
물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해보겠지만,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이 그러기를 원한다면 나로써는 해줄 도리가 없다. 다만 손 닿는 범위 안에서나마 그걸 방지하려 해보는수밖에.
부들대며 겨우겨우 걸어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을 응원해주기도 좀 뭐하므로, 그저 가만히 그녀를 들어올려 다시 소파에 눕힌다.

"일단 그럼 배부터 좀 채우시죠. 뭐 먹고싶은거라도?"

403 이름 없음 (L6eOw65n4M)

2022-05-25 (水) 00:34:54

>>399
“정말? 난 우리 집이랑 물건들 견적 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 오면 쏠거야.”

생강차가 담긴 찻잔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서,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는 자신 앞에, 하나는 자신의 맞은 편에.
피어오르는 연기 뒷편엔, 당신이 앉아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짓고는 본인 몫의 찻잔을 들었다.
정말? 그냥 만나주는 게 좋았을까? 애처로움과 질문이 담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우리, 고등학생 때 기억나? 누나가 그랬잖아. 과한 다정함은 독이 된다고.”

그것은, 그 당시에는 어떤 다른 말보다도 잔인한 말이었다.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의 의사였기에.
생강차 한 모금으로 그 당시의 기억을 말끔히 넘겨버리고,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린다.

“그 때부터야. 내 삶이 중독되어버린건. 이젠 누나 없이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만약 내가 누나의 말대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일거야. 잊을거면 진작에 잊었어. 잊고싶다면 만나지 않았어.”

하지만, 지켜내지 못했다. ─아니, 지금 눈 앞에 있으니 방금 전 문장은 명백한 오류다. 미간이 지끈거린다. 생강향이 너무 짙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해줘.”

404 이름 없음 (q6LDhBtS5g)

2022-05-25 (水) 01:25:10

>>403
찻잔은 들지 않았어.
그저 눈 앞에서 차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
문득 이걸 한 모금만 마시면, 금방이라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도 드네.
이제는 멀어져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년, 재작년, 그리고 너와 처음 함께했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도.
하지만 그런 기적을 바라기엔, 이미 우린 너무 많은 소원을 빌어버린 걸지도 몰라.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좀 잊어, 그런 건."

잊어야지. 전부 잊어 주지 않으면 곤란해.
나와의 추억, 같이 즐겁고 슬퍼했었던 그 모든 일들을 넌 천천히 하나둘씩 잊어 가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 네 앞에 길이 열릴 테니까.

"...."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난 바로 네 앞에 앉아 있지만, 사실 아주 멀리 있어서 뺨에 손을 대주는 것도 해 줄 수 없어.
귀여운 강아지처럼 내 옆에서 우쭐대던 니 얼굴을 찐빵 만지는 듯이 마구 주물러 대는 것도 꽤 즐거웠었는데.
그 때 생각을 하니, 괜히 아릿하면서도 가슴이 저려 와.

"얼간이."

답답하게 웃음을 짓고, 먹먹하게 널 욕해.

"난 니가 이래서 싫어."

설령 그 말이 네겐 닿지 않을지라도.

405 이름 없음 (T5nnk1cwzU)

2022-05-25 (水) 03:02:36

>>402

그가 과거 무슨 일을 했건, 어쩌다 모래먼지 속에서 반군들과 싸웠건, 하나도 관심 없다. 잘난 법에 보호 받으며 사는 인간 따위, 나와는 인연이 없을게 분명했다. 어쩌다 지금처럼 엮여도 결국 스쳐가는 헤프닝으로 금방 잊혀질 거다. 나만이 오늘을 끝없이 저주하고 원망하며 차가운 길바닥 어딘가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가겠지. 그게 그와 나의 사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더는 엮일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난 나갈 거ㅇ-!?"

끝까지 거슬리는 소리만 해대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그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 간신히 돌기 시작한 약기운 덕분에 제대로 걸음을 떼려고 했으나,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소파 위로 되돌려졌다. 애써 일어나서 자세를 잡은게 전부 허사가 됐다. 소파에 눕혀지자 곧장 몰려오는 피로감과 통증의 하모니는 적어도 몇시간은 다시 일어날 엄두도 못 낼 수준이다. 내 노력을 허망하게 무너뜨린 그를 노려보는 눈가가 문득 시큰해진다. 왜, 내 인생은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일까. 왜, 왜, 답 나오지 않는 자문자답이 머릿속을 메아리치고, 나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을 듯이 주먹을 쥐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뭐냐고 XX! 이 X이고 저 X놈이고 지들 맘대로 날 주웠다 버렸다! 책임을 져? 당신도 뻔하지, 질리면 내다 버릴 거잖아! 당신이라고 다를 거 같아? 인간 다 똑같아! XX! 아무도, 아무도 날 버리지 않은 XX가 없는데! XX!"

태연하게 배부터 채우자는 그를 향해 애꿎은 화를 쏟아낸다. 아주 애먼 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과한 건 맞다. 그런 말들을 하면 그가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상관 없다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버림 받을거, 지금이 됐든 나중이 됐든, 결과는 같을테니. XX! 겨우 나아진 목을 다시 찢을 기세로 소리를 지른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웅크렸다. 가쁜 숨과 통증으로 몸을 부들거리면서도, 팔과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며 웅크리고서 단 한마디, 그렇게 내뱉었다.

"안 보일 때 알아서 기어나갈거니까, 내버려 둬."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약은 먹을만치 먹었으니,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밤이 되면 기회를 노려 나갈 것이다. 더는,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믿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406 이름 없음 (mnesxaDp.I)

2022-05-25 (水) 07:08:45

>>405

"질리면 내다 버리는게 아니라, 회복 되면 사회로 복귀시킬겁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겪었길래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가 많겠지. 평소 자주 찾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기 손으로 다 없애버렸다는 그치들이 자신을 버렸고, 그래서 싸움이라도 일어난거겠지. 마치 영화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곳에서 영화의 시놉시스로나 나올만한 일이 이 거리에선 논픽션으로 벌어지고 있다. 슬픈 세상이다.
나도 한때는 그 세상의 슬픔에 휩싸여, 빠져나갈 구석조차 없었고.

단순한 친절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지금의 나는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할까봐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다. 그러나 자각하는 것과 죄책감을 이겨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미 이것과 비슷한 일의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칼을 맞거나 약에 쩔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어디도 날 받아줄 데가 없으며, 세상에는 내 자리가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마음을 다친 인간에겐 의외로 원시적인 방법이 통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아마 지금 그녀도 상당히 시장할 것이다. 부상을 회복하느라 체력을 소진한데다 공복인데, 사람이 어떻게 힘이 나겠는가.
잠깐 전화로 음식을 주문한 뒤에, 다시 이 딱한 짐승과 같은 사람의 곁으로 와 웅크린 어깨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믿을 구석이 생긴다는건 생각보다 많이 두려운 일이죠."

니가 뭘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그랬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당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
한때는 정말 모든 것에서 버려졌으니까. 심지어는 내가 목숨을 바친 조국에게조차. 그런 때에 나를 구원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 사람처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더할나위 없던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구하긴 커녕, 마주칠 일 조차 없었을 것이다.

407 이름 없음 (T5nnk1cwzU)

2022-05-25 (水) 17:37:42

>>406

모짐을 넘어 무례한 소리까지 퍼부었는데도, 그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전의 조직에선 반항할라치면 당장 배부터 걷어차이고 독방에 갇히기 일쑤였는데, 그는 온갖 욕지거리에 애꿎은 소리를 들었는데도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가와 내가 바닥으로 떨어뜨렸던 모포를 다시 덮어주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평온하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얼굴을 가린 채로 눈을 떴다가, 모포를 끌어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얄팍한 한겹 너머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닥치고 내버려 둬. 당신 따위 믿을 일 없어."

믿어서 다시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이제 더는 겪고 싶지 않다. 더는, 생에 무엇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 절망은 언제나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죽지 못한 지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는 이전까지와 다른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정말로 내게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언제 잃을지 모를 것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건 사양이다. 죽지 못 한 지금의 나는 그저 지쳤을 뿐이었다.

"처음이었다면..."

어쩌면, 그가 내 믿음의 시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부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은 헛된 날숨과 함께 흩어진다. 나조차도 겨우 들릴만치 나오던 중얼거림은 숨결에 섞여 끝을 흐린다. 다 부질없다. 무엇을 생각하든 전부 의미없고, 쓸모없으며, 헛된 것들이다. 뿌리 없는 내가 이만치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이 이상 바랄 자격 따위 내게 없다. 그래, 내겐 자격이 없지...

깨지지 않는 알껍질 속에서 썩어가듯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낫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고 약까지 잔뜩 집어넣었으니 여태 깨어있던게 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약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대로 잠들어 스스로 숨을 거둘 셈인지, 해가 지고 달이 떠 시간이 한밤중이 되어도, 내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그가 깨우는 일이 없다면 더욱 그랬겠지.

408 이름 없음 (L6eOw65n4M)

2022-05-25 (水) 20:24:57

>>404
언제까지고 같이할 거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는 서로가 서로의 입에 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나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은 한결 같았다.
문득, 고갤 들어 좌측의 거울을 바라본다. 퀭한 인상의 자신. 비춰지지 않는 당신.
분명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 있음에도.

“왜, 부끄러워? 좀 더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예를 들어, 우리 여름방학 때 계곡에 놀러갔을 때 같은. 펜션 아주머니가 그랬잖아. 신혼부부 같다고. 그래서 난 누나보고 자기라고 불렀다가 한 대 얻어맞았고. 그때도 그랬지만, 누나는 항상 망설이고 있었지. 나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는데도.”

당신의 망설임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안다. 당신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속에 담긴 것을 털어놓듯이 편하게 웃고는,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당신이 만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의 표현. 어릴 적부터 고쳐지지 않은, 사소한 애교다.

“이런 얼간이가 좋다고 해준게 누군데.”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과거의 단편들. 스쳐지나가는 필름. 목소리.

“그럼 좀 더 노력해야겠네. 이래뵈도 유부남인지라.”

농을 섞어 대답한다.

409 이름 없음 (vdrnx3/hOg)

2022-05-25 (水) 21:39:21

>>400 그는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다이어트 중이었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초콜릿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될 대로 되라지, 뭐. 그는 초콜릿을 우둑우둑 씹으며 모든 것을 놓았다. 되는 일이 없어. 세상 따위 멸망했으면 좋겠다. 아냐. 나 하나 멸망하면 깨끗하게 끝나겠구나. 그는 간만하에 가벼운 우울을 앓으며 계속해서 초콜릿을 씹고, 뜯고, 삼켰다. 일련의 동작들은 혀끝에 감미로운 단맛을 발생시켰으나 그것은 끔찍하게 맛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초콜릿을 먹음으로써 일종의 자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과 감각, 그리고 정신 모두에 말이다.

나름대로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군. 그의 이빨 끝에서 초콜릿이 부서졌다. 하긴 그럴만 했어. 개 항문낭에서 나온 분비물보다도 못한 글이었지. 이걸로 내 상황극 청춘도 명운이 다한 모양이지. 그는 자가 인지치료 책을 발가락 끝으로 밀쳐냈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준다며 정평이 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읽겠다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애송이처럼 동네방네 떠들어댔고 그를 아는 모두는 그가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기대감을 갖게 된 차였다. 그게 바로 요즘 내가 저지른 가장 쓰레기같은 일이었지. 이제 모두 상관없어. 망해버려라! 그는 잔 대신 휴대폰을 높이 들어 끝난지 한참 된 제 청춘에게 마지막 인사 겸 건배 겸 들리지 않는 장송곡의 연주를 했다. 잘 가라! 이제는 더이상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 수 있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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