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390 이름 없음 (gD8h2r62qg)

2022-05-23 (모두 수고..) 12:55:41

>>388

당신의 옆쪽에 미동없이 앉아있던 여성은 눈동자만 굴려 당신을 바라보다,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적막. 교장실 구석의 미니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너? 말썽쟁이. 멍청이. 바보."

여성은 톡 쏘듯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신랄한 대답 끝에, 여성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걱정만 끼치는 놈."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파우치에서 물티슈와 반창고를 꺼내었다. 여성은 익숙하다는 듯, 당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왜 싸웠어?"

/ 캐릭터가 학생인 것 같아서 일단 상대캐는 같은 반 반장으로 설정했어~ 설정오류면 말해줘!

391 이름 없음 (awo1YlitAY)

2022-05-23 (모두 수고..) 15:05:05

‘반려인간 구합니다. 숙식 제공 가능합니다. 010-0000-0000’

흡혈귀, 뱀파이어, 드라큘라.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들은 존재했다. 반려 인간과 짝을 지어 평생 그 한 사람만 흡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자리 잡은 지금은 딱히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송곳니가 날카롭고 귀가 뾰족한 그들은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갖고 있고, 반려 인간에게 그 힘의 일부를 내어준다. 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는 반려인간 공고 전단을 돌리고 있다. 귀가 둥근데 전단지 내밀며 웃는 것을 보아하니 이는 날카롭다. 당신에게도 종이 한 장을 건넨다.

392 이름 없음 (xnNjr8UxtE)

2022-05-23 (모두 수고..) 15:33:14

>>391

장밋빛 인생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나만 빼고 다른 모두들은 쉬운 인생을 살아가는게 아닐까. 오늘도 겨우 이자만 갚을 수 있었고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그저 한달을 겨우 풀칠할 수 있는 돈이다.

그렇게 내일을 걱정하며 걸어가던 중 전단지를 내밀어오는 손이 쑥 앞으로 들어온다. 반려인간, 인간과 그것들 간의 평화적인 협상 이후 새롭게 정착된 제도로 누구나 할 거 없이 피를 빠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상대만 흡혈할 수 있는 제도.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건강한 상대를 찾기에 나는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 ... 혹시 다른 조건은 안보시나요? "

하지만 당장 내 인생이 절벽 끝자락에서 반쯤 발을 내밀고 떨어져? 나 떨어진다? 라고 협박하는 와중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일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받은 전단지를 잠깐 바라보고 이것을 나누어주는 여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본 것이다.

" 숙식 제공만 해주시면 어떤걸 시키셔도 상관 없습니다. "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내 인생이.

393 이름 없음 (lyYmX5pEjg)

2022-05-23 (모두 수고..) 16:58:53

>>392

“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지만 전단지가 효과 있을거란 기대는 했다. 전단지에 적어둔 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다니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본다. 정말로 반려 인간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조건에 대해 말해주는게 맞다. 전단지로 얻어맞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서 말한다.

“불쾌하실 수도 있는데… 미인이요.”

인간도 이왕 먹을 것이라면 보기 좋게 예쁜 것을 좋아하는데 인간의 피를 먹는 흡혈귀도 보기 좋게 예쁜 인간의 피가 먹고 싶을 수 있는 거다. 이 여자는 취향이 너무 확고해서 문제다. 안 그래도 반려 인간 구하기는 까다로운데 이 때문에 더 고생하고 있다. 전단에 미인만 연락해달라고 적으려다 아무래도 욕 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니 지금 욕 먹을 차례라 생각하며 당신을 흘끗 바라본다.

394 이름 없음 (RPjS6ejax2)

2022-05-23 (모두 수고..) 18:23:57

>>393

상대방도 분명 잘 구해지지 않으니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계산도 분명히 깔아두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수는 많은데 비해서 그것들의 수는 적기 때문에 반려인간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이다. 본인에게도 무언가 제한되는 사항이 있는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

" 네? "

내건 조건이 미인이란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게 그들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인가보다. 예상치도 못한 조건에 나도 모르게 놀라긴 했지만 ... 그 정도 조건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다.

" 그 ... 제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 나름 봐줄만 하거든요 ... "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하게 얘기한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도 모 엔터테인먼트의 대형 사기극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으로 데뷔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이것저것 돈을 가져다 바치다가 결말은 대표의 잠적. 덕분에 빚만 늘어난 나는 지금까지도 이런 시궁창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 ... 그래도 안된다면 그냥 갈께요 ... "

허나 그것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는 별개의 문제, 결국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먼저 물러나려고 했다.

395 이름 없음 (XCFUZkJPNM)

2022-05-23 (모두 수고..) 20:12:00

>>389

주변을 보았을 때, 날 데려온 그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부터 비치는 햇살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고단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 와중에 날 줍다니, 인생 참 힘들게 사는 부류일테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깨지 않게 배려를 한다던가 했겠지만, 내게 그런 마음씀씀이는 없었다. 가차없이 그를 불러 깨우고, 뻔뻔하게 물을 요구했다. 퍼뜩 잠에서 깬 그가 물을 가지러 가고서야 나는 내 손이 그에게 쥐어있었음을 알았다. 손이, 허전해졌으니까.

그는 물이 든 페트병에 빨대를 꽂아서 가져왔다. 자력으로 일어나지 못 하는 나로서는 참 고마운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싶다. 멍청한건가, 다른 속내가 있는 건가. 일단은 물부터 마셔야 할 것 같아, 천천히 마시라는 말에 알아서 할거라고 대꾸하고 고개를 돌려 빨대를 문다. 입술로는 고정이 되질 않아 끝을 약하게 물고 조금씩 조금씩 물을 빨아들인다. 이런 상태에서 뭔가를 먹는 요령은 이미 터득한지 오래였다. 처음엔 입 안을 적시고, 충분해지면 약간씩 목으로 흘려넣어 적시고, 잠시 쉬었다가 한모금씩 넘겨 본격적인 수분 보충으로 이어간다. 작은 페트병의 반 넘는 양을 그렇게 마시고서 물고 있던 빨대를 퉷, 뱉었다. 급격한 물의 섭취로 잠시 호흡이 가팔라졌지만, 정신이 든 지금은 스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신진대사가 돌며 새롭게 느껴지는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만다.

"아, XX, 개같이 아프네, 젠장. 그 XXX들. 죽이려면 제대로 찌르던가."

누가 고문 전문반 아니랄까봐, 통증이 오래갈 부상만 입혀논 듯 하다. 그 중 제일 심한게 옆구리인가. 겨우 손을 움직여 옷 위를 더듬어보자 두툼한 붕대와 거즈로 추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인간이 해놨겠지. 내 시선은 절로 옆으로 굴러가 물통을 대주던 그에게 향했다. 금방이라도 짜증과 불평을 쏟아낼 듯한 눈빛이었지만, 이제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한숨을 내쉰다. 결국 마지막에 목숨 구걸을 한 건 나였는데, 남에게 짜증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짧게 들이키고 내쉬며 한풀 기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아니, 해가 질 때까지만 누워있다 나갈 테니까, 이 이상 나한테 신경쓰지 마. 더 해줘봤자 줄 돈도 없어."

만약 나가서 '까마귀' 녀석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얼마의 돈 정도는 생기겠지만 앞으로 살면서 들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그마저도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내게 지금 있는 건 이 몸뚱이와 걸친 넝마 한 벌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니 내게 베푼 친절을 금액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말해주고 고개를 돌린다. 고개만 돌렸지 다시 잘 생각은 없었다.

396 이름 없음 (ETeCDUJKt2)

2022-05-24 (FIRE!) 02:00:39

>>395

반 정도 비어버린 물병을 테이블 위로 치웠다.
그녀가 물을 마시고 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내뱉은 말은 욕설이었다. 물론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강한 어조의 욕설이 갑작스레 나온다면 누구나 거기에 동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욕설이 나올거라 예상을 한 사람들일테니까.

그나저나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처입어 죽음의 문 앞에서 벌벌 떨던 그런 사람이 욕설을 하며 투덜거리는 모습이란 참 복잡한 광경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구해다 준 사람에게 봇짐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러모로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나도 남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안식을 얻었었다.
이 사람에게 올 삶의 평화는 과연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내가? 아니. 난 그럴 자격은 없을 것이다.

"돈을 노렸으면, 치료를 하진 않았겠죠."

끔찍한 이야기다만, 거리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하고 사례금을 받는 것 보다는 인질로 납치해서 뒷세계에 팔아치우거나 신체부위를 매매하는 것이 돈 자체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정의로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악랄한 짓을 할 정도로 탐욕스럽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사례금이 되었든 그런 더러운 돈이 되었든 그런것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도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상태를 보면 훤히 믿지는 못할 이야기지만, 내 통장 잔고는 명백하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언제 나가시든 상관 없어요. 하루, 뭐 일주일. 평생만 아니면 됩니다. 남는 방을 쓰시면 되니까."

남는 방! 그래. 이 허름해보이는 아파트도 남는 방이라는게 있었다. 싸구려지만 구색은 다 갖춘 집이지만, 나 자신이 특별히 방을 여러개 쓰는 성격도 아닌지라 대충 손님 방 용도로 쓰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서 마시면 미적지근하게 된 맥주도 맛이 난다며 종종 친구들이 오기 때문이다. 혹은 본인들의 배우자로부터 잠깐 피난을 오거나. 그래서 나는 손님이 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거동이 힘든 환자라면야, 편의를 더 봐줄 의향 정도는 있다.

397 이름 없음 (CECijBQdw2)

2022-05-24 (FIRE!) 06:23:31

>>396

"돈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할 만큼 팔자가 좋나보구만."

사례비 같은 건 못 준다 하니, 그는 돈을 노린게 아니라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잇새로 힘 좀 줬다고 칼같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근육통에 XX을 비롯한 욕지거리가 튀어나간다. 이대로는 저녁이고 나발이고, 며칠은 디비져 누워있어야 할 지도 모를 거 같다. 아주 환장하겠네. 이럴 바엔 차라리 그 골목길에서 딴놈들 눈에 띄어 조각나는게 좀더 편안했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욱신거리는 통증은 피폐해진 정신을 차츰 갉아들어간다. 살아있어봤자 변하지 않는 현실은 순간 순간 내 머릿속을 뒤집는다. 에휴 XX. 짧은 욕 한번 내뱉은 나는 참 여유 넘치는 친절 어린 말에 날카로이 가시를 세웠다.

"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그런데 혹시 알아. 잡아뒀다 뒷골목에 수배 떨어지면 냉큼 갖다 바칠지. 저지른게 많아서 모가지에 수배금 꽤나 걸릴 거거든."

전부 시켜서 한 짓들이었고,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내가 양지 쪽에 수배 따위 걸릴 일은 없겠지만, 음지 쪽엔 내가 저지른 일에 원한을 가진 놈들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들이 작정하고 수배를 내린다면 잡히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벌이를 할 수는 있겠지만... 또다시 찾아온 현실의 무게가 내 입에서 헛웃음을 일으켰다. 푸흐, 흐흐흐. 자포자기의 기운이 역력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댁이 갖다 바치든, 잡혀서 들어가든, 어차피 갈 곳은 그 쪽 뿐이네. 그래. 쥐새끼가 살던데서 어떻게 멀어지겠어. 그나마 내 발로 들어가면 덜 힘들겠지..."

시궁창 쥐새끼는 죽을 때까지 시궁창 쥐새끼고, 골목길 고아는 죽을 때까지 뒷골목 고아일 수 밖에 없다. 쥐구멍에 볕 들 날은 사실 쥐를 잡는 불꽃의 빛 말고는 없는거다. 나는 내가 일으킨 불에 스스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어정쩡하게 데여 꼴불견으로 살아남지 말았어야 했다. 분함에 주먹 쥐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더 분해, 버릇이 된 욕지거리를 재차 씹어뱉는다. 이젠 당연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린 나는 싸늘히 식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이. 약값 안 받을거면, 진통제 두통이랑 물 한통만 내 줘. 하루고 일주일이고, 오늘 당장 해만 떨어지면 나가줄테니."

온종일 진통제라도 씹어먹으면 적어도 통증 정도는 느껴지지 않게 되겠지. 그렇게만 되면 칼같이 나가주겠노라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398 이름 없음 (ETeCDUJKt2)

2022-05-24 (FIRE!) 10:26:03

>>397

"철이 들자마자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모래를 씹다보니, 이 나이 되어서도 팔자가 좋아졌죠."

진부한 이야기다. 어차피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똥덩어리보다 아주 미세하게 나은 정도인 국가라지만, 그래도 만리타향 건너가서 사람을 죽이고 온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준 게 있긴 하다. 물론 그것만으로 해결했다기보단 조금 더... 관련 경력을 살린 일을 해 온 결과라고나 할까. 아, 물론 단타성 주식 매매도 한몫 했고.

수배라. 만약 이 사람이 정말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악인이라면 건네주기야 해야겠지. 악독한 범죄자라도 일단 법의 판결 정도는 받아봐야 한다. 물론 그 법이 충분히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엔, 누군가 대신 처벌해주길 바래야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기 때문에 나 홀로 이 사람에게 벌을 주느니 어쩌니 하는건 할 생각 없다. 대신 경찰이 이 사람을 찾는다면, 고려는 해 봐야겠지.
법 집행관들의 눈 밖에 나 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다. 특히나 나같이 살인마 취급이나 받는 퇴역 군인이라면 더더욱.

"그야 상황 따라 다르죠. 세상이 당신의 처벌을 원하고 적법한 절차를 밟는다면, 저같이 법을 지키는 소시민은 건네 드릴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적인 무언가부터,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녀석들이 개인적인 비즈니스 때문에 찾아온다면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순식간에 몸뚱아리에 납덩어리가 처박히는 경험은 살면서 그다지 해보지 않는 편이 나을테니까.

"제가 약사 면허가 있는건 아닌데, 척 봐도 진통제만 먹으며 버티다 나갔다간 그냥 평범한 옥시코돈 중독자, 혹은 그런 삶을 잠시나마 살았던 것으로만 끝날거 같군요."

잠시 화장실로 가 찬장을 뒤지더니, 작은 약병을 두어개 정도 꺼내온다. 그러고서 주방을 들러 생수를 한 병 꺼내와 테이블 앞에 늘어놓는다.
항생제와 진통제. 상처의 감염 위험도 큰 상태에서 진통제만 씹으며 버티다가 패혈증으로 또 드러누울 수도 있으니까.
어쩌다 이런 가엾고 딱한 감정이 슬슬 벗겨져 나가는 인물의 주치의가 되어버린건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구한 이상 최후까지 보살피긴 해야지.

399 이름 없음 (Cl0MATRLOI)

2022-05-24 (FIRE!) 13:51:57

"아까 식량 팔러 온 그 여자애, 너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탁자 위, 얼마 없는 땔감으로 끓인 생강차의 향이 좁은 은신처를 가득 메웠어.
예전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날 위해, 네가 항상 끓여주곤 했었지.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건 고맙지만 글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너도 잘 알텐데.

"그냥 만나주지 그랬어. 굳이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굴 이유는 또 없잖아?"

애써 내 말을 모른 척하는 네게 나는 따지듯 물었어.
여전히 갑갑한 녀석. 맘 같아선 그대로 펀치를 한 대 꽂아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이제 와선 그런 간단한 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네.

"이 얼간아."

왜냐하면 작년 이맘때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그 날.

"너도 이제 그만, 니 삶을 살아야지."

난 좀비가 됐으니까.

바로 네가 보는 앞에서.

//학생 때부터 연애해 온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 (여자 쪽이 선배)
졸업하고 결혼까지 했는데,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지고 남자만 살아 남게 됨.
그래서 지금 남자가 보고 있는 여자는 남자의 환상이라는 설정.

400 이름 없음 (qX3m1dwL2.)

2022-05-24 (FIRE!) 14:59:24

그인가? 아니면 그녀였나? 하여튼 상관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서 화면을 토닥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무언갈 쓰고 싶군. 그는 생각했다. 그래. 써야겠어. 하지만 어떤 걸 쓰지? 그는 자신의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두칙칙하고 재미없는 과거에 대해서도. 그 다음에는 별 것 없는 연애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했더랬지. 마침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이거야. 그 사람에 대해 써야겠다. 의욕을 찾은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첫 문장을 채 쓰지 못하고 지우고, 썼다가, 또다시 지우는 군.

손가락이 굳었다.

역시 이건 아니야. 혼자 글을 쓰면 재미가 없는 걸. 보아 줄 사람도 없고 말이지.

그는 자유상황극에 올라온 글들을 쭉 살펴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퀄리티 높은 글에 내가 감히 무언갈 달 수 있으려고! 그의 안에서 냉엄한 심판자가 소리쳤다. 너는 그냥 구석에서 혼자 네 걸레 조각 같은 전자 찌꺼기나 끄적이라고!

결국 그는 돼지가 씹다 뱉은 사료 부스러기 같은 것을 주절대다가 한숨을 쉬며 작성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401 이름 없음 (CECijBQdw2)

2022-05-24 (FIRE!) 20:29:44

>>398

내가 뒷골목을 구르면서 깨달은 몇가지 중에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사정이란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나 재력이나 권력 따위는 재쳐놓고 인간적인, 개인적인 사정이 하나쯤은 있었다. 하지만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누가, 어떤 사정을 안고 있건, 나는 내게 주어진 일만 했다. 그들의 숱한 비명과 절규에 귀가 먹먹해져도 그저 내가 휘두르는 나이프의 끝만 보며 달렸다. 겨우 연명하는 지금도, 내 시선이 달리 향하는 일은 없다.

"거참 부러운 삶이시구만."

그러니 그가 무슨 고생을 했던 어떤 삶을 살았던 내겐 중요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멀쩡히 이름이 있고, 신분이 있으며, 낡았어도 자신의 집이 있는 민간인이자 이 도시의 시민이다. 그에 반하면 나는 투명인간이다. 이름도 신분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유일하게 가진 이 몸뚱이도 지금은 짐일 뿐이다. 밑바닥에도 그 아래가 있다는 것 역시 살면서 깨우친 몇가지 중 하나였다.

"아이고, 애국심 그득한 소시민 납셨네 아주. 적법한 절차? 세상의 처벌? 웃기고 자빠졌어... 크흑."

나는 약을 가져온 그의 말에 이 악문 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신음이 터질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정신이 멀쩡한 지금은 입술을 깨물어서라도 버틸 수 있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은 나는 소파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순식간에 이마와 등을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지고, 눈앞이 핑 돌았지만 다년간의 경험은 어떻게 해야 이걸 가라앉힐 수 있는지 알았다. 잠시 모포를 쥐어뜯을 듯이 쥐고서 통증과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그가 가져다놓은 약병에 손을 뻗었다. 악으로 고통을 견디기는 해도 손의 떨림까지 막기는 어렵다. 그 탓에 약이 정량보다 많이 나왔지만 그딴거 일일히 샐 여유 따윈 없다. 항생제와 진통제가 여러알 굴러나와 손바닥에 얹어지자, 일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은 그 다음이다. 이번엔 물통의 입구를 입에 대고 조금씩 물과 약을 흘려넘긴다. 빈 속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약을 다 넘긴 나는 물통을 닫아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약병을 집어들었다. 아직 약기운이 돌기 전이었지만, 해도 지지 않았지만, 여길 나갈 생각이었다. 소파에서 다리를 내려 바닥을 딛고서 조금이라도 약기운이 돌기를 바라며 그에게 말한다.

"내가, 이대로 나가서 약쟁이가 되든, 약에 쩔어 어디서 뒤지든, 당신이 뭔 상관인데. 어? 댁이 내 남은 인생 책임져줄거야? 아니잖아? 그럼 좀 싸물어. 날 줏어온 시점에서 자기만족은 다했을거 아니냐고. 이제 뒤져도 최소한 댁 눈 앞에서 뒤지진 않을테니까, 그 엿 같은 주둥이 닫고 살던대로 살아. X 같은 오지랖 두번 부리지 말고, 댁이 그렇게 애끼시는 법 안에서 XX 안전하게 평생 살으시라고."

눈알을 굴리기만 해도 눈가가 뜨끈한 걸 보니 아마 실핏줄이 거하게 터져있겠지. 안 그래도 시뻘건 눈이 더 뻘개져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밑바닥 아래의 나락에서 저 위를 원망하는, 그런 눈빛. 일어나며 깨물었던 입술은 그새 터져서 피가 맺혔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가를 슥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떨렸지만 어떻게든 설 수 있었고, 설 수 있다는 건 걸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고작 일어선 것만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숨은 천천히 고르면 된다. 날 덮고 있던 모포가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다시 주워놓을 생각도 않은 채, 욱신거리는 다리를 다그쳐 걸음을 옮긴다.

402 이름 없음 (mnesxaDp.I)

2022-05-25 (水) 00:24:58

>>401

"훌륭한 삶이죠. 만리타향에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모래가 들어오고, 그 모래먼지 뒤에는 내 목숨을 노리는 반군들이 득실거리고."

이런 삶을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삶이 부러운 애국자거나, 그것마저도 가지지 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순전히 비꼬는 경우거나. 지금은 뒤의 두개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쩌면 두번째겠지.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지만 구급차도 부르지 못하고 골목길에 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법이 절 보호해주고 있으면, 저도 법을 준수해야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의 삶은 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알고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일어나, 빈 속에 약을 복용하는게 아니라 그냥 들이키는 사람을 보며 이대로 뒀다가는 내가 우려한대로 정말 '약쟁이었던 것'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삶을 살다가 죽어가는 꼴이 되도록 놔둔다면, 내가 주워온 의미도 퇴색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뭔가를 제공해주는 수 밖에.

"어차피 행보를 보면 남은 인생이 그렇게까지 길어 보이지도 않는데, 끝까지 책임 한번 져 보죠."

솔직히 그랬다. 세상에 적이 꽤 많아 보이는 인물인지라 언젠가 불가항력으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뇌리에 꽂혔다.
물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해보겠지만,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이 그러기를 원한다면 나로써는 해줄 도리가 없다. 다만 손 닿는 범위 안에서나마 그걸 방지하려 해보는수밖에.
부들대며 겨우겨우 걸어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을 응원해주기도 좀 뭐하므로, 그저 가만히 그녀를 들어올려 다시 소파에 눕힌다.

"일단 그럼 배부터 좀 채우시죠. 뭐 먹고싶은거라도?"

403 이름 없음 (L6eOw65n4M)

2022-05-25 (水) 00:34:54

>>399
“정말? 난 우리 집이랑 물건들 견적 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 오면 쏠거야.”

생강차가 담긴 찻잔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서,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는 자신 앞에, 하나는 자신의 맞은 편에.
피어오르는 연기 뒷편엔, 당신이 앉아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짓고는 본인 몫의 찻잔을 들었다.
정말? 그냥 만나주는 게 좋았을까? 애처로움과 질문이 담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우리, 고등학생 때 기억나? 누나가 그랬잖아. 과한 다정함은 독이 된다고.”

그것은, 그 당시에는 어떤 다른 말보다도 잔인한 말이었다.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의 의사였기에.
생강차 한 모금으로 그 당시의 기억을 말끔히 넘겨버리고,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린다.

“그 때부터야. 내 삶이 중독되어버린건. 이젠 누나 없이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만약 내가 누나의 말대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일거야. 잊을거면 진작에 잊었어. 잊고싶다면 만나지 않았어.”

하지만, 지켜내지 못했다. ─아니, 지금 눈 앞에 있으니 방금 전 문장은 명백한 오류다. 미간이 지끈거린다. 생강향이 너무 짙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해줘.”

404 이름 없음 (q6LDhBtS5g)

2022-05-25 (水) 01:25:10

>>403
찻잔은 들지 않았어.
그저 눈 앞에서 차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
문득 이걸 한 모금만 마시면, 금방이라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도 드네.
이제는 멀어져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년, 재작년, 그리고 너와 처음 함께했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도.
하지만 그런 기적을 바라기엔, 이미 우린 너무 많은 소원을 빌어버린 걸지도 몰라.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좀 잊어, 그런 건."

잊어야지. 전부 잊어 주지 않으면 곤란해.
나와의 추억, 같이 즐겁고 슬퍼했었던 그 모든 일들을 넌 천천히 하나둘씩 잊어 가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 네 앞에 길이 열릴 테니까.

"...."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난 바로 네 앞에 앉아 있지만, 사실 아주 멀리 있어서 뺨에 손을 대주는 것도 해 줄 수 없어.
귀여운 강아지처럼 내 옆에서 우쭐대던 니 얼굴을 찐빵 만지는 듯이 마구 주물러 대는 것도 꽤 즐거웠었는데.
그 때 생각을 하니, 괜히 아릿하면서도 가슴이 저려 와.

"얼간이."

답답하게 웃음을 짓고, 먹먹하게 널 욕해.

"난 니가 이래서 싫어."

설령 그 말이 네겐 닿지 않을지라도.

405 이름 없음 (T5nnk1cwzU)

2022-05-25 (水) 03:02:36

>>402

그가 과거 무슨 일을 했건, 어쩌다 모래먼지 속에서 반군들과 싸웠건, 하나도 관심 없다. 잘난 법에 보호 받으며 사는 인간 따위, 나와는 인연이 없을게 분명했다. 어쩌다 지금처럼 엮여도 결국 스쳐가는 헤프닝으로 금방 잊혀질 거다. 나만이 오늘을 끝없이 저주하고 원망하며 차가운 길바닥 어딘가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가겠지. 그게 그와 나의 사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더는 엮일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난 나갈 거ㅇ-!?"

끝까지 거슬리는 소리만 해대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그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 간신히 돌기 시작한 약기운 덕분에 제대로 걸음을 떼려고 했으나,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소파 위로 되돌려졌다. 애써 일어나서 자세를 잡은게 전부 허사가 됐다. 소파에 눕혀지자 곧장 몰려오는 피로감과 통증의 하모니는 적어도 몇시간은 다시 일어날 엄두도 못 낼 수준이다. 내 노력을 허망하게 무너뜨린 그를 노려보는 눈가가 문득 시큰해진다. 왜, 내 인생은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일까. 왜, 왜, 답 나오지 않는 자문자답이 머릿속을 메아리치고, 나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을 듯이 주먹을 쥐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뭐냐고 XX! 이 X이고 저 X놈이고 지들 맘대로 날 주웠다 버렸다! 책임을 져? 당신도 뻔하지, 질리면 내다 버릴 거잖아! 당신이라고 다를 거 같아? 인간 다 똑같아! XX! 아무도, 아무도 날 버리지 않은 XX가 없는데! XX!"

태연하게 배부터 채우자는 그를 향해 애꿎은 화를 쏟아낸다. 아주 애먼 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과한 건 맞다. 그런 말들을 하면 그가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상관 없다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버림 받을거, 지금이 됐든 나중이 됐든, 결과는 같을테니. XX! 겨우 나아진 목을 다시 찢을 기세로 소리를 지른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웅크렸다. 가쁜 숨과 통증으로 몸을 부들거리면서도, 팔과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며 웅크리고서 단 한마디, 그렇게 내뱉었다.

"안 보일 때 알아서 기어나갈거니까, 내버려 둬."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약은 먹을만치 먹었으니,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밤이 되면 기회를 노려 나갈 것이다. 더는,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믿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406 이름 없음 (mnesxaDp.I)

2022-05-25 (水) 07:08:45

>>405

"질리면 내다 버리는게 아니라, 회복 되면 사회로 복귀시킬겁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겪었길래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가 많겠지. 평소 자주 찾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기 손으로 다 없애버렸다는 그치들이 자신을 버렸고, 그래서 싸움이라도 일어난거겠지. 마치 영화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곳에서 영화의 시놉시스로나 나올만한 일이 이 거리에선 논픽션으로 벌어지고 있다. 슬픈 세상이다.
나도 한때는 그 세상의 슬픔에 휩싸여, 빠져나갈 구석조차 없었고.

단순한 친절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지금의 나는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할까봐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다. 그러나 자각하는 것과 죄책감을 이겨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미 이것과 비슷한 일의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칼을 맞거나 약에 쩔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어디도 날 받아줄 데가 없으며, 세상에는 내 자리가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마음을 다친 인간에겐 의외로 원시적인 방법이 통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아마 지금 그녀도 상당히 시장할 것이다. 부상을 회복하느라 체력을 소진한데다 공복인데, 사람이 어떻게 힘이 나겠는가.
잠깐 전화로 음식을 주문한 뒤에, 다시 이 딱한 짐승과 같은 사람의 곁으로 와 웅크린 어깨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믿을 구석이 생긴다는건 생각보다 많이 두려운 일이죠."

니가 뭘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그랬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당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
한때는 정말 모든 것에서 버려졌으니까. 심지어는 내가 목숨을 바친 조국에게조차. 그런 때에 나를 구원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 사람처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더할나위 없던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구하긴 커녕, 마주칠 일 조차 없었을 것이다.

407 이름 없음 (T5nnk1cwzU)

2022-05-25 (水) 17:37:42

>>406

모짐을 넘어 무례한 소리까지 퍼부었는데도, 그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전의 조직에선 반항할라치면 당장 배부터 걷어차이고 독방에 갇히기 일쑤였는데, 그는 온갖 욕지거리에 애꿎은 소리를 들었는데도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가와 내가 바닥으로 떨어뜨렸던 모포를 다시 덮어주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평온하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얼굴을 가린 채로 눈을 떴다가, 모포를 끌어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얄팍한 한겹 너머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닥치고 내버려 둬. 당신 따위 믿을 일 없어."

믿어서 다시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이제 더는 겪고 싶지 않다. 더는, 생에 무엇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 절망은 언제나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죽지 못한 지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는 이전까지와 다른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정말로 내게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언제 잃을지 모를 것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건 사양이다. 죽지 못 한 지금의 나는 그저 지쳤을 뿐이었다.

"처음이었다면..."

어쩌면, 그가 내 믿음의 시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부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은 헛된 날숨과 함께 흩어진다. 나조차도 겨우 들릴만치 나오던 중얼거림은 숨결에 섞여 끝을 흐린다. 다 부질없다. 무엇을 생각하든 전부 의미없고, 쓸모없으며, 헛된 것들이다. 뿌리 없는 내가 이만치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이 이상 바랄 자격 따위 내게 없다. 그래, 내겐 자격이 없지...

깨지지 않는 알껍질 속에서 썩어가듯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낫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고 약까지 잔뜩 집어넣었으니 여태 깨어있던게 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약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대로 잠들어 스스로 숨을 거둘 셈인지, 해가 지고 달이 떠 시간이 한밤중이 되어도, 내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그가 깨우는 일이 없다면 더욱 그랬겠지.

408 이름 없음 (L6eOw65n4M)

2022-05-25 (水) 20:24:57

>>404
언제까지고 같이할 거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는 서로가 서로의 입에 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나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은 한결 같았다.
문득, 고갤 들어 좌측의 거울을 바라본다. 퀭한 인상의 자신. 비춰지지 않는 당신.
분명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 있음에도.

“왜, 부끄러워? 좀 더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예를 들어, 우리 여름방학 때 계곡에 놀러갔을 때 같은. 펜션 아주머니가 그랬잖아. 신혼부부 같다고. 그래서 난 누나보고 자기라고 불렀다가 한 대 얻어맞았고. 그때도 그랬지만, 누나는 항상 망설이고 있었지. 나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는데도.”

당신의 망설임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안다. 당신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속에 담긴 것을 털어놓듯이 편하게 웃고는,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당신이 만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의 표현. 어릴 적부터 고쳐지지 않은, 사소한 애교다.

“이런 얼간이가 좋다고 해준게 누군데.”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과거의 단편들. 스쳐지나가는 필름. 목소리.

“그럼 좀 더 노력해야겠네. 이래뵈도 유부남인지라.”

농을 섞어 대답한다.

409 이름 없음 (vdrnx3/hOg)

2022-05-25 (水) 21:39:21

>>400 그는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다이어트 중이었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초콜릿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될 대로 되라지, 뭐. 그는 초콜릿을 우둑우둑 씹으며 모든 것을 놓았다. 되는 일이 없어. 세상 따위 멸망했으면 좋겠다. 아냐. 나 하나 멸망하면 깨끗하게 끝나겠구나. 그는 간만하에 가벼운 우울을 앓으며 계속해서 초콜릿을 씹고, 뜯고, 삼켰다. 일련의 동작들은 혀끝에 감미로운 단맛을 발생시켰으나 그것은 끔찍하게 맛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초콜릿을 먹음으로써 일종의 자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과 감각, 그리고 정신 모두에 말이다.

나름대로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군. 그의 이빨 끝에서 초콜릿이 부서졌다. 하긴 그럴만 했어. 개 항문낭에서 나온 분비물보다도 못한 글이었지. 이걸로 내 상황극 청춘도 명운이 다한 모양이지. 그는 자가 인지치료 책을 발가락 끝으로 밀쳐냈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준다며 정평이 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읽겠다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애송이처럼 동네방네 떠들어댔고 그를 아는 모두는 그가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기대감을 갖게 된 차였다. 그게 바로 요즘 내가 저지른 가장 쓰레기같은 일이었지. 이제 모두 상관없어. 망해버려라! 그는 잔 대신 휴대폰을 높이 들어 끝난지 한참 된 제 청춘에게 마지막 인사 겸 건배 겸 들리지 않는 장송곡의 연주를 했다. 잘 가라! 이제는 더이상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 수 있기를!

410 이름 없음 (h8nc82J1lw)

2022-05-26 (거의 끝나감) 00:51:02

>>407

처음이었다면. 참 복잡한 한 마디 말로, 지금 내 소파 위에서 모포를 뒤집어쓴 한 명의 상처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있게 된거같다.
그 정도나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종류인지만 알아도 처치가 비교적 쉬워진다. 내가 간밤에 응급처치한 상처처럼 말이다.

"저도 그 마음을 모르는것도 아닙니다. 국가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국가, 국민... 뭐 그 외에 이것저것. 그들을 위해 손을 더럽히고 몸을 혹사시키는 대가로 더 나은 삶을 기대해볼 수 있었다. 서로가 믿어야만 했던 체계에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멸시와 함구 뿐이었다. 내 권리와 믿음을 지키려 발버둥치고, 또 나를 도와준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신당한 뒤에 손을 내미는 사람이 꼭 사기꾼이라는 법도 없더라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영원히 나를 책임져줄리는 없다. 그러나 한 때의 인정으로, 상호간에 호의를 나누는 친구로써는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려 하고, 그들은 나를 위해 애도해주기도 했다.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상적이라 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도 딱히 아니다.

배터리를 슬슬 갈 때가 되었는지 요상하게 왜곡된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단골 피자집의 배달원이 친근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일용할 양식과 함께. 나는 피자 값 밑에 팁을 얹어서 건넸고, 서로 좋은 하루가 되라며 인사를 나눴다.

"자, 신뢰니 배신이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피자 타임.
군침도는 향기가 잔뜩 풍기는 뜨끈한 페퍼로니 피자를 테이블 위에 얹었다. 아마 이 유혹을 이기는 사람은 최소한 잘 훈련된 특수부대원 정도일 것이다. 나도 이건 못 이기니까.

411 이름 없음 (tZcw0GkSUg)

2022-05-26 (거의 끝나감) 02:26:05

>>410 으음. 아무래도 답레각이 안 잡혀서 여기까지 해야 할 거 같네. 며칠간 이어줘서 고마웠고 재밌었어.

412 이름 없음 (aK01mzJptM)

2022-05-26 (거의 끝나감) 15:20:18

아이는 발 끝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떼었다. 발이 바닥에 닿고 떨어질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인형이 걷는 것처럼 옷차림도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도록 움직임 하나 하나가 신중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 있던 하인들 또한 소리 없이 미닫이 문을 닫는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방 안에서 아이는 옷자락을 끌어모으고 무릎 꿇어 앉는다. 줄곧 고개는 숙인 채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떠는 티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늘부로 새로 하가의 신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가의 신수는 성격이 고약하여, 영험하다 불리는 신수라면 응당 할 수 있다는 인두겁을 쓰지 않고 짐승의 모습으로 지낸다더라. 털 빗는 손길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박에 목을 물어뜯어 죽어나간 이들이 수백을 웃돈다니,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린다- 하는 소문이 전국에 유명하였다. 아이는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하씨 가문에 속하게 되어서, 몸종일지 언정 열심히 노력하여 주인 어른을 모시는 좋은 하인이 되어보고자 했는데 어째서인지 신수를 뫼시게 되었다. 아이는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하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노라 마음 먹었다.

"감히 빗질을 해드려도 불편하지 아니하실까요."

# 동양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썼고, 가문마다 모시는 신수가 있단 느낌이야. 신수가 강할수록 권위 높은 가문! 신수는 신비한 힘을 가진 덩치 커다랗고 영험한 동물 정도로 생각했어~

413 이름 없음 (1ILs8tCZ0s)

2022-05-26 (거의 끝나감) 17:28:58

불법 카지노가 불법 카지노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윗선에서 딜러한테 자꾸 손기술 쓰라고 강요하고 있다던가.
다행히 남자의 손기술은 천재적이었기때문에 한 번도 걸린적은 없지만, 앞에서도 (아마) 칼을 겨누고 있고 뒤에서도 (이건 확실히)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재주를 부려야 하는 상황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난 그냥 정직하게 게임하고 싶단말야!'

하지만 불법 카지노인 이 곳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늘 그랬듯이 들키지않기만을 바라며 남자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카드를 돌렸다.
실수는 없었으니 문제도 없을것이다.
아마.

#맥커터만 아니면 환영이야!

414 이름 없음 (gsmu/v89jc)

2022-05-27 (불탄다..!) 03:38:57

땀방울이 지저분한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채 묶여 올라가지 못 한 잔머리가 그 길로 따라붙었다. 꽤 기분 나쁜 찝찝함이다.

반파 직전의 폐허, 묵직하게 내려앉은 먼지층. 굳이 들어와 살피기에는 누가 보아도 적합하지 않은 곳.
그럼에도 굳이 이리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만큼 무리에서 떨어져 잠깐 혼자 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발치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 얼마나 묵었는지도 모를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난다. 휙, 휙, 대충 손을 휘저어 그것을 흩어내고, 자신도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벽에 등을 기대곤 스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이나 엉덩이가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은 이미 한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거쳐 온 길에는 깨끗한 물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는 곳도, 그럴 만 한 여유도 충분치 않았으니.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소낙비라도 오면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몸에 내려앉은 티끌 정도는 가볍게 걷어낼 수 있었으니까.

아주 조금, 고단한 몸에게 휴식을 주고 나니 급작스럽게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온다. 배낭을 뒤져 찾아낸 물병에는 아주 조금, 밑바닥을 겨우 적실 정도의 물방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것을 탈탈 털어 입술을 적셔 보려고는 해도ㅡ 버석거릴 정도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시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하고. 젠장, 더 감질나기만 한다. 텅, 터덩, 텅텅.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 500ml짜리 플라스틱 물병. 때 끼고, 구겨지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이런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걸까?
흘러나온 한숨과 함께 시선을 옮기며 눈을 감았다 뜬 그 사이로. 가방 안에 반쯤 구겨진 사진 한 장. 너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나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지저분한 손 끝으로 구겨진 부분을 서투르게 매만져 펴댄 탓에,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더럽혀지고 말았다. 쯧. 마뜩잖은 얼굴. 소매를 끌어다가 벅벅 문질러 닦아 보아도, 제 손과 다를 것 없이 꾀죄죄한 천조각으로는 깨끗하게 지워질 리 만무하다.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군. 신경질적인 손놀림과 천 스치는 소리는 곧 멈추고, 고개가 맥 없이 벽에 툭 기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아, 죽고 싶다.

부서진 천장 너머로 반짝이는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시린 푸른 색.
삶이라는 한 마디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울림보다도 핏빛같은 잔혹함으로 다가오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라! 머리가 아프도록 귓가에 맴도는 스러진 자들의 단말마가 무색하게도,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죽음이었다.


무언가의 이유로 대부분이 죽고, 몇몇만이 살아남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라는 느낌..... ㅇ)-(
그게 좀비인지 전염병인지 핵 때문인지는 몰?루. 자유롭게 설정해도 OK!
나참치 머릿속에서는...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휴식하고 있다. 그런 느낌입니다.

415 이름 없음 (nySQkIrIZk)

2022-05-30 (모두 수고..) 00:11:50

사람이었다가도 동물로 변한다. 체력이 동나든, 정신적으로 피곤하든 피로가 쌓이고 휴식이 필요해지면 동물로 변하고 만다. 푹 쉬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마를 빡빡 치고 싶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내 가방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나는 참새다. 하필 참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니 주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다. 길고양이에게 사냥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늘따라 좀 피곤하다 싶더라니, 하교하던 길에 결국 변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는데! 욕하고 싶다. 해도 아무도 모른다. 짹짹. 내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제발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랐다. 이 동네 아는 얼굴이라도 지나가면 좋겠는데. 아무리 소리쳐봤자 지저귀는 소리만 난다. 짹짹. 지겹다.

# 맥커터 사절~

416 이름 없음 (OG6EDBtqaE)

2022-05-30 (모두 수고..) 00:33:06

>>415

학교에서 발표에 걸리고, 계단에서 넘어지고, 이어폰을 놓고와서 등하교를 할 때 노래조차 못 듣는 사소한 불행들이 있는 이상한 날. 아, 젠장. 오늘은 진짜 뭐라도 마가 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나는 괜히 길가의 돌멩이들을 발로 차면서 하교하기 시작했다. 무릎에는 반창고가 따끔거리는 상처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원래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이어폰 하나 없다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던가.

...........라고 생각하던 그 때, 나는 듣고 보고 말았다. 짹짹거리는 참새의 소리를. 그것도 누군가의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하..?"

뭐야. 누가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가방을 내팽개치기라도 한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 옷이랑 가방....우리 반 애 거 아니던가? 등하원 할 때 동네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던?

"....너 혹시 이거 주인 어디갔는지 알아?"

옷가지와 가방을 살피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를 보며 물었다. 참새가 알 리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물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으니까.

417 이름 없음 (yC/4Pp3dO6)

2022-05-30 (모두 수고..) 10:09:00

>>416

같은 반의 얼굴 알고 이름 모르는 아이. 다들 이상하게 보고 지나가기 여념 없는데 관심을 가져주다니, 복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까치는 아니지만, 은혜 갚는데 참새가 중요하고 까치가 중요할 것 같진 않다. 나는 이것의 주인이 나라고 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리로 가방 지퍼를 물어서 당겨 열고, 그 다음은 필통과 공책을 가방 밖으로 잡아 끌었다. 공책을 펼치는 것도 몇 장 물어 포로롱 날아오르며 넘겨야했고, 필통도 또 지퍼를 부리로 물어 당겨 열어야 했다. 컴싸 뚜껑을 여는 건 얼마나 어렵던지, 발로 펜을 움켜잡아 고정하되 부리로 뚜껑을 물어 당겨야했다. 나는 이 펜을 발로 움켜쥐고 날갯짓 파닥거리며 글씨를 적었다. 내가 이렇게 악필이 아닌데.

'나야'

두글자 적는데 억만년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418 이름 없음 (xq1G4S1E2A)

2022-05-30 (모두 수고..) 12:31:02

>>417

"허? 하? 허?"

이상한 소리가 나도 모르게 마구 튀어나왔다. 아니, 당연하잖아. 참새가 내 질문을 듣더니 갑자기 부리로 가방 지퍼를 열고 필통과 공책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그걸 보고 누가 안 놀라겠어?

"야, 그거 함부로 꺼내면..!"

하지만 안된다고 말리기도 전에, 참새는 날아오르더니 공책을 넘겼다. 게다가 필통을 열고 컴싸 뚜껑까지 열었다. 참새한테 말을 거는 나도 이상하겠지만, 그걸 듣고 저렇게 사람처럼 반응하는 참새가 더 이상해..! 아,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건가? 그런건가..! 오늘 진짜 이상해..!!

"..........하.....?"

하지만 참새가 글을 쓴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아니, 정말로? 설마, 혹시나, 싶긴 했는데, 아니, 진짜로? 꼬부랑거리는 단 두글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도 억만년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저주라도 걸린거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원래 참새였냐, 인간으로는 못 돌아가냐, 등등의 수만가지 질문을 뛰어넘고 참새, 아니지, 너에게 물었다. 이 나이 먹고 동화에 빠졌냐고 비웃어도 할말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상한 날이고, 참새가 되었다는 너도 이상하니, 나도 이상한 소녀 감성에 좀 빠져봐도 뭐 더 달라지겠어? ........달라지겠어?

# 참새 씨의 성별이나 이름 정해졌으면 알려줄 수 있을까?

419 이름 없음 (1Gx0JoVu6c)

2022-05-30 (모두 수고..) 16:35:34

>>418 나 >>417인데 미안해, 내가 설명이 부족했던 듯해 ㅠㅠ 이어준 >>416 보고 설마 했는데........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물로 변한단 설정이었어... 이어줘서 고마운데 정말 미안해 ㅜㅜ

420 이름 없음 (5pviNl0Plo)

2022-05-30 (모두 수고..) 18:04:35

>>419 모든 사람들이 동물로 변한다는 설정이었구나........ 내가 착각해서 미안 ㅠㅠ 그럼 혹시 너참치만 괜찮다면 같은 반+동네 이웃 설정만 유지하고 다시 이어올까 아니면 그만할까? 편하게 말해줘~

421 이름 없음 (xLcqZj1dBM)

2022-05-30 (모두 수고..) 18:10:07

>>420 헉 아냐아냐 ㅠㅠ 내 설명이 불충분했던 건데 너참치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다시 잇고 싶다면 편하게 이어줘. 그리고 >>418 질문에 답하자면 이름은 없고.... 성별은 여자아이일 거 같은 느낌.........? 캐릭터를 구상하고 쓴 건 아니라서.

422 이름 없음 (noVPcjkjQw)

2022-05-30 (모두 수고..) 18:56:00

>>421 너참치에게 정말 미안........ 다시 이으려고 했는데 설정이 좀 바뀌니 글이 안 써진다 ㅠㅠ 아무래도 더 못 이어갈 것 같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었어. 고마워~

423 이름 없음 (V6qJa31Rb6)

2022-05-30 (모두 수고..) 19:00:44

>>422 괜찮아, 미안할 필요 없지. 재밌었다니 오히려 고맙고, 이어줬어서 더 고마워. 안녕.

그럼 음, >>415에 잇고 싶은 참치가 있다면 편하게 이어줘. 🙃

424 이름 없음 (3A7X2RWsBQ)

2022-05-31 (FIRE!) 10:02:35

"야, 아줌마가 이거 가져가래!"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형해 달리다가, 네 뒷통수가 보이자마자 그곳을 향해 던졌다. 상쾌하고 푸른 하늘 아래 아침 공기도 산뜻한데, 이 풍경에 있는 단 하나의 오졈을 조준한다. 체육복 든 가방인데, 이것에 맞든지 잡든지 그건 네 몫이다. 하늘에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는 저걸 못 잡는 것도 재능이겠다. 나는 오늘 3교시 체육인 거 까먹었냐고 빈정대는 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집 산다는 이유로 지겹게 보는 사이인데 고등학교 올라오며 같은 반까지 되었고, 이제는 내가 아침 등교길에 심부름질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까 아줌마가 매일같이 날 딸 삼고 싶다하는 거다.

425 이름 없음 (KMjuitzuKw)

2022-05-31 (FIRE!) 10:26:41

>>424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온다. 사람 마음이라는게 이런 날씨에 갑갑한 교실에서 창문으로만 내려쬐는 햇빛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사람도 별로 없는 한적한 길가를 걸어가고 있으니 뒤에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 아, 고맙다~ "

뒤를 슬쩍 돌아보자 체육복이 들어가있는 가방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다. 한 손을 번쩍 들어서 낚아챈 나는 너가 빈정대는 말에 그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 사실 오늘 학교 안가려고 했거든. 너도 같이 빠질래? "

이런 날씨에 학교에 갇혀서 낭비하는건 아깝지 않냐고, 되물었다.

426 이름 없음 (1avsveeBFk)

2022-05-31 (FIRE!) 11:22:51

>>425

"고마우면 이따 점심에 매점이나 쏘셈."

하복을 입고 가만히 수업만 해도 쪄 죽겠는데, 3교시 체육? 아침부터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이미 체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분명 난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니 날 심부름꾼으로 쓴 저 녀석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뜯어먹어야겠다. 나는 네 옆 즈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 자전거 속도를 줄이고 멈춰섰다. 네가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누구 챙겨다주겠다고 체육복 들고 왔더니 학교를 안 가려고 했다는 말이 귀에 날아와 박혔다. 나는 최대한 욕설을 걸러낸다.

"너 아줌마한테 이른다."

욕설말고 할 말이 없었다.

427 이름 없음 (cSJ3dBKHuc)

2022-05-31 (FIRE!) 15:01:06

>>425

" 돈 없다니까 맨날 뜯어먹네. "

투덜대며 텅빈 지갑을 보여주었다. 물론 정말 돈이 없는 것은 아니고 실제론 카드를 쓰니까 현금이 없는 것이지만. 이미 쟤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 별로 의미가 없는 반항이다. 그리고 내 말에 너의 자전거가 우뚝, 멈춰선다.

" 그래도 이런 날 학교 가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 "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 더운 여름날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학교에 가기엔 아까웠다. 그래서 너에게 좀 더 가까이 붙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 하루쯤은 너도 일탈해도 괜찮잖아? "

씨익 웃음지으며 얘기했다.

428 이름 없음 (c7TjVKe1Rw)

2022-05-31 (FIRE!) 16:08:12

>>427

"허, 참내. 누가 보면 몇십만원 어치 뜯어먹은 줄."

아이스크림 하나가 얼마나 한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여태 뜯어먹은 것들을 모아 가격을 계산하면 꽤 클 것 같기야 하지만, 이유없이 뜯어먹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아예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끌고가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이 좋았다면 이 자전거를 번쩍 들어 정신차리고 헛소리 작작 하라고 이 녀석을 한 대 치기라도 할텐데, 그 정도 힘은 없어 다행이다.

"붙지마, 더워 멍청아."

나는 학교까지 끌고가야할 짐이 두개나 되었다. 하나는 자전거고, 하나는 이 녀석이다. 이 새끼라고 하려다 그간 봐온 정을 생각해 녀석으로 순화시켜줬다. 난 머리끄댕이를 잡을지, 귀를 잡아당길지, 목덜미를 붙잡을지 고민하다 소매를 붙잡기로 했다. 피한다면 어쩔 수 없이 머리끄댕이를 잡아야겠다.

"넌 학교 가기 안 아까운 날이 있긴 하냐?"

429 이름 없음 (cSJ3dBKHuc)

2022-05-31 (FIRE!) 16:33:21

>>428

너의 말에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선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간다. 그러자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서 내 옆을 나란히 걸어가는 네 모습을 힐끗 바라본다. 덥다며, 붙지말라는 너의 말에 슬쩍 거리를 두자 소매를 붙잡아온다. 너의 언행불일치에 다시 한번 슬쩍 바라보고선,

" 재미없잖아. 학교 같은거 안가도 모의고사는 항상 잘 나오니까. "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혼자 공부해서 터득한 것들이었다. 학교 생활에도 크게 흥미가 없으니 그저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서 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소매를 잡은 네 손을 뿌리치지는 못해서 그대로 걸어간다.

" 솔직히 니가 끌고 가는거 아니었으면 이틀에 한번 꼴로 안갔을듯. "

이걸로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알고 있지만 재미 없는 일을 강제로 하는 것은 힘드니까. 그래서 일부러 너를 붙여놨는지도 모른다.

430 이름 없음 (9FR2GdjcOg)

2022-05-31 (FIRE!) 17:48:44

>>429

"와, 역대급으로 재수없어."

자전거를 한손으로 끌려고 하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놓았다가는 오늘 등교하는 건 나 혼자일 것 같다. 이건 최소 아이스크림 두개 뜯어먹어야 한다. 아니다, 세개가 좋겠다. 잘난 척이 매우 재수없으니 세개 뜯어먹어야겠다. 가운데 손가락 곧게 펴고 싶으나 나는 잘 참아냈다.

"3년 동안 이래야 되냐, 나?"

안 그래도 빡센 대한민국 고등학생 라이프가 더 꼬이는 기분이다. 고3이 되어서도 이러진 않겠지. 아니, 이 새끼라면 정시로 간다고 할 것 같으니 고3 되고서도 그럴 것 같다. 아줌마에게 정말로 날 딸로 들이고 우리 집에 쟬 줘버리는 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431 이름 없음 (KMjuitzuKw)

2022-05-31 (FIRE!) 18:32:54

>>430

"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 "

흔히 영재, 천재라고 불리우는 종류의 사람에 속해있는 나는 이미 고등교육까지의 과정은 모두 끝마친 상태다. 그래서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중학교까진 학교를 잘 다녔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그마저도 흥미를 잃었다.

" 내일부터 학교 잘 다닐테니까 걱정 안해도 돼. "

라고 말한게 32번째이다. 매일매일 같은 레퍼토리로 이어지는 대화라서 당연히 너의 반응도 예상이 된다. 소매를 붙잡힌채로 질질 끌려가듯이 학교를 가다가, 문득 네가 잡고 있는 자전거가 눈에 띄었다.

" 자전거 줘, 내가 끌어줄테니까. "

그럼 너도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거 아니야.

432 이름 없음 (JH1dFyuqv.)

2022-05-31 (FIRE!) 18:48:37

>>431

"아니, 난 달라. 내가 제일 재수없어 하고 있으니까."

당연하다. 옆집 살며 매번 보는 얼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주 보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친한 사이인 만큼 우리 가족도 너를 안다. 나도 공부한다고 하고 있고, 낮은 성적은 아닌데 옆에 있는 놈이 하필 천재인 걸 어쩌라고. 얘한테 좀 배워보라는 잔소리는 귀에 딱지앉도록 들었다. 근데 어쩌나, 이 자식은 학교 쨀 생각만 하는데.

"그래그래,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가볍게 비아냥거렸다. 이 말도 32번째 정도 한 것 같다. 나는 자전거 달라는 말에 선뜻 앞바구니에 있는 내 책가방을 들쳐메고 자전거를 넘겼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까지 태워달라 하고 싶은데, 이 녀석이 끄는 자전거가 학교로 향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진 못했다.

433 이름 없음 (KMjuitzuKw)

2022-05-31 (FIRE!) 21:05:02

>>432

" 그럼 너가 대장이네. "

가장 재수없어하고 있다니. 하지만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너인만큼 가장 재수없어한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다. 너희 부모님이 너를 잘부탁한다고 하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럴때마다 웃으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 태워줄까? "

너의 비아냥거리는 말도 그냥 웃음으로 넘긴다. 너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걱정 되니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너를 바라보며 물었다.

" 학교로 무사히 갈테니까 걱정마. "

새끼손가락을 들어서 너에게 보여주며 얘기했다. 이렇게 손모양을 하고서 말하는건 무조건 지켜야한다고 어릴때 약속했던 그것. 사실 너한테 잡힌 이상 학교를 빠지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434 이름 없음 (WSj7PgM9bk)

2022-05-31 (FIRE!) 21:45:59

>>433

"적은 가까이 두랬어."

뭐, 정말 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봐왔으니까 이런 말도 쉽게 하고, 서스럼없이 대하면서 웃을 수 있는 거다. 그게 좋은 점이지. 가족들이 비교하는 건 좀 스트레스 받긴 하지만 그게 얘 잘못도 아니고. 그래도 학교에서는 내가 얘보다 훨씬 더 많이 예쁨 받는다. 난 모범생이니까.

"오키, 너 찍었다."

새끼손가락 들어보이면서 말하면 나도 새끼손가락을 갖다대고는 했다. 버릇으로 굳어서 남들은 약속이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있을 때, 난 새끼손가락을 마주대고는 한다. 지금도 그렇게 새끼손가락끼리 마주닿았고, 바로 자전거 뒤 짐받이칸에 올라타 앉는다.

435 이름 없음 (9o.zaNpSFo)

2022-06-01 (水) 00:25:18

>>434

" 뭐야, 너 내 적이야? "

웃으면서 살짝 거리를 뒀다가 다시 돌아온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런 말 정도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 네가 내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찍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자 나도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예전부터 하도 많이 태우고 다녀서 그런지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꽉 잡아. "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페달의 저항이 많이 약해질때쯤 자전거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뒷자리의 너를 흘끗 바라본 나는 페달을 빠르게 밟기 시작했다. 조금씩 빨라지는 자전거는 빠르게 학교로 향하고 있다.

" 아, 오늘도 같이 갈꺼지? "

예전엔 항상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각자의 약속이 있어서 그런가 같이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436 이름 없음 (UFKVGd4NhQ)

2022-06-01 (水) 12:38:40

>>435

"이제 앎?"

별 대수로운 소리를 하고 있단 듯 받아치고, 네가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자 허리에 팔을 감아 붙잡는다. 꽉 잡으라는데 두 손으로 붙잡을 것까지 있겠나 싶다.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간을 보니 지각하진 않겠다. 이내 자전거가 달려나가고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남이 태워주는 자전거 개꿀.

"어- 나 오늘 뭐 있었던 거 같은데."

일정 정리를 제대로 안 해놓은 과거의 내 잘못이다. 카톡에 들어가 톡방들을 뒤져보는 수 밖에 없다. 공지나 연락이 와 있을테니까. 나는 한 손으로 톡톡 휴대폰을 뒤진다. 학교 쨀 궁리만 하는 누구와는 다르게 일이 많단 말이지. 학생회든 동아리든.

"기다려줄 거?"

437 이름 없음 (9o.zaNpSFo)

2022-06-01 (水) 13:00:09

>>436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느낌은 언제 느껴도 좋다. 네 팔이 내 허리를 둘러오자 자전거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고 얼추 시간 계산을 해보면 지각은 안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같이 하교할 생각으로 말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 바쁘게 사네. "

너와는 다르게 학교에서 수업만 들으니까 이런 스케줄적인 부분에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넌 학생회라던가 동아리라던가 열심히 하는 편이니까. 그래서 오늘도 그냥 집에 혼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내가? "

살짝 웃으면서 반문하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있다. 너의 그 질문에 내가 다른 말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니까.

" 그래. 천천히 할 일 다하고 와. "

지금처럼 너를 뒤에 태우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어릴적부터 너무 붙어다녀서 그런가 이젠 네가 없는게 더 어색할 지경이라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면서 학교로 향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니 학교는 금방이었고 학교 앞 자전거 보관대에 세운 나는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 도착했습니다요. "

438 이름 없음 (y.m1m9bsC2)

2022-06-01 (水) 13:15:53

>>437

톡방을 확인해보니 학생회 쪽 일정이 오늘이었다. 공지에 적힌 걸 보아하니 기억난다. 오늘 회의는 학기마다 한 번 정기적으로 하는 전체 회의인데, 오히려 빠르게 끝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각 반 반장들과 부반장들도 부르고, 학급 회의에서 나온 안건들을 정리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학생회 하는 애들이 거의 다 반장, 부반장도 하고 있는데다 학급 회의 시간에 회의가 진행되는 경우도 적으니 겉치레 같은 느낌이다.

"생기부 빵빵하게 채워서 대학 가야지. 대학에선 떨어지자?"

설마 대학도 같은 곳 가겠어. 재수없는 자식, 얜 당연히 인서울할텐데 난 모르겠다.

"오늘은 금방 끝나."

학교 앞 자전거들이 늘어서 있는 자전거 보관대 옆에 내 자전거도 멈춘다. 나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체육하기 정말 싫게 날씨가 좋다. 왜 째고 싶다는지 알 것 같기도.

439 이름 없음 (9o.zaNpSFo)

2022-06-01 (水) 18:05:37

>>438

" 고3 까지 같은 반이면 대학도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

그 정도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너와 같은 대학을 갈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는데 너와 다른 대학교가 된다면 그것도 찜찜한 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른 학교를 가고싶으면 다른 반이 되기를 비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 그럼 기다릴께. "

금방 끝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자전거를 보관대에 묶어놓는다. 아 정말 날씨 좋은데, 이런 날에 학교를 오다니 정말 아깝다. 잠시 하늘을 바라본 나는 네 뒤를 따라서 학교로 들어간다. 어차피 같은 반이라 가는 길은 똑같으니까.

" 아 맞다, 오늘 엄마가 집에 저녁 먹으러 오래. "

맛있는거 해놨다더라.

440 이름 없음 (p7MGH9wn7U)

2022-06-01 (水) 18:53:10

>>439

"야, 야. 자제해.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얜 지겹지도 않나,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반 갈리든 학교 떨어지든 옆집이라 주구장창 봤는데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라니, 말이 되나. 그렇다고 막상 옆에 늘 있던 애 없으면 기분 이상할 것도 같긴 하다. 얘만큼 편한 친구 만들 수 있으려나.

"끝나면 전화함."

교문을 지나친다. 학교 째면 뭐하고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집이랑 학교 둘 다 발칵 뒤집힐 걸 생각하면 제대로 놀지도 못 할 것 같은데.

"진짜? 오늘 점심 굶어야겠다."

농담이지만 아줌마 요리 엄청 맛있으니까. 어차피 저녁에 갈 거면 그냥 집 가서 씻고 옷만 갈아입은 다음에 바로 넘어가 있어도 되겠다. 얘 집이 우리 집이고 우리 집이 얘 집이지 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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