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339 이름 없음 (2BehpH8S1M)

2022-05-03 (FIRE!) 17:26:51

>>334

"나바레테Navarrete라고 불러주세요. 경장이죠."

제복 명찰에 박힌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하냐는 질문의 답은 '잘 모르겠다'. 사람이 물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해서 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호불호의 영역을 벗어난 광기와 비스무리한 개념이었다. 오오, 초과근무와 카페인. 나의 오랜 벗이여. 마피아와 결탁했다고 업무량이 딱히 줄어들진 않더라. 썩는 것도 성심껏 열심히 썩어야 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썩으면 해고에 징역살이까지 따라오니 대외적인 업무도 보아야 했다. 내가 이 시간에 경찰서에 있던게 바로 그래서였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서 쭈뼛대는 기색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킹핀의 손은 크고, 거칠며, 단단했다. 남성적이라는 뜻에 이토록 걸맞는 손이 또 있을지. 이로써 우리는 한 배를 탄 선장과 일등항해사로 임명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움을 가진 기기묘묘한 관계성. 복수와 2억이라는 판돈을 걸고 밤중에 암살자가 찾아올까, 도시 한복판에 호외를 뿌려버릴까 불안해하겠지. 그러나 두려움이란 뾰족한 발언은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는 법. 한 배를 탄 마당에 다같이 빠져죽기 싫으면 그 두려움을 조용히 감춰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 일을 하기로 정한 이상 이전에 했던 생각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이제 갈 길은 두 곳뿐이다. 성공하던가, 몰락이 배제된 실패를 받아들이던가. 실패해도 곱게 목을 빼진 않으리라.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할 것이다.

심야의 카페는 당연히 한적했다. 졸려보이는 알바생은 뚱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주시한다. 놀랍게도 또 다른 손이 있었는데, 창작의 고통에 빠진 예술가라도 되시나. 아메리카노 빨대를 잘근거리면서 텅 빈 수첩을 긁어대고 있었다. 저거 샷을 몇 번이나 들이부은거야? 색깔이 심상찮았다. 예술가의 영혼이라도 지녔는지 마피아도 부패경찰도 죽음도 무시하고 한 차원을 초월해 혼자만의 세계로 진입하였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영혼은 그렇게 고결하지 못하니까. 숭고한 고뇌를 하는 대신 비상 출구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스마일 컴퍼니랑 벌룬이라면. 아하, 웃음풍선 팔아먹는 놈들 말씀이신거죠?"

킹핀은 어울리게도 범인을 특정하는 외과적 폭격에 관심이 없어보인다. 좀 전에도 말했듯, 그의 스타일은 하늘에서 내리는 죽음의 소나기. 융단폭격이다.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천장을 본다. 감시카메라가 하나, 둘, 셋. 사각은 없다. 하지만 몸을 조금만 틀어도? 몸의 많은 부분이 가려진다. 끼이익. 끼이익.

"정확한 인텔은 DB를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지만, 음..."

스마트폰을 상 위에 놓으며 쇼윈도 밖을 본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도 옆에 대놓은 차량이 있다. 선팅이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쇼윈도 사이 기둥이 차량 운전석으로부터 나를 가리도록. 다시 위치를 보정한다.

"단순히 얼굴과 이름이라면 대부분 있을거에요. 대부분이 뭐냐. 전국민이 다 있죠. 문제는 스마일 컴퍼니로 키워드를 넣고 검색했을 때 안 나오는 놈들이거든요? 실제론 그쪽 사람인데 말이죠.''

''그거는 둘 중 하나에요. 사실을 숨기고 있어서 그 놈이 그쪽 놈인걸 경찰에서 모르거나? 아니면 위장신분, 기록말소 식으로 신원 자체가 오염되었거나? 그런거에요. 최대한 정보를 교차검증해서 허수를 줄여야 해요."

경찰이 대 범죄조직 업무를 열심히 했다면 정보에 빈틈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말했다.

나는 쉼없이 나불거렸다. 경험상 신고자에게는 입을 많이 놀려줘야 했다. 많이 말해주는만큼 그들은 편안해했다. 말을 안 해주면? 불안해하다가 제 풀에 삽질을 해버린다. 킹핀의 삽은 내 머리통으로 떨어질 것이다.

"스마일은 대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니까 공개정보가 많아요. 유명한 놈은 사이트에 바로 면상이 박혀있구요. 덜 유명한 놈은 TV프로 찾아보면 나와요. 예능에 피디랑 매니저같은 사람 나오잖아요. 마지막에 스탭롤도 올라가고."

"음지에 있는 안 유명한 애들은 스마일한테 돈 받아먹는 우리 경찰 친구들이 잘 알지요. 경찰 DB란게 까고말하면 경찰 전용 위키피디아라서, 스마일쪽 통들도 부패 여하 관계없이 '문서' 편집을 자주 한다는 말이죠? 부패란건 마피아랑 유착했다는 뜻이지, 완전무장해제에 항복을 했다는 말이 아니니까.''

점조직 인원들이 풍선을 파는 핫플레이스도 파악이 되어있을 것이다. 다음 문제는 쉐프이다.

"그건 스마일한테 상납하는 치과나 카페를 털어보면 나오는게 있을겁니다."

치과와 카페. 나는 말을 멈추고 한 모금 마셨다.

"아시겠지만 풍선 안에 들어가는 기본 재료가 아산화질소NO2잖아요? 젠켐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차차하고. 그거의 본래 합법적인 사용처이자 음지로 삥땅치기 가장 좋은 명목이...''

입술에 묻은 휘핑크림을 햝아먹었다.

"치과 마취용, 그리고 카페 휘핑크림 제조용. 그쪽 라인으로 가스를 공급받는 선이 분명히 있을거에요."

목과 입이 슬슬 아파온다. 헛기침을 하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상, 계획 브리핑 마칩니다. 질문은 있으신가요?"

//일단 이렇게 써봤다 이쪽이야말로 이어줘서 고마어...

340 이름 없음 (XsuPTaZv96)

2022-05-03 (FIRE!) 19:56:29

>>336
(당신이 눈싸움으로 응하자,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살짝 움찔한 듯 보였지만 이내 차분함을 가장하고 눈에 힘을 주는 것이 어딘가 어색해보인다. 그러나 이내 당신이 돌려준 말에 티는 나지 않게 화색했다. 당신이 수락할거라곤 생각 못한 듯이.) 잠깐 앞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라고 공손하게 허락을 구하곤, 앉기 전에 사제복 안에서 붉은 보석이 박힌 금색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술집이 위치해있는 왕국보다 옆 공화국의 유명한 종교적 심볼이다.) 저는 생프텐 교의 순례자입니다. 자매님의 영혼에 고결한 의지가 깃들기를. (기도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미세한 축복이 당신의 신체에 흘러들어온다.)

341 이름 없음 (c97qS88PL6)

2022-05-03 (FIRE!) 21:59:20

>>340 ...? (느닷없이 제 몸에 종교 의식을 행하려는 듯한 사제의 행동에 그는 반사적으로 회피하며 의자째로 물러났다. 그러다,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보고는 인내심을 끌어모아 정중히 말했다.) 외람되지만 사제님, 저는 아직 수락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제 몸에 갑자기 주술을 거는 행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와 대화를 하고자 하신다면 이런 행동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342 이름 없음 (XsuPTaZv96)

2022-05-03 (FIRE!) 23:32:45

>>341
(사제는 깜짝 놀란 듯한 행동을 취하고, 그 뒤 테이블 주변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라사제한테 망신주지말라는 무책임한 말과, 신성 사기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됐다며 핀잔주는 이야깃소리도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는 시선을 끌기 마련. 사제는 급히 태세를 추스르고 공손히 손을 모아 사죄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공화국에서는 사제가 맡은 역할 중 하나였기에 타국의 문화를 학습치 못하여 경솔한 행동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근데 주변분들은 어째서 웃으시는 건가요...?

343 이름 없음 (qzAS619i0U)

2022-05-04 (水) 00:23:02

>>342 (그는 사제의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좀 전에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높아지긴 했지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자기랑 대화하는 중에도 다른 손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줄 아나? 알 게 뭐야, 그런 것보다는 빨리 조건이나 듣고 싶네. 크리스는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주점에서 식사하며 웃는 일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요. 그보다는 의뢰 내용과 기간, 보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듣기 전까지는 답을 드릴 수 없겠네요.

344 이름 없음 (F5Bj8/M18I)

2022-05-04 (水) 00:34:49

>>343
(타이밍이나 시선이나, 이쪽을 보고 웃는 것 같이 보였는데 자신의 착각이고 보지는 못한건가?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항상 주변을 의식하고 움직이라고 들었는데.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의아한 시선을 던지다가 당신의 앞자리에 앉았다.) 의뢰 내용은 대륙에 흩어져있는 성유물의 회수입니다. 기간은 무기한. 원하실 때 그만두실 수 있어요. 보수는 성유물 회수 시 신전에서 매겨줍니다. 그 중, 반을 내어드리려고 합니다.

345 이름 없음 (qzAS619i0U)

2022-05-04 (水) 00:57:19

>>344
(성유물? 그런 거라면 가장 구미가 당길만한 사람은 그 종교 신자나 그런 사람들 아냐? 왜 타국에 와서 구인을 하지? 어쨌거나, 의뢰 내용상 무리겠군. 굳이 이직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는 밑바닥에서 찰랑거리는 맥주를 마저 입에 털어넣은 뒤 대답했다.) 그럼 안 되겠군요. 말씀드린 대로 생업이 있다보니 대륙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건 어려워서요. 그런 거라면 인근에 용병길드가 있으니 거기서 한번 구인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슬슬 일어날까, 휴가라지만 과음은 안 좋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그는 주점 주인에게 술값을 건네고 주점을 나섰다.)

346 이름 없음 (F5Bj8/M18I)

2022-05-04 (水) 01:08:05

>>345
#궁금한 게 있는데...꼭 상대방을 무안주기 위해서 이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일까? 짧게 이어가는 자유 상황극이라고는 하지만 매 지문마다 설정 트집에, 어느정도 어울려주려고 해도 티키타카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네...뭘 위해, 무슨 반응을 위해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혹시 자신의 결여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들이 너참치를 생각해주고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주길 바래ㅠㅠ

347 이름 없음 (qzAS619i0U)

2022-05-04 (水) 01:24:44

>>346
그렇게 느꼈다면 유감이지만 내 캐릭터 입장에서는 네 캐릭터가 의도한 건 아니었더라도 불시에 달갑지 않은 일을 당했으니 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미 정착지에서 생업이 있는데 전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일을 맡는 건 여건상 어렵지 않겠니?

너참치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라니 안타깝지만 원하는 전개나 반응이 있다면 다음에는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공유해서 이런 전개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반응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먼저 의견제시라도 해주길 바래ㅠㅠ

348 이름 없음 (F5Bj8/M18I)

2022-05-04 (水) 01:45:22

>>347
#정말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굳이 굳이 해야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슨 말을 돌려주든 그게 너 참치에겐 상관없다는 걸, 그리고 본인이 다른 참치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너참치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즐기는 거 같아보이니 더 이상은 말을 줄이도록 할게 ^^

349 이름 없음 (L5Vg7gW2zk)

2022-05-04 (水) 15:24:26

>>339

나바레테. 그녀의 이름이었다. 제복에 박혀있던 명찰로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간다. 적어도 가명은 아닌가. 멋대로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부르는것보단, 통성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분명히 신뢰감 형성에 도움을 줄 테니까. 이름을 들었으니 내 쪽에서 이름을 밝힐 차례였고, 잠시 뜸을 들였다.

" 잘 부탁하겠네, 나바레테. 벨이라고 부르게. ..흔한 이름은 아닌것 같네만, 어디 출신이지? "

멕시코 계열인가? 그게 아니라면 러시아계? 교양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아쉬운 일이었다. 늘 살아남는것, 그것 하나만으로 벅차왔으니 공부같은걸 할 시간이 부족했다. 뭐, 반쯤은 손이 안 갔던 것도 있지만. 커피, 그리고 담배, 때때로 위스키. 그러한 취미시간은 제법 달콤했다. 그녀는 쭈뼛대는 기색으로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 손을 꽉 맞잡았다. 무른 손이라고 느껴졌다. 전투력을 기대하는건 힘들겠군. 혹여 사격의 천재일수도 있겠지만, 무기를 빼앗기거나, 탄환이 모두 소모되면 그 뒤론 힘들겠지. 히어로처럼 우리에게 총알이 빗겨가고, 맞아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크게 다쳐도 붕대 좀 두르면 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동력도 중요시해야하니, 탄창을 가방에 잔뜩 실어다닐수도 없는 노릇이고. 권총에 잔 고장이 일어날수도 있고, 던진 잡동사니에 맞아 무기를 놓칠수도 있겠지. 잠시간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 나바레테 경장, FBI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했었지. 우등생이었단 얘기는 못 들었네만, 사격은 좀 하나? "

우스갯소리로 FBI 얘기를 꺼낸걸수도 있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되는 정규 과정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사격 교육은 받았을테니. 허나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지 않든, 사격엔 젬병일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킬러로써의 일을 바라고 있는것도 아니니. 보조사격 정도는 기대하고 있지만,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 코트 안쪽에서 연습용 수류탄 하나와, 수류탄 한 발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잘 가지고 다니게. 무기를 혹시 놓치면 그걸 써. 이것도 옷 소매에 달아두고. "

원래는 아내에게 주려고 했던 거지만, 상관 없겠지. 그녀에게 자그마한 손목밴드를 건네었다. 감압식 전기충격기였다.

" 손목을 빠르게 위 아래로 한번씩 꺾으면 작동한다. 그 뒤엔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혹시 그쪽 손목이 잡히더라도, 일정 압력 이상이 가해지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편리한 물건이지. 감전대책도 되어있으니 자네가 감전될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세번까지만 사용할수 있으니까 잘 알아두고. "

대비책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역으로 당하는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 이건 실용적인 대비책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심야의 카페에 도착했다. 허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원목 소재의 인테리어가 새벽의 가로등과 맞물려 아늑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줍잖은 갱들에게 보호세를 바칠 만큼은 장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한적한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하고선 자리에 앉으며 코트의 단추를 풀었고, 장갑과 모자를 벗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 나바레테, 자네의 정보접근권한은 어디까지 유효하지? 이 도시는 부패했어. 다른 도시, 다른 주에서 떠넘기고 싶은 부랑자들, 노숙자들, 그리고 마피아들이 이 곳에 모여있는게 차라리 그들에겐 편할테니, 계획적으로 부패했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곳은 범죄자들에게서 로비를 받아 배를 불릴 먹이터인 동시에, 위협적인 도시야. 이곳의 쓰레기들이 바깥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녀석들도 있을테니, 정부가 그걸 용납하지 않을텐데. 누군가는 따로 이곳의 조직들을 제대로 정리해두지 않았겠나? 놈들이 원하는건 통제니까. 그 통제를 벗어나는 녀석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녀석들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의 말대로, 단순히 문서 편집에 그치는 선이 아니라. "

아무리 로비를 하면서 뒷주머니를 불린다고 하더라도, 윗놈들은 안전을 원한다. 적어도 이 쓰레기장은 벗어나지 못하도록, 분명히 목줄을 쥐고 있을텐데. 시민이 이곳에서도 그럭저럭, 어떻게든 살아가기라도 하는걸 보면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만한 일이지. 정보를 교차해 허수를 줄여나가는 과정은 제법 시간이 소모될테고, 그녀에게 나름 부담이 될것이다. 귀중한 정보원이 헛일을 하며 체력을 소모하는것보다, 최소한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정보를 검증할 일종의 광맥이 필요했다. 어느덧 나온 에스프레소를 받아 한 모금 삼켰다. 코를 부드럽게 감싸는 커피 향이 마음에 들었다. 실력이 없어 보이는 바리스타였는데, 원두가 좋았던걸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고, 성냥을 찾아 뒤적거리다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잊어버리고 있었군, 성냥을 전부 건넸었지. 불좀 붙여주겠나? 가벼이 속삭였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짙은 선팅을 한 승용차 한대. 감시가 붙었나?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CCTV로 부터도, 차 내부로부터도 보이지 않을 법하게 몸을 숨겼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수하군. 썩 마음에 들었다. 저 차의 번호판도 한번 조회해두게. 가볍게 일러두었다.

" 치과, 혹은 카페라. 그런가. "

입술에 묻은 휘핑크림을 핥고, 헛기침을 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그녀를 재밌다는듯 바라보았다. 조금 긴장감이 부족해보이긴 해도,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합법과 비합법의 사이에서 줄을 타는 녀석들이니까. 안전성을 추구했을테지. 질문이 있냐는 말에 잠시 생각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지키던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졸려보이지만,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응시하는 녀석에게 다가가 싱긋, 부드러워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가게의 휘핑크림을 여자친구가 마음에 들어하더군. "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간다는듯, 날 쳐다보는 알바생에게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이야기했다.

" 휘핑크림을 좀 사고싶은데. "

" 음, 제가 사장이 아니라서... 내어드리긴 좀 곤란한데요. "

" 그런가, 그렇다면 휘핑크림이라도 좀 볼 수 없겠나? "

" 저희 휘핑크림은 그냥 평범한거에요. 마트에서도 많이 파는거죠, 상표명도 그냥 휘핑크림인거. 이거에요. 보신 적 많으시죠? "

휘핑크림을 꺼내온 알바생은, 스프레이 형식의 휘핑크림을 들고 있었다.

" 그래, 알려줘서 고맙네. 참, 요새 좀도둑이 많다고 하던데. 가게에서도 도둑맞거나 하는 일은 없나? "

" 글쎄요... 그런 건 없는데, 요새 휘핑크림 갯수가 좀 안맞더군요. 아니, 도둑맞거나 한게 아니구요. 분명히 10개정도 주문하셨다는데 영수증엔 100개, 1000개 이렇게 적혀있던걸 우연히 봤어요. 분명 10개 주문했다고, 이렇게 많은 값은 치르지 못한다고 했더니 본사 표기 오류라나? 실제로도 10개를 받았고, 10개 값만 지불했으니 상관은 없었긴 한데, 쩝. 이러다 나중에 그거 값 내놓으라 해서 알바자리 잃는게 아닐까 모르겠네요. 아, 근데 경찰이에요? "

" 경찰은 아니네만, 얘기 잘 들었네. 덕분에 집에서도 휘핑크림을 먹을 수 있겠어. "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오며, 그녀에게 저도 모르게 웃어보였다.

" 나바레테 경장, 이 이후로의 예정은 있는가? 없다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게. 일 할 시간이다. "

악의로 가득찼고, 눈엔 증오가 가득 서려있음에도, 묘하게 아름다운 웃음. 스스로도 그런 미소를 띄우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것같았다. 그러나 그런것은 중요한게 아니었다. 기회라는것이 중요했다. 공장선에서 따로 휘핑크림을 잔뜩 만들면 자금이 유통된다. 허나 공장에서 그만큼 만들었으면 판매해야 하는데, 풍선 제조 목적으로 사용했으면 무엇을 팔겠는가? 너무 쉽게 찾아냈다. 운이 좋았다. 어차피 경찰이 신경쓰지 않으니 해이해졌던거겠지. 그러면 이제 찾아가서 전부 때려죽이면 된다. 그 뒤론 그 공장을 점령하면, 벌룬과 스마일 컴퍼니를 전부 끌어내어 전면전을 치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 막혔으니 올라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겠지. 다른 공장지부들도 많다면 마찬가지로 찾아가서 전부 때려죽이면 될 일.

" 질문은 있는가? "

350 이름 없음 (DCToBAFeKA)

2022-05-04 (水) 18:38:23

>>349

"제 피의 절반은 마쿠아후이틀로 골통을 쪼개던 아즈텍 식인종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머스킷으로 손바닥만한 구멍을 뚫어주던 콩키스타도르 학살자의 것이죠."

"....적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저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식인종과 학살자의 자손이라면 세계를 도탄에 빠뜨릴 마왕이라도 태어난 것 같지만, 그 자손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일하고 사랑하고 못된 짓도 해 가며 평범하게 지내고 있다. 주로 멕시코에서. 나도 그들 중 하나고. 그러고보니 심장을 꺼내는 건 정말로 본 적이 있어. 평소와 같은 과시용 보복범죄였지. 나도 몇 번인가 그런 위기가 있었지만 잘 넘겨냈다. 그리고 이렇게 킹핀과 독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벨이라고 했다. 벨. 지위에 비해서 수수한 이름인가. 벨이 하필이면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자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낡은 코트 주머니엔 구소련제 권총이, 명품 코트 주머니엔 독일산 권총이 들어있지! 권총집에 손을 대려던 걸 간신히 허리에 손을 올리는 자세로 얼버무렸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니까. 그래도 벨이 권총을 꺼내던 건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수류탄이다. 수류탄......이랑 손목밴드. 컴퍼니 회장쯤 되면 수류탄 정도는 담뱃갑처럼 들고다니게 되는건가. 이건 좀 색다르게 무서운데?

"보통은 저희 경찰이 스마트워치나 방탄 방검복을 슬쩍 건네주는건데 말이죠...하하.."

그래, 말랑말랑한부패경찰이 보호를 받아야지. 그게 맞는거겠지... 테이저벤드를 손목에 찼다. 탄탄한 장력이 피부를 가볍게 누르고 들어갔다.




두 번째 성냥이 타오른다. 첫째에서는 혼자 들지도 못할 돈가방에 둘러싸인 모습이었고, 이번에는 깨끗한 부촌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는 장면이 아릿히 보였다. 지금은 그저 설레발이지만,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터였다. 담뱃불을 붙여주고 흔들어서 껐다. 알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상을 뒤엎고 돈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리는 갱들과 비하면 영국 왕실과 비견될 에티켓 아닌가?

"사실 순경 다음 일개 경장이라, 공식적으로는 현장 나갈 때 필요한 정보 수준이지만? 뒷구멍을 살살 캐보면 말마따나 통제를 웧하는, 권한을 가진 자를 다룰 권한이 손에 들어오겠죠?"

반지. 7천만 달러짜리 반지. 개판난 도시의 경찰직 특유의 박봉에 집에 있는 아내와 아들딸이 굶을까 마피아처럼 상납을 받는 경찰관이 한둘이 아니다(사실 나도). 간단히 계산해서 1,000명의 경찰관에게 7만 달러씩 뿌린다고 가정해보자. 상상이 가나?

"이 나라 높으신 분과 엮여서 죽어도 보여줄 수 없는 류의 것들만 빼면요."

전술하였던 예시는 단순히 돈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사회적 술수는 고려되지도 않은 수치란 말이다. 벨, 킹핀이 아닌 이상. 킹핀이 회사를 통으로 팔아넘기려는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와 동업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결코 불가능한 묘기에 가까운 술수였다.

"결과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을거에요."

언뜻 양순한 사람처럼 웃었다. 인상이 그럴 뿐이다. 인상만.




'여자친구?'

카페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여기가 카페다. 킹핀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탐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사모님이 보시면 기함을 할 장면이 많이 보인다. 용돈 주고, 반지 선물, 팔찌 선물에다가 나에게 제안Propose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친구 운운을. 그러셔도 괜찮은가요. 확증은 없지만 뒤통수가 계속 콕콕대는 느낌이라. 평소에 파파라치랑 술래잡기 하고 그러시진 않으시죠?

그럼에도 장난질처럼 지나가는 무의미한 순간에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이 카페가 그 카페였다. 내가 수사할때는 길거리를 픽셀 단위로 뒤져도 며칠 몇주가 걸렸었다. 이게 초심자의 행운이냐. 또한 행운이 날아오면 주저하지 않고 붙잡는게 당연한 일인데... 그의 사악한 웃음은 날선 요검같았다.

"시작하실거면 저는 퇴근 처리하고 오면 되는데요.. 혹시 무력이 필요하다거나, 그런 일?"

일을 쇠뿔 뽑듯 파죽지세로 해치운다. 난폭운전수의 조수석에 앉은 것처럼 얼굴이 굳는다. 나는 당황하면 웃는 표정으로 굳어버리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351 이름 없음 (fDNlmZxu1c)

2022-05-05 (거의 끝나감) 22:47:01

미안 >>349인데 요새 넘 바빠서 기력이 없네 ㅠㅠ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다시 올게... 꼭 이어올게!!!

352 이름 없음 (WbyKbAlONY)

2022-05-05 (거의 끝나감) 22:52:51

>>350 괜찮아 편한 시간에 이어줘!

353 이름 없음 (rbjc/bjMAA)

2022-05-06 (불탄다..!) 01:27:47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인간과 마족의 전쟁도 이제 슬슬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어둠을 가른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무기들을 손에 얻은 용사와 그를 보좌하는 멤버들은 마침내 마왕성에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막강한 마족들과 싸우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여정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이를 악물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계속해서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왕이 있는 꼭대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층. 진득한 피냄새가 그 장소에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 전설의 무기 중 하나로 알려진 영웅의 활을 들고 있는 푸른머리 사내는 벽에 등을 기대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 옆에는 죽은채 쓰러져있는 붉은 날개를 지닌 고위 악마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악마에게 심하게 공격당했는지 사내의 몸 여기저기엔 상처가 깊게 남아있었고 그가 꾹 누르고 있는 가슴 부위에선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마왕의 심복 중 하나인 블러디 데몬을 혼자서 쓰러뜨리는 것은 너무 무모했나보네.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만큼은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싶었으니까 후회는 없어."

전설의 무기 중 하나인 영웅의 활을 대대로 봉인해서 숨겨놓고 있던 그의 마을은 바로 그가 쓰러뜨린 블러디 데몬이 지휘한 마족들에게 불바다가 되었다. 수많은 이가 죽었고 그 중에는 그의 가족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블러디 데몬은 자신의 손으로 결판을 내고 싶었고 반드시 무찌르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다른 동료들을 꼭대기로 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왕과 대면했거나 한창 싸우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씨익 웃었다.

"올라가서 합류해야하지만 이대로는 올라가기는 커녕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어쩐다. 하..하. 나중에 모든게 다 끝나고 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다들 눈물을 흘릴까. 흘리겠지. 싸움에 승리해서 기뻐해야하는데도 그 녀석들이라면 기뻐하지 못하고 울겠지."

그래도 후회는 없어. 원수를 내 손으로 갚았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 날까. 조금씩 의식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얼굴을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미안하다. 애들아. 반드시 이 세상에 평화를 다시 가져다줘."

/가끔 마왕과 싸우는 용사물에서 볼 수 있는 너희 먼저 올라가! 난 이 녀석을 쓰러뜨리고 갈게! 를 시전했다가 아치 에너미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힘이 다 되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용사 파티 멤버 중 하나의 이야기야.
여기에 누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걸어도 별로 상관은 없긴 하지만 이미 죽였다고 분명히 이야기한 블러디 데몬이 난 사실 살아있다! 를 시전한다거나 사실 그런 일 없었는데 혼자서 헛소리하는 중2병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그런 것만 아니면 돼. 당연하지만 꼽주는 맥커터질도 사절이야. 그 이외에는 진짜 어지간하면 다 가능!

354 이름 없음 (bIuZRWORn.)

2022-05-06 (불탄다..!) 19:32:03

>>353
상식을 가진 이에게 그 남자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무식한 농부 하나를 꾀이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내 감상만을 말한다면, 블러디 데몬은 복잡하고 기복이 극심한,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을 통제할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자였다. 인간이든, 마족이든, 그런 성정을 가진 이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주변에 고통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자를 상사로 두고서 마냥 괴로웠다고 단정지어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의 악덕이다. 즉흥적이고 가변하는 존재였기에 그는 때때로 관대했고, 소란으로 주변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소양도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그 자의 편집증적인 광기가 조금은 만족감을 느끼던 날에, 우리는 지극히 악마적인 광란이 충만한, 족히 몇 달분의 유흥에 버금갈 수 있는 연회를 제공받곤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블러디 데몬의 병리적 집착은 진정되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의 부사수로서 종종 무의미한 위치의 부락과 도시들에 철저한 파괴를 자행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납득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자신의 존재를 파괴할 어떤 존재, 혹은 물건에 대한 공포는 항상 블러디 데몬의 동선, 그리고 나의 동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점의 확보나 전리품의 수급 같은 실리적인 동기들은 매번 존재조차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한 파괴라는 목표에 밀려 무시되었다. 대개는 어떤 인간, 때때로 창이나 도끼, 혹은 활, 심지어는 낡은 베일이나 녹슨 식기로 변하는, 안개 뒤쪽의 모호한 목표.

그게 내게는 항상 불만이었건만......

지금, 회랑의 저편으로 보이는 죽음의 모습은 그 자가 평생 집착했던, 그리고 내게도 흔한 유언비어의 일각으로나마 기억되는 악의 운명론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활이었구나."

처참한 관통상에 터져나간 창자와 내장들을 피해 걸어가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시신에 가까워질수록, 배가되는 불안감과 위화감 속으로 오랜 시간동안 억눌렀던 억하심정이 터져나왔다. 그래, 이 날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사수를 집어삼킨 악의 운명이 정말 어떤 신기인지, 평범한 유시인지의 여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체를 남기는 종류의 공격에 그가 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계승받을 게 남아있다.

조용히 열주들 사이를 지나, 어느 새인가 목표에 도달한다. 거리낄 것도 없다. 무릎을 꿇고 자세를 죽인다. 힘없이 구겨진 붉은 날개를 치우고, 시신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희미한 숨소리, 그쪽으로 집중한다.

평생 공포에 쫓긴 불쌍한 병신의 숨을 거둬간, 준비된 사수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내 지척에.

강인한 존재로군.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치명상 속에도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못한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남자에게 설사 죽음에 반쯤 안겨버리고 말았더라도 1번 더 활을 쏠 여력이 남아있을지의 여부만이 중요하다.

만약 있다면, 내 사수를 위해 준비되었던 신기가 나에게도 영면의 도구로 작용하게 될까?

"쏠 텐가."

355 이름 없음 (rbjc/bjMAA)

2022-05-06 (불탄다..!) 20:05:10

>>354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힘없이 사내의 얼굴이 그곳을 향했다. 아직 누군가가 남아있었나? 아니. 남아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 사라져가는 의식을 애써 꽉 잡는 것은 아직 이 자리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상황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힐은 없었으나 그래도 활시위를 당길 정도의 힘은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허나 자신의 몸 상태, 그리고 흐르는 피. 그것을 모두 생각해보면 그나마 모든 힘을 끌어모아 정말로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는 단 한 발의 기횔 뿐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활을 애써 꽈악 쥐며 그는 팔만 겨우겨우 올려, 상처부위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올려 시위를 잡았다. 손으로 막혀있던 진한 향이 더는 가려지는 일 없이 그대로 코 끝을 찔렀다.

"네가 먼저 올라간 내 동료들을 쫓는다고 한다면. 하하. 허나 항복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나도 굳이 쏘고 싶진 않은데. 어차피 이제와서 쫓아간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바꿀 순 없어. 마왕은 그 녀석에게 토벌당하고 너희들의 패배로 전쟁은 끝날테니까. 쿨럭!"

힘을 주고 말을 한 탓일까.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스스로 목숨이 다 할 것을 직감하나 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가족의 복수는 했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도 했다. 그렇기에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았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들이 모든 것을 끝낸 후의 세상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말해두는데 나를 무시하고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승산은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는 어차피 곧 죽게 될 녀석 하나 내버려두고 목숨 보존할 셈 도주하는 것은 어때? 그 녀석들도 싸울 의지가 없는 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뒤쫓진 않을테니까."

만일의 경우, 만약 자신을 공격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동료를 뒤쫓아가려고 하면, 그 즉시 활을 발사할 생각으로 그는 그 끝을 눈앞의 대상에게 겨냥했다. 곧 꺼져가는 목숨과 맞바꾼 마지막 한 발. 빗나갈지, 명중할진 모르겠으나 만일의 경우엔 망설이지 않고 발사하려는 듯, 그의 꺼져가는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356 이름 없음 (bIuZRWORn.)

2022-05-06 (불탄다..!) 20:46:14

>>355
이 남자는, 아직 말을 할 기력까지 남아있어서 희미하게나마 나에게 협박까지 하고 있다. 경이적인 생명력이다. 내가 저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필히...... 아니, 그 전에 육체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저 상처들은 일생 쫓는 동시에 쫓겼던 공포의 근원을 비로소 마주한 대악마의 필사적인 공격에 의한 결과물일 터, 나라면 즉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확신하건대, 저 활은 당길 수 있다.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

복잡해지는 심사, 삶과 죽음의 기로, 희미한 두려움, 그러나 모든 맥락이 무의미하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은 순수한 감상의 표현이다. 그 기적과 같은 강인함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 남자에 대한 감상 또한 순수하게 호의에 가까워진다. 심, 기, 체의 균형이 맞고 힘과 힘의 연결이 긴밀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명궁의 눈, 혹은 달인의 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 그간 조금은 잊고 있던 것들이다. 의무에 대한 상기. 오랜 시간 의식 밖으로 밀어놓았던 충성의 의무에 대한 기억이다. 본 적도 없는 군주를 위해 일생 대적했던 어떤 이보다도 강인한 인간들을 향해 뛰어들어야 할 불나방의 의무, 악덕이란 항상 강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는 않는다. 조금도.

"동료들이 있나, 분명히 아직 살아있고, 또 당신이 수행할 수 없게 된 목표의 후반부를 통제하고 있겠군. 그게 당신네들의 방식이니까."

그래, 인간들이 죽음을 넘을 수 있는 방식이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이다.

"대화의 여지가 있을 것 같군. 그리고, 불쾌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어떤 면에서 닮은 부분이 있어. 방금 당신의 손으로 죽인 존재와."

그러니까 내 사수여,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당신을 계승하고 있으니.

"내 목적은 블러디 데몬을 섭식하는 것이고, 그게 달성된다면 내 군주에 대한 의리는 없다. 이 기나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라고는 이것 뿐일 듯 하군."

357 이름 없음 (rbjc/bjMAA)

2022-05-06 (불탄다..!) 21:12:59

>>356

"그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핫. 지금 내 몸 상태가 이런 것이 유감스러운걸. 정말로 불쾌한 소리에 바로 대응을 할 수 없는게 말이야."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하니 그는 바로 활을 당기지 않고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보는 것을 택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마족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활을 쏘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더 싸울 의지가 없는 이라면 굳이 피를 더 흘리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블러디 데몬을 섭식한다는 그 말에 그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죽어버린 녀석을 먹어서 얻을 수 있는게 뭐지? 대답에 따라서 내 행동도 결정될 것 같아서 말이야."

만약 섭식함으로서 새로운 블러디 데몬이 탄생하게 되고, 자신의 동료를 위협하는 적으로서 강림한다면 지금 여기서 막아야만 했다. 물론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점차적으로 시선이 흐려졌고 조금만 느슨해져도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으니까. 붉은 핏물은 그의 옷을 따라 땅을 향해 흘렀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질 정도였다.

"이 길고 긴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행위가 아니길 빌겠어. 설사 여기서 내 공격을 피하고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내 동료들의 힘까지 피할 순 없을테니까."

358 이름 없음 (bIuZRWORn.)

2022-05-06 (불탄다..!) 21:38:25

>>357
"모르나?"

부드럽게 반문이 나왔다. 어쩐지 모든 것이 간단하고, 쉽게 풀릴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끝으로부터 조금씩, 힘을 가져온다는 느낌이 오면 올수록 그러했다. 어쩌면 도취의 감각인지도.

"피상적이고 비타협적이었지만 우리 간의 전쟁은 충분히 길었지. 당신같이 경력이 많은 자라면, 적어도 나만큼은 우리에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다."

상대의 안색이 불쾌해진 만큼이나, 내게도 좋은 화제는 아니다. 다만 섭식이 시작된 순간부터, 분노 이상으로 상기되는 마음이 계속 말을 장황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소재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쓸데없는 말을 자꾸 부연하게 된다.

"악마가 다른 악마를 섭식한다는 것은, 그 자의 힘과 의식을 취하기 위한 행위이다. 먹는 자는 피식자의 힘과 지식을 체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하고, 먹히는 자는 포식자의 일부로 흡수당해서 죽음을 넘는 것이지. 당신네들이 동료에게 의지를 의탁해서 죽음을 넘는 것처럼."

그래,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이 시체는 닮았지. 죽어도 죽음을 넘을 수 있으니까.

"블러디 데몬이, 나를 부사수로 들인 이후로 유일하게 약속한 보상이 이것이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전쟁 속에 있었지만, 결국 이 전쟁에서 얻는 것은 이것 뿐이야. 이것 뿐......"

좋지 않다. 말이 너무 길어진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섭식이 잘못된다면, 역으로 내가 먹힐 가능성도 조금이나마 있다. 내지는 의식이 과도하게 섞여서 내가 내가 아닌 존재로 변이될 가능성도.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은 확실히 내 통제 하에 둬야만 한다.

이것만큼은 내 봉사의 정당한 삯이니까.

"그쪽은 어떻지? 이 전쟁에서 얻은 게 있나? 어차피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집중의 시간을 벌기 위해, 반문했다.

359 이름 없음 (rbjc/bjMAA)

2022-05-06 (불탄다..!) 21:50:31

>>358

힘과 의식을 취하기 위한 행위라는 말에 그는 말없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자가 또 다른 블러디 데몬이 되어서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저 힘을 취하고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싸움을 희망하지 않고 싸울 마음이 없는 마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방식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상대 종족을 무조건 멸하려 하는 섬멸이 아니었으니까. 빛의 뒤에 어둠이 있고, 밝음 뒤에 그림자가 있듯이 수많은 종족들은 결국 어떻게든 연결되어 조화를 이뤄야하는 법이었다.

"복수. 힘없는 내 부모님과 친구들을 죽인 이를 죽였으니 이제 여한은 없어. 누군가에겐 어리석을지도 모르고 개인만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한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나 혼자서 그 녀석과 결판을 낸 거였고."

물론 살아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동료 중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면 같이 따로 여행을 가자고 한 이도 있었고 재건한 마을에 가서 조용히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복수를 했으니 이대로 가족과 친구들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서로서로 날카롭게 있진 말자고. 이것만 대답해. 그걸 다 먹고 힘과 의식을 얻고 나면 어쩔 참이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나도 방해하지 않겠어."

허나 그 힘으로 다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동료들을 공격하러 간다면 활시위를 당길 뿐이었다. 그 화살은 마를 멸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쫓아갈테니까. 단 한 방에 죽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부상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약간의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약간의 시간끌기가 자신의 동료들에겐 필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어차피 마왕은 내 동료들의 손에 쓰러질거야. 그렇다면 굳이 힘겹게 다시 서로서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360 이름 없음 (o8CNoXgSnE)

2022-05-08 (내일 월요일) 06:24:48

>>359 /기껏 이어놓고는 미안한데 연휴라 괜찮을 줄 알았더니 나 일이 바빠졌어
/중단해도 괜찮을까?

361 이름 없음 (Xfe7y2tonY)

2022-05-08 (내일 월요일) 10:15:02

>>360 괜찮아! 괜찮아! 바쁘고 그러면 어쩔 수 없는거지!

그럼 >>353으로 다시 구해볼까! 혹시 저걸로 다시 잇고 싶은 사람은 이어도 돼!

362 이름 없음 (FyHRxC/6T.)

2022-05-10 (FIRE!) 14:54:52

아직도 3시가 안 됐다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등받이에 무거운 몸을 뉘인다. 모니터 속에 기어들어갈듯이 구부정해있던 척추, 어깨, 목이 좀 펴지는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든다. 은은한 두통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고, 블루라이트 차단에 뭐 이것저것 좋은 옵션을 추가하여 만들어 렌즈만 돈 십만원 넘는 안경은 제 기능을 하긴 하는건지. 눈도 뻑뻑하고 공기도 탁한 것 같다. 아니, 탁했다. 여기서 살아숨쉬는 건 나뿐이라 나만 아는 이야기라 한탄할 곳도 없다. 이번 망자만 접수하고 바람 좀 쐬러 가야겠다.

"대기번호 573번 망자 호출합니다."

제발 무난한 망자이길. 난동을 피워 구속당해 오는 망자는 사절이다.

363 이름 없음 (eu0hz8FrXc)

2022-05-13 (불탄다..!) 00:46:33

"당신들을 구속하겠습니다!!"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이야기였다.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내의 전방의 지형은 모두 꽁꽁 얼어붙은 상태엿다. 지금이 한겨울이라면 그런 지형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으나 지금은 더위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5월 중순이었고, 땅 지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녀 한 쌍의 주변을 감싸고 있듯이 얼어붙어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남녀 한쌍은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허나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그 하얀 검 끝을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능'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내는 그런 자들을 막아서는 '이능'을 지닌 멤버 중 하나였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출난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던 사내는 다른 팀의 멤버들이 오자 붙잡아두고 있던 범죄자 두 명의 신병을 인도했고 두 명은 구속되었다. 이송되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던 사내는 뒤로 돌아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조금 쉬는 분위기인 듯 했으니 이렇게 혼자 달을 구경해도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하며 사내는 아주 살짝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거리를 띄웠다. 딱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냉정한 성격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열정적이고 열혈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아주 살짝 관심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이능을 가진 범죄자가 있고 그것을 이능을 지닌 팀이 막아내고 체포하고 잠시 쉬는 타임이라는 느낌이야. 누가 와서 어떻게 이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중2병 연극 그만. 이라는 식의 꼽이라거나 맥을 박살내는 맥 브레이커 같은 것은 없었으면 해. 그 외에는 갑자기 내 캐릭터를 죽여버리는 거 아니면 자유롭게 잇기 가능이야.
개인적으로는 약간 과거 모카고 같은 느낌을 떠올려서 썼으니 분위기에 참고를 해도 좋을 것 같고?

364 이름 없음 (2tu3LRqfzk)

2022-05-14 (파란날) 16:25:58

ㄱㅅ

365 이름 없음 (hU8uvS588w)

2022-05-16 (모두 수고..) 12:33:51

>>363
"OO 씨, 잘 쉬었어요?"

사내의 뒤로 다가와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넨 이는, 172cm의 결코 작지 않은 신장에, 살집이 붙어 겉으로 보기에는 둥글둥글한 체형의 몸 위로, 전투로 인해 구겨지고 더러워진 하얀 제복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로 질끈 묶은 여성으로, 그의 직장 선배인 도라희였다. 정규직이 된 건 좋은데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갈 지 모르겠다니까. 그나마 비정규직일 땐 범죄자만 잡아서 넣으면 됐는데 이제는 범죄자랑 씨름한 직후엔 서류 작업 해서 윗 분들한테 보고해야 하잖아. 피의자 신상에. 범죄 목록에, 추적 경로랑, 체포과정까지... 써서 내고 끝나기만 하면 몰라. 윗분들이 절차, 서류 그런 거 빠지면 사람 혼 빼먹을 기세로 뭐라고 해대니까 업무시간 상당부분을 종이씨름에 할애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어. 근데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해도 결재를 못 받고 반려되기 일쑤고,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피드백도 엄청 느려터져서 한 숨 돌렸나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하고... 가끔은 윗 분들이 범죄자보다 더 끔찍하다니까. 그 새끼들은 암만 날 굴려대도 체포도 못 하잖아. 에휴, 됐다. 솔직히 불만거릴 본격적으로 따지자면 이 실용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금방 더러워지는 제복부터 시작해도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럴 시간은 없지. 일해야 하잖아. 라희는 일터에선 뱉지 못할 불만을 웃는 얼굴 너머로 삼키곤 스스로를 타이르며, 가벼운 태도로 후배를 재촉했다.

"이대로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야 저도 태산같지만 윗 분들한테 보고 해야하잖아요? 숨 다 돌렸으면 얼른 서류 작업하러 가자구요."

그래도 국민연금에 건강보험료도 반이나 대신 내주고, 급여도 안정적으로 나오는 정규직이 훨씬 좋지.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거지만 우리 귀요미 발레 학원도 내년에는 꼭 끊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짧은 시간도 아닌데도 착하게 잘 기다려주고 있으니까 나 힘들다고 배신할 수는 없지. 우리 와이프도 고된 거 참아가며 힘 내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찡찡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고. 그래도 복지 더 나은 곳 있으면 확 그냥 이직해 버릴테다. 후배를 재촉하는 김에 스스로도 타이르며, 그는 어서 오란 투로 후배를 향해 손짓했다. 밤은 깊었지만 오늘 안에 퇴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이름이 안 나와있어서 부득이하게 OO로 처리했어:) 이름 알려주면 다음 턴부터 반영할게!

366 이름 없음 (sQr06crF06)

2022-05-18 (水) 00:29:16

왔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쓰레기더미나 다름없는 잿빛 공터의 철근 위에 앉아 당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인다. 마치 농구 기술을 선보이듯, 제 등 뒤로 팔을 꺾어 무언가를 당신에게 향해 던진다. 빵이 든 봉지는 먼지가 좀 묻어있지만, 빵은 깨끗하다. 당신을 향해 흔들어보이는 손 아래, 널널한 소매에 가려진 팔에 주삿자국이 여러개 찍혀있는 것이 보인다.) 헌혈차는 방금 갔어. 31구역으로 간다더라. 저번에 맡았다던 일은 어떻게 됐어? 할 만해?

367 이름 없음 (N59eG87gLU)

2022-05-18 (水) 15:04:00

>>366 31구역? 빨리도 가네, 원. 손님 모자라서 아쉬울 일 없으니 이해는 간다만.(투덜거리면서 봉지를 살짝 열고, 빨대 하나를 슬며시 꺼내 집어넣은 다음, 코끝을 대고 살짝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냄새 좋네. 오늘 들어온 밀로 구운 거지? 니미럴, 이런 상등품 하나면 보름은 빠릿빠릿해진단 말이야. (더 볼 것도 없이, 봉지를 뜯은 다음 대강 뜯어서 조금 맛본다.) 맡았던 일? 말도 마. 꼬일 대로 꼬여서 지금도 슬래셔 갱들이랑 한판 하고 오는 길이야. (옆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더니 아수라장같은 공터의 그나마 적당할 법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궁시렁거린다.)막 착수하려고 수건이고 안무고 준비 다 해서 갔더니만, 여기 건은 자기네들 봉사라는 거지. 돼지같은 것들. 온 동네 양로원이 다 지들 나와바리인줄 안다니까.

368 이름 없음 (sQr06crF06)

2022-05-18 (水) 20:02:08

>>367
최근에 31구역 자경단 내분이 일어나서 마약 공급로가 채식주의자 혈관처럼 뚫려버렸대. 신종 마약도 들어와서 장난 아니라더라. (빵을 맛보는 당신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이 빵을 받아라, 내 피이니.’라고 덧붙인다.) 슬래셔 애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다 보네. 기업의 애완견 화장지 대용품이었던 애들이. 원래 못먹던 애들이 한 번 맛 본 건 아득바득 안뺏기려고 애쓰잖아. (마찬가지로 빵 봉지를 뜯어 크게 한 입 베어문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입만 우물거리며 뿌연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빈 하우스 빌딩에 살던 맥퀸 부인, 어제 죽었대. 약물 과다복용으로. 맨날 사탕이니 뭐니 주셨었는데.

369 이름 없음 (nGc0/JwOj6)

2022-05-18 (水) 20:41:24

>>368
그 치들도 말야, 곤궁은 한 모양이지? 약물 계통이 꿈틀댈 때는 말단부에서 변화가 올라오는 건 절대 아니란 말이야. 약팔이 새끼들은 다 약쟁이들이라고. 돈 생기면 사먹고 돈 없으면 팔고, 그러다 죽을 병신들.(신경질적으로 빵을 쑤셔넣다가 잠깐 목이 매여서 꺽꺽거린다.) ......아무튼, 31구역 시끄러운 건 애초부터 마약 건일 게 뻔하지. 따라가보면 부랑자 놈들 상대로 신상품 쇼케이스 벌이고 싶은 큰 손 하나 있을 거라고. (당신의 손에 있는 빵봉지에도 우악스럽게 손을 집어넣으며, 겨우 조금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따지고 보면 슬래셔 그 거렁뱅이들도 대가리가 없는 것들은 아니야. 결국 개사료도 고기니까, 먹고 싶다는 호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지. 급한 새끼들은 헌혈차나 양로원이나 똑같다니까, 노인네들 지옥 보내주는 싸구려라도 꽉 잡아놓는 게 나름의 수완이겠지. 그것밖에 안 남은 거지새끼들. (그러다 당신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내색은 않지만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중독자는 다 단두대에 목 걸어놓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입맛만 버렸구만.

370 이름 없음 (sQr06crF06)

2022-05-18 (水) 23:28:48

>>369
그래도 약팔이 중에서도 괜찮은 애들도 몇몇 있어. 쏜 디키빈, 마그네스, 록커...셋 중 둘은 죽었네. 진짜 이상해. 록커의 노래는 끔찍했지만 칼림바는 끝내줬는데, 재능도 못살린다는게.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다, 당신이 꺽꺽거릴 때 등을 토닥여준다.) 그렇겠지. 그래서인지 네이밍도 끔찍해. 정적 낙원이래. 근육수축제 성분도 같이 들어있어서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는대. 풀릴 때도 소변 다 봤을 때처럼 기분 좋다나. 야! (빵봉지를 빼려해보지만 역부족이라 그냥 당신 얼굴을 향해 던진다.) 너무 부조리해. 이 거리의 노인들은 모두 과거에 훌륭한 어른들이었단 말이야. 센트럴 실버타운, 그 건만 공중분해되지 않았더라면. (그러다 당신의 말을 듣곤 노려본다.) 맥퀸 부인은 딱한 사람이야. 과거 교수에, 자식들이 죄다 변호사에 검사인데도 얼굴 한 번 안내비쳤잖아. 그냥, 이 거리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371 이름 없음 (HD5CPcnXLg)

2022-05-19 (거의 끝나감) 07:34:47

>>370
록커는 병신이었어. 병신이었다고. 동네에 널린 게 운반책인데, 지가 뭐라고 건수마다 기어나와? 잠자코 오디션이나 보러 갈 것이지......(텅 빈 봉지에서 부스러기나 긁어모아 입에 털어넣는다.) 그래도 마그네스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걔는 진짜로...... 좀 정상적인 곳에서, 의류 브랜드같은 거라도 운영했으면 좋았겠지. 큽!(안면을 후려친 빵봉지를 잡아 대충 근처에 내려놓는다.) 뭐, 결국 책임은 본인들에게 있다는 거지만, 나도 동정은 해. 맥퀸 부인도 그렇고. 진통제 떨이로 전락할 프로젝트에 홀려서 재산이고 뭐고 다 포기한 건 그 여사님 잘못이지만, 그래도, 실수 한 번에 망가져도 상관없는 볼품없는 인생은 아니었을 거야.(조용히 자기 손바닥을 펴고 응시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린다.) 휴, 그리고 뭐, 알라시도 그랬고.(말을 꺼내놓고는, 슬쩍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372 이름 없음 (w6ecSNXhaU)

2022-05-20 (불탄다..!) 01:01:27

>>371
...야, 오디션까진 아니야. 걔 오디션 나갔으면 극단적 선택 했을걸. (푸하하, 알맹이 없는 웃음을 흘린다.) 맞아. 결국 운반책 애들도...나쁘지 않다곤 못하겠지만, 그냥...어쩔 수 없는 놈들이었다고. (습관적으로 손등을 긁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당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다, 뒤에 나온 이름에 눈이 커진다.) 아니. 알라시, 걔는...걘, 실수 같은 거 한 적 없어. 너도 알잖아. 그런 꼴을 당해도 싼 애가 아니었어. (손등을 긁던 손이, 점점 손목의 흉터로 옮겨간다.) 내가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왜 하필 그 때 난...씨발. (아무리 그라 해도 욕을 지껄일 수 밖에 없다.) 경찰들은 아무도 안믿어줘.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지만 알라시가 어떤 앤지 알면서. (몇 번이고 했었던 말을 다시금 중얼거린다.) 분명 타살이야. 꼭 잡아낼거라고. 근데, 너무 무력해...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길고 무거운 숨을 뱉는다.)

373 이름 없음 (baXJa7Yf0I)

2022-05-20 (불탄다..!) 09:34:55

>>372
하기야, 악기도 무슨 지처럼 모자란 걸 해가지고, 우리같은 부랑아들이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힙합이나, 메탈이나, 보통 그런 쪽이지. 그래도 나는 걔 연주 좋아했지만. (침을 꿀걱 삼키고, 괜히 바닥을 본다. 당신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쉰다.)자꾸 긁지 마, 피부 벗겨질라. (약간 후회스러운 어투로)이거 괜한 화제를 꺼냈구만. 그때 이후로...... 바뀐 것도 없고, 여전히 하루 하루는 지랄같고, 나도 답답......해서 말야.(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쉼 없이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으면 다 잊혀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책임 있다면, 하필 이런 개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는 거지. 쓰레기장에 꽃이 피어 봤자, 몇 번 주변에 휩쓸리면 결국 구분이 안 간다고, 우리가 꽃은 아니겠지만. (잠시 고민하듯 눈빛이 흔들리다가, 지긋이 당신을 보고 조심스레 말한다.)이 말 하면 내 아구창이 남아날지는 모르겠지만, 난 역시 자살 같았어. 그...... 후.(깊은 한숨.)

374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02:26:50

내 인생은 시작부터 운빨망겜 그 자체였다. 돈과 권력, 그리고 빌어먹을 능력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운이 없었다. 그런 세상에 하룻밤 장난질로 생겨난 것도, 부모 모두에게 버려진 주제에 죽지 못 하고 살아남은 것도, 천운이 아니라 천악이었다. 어느 멍청한 집시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 날 그 쓰레기장의 차가운 봉투 속에서 죽어버렸을 텐데. 그랬다면 여태 살아, 아득바득 살다가 이렇게 괴로운 최후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운이 없다. 그래도 이제야 끝나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25년이나 이렇게 살았으면 충분하지...

"쿨럭, 커흑..."

어두운 골목길에 내 밭은 기침 소리 울린다. 입에 고였던 핏물과 새로 솟은 핏물 뒤섞여 바닥에 흘뿌려진다. 새벽이 깊은 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길 한구석, 차가운 벽과 바닥과 오물 뿐인 이곳이 나의 마지막 잠자리가 될 곳이라니, 마지막만큼은 좀 멀쩡한 곳으로 갈까 싶어 몸을 일으키다가 포기했다. 다리는 없는 것마냥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베인 옆구리에선 이미 피가 바닥에 늪을 만들 기세로 흘렀다. 움직여봤자 몇분이 고작이겠지. 그럴 바엔 편안히 잠이나 들어버리자고,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쉬자며 몸을 굴러 벽에 기댔다.

아아, 정말 엿 같은 인생이었어. 꽃다운 계집으로 태어나, 남들 다 하는 거, 사랑도 놀이도 한 번 못 해보고, 그저 살다가 가는 인생이라니. 부디 다음 생은 없길 바라며 점점 무거워지는 눈커풀을 움직인다. 깊은 밤, 빛이라곤 희미한 달빛 뿐인 골목길, 그 끄트머리에 처박힌 내 쪽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한 채였다.

//맥브레이커 사절.

375 이름 없음 (UAJJsecazA)

2022-05-21 (파란날) 03:23:44

>>374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끝 맺히고 싶은가요? 대단원에 이른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그 발소리의 주인은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어색할지도 모르는 인물 이였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 이던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그 인물은 지금의 상황에서 결국은 그렇게 되도록 된 경위를 이야기, 우화에 비유하는 듯이 말하며 건넸습니다. 그 억양 속에 담긴 것은 마치 여러 번 보았다는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그럴 뿐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으슥한 곳에서 위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 이러한 비유법을 들면서 태연이 말을 건넨다는 행위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저의 시간 역시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허리를 넘어서 닿는 긴 흑발에 검은색의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이런 흐릿한 달빛 만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도 조차도 검은 양산을 손에 쥔 위고 아래고, 전부 검은색의 투성이로 그렇기에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다른 색이라면 옷에 가려지지 않는 부분인 흰 얼굴과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듯한 선명한 색의 눈동자 뿐인 소녀가 이번에는 눈웃음을 한번 지으며 이어서는 이번에도 애매모호한 말로서 물음을 건넵니다


그녀는 그 앞에 인물의 바로 곁에서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돌아 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그대로 멈춰 서서는 바라보았습니다

376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05:37:02

>>375 이어줘서 고맙지만.. 내용이 내가 생각한 흐름이랑은 맞지 않는거 같네. 스루할게. 미안.

377 이름 없음 (atpR9LS59.)

2022-05-21 (파란날) 07:55:07

>>374

내겐 자비심도, 감정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온 지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스스로의 그런 '나약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이제 그 절반도 덜 되는 수준이다. 나는 온정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났으니, 무기에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늦은 밤이다. 내 삶에서 의미가 있던 날들중 대다수는 다른 이들이 잠드는 이 밤에 존재했다. 부모님께서 헤어진 것도 밤. 홀로 남게 되어버린 것도 밤. 스스로의 신분을 국가에 맡기기로 한 것도 밤. 소중한 전우들을 잃은 것도, 총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소중한 그녀를 만나고, 잃은 것도. 전부 밤이었다.

오늘 밤은 그녀를 잃은 지 3년이 지난 밤이다. 그녀의 친구들이자 곧 나의 친구들인 이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존재를 기리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익숙한 향기가 골목 한 구석에서 풍겼다. 본능과 이성이 한꺼번에 경보를 울렸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냥꾼이 아닌 사회를 누리는 시민으로써.
그곳엔 내가 있었다.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성별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겠지만,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이 광경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상처를 입고 세상을 원망하는 눈은 분명히, 그 때의 나 자신과 같았다.

"세상에."

욕설조차도 하지 못하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랜 공포는 아직도 내 뇌 한 구석에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피를 흘린다는 상황을 지나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보통 허리춤에 권총집을 찰 때, 나는 작은 가방을 찼다. 그곳에서 꺼낸 간단한 도구라면 분명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그 때 구해내지 못한 내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았다.

"우선 상처, 아니 출혈을... 잠깐만요."

너무 급해서 그런지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다친 사람의 환부를 확인하려 들었다.
가로등 불빛도 없이 희끄무레한 달빛 밖에 닿지 않는 골목길 구석에서,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존하여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는 멍청한 짓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전에 이어진 것을 스루했다면 혹시 이걸로 이어봐도 될까!

378 이름 없음 (V7gUo0Mu4c)

2022-05-21 (파란날) 07:55:46

>>374

기름 두른 팬 위를 널뛰는 옥수수 낟알처럼 소란스러운 거리가 싫어서 피하고 피한 것뿐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요란스럽던 소리가 죽으면서 흘린 붉음일까 싶어 눈을 비비면 한 명의 사람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축록에 사냥당한 산짐승처럼 베인 허리로부터 생명의 증거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누군가. 웅덩이를 만드는 흥건함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마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그 냄새가 퀘퀘 묵은 지난날의 상흔을 아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고 마는 것은 모른 척, 못 본 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속삭이는 양심을 등진 이성의 꼬드김 때문이다.

지난 삼십 년의 평화를 깨부수는 짓은 삼가고 싶었다. 사건을 모르고 사고를 잊은 척하며, 한 번 궤도를 벗어났던 삶을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 되돌려놓았다. 그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고한 피해자는 없다며 세상만사에 삐뚠 태도를 보이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도움의 손길을 망설이는 내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 뜨거움을 직접 데어봐야만 아는 멍청이였냐며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가라고 내 엉덩이를 걷어찼겠지. 생면부지 타인,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은 것이 분명한 사고 물건에 어디 손을 대려 하냐면서 윽박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달빛을 반사해 빛나는 붉은 피가 내게는 건널목의 적색등처럼 보였다.

더는 다가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이 보였다.

"아가씨. 돈 있어?"

// 도전!

379 이름 없음 (V7gUo0Mu4c)

2022-05-21 (파란날) 07:56:50

오 젠장. 못 보고 올렸네. 제 꺼 하이드 부탁합니다!

380 이름 없음 (Mx6oRjfhOo)

2022-05-21 (파란날) 08:42:28

핏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한때는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등등. 정말로 다양한 종족이 서로의 생존과 이익관계 등으로 싸웠지만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던 '흑막'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흑막이야말로 자신들이 평화를 위해 처치해야 할 존재라고 인식된 수많으 종족들은 이내 모두 힘을 하나로 합쳐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모든 것을 뒤에서 지배하고 남 모르게 조종하던 흑막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고 이제는 서로 더 싸우지 않도록 평화협정을 맺음과 동시에 제대로 된 평화가 찾아왔다.

바로 전날만 했어도 전쟁에 차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은 이들의 표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막과 싸웠던 이들 중 한 명인 인간족의 젊은 사내는 정말 유유자적하게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성스러운 검을 들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세계에 평화를 되찾아온 주역 중 한명인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평화를 즐겼다. 세간에 떠도는 소설을 보면 보통 자신 같은 케이스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며 많은 부와 명예가 주어질지도 모르나 현실은 마냥 그렇진 않았다. 물론 왕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대우를 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을 세간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친분이 있는 이들이야 대단해!! 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럼 오늘 이 축제만 즐기고 슬슬 다른 곳으로 가볼까. 뭔가 계속 여기에 있기도 애매하니 말이야."

수도 출신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작은 마을 출신이었던 그는 슬슬 여길 떠나 고향, 혹은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아닐까 생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수도 생활이 불편하다거나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검이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시리어스한 장면이나 컷! 아. 배우님. 다시 제대로 해주세요! 같은 맥브레이커만 아니면 오케이!

381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17:19:08

>>377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겨간다. 이제 몇번,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앞을 보고나면 내 의식은 완전히 끊겨버릴... 터였다.

"ㄴ, 누구, 야..."

의식이 희미해서였는지, 나는 누군가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 했다. 스마트폰 플래시 특유의 빛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죽어가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어도 몰랐을거다. 그러나 그는 멍청하게도 플래시를 켰고 그 빛은 가라앉던 내 의식을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불쾌한 각성의 감각과 마지막을 방해받았다는 짜증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

"오지랖, 떨지 말고... 꺼져. 털어갈 것도, 없으, 니까..."

갈린 목으로 억지로 쥐어짜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소음 그 자체다. 말하느라 목이며 몸 곳곳에 힘을 준 탓에 잊어가던 고통이 새롭게 밀려와, 신음으로 낮게 목을 울리자 짐승의 그것과 흡사한 소리가 난다. 그 뿐이랴, 메마른 목을 울렸으니 마른 기침 터지는 것도 있다. 커흑! 크흑. 온몸을 울리는 기침 몇번 하자 몸이 파르르 떨리고 슬슬 굳어가던 옆구리로부터 뜨끈한 피가 또 한웅큼 왈칵 솟구친다. 내 아까운 피, 이 이상 쏟으면 안 되겠다는 본능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를 짚지만 힘없는 손으론 지혈도 뭣도 안 된다. 다만 차게 식어가는 손에 갓 흐르는 피는 뜨겁다고 느끼며, 괴로운 숨을 몰아쉰다.

"내버려, 둬... 이제, 이제야... 쉴... 거라고... 나는..."

비몽사몽에 가까운 감각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접근을 허락치 않듯 몸을 웅크렸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뜯어진 테크웨어 한벌만이 내 수의가 되어주면 족했다. 이제와서 도움 따위, 누군가의 도움 따위는...

//물론 오케이지!
>>378도 이어주려해서 고마워.

382 이름 없음 (atpR9LS59.)

2022-05-21 (파란날) 22:27:10

>>381

이 거리의 또 다른 그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아마, 이 사람에게도 이렇게 되어버린 사연이 있겠지. 특히나 단순한 사고가 아닌, 흉기 등으로 노려진 듯한 모습을 보면 더더욱.
이 사람과 엮이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머리 속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지나칠 수 없었다.
기사도 정신 따위나 군인 정신 같은게 아니다. 이건 두려움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모든 것에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같아 보였다.
출혈과 그것을 가리는 손을 바라보고선, 조심스레 그 손을 옮겼다. 웅크린 틈새로 잡은 피투성이 손목은 차가웠다.
출혈도 많고, 체온도 잃고 있다. 의식을 잃지 않도록 조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간단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을 물어가며, 상처 부위의 옷을 조금 걷어올렸다. 날붙이로 인한 절상인가? 확실히 그냥 사고로 인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목숨이 빼았기는 것은 이제 사절이다. 특히나 내 눈 앞에서.
망설임 없이 소독 거즈의 포장을 뜯고서, 거즈를 환부에 대고 꽉 누른다. 물론, 상태를 보면 지혈만으론 부족하겠지만 일단 피를 멈춰야 한다. 후송은 그 다음이야.

구급대를 불러야 하나? 아니. 어쩌면 그랬다간 허사가 될 수도 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몇몇 상황에선 더 무력한 경우가 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들어올려 조금 고민하고 있다가, 본인에게 묻기로 했다. 자칫하면 구급대를 기다릴 틈도 없이 이동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요?"

383 이름 없음 (qAvSXG8Ujw)

2022-05-21 (파란날) 23:40:03

>>382

그만, 그만 날 내버려둬. 이 이상 나를 이 거리에 붙잡아두지 마. 더 이상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지 말라고. 나는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빠져나간 피의 분량만큼 체온을 잃었기에, 절대 춥지 않은 이 계절에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신을 엄습한다. 아, 젠장, 진작에 정신을 잃었으면 이런 한기는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저 불청객 때문에 내 마지막 가는 길도 영 개운치가 않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반항을 할 수 없는 내가 더 한심스럽고, 짜증이 났다.

"두라고, 좀, 손 대지마..."

다 죽어가도 욕지거리는 입에 베여서 술술 튀어나온다. 그러면 뭐하나, 날 건드는 저 손 하나 쳐내지를 못 하는데. 간신히 뜨고있는 눈으로 이 정체 모를 인간을 노려보면서 잇새로 연신 거친 소리 내뱉는다. 그러다 목이 메여 다시 기침하고, 머리가 핑 돌아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숨만 겨우 쉬는 지경에 이른다. 시익시익, 내 숨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이명과 숨소리가 뒤섞여 머릿속을 채우는 와중에, 내 옆구리에 뭔가를 대고 손을 얹은 그가 물었다. 이름, 나이, 당연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질문들에 크흑 하는 괴로운 웃음소리 흘렸다.

"있겠냐, 그딴거... 나는, 언제나, 대용품... 이었다고..."

나이도 날 주운 집시로부터 들어서 추정했을 뿐이고, 이름 역시 조직의 코드번호 이외는 없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희미하다. 그야 몇번 불리지도 않았지, 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으니까...

"없어... 아무도... 다 죽였어... 내가... 아무것도... 없어... 이제..."

누군가에 쫓기고 있냐는 말에 나는 떠올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조직의 내부를, 전부 새빨갛게 물든 그곳을. 그나마 기다리던 사람도, 돌아갈 곳도, 모두 없어졌다. 내 손으로 없앴다. 그리고 이제 와서 혼자는 싫다.

"내버려 둬... 제발..."

한기로 턱을 떨면서도 중얼거린 나는 더이상 눈커풀을 잡고 있지 않기로 했다. 스르륵,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이 무거우면서도 이제 겨우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쉬운 것도 같았다. 내 손이 늘어져 툭 기댄 그의 손이 따뜻했으니까.

384 이름 없음 (UDGFlMPLhw)

2022-05-22 (내일 월요일) 01:27:30

>>383

손을 대지 말라는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발악은 듣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나는 지금 이 행동을 순전한 연민과 자비만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기 만족이었다. 그냥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지나쳤다간, 두고두고 또 내 정신이 나를 괴롭힐 것 같아서.
복잡한 감정이다. 인간은 원래 복잡한 감정으로 만사를 행하는 법이다만.

의식을 잃지 않도록 물어보는 일이, 의외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인적 사항의 말소. 소모성 인적 자원에, 추격자를 전부 처치했다...
흐려져가는 의식 중에 말하는 횡설수설일수도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꽤나 귀찮은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직, 혹은 기관. 절대 소규모의 집단과 연루되어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구급대를 불러선 안된다. 오히려 일이 더 틀어질것이 뻔하다.

출혈 자체는 어느정도 통제가 되고 있다. 피에 절어버린 거즈 위에 하나를 더 얹고, 꽉 누른채 천천히 그녀를 안아올렸다.

"걸을 순 없어보이니, 이대로 갈겁니다."

조심스레 무릎 아래에 팔을 대고, 등을 받쳐서 일어선다. 다리나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그나마 거처가 근처라서 다행이었다. 집세가 싼 동네에 사는 게 이런 도움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이후로, 나는 집이 굳이 넓을 필요가 없어졌다. 살던 집을 팔고, 지금의 치안도 너비도 보장되지 못하는 아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스스로를 내던진 벼랑같은 곳으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역설이 참 우스웠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나마 양심상 달려 있는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고, 우선은 그녀를 낡은 소파에 눕혔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근처 도로의 차량 소리가 뻔히 다 들리는 이곳이 내 집이자 무덤이다.

385 이름 없음 (aiVpxnKJoQ)

2022-05-22 (내일 월요일) 02:33:38

>>384

그가 데려가겠다며 들어올렸을 때, 내 정신은 이미 끊겨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지고 입은 힘없이 벌어져서, 게다가 피범벅이기까지 했으니 꼴불견이었겠지. 그렇게 데려가지는 내내 나는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목숨이란 어찌 그리도 질기던지, 그의 집에 도착해 낡은 소파에 내려지고서도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살아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향하는 손은 언제나 악의와 살기로 가득찬 것 뿐이었다. 뾰족하고 날선 감정들은 나를 사정없이 찌르고, 후비고, 베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비껴나가 살아남았지만, 그 감정들은 흉터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이 없을 땐 온 몸을 감추는 옷만을 입게 되었다. 오늘도, 조직에서 지급했던 새까만 테크웨어로 온 몸을 감싸고, 다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조직원들을 전부, 내 손으로...

"큭, 커흑..."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내 상태가 나아질 리는 없었다. 들고 옮겨진 후폭풍과 점점 가까워지는 생사의 경계에 무의식 중에도 몸서리를 치며 기침과 피를 토한다. 갓 터진 피는 그의 낡은 소파를 더럽히고 바닥에도 튄다. 이제 정말 끝이 코앞이구나, 싶을 때, 기침의 충격으로 닫혔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흐릿함을 넘어 색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뭉개진 시야에 곧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이제 눈에서도 피가 나는가, 아니, 아니다, 이건 눈물이다.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진심이었나, 순간 그렇게 중얼거려버렸다.

"죽기, 싫어... 죽고싶지... 않아..."

아, 인간이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지, 그토록 죽음을 바랐으면서 정작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니 두려워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살고 싶다고, 나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보려해도 팔은 들리지 않고 손만 겨우 부들거릴 뿐이다. 그마저도 지금의 내게는 힘이 부치는 일이었기에, 곧 다시 의식을 잃었다.

386 이름 없음 (v5chgsZ58.)

2022-05-23 (모두 수고..) 00:09:30

>>385

"동감입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보자 측은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숨을 쉬는 것이 평소보다 더 수고로워졌다.
전부 포기해버리고 놓고 가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 피가 순전히 이 사람만의 피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의 피도 섞여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길이다. 후자인 편이 안위에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구하고 있는 사람이, 무고한 이들을 수도 없이 해친 살인마라면?
그리고 내 손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 다음 희생자를 찾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일어나는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나를 찾아내 책임을 묻는다면...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가진게 너무 부족하고 제한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흘린 피를 메꿔줘야 하는 것인데 수혈팩은 고사하고 이쪽의 혈액형도 모르는 상황인데다, 제대로 된 처방이 필요한 항생제가 아닌 상비약 정도밖에 없다.
몸을 씻기는 것도 필요할텐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정신을 잃은 이성에게 멋대로 그런 짓을 하고싶진 않다.

"...갈아입힐 옷도 없고 말이지."

그나마 내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것은 따뜻한 모포 정도가 끝이다. 나머지는 그저, 손으로나마 체온을 전해주는 수 밖에.
상의를 조금 끌어올려 거즈를 갈고, 새 습포를 덧댄 뒤 붕대를 감는다. 그리고 그 위에 모포를 목 아래까지 덮은 뒤, 가만히 곁에 앉아서 손을 잡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약한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지나쳤을 때의 후회보다는 낫겠지.

387 이름 없음 (XCFUZkJPNM)

2022-05-23 (모두 수고..) 02:06:59

>>386

피를 닦아낸 내 얼굴은 몇군데 찰과상을 제외하면 큰 상처는 없었을 것이다. 끈적해질만큼 묻어있던 피가 전부 내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거칠게 손질된 검붉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있다가 젖은 수건에 밀려 옆으로 흘러내린다. 그렇게 드러난, 옅어진 핏자국 아래 하얀 피부나 얼굴의 생김이 앳되어 쉬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다. 잠긴 것처럼 굳게 감긴 눈은 얼굴에 수건질을 하고 옆구리에 새 처치를 해도 열리지 않았다. 모포를 덮어주고 손을 잡아주었을 땐, 차가운 손에 닿은 그의 체온이 뜨거운 것처럼 흠칫하지만 곧 잠잠해진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으면서도 가늘게, 희미하게 숨을 이어가며 내 생은 이어진다.

그대로 푹 잤으면 좋으련만, 피가 너무 흐른게 문제였는지 겨우 서너시간 지나서 정신이 깬다. 영원할 것 같던 새벽이 거의 지나 창밖이 흐릿하게 밝아지려 하는 시간이었다.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리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 역시 낯설다. 순간적으로 패닉이 올 뻔 했으나, 공교롭게도 내 정신은 적응과 이해가 빨랐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는 일의 전말에 탄식과 같은 숨이 입술 사이로 토해진다. 하-...

"젠장..."

죽음의 문턱에서 생을 구걸하는 꼬라지라니. 누구보다 죽고 싶어하는 인간은 사실 누구보다 살고 싶어하는 인간이라는게, 그게 나였을 줄이야. 기가 차서 헛웃음도 안 나온다. 아니, 목이 말라서 말이고 뭐고 못 하겠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이 집의 주인, 날 데려온 오지랖 넓은 남자, 그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ㅇ, 어이... 이봐."

원래 목소리가 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는 내 귀로 듣는 것도 별로다. 그래도 말을 안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겨우 겨우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끌어낸다.

"물... 물 좀, 줘 봐..."

죽지 못 했다면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나. 일단은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물 좀 달라고 하고, 그새 자극받은 목 때문에 마른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숨이 빠질 때마다 느껴지는 피맛은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줘서,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젠장, 다시 중얼거린 건 당연했다.

388 이름 없음 (U8lVilf86o)

2022-05-23 (모두 수고..) 10:46:06

"나, 어떻게 생각해?"

적막을 깬 한마디에 무게가 실려있다. 남성은 당신쪽을 보지도 않고선, 묵묵히 교장실 구석의 미니선풍기를 응시한다. 방금 치고박고 싸운 흔적이 남아있는 그의 상기된 얼굴에선 피 비린내가 나는듯 하다.

남성은 이 이후로 말을 잇진 않았다, 그저 애꿎은 미니선풍기만 바라볼 뿐.

/편하게 이어줘~ 상대캐 설정은 아무렇게나 해도 돼!

389 이름 없음 (v5chgsZ58.)

2022-05-23 (모두 수고..) 11:16:48

>>387

피곤한 하루와 그것보다 배는 더 피로하고 긴장되었던 하루의 끝자락 탓인지, 잠시 체온을 건네주려 손을 잡고서는 그 자리에서 나도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따스하다기보단 따가운 햇살이 등짝을 두들기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기척이 느껴지자 코를 골아대며 잠들어 있다가도 펄쩍 뛰듯이 깨어나, 잠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깨어났다. 새하얗고 앳된 얼굴이 눈을 뜨고서 무어라 하는 것을 보자, 비밀스러운 무엇인가 혹은 최소한 옆구리에 절상을 입고 피칠갑을 할만한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물... 아, 그래. 물."

자다가 금방 깨어난 지라 정신이 없었으나, 이내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요구하는 지 알아채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굉장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밤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걸어가,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를 꺼내들고 가져가려다가 아차 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행여 힘이 없어서 마시지 못하고 쏟지 않을까 싶어, 빨대를 하나 꺼내 열린 페트병에 꽂아서 소파로 걸어왔다.

"여기요. 체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체력의 보충을 위해 음식물을 섭취할 수도 있을테니까.
약도 먹을 수 있겠지. 한 시름을 놓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페트병에 꽂힌 빨대를 입가에 가져다 준다. 들고 마시기엔 힘들지 모르기에, 당장은 이런 간호를 해줄 필요가 있을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지금은 회복이 급선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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