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288 이름 없음 (0/fgptDqtk)

2022-03-12 (파란날) 00:26:46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여자는 느릿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약간의 사과맛, 그리고 매캐하게 몰려드는 텁텁함. 화한 연기가 목구멍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턱 막힌 속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눈길 위로 잿가루가 떨어지고, 이내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그 위로 지저분한 발자국을 남긴다.

" 어, 왔어? "

여자가 양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익숙한, 때문에 지루하리라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형식적인 인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보다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지. 여자가 눈 쌓인 지붕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처음 만나던 그 날엔 똑같이 하얀 함박눈이 내렸고 바람이 뼛 속에 스밀듯 차가웠다. 옛날의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던 여자는 오늘보단 옷을 단단히 껴입었고 담배를 무는 대신 새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남자를 기다렸다.

" 좀 늦었네. "

둘은 항상 그러했듯 동네의 작은 카페를 향해 걸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과 같았다. 그들은 늘 그랬듯 카페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할 것이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대로 가볍게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조금 질색하며 노래방을 찾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을 맞이하듯 지겨움을 참고 여자는 걷는다. 어쩌면 남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자는 어느순간부터 남자에게 설렘을 느낄 수 없었고 사랑이라 믿어왔던 감정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언젠가 인생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이라 믿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너같은 사람은 없을거야. 여자는 문득 어느날 밤 남자가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다. 아마 남자에게 그녀와 같은 여자는 다신 없을 것이다. 그 날의 그녀와 같은 여자는 말이다. 지금의 여자는 그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순간부터 여자는 남자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자 앞에선 잘 물지 않던 담배를 피며 남자를 기다렸다. 어찌되었던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더이상 남자가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낭비할 수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라는 뜻이었지만, 아마도 남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이란 단어에 본질적인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사랑하긴 했다. 다만 불 같이 타오르던 그것이 조금 식은, 혹은 시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밤마다 그가 떠오르긴 했으나 설레고 행복한 감정보다는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그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저 그와 내가 오래 사랑했으니, 조금 서로에게 편안해진 것일 거라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 사랑이 조금 더 불타길 염원하며 잠들었고 눈을 뜬 아침 휴대전화 액정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이름에 여자는 차갑게 식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여자는 점점 남자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저 어느순간부터 여자의 주변에 안개가 끼어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자신이 자연스레 상상갈 즈음 여자는 멀리서 나타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 몇 달 뒤면 우리 5주년이더라. "

여자가 무심히 말했다. 아직 여자의 휴대전화 한 켠을 차지하는 디데이 어플 위젯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을테지만. 여자가 속으로 말을 삼켜내며 살며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결코 기대를 거는 눈빛은 아니었다. 여자가 양주머니 속으로 더욱 손을 깊게 찔러넣으며 아주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단단히 엉킨 실을 곧장 잘라버리고 싶은데, 손잡이가 딱딱한 가위를 쥘 용기는 나질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대략 10cm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이제는 익숙하게 맞추어진 서로의 보폭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보폭은 달랐다.

" 오늘은 좀, 춥네. "

어릴 적의 여자는 추위를 많이 탔다. 때문에 여러겹 옷을 껴입고도 두툼한 목도리나 모자를 쓰곤 했다. 약 오 년의 세월이 흐르며 여자는 더이상 목도리는 매지 않아도 될 만큼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나, 남자는 매년 겨울마다 두툼한 목도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 때마다 여자는, 늘 그렇듯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목도리를 받았다. 여자가 허전한 목덜미를 더듬으며 말했다. 버티지 못할 추위는 아니었다.

# 권태기가 온 커플 느낌! 여자는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으나 직접 뱉을 용기는 아직 없는 상태. 너무 무맥락만 아니면 다 좋으니 편하게 이어줘.

289 이름 없음 (8ETXevd4WU)

2022-03-12 (파란날) 10:09:40

>>288

더이상 인생에서 보고싶지 않은 기후 중 하나였던 함박눈은, 로맨틱이란 단어를 뇌에서 슬슬 지워버리기 시작한 남자에게는 그저 기분나쁜 진눈깨비랑 별 다를 바 없었다.
가까워진 그녀 곁에서 언제 맡아도 익숙치 않은 담배 냄새가 나도 얼굴을 잠시 찡그릴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미안. 길이 좀 막혀서."

거짓말에 가깝다. 약속은 했으니 가겠다만 그에겐 슬슬 사랑하는, 아니 어쩌면 사랑했던 여자보단 아침의 잠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으니까.

왔냐는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에 슬슬 신물이 나는 그 카페로 가게 될 것 같다. 저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몇 번 바뀌었는지도 이제 알 것만 같은 남자는 오늘도 결국 여자를 데리고 카페 쪽으로 향했다. 너무도 당연하고 기계적으로.

별 다른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 것으로 여자가 기분나빠할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젠 그녀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한 것도 없었기에 묻지 않았다.
전날 밤에도, 아마 몇년 전의 그들이었다면 밤새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하고 감정을 확인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았고 알고싶은 마음도 많았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제 그렇지 않았다. 알아서 잘 살겠지. 그래, 그녀는 그럴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퍽 예쁜 편이었다. 그런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벅차, 남자는 해본적도 없는 일을 다양하게 도전해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오래도 사귀었네."

5주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애인이 되기로 선언하고서부터 5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5년. 강산이 둘다 변하진 않아도 어느 한쪽 정도는 변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얄팍한 사람의 감정과 심리가 변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 5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잊고 있었다. 디데이 위젯도 예저녁에 지워버렸으니까.

"좀 따뜻하게 입고 오지 그랬냐."

마치 동성 친구에게 막 대하듯 나오는 어투는 5년 전의 남자에게선 상상도 못할 언동이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춥다고 하면 금세 호들갑을 떨고, 손재주 하나 없던 남자가 뜨개질까지 하며 손수 짠 목도리를 자랑스레 그녀의 목에 걸어주던 지난날들은 이제 남자에게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뜨거운 도파민의 작용은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듯 했다.

남자는 외투 주머니 안에 든 뭔가를 꽉 붙잡았다. 겉으로는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었고, 스스로에게 이미 사랑따위 다 식지 않았냐며 다그쳤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잿더미 속에 빨갛게 빛나는 잔불처럼 무엇인가가 남았는지, 남자는 그것을 놓지 못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참 간사하고 한심했다. 그런 남자에게, 5년 가까운 세월간 함께한 여자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과분할 정도로 완벽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잇는다... 말투가 좀 심하게 차가운건 아닌가 걱정도 되네.

290 이름 없음 (VUMz4HXROY)

2022-03-12 (파란날) 23:03:34

아니, 세상에 죽일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어째 하루가 멀다하시고 송장들을 가져오시는 것 같네요. 워커홀릭이신가보다. 아, 허브티 마실래요? (환히 웃으며 화분들을 정리하느라 흙이 묻은 목장갑을 벗는다. 찻주전자를 찾으러 꽃집 안쪽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시체는 거기 두세요.

291 이름 없음 (ozJjSz54hU)

2022-03-12 (파란날) 23:38:48

>>290
요새 미팅이 좀 잦네……. (남자가 캡모자를 벗어 꽃화분이 여러 개 놓인 트롤리에 올렸다. 유리온실에 얼굴을 비춰 보며 눈가에 튄 피를 닦아낸다.) 어, 고마워. 따뜻한 걸로. (찻주전자를 가져오는 그를 바라보며 날서있던 눈빛을 가라앉힌다.) 오늘은 여기 그냥 둬? 영업 끝났어?

292 이름 없음 (BzosojpEu.)

2022-03-12 (파란날) 23:44:46

>>289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이런데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잖아, 또는 너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아? 울컥이며 올라오는 말들은 많았고 머릿 속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여자는 늘 그랬듯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과거에는 올라오는 생각들을 전부 뱉어내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혹은 거짓이 아니냐 의심하기도 했다. 상대의 말이 거짓일 것이라 단정한 채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상대의 잘못에 대한 분노보다는, 이만큼이나 서운하니 나를 봐달라는 신호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상대에게는 그저 귀찮고 지긋지긋한 언쟁으로 보일테지만. 조금만 더 이렇게 해줬더라면— 그 행복한 상상 속에서라면 둘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랑했겠지. 현실은 결코 꽃밭이 아니었다.

카페로 향하는 길의 정적이 무거웠다. 오늘 아침은 어땠는지, 오는 길에 별 탈은 없었는지. 먼저 꺼내기도 혹은 묻기도 하던 그 질문들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남자도 그랬겠지. 약간 느린 걸음으로 침묵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채 말하지 못한 질문들과 궁금증이 남자의 발자국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자는 천천히 남자의 발자국에 맞춰 그것을 밟아내리며, 꺾어진 기대를 시든 꽃 송이처럼 쥘 뿐이다. 남자는 오늘도 여자에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 그러게. 어릴 때부터 사귀었으니까. "

그 시절의 사랑을 한순간의 불장난이라 치부하진 않는다.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느껴진 사랑이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종종 상대를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고, 잠이 오지 않는 날 지나간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짚으며 웃고, 그러다 사랑임을 깨닫고. 평범하나 특별한 추억들이 결코 가벼운 순간의 감정일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의 무서운 점은 그리 특별하고 애틋한 감정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점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외향이 깎이고 닳을 뿐 그 본질은 영원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깎이고, 닳다가,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 것이다. 여자가 작게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첫만남의 강렬한 기억 따위 남자에게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 …그러게. 깜빡했네. "

여자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무언이 잠깐 지나간 늦은 대답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선물한 목도리가 어느순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는 단 한 번도, 그가 선물한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그 뿐이었다. 변화를 알아달라는 작은 외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는 꺼져가는 잔불을 바라볼 수 있었으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장작을 더 가져오지도, 불씨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제 손이 더러워지기 전에 먼저 불길이 꺼지기를. 그리고 무시히 그 위를 새하얀 눈더미로 덮을 수 있기를. 잿가루가 날려 애써 덮은 눈길 위를 더럽히지 않길 바랬으나 그것은 여자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새하얗게 잊을 수 있길 기도할 수 밖에.

" 너 그 날 생각 나? "

여자가 걸음을 조금 높여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우리 처음 학교에서, 마니또 하는데 너가 내 사물함에 사탕 넣다가 걸렸잖아. 근데 또 하필 화이트데이라 애들이 이상하게 몰아가고. 맞아, 동호였지. 너 친구. 그 애가 그렇게 바람을 잡는 바람에. "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추억,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는데. 여자가 넌지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에게는 잊기 아까울 애틋한 추억이었기에.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 다시 한 번 되새기고파 답지 않게 수다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 아냐 이런 분위기를 원했어!! 이어줘서 고마워!! 나이대를 어떻게 잡을까 하다가 대충 20대 초반에 사귀어서 20대 중후반이 된 나이라고 생각하고 적었는데 괜찮지...?🥺 친구로 지내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케이스겠네.

293 이름 없음 (DAUNkxhAVA)

2022-03-13 (내일 월요일) 07:34:21

>>292

서로는 지쳐갔다. 열렬한 사랑에 완전히 불타버려, 이제는 한 팔을 들어올리면 잿가루가 되어 무너질 상태가 되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녀는 서운함조차 이제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인물에게 '더 일찍 못 봐서 너무 서운해' 하진 않을테니까.

오랫동안 사귄 연인들은 어느새 두 가지로 나뉜다. 정말로 가족처럼, 부부가 그러하듯 서로가 있는 것이 너무도 편하여 그런 하나가 된 사랑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그 사랑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천천히 멀어져가거나. 우리는 후자에 가까울것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남자가 직접 짠 목도리를 하고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적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직 서로에게 남아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나 지금에 와선 한없이 평범하게만 받아들여진다. 아마 이젠 자신이 선물해준 물건마저도 거추장스럽고 부끄럽겠지.
내가 짜준 넝마같은 목도리에서 콩깍지가 벗겨질 때도 되었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날?"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식 없이, 자연스레 남자는 다가오는 여자의 몸동작에 맞춰 자신도 슬쩍 다가서서 눈을 맞췄다. 이제는 이 버릇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남자지만, 그 오랫동안 몸에 새겨진 버릇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때... 맞아. 동호였어. 난리도 아니었지... 한동안은 우리 둘이 말만 섞어도 애들이 막 사귄다느니 어쩌느니 그랬고. 그 이후로 오히려 서로 말도 많이 섞고 그랬었지. 마니또가 효과가 있긴 있던거 같더라."

덩달아 나도 말이 많아졌다. 옛날 생각은 사람의 입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나보다.
그때. 서로에 대한 존재에 관심도 딱히 없었을 때였다. 마니또인지 뭔지 잘 모르겠고 화이트데이도 의식하지 않던 그 때. 남자는 그냥 지나가다 들은 말로 '여자가 이런이런 사탕을 좋아한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과 선택은 남들의 눈에, 특히 날 놀리는걸 좋아하던 그 친구 눈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얽히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그 사건은 어쩌면 자기 실현적 예언처럼 움직였었다.

"아, 그래. 나중에 동호 그 놈, 술마시다가 나한테 그러더라. 사실 걔가 널 좋아했었다고. 그 녀석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렇게까지 말의 무게가 있진 않았지만. 그때도 여친이 있던 놈이 무슨... 쯧."

그리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지금의 나처럼 식어버린 사랑을 질질 끌어버리진 않았을거라고, 그리고 그걸로 여자를 더 괴롭히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했다.

무어라 계속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손이 여자의 손에 닿아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촉감을 의식한 남자는 슬그머니 다시 손을 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버릇. 둘의 사이는 버릇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이 버릇을 과연 씻어낼 수 있을까. 남자는 썩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나잇대도 딱 적당하고, 나도 대충 그 언저리로 생각했어. 그리고 친구에서 연인이라니 이거 참 풋풋... 했던 이야기구만(코쓱

294 이름 없음 (K0c2l3s96E)

2022-03-15 (FIRE!) 20:23:31

길고 긴 전쟁이 끝이 났고 세계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싫어하던 마족은 물론이요, 평화를 사랑하던 인간들도 모두가 두 팔 크게 벌려 만세를 외쳤고 대륙 전체에서 축제의 장이 열렸다. 목숨을 걸고 평화를 가져온 이들을 주변에선 영웅이라고 불렀으며 하나같이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저 평화롭게 마을에서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사내는 그 모습에 두 손을 휘저었으나 찬양하는 분위기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며칠이나 낮밤 할 거 없이 축제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술잔치가 열렸으며 하루하루 언제 죽을까 불안해서 살지 못했던 분위기는 이젠 너무나 평화로워 매일 밤 신나게 놀고 먹으며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웅이라고 불리던 이 중 가장 필두에 섰던 사내는 성의 복도를 정말 조용히 걷고 있었다. 주변 병사들에게 걸리지 않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나라의 왕이 마땅히 대접과 보상을 해야한다고 성으로 들어오게 한 지 어연 다섯 달. 몇 번이나 이제 충분하니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정치적 이유인지, 아니면 인재를 놓치기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이 정도 대접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는지 왕은 그 부탁을 허하지 않았다. 그저 이 성에서 앞으로 평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할 뿐, 수도를 떠나 원래 살던 고향으로 가는 것은 허하지 않았기에 결국 사내는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여기에 있으면 확실히 맛있는 것도 많고, 삶도 평화롭고 대우 자체도 상당히 좋긴 하지만...'

그야말로 왕족 수준은 아니어도 준 왕족 수준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 아마 동료들 중에선 이 삶을 택한 이도 있겠으나 애초에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였다. 역시 그때의 그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복도를 살금살금 걷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재빠르게 다른 방에 들어가고, 인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나와서 살금살금 걸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당연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당연히 그쪽에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세 달 전부터 조용히 만든 정원의 비밀통로를 통해 성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정원이 바로 코앞이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사내는 경비병들에게 걸리지 않고 정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원의 가장 가장자리 벽면의 벽돌을 빼내고 꾹 누르면 그 부분이 무너지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벽에만 도달하면 이제 이 성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그 희망을 가지며 사내는 정원을 살금살금 걸었다.

/탈출을 감행하는 영웅이라는 설정이야! 동료도 좋고 성 사람도 좋고, 탈출을 도와줘도 좋고 방해해도 괜찮아! 맥커터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295 이름 없음 (6eCObRcBnY)

2022-03-16 (水) 00:24:57

# >>294 과하게 집착하는 얀데레 왕녀로 이어도 괜찮을까? 물론 방해하는 쪽으로.

296 이름 없음 (4fD6BYm2io)

2022-03-16 (水) 00:29:55

>>295 물론 괜찮아!! 어느 쪽으로 이어줘도 크게 상관은 없으니 말이야!

297 이름 없음 (4fD6BYm2io)

2022-03-16 (水) 21:46:35

>>295 음. 일단 10시까지만 기다려보고 잇는 것이 없으면 다른 이가 이을 수 있도록 할게!

298 이름 없음 (cJwJghY3Yg)

2022-03-19 (파란날) 00:19:37

겨울내음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봄이 왔다. 오랫동안 맡아 체향같았던 병원내음도 사랑스럽게 만들던 그 사람이 잊히기도 전에 다시 봄이 온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더듬어 팔을 쓸어내렸다. 피부 위를 덮은 옷의 한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에 내려앉았다. 후. 숨 하나에 그리움 하나. 오래 전 타계한 시인은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을 세었으나 별이 저문 세상을 사는 여자는 숨결 하나에 추억과 그리움을 셌다.

머리를 가리는 니트 모자를 더욱 당겨 눌러쓰곤 품에 안은 흰국화 꽃을 세었다. 오늘도 주지 못했다는 이유가 내일도 볼 수 있는 이유가 되길 바랐다. 아직 차가 오기까지 한참 남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꽃다발을 껴안고 숨을 뱉었다. 희미한 꽃향기와 꽃잎이 숨결을 따라 코를 간질였다.

여자의 상념을 깨운건 전화소리였다. 전화벨이 울리는 걸 빤히 보기만 하다 화면은 배경화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화는 끈질기게 다시 울렸다. 갑작스러운 충동이 명치를 타고 올라왔다. 며칠째 무시하던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이유였다.

"여보세요."

쇳소리가 섞인 탁한 음색이 전자신호로 바뀌어 발신인에게 닿았다.

299 이름 없음 (0AwE7xzfj.)

2022-03-19 (파란날) 23:19:52

전쟁이 시작된지 사십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마족과 인간이 각기 자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명목도 명분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이유도 망각한 채 서로를 해할 뿐이다. 본래 열 명의 대마법사가 존재하던 제국에는 현재 단 한 명의 대마법사만이 남아 전장을 지키고 있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샤를로테 로즈. 대마법사로 임명되기 전부터 전쟁에 숱한 공을 쌓아올리던 천재 마법사. 지독한 전쟁 끝에 남은 수식어는 오직 그 뿐이었다.

" ...그러니 이제, 계획이 있으십니까? "

목소리가 들린 곳은 어두운 동굴이다. 그곳에 대마법사 샤를로테가 있었다. 밑둥이 조금 부서진 거대한 스탬프를 끌어안은 샤를로테에겐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저분한 옷가지와 크고 작은 상처들. 전투의 열세에 후퇴를 결정한지 십 분, 선두에 서있던 대마법사 샤를로테와 기사단장인 당신은 남은 전투인력들과 분산되어 외딴 산맥의 동굴로 숨어들게 되었다. 쫓아오는 마족 무리를 제압하고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샤를로테와 당신은 감탄스러울 실력으로 훌륭히 마족들을 무찔러주었다. 하지만 단 두 명의 전세는 금방 뒤집히고 말았으니 급히 도망치며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동굴인 것이었다. 아마 지금 밖은 대마법사와 기사단장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마족들이 어슬렁대고 있을테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그리고 그 동물 속에는 지쳐 기력이 떨어진 대마법사와 부상 당한 기사단장이 숨어있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뿐이다.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다소 까칠하다.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한 기사단장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테다. 그저 오늘 너무 많은 마법을 사용하였고, 마법사의 체력을 고려하지 못한 당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도망을 다니다보니 지쳤을 뿐이다. 샤를로테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동굴 내벽에 몸을 기대었다. 시커먼 먼지들이 들러붙을 게 뻔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다.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한다. 샤를로테의 머릿 속에는 오직 그 생각만이 절실했다.

"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가도 괜찮습니다. 괜찮은 수가 있다면 말해보십시오. "

섬뜩한 이야기를 눈 깜짝 하지 않고 내뱉는 샤를로테.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여태 제국에서 대마법사들의 이미지라 함은, 잘난 척 심하고 엄살 심한 샌님. 그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었다. 샤를로테는 그런 부류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으나...

" 아니면 여기서 명예롭게 죽는 게 나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괜찮은 주문들을 좀 외우고 있습니다. "

살아나갈 방법 따위 진작에 포기하고 만 것일까. 샤를로테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나지막히 말했다. 역시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동굴 밖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마족이 포위망을 가까히 좁혀온 것일까. 샤를로테의 경계가 예민해진다. 스탬프를 쥔 손이 잘게 떨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말은 담담하게 던졌으나, 아직은 죽는 게 무서운 모양이다.

# 대충 판타지 컨셉! 꼭 시리어스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성의 없이 이어주는 것만 아니면 뭐든 좋아~



300 이름 없음 (fLv9kYFIiI)

2022-03-20 (내일 월요일) 02:22:53

>>299

기사단장은 이번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간 수도 없이 많은 그러한 직감이 그의 신경 구석구석을 간지럽혔고, 다행스럽게도 여태 전부 빗나갔었다. 이번에도 부디 그 직감이 빗나가기를 단장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무가의 자제로써 전쟁이 한창때인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 제 이름을 쓸 수 있을 시절부터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졸업하여 성인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방의 기사로써 임관했고, 대부분의 초임 '기사'들이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것 대신 그는 몇 년이나 더 살아남았다.
그게 그가 기사단장이라는, 치열한 전쟁 탓에 공석일 때가 더 많은 자리에 앉은 이유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해서 촉망받는 기사단장은 인근의 하급 기사에게도 팔씨름으로 질 자신이 있었다. 그를 살아남게 만든 것은 직감, 눈치, 교활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선 결국 그게 힘보다 중요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범한 이들에 비하면 괴물같은 힘에는 다를 바 없었지만.

광택따위 내지 않은 갑옷에는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그게 몽땅 마족들의 피였음에 둘 모두 감사해도 될 것이다.
타는 듯한 목을 축이지도 못한 채 겨우 목구멍 너머에서 긁어내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내 취향의 이야기는 아닌데."

명망높고 높은 신분에 인간병기로 일컬어지던 기사란 직위는 어느새 장교나 동급의 이야기가 되었다. 더 심하면 부사관 수준으로 떨어졌고. 그런 이들 몇 명과 무기보다 농기구가 더 익숙한 민병들 대다수와 약간의 상비군들 정도를 이끌고 마족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희망이 없었다. 대부분의 기사단이 이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샤를로테의 존재였다.
장래가 촉망받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라. 그런 귀하신 분께서 굳이 이런 곳에 행차를 하셨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주 큰 의미였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이곳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 말이다.

건틀릿을 낀 손으로 샤를로테의 하얀 손을 감싸 잡는다. 두려움에서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랬다.

"대마법사께선 운이 좀 나쁜거 같군. 이것보다 더 거지같은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이번에는 그때보단 좀 덜 재밌는 광경이 될 테니까."

뭇 병사들이 그러듯,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약간의 허세를 섞어 내뱉는다. 하지만 온전히 허세인것만도 아니다.
그에겐 계책이 있다. 그게 지금까지 이 남자를 살아남게 만든 귀중한 자질이었다. 이 동굴의 이 구석으로 들어온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우선 기력을 좀 보충하는게 좋겠어. 그 동안 우리는 여기서 몸을 좀 숨기지. 아예 이쪽 가지의 입구에다 동굴 벽을 감쪽같이 만들 수 있으면 최선이겠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샤를로테에게 좀더 고생을 시켜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최소한 마족들이 현재 그들에게 혈안이 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301 이름 없음 (0CgRrViQVg)

2022-03-28 (모두 수고..) 23:58:58

미안해...내, 내가 그래서 공포 영화 보지 말자 했잖아... (불 꺼진 방, 티비엔 여전히 주인공이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엔 비명과 악력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진 리모컨이 싸늘하게 죽어있다. 민망함과 서러움,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린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당신의 팔을 잡고 있었을 테지만 일말의 이성을 잘 조절해 타겟을 바꾼 모양이다.)

302 이름 없음 (gf/hfo9QHI)

2022-03-29 (FIRE!) 00:00:20

자명종이 활기차게 울린다. 안녕, 자명종아! 그리고 따듯한 햇님아! 예쁜 우리 고양이 민트초코도, 어제도 오늘도 한 자리에 있어주는 선인장 제임스도!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신선한 공기도 좋지만, 음, 역시 아침공기엔 빠질수 없는게 있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번호를 몇개 누르고 전화를 건다. 귀여운 음악소리가 상큼하게 들려오고, 곧이어.

쾅!

순식간에 부숴지는 몇백개의 유리창 소리. 산산조각나며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들린다. 매캐한 화약냄새가 섞인, 아직은 조금 차가운 아침공기를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킨다. 아, 화약냄새 없는 아침공기를 상상할수 있을까? 아니, 나는 못해. 어느새 입가엔 예쁜 미소가 걸린다. 좋아, 오늘도 나는 최고로 예뻐.

" 좋은 아침이야!!! "

씩 웃으며 크게 소리친다. 아, 그러고보니 자기소개를 안했네. 내 이름은 벌룬, 더 해피 걸. 해피벌룬, 해피, 뭐가 됐든간에 네가 생각하는 최고로 예쁜 이름으로 불러줘. 그야 나는 이 도시의 빌런이니까.


사람들은 왜 그리도 슬픈 얼굴을 하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내고, 알수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할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건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늘은 앞으로 남은 날 중 내가 가장 어린 때잖아!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섭하지.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너무 귀여운 스미스 앤 웨슨 모델 500 권총(이름은 깜찍이), 사랑스러운 BOPE에서도 사용하는 세열 수류탄(이름은 반짝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제 가스. 한 모금만 마시면 모든 걱정도, 슬픔도, 불행도 잊어버릴수 있는, 해피 시리즈의 3번째 자신작 ' 핑크 다이아몬드 ' . 화창한 햇빛 아래, 오늘도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서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선물을 주기로 했다. 뭐, 개중에는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군가는 날 좋아하는 법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낙하산 가방을 메고 그대로 떨어진다. 빠른 속도감이 나를 덮쳐오고, 크게 웃고, 소리지르다가, 은행 건물이 보이자 반짝이를 몇개 안전장치 째로 뽑아 던진다. 우직, 하고 뽑은 뒤 슉, 펑! 그리고 생긴 구멍에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착지하며 깜찍이를 몇 발 쏴준다.

" 아헤, 모두 왜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오늘도 내가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바닥에 던지고, 나는 깜찍한 방독면을 착용한다. 음, 어찌 저렇게 행복해보이는 표정일까. 내가 준 선물을 좋아해주는걸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보이는걸. 폴짝거리며 뛰어서 그대로 은행의 금고까지 도착했다. 한 눈에 봐도 보안이 어마무시해보이지만, 반짝이 몇개면 다 해결 돼. 순식간에 그 철통같던 금고 문이 열리고, 안에 쌓인 수많은 돈다발을 본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이정도면 사람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어. 물론 나도 좀 써야지! 반짝이 몇개,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더 만들 정도의 재료들, 그리고 달콤하고 사랑스런 팬케이크, 파르페, 크레이프, 파운드 케이크... 물론 예쁜 옷도 빼 놓을 수 없겠지. 나머지는 광장에서 뿌리는거야. 다들 좋아해주겠지? 아아, 행복해. 그녀는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 어떻게 이어줘도 괜찮아~ 대환영!

303 이름 없음 (nywXcHkACY)

2022-03-29 (FIRE!) 00:39:48

>>302

자명종이 귀를 찢어놓을 기세로 울린다. 제발,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도 죽어. 시끄럽게 다투는 고양이들도...너흰 좀 가라. 귀를 꾹 막고서, 폐에서부터 끌어올린 고통에 찬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정말, 당연하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절망스럽게도, 일하기, 너무, 싫다. 밍기적밍기적. 액체화 된 수은 마냥 스르륵 몸을 침대 바깥으로 꺼내고나서는, 손가락을 일정 방향으로 휘두른다. 그 즉시, 몸이 일으켜지고 방의 불이 켜지며 온갖 손질도구가 주변에 날아든다. 거의 반쯤 수면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몸은 자연스레 화장실로 들어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몸치장을 시작한다.

“하아……쓰레기 요일. 쓰레기 출근.”

어느새 말끔히 투 버튼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아까 전 날백수 같은 모습과 완전 딴판이다. 다만, 심히 기분이 편찮아보이는 표정만큼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보온병에 커피가 담기고, TV에 전원을 켜 뉴스를 튼다. 흘러나오는 뉴스에 나오는 은행 지점 빌런 습격 뉴스를 지켜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정말 대단해. 경이로울 정도야. 월요일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가 넘치다니.”

그런 비아냥을 담은 중얼거림을 하자마자, 핫라인 전용 무전기가 울린다. 손가락을 까닥해 그것을 귓가에 가까이 가져와 연락을 받는다.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사회성 1%, 탄식 49%, 아무 생각 없음 50%에 가깝다. 아침 식사는 거른다. 체질이 안받아서. 싸우기 전에 뭔갈 먹으면 소화 안되거든. 싸워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단 히어로, 즉, 빌어먹을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은행. 안에 가스가 가득 차있어 억지로 답답한 방독면을 차고 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깔끔하게 부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깔끔한 구멍을 슥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이번 빌런도 분명 제정신 아닐걸. 이번달 월급을 걸어도 좋다.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초조해진다. 제정신 박힌 빌런이면 어쩌지? 여전히 걷는 것은 싫어하기에, 염동력으로 몸만 옮겨 둥둥 떠다닌다. 굳이 은행을 털었다면 이곳 말고 목적지는 없겠지. 독가스를 헤치고 나아가가며 중간중간 손가락질로 독가스를 마신 시민들을 건물 밖으로 내던진다. 배려가 부족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침내 금고 앞에 도달해, 그곳에서 돈을 챙기다 말고 빙글빙글 돌고있는 인영을 발견한다. 방독면이 개성적이네. 그리고 기묘한 행동을 일삼고있고. +2점. 조금 더 지켜보자 싶어 근처 부서진 기둥 위에 앉아 뻐근한 허리를 두드린다. 바닥 파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당신에게 들린 것 같아, 일부러 먼저 말을 꺼낸다.

“아, 괜찮아 괜찮아, 아가씨. 하던거 마저 해. 일단은 지금도 근무 시간인지라 뺄 수 있을 때 빼둬야하거든. 챙기던거 마저 다 챙기면 말해주고. 참고로 물어보는건데, 그 돈들 어디다 쓸 거야? 그리고 왜 하필 월요일일까?”

졸음과 피곤함에 묻힌 목소리로 물으며 등과 목을 뒤로 쭉 피며 스트레칭을 한다.

/ 이렇게 이어도 될까!?

304 이름 없음 (gv1841PaFw)

2022-03-29 (FIRE!) 00:44:19

>>301

야, 난 네가 공포 영화는 위험하다는 게 이런 '물리'적인 위험인줄은 몰랐지..힘이 세다는 건 알고있었다만... (싸늘하게 죽은 리모컨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다가 허탈함과 어이없음,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린다. 그래도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네 모습하며, 만약 네가 이성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조금 전까지 잡혀있던 팔이 저 리모컨 대신 박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뭐라고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리모컨 값은 네가 물어내라? (죽은 리모컨을 수습하면서 영화에서 잠깐 시선을 떼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도망쳐서 잘 숨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안심하는 순간 방금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직전, 네 눈을 가려주거나 널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305 이름 없음 (g5AVYOclX6)

2022-03-29 (FIRE!) 14:17:54

>>303

" 으에? "

그나저나, 돈을 어떻게 챙기지? 고민하던 그녀는 우선 주머니에 돈다발을 대충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보니 낙하산 가방이 있었지. 거기에 잔뜩 집어넣고,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가방들에도 집어넣어서 가면 되겠다. 그러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 휙 하고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던 그녀는 해맑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 안녕, 안녕! 내 이름은 해피, 네 이름은 뭐야? "

딱 봐도 피곤해보이는 목소리, 그리고 졸린 목소리네. 정말, 사람들은 왜 저리도 피곤해보이고, 또 졸려보일까? 주말이 다 지나간건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날이잖아! 새로운 태양, 새로운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도 살아있는 나. 아름답잖아? 그녀는 등과 목을 뒤로 쭉 피며 스트레칭하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 근무시간이면, 친구, 너는 히어로야? 이번엔 드디어 나를 칭찬해줄 사람인걸까? 정말이지, 전의 히어로들은 정말 무례했거든. 난 그냥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을 뿐인데, 다짜고짜 욕을 하지 않나, 때리려고 하질 않나...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기까지! 아, 너무 무서웠어. 다행스럽게도 이 깜찍이를 몇 번 쏴줬더니 도망칠수 있었지만. 아, 맞아. 물어보는거에 대답을 해 줘야지. 이 돈은~ 음... 파운드 케이크, 크레이프, 그런 사랑스러운것들을 사는데에 좀 쓰고, 깜찍이에 넣을 탄약, 그리고 행복해지는 해피 시리즈를 더 만드는데 조금. 그리고 나머지는! 광장의 높은곳에서 휙 뿌려줄거야. 그러면 다들 좋아할테니까! 내 친구인 너도 돈 좋아하지? 자, 원하는 만큼 챙겨가! 아, 그래도 다 챙겨가는건 안된다? 이런건 같이 나눠써야하니까. "

긴 말을 마치고 쌓여있는 돈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아, 네 쪽으로 던진다. 힘이 부족해서일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하고 맥없이 툭 떨어졌지만. 그녀는 쑥스러운듯 웃었다.

" 좋아좋아,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나. 최고로 사랑스러워. 음, 그리고 또 질문이 뭐였지? 아, 맞아. 왜 하필 월요일이냐고? 그야 오늘이 내게 남은 날 중 가장 어리고, 최고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날이잖아? 매일을 전력으로 즐기지 않으면 손해야~ 그렇지, 친구? 참, 이름도 물어보질 않았네.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뭘까?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음... 민트초코? 맞지? 응? "

분명 이름을 맞췄을거야! 얼마나 놀라줄까?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 아헤, 행복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크레이프나 먹으러 가지 않을래? 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최근에 돈 안내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거든. 이 깜찍이를 한번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다들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한테 전부 공짜로 준다니까? 그래서 전엔 케이크를 한가득 받아서, 배가 터지게 먹어버렸어. "

/ 좋아! 이어줘서 고마워~ 편하게 이어줘!!

306 이름 없음 (nywXcHkACY)

2022-03-29 (FIRE!) 14:56:32

>>305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금새 본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당신을 지켜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귀를 기울인다. 정확히는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소리에. 기동대가 도착하는 소리다.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움직이는 것 하나는 빨라가지고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싶나?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노동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응응, 전통적인 문구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륜적으로 좀 심하지않아? 좀 적당히 노동해서 적당히 먹고 살고 싶은게 죄야? 본질적인 문제는 그곳에 있다. 히어로라는 직업을 선택한 자신에게 있어 일을 늘리는 것은 오직 빌런들 뿐. 기동대가 투입되기 전에는 일을 마무리해야한다.

“……그렇구마안~. 빌런치고는 제법 알차게 쓰는데. 나라면 우선 노후를 위해 저축하겠지만, 뭐, 지금 이 사단을 보자니 아가씨가 존재하는 이상 어떤 은행에 저축해도 의미가 없어보이네.”

해피, 라는 이름 +1. 월요일인데 지나치게 활기찬 목소리 +1. 도덕성 및 사회성 결여 +1. 지독한 네이밍 센스 +1. 불법 폭탄 개조 및 사용 +1. 친구에게 훔친 돈을 나눠주는 상냥한 마음 +1. 이 이상 점수를 매기는 건 무의미하다. 자신의 월급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명분도 충분히 세워졌다. 맥없이 툭 떨어진 돈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거린다.

“민트초코는 맛있긴 하지만 사람 이름으로는 좀 그렇지. 뮬렌 맥워커라고 한다, 해피 아가씨. 재미없는 이름이라서 미안하네.”

아무런 감흥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평이하다. 이 사람, 정말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건 맞는건가? 이를 아득 갈고있다. 금고의 구석에 달린 통로 CCTV를 확인하자 무장한 병력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시간을 버는 건 여기까지. 어기적어기적 자리서 일어나 상체를 좌우로 짧게 기울여가며 뻐근한 허리를 풀어준다.

“오, 정말? 나도 크레이프 좋아해. 근데 아가씨랑 같이 먹으러 가기엔 아저씨는 좀 부끄러울 나이기도 하고……─쑥쓰럽다는 듯이 턱을 긁적거려보였다.─자고로 디저트는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버텨내서 갓 받은 월급을 ATM에서 인출해 내 땀과 피, 종이 냄새가 나는 뻣뻣한 지폐로 사먹는 게 제일 맛있거든. 돈 다 챙겼지?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어. 다음엔 꼭 화요일…아니, 수……음, 그냥 제압할테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해.”

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펼친 검지 손가락을 아래서 위로 슥 들어올린다. 그러자 당신이 서있는 바닥이 들썩거리더니 그대로 떠올라 천장에 충돌할 기세로 솟구친다. 범상치 않은 당신이 이정도 공격은 대처할 것을 알고있기에, 주변의 잔해들을 전부 떠오르게 해, 일제히 당신에게 맹렬한 속도로 날려보낸다. 이것 또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힘을 모아 천장에 바깥과 이어지는 커다란 구멍을 내려 하고있다. 먼저 이 끔찍한 가스를 빼내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정정하지. 월요일은 저주받은 요일이다. 내게 남은 날 중 유급 휴가를 적용하지 않은 매 월요일은 가장 괴롭고, 최고로 끔찍하며 주말과 동떨어진 최악의 날이다. 그러니 그 정신머리를 개조시켜주지. 난 다른 히어로들 처럼 무자비하지 않아. 재판에 언질을 넣어둘테니 아가씨는 실력 좋은 빌런교화센터에 들어가게 될테고, 완치될 즘이면 같이 내 단골 디저트 가게에 갈 수도 있겠지. 그러니 저항은 포기하도록.”

307 이름 없음 (74Ngo.ktVM)

2022-03-29 (FIRE!) 19:26:37

>>306

" 칭찬해주니까 부끄러워지는걸~ 그래도 날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보지는 말아줘! 다른 빌런들은 그야, 온통 재미없는 일에만 쓰잖아? 세계정복이니, 모두를 노예로 만든다느니, 죽고 죽이고... 그런건 전혀 재미없어! 기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건.. 사랑스럽지 않다는거겠지. 그렇지 않아, 내 소중한 친구? 응? "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짧게 웃었다. 그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멍청해보여, 왜 그리도 재미없는 일에 이를 물고 덤벼드는걸까? 우리가 사는 삶은 언제나 짧잖아?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늘 전력으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 손해야. 내 깜찍이, 반짝이에 죽은 사람들도, 오늘 내가 이렇게 죽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나도 그런거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나는 즐길래, 한 점의 후회도 없이, 최고로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 노후를 위해 저축해? 그거 진짜 재미없다. 친구,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오늘이 너의 가장 젊은 날이잖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싫어하는 일만 하면, 사는건 재미없잖아? 으에, 끔찍해. 나같으면 그런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다 그가 맥없이 떨어진 돈다발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리는거에 응? 돈 안가져가? 내가 주는 선물인데! 하고 얘기했다가.

" 쿠궁,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완전 충격이야, 그런 재미없는 이름이라니. 게다가 맥워커? 성에서부터 일복을 타고났잖아. 안되겠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름이야. 그냥 민트초코가 되는건 어때? 무려 우리 집 고양이랑 똑같은 이름이라구. 응! 아주 귀여워. 어라, 허리아파? 마사지라도 해줄까?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허리를 주물러주면 순식간에 나을거야. 장담은 못 하겠지만~ "

다시 짧게 웃던 그녀는,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이 밟고있는 땅을 그대로 들어올리자 길게 한숨쉬었다. 그리고 쪼그려앉으며, 자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 아아, 정말. 나랑 같이 크레이프 먹으러 가는건 부끄럽고, 나처럼 예쁘고, 최고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여자애를 공격하는건 부끄럽지 않은거야? 정말, 최악이야. 전혀 사랑스럽지 않아. 친구라고 믿었는데, 나를 배신하다니. "

정말 슬퍼. 그녀는 빠른 속도로 주머니에서 반짝이들을 꺼내 그대로 마구 흩뿌렸다. BOPE에서도 사용하는 특제 고폭 수류탄. 그리고 그대로 공중에서, 뒤로 한바퀴 돌며 뛰어내렸고, 큰 폭압에 휘말린듯 옷은 이리저리 헤지고 찢겨나가며,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큰 목소리로 보아 그녀는 나름대로 무사한듯 싶었다.

" 정말, 너무해.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선, 나중엔 데이트하자며 꼬드기는거야? 미안, 난 나쁜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이미 질릴대로 봤거든. 으응, 근데, 아저씨 친구들은 괜찮을까~? 저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봐, 천장에 구멍이 생긴 탓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뭉게뭉게, 하늘의 구름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기 경찰? 인가? 저 친구들도 위험해보이는데~ "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찰랑거리는, 분홍색 액체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겉엔 요란하고 화려한 분홍색 스티커, 반짝이 가루까지...

" 이거 던져서 깨지면, 구름이 잔뜩! 응? 근데, 지금이라면 되돌릴수 있어, 아저씨. 아직까진 수습이 가능한 단계야. "

근데 내가, 그렇게 가만히 두진 않을거야. 그녀는 바닥에 핑크 다이아몬드를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 아아, 아저씨... 일하기 싫다고 했지? 월요일을 싫어하는것도 출근때문이고? 괜찮아, 괜찮아, 민트초코. 설령 날 배신했더라도, 최고로 사랑스럽게 만들어줄게. 일 따윈 안나가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만들어줄테니까. "

그럼 우리, 지금부터 다시 친구하는거다? 응?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깜찍이를 쏘기 시작했다. 쾅, 하는 미친것처럼 시끄러운 폭약음이 귀를 때렸고, 뒤이어 큰 폭발이 금고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핑크 다이아몬드에 몇개 인화성 가스가 섞였던걸까. 그리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자기가 부쉈던 금고의 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 술래잡기 시작이야! 잡으면, 으음~ 그 센터? 거기에 들어가는거, 생각해볼게~ "

308 이름 없음 (kYJ74/gKbk)

2022-03-30 (水) 23:06:33

>>307
감히, 내 원칙을 비웃다니. 거기다 이름에 일복을 타고났다고 말해?! 머릿속에서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느낌이 든다. 누가 일복을 타고나, 누구 이름이 재미없어!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랑스런 이름이다! 민트초코 따위 될까 보냐. 되다 못한 그런 디저트의 이름을 갖는 순간 자신은 평생 뇌가 세척당한 상태로 살아야할 것이다. 푸, 한숨을 쉬며 감정을 진정시키고 날아오는 수류탄들을 시야에 들인다. 성가신 무기를 쓰는데, 본인까지 휘말려도 상관 없다 이거야? 열기와 긴장감에 식은땀 한 줄기를 흘리며 근처의 벽을 염동력으로 뜯어내 폭압을 막아낸다. 그리고 가스병을 던져 깨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먼지와 땀이 섞인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긴다.

“내가 살아온 31년 간, 스스로를 예쁘고, 사랑스럽고, 가련하다고 하는 여자애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애들은 없었거든. 그래도, 뭐, 친구끼리 다투곤 하잖아. 안 그래? 그런거라 보자고.”

그래, 이놈의 가스가 문제였지.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 분산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 그 위험성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구멍을 낸 이유는, 그의 능력의 본질에 있다. 평범한 염동력이라면 그 세기에 따라 능력자에게 매겨지는 강함의 척도가 달라지곤 한다. 맥워커는 그런 강함만으로 따진다면 분명 상위권에 위치하진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위권의 염동력자들과 호각을 다투고, 심지어 한 수 접어주는 이유는, 누구보다 섬세하게 다룰 수 있다. 그 이유 하나뿐이다.

“미안하지만 죽어도 일하기 싫어도, 끔찍하게 출근하기 싫어도 아가씨 같은 녀석들이 설치고 다녀서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내가 이짓거리를 그만두는건 빌런놈들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때 뿐이거든. 그러니까 아저씨의 퇴근 시간과 허리를 생각한다면, 얼른 잡혀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민트초코라 부르지마라. 분명히 말했어. 진짜로.”

의외로 속이 좁다. 그러곤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전체를 움직인다. 그러자 천장에 난 구멍 주변에 날아다니던 먼지가 떨어지는 것이 멈춘다. 흙먼지들이 만들어낸 윤곽은 마치 투명하고 길다란 원통이 박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반대편 손으로 꾸욱 잡아당기듯이 허공을 긁자, 핑크 다이아몬드의 분홍색 연기들이 염동력으로 만들어낸 원통형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내 금고 안을 가득 메웠던 연기를 전부 빨아들여 순수한 분홍색 연기만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압축된 연기를 한번에 힘을 주어 발사한다.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온 길다란 1자형의 연기는 그대로 하늘 저멀리까지 깔끔하게 날아간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진짜로. 뛰는 것도 못하는데, 하아.”

이미 당신이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길게 한숨을 짓고는 인화성 가스로 인한 폭발로 날아온 파편들을 염동력으로 쳐냈다. 그 중 몇개는 머리나 어깨에 맞아 피가 조금 흘러내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걷는 것보단 염동력으로 날아가는 것을 택해, 빠르게 뒤쫓는다.

“저기, 월요일 아침부터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랑 술래잡기 하고있는 아저씨 체면 좀 세워줘. 응? 그 센터에 친구들도 분명 많을걸. 근데 뭘 먹고 그렇게 빠른거야, 대체.”

아무리봐도 신속한 제압이 필요하다. 방독면도 벗어제끼고 신체 주변을 감싼 염동력에 힘을 줘 벽을 부셔가며 빠르게 쫓아간다. 중간에, 당신이 지나갈 법한 골목의 좌우 벽을 뜯어 길을 막아가며 진로를 방해한다. 무작정 길을 막는 것이 아닌, 최대한 구석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다. 그래봤자 당신이 벽을 부수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지만 바깥으로 나갈 경우, 이쪽이 좀 더 유리해진다. 어떻게 할 테냐, 깜찍한 아가씨.

309 이름 없음 (LWmIMFYTnY)

2022-03-32 (불탄다..!) 22:57:48

" 내 살다보면, 별의 별 또라이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

독한 담배연기가 어두운 밀실을 가득 채운다. 천장에 조악하게 달린 낡은 조명과 정가운데 펼쳐진 철제 책상, 반듯한 의자 하나와 대조되는 비뚤게 기운 의자 하나. 50년대 턴테이블에서 흐를 법한 재즈 음악을 깔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우리라. 그중 남자는 아니꼽게 비뚠 자리에 앉아 상대를 응시하고 있다. 잠시의 침묵. 남자는 다시 밋밋한 금반지를 낀 손가락을 까딱이며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다.

" 그런데 그쪽 같은 사람은 또 처음이네…… "

겨울날 피어오르는 입김처럼 쏟아지는 연기들. 이미 냉랭해진 공기 속 이것과 그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 남자가 가벼운 비소를 흘리며 재떨이 위로 담뱃재를 털어낸다. 번듯한 양복에 듬직한 몸뚱이. 제 능력껏 머리를 단정히 만져본 듯 싶으나 삐죽 튀어나와 흐트러진 머리칼 한두 개는 어딘가 모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내비치는 성 싶다. 남자의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새겨진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는 습관 탓이다. 결코 만만한 모습을 보여선 안되는 자리지. 남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위를 설명하거든 늘 그리 중얼였다. 짙은 이목구비와, 상반되게 가벼운 푸른 눈동자. 홀로 무언가를 몰골하듯 눈동자를 움직이던 남자가 다시금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 아, 죄송합니다. "

남자의 태도가 양껏 거만해진다. 가볍게 뒤로 젖힌 상체와 불규칙적으로 까딱대는 구둣발. 상대의 머릿속을 열심히 읽어내려는 건방진 눈빛. 그리고 당신의 의사 따위는 고려치 않고 끊임없이 내뿜는 독한 담배 연기. 늙은 조명 아래로 연기가 희뿌옇게 들이차고 남자의 손에 들린 담배 한 대는 목구멍 곧 아래까지 몸을 태워낸 채 위태로운 호흡을 이어간다. 조용히 담배를 물고, 마지막으로 마시는 한 모금. 남자가 지독한 안개같은 연기를 삼켜내며 철제 책상 위로 담뱃머리를 짓눌러 문지른다.

" 뭐, 까짓거 하죠. 물어보고 싶은 게 뭐라고… 하셨더라? "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아래로 희끄무레한 담배연기가 뿜어져나온다. 그 사이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결코 선한 자의 것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악마의 유혹일지 모르리라. 붉은 벽지와 오렌지빛 조명, 여건만 된다면 남자는 흔쾌히 데킬라 한 병을 주문했을테다.

# 남자는 거대 마피아 조직의 고위인사, 상대는 마피아와 연루된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 기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 아마도 그런 쪽! 유서 깊은 마피아 조직은 현대화를 거치며 이미지를 세탁해 평판 좋은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어 범죄의 증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 이곳은 어쩌면 취재하러온 당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지도! 편하게 이어줘!

310 이름 없음 (NMlIrlWgNs)

2022-04-03 (내일 월요일) 01:10:14

그래서, 이게 네가 바라던 히어로의 모습이야? (불타고 있는 건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울고 있는 아이. 하지만 경찰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참혹한 풍경, 그리고 당신과 나뿐.) 지금이라도 멈춰.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원하던 히어로는 이게 아니잖아. (슬픈 표정을 지은 흑발 금안의 남자는, 당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311 이름 없음 (rqh/1cHbIc)

2022-04-03 (내일 월요일) 01:30:15

너무나 평화로워보이는 황실의 모습은 그저 겉보기에 불과했다. 그 일면에선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한 암투가 있었고 그건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황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나 자비롭고 인자하며 두뇌도 명석한, 정말 너무나 뛰어난 자질을 지닌 황태자였으나 건강이 약하고 체력이 좋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황실의 대신들은 황자의 재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지금 저대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건강상 업무를 보지 못할테니 폐위하고 다른 이를 그 자리에 올려야한다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런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말 따윈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이들끼리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아직 피는 튀지 않았으나 언제 피향기가 튈지도 모르는 환경 속에서 황태자는 자신의 최측근과 황제, 그리고 일부 황족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요양길에 올랐다. 서쪽에 있는 실력 좋은 마법사에게 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황태자님! 건강이 나쁜게 아니었습니까?!"

"언제까지 제 건강이 나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이제는 이런 일도 쉽사리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황태자는 누구인가. 그는 황태자의 최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였다. 황태자의 바로 옆에서 황태자를 지키던 검이요 방패인 사내였다. 마법의 힘을 빌려 얼굴을 황태자와 똑같이 만들어낸 그는 황태자인 척, 대신들의 앞에 서 있었다. 길게 한줄기로 묶어내린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갸름하고 기품이 흐르는 얼굴까지. 그야말로 똑같다 못해 본인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럼 어째서 사내가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진실은 이러했다.
황태자가 요양길에 나섰다는 것이 알려지면 누군가는 시꺼먼 속을 품고 황자를 해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자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최측근인 사내에게 부탁해서 자신인양 행동하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길거리를 떠돌며 굶주리고 살아갔으나, 우연히 거리로 온 황태자의 자비로 황궁에 들어와 교육을 받고, 밥을 먹으며 무술을 익힌 사내는 황태자의 명이라면 목숨도 끊을 자신이 있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이 황태자의 흉내를 내고 있어야하니 황태자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존재는 그렇게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알려졌다면 황태자가 있는데 그 옆을 지키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고 의심을 살테니까. 일단 사내는 어떻게든 황태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버티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물론 지금 황태자를 찾아온 이에게도 그게 통할진 알 수 없었지만.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가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말 그대로 황자는 건강상 문제로 남들 몰래 다른 곳으로 요양을 갔고 황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20대 정도의 최측근이 마법의 힘을 빌려 황자인척 대리로 행동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가 찾아온거야.
찾아온 이는 아무나 좋아. 다만 너무 말도 안되는 맥끊기는 아니었으면 해. 이를테면 컷!! 영화 촬영 끝났습니다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건 사절이야. 잇지도 않을거고.
일단 이렇게 써두고 자러갈 생각이니까 혹시 이 새벽에 잇더라도 기다리지 말길 바랄게! 정말 편하게 이어도 상관없어! 아. 배경은 서양이야.

312 이름 없음 (llu5yPLJqg)

2022-04-03 (내일 월요일) 01:49:51

>>310
쏠 거야? (그리 말하는 자는 여상히 웃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후회도 희열도 그 무엇 하나 드러내지 않는. 그저 얼굴거죽 위로 잡아 당기니 웃는 체 할 뿐입니다.) 쏠 거니? 그 총으로 나를 공격해, 내 심장을 꿰뚫어 이 모든 참상을 멈출 테야? 난 네가 그러지 못 하리라는 데에 걸겠어. 그렇지만, (발 내딛습니다, 여전히 바뀌지 못 한 당신을 향해.) 여기서 멈추는 것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네.

313 이름 없음 (NMlIrlWgNs)

2022-04-03 (내일 월요일) 02:26:58

>>312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못 쏜다는 건.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깊은 슬픔과, 후회,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 당신을 보는 감정이었다.) 난 네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아직은 어딘가에 내가 기억하는 네가 남아있을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널 죽일 수는 없어. (그저 혼자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너무나 바뀐 당신을 향해서.) 하지만 네가 멈추지 않는다면, 난 너를 막을 거야. 죽일 수는 없지만, 제압할 수는 있으니까. (당신이 다가오지만 총은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단호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314 이름 없음 (llu5yPLJqg)

2022-04-03 (내일 월요일) 08:27:39

>>313
(그제야 이 자의 표정에 무언가 감정이 드러납니다. 안타까워라. 가엾이 여기는 대상만이 오리무중일 뿐.) 나는 알아. 네 태도 또한, 아주 굳센 다짐의 결과물일 테야. 극악무도한 악인마저 죽이려 들지 않는 정의의 히어로. 멋지네, 이상적이야. (나는 그러지 못 했지만. 대중은 비명 소리로 코러스를 넣어준다. 네가 이걸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가끔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게 있어. 그걸 빨리 깨달아. 그리고, 강해져! 방아쇠를 당겨! 무얼 하고 있니? 제압 안 할 거야?! (호통칩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람이 머릿결 사이를 파고들어 이리저리 흐트러뜨립니다. 어느샌가 양손에는 단검이 들립니다. 주무기지요.) 나는 멈추지 않아! 모든 걸 뒤엎어버리기 전까지... 히어로는 멈춰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너같은 애송이가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네! (값싼 도발입니다. 어서 빨리 죽여달라는 바람의 발현.)

315 이름 없음 (2Xv740JREE)

2022-04-03 (내일 월요일) 11:40:37

>>314
(감정이 드리운 당신의 표정에, 그의 눈빛에 잠시 의문이 스친다. 왜, 그리고 누구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네가 이렇게 되길 바랬어. 이상 속에 있는 정의의 히어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 아이들이 우는 소리, 죽어가며 내는 단말마.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할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라. 엄습하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닥쳐. 네가 뭐라 하든 날 널 예전의 너로 돌아오게 만들 거야. (강해져라. 당신이 언제나 하던 말이다. 우스울 뿐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어째서 예전처럼. 망설이던 내게 마음을 굳히게 만드는 건지.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자동권총이, 오른손에는 리볼버가 자리잡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해도 널 막을 거야. 히어로는 물러서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덤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죽여줄 테니까! (쌓였던 분노섞인 말을 내뱉었다. 죽여달라는 당신도, 불타고 있는 주변도 전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다가오는 당신에게 달려가며 자동권총을 여러발 쏘며 탄막을 형성했다. 급소를 일부러 피한건지, 총알은 팔다리 쪽으로 향한다.)

316 이름 없음 (yWTJw2wySk)

2022-04-03 (내일 월요일) 20:50:33

>>315
응. 실패했네. (당신의 바람 듣고 그리 단언합니다. 양측의 이상상 산산히 부수어버린 게 자신임을 알고나 있을까요? 다만 당당할 뿐입니다.) 이상은 그저 하룻밤 꿈이야... 꿈을 좇아 현실을 외면할지,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에서 깨어날지. 난 그 중 후자를 택한 거야... (나를 무위의 무대 위로 다시 올리려 하네요.) 그런데도 나한테 다시 안대 씌울 속셈이야? 아무리 너라도 그건 못 봐줘!!
(실실 웃던 웃음 어디로 가고 호승심과 전투 향한 집념이 그 자를 집어삼킵니다. 당신한텐 오히려 이 모습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의 옆에 있던 이 사람은 언제나 이랬잖아요?)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몇 발의 탄환을 튕겨냅니다. 몇 발의 탄환이 기다란 붉은 족적을 남깁니다. 일반인이라면 - 전투에 능하지 않은 여타 빌런이었다면 통증에 주저앉았을 상처 달고도 당신 향해 휘두르는 팔은 멈추지 않습니다. 절대 그만두지 않으리란 선언을 끝까지 지키려는지.) 뭐 하니? 사지는 급소가 아니야. 머리. 심장. 하다못해 폐 정도는 노려. (제 말 지키려는 듯 오른손에 쥔 단도는 정직하게도 당신의 목을 노리며 달려듭니다.) 네가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널 죽일 테야. 차라리 그게 우리한테 행복할 테니까...

317 이름 없음 (p6fTa2AlTw)

2022-04-04 (모두 수고..) 06:41:14

>>316
모를 일이지.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확신하는 건지. 당신이 이상을 산산히 부수어도, 그것에 당당하더라도, 그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불태우는게 현실을 직시한 거야? 정말, 이게 히어로일까? (이상은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 또한 꿈을 꾸고 있잖아.) 그만 정신 차리라고! 네가 하고있는 짓이 뭔지, 똑똑히 바라봐!!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이었다. 호승심 가득한 모습도, 아까의 호탕치는 모습도. 그런데 왜 지금의 당신은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건지 모를 일이다.) 이 미친놈..! 그 통증을 무시하고..!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탄막이 아닌, 저격을 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닥쳐. 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야. 이 싸움에서, 둘 모두 죽지 못 하게 할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당신의 말마따나, 쉽지 않아보였다. 정직하게 날아오는 단도를 고개와 상반신만 비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낸다. 단도가 목을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실선을 목에 남긴다. 급소를 정확히 노리는걸 피해야 하면서, 상대방의 급소도 맞추면 안 되는 싸움이라니.) 네가 죽으면, 나는 행복할까? 내가 죽으면, 너는 행복하니? (당신의 말에 울컥했는지 총을 든 손과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크게 떨린다.) 알지도 못하면서 급소를 노리니 어쩌니, 집어 치워!!! (결국 쌓아두었던 것이 폭발하고, 자동권총이 아닌 리볼버의 총구가 당신을 향한다. 대구경 리볼버의 탄환 두 발이 각각 당신의 허벅지와 팔목으로 향했다.)

318 이름 없음 (UgmDynjhX2)

2022-04-08 (불탄다..!) 12:33:07

>>311

깨끗한 은빛 머리카락을 낮게 틀어 고정하고 앞머리는 뒤로 깔끔히 넘긴, 서늘한 눈매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냉철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진 성품을 지녔던 황태자와는 인상이 퍽 다르지만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있는 그는, 황태자의 어미이자 제국의 황제인 루도비카 알브레히트였다. 황제는 황태자로 변장한 사내를 보자마자, 경악한 듯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일국의 황제임에도 감정이 다잡아지지 않는지 마른 세수를 하던 그는, 애써 냉엄하게 가다듬은 얼굴로, 그러나 다부지게 그러쥔 주먹을 희미하게 떨면서 입을 열어 진노가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침 황태자의 부고가 전해졌거늘, 네 놈은 누구이기에 여기서 내 아들의 행세를 하고 있느냐!"

마치 황태자의 대역을 하고 있는 사내를 모르는 듯, 냉정하려 애쓰면서도 충격과 진노를 다 감추지 못한 듯한 기색의 황제였지만, 그는 이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아들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이라는 것도, 그가 비밀리에 요양을 떠난 스스로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대역을 맡긴 이라는 것도. 그런 이를 이런 식으로 처분하게 된 것은, 황태자의 어머니이지 한 개인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개인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그렇기에,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기 전에 그 이후의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죽은 지금 제국에는 새로운 황위 계승자가 필요했고, 그를 옹립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황태자를 따랐던 이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들을 가장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눈 앞의 사내를 황태자 사칭범이자 시해 사주범으로 몰아, 본보기로서 처형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해서 무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황제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근위대를 불러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자를 포박하라!"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들이 일제히 황태자의 모습을 한 사내를 에워싸며 창을 겨눴고, 그중 몇이 앞으로 나와 그를 포박하고자 덤벼들었다.

319 이름 없음 (6pyb05QBWU)

2022-04-08 (불탄다..!) 12:51:24

>>317 미안하지만 이을 수는 없을 것 같네. 일단 손님이 찾아왔다는 보고가 왔는데 그 찾아온 이가 황제다? 그런 판국에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러 왔다? 근데 그걸 최측근되는 이는 황자가 죽었다는 것도 몰랐다? 너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어지간한건 다 이으려 했는데 이건 상황 자체도 정말 당황스럽네. 고로 이건 패스하도록 할게.

320 이름 없음 (6pyb05QBWU)

2022-04-08 (불탄다..!) 12:51:53

실수야. 317이 아니라 318이야

321 이름 없음 (UgmDynjhX2)

2022-04-08 (불탄다..!) 13:04:46

>>319 아이고, 황제가 시종에게 손님이 왔다고 이르라고 하고 보냈다는 서술을 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그렇지만 황태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건 황제나 측근이나 마찬가진데 당연히 황제이자 황태자 엄마인 루도비카한테 먼저 알리지 않을까? 아침에 들어온 부고고 말이야.

자기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하면 어떤 심경일지, 그런 마음으로 어떤 대처를 할지 되게 기대했는데,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니 아쉽네...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좋은 하루 되길 바라

322 이름 없음 (uG1yswtFho)

2022-04-19 (FIRE!) 23:10:35

' 오늘의 날씨입니다. 봄이 찾아오며 따스하고 화창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오늘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교차는 조금 크겠으나 오후에는 최대 21도까지 기온이 오르며 완연한 봄날씨를 만끽할 수 있겠습니다— '

세상은 평화롭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텨가는 이들에게는 야속하게도 말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내일이 오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이 세상. 당신은 아마 스물 둘셋을 먹은 창창한 청년이었던가.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라는 우스갯 소리를 중얼이며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을지도,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며 아르바이트의 따분함을 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잔뜩 몰려온 피로감에 에너지 드링크를 연달아 마셔대고 있었을지도. 요컨대 당신은 지루하고 따분하나 변함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으리란 뜻이다.

" 저, 저기! "

그런 평범한 당신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앳되어보이는 젊은 여자다. 숫기가 없게 생긴, 묘하게 색채가 옅은 여인은 무언가를 우물쭈물 망설이며 당신의 옷깃을 당겼다. 그리 대담하게 낯선 이의 옷깃을 끈 여자는 한참, 아주 한참이나 뱉을 말을 고민하다 겨우내 제 입을 열어냈다.

" 내일, 세상이 멸망할거예요... "

여자는 내일, 세상이 망할거라고 말했다.

323 이름 없음 (bDn4Q/X.vc)

2022-04-28 (거의 끝나감) 20:55:03

님, 맨날 여기서 뭐 합성하고 계시네요? 뭐 만들고 계세요? (당신의 곁으로 다가온 유저는 철갑옷을 입은 기사 클래스로 보이지만, 당신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인벤토리에서 피리를 꺼내든다. 그리고 익살맞은 리듬의 연주를 하다, 당신의 합성이 언제나처럼 실패하자 삐루루루룩, 하고 처지는 음악소리를 낸다.) 아깝당.

324 이름 없음 (dQ6js4ZQ8A)

2022-04-30 (파란날) 04:25:57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텅 빈 폐허의 풍경이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그곳은 내게 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챘을때엔, 내가 가진거라곤 오직 끝없는 공허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당연한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부모도 내겐 없고, 추위와 비, 벌레 따위를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집도 없었으며,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단조차 내겐 없었다. 공허함, 무력감, 그리고 이어지는 표독스러운 절망. 울어도 상황이 달라지는건 없었기에 나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두 주먹이었다. 믿을 수 있는건 내 두 주먹 뿐이었다. 이 두 주먹으로 모든것을 쟁취하리라.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이것은 하나의 신념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수단을 쓰든간에 반드시 이뤄내리라. 살아남아서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강탈하리라.

처음엔 소매치기로 시작했다. 물론 그 때엔 기술이 좋지 않아 쉽게 걸리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두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덤벼들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냐며 덤벼오는 멍청이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잡아 던지고. 꺾고, 조르고, 급소를 찔렀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잘 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어린 아이였고, 체격은 왜소했으니. 그렇게 한참을 두드려맞으면 분노가 들끓었다. 무력한 내 자신에게, 아직 한참 미숙한 내 두 손에. 그리고 나는 바로 다음 타겟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또 싸우고, 두드려맞고, 그렇게 기절하며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체력이 돌아올때까지 선잠을 잤다. 지갑을 훔치는데 성공한 날은 우선 배가 터지게 밥을 먹고, 그렇지 않는 날에는 차갑고 새카만 벽돌같은 빵이라도 훔치며 어떻게든 연명했다. 이걸 훔치는 이유는, 가장 싼 빵이기에 죽어라고 도망치면 포기하는 녀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에 성공하고 남은 돈으로는 마약을 샀다. 비싼 가격으로 호구잡혀도, 닥치는대로 긁어모았다. 그리고 하수도 근처에 사는, 중독자 중에서도 밑바닥으로 떨어진 놈들에게 가져다 팔았다. 가격은 무조건 내가 산 금액의 두배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설사 그것이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낭떠러지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아무도 마약을 팔지 않았다. 왜? 돈을 구할 방법이 없는 쓰레기같은 족속들이니까. 그들은 마약굴 근처에서 남은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어떻게든 마약 부스러기를 찾아내어 몇분 단위로 연명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마약을 보여주며 가격을 제시하고, 서비스라며 살짝 뿌려주자, 어떻게든 돈을 구해왔다. 감옥으로 직행했는지, 계획이 잘 풀리지 않아 죽었는지, 보이지 않게 된 녀석들도 더럿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틈새시장을 이용해 고객을 찾아냈고, 돈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도 성에 차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들은 수가 한정되어 있고, 가져다 바칠 수 있는 금액도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 이런것에 만족하려고 여태까지 발버둥치며 살아온게 아니란 말이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손톱을 조금 깨무는 버릇. 그래, 조금은 신경질적이게 된 것이 이때부터겠지. 우선은 이 방법이 내가 제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여유자금이 생길때까지 돈으로 돈을 벌고, 소매치기를 해서 또 다시 돈을 번다. 체력을 위해 배가 터질때까지 밥을 먹고, 훈련을 반복한다. 그렇게 나이가 드는걸 기다려야 했다. 돌이켜보면 지루하고, 초조한 시기였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때. 키가 훌쩍 컸고 주변의 어른들과 비슷한 키를 가졌을때. 이젠 소매치기정도는 걸리는 일이 없었다. 지갑을 훔치는것 정도는 너무도 간단한 일이 되었다. 쓰레기들에게 계속해서 마약을 팔며 제법 자금을 모아두었다. 물론, 위험한 순간이 없던 건 아니다. 쓰레기들에게 마약을 갈취당할뻔 하고, 완전히 얕잡아보인적도 있었다. 그래서 난 이른 새벽을 노려 제정신이 아닌 놈들을 완전히 뭉개놓았다. 그 과정에서 몇번이나 찔리고, 물리고,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날 감히 얕잡아 보던 놈들을 전부 때려죽였다. 그나마 상황판단이 조금 될 정도의 지성이 남은 놈들는 내게 두번다신 대들 수 없게끔, 상하관계를 확실히 주입시켜주었다. 또 한번은 내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어떤 조직의 말단으로 추정되는 놈이 덤벼온 적도 있었다. 마약을 팔고, 뒷골목을 헤집던 난 당연히 골칫거리였겠지. 그녀석은 날 만만히 보고 덤벼왔던 모양이지만,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내가 믿는건 오직 내 두 주먹 뿐이었고, 하루도 훈련을 게을리 한 날이 없었다. 완전히 때려죽이고 난 다음, 난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녀석의 적대 조직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큰 돈을 벌어다주겠다며 내 계획을 말해주었다. 전쟁, 전쟁이었다. 이권다툼을 하던 조직이니 언제 전쟁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조직원이라면, 습격을 받았으니 명분은 충분히 된다. 내가 네 적들을 전부 죽여주겠다. 그러면 크나큰 돈이 네게 굴러들어온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전쟁의 주도자는 나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네게 손해가 될 것은 단 한푼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망진창인 말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들은 내 계획에 찬동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회였다. 크나큰 기회. 나는 그 길로 놈들의 아지트로 찾아가 전부 때려죽였다. 꽉 쥔 주먹으로 턱을 으깨고, 팔을 부러트리고, 눈을 찔러대며 그대로 괴멸시켰다. 고작 9명밖에 상주하지 않는 작은 지부였기에, 어떻게든 성공할수 있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조직의 보스와 대면한 난, 그 자리에서 행동대장이라는 중견 간부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이것으로 나는 기회를 내것으로 만들었다. 고작 9명이다. 겨우 그것만으로 나는 조직에 들어감과 동시에 내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슈퍼히어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작 9명을 때려죽였다고 무엇이 변하겠는가? 마피아의 가장 위험한 점은 압도적인 그 숫자에서 나온다. 개개인이 전부 저명한 싸움꾼 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그들은 수백명씩 존재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내 목숨을 노릴 수 있다. 정신 차려라, 네가 9명을 이긴다고 해서 조직 하나에 맞설 순 없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나 또한 조직을 등에 업었으니, 남은건 내 기량을 전부 펼쳐보이는것. 이 남자의 탐욕스러운 아가리에 이득을 쑤셔넣어보이겠다. 그리고 그 배를 갈라서, 모조리 다 내것으로 만들것이다. 겨우 중견 보스 자리를 하나 얻자고 여태까지 발버둥쳤을리가 없잖느냐.

또 다시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키는 192cm를 훌쩍 넘었고, 몸무게는 90kg가 넘어갔다. 근육도 단단하게 붙었으며, 난 이 조직의 보스가 되었다. 그래, 이전에 얘기했던 그 전쟁에서 나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칼에 찔리고, 놈들의 턱을 깨부수면서, 내 몸에서 흐른건지, 뒤집어쓴건지 알 수가 없는 피로 점철된 내 모습을 보고 사냥개라는 이명을 받았을 정도로. 그렇게 난 내게 충성하는 부하들을 모으며 내 입지를 다졌고, 조직 내부의 불만과 권력다툼을 교묘히 이용해 내전을 일으켜, 모조리 독식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 나는 여전히 돈으로 돈을 불리며, 그토록 바라던 안정된 생활을 손에 넣었다. 회사의 경영 방침은 단 하나, 프리미엄. 겉으로는 무역회사기에, 싸게 원자재들을 구매하여 품질좋게 가공한 뒤 비싼 값으로 판매한다. 그레이 하운드의 무기들과 경호 업무, 중금속과 하다못해 식자재까지. 어느 것 하나 돈벌이가 되지 않는게 없었다. 그리고 뒤로는 어떤 의뢰든 반드시 수행해내는 킬러집단으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내게 존재하지 않는 가족들도 손에 넣었다. 사랑스런 아내, 보물과도 같은 딸.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은곳의 공허함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뭔가를 놓치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하나의 흉조였을지도 모른다.

" 다녀왔어. "

이상하다. 유달리 집이 어둡고,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 향초를 들고 집 안쪽으로 들어섰더니, 그곳엔 무참하게 찢겨진 가족의 시체가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고, 가슴은 도륙이 나 찢어지는것처럼 아파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은 한 방울 조차 흘러내리지 않았다. 울더라도 바뀌는게 없다는걸 잘 알기 때문일까? 아니, 그게 아니다. 이 과분한 행복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처음부터 알고있었기 때문이다.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우선 누가 이랬는지를 찾아내어,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인다.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뭔가 달라질까? 지금, 이 순간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게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태어날때부터 가진거라곤 두 주먹밖에 없었고, 이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수 많은 피를 이 손에 묻혔으나, 정작 가족조차 지키지 못했던, 드디어 쟁취한 이 행복도 지키지 못했던 이 두 손을 어떻게 계속해서 믿을 수 있겠나. 내게 남은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살려고, 조금은 행복해 지려고 발버둥쳐왔는데, 더이상 그 어떤것도 의미가 없잖은가. 공허함. 세상이 내가 알던 당연함과 다르다는걸 깨달았던 순간부터. 이건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공허함만이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참사를 뒤로 하고, 집 밖으로 나가 경찰서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이미 늦은 한밤중이었지만, 한명이 눈에 띄었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 나다.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으며, 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겼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달이 환하게 차오르는, 그런 밤이었다.

325 이름 없음 (PSfuTR2fWU)

2022-05-01 (내일 월요일) 15:11:34

>>325
외신 뉴스나 위키피디아 같은 잡다한 것들.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인터넷 논객이나 격식있는 외교관이나 도긴개긴이다. 무능한 중앙정부, 군벌화하는 마약 카르텔들-아니면 마피아던지-, 피로 피를 씻는 조직간 항쟁, 신체 일부가 사라진 채 고가도로에 매달린 시신들, 정의로운 시장과 경찰관은 가족까지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피아와 유착하고, 묵인하고, 쥐꼬리만한 월급에 플러스를 얹기 위하여 뇌물을 받고 또 뜯어낸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저 먼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건조한 문장과 문단으로 정제된다.

한때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경찰을 꿈꾸던 소녀. 유학까지 다녀온 나름 엘리트였지만, 결국 현실에 굴복하여 부패경찰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못해 공기와도 같은 이야기라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이야기다.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은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지치는 일. 하지만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짜릿했다. 자칭 정의의 사도들이 손가락질한다면 내게도 항변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마피아 간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웃으며 했던 '잘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는 황금 열쇠나 다름없었으니. 나는 마침내 저축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없어 죽어가던 언니는 마피아들이 세운 병원에서 싼 값에 치료받게 되었다. 한번 신념을 버린 대가로 나는 모든 결핍을 해소했다. 두번째부터 죄책감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로 길거리의 시체나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들, 인신매매의 타겟이 된 여자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열정이 넘치던 시절 밤잠을 줄이며 작성하던 수사 자료들을 모조리 드럼통에 넣고 불살라버렸다. 그들이 그러기를 원했기에.

우리 경찰 사이에서 일명 킹핀Kingpin이라 불리는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의 보스 되시는 분이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마피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선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젖혀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거한인데, 권총에 야경봉에 테이저까지 휘둘러도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헛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킹핀."

하던 전화를 마무리하고 안경을 고쳐쓴다. 테가 크고 동그란 안경은 경찰서 앞 가로등 불빛을 받아서 윤이 났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군요.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실줄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친절한 민중의 지팡이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실상은 권력에 복종하고 기생하는 샤일록의 웃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이 남자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도도한 척은 다 하더니 뼈다귀를 물려주자 금세 엎드려서 꼬리를 치는 계집? 정말 그렇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킹핀이 직접 찾아와서 말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대체 뭘까. 나는 궁금했다.

326 이름 없음 (sDPyxlTZ9A)

2022-05-01 (내일 월요일) 20:19:49

(노움으로 여겨질 법한 뾰족 솟은 귀와 작은 키, 그리고 부스스한 흰색 머리칼. 앳되고 차가워보이는 인상 덕분에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여행자 술집에 있는 이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조금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고있다는 점일까. 잠시동안 당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죄송합니다. 실은 같이 의뢰를 맡아줄 호위를 구하고 있어요. (왜 당신인지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단지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볼 뿐이다.)

#정통 판타지~!

327 이름 없음 (Kg78n5JoOw)

2022-05-01 (내일 월요일) 20:52:49

다시 보니 오타났다.. >>325의 앵커는 >>324에 걸어놓은거야

328 이름 없음 (Tvi18C4W06)

2022-05-02 (모두 수고..) 00:27:06

사방이 사이렌의 불빛과 굉음으로 소란스럽다. 높디 높은 고층 빌딩의 아랫편은 분주하게 대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만 이건 꺼지지 못한 게 아니라 불장난이 일어난 정도가 아닐지— 싶은 마음이다. 바닥부터 터져오르는 카메라 플래쉬와 무어라 외치는건지 알 수 없을 인간들의 목소리. 저 거리에서 형체는 제대로 보이는걸까. 특종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대 언론사들의 발악이라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달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이 빌딩 옥상에서 마주한 당신과 여자. 그냥 여자는 아니고, 아마도 미친 여자.

" 있잖아, 나, 히어로가 하고 싶어! "

제 뺨에 튄 핏자국을 문질러 닦아내며 그 미친 여자가 해맑게 외쳤다.

*

혼란과 공포의 2031년을 기점으로, 세상은 [이능력]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졌다. 출현 전의 세상은 당신 모두들이 알고 있는 그 평범하고 따분한 세상. 출현 이후의 세상은, 수 천년에 걸쳐 배출된 현자들의 귀중한 도덕적 가르침들이 개거품으로 사라져버린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정확히 2021년 12월 31일 정각 12시. 전세계 20%의 인구가 이유를 모를 발작을 일으키며 폭주했다. 폭주를 겪고도 사망하지 않은 인원들에게는 똑같은 후유증이 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전세계적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된 [이능력]의 등장인 것이다. 인간의 과학력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 누군가는 불을 뿜고, 누군가는 물을 만들어냈으며, 누군가는 중력의 법칙 따위는 개무시한 채 하늘을 떠다닐 수 없었다. 인류를 지배하던 법칙이 무너지던 순간. 인류가 세운 법칙 역시 연쇄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이능력을 이용한 범죄 보도, 이능력자들에 대한 차별과 차별 범죄, 한순간 인류에게서 '다른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은 혼란에 빠지고야 말았다. 기존의 인류도 마찬가지. 그들을 현존해오던 인류와 동족으로 취급해도 되는가? 라는 논제까지 불거졌을 수준이니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아무튼, 따분한 이야기는 그만 멈추고. 그렇게 이능력이 등장하고 십오년 뒤, 세상은 드디어 정비되어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니 이능력 범죄자를 빌런(villain), 그들을 전문적으로 수사/체포하며 치안을 수호하는 이들을 히어로(hero)라 부르게 되었다.

눈 앞의 여자는 수 백건의 범죄를 저지른 분류 등급 S급의 빌런. 살인과 테러가 심심치 않게 섞여있으니 당장 체포한다면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사형이 내려질 운명 . 세 달도 적게 쳐준 것이다. 그녀의 체포는 모든 언론사가 개 떼처럼 달려들 특종 중 특종이니 이런저런 취재 요청으로 이능력특별재판이 차일피일 미뤄질 게 뻔했다. 본래 특별재판은 대개 한 달 내외로 결판이 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시끄럽고, 공포스러우며, 집중된 존재인지 알 수 있으리라. 아니, 그럼 저 여자 하나가 수 백건의 범죄를 저지를 동안 히어로들은 뭐했냐고? 한 사람당 하나의 이능력을 가지는 것이 레귤러, 두 개를 이레귤러로 취급하는 이 시대에 확인 된 것만 무려 다섯 개의 이능력을 가진 저 괴물을 어떻게 잡아쳐넣는단 말인가.

" 힘들까? "

여자가 해맑게 웃었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그 가증스러운 말이, 장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히어로 당신이라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물론 죽어간 동료들을 생각해 분노를 담아 그녀를 '즉결심판' 하려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여자에 대한 사형 선고는 뻔하디 뻔한 결말. 사회적으로 조금 논란은 될지 몰라도 국민 대다수는 그녀를 당장 죽어야할 인간 폐기물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오히려 당신을 옹호하는 여론이 더 거셀지도. 뭐,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시도가 성공한 뒤의 이야기지만. 재차 말하지만 여자는 확인된 것만 다섯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확인되지 않은 능력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마 하나, 내지는 두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당신이 덤빈다면... 그래, 여기까지. 당신은 아마 히어로 기관의 간부까지는 아니겠지만— 어느정도 촉망받는 인재일 것이다. 이 나라를 넘어 외신들도 주목하고 있는 '그 여자'와의 협상 자리에 파견된 게 당신이니까! 웬만히 믿음이 가는 인간이 아니고선 보내기 힘든 자리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히어로로서 어느정도 출세가 보장된, 윗분들의 귀여움을 받는 실력 있는 사람이겠지.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희생 당할 게 뻔하다는 이유로 총알받이처럼 내던져진 애물단지일 수도, 독불장군처럼 막나가는 성격에 의해 갑작스레 끼어들어 난입하게 된 열혈 히어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순찰 당번에 걸려서 재수없게 끌려왔을 수도? 아무튼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당장 "히어로 시켜줘!" 라는 생떼 같은 요구를 함부로 응할 수 있거나 응하지 못할, 히어로 아무개씨. 당신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 내가 여태 잘못 살아온 건 알아. 회개 하고 싶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은 아니고— "

여자가 한참이나 머리를 굴린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다. 이거, 면접이라도 보는 기분인데! 여자는 해맑게 생각했다.

" 한 번쯤은 정의의 히어로로 살고 싶달까... "

멋지잖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랑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따위의 대사를 던지는 히어로 말야! 아무래도 여자는 마법소녀 놀이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329 이름 없음 (.oQ.RYEQic)

2022-05-02 (모두 수고..) 00:28:17

>>328 아 오타.... 혼란과 공포의 2021년을 기점으로 <- 야!

330 이름 없음 (sMD2MH1mHI)

2022-05-02 (모두 수고..) 01:22:24

>>325

굳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로 찾아간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의 식사자리에서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말 하던 그 부패경찰이던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연락책 인부에 적혀있던 여자던가? 기억이 꽤 혼탁하다. 언제라도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흐릿한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그러면서도 한 송이의 꽃처럼 피어오른다.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해야했다. 중요한 것,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야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건 무엇이지? 그래, 복수다. 철저하게, 그리고 파괴적으로. 이 도시를 전부 부숴버리는것. 그것 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끝에서 새빨갛게 불타오르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추락하는것처럼, 내가 저 절망 아래로 끝없이 빠져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내게 남은 것은 지독한 공허뿐이다. 그 무엇도 이젠 내 손아귀에 남아있지 않아. 나 자신의 마음마저도.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것은?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녀를 알고 있다. 그녀의 테가 큰 안경은 윤이 났고, 친절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떼자 찌직,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선홍빛 핏방울이 입새에 방울졌다.

" 제안을, 하나 하지. "

입가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는 지극히 메마르고, 건조했다. 늘 듣던 계산적인 목소리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을 몇번 깜빡였다. 그리고 가만히 쳐다보고, 입새 사이로 흐릿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뜸을 들였다. 네 동그란 안경테가 빛을 받아, 붉은빛 자욱이 번져왔다. 그녀는 그렇게 높은 위치의 인물이 아니고, 나는 그녀보단 높은 인물이다.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의 보스니까. 내 쪽에서 매달리는듯한 태도를 취하는건 금물이다. 얕보이면 물어뜯긴다. 실제로 나는 지금 목덜미를 물린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처입은 짐승이니까. 내 쪽에서 얘기하는 제안은 분명히 네게 자극적이겠지. 생명의 위협을 느낄수도 있을것이고, 권력욕에 취해 야망을 불태울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어떤 일거리인지 생각해볼법 하겠지. 다양한 생각은 곧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때에 꺼내는 달콤한 제안.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찝찝할정도의 제안. 거기서 신뢰를 사면 된다.

" 2억 달러를 가지고 싶지 않나? "

2억 달러. 그 누구도 꿈꿔보지 못했을,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금액. 이 돈이 있으면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개인이 꿈꾸는 선에서는. 아픈 가족에게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돈 걱정이라곤 없이 지낼 수 있다. 커다란 집, 스포츠카, 화려한 옷, 무엇보다, 하루하루 배 곯지 않고 죽을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이걸 어떻게 제공하냐고? 간단하다. 내 회사의 주가 총액이 2억이니까. 회사를 경매로 팔기만 하면 된다. 내 입지를, 내 회사를. 아니, 내가 키운 내 조직을 원하는 녀석들은 굳이 이 도시가 아니더라도 가득하니까. 이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도시가 아니더라도. 경매로 들어가기만 하면 경쟁이 붙어 그 두배, 잘하면 세배까지 얻을 수 있다. 뭣하면 지금의 내 자리를 그녀에게 주어도 괜찮겠지. 그녀가 사업에 능력만 있다면, 범죄와는 완전히 손을 떼고 다른 지부를 차린 뒤, 그곳을 본부로 해 양지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돈만 챙긴 뒤 하와이같은곳에서 대부호의 삶을 사는것도 좋겠지. 그러나, 오히려 너무 조건이 좋기에 무슨 일을 하자고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뒤끝이 좋지 않은걸 경계하거나, 이용당하는걸 꺼릴수도 있겠지. 나는 천천히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며, 부드럽게 장갑을 벗었다. 흉터와 굳은 살 투성이인 손.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것 만이 내 전부였고, 오롯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입에 머금은 담배연기를 뱉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 오른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내 도장이다. 통장에 7천만 달러가 있다. 그걸 가지고 스위스로 향하면 꺼내줄거야, 물론 전부 현금으로. "

눈을 몇번 깜빡였다. 이제 더 뜸을 들이는건 오히려 독이다. 미끼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고, 이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물고기를 낚을 차례다.

" 날 도와주면 마저 2억 달러를 주겠다. 그건 선금으로 네게 주는거고. 자네의 대답을... 듣고싶군.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새로운 담배를 꺼내어 입가에 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냥곽을 건네었다. 이것으로 난 그녀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었다. 결정은 오롯이 그녀만이 할 수 있겠지.

331 이름 없음 (0iymoAhWks)

2022-05-02 (모두 수고..) 15:18:37

>>330

'뭐시라?'

표정은 웃되, 안색이 창백해진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킹핀의 얼굴이 나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몸에 힘이 풀려 서로 맞잡은 두 손이 가슴께까지 슬금히 내려갔다.

2억 달러. 내가 알기론 그레이하운드 컴퍼니를 매각하면 그 정도의 값이 나온다. 도와주면 회사를 주시겠다구요. 예.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이건 돈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 귀찮은 일을 할 건데 네가 전부 책임을 떠안고 죽어라. 뭐 이런 뜻일게 분명하다. 거절하면 병원에 있는 네 언니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거지? 지나간 반 년어치의 시간을 되돌려보았다. 컴퍼니의 사업장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컴퍼니의 직원을 체포하거나 귀찮게 굴지도 않았었다. 병원비가 밀린 적도 없었다고!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는건가? 다른 패밀리에 제물로 넘겨? 불길한 생각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수습할 수가 없었다. 2억 달러라는 불씨는 수소폭탄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킹...핀..."

"혹시 제가 뭐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내 인생 여기서 허무하게 종치나?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죽음은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주님. 왜 하필 지금이란 말입니까? 제가 앞으로 살아갈 많고 많은 날 중에 하필 지금! 눈을 떠보니 나도 모르게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그란 거랑 네모난 거를 받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날벼락 앞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뭐든지 할게요.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일은 다 할게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 앞에서 애걸하는 사람은 다 똑같더라. 그들의 진부함을 비웃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직접 맞닥뜨리지 정말 판에 박은 것처럼 이런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굴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킹핀의 발도 햝을 각오가 내게는 있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선 그 정도 각오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특히 나같은 소시민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무슨 제안을 하려고 2억 달러라는 폭탄을 던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한다고 해야 했다. 당장 킹핀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허리가 거꾸로 접혀 죽지 않겠는가?

"저희...저희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저번 컨테이너에 사람 실어왔을 때 섞여있던 기자 나부랭이도 제가 찾아드렸었고 또...."

뭐, 킹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이 정도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냥개. 사람들이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그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그가 가진 마음 속의 공허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332 이름 없음 (GDIx2/7.C2)

2022-05-02 (모두 수고..) 17:39:07

>>331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안색은 창백해졌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패닉에 빠진 모양이었다. 보수로 제안한 2억달러는 그녀의 의욕을 불러일으킨게 아닌, 생존 욕구를 불러일으킨것같다. 혹시 뭐라도 자신이 잘못한게 있다면, 그리고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뭐든지 하겠다며, 아직 죽고싶지 않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뻔했다. 늘상 봐오던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내어줄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며. 합리적으로 보면 그것이 맞았다. 살아 있어야 돈을 쓰든, 가족과 시간을 보내든, 밥을 먹든, 하다못해 가는 길 마지막으로 담배라도 한 대 피울수 있지 않겠는가?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참하게 찢겨,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들이. 그건 더이상 내 가족이 아니었다. 한 덩이의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이었지. 그녀들도 살려달라고 이렇게 애원했을까? 사냥개가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을까? 아니, 아니지.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내 딸의 눈과 귀를 막았을거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기도했겠지. 적어도 이 아이 만큼은 살아남길, 그리고 내 행복과 안위를 기도했겠지. 나는 죽어도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것이다. 소원이 있다면 그녀들이 천국에서 행복하는 것 뿐. 내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것 쯤은 나도 알고있다. 우리 잘 지내고 있었다고, 자신의 우수함을 어필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오른손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쉿, 하고 자그마한 소리를 내었다.

" 진정하게. "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는 우수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내가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공허를 없애달라고, 위안을 바라겠는가? 그녀로썬 할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녀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타인에 불과하니까. 내가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지만, 바란다면 그건 멍청한 일에 불과할 뿐이겠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왼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흘러내린 흑색 머리칼을 가벼이 쓸어넘기며, 무의식적으로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몇번 빨았다. 우선은 그녀가 진정해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겠으니. 약점을 바탕으로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래야 같이 행동할 수 있다. 전적인 믿음, 호의, 친밀감. 그런것들은 너와 내가 아무리 해도 맺을 수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타인과는 맺기 어려웠으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오래 물고 있던 필터는 어느새 입가에 맺힌 핏방울에 젖어 조금 붉게 물들었다.

" 돌려 말하는게 아니야. 자네가 큰 건의 책임자로써 죽어주길 바라는건 더욱이 아니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대충 감이 잡히네. 2억 달러, 손에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금액을, 그것도 내 회사를 팔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을 공짜로 주겠다는 멍청이가. 이 도시에 어디 있겠나? 그건 나도, 자네도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러나, 나는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네. 그러니 2억 달러를 주겠다는 뜻이야. 실제로도 이미 자네의 손엔 7천만 달러가 쥐어져있지 않은가? "

무미건조하게 보인다는건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쯤은 네가 진정하길 바라면서. 길게 말했더니 목이 타온다. 몇번 기침을 뱉으면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잘 듣게. 자네가 나를 도와주면 내 모든걸 주겠네. 그리고 나는 홀연히 사라질거야. 왜냐고? 이 도시의 권력자인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게 믿겨지지 않겠지. 이유를 말해주겠네. 살해 협박 편지가 내 집으로 도착했고, 아내가 다쳤네. 딸 아이도 겁에 질려 울고있어.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지? 그래, 복수다. 어떤 녀석이 그랬는지 모르니, 이 도시의 모든 쓰레기들을 전부 죽여버릴걸세. 그러고 나면? 자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야. 난, 내가 이 위치에 있는 한 이런 삶이 계속된다는 결론에 다다랐지. 그렇기에 모든걸 처리하고 떠날거야. 첫번째로, 복수를 할 거고. 두번째로, 내가 가진 자산을 전부 매각하고. 세번째로, 해외로 떠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재산, 내가 가진 인맥, 나의 입지. 그것들이 내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해 쥐새끼들이 끊임없이 덤벼들겠지. 그러니까 난 그 모든걸 털어내고, 다른 차명 계좌에 있는 돈으로 유유자적하게 살아갈거다. 어차피 돈은 많으니까. 여기까지, 이해했나?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득력 있는 얘기를 꾸며냈는지, 스스로도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하다. 허나, 제법 들어줄법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다쳤으니 복수를 하는것은 이상하지 않고, 또 다시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두 죽인 뒤 떠나는것도 이상하지 않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재물을 털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고. 그렇다면? 왜 하필 나인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후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증거는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 왜 자네냐고 생각하고 있나? 딱 자네 정도가 좋아. 나를 배신하면 언제든지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자네니까. 또, 그 많은 돈을 추적하면 결과적으로 자네를 쫓을 법 하니, 자네가 살아있는 편이 나로써도 도움이 되지. 그러면 너무 자네에게 리스크가 큰 것은 아닌가? 꼭 그렇지만도 않아. 막대한 부로 호위를 사면 되지 않겠는가. 혹은, 이 쓰레기같은 도시를 떠나 제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의 경찰이 되어 그곳에서 살아가도 되고. 어때, 자네도 이 제안이 왜 합리적인지 이제 이해가 가나? "

맞는 말이었다. 내가 판단했을때엔 그녀에게 일종의 리스크가 있는것은 사실이었지만, 현상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는 것. 그 둘을 저울에 달아보았을땐, 충분히 그녀가 제안을 받아들일만 하지 않겠는가.

" 한번 더 묻겠네. 불을 붙여줄텐가? "

그녀에게 건넸던 성냥곽과, 입가에 물고있어 선홍빛으로 물든 담배를 가리키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333 이름 없음 (MUANmUrRKI)

2022-05-03 (FIRE!) 00:22:13

>>332

그러고보니 킹핀과 이토록 가까이서 독대했던 적이 전에 있었나?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내가 기억했겠지. 오늘같은 날은 수메르의 쐐기문자처럼 나의 영원 속에 새겨질 테니까. 뼛조각으로 눌러 쓴 점토판 위의 이야기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승리한다면 영광스러운 승리인가 피로스의 승리인가, 패배한다면 영웅적인 패배인가 비참한 도축인가.

눈에 눈물이 매달린다. 이내 아랫 속눈썹을 타고 몇 방울이 떨어진다. 흑, 끅, 격한 호흡이 강제로 멈추는 반동으로 어깨가 들썩인다. 킹핀은 내 앞에 함께 무릎꿇어 시선을 맞추고, 심지어 옅은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놀라서 눈물이 뚝 그쳤다. 죽을 때가 되니 영안이 트였나, 신묘한 것들이 보였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누군가가 킹핀의 가족을 건드렸다. 일단 죽이면 신께서 구별하실테니 의심가는 놈들은 모두 주물러버리겠다. 그리고 회삿돈은 세탁이 덜 된 블랙머니라 계속 가지기가 찜찜한데, 날 도와주면 전부 네게 줄 테니 뒷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대강 이런 이야기였다. 복수하려면 컴퍼니에 존 윅같은 킬러가 한 트럭일텐데 왜 고기 썩은내나 풍기는 경찰에게 와서..... 아, 누구도 믿을 상황이 아니고 부하 짓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사방이 도산검림인데 가장 먼저 생각하고 찾아온 사람이 나. 이렇게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사적인 대화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인데. 킹핀은 오래도록 나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장도 내게 이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돈의 액수를 고려하면 여러 사람에게 제안을 하여 돈이 나뉘지도 않았다. 나 혼자인게 분명하다.

"어.. 어어.."

고개를 들어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 떨구었다. 손 안에서 7천만 달러와 성냥갑이 바스락거렸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내 영혼, 내 몸, 나의 재산.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가치있는 지식과 능력, 경험들. 모두 합쳐서 돈으로 환산해도 2억 달러의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량발천근을 일삼는 무술 고수가 아니다. 2억 달러를 옮기다 사지가 부러지는 미래가 가장 합리적인 예측이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그레이 하운드의 킹핀 정도의 사람이라면 간악한 협잡꾼처럼 굴지 않을 것이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킹핀의 부하 중엔 협잡꾼이 많겠지만, 본인은 기품있는 콜리오네에 가까우리라. 희망사항이었다. 그래야 내가 2억 달러를 받는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살다보면 사람이 좀 망가지기 마련이다. 확증 편향 X까라.

왠진 몰라도 킹핀은 나를 신뢰하고 있다. 제안도 어디서 물건을 전달하라는 식의 모호하고 불길한 예의 것이 아니다. 복수와 단절은 강력하고도 명징한 키워드였다. 그리고 2억 달러가 있으면... 언니도 멀쩡하게 돌려놓고, 이 지긋지긋한 도시도 더럽혀진 신념도 모두 던져버리고... 돈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상상조차 못 할 지경이었다. 막말로 퇴역 항공모함을 사서 평생 바다 위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 따닥, 딱

- 치이이-

성냥을 키자 밝은 미래가 어른거렸다. 성냥팔이 소녀는 이 짓을 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저항하지 못했다. 어차피, 어차피 이런 식으로는 오래 살지 못한다. 재수없어 눈먼 총알에 맞아죽으면 다행이고, 외줄타기에서 한번만 삐끗해도 성난 조직원에게 잡혀가 차마 못 볼 꼴을 볼 가능성이 크니까. 이 도시에서 호상은 예수의 구원보다 얻기가 어려웠다. 이러나 저러나 그렇게 죽을거면 승부수라도 띄워봐야 않겠는가.

"천인공노할 일이네요. 어느 주제모르는 인간이 감히 그러고 다니는지.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저, 이래보여도 FBI 아카데미에 다녀온 사람이거든요. FBI! Open up! 하고 쾅 들어가는 그거 아시죠.....헤헤. "

그 능력들을 기자 색출에나 쓰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입장을 정했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약자의 처제술에는 쓸개가 없었다. 담배 끝이 달아오른다. 이건 내가 사건을 맡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라, 그러고보니 이 사람. 입에 피 난다.

"피해자 조사부터 시작할까요? 아니면 남들 모르게 과학수사대를 보내드릴까요?"

일단 경찰스러운 선택지를 제시해보았다. 협박 편지. 사모님과 따님이 보고 들은 것. 모두 증거 아닌가. 나는 다시 웃는 표정이 되었다. 눈이 발갛게 되어서 웃고 있으니 퍽이나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334 이름 없음 (mTtbahD/5E)

2022-05-03 (FIRE!) 01:50:26

>>333

승리는 내게 언제나 달콤했다. 지갑을 훔치는데 마침내 성공하여,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쓰레기같은 음식을 사 입에 쑤셔넣었을때의 그 기쁨. 딱딱한 빵, 비계뿐이면서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마른 고깃조각, 탁한 물 한컵. 고작 그 따위 음식임에도 너무나 달콤했다. 단신으로 적대 조직의 지부에 쳐들어가 모조리 때려 죽이고, 사냥개라는 이명을 획득하고, 중견 보스의 자리를 차지했을때의 그 기쁨. 적대 조직과의 전쟁 끝에, 조직의 보스로 자리잡았을때의 기쁨. 그러나, 이젠 승리도, 패배도 남지 않았다. 이 도시 위 모든 생명을 거두더라도.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비통하게 죽을 뿐이다. 복수조차 이루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실패를 겪으며 처참하게 죽는 것. 오장육부가 뒤틀리는것같은 격통을 품에 안고 죽어버리는것 뿐. 그럼에도 나는 나서야 한다. 그것이 의미가 없는걸 알더라도, 스스로 목에 맨 줄을 잡고 발버둥치는 비참한 말로임에도.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죽는게 낫다고 하던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아이러닉한 일이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매달린다. 몇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을 가만히 보았다. 울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격한 호흡으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에 차분히 손을 올리려 뻗었다. 조금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위협으로 보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무표정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로 자꾸 눈을 떨구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는 내 반지와, 성냥갑이 바스락거린다. 그리고, 그녀는 성냥을 켰다. 붉은 빛이 아른거린다. 어스름한 불빛이, 그녀의 둥근 안경 테에 일렁였고, 나 또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또한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쉽지가 않은 일일테지. 선악과를 먹으라며 이브에게 뱀이 속삭였듯, 나 또한 파멸로 내닫는 길에 그녀라는 동반자를 만들었다. 순전히 내 계획을 위해. 허나 죽으면 그녀도 결국 거기까지였던 운명이겠지.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사는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 그래, 자네의 그 우수한 능력. 기대하고 있다네. "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녀의 실없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선홍빛으로 젖었던 담배가 붉게 타오른다. 입 안쪽으로 부드럽게 연기가 넘어들어오니 이제서야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대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매캐한 연기를 뱉어내며, 예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내게 불을 붙였다. 이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한 배를 탄 몸이 되었다.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배신할 수 있는 관계. 나로써는 그녀를 죽이면 되는 일이고, 그녀는 정보를 흘리면 된다. 킹핀의 가족이 다쳤다.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 한마디의 정보가 새어나가면, 내 성격을 아는 이들은 모조리 경계할것이다. 그러면 난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겠지. 그렇기에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더없이 완벽한, 이상적이고 실용적인 관계다.

" ...정보부터 취합해볼까. 인물들 리스트는 전부 가지고 있겠지? 보고를 좀 듣고 싶은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일세. 우선 적대 조직인 스마일 컴퍼니부터 쳐야겠어. 한 놈도 빠트리지 말고, 전부 내 손으로 찢어죽일거니까. ...이대로 경찰서 앞에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것도, 상황이 그래보이니. 근처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지. "

가슴 안쪽까지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귀를 타고 울려 퍼진다. 몇번 눈을 깜빡이다가, 쓰린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고는 천천히 벗었던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 모자를 머리에 깊게 눌러쓰며, 꿇었던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담배가 좀 젖었군. 작게 중얼거린 뒤에, 길게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피해자 조사를 시작하는것도, 과학 수사대를 부르는것도. 내 거짓말이 실제였다면 합당한 방법이었겠지만, 정보가 새어나가는것을 원치 않았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내 조직 안에 있는 녀석이 벌인 일일수도 있으니. 그렇기에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야 했다. 나는 적대 조직 전원의 얼굴과 이름,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지 않다. 허나 경찰의 막대한 데이터베이스라면 내게 그것을 알려주리라. 부패경찰로 가득한 이 도시의 경찰청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쯤의 정보는 기록되어 있겠지.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건드리지 않기도 할 테니까. 그런 자세한 정보를 알고, 단 한 마리의 쥐새끼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찢어죽여야 했다. 적대 조직인 스마일 컴퍼니는 그런 점에서 첫번째 타깃으로 적합했다. 일대에 마약을 판매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한 조직이며, 점 조직 형태를 갖추고 있어 격파하기도 편했다. 그리고,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놈이 이 도시에 얼마나 없겠냐만은, 유달리 큰 원한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그곳에 간부로 몸을 담고 있었다. 마약에 취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분명히 배제할수는 없겠지.

" 특히 그에 대해서 알아봤으면 좋겠군. 벌룬이라고 하면 알겠지? 마약 제조상. "

합법과 비합법의 사이를 오가는, 풍선 형태의 마약 제조 전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어디가 시발점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질긴 악연이었다.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조금 성급했나. 긴 얘기를 주절거리며 늘어놓는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조금은 늦었지만, 그녀에게로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안했군. 언제까지 자네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이름을 묻고 싶은데. "

그녀는 이제 나의 파트너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고작 허울뿐인 관계라면 계약에 금이 가기 쉽다. 조금 더 서로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었다. 그 편이 합리적이겠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태우고선, 저 멀리 던져버렸다. 커피는 좋아하나? 짧은 질문과 함께.

335 이름 없음 (xtCElGmwJg)

2022-05-03 (FIRE!) 10:44:50

>>334 답레 전에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스마일컴퍼니와 벌룬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둔 설정이 있을까?

336 이름 없음 (c97qS88PL6)

2022-05-03 (FIRE!) 15:59:25

>>326
(그 시선에 눈싸움으로 응한 사람은 꽁지머리로 묶은 짧은 금발에, 살구색 피부, 서늘한 눈매와 창백한 벽안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던 이가 목례를 하더니 느닷없이 같이 의뢰를 맡을 호위를 구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오자, 덤덤한 투로 대꾸했다.) 제가 생업이 있어서요. 어떤 의뢰인지, 기간은 얼마나 걸리고, 보수는 얼마인지 말씀해주시면 수락 여부를 말씀드리죠. (이 근처 용병 길드에 가면 좀더 쉽게 인력을 구할 수 있을텐데, 왜 번거롭게 주점에서 구인을 한담? 의아함이 앞섰지만, 일단 들어나보고 영 쎄하면 거절하자는 생각에 그는 맥주를 한모금 넘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337 이름 없음 (1Z4uwnZ6PA)

2022-05-03 (FIRE!) 16:10:42

'그것'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그것은 울거나 웃을 줄 알았지만 그럴 때 그것의 목에서는 아무런 심지어 바스락거림마저도 올라오지 않고는 했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성대를 제거했다고 하던가? 어쩌면 그것을 넘겨받을 때 들었지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러나 숨소리를 낼 줄 알았다. 그것이 내는 숨소리는 규칙적이고 유기체적이었다. 언젠가부터 비어있던 집은 그것과 당신의 숨소리로 차기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당신은 오랜 숙적인 불면증을 뒤로하고 그것의 숨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의 여정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모든 것이 그것의 탓이고, 그것의 덕인 것만 같다.

오늘도 당신은 집에 들어왔다. 그것은 거실 바닥 위에서 웅크리고 졸고 있었다. 당신은 초인종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초인종 소리를 내었다면 그것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서 여기가 어딘지, 자기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차례차례 알아내고서 틀림없이 현관으로 달려와 당신의 구두를 짓밟기까지 하며 무척 반겼으리라.

당신은 조용히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그것이 조그마한 머리통을 미세한 움직임으로 까닥거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그것의 머리는 곧 바닥과 밀착하리라.

# 꼽사절

338 이름 없음 (ZkTVqd0iGk)

2022-05-03 (FIRE!) 16:12:13

>>335 스마일컴퍼니는 겉으로는 코미디 계열 연예 그룹사고, 연극소품이라던지 무대세트라던지 이런걸 담당하고 있지만 실상은 거대마약조직으로 생각하고 있어~ 벌룬은 풍선 관련 마약(해피벌룬 등)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정도? 원하면 좀 더 상세하게 살 붙여볼건데, 아니라면 주도적으로 착착 진행해도 좋아! 언제나 재밌게 이어나가려고 노력중이라서,,, 매번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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