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237 이름 없음 (OlDz7JtQzk)

2021-11-23 (FIRE!) 22:32:48

>>236

/아이고 ㅠㅠㅠㅠ 개인 사정이 있었구나. 현생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원래 상판은 취미생활이니까 느긋하게 하거나 편할 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너무 정말정말 고마워! 이야기하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아마 새로운 상대는 안 구할 것 같아. 그리고 지원이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니 2번 안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결은 어느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혹시나 내가 갱신을 놓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네 ㅠㅠ 여기는 공동 스레라서 갱신했는데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새로 스레를 세워두는 것이 좋으려나?
이부분에 대해서는 지원주가 편한 대로 해줘! 이곳에서 기다릴지 아니면 새로 스레만 세워두고 동결할지 말이야!

238 이름 없음 (HTA4Bg/wFI)

2021-11-23 (FIRE!) 23:17:01

>>237

/아이고 나야말로 너무 고맙지ㅠ_ㅠ... 뭐가 고맙냐면 그냥 다...(?)
나도 현이의 이야기가 정말 궁금했던지라 현주가 나중에라도 이어가자고 말해주니까 내심 기쁘기도 하네. 동결은 일단 3개월...을 바라보고 있긴 한데 이건 혹시 몰라 넉넉히 잡은 거고 그보다 일찍 돌아올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기간이 예상이 안 가네ㅠ_ㅠ 그래도 가끔 들러 생존신고하거나 가볍게 잡담할 시간은 낼 수 있을 거 같아. 퀼트처럼 답레 조금씩 이어맞춰서 느린 텀이나마 나중에 이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생존신고용 임시 스레라도 파두는 것이 서로에게 심적으로 편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 만약 현주도 같은 생각이라면 스레를 세우는 건 혹시 부탁해도 괜찮을까? (염치없음...) 제목이나 그런 건 현주 임의로 해도 정말정말 좋지만 혹시라도 상의가 필요하면 말해줘.

239 이름 없음 (gOL743NOOI)

2021-11-23 (FIRE!) 23:40:53

>>238
/얍! 임시스레 팠어. 제목은 임시로 정했어~ 나중에 정식 오픈하면 바뀔수도 있구. 현생 힘내구 늘 편하게 갱신해줘!
>1596377096>

240 이름 없음 (DBAXlru2.U)

2021-11-24 (水) 00:30:58

>>239

/응응, 고마워. 제목 진짜 멋지다! U_U* 현주도 좋은 나날 보내고 갱신은 모쪼록 편하게 해줘~

241 이름 없음 (wJQsnbys5s)

2021-11-28 (내일 월요일) 02:15:26

흰 구름과 그 사이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 코 끝과 귀가 붉어질 정도로 차가운 겨울 바람, 그르륵거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사방에서 진동하는 시체 썩은내. 아, 오늘도 참 평화로운 하루다.

입구가 핏자국으로 난도질된 아파트 단지, 거기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간, 창문의 모든 면에 신문지를 붙이고 청테이프를 덕지덕지 도배해둔 401호에서는 오늘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소리가 났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책가방 같은 배낭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제 봇짐을 점검하는 소리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배낭에서 먹다 남은 감자칩을 빼내며 쳇, 혀를 차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넣어 뒤적이다, 제 무릎 옆에 놓여있던 소꿉놀이 세트의 냄비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넣는다. 이정도면 됐겠지. 후드를 눌러쓴 누군가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배낭정리에 신경을 쏟은 탓에 어느덧 저녁 노을이 겨울바람에 밀려 땅 아래로 몸을 숨기고야 말았다. 잠시 신문지를 들쳐올려 시꺼면 밤거리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아무래도 제가 훼까닥 미쳐버린 게 분명한 것 같다. 이 시간에 안전지대를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미 오늘 저녁, 편지 속에 네놈을 찾아가겠노라 선전포고를 날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을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튼간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지. 창 밖 세상에서 눈을 떼낸 누군가가 새하얀 볼캡을 고쳐쓰며 배낭을 들쳐맸다. 하여간, 만나기만 해봐 새끼 염소. 볼캡을 눌러쓰고 그 위로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써 도통 누군질 알 수 없을 인상착의였다만, 다소 거친 욕설이 익숙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좀비들의 시간을 빼앗아쓰려는 인간에게는 제법 많은 제약이 걸렸다. 첫 째, 숨소리도 들키지 말 것. 둘 째, 불빛을 사용하지 말 것, 셋 째, 달리기를 뒤지게 잘 할 것. 물론 순전히 볼캡을 눌러쓴 그 '누군가'가 지어낸 공식일 뿐이었다. 제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냐고? 사람 고기를 좋아하는 시쳇덩어리가 되는 수 밖에.

좀비떼를 피해 자세를 낮추어 걸음을 옮기던 누군가가 잠시 멈칫였다. 그리곤 길목의 끝머리에서, 슬며시 고개를 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재빠르게 발을 굴러 한 낡은 마트의 광고판 앞으로 숨어든다. 마트는 제법 규모가 컸으나 관리를 멈춘지 오래된 듯 낡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짝였을 전광판이 반파되어 이름조차 잃어버렸으니, 지금은 그저 초라한 폐건물일 뿐이다. 누군가가 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야구 방망이를 쥔 오른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길게 뻗은 자태가 아름다운 방망이에는, 누구의 것일지 모를 지저분한 핏자국이 흉측히 튀어있다.

" 어디있냐, 새끼 염소... "

야구방망이를 쥔 누군가가 작은 보폭으로 고장난 자동문을 향해 몸을 옮겼다. 전기가 끊긴 탓에 커다란 자동문은 손님을 보고도 굳건히 제 입을 걸어잠구고 있다.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시커먼 마트 내부에는 그 무엇도 보이질 않는다. 허탕인가? 마트의 외벽에 몸을 붙인 채, 마트의 내외부를 모두 경계하며 인기척을 살피던 누군가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데, 분명 여기 있을텐…

" 여깄냐?! "

이 갑오징어놈아! 큼지막한 야구방망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막아섰다. 볼캡을 푹 눌러 써 보이진 않았으나, 방망이의 주인은 제법 의기양양한 눈빛이었다. 조금 마른 듯한 체구에, 혼자 신이 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 사람의 정체는…

" 어린이 공원은 개뿔. 너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지. "

푹 눌러 쓴 후드 모자를 걷고, 볼캡을 조금 들어올리자 '누군가'의 얼굴이 환히 드러난다. 신이 난 듯, 혹은 신경질이 난 듯, 화난 고양이처럼 사나운 눈매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당신에게 다가가며 야구방망이를 건들댔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여 불길한 분위기를 뽐내는 방망이가 당신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얼쩡거린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은? 새끼 염소씨. "

여자가 당신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살긋 지어내는 미소가 당신에게 자애롭게 비쳐보였길 바란다.

#편지 스레에서 넘어온 상황극입니다! U.U

242 이름 없음 (29/.b2D0Vg)

2021-11-28 (내일 월요일) 22:52:12

볶음밥은 맛있었다. 심하게 짜지도 않고 적당히 단 맛.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김밥햄을 썰어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아침에 안 깎았다고 수염이 꺼슬하게 나는 자신과는 달리 아직 어린 당신한테는 싱거울지도 모르겠지만.

포슬포슬한 달걀볶음을 고봉밥 위에 얹어 식탁에 올린다. 그리고는 당신을 부른다. 먹어. 적당히 먹을 만치는 될 거다. 볶음밥의 맞은편 의자에 비뚜름하니 앉는다. 삐그덕대는 허리 탓에 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나이가 죄지. 나이가 죄야."

혼잣말 또한 시간을 맞이한 사람만의 특권일 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월을 음미하려니 쌉싸름한 담뱃내가 곁들임에 제격이다. 손떼 묻은 케이스에서 한 개피를 꺼내본다. 입술 새로 담배를 끼운다. 그제야 저가 방금 전 어린 아이한테 밥상을 차려줬다는 것을 깨닫는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는 담배가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기호품이고 따라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때와 상황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린아이 앞에서 담배를 자제할 정도로 배려심이 깊지는 않았다.

"한 대 피워도 되지? 그러니까... 흠, 꼬마야."

입술을 움직임에 따라 담배 끝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는 이미 손에 낡은 라이터를 쥐고 있다.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는 팔뚝을 당장 옮겨 벌건 불을 피워낼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제 집에 함께 있는 어린아이가 전생에 가진 이름이 무언지는 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에 지녔던 이름이고, 지금 저 아이가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어쩌면 저 아이를 부르기에 더 적합한 호칭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만약 저 아이가 제 기억과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한다면 남자는 거기에 맞추어줄 의향이 있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는 것도 뭐,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이먹은 아저씨캐가 환생한 과거의 인연(아이)을 만났다는 상황이야!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너참치의 캐가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생각해둔 게 없으니 자유롭게 이어주면 고맙겠어. 물론 맥커터는 사절!

243 이름 없음 (29/.b2D0Vg)

2021-11-28 (내일 월요일) 22:59:27

>>242 // 추가) 아이라고 서술하긴 했지만 내 캐가 보기에 어려보여서 아이라고 했을 뿐이지 사실 더 나이들었다고 해도 좋고... 아무튼 자유롭게 이어줘!

244 이름 없음 (usmIn/tky6)

2021-11-29 (모두 수고..) 11:42:59

>>242 체격에 들어맞지 않는 의자 위에 덩그러니 던져지듯 앉은 모습이 퍽 우스웠다. 잘 관리된 머리카락과 그 위로 매듭지어진 벨벳리본, 인근 사립 학교의 학생복에 새하얀 레이스 양말까지 척 봐도 값나가는 차림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꼬마 애의 모습은 영 궁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저분한 상처와 흙먼지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바닥에 닿지 않아 덜렁거리는 다리만 봐도 볼품없는 꼴이지 않은가. 꼬마 애는 뜨거운 김이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밥과 달걀을 두고 빤히 쳐다봤다가는, 이내 그 커다란 눈을 데록 굴려 남자를 바라봤다. 처한 상황이 무색하게 제법 어린애다운 맑은 눈동자였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집에 가고 싶어요.”

이마에서 눈으로, 그 다음은 코. 바로 밑에 위치한 인중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선까지 차례대로 천진하게 훑던 시선이 손에 쥐어진 물체들 앞에서 멈춰섰다. 담배와 라이터였다. 별다른 감흥 없이-조금은 신기하다는 듯-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던 꼬마 애는 곧 한 대 해도 되겠냐는 물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매운 연기를 싫어하는 그 나이대 꼬맹이임을 감안하면 참 희한한 반응이었다. 담배의 지독함에 익숙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도 그 냄새를 맡아본 적 없어 무지한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 꼬마 애는 그보다도 다른 데 관심을 더 많이 보이는 듯했다. 앉은 채로 집 안의 곳곳과 가구들을 훽훽 살펴보며 그 애가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 우리 집이에요? 아저씨 우리 아빠예요?”

뜻밖에도 제 집 살림은커녕 본인의 아비도 못 알아보는 황당한 발언이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기가 막혔건 간에 그 애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어설픈 장난이나 치려는 투는 결코 아니었다. 의심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 던져진 남자의 말에 꼬마 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어버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제가, 사실은 아까 전에요. 아저씨랑 오는 길부터 이름이랑 학교랑, 엄마 아빠 이름이랑 다 생각해보려고 그랬는데요, 자꾸 생각이 안 나요.”

그 애의 말로는 사고를 포함한 그 이전의 일들은 까만 잉크라도 엎지른 듯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집 주소나 부모의 번호는 고사하고 제 이름까지 모른댄다.
톡톡,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건드린다.
어느덧 김이 멎어들었을 즈음이 됐음에도 볶음밥은 그대로였다. 꼬마 애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주제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테이블 위의 식사 자리를 영 불편해하는 듯했다. 불편함보다는 불안함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고. 기억은 잃었다 하니 꼭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두 캐릭터 다 환생한 상태에서 아저씨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 캐릭터만 (아저씨 기준) 이번 생에서 죽고 환생한 상태인 건지 애매해서 일단 후자로 잡고 초등학생쯤 되는 캐릭터를 들고 와봤는데 나이는 좀 더 올려서 상상해도 괜찮아! 아무 이유 없이 남의 집에 왔을 것 같진 않아서 대충 내 캐릭터가 모종의 사건(범죄든 사고든)에 휘말린 상황에서 아저씨랑 조우하고 따라오게 됐다는 배경을 상정했는데, 뭣하면 스루해도 좋아 ^-ㅠ

245 이름 없음 (dTU5tk4EcQ)

2021-11-29 (모두 수고..) 20:38:00

>>244

"아빠라니."

라이터에 불이 붙지 않았다. 천부당만부당한 단어가 생소하고 낯설어 부싯돌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탓이다. 아빠라니? 우리 집이라니? 하늘과 과거와 자신의 여성 편력에 맹세코 절대 그럴 리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부러 강하게 담배의 첫 숨을 내뱉어본다. (다행히,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었다.) 식탁에 뿌연 연기 가득 메우는 이유는 좋게 표현해 검소하고 나쁘게 말해 궁상맞은 제 집 가구에서 아이의 관심을 불러오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네 말에 나는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너, 어디 가서 그 말 하지 마. 알겠니 꼬맹아? 너는 길바닥에서 상처투성이로 구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가-엾-은- 아이를 불쌍히 여겨 경찰이 데리러 올 때까지 잠시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밥과 아늑한 쉴자리를 제공해줬을 뿐. 그 뿐인 관계야, 알았어?"

아빠라니 무슨... 중얼거리다가.

"그리고 납치당했다고도 하지 마."

제 발 저려 그리 덧붙인다. 툴툴거린다. "안 그래도 벽 얇은 싸구려 아파트라 방음의 ㅂ도 없단 말이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이 근처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그런 비싼 학교에 아이를 보낼 작자가 이런 다 허물어지는 건물에 세 들어 살 리가 없지. 아이의 행색을 보며 그가 차분히 생각했다.

기실 남자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아이를 불쌍히 여겨 데려왔다기에는 상처에 연고 하나 발라주지도 않고 하물며 흙먼지조차 털어주지 않고 있지 않은가. 경찰을 운운하긴 하였으나 남자는 아이를 만난 뒤로 핸드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았다.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과거의 인연이 있다 하여─그저 닮았을 뿐이란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데려오긴 하였으나,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그리고 그 혼란은 아이의 황당한 기억상실 선언 때문에 곱절은 증폭되었다.

"얌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으아...거니?"

기가 막히다 못 해 머리카락 꽉 막힌 배수구처럼 되는 바람에 원래 쓰는 말투가 나와버린다. 중간에 정신 차려 급하게 상냥한 말투로 선회하긴 하였으나 겁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자. 참아. 잘생기고 착한 내가 참자. 제 이름까지 모른다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아, 이제야 뇌가 맑아진다. 니코틴의 힘을 받아 팽팽 돌아가는 생각세포가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러나 싸구려 소설이나 삼류 영화도 아니고 그저 상처 조금 생겼을 뿐인 아이한테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니? 차라리 어제 긁은 복권이 1등 당첨인 게 훨씬 현실성이 있겠다. 먼 치에서 눈으로 살피기에 머리 쪽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얘가 뭔 이유로 저런 말을 한담. 정말로 기억상실이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남자는 아이가 손도 대지 않은 볶음밥을 내려다본다. 검지손가락은 남자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식탁 위를 두드린다. 톡톡. 아이와 남자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합주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젠장, 몇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 전두엽을 괴롭힌다. 토할지 말지를 결정 못한 옛 추억을 목구멍 뒤로 삼키기 위해 남자는 대신 담배 연기를 토하기로 했다.

"꼬맹아. 집에 가기 싫다고 그런 거짓말 하는 거 아니예요."

식탁 위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버린다. 뭉툭해진 담배 끝을 아이한테로 향한다. 삿대질한다.
저 징글맞은 놈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할 뿐인 속 시꺼먼 놈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도 모르는 척을 한다. 모르는 척을 하며 살살 긁어보다가 수상한 정황이 나오면 덥썩 물어 캐물어야지. 콱 이빨로 물어버리는 것도 좋겠고.

남자는 자신의 계획이 퍽 만족스럽다.

"학생복 입은 걸 보아하니 요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거기 가면 너 누군지 바로 알 수 있거든? 아저씨 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자, 이제 어쩔 테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 앗앗 나도 후자로 생각하고 상황 제시했었어! 설명이 애매했던 것 같은데 잘 들어맞아서 다행이다 ^ㅁ^) 흥미진진하게 상황 받아줘서 고마워.......!!!

246 이름 없음 (Y8F8Q8bo6I)

2021-11-30 (FIRE!) 23:01:29

(장갑 낀 양 손으로 화단에 쌓인 눈을 퍼올리고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듯한 당신에게로 다가간다. 음흉한 미소를 한껏 지으며.) 손님, 주문하신 설빙 아이스 나왔습니다.

247 이름 없음 (jU0tpr./NM)

2021-12-05 (내일 월요일) 19:03:08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야릿한 새벽의 어느 감성주점이었다. 우당탕탕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시비가 붙은 취객들이 벌여놓은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고, 쯧쯧 혀를 차며 거들먹거리는듯한 걸음으로 당연스레 그 곁을 지나오던 이가,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있는 당신 앞에 문득 멈춰선다.

"술을 처 자실거면 곱게 마셔야지, 저게 뭐야. 그치요?"

너저분해 보이는 묶음머리를 한 그 또한 적잖이 술이 들어간 것 같아뵈지만, 그는 당신이 제지하기도 전에 자연히 몸을 뉘듯 당신의 앞자리에 앉아온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이 소란에도 아랑곳 않는 당신을 한 번 훑고 지나간다.

"... 아! 너... 그. 뭐야. ... 그래. 배신자!"

곧, 말까지 더듬으며 황급히 당신을 떠올려낸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당신을 배신자라 부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뾰족 든 검지로 당신의 얼굴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아니아니. 싸우잔 게 아니라. ... 벌써 몇 년도 더 된 이야기잖냐."

그는 당신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먼저 손사래를 치며 당신에게 악감정이 없음을 피력했다.
그래. 벌써 몇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십수 년 전, 몇몇 인간들에겐 자연의 섭리와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난 기이한 능력이 발현되었고, 그들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라 추앙받기도 했었고, 사상 최악의 악당이라며 비난받기도 했었다.
지금은 인류의 기술이 발전하여 법적으로 능력 사용이 금지시 됐을뿐더러 당시 인류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이들은 약간의 보조금이나 받으며 유흥거리나 찾아다니는 백수 한량이 되어버렸으니. 선이고 악이고 모두 인위적인 흐름으로 빚어 만들어진, 인류의 화합을 위해 이용당했을 뿐인 기구한 인생들일 뿐이었다.


"하... 시발거. 인생에 낙이 없어, 낙이."

한 잔 빌리자며 당연하단 듯이 당신의 술병으로 손을 뻗는 그의 추레한 모습은, 한때 당신이 가장 존경하고 시기하고 증오하고 남몰래 연모했던 것과는 이미 한참이나 동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너는 어떻게 그때 그대로냐. 내 머리가 많이 길어서 못 알아보겠지? 하고 시답잖은 농을 던지며 털레털레 웃어버리고 만다.

248 이름 없음 (oF6AZmsyT6)

2021-12-05 (내일 월요일) 21:36:01

>>247
온갖 소란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여자는 주점 한 구석을 고요히 지킬 뿐이었다. 아주 한참 전에는 저런 작은 일에도 나서 사람들을 말리고 했다만...지금과는 영 상관 없는 이야기다. 여자는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갑작스레 다가온 이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길게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 기억한 모양이다. 배신자라 소리치는 말에도, 찌를 듯 다가온 손가락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렇다는 사람이 삿대질부터 하시나요."

조금 쉬고 갈라진 목소리기는 해도 어투는 또렷하고 정중하다. 비록 그에 담긴 내용이 그렇지 않더라도. 비꼬듯 이야기했어도 사감이 남지 않은 것이 이쪽도 매한가지인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머무름이 길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는다.

그녀는 당신의 한탄에 답하지 않고, 당신의 모습을 관찰이라도 하듯 샅샅이 훑는다. 과거와는 달리 추레한 모습이다. 외려 당신이 아니라 그녀가 과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건 꽤나 웃긴 일이다. 선의 편이었던 당신이 아니라 악에 가까웠던, 배신자니 악당이니 불리었던 그녀가 겉모습으로나마 그 당당하고 꼿꼿한하던 태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던데,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네요."

겉모습도 그렇지마는 그 속 또한.
과거 치열하게도 싸웠던 당신과 여자가 이리 마주보고 대화라는 걸 하고 있다는 점만 해도 그렇지 않나. 그녀는 비웠던 잔에 다시 술을 따를 요량인지, 손을 까닥이며 쓰고 돌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249 이름 없음 (1MG403nWmQ)

2021-12-06 (모두 수고..) 00:40:33

>>248
당신이 훑는 시선을 한껏 즐기며 입에 머금은 술을 곧바로 삼키지 않고 느긋하게 입안에서 혀를 굴리던 그는, 당신의 손짓에 목구멍으로 닁큼 술을 넘기고서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이야... 독하네."

그는 혼잣말처럼 감탄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볍게 훔쳐내는 것으로 안주를 대신한다. 독하다고 할 적에 당신의 푸른 눈동자를 흘금 바라보는 것이, 당신을 겨냥한듯싶기도 하다.

"이리 마주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냐."

측은하게 빛나는 초록 눈동자는 당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지만 그 시선의 끝은 과거의 한때를 가리키고 있다.

"차라리 그때, 네 손에 죽었다면 이따위로 살고 있진 않았을 텐데."

조금 분하긴 했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순직한 놈들이 참 부럽단 말이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옳다고 믿고 믿었을 테니까.
평화를 위한답시고 정부에 헌신하며 꾸역꾸역 살아남은 대가로 이런 짐덩이 취급을 받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손등에 턱을 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런 이야길 중얼거리던 그는, 느른하게 손을 뻗어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250 이름 없음 (XCdoGZ7vEU)

2021-12-06 (모두 수고..) 10:24:10

지금은 2X세기, 21세기의 누군가들이 많이도 예측했던 캡슐 형식의 가상현실게임 기기가 출시된 시대.
다른 콘솔 게임은 오래된 게임 매니아들의 유산이자 무덤이 된 지 오래됐다. 이미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들이 게임계에 혜성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외계인을 고문했다는 소문이 도는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게임도 있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휴양 대신 선택한다는 자연스러운 그래픽과 감성적인 디자인이 유명한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맨 처음 등장했을 땐 수많은 겜덕후와 민간인들의 돈을 빨아먹었지만 지금은 고인물만 남아서 썩어들어가는, 한 져가는 별도 있었다.
<슈팅 스타 온라인>.
커뮤니티 내 별명은 '노인정'과 '별'을 합쳐서, '별인정'.

[특별]약초줍는노인 :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특별]약초줍는노인 : 심심 산천에 백도라지
[특별]약초줍는노인 : 한두 뿌리만 캐어도
[특별]약초줍는노인 : 대바구니 철철철 다넘는다

이 플레이어, 약초줍는노인도 같은 처지였다.
쓸모없는 고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노인들이 쓰곤 하는 오색찬란한 꽃무늬 두건을 써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렸다. 체구는 작지만 부푼 천옷으로 몸을 완전히 가려, 정말 등 굽고 작은 노인 커스텀 캐릭터인지 어린아이 커스텀 캐릭터인지 알 도리가 없다. 손잡이를 두 개 엮어 등에 맨 망태기에 1골드짜리 약초가 가득 담겨 있다. 그야말로 '약초 줍는 노인'이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컨셉질이다.

[확성]혜진아칭칭나 : 약초 또 난동이네 예쁜아기가
[확성]꾸워어꾸우워 : 니 산삼 캔 거 안궁금ㅗ

여느 고인물이 그렇든 약초줍는노인도 트롤링을 했다.
게임사가 손 놓아버린 이 게임은 심각한 수준의 버그가 아니면 패치되지 않았다. 수많은 버그를 줄줄 꿰는 고인물이 갖고 놀기 딱 좋았다.
그 수단은 히든 플래그. 게임 판타지 소설이 그러했듯 이 게임에도 히든 플래그가 있었다. 무협의 기연처럼 영약을 얻거나 히든 클래스를 계승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
하지만 악랄한 이 게임은 기연도 거저 주지 않았다.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구매해야 했다.
가격은 게임 내 화폐가 아닌 결제 화폐인 크레딧으로 200,000크레딧.
일반인이 사기엔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게다가, 히든 플래그가 무조건 구매자에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히든 플래그를 바로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 조건이 랜덤하게 정해진 히든 플래그가 새로이 생성된다.
재수 없으면 발생권을 사 놓고도 히든 플래그를 놓칠 수도 있단 거였다.
발생권으로 생성된 히든 플래그의 조건은 최대한 구매자한테 맞춰진다고 하지만, 확률도 나와 있지 않은 불확실한 확률놀음을 누가 믿을까.

[히든 플래그 발생권 x1 구매완료.]
[히든 플래그 발생권 x1 사용합니다.]

하지만 약초줍는노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이벤트를 '100%' 발생시킬 자신이 있었다.

[약초줍는노인 님이 '만년설삼'을 획득했습니다!]
[특별]약초줍는노인 : 뿡
[확성]혜진아칭칭나 : 아 냄새 火'口'

약초줍는노인이 얼마전에 발견한 오류.
발생권으로만 발생하는 히든 플래그 중 오직 약초줍는노인과 같은 채집 특화 캐릭터에게만 출현하는 '영약재 발견 이벤트', 속된 말로 '심봐'다.
완성품 영약이 출현하는 기연 이벤트와 달리, 비교적 다른 방식으로도 수급하기 쉬운 영약의 원재료가 정해진 장소에 나오는 히든 플래그. 거의 꽝 취급받는 이벤트.
하지만 이 이벤트에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사용할 경우 다른 이벤트와 함께 무조건 다시 리젠된다'는 오류가 있었다.
다른 히든 플래그가 얼마나 생기든 무조건 심봐도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든 플래그는 종류 불문하고 누군가 습득하면 전 월드에 요란한 이펙트로 축하 메세지가 뜨며, 획득자가 전 월드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 확성기를 1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원래 자랑용으로 쓰였어야 할 이 확성기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무더기로 쓰는 약초줍는노인에 의해 전 월드 대상 테러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특별'하기 때문인지 신고나 차단도 먹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약초줍는노인은 전 월드에 명성과 악명을 떨치는 유쾌하고 불쾌한 어그로 네임드 고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약초줍는노인 님이 '인형설삼'을 획득했습니다!]
[특별]약초줍는노인 : 허허허... 유교 국가에서 감히 노인한테 대들다니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구료...
[확성]메리볼셰비키 : 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

'음?'
그런 약초줍는노인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이곳은 '만년설삼'과 '인형설삼'의 고정 출현 장소인 예티 설산. 약초줍는노인 같은 괴짜가 아니면 올라올 일이 없다.
혹시 뉴비? ...일 리가 없다. 온갖 공략과 정보가 넘치는 썩은물 게임에, 이 가혹한 환경 근처에 위치한 유일한 스타팅 포인트인 레멘세 마을에서 시작할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그 전에 이 게임에 들어오는 뉴비는 없다.)

[일반]약초줍는노인 : 에베레스트 등반 컨셉충인가?

혼잣말도 마이크 안 켜고 채팅으로 하는 게임 과몰입충 그 자체인 약초줍는노인이었다.

'이벤트인 척하고 놀려야겠다.'
약초줍는노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꽃무늬 두건을 벗고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추위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물리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현혹하는 환상'효과가...]
[인간의 능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겨울신의 분노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능력치가 99% 감소...]
[현인신만렙 칭호의 효과로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현혹하는 환상'효과를 얻습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닉네임, 길드명, 레벨 효과가 가려집니다. 장비를 해제할 때까지 일반 채팅, 길드 채팅, 비밀 채팅이 불가능합니다.]
[마이크를 활성화했습니다.]

'유령이니까 하얀색으로 할까? 아니다, 눈이 하도 많아서 안 보이겠지. 머리카락과 눈색은 검은색으로 해야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겠다.'
어느새 눈밭과 구분이 안 될 만큼 새하얀 피부에 새까만 흑발, 흑안 청년 모습으로 변하고 다리가 투명해진 약초줍는노인, 아니, '유령'은 스킬 '제 3의 손'의 효과로 살짝 떠서 날아가듯 눈 속의 형체를 향했다.

251 이름 없음 (zw286CnU1E)

2021-12-07 (FIRE!) 20:57:17

>>249
술병을 건네받은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이 끝까지 차도록 술을 붓는다. 자신을 겨냥하는 것인지, 술을 향한 것인지 모를 감탄사에 한쪽 눈썹만 쓱 올렸다. 마치 무슨 소리냐 묻는 듯 말이다.

여자는 당신의 말에 곧바로 답하는 대신, 술잔을 기울였다. 모순적이나, 폭력이 만연하던 과거를 영광의 때라 회상하는 이는 많았다. 영웅이니 대악당이니 하고 추앙받던 그 시절에는 영광이나 두려움을 손에 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 모든 전설들은 한낱 과거의 산물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었다. 정의는 부정당하였으며 악은 그 근간을 잃은 지 오래다. 당신이 빈 잔을 흔들어 보이자, 여자는 당신 앞에 술병을 밀어주며 말한다.

"그리 후회한대도 과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 죽일 생각 없어요, 여자는 짧게 덧붙인다. 모호한 어투다. 지금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혹은....그 과거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아닌 농인지. 여자는 당신을 바라보다,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요, 맹신하지 말라고."

언젠가는, 그래. 그런 말도 했더랬다. 한낱 배신자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252 이름 없음 (GpaEsLtKWU)

2021-12-10 (불탄다..!) 00:54:01

그가 죽던 날에는 세찬 눈보라가 내리쳤다. 항상 —올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그날 밤에는 아주 많은 눈이 내렸다. 그는 새하얀 눈밭 위로 새빨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그 옆에서 시체처럼 눈밭에 파묻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움켜쥐고 있었다.

*

" 어디… "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있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두면 어때? —그래, 나쁠 건 없지. 그 뒤로 모든 것은 재빠르게 진행 되었다. 복잡한 장치를 쓰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보험사의 직원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보라색 구체를 가리키며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주셔야해요. 그때 그가 내뱉었던 감탄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현대 과학이란. 메리가 나직히 중얼였다. 꺼림칙하고도 사랑스러운, 현대 과학이란.

메리는 제 몸집보다도 커다란 상자를 끌어안았다. 바깥이 제법 추워 상자를 빠르게 옮겨야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춥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이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으니까. 초겨울에도 꼭 회색 머플러를 두르던 사람이었다. 회색 머플러에서는 항상 그의 향기가 났다. 서랍장 안 쪽에 모셔둔 머플러에서는, 더이상 그의 향기가 나질 않았다. 그 위로 그가 아끼던 향수를 제아무리 뿌려본들 품에 안겼을 때 코끝에 닿았던 그 향은 나지 않았다. 그의 향기를 잃고 난 무렵부터 메리는 머플러를 찾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향기보다도 메리의 향이 더욱 짙게 나는 것만 같았다.

메리는 한참의 시간을 들여 상자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바깥에 조금씩 날리는 눈발 덕에 상자가 조금 축축했다. 메리는 가볍게 상자 위의 물기를 털어낸 뒤, [Remember-Reunion] 이라는 로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험회사를 찾아가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었다. 그마저도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않던 두 달을 제외한 시간이었다. 보험회사의 직원들은 메리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니까, 다행히도 사망 1주 전까지의 기억이 업데이트 되어 있으시네요. 직원이 작게 미소 지으며 건넨 말에 메리는 쉽게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소생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약 세 달이 지났을 무렵, 아무도 찾지 않는 메리의 휴대전화로 한 통의 문자가 들었다. <벤자민 포트만 님의 안드로이드가 제작 완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배송 장소를 말씀해주세요.> 메리는 둘만이 알고 있던 설원 속 별장의 주소를 적어보냈다.

메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를 열었다. 한 겹의 박스를 열자 새하얀 플라스틱 완충제가 와락 쏟아져나왔다. 두 번째 박스를 열자 고운 천으로 마감된 고급 상자가 보인다. 메리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가는 붉게 물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메리, 당신은 감정이 너무 잘 들어나 탈이라니까. 어렴풋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메리는 두어번이나 얼굴을 감싸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메리가 숨을 들이켰다. 바깥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상자를 열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기억에 오롯이 살아있던 그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환히 웃어주던, 입을 맞추어주던, 부드럽게 안아주던 그의 모습이었다. 메리는 조심스럽게 안드로이드의 얼굴 위로 손을 댔다. 인간의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감촉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차가웠다. 눈보라 아래로 식어가던 그의 손처럼 차가웠다. 메리의 손가락이 굳게 감겨진 눈꺼풀 위로 향했다. 그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메리는, 관자놀이쪽의 작은 스위치 버튼을 눌러도, 그가 미동 없이 누워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 …벤자민, 베니… "

메리가 황급히 제 두 손을 감싼 채 두 눈을 감아내렸다. 간절하게 부르는 그 이름이 낯설다. 그러면 안되는데. 적막이 감도는 별장 속에서 작게 기계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는 숨을 죽여, 그의 모습을 본딴 안드로이드가 작동되기를 기다렸다. 그의 모든 기억을 가진 안드로이드, 그의 성격과, 취향과, 사랑을 모두 이어 받은 그 꺼림칙한 안드로이드가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길.

253 이름 없음 (/q8rQw7cII)

2021-12-10 (불탄다..!) 00:57:58

>>252
# 들어나 -> 드러나... (머리탁)

254 이름 없음 (TnRNR2tfks)

2021-12-20 (모두 수고..) 19:09:17

>>252 상황 너무 취향인데 지금이라도 이어봐도 될까? 시간이 많이 지나서 혹시 몰라 물어볼게 ㅠ_ㅠ

255 이름 없음 (czdbZ.uNuM)

2021-12-20 (모두 수고..) 20:23:38

>>254 헉 나 >>252 야! 이어주면 나야 넘 고맙지! >_< 아무도 안 이어줘서 흑흑 별로인가... 하고 슬퍼했어... ㅎ.ㅎ 대환영대환영!!

256 이름 없음 (kRv3oWI7TE)

2021-12-20 (모두 수고..) 20:28:12

>>255 아직 있었구나! 답해줘서 고마워~ 손 가는대로 이어오도록 할게 +_+

257 이름 없음 (34HTvcCJxQ)

2021-12-20 (모두 수고..) 23:42:29

>>252

그는 안드로이드였다. 뼈 대신 고철이, 혈관 대신 전선이 있는 기계,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었다. 아니, 사실 '생명'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안드로이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인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그 또한 평범한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같은 기계, 혹은 인간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고철 덩어리라는 말이다. 그 또한 여타 안드로이드들과 같은 제조 공정을 거쳤었다. 그래서 막 만들어졌을 때의 그에겐 의식과 감정을 만들 프로그램도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도 더 못한,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이. 그렇게 그는 초라한 외골격을 덮을 피부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제조 공장의 창고에 넣어졌었다.
그가 처음 만들어지고 몇 달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늘 그렇듯 창고의 완제품─이자 미완성인─안드로이드들이 저마다의 주인을 찾아가고, 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의 반복이었다.
적어도 삼개월 전까지는 그랬었다.

공장의 육중한 철문은 며칠에 한 번 꼴로 열렸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인부 몇이 철문을 열었다. 차갑고 삭막한 밀실 안으로 그들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인부들은 그의 몸체를 꺼내 수레에 실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그를 실은 수레가 공장 바깥까지 끌려나왔다. 인부들은 넓직한 트럭에 그를 비롯한 여러 안드로이드들을 집어넣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곧 트럭이 출발했다. 쉼없이 달린 트럭은 또 다른 공장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그는 제대로 된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외피에 정교한 피부가 입혀지고, 머릿속 회로에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인간의 기억 또한 주입받았다. 생생하면서도 사뭇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기억을 가지고, 그 기억의 주인과 완벽히 닮은 안드로이드. 그렇게 그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벤자민 포트만'.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

'벤자민'의 의식이 부팅된다. 몸체 내부의 복잡한 기계가 바쁘게 돌아간다. 자세히 들어도 들리지 않을 소음이 그 속에서 고요히 울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성격, 취향, 감정…. 그 모든 것도 회로 속에서 로드된다. 그의 의식 속에 기억들이 온전히 정착된다.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그건 남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일부였다.
고즈넉한 적막이 그의 몸체를 휘감는다. 마침내 가동 준비를 마친 안드로이드─벤자민은 눈꺼풀을 연다. 관자놀이의 스위치에 은은한 녹빛이 돈다. 정상 작동됨을 알리는 신호이자, 그가 명백한 안드로이드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눈을 뜨자, 늘 기억 속에 있었던 천장이 보인다. 항상 '당신'과 함께 했었던 별장. 창가에 앉아 눈발 흩날리는 풍경을 곧잘 보곤 했었던 장소. 그의 회로가 남아있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인간의 두뇌가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줄곧 상자 속에 누워있었던 벤자민이 몸을 일으킨다. 끼어있었던 완충재가 사르륵─ 흩어진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묘하게 기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이다.

그, 벤자민의 시각 센서에─'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들어온다. 누구보다 좋아하는 당신,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빛, 나의 사랑─사고가 전부 돌아가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메리."

완벽히 조형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벤자민은 짐짓 기쁜 표정을 해보인다. 눈은 곱게 접혀 휘어있고,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선명히 떠오른다. 당신을 보게 되어 기쁘다는 감정이 든다. 만들어진 감정임에도 그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상자를 빠져나오는 벤자민의 발걸음이 꽤나 조심스럽다. 곧 그는 당신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당신을 살핀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모습,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벤자민이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리고, 당신의 뺨을 향해 그가 오른손을 뻗는다.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그러나 쇳덩이처럼 차가운 손을.

"나 왔어."

그의 목소리가 아릿하게 떨려왔다.


//고민하면서 쓰느라 늦어졌어... 기다렸을까봐 미안해지네 ㅠ_ㅠ

258 이름 없음 (kKbFJ6fNOg)

2021-12-21 (FIRE!) 00:53:28

>>257

" 베니, 베니… "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메리는 목이 메여오는 통에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오랜 시간동안 소중히 품어왔던, 당신의 이름만을 겨우 옹알이처럼 떼어낼 뿐이었다. 메리의 눈망울이 떨려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훑어내리는 눈길이 조심스러웠다. 행여 닿기만해도 바스라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가 웃었다. 메리는 달라진 것 없는 그 미소에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 감정을 무어라 형용해야할까? 안도, 그리움, 반가움, 사랑…오로지 그것들만이 메리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이성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또한 그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낭비할 시간 조차 없었다. 벤자민, 그가 돌아왔다. 메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벤자민을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벤자민의 형체를 띤 기곗덩이를 끌어안았다. 허나 메리는 느낄 수 있었다. 일정하게 뛰어오르던 그의 심장박동과, 고요한 호흡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부드러운 살갛을, 또 항상 그랬듯 먼저 뻗어내는 오른손과, 당연스레 제 뺨에 닿는 큼지막한 손을.

벤자민의 손이 닿은 뺨이 차가웠다. 허나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벤자민의 온기를 느꼈다. 메리가 붉어진 눈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흔들림 없이 자신을 붙잡아주던 그 눈이었다. 벤자민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가 보인다. 벤자민이 바라보고 있을 메리가 보였다. 벤자민의 손은 차가웠다. 갓 가동된, 그리고 몇 십분간 바깥 기온에 노출된 안드로이드가 내뿜는 한기였다. 그럼에도 메리는 벤자민의 품과 손길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너무도 따뜻한 것들은, 이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메리가 벤자민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제 손바닥 안에서 한 없이 부서져내리던 그의 손이, 단단히 느껴진다. 항상 꿈길에서만 쫓던 그 감촉이었다. 메리는 눈물을 멈추고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존재를 조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답 해야하는데.

"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

메리는 늘상 건네왔던 평범한 인사를 했다. 벤자민이 지친 기색으로 현관문을 열면, 메리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안기며 그리 인사했다.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그러고 나면 항상 벤자민은 메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커피 머신을 가동시켰다. 메리는 늘 코코아를 준비했다. 둘은 소파에 앉아 시시껄렁한 코미디를 보기도 했고, 심야 토크쇼를 보며 몇몇 유명인들에 대한 쓸모없는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가끔은 TV를 끈 채 얄팍한 조명에만 의지하며, 우연이 만들어낸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당연히 찾아오던 아늑한 저녁. 그것이 그들의 당연한 하루였다.

제법 오랜 기다림 끝에 내뱉은 그 인사가 너무도 애틋하다. 메리가 벤자민의 품에서 벗어나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벤자민, 나의 벤자민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나의 벤자민이었다. 메리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이 적막한 한기는, 아마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바람의 탓이리라.

" 벤자민, 당신이지. 당신이 맞지? "

메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끝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반점짜리 정답이었다. 알면서도 문제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내야하는 그 심정이 어딘가 따끔하다. 하지만 메리는, 벤자민—그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 나도 늦어서 미안...ㅠㅡㅠ 나도 어떻게 하면 잘 이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늦었네... 마지막까지도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면서 썼어 ㅎㅡㅎ...!

259 이름 없음 (ol3DUUeCjQ)

2021-12-21 (FIRE!) 12:34:41

>>258

당신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 울음 섞인 몇 마디를 들으며 그는 어느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그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재회가 너무나도 기뻤던 탓에. 슬픔, 애환, 기쁨. 모두 기계적인 분석으로 도출해낸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게 심어진 '벤자민'의 조각들을 기워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다. 진짜이되 진짜가 아닌 것. 그렇지만 벤자민—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로 당신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평범한 기계가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흐느끼며 얼굴을 묻어올 때도, 당연하다는 듯 당신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예전과 같은 몸짓으로. 늘상 당신에게 하던 따스한—그러나 아직은 차가운—포옹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북받친 감정을 달래려는 듯이, 규칙적으로 그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당신의 식지 않은 눈물이 앞섶을 느리게 적셔간다.
손을 뻗어 닿은 당신의 뺨이 발갛고 뜨겁다. 벤자민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뺨을 어루만진다.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이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당신을 바라보았다. 위화감 없이 만들어진 눈동자에 당신이 비친다. 그가 살풋 웃었다.
당신은 그 여린 손을 들어 그의 손을 포갠다. 마주 닿은 피부로 당신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게 너무나도 포근해서—이 차가운 쇳덩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벤자민은 손을 떼지 않는다. 가늘게 조각된 손가락이 당신의 눈꺼풀을 훑고 지나간다. 당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손 끝에 선명히 번져갔다.

당신이 입을 연다. 매일마다 들었던 인사말이지만, 평범하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말이었다. 기억 속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속살대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성대—음성 모듈을 타고 당신에게 가 닿는다.

"응, 다녀왔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항상 당신의 이마에 키스하며 다정히 건네던 말이었다. 그리곤 따뜻한 걸 마시고,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었다. 당연한 일상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당신과 보냈던 순간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당신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 갈라진 목소리에 간절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그—안드로이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벤자민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벤자민이다.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벤자민이다.
벤자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응. 나야, 벤자민."
"세상에 둘도 없는, 너만의 베니."

라고.

//괜찮아~ 걱정할거 없는걸! 충분히 잘 이어주고 있으니까 ^_^

260 이름 없음 (lmYM2B62g.)

2021-12-26 (내일 월요일) 23:54:21

(책상에 엎드려 자던 와중, 목덜미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벌떡 상체를 일으켜 당신을 올려다본다.) ...너 싸움 잘해? (물론 죽일 듯한 눈빛으로.)

261 이름 없음 (iBPhOXbQRs)

2021-12-27 (모두 수고..) 00:06:41

>>260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 눈웃음 친다. (진실이 어떠할지는 모르나.) 차가운 감촉의 주인인 사이다캔을 당신 앞 책상에 내려놓는다.) 못 해. 그렇지만 너는 이길 수 있어. (검지로 캔 끝을 죽 민다. 알루미늄 캔 안의 음료도 손끝 따라 이리 찰랑 저리 찰랑 흔들리고 있을 터다.) 안 마실 거야?

262 이름 없음 (JXmF9GN5GQ)

2021-12-27 (모두 수고..) 00:14:17

>>261
허, 말은 잘하지. 그놈의 입이 문제야, 입이. (뒷목을 문지르며 당신을 쏘아보던 눈빛은 사이다캔을 보고 살짝 유순해졌다. 손가락에 밀려온 사이다캔과 당신의 눈웃음을 번갈아 쳐다보다, 손을 뻗어 캔을 집는다.) 내가 봐주는 거야, 너. 앗, 차가. (집어들었다가 놓쳐서 떨어뜨릴 뻔 했다.) 근데 왠 일이야, 착한 일을 다 하고? 네 거는?

263 이름 없음 (iBPhOXbQRs)

2021-12-27 (모두 수고..) 00:24:31

>>262 입만 문제야? 오, 웬일이래. 그렇게 후한 평가를 다 해주고. (천덕꾸러기 특유의 웃음소리 내며 당신 앞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래그래. 자판기 온도에도 져버리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하마터면 탄산 폭탄이 될 뻔한 캔을 가리키며 웃었다. 갈색 눈만은 당신을 향하였지만.) 내 거? 없어. (사이다캔이 주인한테 돌아가자 텅 비어버린 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너 그 사이다캔 분명히 받은 거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내 음료수를 안 들고 귀엽지도 않은 친구한테 사이다를 사준 이유가 뭐일 것 같아?

264 이름 없음 (uWfaCx4Iu.)

2022-01-14 (불탄다..!) 11:43:34

“히어로고 빌런이고 짜증나 죽겠어.” 서로 이름 다른 회사들이 층마다 호마다 들어찬 아파트형 공장 옥상. 옥상 정원이랍시고 꾸며두었지만 실상은 폐암행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고, 방금 중얼거린 화자는 생각했다. 파란 밤하늘 아래, 담배 꽁초가 그득 들어찬 쓰레기통 옆에서 막대 사탕이나 물고 있는 신세. 그래, 야근 중인 신세다.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푹 눌러쓴 볼캡 위로 후드까지 뒤집어쓰며 완벽 봉인, 퀭한 눈 밑 다크서클, 렌즈고 화장이고 신경쓸 겨를 없는 안경과 턱 밑에 걸쳐진 마스크.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퇴근없이 며칠 연달아 일한 차림새다. 푹 쉬질 못해 연신 잠이 쏟아지니 사탕이라도 물고 밤공기 좀 쐬러 올라왔다. 그랬더니 타이밍도 좋지, 저기 높은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왔다. 참고로 화자는 며칠 전 히어로와 빌런이 치고박고 싸우던 현장에 하필이면 출장가던 사수와 부사수가 있었고, 당연히 휘말렸다. 죽지는 않았다만 병원에 실려갔고 일은 고스란히 화자에게 몰렸다. 그러니 냉큼 궁시렁거리고 말았다.

“아... 돛대였네.”

담배 한 개비를 뜻하는 말이지만, 화자에게는 막대 사탕 하나를 뜻한다. 내려가서 먹을 사탕이 남았나 주머니를 뒤졌는데 안쪽에 박힌 먼지나 털었다. 뉴스는 계속 무슨 빌런이 나타나서 무슨 히어로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

“그렇게 개박살을 내고 다닐거면 우리 회사나 개박살내주지.”

누구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잘난 초능력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놈은 빌런, 초능력이랄게 없는 경찰을 도와 정의감 투철하게 빌런을 잡으러 다니는 초능력 보유자는 히어로. 빌런이 나쁜 놈은 맞는데, 둘이 투닥대며 개박살내는 꼬라지를 보니 평범한 소시민 월급쟁이에 불과한 화자는 둘다 아니꼬워 죽겠는 것이다. 정말 회사가 개박살나면 무직백수가 되겠다만, 당장 집에는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 짧은 바람이 새어나왔다.

265 이름 없음 (mjxsIW6Q6Q)

2022-01-14 (불탄다..!) 19:09:09

>>264
도시의 불빛은 사람의 아주 오래전에 회자되었던 이야기도 거부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살지 않음이 명백한 암석덩어리의 불빛만을 아주 조금 허용했다. 화자와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같은 건물의 이용자였으며, 당신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던 이는 당신이 오기 전부터 옥상에 나와 담배를 한 대 물고있었다. 히어로와 빌런에 대한 이야기도 조용히 듣고 있던 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으나 그것이 쓴웃음일지 예의상 지어준 미소일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일 것이었다.

" 저도 선배 말에 동감해요. "

담배불을 지져 양철 쓰레기통에 지져서 끈 이후에 기지개를 폈다. 끄으응-! 하는 힘겨운 소리.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고, 척 보아도 비싸보일법한 시계에 깔끔하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둘의 관계상 선후배는 성립할 수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 호칭은 한 사람의 억지로 줄곳 유지되었다.

" 하지만 선배. 혹시 정말로. 간절하게 초능력자가 내 삶에 엮였으면 좋겠어요? "

잔잔한 미소에 깜빡이지 않는 동공이 당신을 직시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속눈썹을 건드릴지언정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은체 당신을 보았고 눈꺼풀은 아주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266 이름 없음 (69X.VZZWHU)

2022-01-15 (파란날) 22:09:56

(심한 인체연구와 고문을 당한 듯 보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아무것도 없는 벽 쪽을 흘긋 살펴보고 차트를 향해 시선을 내린다.) 실험체. 깨어있는 것 알고 있어. (다짜고짜 당신의 볼을 후려친 뒤, 제 손을 털며 자리에 앉는다.) 새로 배정된 연구원인 오르카다. 오늘 기분이 어떻지?

267 이름 없음 (ugW2HBlVxU)

2022-01-15 (파란날) 23:00:17

>>266

(덜컥 날아오는 손찌검에 실험체의 고개가 크게 흔들린다. 고개가 돌려진 채 잠시 당신을 노려보던 실험체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어낸다.) 내 기분 따위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힘 없이 너덜대며 웃는다.) 혀 깨물고 뒤지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정도. 됐냐? (거칠게 비아냥댄다. 허나 심한 고문으로 기력이 부족한 듯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르카고 나발이고. 시X. 전에 있던 놈은 내 팔 조져놓고 어디로 간거야?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실험체. 아마 전임 연구원에 대한 욕설인 듯 하다.)

268 이름 없음 (69X.VZZWHU)

2022-01-15 (파란날) 23:08:35

>>267
(침을 뱉는 모습에도 무심히 바라본다. 기분을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질문임을 잘 알고있지 않냐는 듯이.) 어차피 되살아날텐데 뭐하러.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일과에 집중해. (당신의 앞에 놓여있는 흰 의자 위에 앉아 차트를 몇 장 넘기며 안의 내용을 훝어본다.) 새뮤얼은. (말이 잠시 끊긴다. 귓가에 꽂힌 무선 이어폰에서 상부의 명령을 듣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작별 인사를 남기진 않았더군. 무슨 작품을 남겼는 지 볼까. 왼팔을 내밀어.

269 이름 없음 (4feLUdCJ9I)

2022-01-15 (파란날) 23:45:12

>>268

(당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주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군. 그래, 영원히 죽지 않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냈으니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도 된 듯 하겠지. (실험체가 비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가만히 당신의 표정을 살피던 실험체가 고개를 까딱인다.) 새뮤얼, 그 인간이 도망치기라도 했나봐? 오, 아니면 내 평생의 바람대로 나가 뒈져준걸까? (묘하게 두 눈에 생기가 돈다.) 그래, 내가 항상 말해줬지. (별안간 목을 가다듬는 실험체.) " 새뮤얼. 네가 이 세상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뿐이야! "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목소리와 말투. 낄낄대며 웃고 있다. 전임 연구원을 심히 저주한 듯 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지, 진실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저 제 상상 속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새뮤얼을 떠올리는 데 열중하는 실험체.) …뭐, 왼팔? (갑작스레 예민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실험체.) 네 전임 연구원이 아작을 내버린 내 왼팔 말이지. 그래. (당신의 명령에 불복할 생각은 없는 듯, 적의에 찬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순순히 팔을 걷어 보여준다. 학습된 복종인 듯 하다.)

270 이름 없음 (VzQ.FnvRt.)

2022-01-16 (내일 월요일) 22:53:05

>>269
듣다 보니 이상한걸.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이지? 그건 아마도. (잠시 침묵. 그리곤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헛소리 할 정신력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허수아비라 생각할 줄도 알고. (생기가 도는 눈빛과 연극조의 말투는 무시한 채, 차트 속에 가려져있던 작은 주사기를 꺼내서 당신의 왼손목의 혈관에 주사한다. 그리고 말끔해보이는 당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이리저리 살펴본다.)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연구 결과는 충분히 나왔으니, 이제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말야. 그래서 너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지? (희망을 주고, 부수는 행위는 몇 번이나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평탄한 어조의 목소리다.)

271 이름 없음 (jMjYzBrXus)

2022-01-16 (내일 월요일) 23:44:47

>>270

잊었나? 네놈들이 자르고 붙이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기 전까진 나도 인간이었다는 걸. 내 태생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신이 내려준 운명은 저주 받은 불사의 시쳇덩이가 아니라— (점점 격양되는 어조.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다 이내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만다. 그리곤 한참이나 침묵하며 무표정히 앉아있는 실험체.) 또 뭘 꽂아넣는거야. 지긋지긋해.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로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반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 지금 장난하냐? (실험체의 눈빛이 떨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하나 효과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나를,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지금 자유라는 말이 담겨?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린다.) 니들 속이야 뻔하지. 또 이딴 말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거. 뻔한 수법이지. (중얼이듯 말하는 실험체. 허나 동요된 것이 뻔히 보인다. 잠깐의 침묵 속,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불안한 낌새로 아랫입술을 잘근이던 실험체가 입을 연다.) 이 연구소에 불부터 질러버릴테야.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리곤 고향에 가야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인다.)

272 이름 없음 (0K5a8oHMMs)

2022-01-17 (모두 수고..) 00:28:57

>>271
그럼 우리가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하기라도 했단건가? 그럴리가, 우린 한낱 인간이야. 너와 같은 인간.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지금 이 상황, 대화조차 운명이었다고 말야. 그럼 이 운명 끝에 있는 것은 뭘까? (뭘 꽂아넣었냐는 질문은 무시한 채, 주사기 끝은 탁탁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의 감정이 쉴 새 없이 변해갈 때에도, 전임 연구원과는 다르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분노 하나하나를 실감하면서도, 안경알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연구소를 불지르는 정도는 새발의 피야. 포워드 코퍼레이션은 도시 전체를 장악 중이니까. 넌 또다시 금새 잡혀오겠지. (손목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 뒤이은 말에 피식 웃는다.) 네 말대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게 특기라고 하자. 왜 네 고향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윗분들에게는, 아주 재밌는 소재거리일텐데. (손목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1분 남았어. 꿈 이야기 좀 더 해봐.

273 이름 없음 (O0u4EXpToU)

2022-01-17 (모두 수고..) 23:38:19

>>272

입은 더럽게도 잘 놀리는구나. (쯧, 혀를 차내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오, 분명한 거역이지. 너희들은 엄청난 천벌을 받을거야. 한낱 인간 주제에 새장을 탈출하고자 한 죄. 교만의 댓가… (주사기를 정리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실험체. 흡사 저주를 퍼붓는 것 같기도 하다. 제 몸에 주입된 약물이 무엇인지엔 관심 조차 없는 듯 하다. 실험체에겐 그닥 가치 없는 정보였던 걸 수도.) 뭐 어때? 난 세상의 악을 심판하겠다는, 그딴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냐. 그저 내 인생을 난도질한 너희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지. 포워드 코퍼레이션이고 나발이고 상관 없어. 난 니들이 고통스럽게 죽기만 하면 돼. (힘없이 웃으며 당신을 응시한다. 곧게 꽂혀드는 시선에 앙심이 가득하다.) …알게 뭐야. (미간을 구기는 실험체.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1분이 남았다.' 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는 듯 하다.) 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이 실험실에 들어오고, 아마도, 몇 달 후까지는 그 꿈을 가지고 있었을거야. 풀려나면 고향에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다시 입술을 잘근인다.) 내 꿈 얘기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숨을 내뱉는 실험체.) 내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나 썩어버렸어. 니들 덕분에. (당신의 안경알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실험체.) 그니까 엿이나 먹어. 그리고 고통스럽게 뒈지길. 죽어서도 망령으로 남아 저주해줄테니까. (킥킥대며 웃어대는 실험체. 허나 역시나 기력이 부족해보인다.)

274 이름 없음 (mnIEA8/auE)

2022-01-18 (FIRE!) 00:14:36

>>273
(당신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새삼 표정의 변화 하나 없다. 되려 그것은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주사를 놓고 난 다음에는 그저 하염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따금씩 시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선생이셨네. 꿈 치고는 포기가 빠른 편이란말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욕을 할 기운은 남아있고. (차트에 꽂혀있던 펜을 들어 당신을 향해 겨눈다.) 넌 안죽어. 대신 노선은 확실히 해줬으면 해. 고통스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꿈을 좇아 살아나갈건지, 그저 한톨의 먼지처럼 높으신 분들의 비웃음이나 사며 화장당할건지. (펜을 돌리며, 슬며시 웃는다.) 뭘 선택하든 운명은 하나 뿐이지만 말야. 1분 지났어. (순간, 온몸의 혈관이 끓어오르는 극한의 고통과 함께 당신의 눈과 귀, 입에서 피가 뿜어져나온다. 그리고 시야가 꺼매진다. 단지 한계를 넘어선 격통 때문이 아닌, 실험실 내부 전체적으로 불이 나간 듯 금새 붉은 비상전등이 켜진다. 사이렌이 울리고,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온다. 당신의 눈 앞에 있던 연구원은 어느새 연구복과 안경을 벗어던지고 검은 작전복 차림을 하고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네 혈관에 있는 추적 나노봇을 배제하는 과정이야.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니 잘 들어. 모든 보안 프로토콜은 약 45초간 정지 상태일거야. 내 뒷편의 문을 열고, 보안 게이트 3개와 스무명 남짓의 무장병력을 뚫어내야해. 우리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다는걸 보여줘. 선생. (당신의 뒷편으로 돌아가 수갑에 권총을 발포해 당신의 팔을 자유롭게 해준다.) 정문으로 나오면 데리러 갈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천장 구석에 붙어있는 환풍구에 뛰어들어가기 직전, 당신을 돌아본다.) 선생 고향, 데려다주지. 살아서 나오면.

275 이름 없음 (4UWr6cnJc2)

2022-01-18 (FIRE!) 00:54:40

>>274

그래, 어려서부터 물에 빠져도 주둥아리는 동동 뜨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나불거리는 것 밖에 없기도 하고 말야. (무표정한 당신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댄다.)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구나. (당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는 실험체. 허나 곧 극심한 고통에 몸을 크게 덜썩대기 시작한다. 단말마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죄여오는 고통. 실험체가 크게 몸부림 쳤지만, 단단히 구속된 탓에 오히려 묶인 신체 부위의 피부만 긁히고 파일 뿐이었다.) …뭐야? 너, 연구원이 아니었구나? 이건 또 무슨… (아직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뚝뚝 끊긴다. 호흡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숨소리가 터질듯 위태롭다.) …시X, 그냥 연구원의 장난감으로 뒈지는 게 편할 뻔했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대다 총소리에 크게 몸을 움찔이는 실험체. 저도 모르게 놀라 두 팔을 움찔이자, 자유롭게 허공을 휘젓는 감각이 낯설게 몰려든다. 멍하게 제 두 손과 발을 바라보던 실험체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만나면, 다 설명해야할 거야. 왜 나를 구해준건지, 니들은 또 뭔지! (혼비백산한 상황. 사이렌 사이로 실험체가 크게 소리쳤다.) 젠장, 젠장, 젠장. 45초는 너무 짧잖아... (약간 패닉한 듯 제 머리칼을 쥐뜯는 실험체. 그러나 곧 결심한 듯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당신을 지나쳐 뛰어든다.) 뭘 믿고 투자를 한건진 모르겠지만, 대박 한 번 보여주지. 난 고향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승부사였거든. (당신이 환풍구에 들어가기 직전, 실험체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실험실 문고리를 쥐었다. 고통에 의한 발작으로 너덜너덜해진 피부가죽이 눈에 띈다.) 에이 시X, 모르겠다. 그쪽이나 뒤지지 말아. (시끄러운 사이렌 아래, 실험체가 문을 열어제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새하얀 실험실을 탈출하는 경이로운 순간. 제대로 기능한 지 오래되어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실험체는 자유를 향하며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276 이름 없음 (Z/SMrPmkGg)

2022-01-26 (水) 21:15:21

ㅡ왕국이 위기에 처할 때 이세계에서 온 용사가 어둠을 가르고 세계를 구하리라.


아무도 믿지 않고 그저 옛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전설은 사실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 앞에서 왕국은 물론이며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예언을 떠올린 현자는 대대로 왕국에 전해지는 주술을 사용했고 이세계에서 온 존재를 왕국에 소환했다. 그 후 수많은 이들이 있었고 마침내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은 소멸했고 세계에 평화가 돌아왔다.

왕국은 물론이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평화가 되찾아온 것을 기념해서 긴 축제를 열었고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공포와 절망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전 세계에 가득 퍼졌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다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 끝났잖아. 그런데 왜 우릴 돌려보내지 않는거야?"

이세계에서 온 존재 중 하나인 소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벌써 소환되고 2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17살의 나이에 이곳에 온 소년은 이젠 19살이 되어 성인을 앞두고 있었다. 2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열심히 여행을 하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존재와 목숨 걸고 싸워서 세계를 구했건만 막상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마치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슬그머니 회피하는 왕국 사람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괜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년에게는 딱히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소환 마법으로 소환된 이들은 모두 부모가 없는, 어떻게 보면 현 세계에서 사라져도 크게 영향이 없을 이들이었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런 이들로 선발되는 마법이라고 설명을 듣긴 했으나 그럼에도 사내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작게 중얼거리며 소년은 왕국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있었으나 아직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계속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소년은 눈을 감았다.

/이세계에 소환되었고 세계를 구했으나 다시 원래 세계로 가지 못하고 이세계에 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 용사 일행 중 한명이라는 설정이야.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혹은 이 소년처럼 똑같이 소환된 누군가여도 상관없어. 너무 뜬금없는 전개만 아니라면 어떻게 이어줘도 괜찮아! 맥커터는 사절이야.

277 이름 없음 (u89/AzCMkk)

2022-01-27 (거의 끝나감) 03:11:50

>>276

"어디 가셨지? 얼른 이쪽으로 가 봐! 오늘은 정말 늦으시면 안 돼."

소녀는 보드라운 두 손으로 둥근 입을 꼬옥 틀어 막고 미로 같은 도서관 책장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종들의 발걸음이 쿵쿵 거리는 요란한 울림에서, 토끼같이 작은 울림으로 멀어졌을 때. 그제서야 소녀는 달띤 숨을 작달만하게 헉, 토해내었다. 그저 조금 뛰었을 뿐인데. 소녀는 열이 오른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작게 몰아내쉬며 진정시켰다. 휴--. 약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몇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야. 도서관이라는 미로 속, 제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소녀는 말간 웃음꽃을 피운다. 신나라! 하지만 이곳에서도 감시중인 관리인이 존재하니 소리는 내면 안돼. 소녀는 한껏 들뜬 얼굴로 히죽 웃으며 까치발로 살금살금 관리인의 눈을 피해 옷자락을 살랑거렸다.

이 칸은 이미 다 읽었고, 여기는 시종들이 잔뜩 쌓아주던 지루한 책들이다. 이쪽도 모두 정독했고.. 한 손엔 보석이 박힌 구두도 쥐어들고 프릴삭스만 신은 채 살금살금 제가 좋아하는 구간으로 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는 쉽게 다가갈 수 없게 저 안쪽, 저 안---쪽 구석 깊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어린아이가 아닌 곧 성인이 가까워져 가는 이 소녀에겐 크나큰 일도 아니지! 그래도 아직 2년은 남았던가? 파파랑 마마는 성장기인 소녀가 성장은 그대론데 해만 가는 게 골치인 듯 했으나 소녀는 그 재수없는 금발 머저리랑은 죽어도 혼약하고 싶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높은 책들을 읽고 싶다면 낡은 사다리 위로 가야하는 게 조금 무섭지만. 그리고 늘어나는 약들이랑... ...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구석에 위치한 코너로 거의 다다랐을 때. 잡념에 빠져 손에 턱을 괴고 걷던 소녀가 코너를 돌자, 좁아졌던 시야를 갑작스레 꽉 채운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소리없이 허둥거렸다. 간신히 구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품에 안으니 다행히 상대는 눈을 감아 소녀의 등장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돌리던 소녀는 바닥에 구두를 가지런히 놔두고 경계의 눈초리로 소년을 빤히 관찰했다. 아무리보아도 제 또래 쯤으로 보이는 이목구비에, 근래 들어 자주 보이던 차림세. 그리고 무척 가느다란.. 속눈썹. 음. 이 속눈썹 본적 있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소녀의 입꼬리는 조금 호선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소녀는 소년이 눈을 뜨길 얌전히 기다렸으나. 잠시 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앉아있는 소년의 맞은편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소년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소년이 눈을 뜬다면 어느새 호기심으로 잔뜩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 사이 거리에 깜짝 놀라려나. 그렇다면 소녀는 눈을 활짝 휘어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터다.
소녀는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호위 기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여러차 말했지만 무참히 묵살 당하고 뒤를 좇으며 소녀를 지키던 그 소년을.

"돌아가요? 어딜?"

제대로 못 들었어. 소녀는 한껏 낮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상냥히 물으며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왕국의 공주인 소녀가 대대로 물려받는 마력으로 파멸의 봉인을 위해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설정!
아니면 용사가 모험을 다닐 땐 제외하고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주었다는 설정! 정도로 썼는데..
마음에 들 지 모르겠네 🥺..

278 이름 없음 (ZidW.fFtDA)

2022-01-27 (거의 끝나감) 19:28:28

>>277

잠시 고뇌하던 찰나 인기척이 정말로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여긴 도서관이니 사람이 오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허나 그 인기척이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기에 소년은 의문을 가지고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낯익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순간, 소녀가 쉿 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소년은 얼떨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왕국의 공주인 그녀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이다 들려온 물음에 대답했다.

"그거야 원래 살던 세계죠. 알다시피 저는 이 세계 출신이 아니니까요."

함께 세계를 구하는 여정을 떠난 일행인만큼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턱이 없었기에 소년은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년이 들고 있는 책은 이동 마법에 대한 책이었으니 그 책을 보면 더더욱 상황을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긴 하나 일단 공주인만큼 소년은 나름대로의 예를 갖춰 이야기했다. 왕국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바로 반말을 한 시절과 비교하면 크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물론 제가 없어져도 제가 살던 세계에는 크게 영향이 끼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요."

결론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눈을 감고 원래 살던 세계를 가만히 떠올리던 그는 한숨을 약하게 내쉬다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주시하며 이번엔 자신 쪽에서 물었다.

"그러는 공주님은 여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찾는 자료라도 있으신가요? 이곳의 자료는 잘 모르지만 찾는 것이 있으면 같이 찾아볼게요. 김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면 좋기도 하고요."

그래도 왕국에서 관리하고 있는 도서관이니 뭔가 단서는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소년은 밝은 표정을 보였다. 반드시 자료를 찾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일단 전자를 가장 먼저 생각한 것 같아서 그 설정의 여캐라고 생각하고 이어봤어! 나는 막 갑자기 뜬금없는 느낌..그러니까 소년이 알고 보니 망상에 빠져있는 환자였다. 같은 느낌의 맥커터만 아니면 얼마든지 오케이야!

279 이름 없음 (81.U5YbV3g)

2022-02-02 (水) 00:23:07

>>277이 더 이상 잇지 않는 것 같네. 음. 없을 것 같지만 혹시나 >>276에 새로 잇고 싶은 이가 있으면 얼마든지 이어도 괜찮아!

280 이름 없음 (ek/Xmpeqlw)

2022-02-09 (水) 11:09:37

야 00:49
너가 준 옷 내일 돌려줄게 00:49
그리고 오늘 심한 말 해서 미안했다 00:52
친구들이랑 술 적당히 마시고 조심히 들어와 00:53

281 이름 없음 (k7GVMxBf2.)

2022-02-14 (모두 수고..) 00:04:21

남자는 신을 믿지 않았다. 모든 어른이 입에 올려 간절히 부르짖는, 신—그 짧은 단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안쓰러운 마음들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사실 남자는 거짓으로 손을 모아쥐곤 존재하지 않는 그 존재를 남몰래 비웃었다. 그 어린 눈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가능하리라 믿는 일들을 이루어달라 빌고 또 비는 그 모습들이. 죽음이 선명한 인간들 두고서 동정심을 팔아 실체 모를 누군가에게 바짝 엎드리는 모습이. —신은 없어. 그러니 그렇게 기도해봐야 그 누구도 듣지 않을거야. 병들어 죽어가는 여자의 옆을 지키던 남자의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하던 어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샤오첸, 너는 아마 지옥에 갈테다.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했다.

사후 지옥에 떨어지길 간곡하며 죄악을 저지르는 악취미는 없다. 그렇다고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간식 삼는 고약한 성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그런 거창한 명분 따위는 없었다.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천재 음악가들이 미친듯이 악보를 써내려가며 손가락이 부서질 듯 건반을 내치는 것처럼. 운명이 내린 숭고한 마음을 하사받아 온 세상의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핀 세기의 성인들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 한 순간의 발걸음으로 트럭에 치여 생명이 식어버린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고 숙명이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순리였다. 도시에 혼란을 내지르고 핏물을 뒤집어쓰는— 그리고 언젠가 선의 발길에 짓밟혀 목숨줄이 끊기고 말—

그것이 그가 생각한 자신의 운명이었다.

" 저번에도 말했지. 총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고. "

검붉은 피냄새가 났다. 한 번 스며들어 쉽사리 빠지지 않을 듯한 죄악의 냄새였다. 낙인처럼 뒤따라 자취를 남길 듯한 그 냄새가, 당신의 머릿 속을 아찔하게 주무른다. 남자는 그런 당신을 물그럼 바라보았다. 진득한 핏물이 묻은 둔기를 거칠게 바닥으로 내던지며, 남자가 천천히 당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잔뜩 상처가 난 구두와, 구겨진 정장 바지, 말려 올라간 소매와, 핏물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셔츠. 어딘가 피곤한 기색의 남자가 나직히 중얼이며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옅은 핏물은 머리칼과 엉켜 굳어버리고야 만다.

남자가 당신의 손을 덮어쥐었다. 결코 거친 행동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찌 느꼈을지 모르겠다만. 당신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갠 남자가 천천히, 방아쇠에 올려진 손가락을 느릿히 밀고 힘을 주며 손바닥을 긴장 시켰다. 그리곤 상처난 왼손으로 총을 받쳐,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 머리를, 조준해야지. "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꼿꼿이 당신의 눈을 마주하며. 한 번도 발포된 적 없는 차가운 총구가 남자의 이마에 닿았다. 남자가 왼손을 조금 움직여 방아쇠에 닿은 당신의 손가락 위로 제 엄지를 포갰다. 금방이라도 힘을 주어 방아쇠를 눌러버릴 듯, 그의 손에는 가볍게 힘이 들어가있다. 시커먼 눈빛이 당신을 주시한다. 방아쇠가 눌려 목숨이 터져버릴 그 순간에도 당신을 바라볼 듯 그 눈빛이 형형하다.

" 아직도 어려운가? "

남자의 목소리는 항상 낮고도 조용했다. 그리고 높낮이가 없이 단조로웠다. 때문에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항상 자신의 의도를 꽁꽁 숨겨 내주지 않는 인간이었다. 마치 선글라스를 낀 인간의 눈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말이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음은 알았지만, 도통 그것이 내 마음의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느릿히 시선을 깔아 당신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목선을, 그리고 다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왼손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포개어 쥔다. 살며시 힘을 주어 총구를 떼내었다— 남자는 작게 차가운 금속과 인간의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느릿히 입술을 떼낸다.

" 아직도. 어려운가? "

남자가, 나직히 물었다.

#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 X~

282 이름 없음 (gPu1RYdilo)

2022-02-15 (FIRE!) 23:33:04

>>281 다시 한 번, 원수의 앞에 섰다. 그토록 굳게 다짐하고 수도 없이 연습했음에도 그 머리통을 꿰뚫기 위해 총구를 겨눈 순간, 덜컥 겁이 나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몸이 굳어버렸던 첫 대면이 떠올랐다. 그 날도,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서 스승이라도 되는 양 훈수를 뒀었다. 원수가 더러운 손을 뻗어 내 손을 더듬는다. 벌레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듯 불쾌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 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복수라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몇번이고 되뇌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두려웠다. 이깟 쇳덩이 때문에 한 순간 명을 달리해버린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해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느닷없이 상체를 숙이더니, 총을 쥔 내 손을 자기 머리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총구를 이마에 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뜬금없고, 또 멍청한 행동에 숨통까지 옥죄어오던 긴장이 탁 풀렸다. 남자가 무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으나, 그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원수에게 붙들린 손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한껏 민감해져있던 신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비록 상대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라 해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니 그 어느때보다도 머리가 맑아졌고, 터질 듯하던 심장의 고동도 진정되었다. 총구는 남자의 이마로부터 멀어졌으나. 아주 가까웠다. 그런 상태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어려운가. 대답 대신, 총을 거머쥔 손에 힘을 주고, 정확하게 남자의 이마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과녁을 상대로 연습했을 때보다도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놓았다. 그제서야,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쉽네."

나의 목소리는 소음기를 장착했음에도 모든 청각을 마비시키는 듯한 총성에 묻히고 말았고, 이런 멍청한 놈 때문에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그렇게 애를 먹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드디어 해냈다는 고양감이 모든 복잡한 감정을 압도했다.

283 이름 없음 (F6HFYmlXy6)

2022-02-16 (水) 00:03:29

>>282
# 어 음... 죽여버렸네.... 이걸 어떻게 이어야하지... 😂

284 이름 없음 (tv0ppC.wk.)

2022-02-16 (水) 00:47:41

>>283
혹시 >>281 본인일까...? 위 레스와 더 잇지 않는다면, 내가 >>281에 이어봐도 괜찮을까? 지나가다 보게 되었는데 상황이 취향이라! 곤란하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285 이름 없음 (/6PEJkvvt2)

2022-02-16 (水) 00:55:41

>>284
응 >>281 맞아! 불사신 설정이라도 넣어서 이어야하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282가 다시 살아나는 전개를 원할 거 같진 않고...😂 >>282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너레더가 원한다면 >>281에 이어줘도 괜찮아! 나야 고마운걸!

>>282도 분위기 있게 이어줬지만 아무래도 내 캐릭터를 확정형으로 죽여버려서...😅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더 이어갈 방법이 없을 거 같아ㅠ 이미 죽이고 후련해하는 결말로 써줘서 내가 다시 살린다 한들 >>282한테는 맥빠지는 레스일 거 같기도 하고... 미안해!ㅠㅠ

286 이름 없음 (mrbUIH6QXQ)

2022-02-16 (水) 00:57:56

>>285 허락해줘서 고마워! 오늘~내일 중으로 이어서 써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287 이름 없음 (l6cQ6SfdcU)

2022-02-28 (모두 수고..) 22:25:23

저, 저는 혼자 살 수 없어요. 부디, 저를 내치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창조주를 바라보며 매달린다. 인위적인 생명체, 크리쳐, 호문클루스,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 생명체의 시선에는 오로지 당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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