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257 이름 없음 (34HTvcCJxQ)

2021-12-20 (모두 수고..) 23:42:29

>>252

그는 안드로이드였다. 뼈 대신 고철이, 혈관 대신 전선이 있는 기계,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었다. 아니, 사실 '생명'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안드로이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인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그 또한 평범한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같은 기계, 혹은 인간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고철 덩어리라는 말이다. 그 또한 여타 안드로이드들과 같은 제조 공정을 거쳤었다. 그래서 막 만들어졌을 때의 그에겐 의식과 감정을 만들 프로그램도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도 더 못한,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이. 그렇게 그는 초라한 외골격을 덮을 피부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제조 공장의 창고에 넣어졌었다.
그가 처음 만들어지고 몇 달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늘 그렇듯 창고의 완제품─이자 미완성인─안드로이드들이 저마다의 주인을 찾아가고, 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의 반복이었다.
적어도 삼개월 전까지는 그랬었다.

공장의 육중한 철문은 며칠에 한 번 꼴로 열렸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인부 몇이 철문을 열었다. 차갑고 삭막한 밀실 안으로 그들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인부들은 그의 몸체를 꺼내 수레에 실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그를 실은 수레가 공장 바깥까지 끌려나왔다. 인부들은 넓직한 트럭에 그를 비롯한 여러 안드로이드들을 집어넣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곧 트럭이 출발했다. 쉼없이 달린 트럭은 또 다른 공장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그는 제대로 된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외피에 정교한 피부가 입혀지고, 머릿속 회로에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인간의 기억 또한 주입받았다. 생생하면서도 사뭇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기억을 가지고, 그 기억의 주인과 완벽히 닮은 안드로이드. 그렇게 그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벤자민 포트만'.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

'벤자민'의 의식이 부팅된다. 몸체 내부의 복잡한 기계가 바쁘게 돌아간다. 자세히 들어도 들리지 않을 소음이 그 속에서 고요히 울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성격, 취향, 감정…. 그 모든 것도 회로 속에서 로드된다. 그의 의식 속에 기억들이 온전히 정착된다.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그건 남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일부였다.
고즈넉한 적막이 그의 몸체를 휘감는다. 마침내 가동 준비를 마친 안드로이드─벤자민은 눈꺼풀을 연다. 관자놀이의 스위치에 은은한 녹빛이 돈다. 정상 작동됨을 알리는 신호이자, 그가 명백한 안드로이드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눈을 뜨자, 늘 기억 속에 있었던 천장이 보인다. 항상 '당신'과 함께 했었던 별장. 창가에 앉아 눈발 흩날리는 풍경을 곧잘 보곤 했었던 장소. 그의 회로가 남아있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인간의 두뇌가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줄곧 상자 속에 누워있었던 벤자민이 몸을 일으킨다. 끼어있었던 완충재가 사르륵─ 흩어진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묘하게 기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이다.

그, 벤자민의 시각 센서에─'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들어온다. 누구보다 좋아하는 당신,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빛, 나의 사랑─사고가 전부 돌아가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메리."

완벽히 조형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벤자민은 짐짓 기쁜 표정을 해보인다. 눈은 곱게 접혀 휘어있고,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선명히 떠오른다. 당신을 보게 되어 기쁘다는 감정이 든다. 만들어진 감정임에도 그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상자를 빠져나오는 벤자민의 발걸음이 꽤나 조심스럽다. 곧 그는 당신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당신을 살핀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모습,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벤자민이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리고, 당신의 뺨을 향해 그가 오른손을 뻗는다.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그러나 쇳덩이처럼 차가운 손을.

"나 왔어."

그의 목소리가 아릿하게 떨려왔다.


//고민하면서 쓰느라 늦어졌어... 기다렸을까봐 미안해지네 ㅠ_ㅠ

258 이름 없음 (kKbFJ6fNOg)

2021-12-21 (FIRE!) 00:53:28

>>257

" 베니, 베니… "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메리는 목이 메여오는 통에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오랜 시간동안 소중히 품어왔던, 당신의 이름만을 겨우 옹알이처럼 떼어낼 뿐이었다. 메리의 눈망울이 떨려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훑어내리는 눈길이 조심스러웠다. 행여 닿기만해도 바스라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가 웃었다. 메리는 달라진 것 없는 그 미소에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 감정을 무어라 형용해야할까? 안도, 그리움, 반가움, 사랑…오로지 그것들만이 메리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이성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또한 그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낭비할 시간 조차 없었다. 벤자민, 그가 돌아왔다. 메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벤자민을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벤자민의 형체를 띤 기곗덩이를 끌어안았다. 허나 메리는 느낄 수 있었다. 일정하게 뛰어오르던 그의 심장박동과, 고요한 호흡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부드러운 살갛을, 또 항상 그랬듯 먼저 뻗어내는 오른손과, 당연스레 제 뺨에 닿는 큼지막한 손을.

벤자민의 손이 닿은 뺨이 차가웠다. 허나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벤자민의 온기를 느꼈다. 메리가 붉어진 눈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흔들림 없이 자신을 붙잡아주던 그 눈이었다. 벤자민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가 보인다. 벤자민이 바라보고 있을 메리가 보였다. 벤자민의 손은 차가웠다. 갓 가동된, 그리고 몇 십분간 바깥 기온에 노출된 안드로이드가 내뿜는 한기였다. 그럼에도 메리는 벤자민의 품과 손길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너무도 따뜻한 것들은, 이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메리가 벤자민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제 손바닥 안에서 한 없이 부서져내리던 그의 손이, 단단히 느껴진다. 항상 꿈길에서만 쫓던 그 감촉이었다. 메리는 눈물을 멈추고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존재를 조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답 해야하는데.

"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

메리는 늘상 건네왔던 평범한 인사를 했다. 벤자민이 지친 기색으로 현관문을 열면, 메리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안기며 그리 인사했다.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그러고 나면 항상 벤자민은 메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커피 머신을 가동시켰다. 메리는 늘 코코아를 준비했다. 둘은 소파에 앉아 시시껄렁한 코미디를 보기도 했고, 심야 토크쇼를 보며 몇몇 유명인들에 대한 쓸모없는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가끔은 TV를 끈 채 얄팍한 조명에만 의지하며, 우연이 만들어낸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당연히 찾아오던 아늑한 저녁. 그것이 그들의 당연한 하루였다.

제법 오랜 기다림 끝에 내뱉은 그 인사가 너무도 애틋하다. 메리가 벤자민의 품에서 벗어나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벤자민, 나의 벤자민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나의 벤자민이었다. 메리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이 적막한 한기는, 아마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바람의 탓이리라.

" 벤자민, 당신이지. 당신이 맞지? "

메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끝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반점짜리 정답이었다. 알면서도 문제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내야하는 그 심정이 어딘가 따끔하다. 하지만 메리는, 벤자민—그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 나도 늦어서 미안...ㅠㅡㅠ 나도 어떻게 하면 잘 이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늦었네... 마지막까지도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면서 썼어 ㅎㅡㅎ...!

259 이름 없음 (ol3DUUeCjQ)

2021-12-21 (FIRE!) 12:34:41

>>258

당신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 울음 섞인 몇 마디를 들으며 그는 어느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그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재회가 너무나도 기뻤던 탓에. 슬픔, 애환, 기쁨. 모두 기계적인 분석으로 도출해낸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게 심어진 '벤자민'의 조각들을 기워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다. 진짜이되 진짜가 아닌 것. 그렇지만 벤자민—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로 당신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평범한 기계가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흐느끼며 얼굴을 묻어올 때도, 당연하다는 듯 당신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예전과 같은 몸짓으로. 늘상 당신에게 하던 따스한—그러나 아직은 차가운—포옹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북받친 감정을 달래려는 듯이, 규칙적으로 그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당신의 식지 않은 눈물이 앞섶을 느리게 적셔간다.
손을 뻗어 닿은 당신의 뺨이 발갛고 뜨겁다. 벤자민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뺨을 어루만진다.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이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당신을 바라보았다. 위화감 없이 만들어진 눈동자에 당신이 비친다. 그가 살풋 웃었다.
당신은 그 여린 손을 들어 그의 손을 포갠다. 마주 닿은 피부로 당신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게 너무나도 포근해서—이 차가운 쇳덩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벤자민은 손을 떼지 않는다. 가늘게 조각된 손가락이 당신의 눈꺼풀을 훑고 지나간다. 당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손 끝에 선명히 번져갔다.

당신이 입을 연다. 매일마다 들었던 인사말이지만, 평범하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말이었다. 기억 속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속살대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성대—음성 모듈을 타고 당신에게 가 닿는다.

"응, 다녀왔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항상 당신의 이마에 키스하며 다정히 건네던 말이었다. 그리곤 따뜻한 걸 마시고,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었다. 당연한 일상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당신과 보냈던 순간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당신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 갈라진 목소리에 간절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그—안드로이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벤자민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벤자민이다.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벤자민이다.
벤자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응. 나야, 벤자민."
"세상에 둘도 없는, 너만의 베니."

라고.

//괜찮아~ 걱정할거 없는걸! 충분히 잘 이어주고 있으니까 ^_^

260 이름 없음 (lmYM2B62g.)

2021-12-26 (내일 월요일) 23:54:21

(책상에 엎드려 자던 와중, 목덜미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벌떡 상체를 일으켜 당신을 올려다본다.) ...너 싸움 잘해? (물론 죽일 듯한 눈빛으로.)

261 이름 없음 (iBPhOXbQRs)

2021-12-27 (모두 수고..) 00:06:41

>>260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 눈웃음 친다. (진실이 어떠할지는 모르나.) 차가운 감촉의 주인인 사이다캔을 당신 앞 책상에 내려놓는다.) 못 해. 그렇지만 너는 이길 수 있어. (검지로 캔 끝을 죽 민다. 알루미늄 캔 안의 음료도 손끝 따라 이리 찰랑 저리 찰랑 흔들리고 있을 터다.) 안 마실 거야?

262 이름 없음 (JXmF9GN5GQ)

2021-12-27 (모두 수고..) 00:14:17

>>261
허, 말은 잘하지. 그놈의 입이 문제야, 입이. (뒷목을 문지르며 당신을 쏘아보던 눈빛은 사이다캔을 보고 살짝 유순해졌다. 손가락에 밀려온 사이다캔과 당신의 눈웃음을 번갈아 쳐다보다, 손을 뻗어 캔을 집는다.) 내가 봐주는 거야, 너. 앗, 차가. (집어들었다가 놓쳐서 떨어뜨릴 뻔 했다.) 근데 왠 일이야, 착한 일을 다 하고? 네 거는?

263 이름 없음 (iBPhOXbQRs)

2021-12-27 (모두 수고..) 00:24:31

>>262 입만 문제야? 오, 웬일이래. 그렇게 후한 평가를 다 해주고. (천덕꾸러기 특유의 웃음소리 내며 당신 앞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래그래. 자판기 온도에도 져버리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하마터면 탄산 폭탄이 될 뻔한 캔을 가리키며 웃었다. 갈색 눈만은 당신을 향하였지만.) 내 거? 없어. (사이다캔이 주인한테 돌아가자 텅 비어버린 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너 그 사이다캔 분명히 받은 거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내 음료수를 안 들고 귀엽지도 않은 친구한테 사이다를 사준 이유가 뭐일 것 같아?

264 이름 없음 (uWfaCx4Iu.)

2022-01-14 (불탄다..!) 11:43:34

“히어로고 빌런이고 짜증나 죽겠어.” 서로 이름 다른 회사들이 층마다 호마다 들어찬 아파트형 공장 옥상. 옥상 정원이랍시고 꾸며두었지만 실상은 폐암행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고, 방금 중얼거린 화자는 생각했다. 파란 밤하늘 아래, 담배 꽁초가 그득 들어찬 쓰레기통 옆에서 막대 사탕이나 물고 있는 신세. 그래, 야근 중인 신세다.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푹 눌러쓴 볼캡 위로 후드까지 뒤집어쓰며 완벽 봉인, 퀭한 눈 밑 다크서클, 렌즈고 화장이고 신경쓸 겨를 없는 안경과 턱 밑에 걸쳐진 마스크.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퇴근없이 며칠 연달아 일한 차림새다. 푹 쉬질 못해 연신 잠이 쏟아지니 사탕이라도 물고 밤공기 좀 쐬러 올라왔다. 그랬더니 타이밍도 좋지, 저기 높은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왔다. 참고로 화자는 며칠 전 히어로와 빌런이 치고박고 싸우던 현장에 하필이면 출장가던 사수와 부사수가 있었고, 당연히 휘말렸다. 죽지는 않았다만 병원에 실려갔고 일은 고스란히 화자에게 몰렸다. 그러니 냉큼 궁시렁거리고 말았다.

“아... 돛대였네.”

담배 한 개비를 뜻하는 말이지만, 화자에게는 막대 사탕 하나를 뜻한다. 내려가서 먹을 사탕이 남았나 주머니를 뒤졌는데 안쪽에 박힌 먼지나 털었다. 뉴스는 계속 무슨 빌런이 나타나서 무슨 히어로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

“그렇게 개박살을 내고 다닐거면 우리 회사나 개박살내주지.”

누구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잘난 초능력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놈은 빌런, 초능력이랄게 없는 경찰을 도와 정의감 투철하게 빌런을 잡으러 다니는 초능력 보유자는 히어로. 빌런이 나쁜 놈은 맞는데, 둘이 투닥대며 개박살내는 꼬라지를 보니 평범한 소시민 월급쟁이에 불과한 화자는 둘다 아니꼬워 죽겠는 것이다. 정말 회사가 개박살나면 무직백수가 되겠다만, 당장 집에는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 짧은 바람이 새어나왔다.

265 이름 없음 (mjxsIW6Q6Q)

2022-01-14 (불탄다..!) 19:09:09

>>264
도시의 불빛은 사람의 아주 오래전에 회자되었던 이야기도 거부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살지 않음이 명백한 암석덩어리의 불빛만을 아주 조금 허용했다. 화자와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같은 건물의 이용자였으며, 당신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던 이는 당신이 오기 전부터 옥상에 나와 담배를 한 대 물고있었다. 히어로와 빌런에 대한 이야기도 조용히 듣고 있던 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으나 그것이 쓴웃음일지 예의상 지어준 미소일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일 것이었다.

" 저도 선배 말에 동감해요. "

담배불을 지져 양철 쓰레기통에 지져서 끈 이후에 기지개를 폈다. 끄으응-! 하는 힘겨운 소리.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고, 척 보아도 비싸보일법한 시계에 깔끔하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둘의 관계상 선후배는 성립할 수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 호칭은 한 사람의 억지로 줄곳 유지되었다.

" 하지만 선배. 혹시 정말로. 간절하게 초능력자가 내 삶에 엮였으면 좋겠어요? "

잔잔한 미소에 깜빡이지 않는 동공이 당신을 직시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속눈썹을 건드릴지언정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은체 당신을 보았고 눈꺼풀은 아주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266 이름 없음 (69X.VZZWHU)

2022-01-15 (파란날) 22:09:56

(심한 인체연구와 고문을 당한 듯 보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아무것도 없는 벽 쪽을 흘긋 살펴보고 차트를 향해 시선을 내린다.) 실험체. 깨어있는 것 알고 있어. (다짜고짜 당신의 볼을 후려친 뒤, 제 손을 털며 자리에 앉는다.) 새로 배정된 연구원인 오르카다. 오늘 기분이 어떻지?

267 이름 없음 (ugW2HBlVxU)

2022-01-15 (파란날) 23:00:17

>>266

(덜컥 날아오는 손찌검에 실험체의 고개가 크게 흔들린다. 고개가 돌려진 채 잠시 당신을 노려보던 실험체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어낸다.) 내 기분 따위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힘 없이 너덜대며 웃는다.) 혀 깨물고 뒤지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정도. 됐냐? (거칠게 비아냥댄다. 허나 심한 고문으로 기력이 부족한 듯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르카고 나발이고. 시X. 전에 있던 놈은 내 팔 조져놓고 어디로 간거야?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실험체. 아마 전임 연구원에 대한 욕설인 듯 하다.)

268 이름 없음 (69X.VZZWHU)

2022-01-15 (파란날) 23:08:35

>>267
(침을 뱉는 모습에도 무심히 바라본다. 기분을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질문임을 잘 알고있지 않냐는 듯이.) 어차피 되살아날텐데 뭐하러.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일과에 집중해. (당신의 앞에 놓여있는 흰 의자 위에 앉아 차트를 몇 장 넘기며 안의 내용을 훝어본다.) 새뮤얼은. (말이 잠시 끊긴다. 귓가에 꽂힌 무선 이어폰에서 상부의 명령을 듣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작별 인사를 남기진 않았더군. 무슨 작품을 남겼는 지 볼까. 왼팔을 내밀어.

269 이름 없음 (4feLUdCJ9I)

2022-01-15 (파란날) 23:45:12

>>268

(당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주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군. 그래, 영원히 죽지 않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냈으니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도 된 듯 하겠지. (실험체가 비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가만히 당신의 표정을 살피던 실험체가 고개를 까딱인다.) 새뮤얼, 그 인간이 도망치기라도 했나봐? 오, 아니면 내 평생의 바람대로 나가 뒈져준걸까? (묘하게 두 눈에 생기가 돈다.) 그래, 내가 항상 말해줬지. (별안간 목을 가다듬는 실험체.) " 새뮤얼. 네가 이 세상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뿐이야! "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목소리와 말투. 낄낄대며 웃고 있다. 전임 연구원을 심히 저주한 듯 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지, 진실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저 제 상상 속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새뮤얼을 떠올리는 데 열중하는 실험체.) …뭐, 왼팔? (갑작스레 예민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실험체.) 네 전임 연구원이 아작을 내버린 내 왼팔 말이지. 그래. (당신의 명령에 불복할 생각은 없는 듯, 적의에 찬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순순히 팔을 걷어 보여준다. 학습된 복종인 듯 하다.)

270 이름 없음 (VzQ.FnvRt.)

2022-01-16 (내일 월요일) 22:53:05

>>269
듣다 보니 이상한걸.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이지? 그건 아마도. (잠시 침묵. 그리곤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헛소리 할 정신력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허수아비라 생각할 줄도 알고. (생기가 도는 눈빛과 연극조의 말투는 무시한 채, 차트 속에 가려져있던 작은 주사기를 꺼내서 당신의 왼손목의 혈관에 주사한다. 그리고 말끔해보이는 당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이리저리 살펴본다.)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연구 결과는 충분히 나왔으니, 이제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말야. 그래서 너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지? (희망을 주고, 부수는 행위는 몇 번이나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평탄한 어조의 목소리다.)

271 이름 없음 (jMjYzBrXus)

2022-01-16 (내일 월요일) 23:44:47

>>270

잊었나? 네놈들이 자르고 붙이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기 전까진 나도 인간이었다는 걸. 내 태생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신이 내려준 운명은 저주 받은 불사의 시쳇덩이가 아니라— (점점 격양되는 어조.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다 이내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만다. 그리곤 한참이나 침묵하며 무표정히 앉아있는 실험체.) 또 뭘 꽂아넣는거야. 지긋지긋해.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로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반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 지금 장난하냐? (실험체의 눈빛이 떨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하나 효과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나를,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지금 자유라는 말이 담겨?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린다.) 니들 속이야 뻔하지. 또 이딴 말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거. 뻔한 수법이지. (중얼이듯 말하는 실험체. 허나 동요된 것이 뻔히 보인다. 잠깐의 침묵 속,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불안한 낌새로 아랫입술을 잘근이던 실험체가 입을 연다.) 이 연구소에 불부터 질러버릴테야.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리곤 고향에 가야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인다.)

272 이름 없음 (0K5a8oHMMs)

2022-01-17 (모두 수고..) 00:28:57

>>271
그럼 우리가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하기라도 했단건가? 그럴리가, 우린 한낱 인간이야. 너와 같은 인간.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지금 이 상황, 대화조차 운명이었다고 말야. 그럼 이 운명 끝에 있는 것은 뭘까? (뭘 꽂아넣었냐는 질문은 무시한 채, 주사기 끝은 탁탁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의 감정이 쉴 새 없이 변해갈 때에도, 전임 연구원과는 다르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분노 하나하나를 실감하면서도, 안경알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연구소를 불지르는 정도는 새발의 피야. 포워드 코퍼레이션은 도시 전체를 장악 중이니까. 넌 또다시 금새 잡혀오겠지. (손목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 뒤이은 말에 피식 웃는다.) 네 말대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게 특기라고 하자. 왜 네 고향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윗분들에게는, 아주 재밌는 소재거리일텐데. (손목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1분 남았어. 꿈 이야기 좀 더 해봐.

273 이름 없음 (O0u4EXpToU)

2022-01-17 (모두 수고..) 23:38:19

>>272

입은 더럽게도 잘 놀리는구나. (쯧, 혀를 차내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오, 분명한 거역이지. 너희들은 엄청난 천벌을 받을거야. 한낱 인간 주제에 새장을 탈출하고자 한 죄. 교만의 댓가… (주사기를 정리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실험체. 흡사 저주를 퍼붓는 것 같기도 하다. 제 몸에 주입된 약물이 무엇인지엔 관심 조차 없는 듯 하다. 실험체에겐 그닥 가치 없는 정보였던 걸 수도.) 뭐 어때? 난 세상의 악을 심판하겠다는, 그딴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냐. 그저 내 인생을 난도질한 너희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지. 포워드 코퍼레이션이고 나발이고 상관 없어. 난 니들이 고통스럽게 죽기만 하면 돼. (힘없이 웃으며 당신을 응시한다. 곧게 꽂혀드는 시선에 앙심이 가득하다.) …알게 뭐야. (미간을 구기는 실험체.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1분이 남았다.' 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는 듯 하다.) 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이 실험실에 들어오고, 아마도, 몇 달 후까지는 그 꿈을 가지고 있었을거야. 풀려나면 고향에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다시 입술을 잘근인다.) 내 꿈 얘기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숨을 내뱉는 실험체.) 내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나 썩어버렸어. 니들 덕분에. (당신의 안경알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실험체.) 그니까 엿이나 먹어. 그리고 고통스럽게 뒈지길. 죽어서도 망령으로 남아 저주해줄테니까. (킥킥대며 웃어대는 실험체. 허나 역시나 기력이 부족해보인다.)

274 이름 없음 (mnIEA8/auE)

2022-01-18 (FIRE!) 00:14:36

>>273
(당신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새삼 표정의 변화 하나 없다. 되려 그것은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주사를 놓고 난 다음에는 그저 하염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따금씩 시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선생이셨네. 꿈 치고는 포기가 빠른 편이란말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욕을 할 기운은 남아있고. (차트에 꽂혀있던 펜을 들어 당신을 향해 겨눈다.) 넌 안죽어. 대신 노선은 확실히 해줬으면 해. 고통스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꿈을 좇아 살아나갈건지, 그저 한톨의 먼지처럼 높으신 분들의 비웃음이나 사며 화장당할건지. (펜을 돌리며, 슬며시 웃는다.) 뭘 선택하든 운명은 하나 뿐이지만 말야. 1분 지났어. (순간, 온몸의 혈관이 끓어오르는 극한의 고통과 함께 당신의 눈과 귀, 입에서 피가 뿜어져나온다. 그리고 시야가 꺼매진다. 단지 한계를 넘어선 격통 때문이 아닌, 실험실 내부 전체적으로 불이 나간 듯 금새 붉은 비상전등이 켜진다. 사이렌이 울리고,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온다. 당신의 눈 앞에 있던 연구원은 어느새 연구복과 안경을 벗어던지고 검은 작전복 차림을 하고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네 혈관에 있는 추적 나노봇을 배제하는 과정이야.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니 잘 들어. 모든 보안 프로토콜은 약 45초간 정지 상태일거야. 내 뒷편의 문을 열고, 보안 게이트 3개와 스무명 남짓의 무장병력을 뚫어내야해. 우리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다는걸 보여줘. 선생. (당신의 뒷편으로 돌아가 수갑에 권총을 발포해 당신의 팔을 자유롭게 해준다.) 정문으로 나오면 데리러 갈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천장 구석에 붙어있는 환풍구에 뛰어들어가기 직전, 당신을 돌아본다.) 선생 고향, 데려다주지. 살아서 나오면.

275 이름 없음 (4UWr6cnJc2)

2022-01-18 (FIRE!) 00:54:40

>>274

그래, 어려서부터 물에 빠져도 주둥아리는 동동 뜨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나불거리는 것 밖에 없기도 하고 말야. (무표정한 당신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댄다.)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구나. (당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는 실험체. 허나 곧 극심한 고통에 몸을 크게 덜썩대기 시작한다. 단말마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죄여오는 고통. 실험체가 크게 몸부림 쳤지만, 단단히 구속된 탓에 오히려 묶인 신체 부위의 피부만 긁히고 파일 뿐이었다.) …뭐야? 너, 연구원이 아니었구나? 이건 또 무슨… (아직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뚝뚝 끊긴다. 호흡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숨소리가 터질듯 위태롭다.) …시X, 그냥 연구원의 장난감으로 뒈지는 게 편할 뻔했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대다 총소리에 크게 몸을 움찔이는 실험체. 저도 모르게 놀라 두 팔을 움찔이자, 자유롭게 허공을 휘젓는 감각이 낯설게 몰려든다. 멍하게 제 두 손과 발을 바라보던 실험체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만나면, 다 설명해야할 거야. 왜 나를 구해준건지, 니들은 또 뭔지! (혼비백산한 상황. 사이렌 사이로 실험체가 크게 소리쳤다.) 젠장, 젠장, 젠장. 45초는 너무 짧잖아... (약간 패닉한 듯 제 머리칼을 쥐뜯는 실험체. 그러나 곧 결심한 듯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당신을 지나쳐 뛰어든다.) 뭘 믿고 투자를 한건진 모르겠지만, 대박 한 번 보여주지. 난 고향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승부사였거든. (당신이 환풍구에 들어가기 직전, 실험체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실험실 문고리를 쥐었다. 고통에 의한 발작으로 너덜너덜해진 피부가죽이 눈에 띈다.) 에이 시X, 모르겠다. 그쪽이나 뒤지지 말아. (시끄러운 사이렌 아래, 실험체가 문을 열어제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새하얀 실험실을 탈출하는 경이로운 순간. 제대로 기능한 지 오래되어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실험체는 자유를 향하며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276 이름 없음 (Z/SMrPmkGg)

2022-01-26 (水) 21:15:21

ㅡ왕국이 위기에 처할 때 이세계에서 온 용사가 어둠을 가르고 세계를 구하리라.


아무도 믿지 않고 그저 옛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전설은 사실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 앞에서 왕국은 물론이며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예언을 떠올린 현자는 대대로 왕국에 전해지는 주술을 사용했고 이세계에서 온 존재를 왕국에 소환했다. 그 후 수많은 이들이 있었고 마침내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은 소멸했고 세계에 평화가 돌아왔다.

왕국은 물론이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평화가 되찾아온 것을 기념해서 긴 축제를 열었고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공포와 절망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전 세계에 가득 퍼졌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다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 끝났잖아. 그런데 왜 우릴 돌려보내지 않는거야?"

이세계에서 온 존재 중 하나인 소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벌써 소환되고 2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17살의 나이에 이곳에 온 소년은 이젠 19살이 되어 성인을 앞두고 있었다. 2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열심히 여행을 하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존재와 목숨 걸고 싸워서 세계를 구했건만 막상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마치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슬그머니 회피하는 왕국 사람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괜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년에게는 딱히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소환 마법으로 소환된 이들은 모두 부모가 없는, 어떻게 보면 현 세계에서 사라져도 크게 영향이 없을 이들이었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런 이들로 선발되는 마법이라고 설명을 듣긴 했으나 그럼에도 사내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작게 중얼거리며 소년은 왕국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있었으나 아직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계속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소년은 눈을 감았다.

/이세계에 소환되었고 세계를 구했으나 다시 원래 세계로 가지 못하고 이세계에 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 용사 일행 중 한명이라는 설정이야.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혹은 이 소년처럼 똑같이 소환된 누군가여도 상관없어. 너무 뜬금없는 전개만 아니라면 어떻게 이어줘도 괜찮아! 맥커터는 사절이야.

277 이름 없음 (u89/AzCMkk)

2022-01-27 (거의 끝나감) 03:11:50

>>276

"어디 가셨지? 얼른 이쪽으로 가 봐! 오늘은 정말 늦으시면 안 돼."

소녀는 보드라운 두 손으로 둥근 입을 꼬옥 틀어 막고 미로 같은 도서관 책장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종들의 발걸음이 쿵쿵 거리는 요란한 울림에서, 토끼같이 작은 울림으로 멀어졌을 때. 그제서야 소녀는 달띤 숨을 작달만하게 헉, 토해내었다. 그저 조금 뛰었을 뿐인데. 소녀는 열이 오른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작게 몰아내쉬며 진정시켰다. 휴--. 약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몇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야. 도서관이라는 미로 속, 제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소녀는 말간 웃음꽃을 피운다. 신나라! 하지만 이곳에서도 감시중인 관리인이 존재하니 소리는 내면 안돼. 소녀는 한껏 들뜬 얼굴로 히죽 웃으며 까치발로 살금살금 관리인의 눈을 피해 옷자락을 살랑거렸다.

이 칸은 이미 다 읽었고, 여기는 시종들이 잔뜩 쌓아주던 지루한 책들이다. 이쪽도 모두 정독했고.. 한 손엔 보석이 박힌 구두도 쥐어들고 프릴삭스만 신은 채 살금살금 제가 좋아하는 구간으로 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는 쉽게 다가갈 수 없게 저 안쪽, 저 안---쪽 구석 깊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어린아이가 아닌 곧 성인이 가까워져 가는 이 소녀에겐 크나큰 일도 아니지! 그래도 아직 2년은 남았던가? 파파랑 마마는 성장기인 소녀가 성장은 그대론데 해만 가는 게 골치인 듯 했으나 소녀는 그 재수없는 금발 머저리랑은 죽어도 혼약하고 싶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높은 책들을 읽고 싶다면 낡은 사다리 위로 가야하는 게 조금 무섭지만. 그리고 늘어나는 약들이랑... ...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구석에 위치한 코너로 거의 다다랐을 때. 잡념에 빠져 손에 턱을 괴고 걷던 소녀가 코너를 돌자, 좁아졌던 시야를 갑작스레 꽉 채운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소리없이 허둥거렸다. 간신히 구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품에 안으니 다행히 상대는 눈을 감아 소녀의 등장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돌리던 소녀는 바닥에 구두를 가지런히 놔두고 경계의 눈초리로 소년을 빤히 관찰했다. 아무리보아도 제 또래 쯤으로 보이는 이목구비에, 근래 들어 자주 보이던 차림세. 그리고 무척 가느다란.. 속눈썹. 음. 이 속눈썹 본적 있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소녀의 입꼬리는 조금 호선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소녀는 소년이 눈을 뜨길 얌전히 기다렸으나. 잠시 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앉아있는 소년의 맞은편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소년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소년이 눈을 뜬다면 어느새 호기심으로 잔뜩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 사이 거리에 깜짝 놀라려나. 그렇다면 소녀는 눈을 활짝 휘어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터다.
소녀는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호위 기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여러차 말했지만 무참히 묵살 당하고 뒤를 좇으며 소녀를 지키던 그 소년을.

"돌아가요? 어딜?"

제대로 못 들었어. 소녀는 한껏 낮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상냥히 물으며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왕국의 공주인 소녀가 대대로 물려받는 마력으로 파멸의 봉인을 위해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설정!
아니면 용사가 모험을 다닐 땐 제외하고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주었다는 설정! 정도로 썼는데..
마음에 들 지 모르겠네 🥺..

278 이름 없음 (ZidW.fFtDA)

2022-01-27 (거의 끝나감) 19:28:28

>>277

잠시 고뇌하던 찰나 인기척이 정말로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여긴 도서관이니 사람이 오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허나 그 인기척이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기에 소년은 의문을 가지고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낯익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순간, 소녀가 쉿 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소년은 얼떨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왕국의 공주인 그녀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이다 들려온 물음에 대답했다.

"그거야 원래 살던 세계죠. 알다시피 저는 이 세계 출신이 아니니까요."

함께 세계를 구하는 여정을 떠난 일행인만큼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턱이 없었기에 소년은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년이 들고 있는 책은 이동 마법에 대한 책이었으니 그 책을 보면 더더욱 상황을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긴 하나 일단 공주인만큼 소년은 나름대로의 예를 갖춰 이야기했다. 왕국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바로 반말을 한 시절과 비교하면 크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물론 제가 없어져도 제가 살던 세계에는 크게 영향이 끼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요."

결론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눈을 감고 원래 살던 세계를 가만히 떠올리던 그는 한숨을 약하게 내쉬다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주시하며 이번엔 자신 쪽에서 물었다.

"그러는 공주님은 여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찾는 자료라도 있으신가요? 이곳의 자료는 잘 모르지만 찾는 것이 있으면 같이 찾아볼게요. 김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면 좋기도 하고요."

그래도 왕국에서 관리하고 있는 도서관이니 뭔가 단서는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소년은 밝은 표정을 보였다. 반드시 자료를 찾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일단 전자를 가장 먼저 생각한 것 같아서 그 설정의 여캐라고 생각하고 이어봤어! 나는 막 갑자기 뜬금없는 느낌..그러니까 소년이 알고 보니 망상에 빠져있는 환자였다. 같은 느낌의 맥커터만 아니면 얼마든지 오케이야!

279 이름 없음 (81.U5YbV3g)

2022-02-02 (水) 00:23:07

>>277이 더 이상 잇지 않는 것 같네. 음. 없을 것 같지만 혹시나 >>276에 새로 잇고 싶은 이가 있으면 얼마든지 이어도 괜찮아!

280 이름 없음 (ek/Xmpeqlw)

2022-02-09 (水) 11:09:37

야 00:49
너가 준 옷 내일 돌려줄게 00:49
그리고 오늘 심한 말 해서 미안했다 00:52
친구들이랑 술 적당히 마시고 조심히 들어와 00:53

281 이름 없음 (k7GVMxBf2.)

2022-02-14 (모두 수고..) 00:04:21

남자는 신을 믿지 않았다. 모든 어른이 입에 올려 간절히 부르짖는, 신—그 짧은 단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안쓰러운 마음들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사실 남자는 거짓으로 손을 모아쥐곤 존재하지 않는 그 존재를 남몰래 비웃었다. 그 어린 눈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가능하리라 믿는 일들을 이루어달라 빌고 또 비는 그 모습들이. 죽음이 선명한 인간들 두고서 동정심을 팔아 실체 모를 누군가에게 바짝 엎드리는 모습이. —신은 없어. 그러니 그렇게 기도해봐야 그 누구도 듣지 않을거야. 병들어 죽어가는 여자의 옆을 지키던 남자의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하던 어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샤오첸, 너는 아마 지옥에 갈테다.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했다.

사후 지옥에 떨어지길 간곡하며 죄악을 저지르는 악취미는 없다. 그렇다고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간식 삼는 고약한 성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그런 거창한 명분 따위는 없었다.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천재 음악가들이 미친듯이 악보를 써내려가며 손가락이 부서질 듯 건반을 내치는 것처럼. 운명이 내린 숭고한 마음을 하사받아 온 세상의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핀 세기의 성인들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 한 순간의 발걸음으로 트럭에 치여 생명이 식어버린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고 숙명이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순리였다. 도시에 혼란을 내지르고 핏물을 뒤집어쓰는— 그리고 언젠가 선의 발길에 짓밟혀 목숨줄이 끊기고 말—

그것이 그가 생각한 자신의 운명이었다.

" 저번에도 말했지. 총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고. "

검붉은 피냄새가 났다. 한 번 스며들어 쉽사리 빠지지 않을 듯한 죄악의 냄새였다. 낙인처럼 뒤따라 자취를 남길 듯한 그 냄새가, 당신의 머릿 속을 아찔하게 주무른다. 남자는 그런 당신을 물그럼 바라보았다. 진득한 핏물이 묻은 둔기를 거칠게 바닥으로 내던지며, 남자가 천천히 당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잔뜩 상처가 난 구두와, 구겨진 정장 바지, 말려 올라간 소매와, 핏물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셔츠. 어딘가 피곤한 기색의 남자가 나직히 중얼이며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옅은 핏물은 머리칼과 엉켜 굳어버리고야 만다.

남자가 당신의 손을 덮어쥐었다. 결코 거친 행동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찌 느꼈을지 모르겠다만. 당신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갠 남자가 천천히, 방아쇠에 올려진 손가락을 느릿히 밀고 힘을 주며 손바닥을 긴장 시켰다. 그리곤 상처난 왼손으로 총을 받쳐,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 머리를, 조준해야지. "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꼿꼿이 당신의 눈을 마주하며. 한 번도 발포된 적 없는 차가운 총구가 남자의 이마에 닿았다. 남자가 왼손을 조금 움직여 방아쇠에 닿은 당신의 손가락 위로 제 엄지를 포갰다. 금방이라도 힘을 주어 방아쇠를 눌러버릴 듯, 그의 손에는 가볍게 힘이 들어가있다. 시커먼 눈빛이 당신을 주시한다. 방아쇠가 눌려 목숨이 터져버릴 그 순간에도 당신을 바라볼 듯 그 눈빛이 형형하다.

" 아직도 어려운가? "

남자의 목소리는 항상 낮고도 조용했다. 그리고 높낮이가 없이 단조로웠다. 때문에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항상 자신의 의도를 꽁꽁 숨겨 내주지 않는 인간이었다. 마치 선글라스를 낀 인간의 눈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말이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음은 알았지만, 도통 그것이 내 마음의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느릿히 시선을 깔아 당신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목선을, 그리고 다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왼손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포개어 쥔다. 살며시 힘을 주어 총구를 떼내었다— 남자는 작게 차가운 금속과 인간의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느릿히 입술을 떼낸다.

" 아직도. 어려운가? "

남자가, 나직히 물었다.

#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 X~

282 이름 없음 (gPu1RYdilo)

2022-02-15 (FIRE!) 23:33:04

>>281 다시 한 번, 원수의 앞에 섰다. 그토록 굳게 다짐하고 수도 없이 연습했음에도 그 머리통을 꿰뚫기 위해 총구를 겨눈 순간, 덜컥 겁이 나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몸이 굳어버렸던 첫 대면이 떠올랐다. 그 날도,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서 스승이라도 되는 양 훈수를 뒀었다. 원수가 더러운 손을 뻗어 내 손을 더듬는다. 벌레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듯 불쾌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 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복수라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몇번이고 되뇌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두려웠다. 이깟 쇳덩이 때문에 한 순간 명을 달리해버린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해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느닷없이 상체를 숙이더니, 총을 쥔 내 손을 자기 머리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총구를 이마에 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뜬금없고, 또 멍청한 행동에 숨통까지 옥죄어오던 긴장이 탁 풀렸다. 남자가 무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으나, 그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원수에게 붙들린 손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한껏 민감해져있던 신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비록 상대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라 해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니 그 어느때보다도 머리가 맑아졌고, 터질 듯하던 심장의 고동도 진정되었다. 총구는 남자의 이마로부터 멀어졌으나. 아주 가까웠다. 그런 상태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어려운가. 대답 대신, 총을 거머쥔 손에 힘을 주고, 정확하게 남자의 이마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과녁을 상대로 연습했을 때보다도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놓았다. 그제서야,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쉽네."

나의 목소리는 소음기를 장착했음에도 모든 청각을 마비시키는 듯한 총성에 묻히고 말았고, 이런 멍청한 놈 때문에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그렇게 애를 먹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드디어 해냈다는 고양감이 모든 복잡한 감정을 압도했다.

283 이름 없음 (F6HFYmlXy6)

2022-02-16 (水) 00:03:29

>>282
# 어 음... 죽여버렸네.... 이걸 어떻게 이어야하지... 😂

284 이름 없음 (tv0ppC.wk.)

2022-02-16 (水) 00:47:41

>>283
혹시 >>281 본인일까...? 위 레스와 더 잇지 않는다면, 내가 >>281에 이어봐도 괜찮을까? 지나가다 보게 되었는데 상황이 취향이라! 곤란하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285 이름 없음 (/6PEJkvvt2)

2022-02-16 (水) 00:55:41

>>284
응 >>281 맞아! 불사신 설정이라도 넣어서 이어야하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282가 다시 살아나는 전개를 원할 거 같진 않고...😂 >>282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너레더가 원한다면 >>281에 이어줘도 괜찮아! 나야 고마운걸!

>>282도 분위기 있게 이어줬지만 아무래도 내 캐릭터를 확정형으로 죽여버려서...😅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더 이어갈 방법이 없을 거 같아ㅠ 이미 죽이고 후련해하는 결말로 써줘서 내가 다시 살린다 한들 >>282한테는 맥빠지는 레스일 거 같기도 하고... 미안해!ㅠㅠ

286 이름 없음 (mrbUIH6QXQ)

2022-02-16 (水) 00:57:56

>>285 허락해줘서 고마워! 오늘~내일 중으로 이어서 써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287 이름 없음 (l6cQ6SfdcU)

2022-02-28 (모두 수고..) 22:25:23

저, 저는 혼자 살 수 없어요. 부디, 저를 내치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창조주를 바라보며 매달린다. 인위적인 생명체, 크리쳐, 호문클루스,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 생명체의 시선에는 오로지 당신 뿐이다.)

288 이름 없음 (0/fgptDqtk)

2022-03-12 (파란날) 00:26:46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여자는 느릿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약간의 사과맛, 그리고 매캐하게 몰려드는 텁텁함. 화한 연기가 목구멍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턱 막힌 속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눈길 위로 잿가루가 떨어지고, 이내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그 위로 지저분한 발자국을 남긴다.

" 어, 왔어? "

여자가 양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익숙한, 때문에 지루하리라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형식적인 인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보다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지. 여자가 눈 쌓인 지붕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처음 만나던 그 날엔 똑같이 하얀 함박눈이 내렸고 바람이 뼛 속에 스밀듯 차가웠다. 옛날의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던 여자는 오늘보단 옷을 단단히 껴입었고 담배를 무는 대신 새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남자를 기다렸다.

" 좀 늦었네. "

둘은 항상 그러했듯 동네의 작은 카페를 향해 걸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과 같았다. 그들은 늘 그랬듯 카페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할 것이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대로 가볍게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조금 질색하며 노래방을 찾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을 맞이하듯 지겨움을 참고 여자는 걷는다. 어쩌면 남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자는 어느순간부터 남자에게 설렘을 느낄 수 없었고 사랑이라 믿어왔던 감정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언젠가 인생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이라 믿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너같은 사람은 없을거야. 여자는 문득 어느날 밤 남자가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다. 아마 남자에게 그녀와 같은 여자는 다신 없을 것이다. 그 날의 그녀와 같은 여자는 말이다. 지금의 여자는 그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순간부터 여자는 남자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자 앞에선 잘 물지 않던 담배를 피며 남자를 기다렸다. 어찌되었던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더이상 남자가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낭비할 수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라는 뜻이었지만, 아마도 남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이란 단어에 본질적인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사랑하긴 했다. 다만 불 같이 타오르던 그것이 조금 식은, 혹은 시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밤마다 그가 떠오르긴 했으나 설레고 행복한 감정보다는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그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저 그와 내가 오래 사랑했으니, 조금 서로에게 편안해진 것일 거라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 사랑이 조금 더 불타길 염원하며 잠들었고 눈을 뜬 아침 휴대전화 액정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이름에 여자는 차갑게 식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여자는 점점 남자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저 어느순간부터 여자의 주변에 안개가 끼어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자신이 자연스레 상상갈 즈음 여자는 멀리서 나타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 몇 달 뒤면 우리 5주년이더라. "

여자가 무심히 말했다. 아직 여자의 휴대전화 한 켠을 차지하는 디데이 어플 위젯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을테지만. 여자가 속으로 말을 삼켜내며 살며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결코 기대를 거는 눈빛은 아니었다. 여자가 양주머니 속으로 더욱 손을 깊게 찔러넣으며 아주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단단히 엉킨 실을 곧장 잘라버리고 싶은데, 손잡이가 딱딱한 가위를 쥘 용기는 나질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대략 10cm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이제는 익숙하게 맞추어진 서로의 보폭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보폭은 달랐다.

" 오늘은 좀, 춥네. "

어릴 적의 여자는 추위를 많이 탔다. 때문에 여러겹 옷을 껴입고도 두툼한 목도리나 모자를 쓰곤 했다. 약 오 년의 세월이 흐르며 여자는 더이상 목도리는 매지 않아도 될 만큼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나, 남자는 매년 겨울마다 두툼한 목도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 때마다 여자는, 늘 그렇듯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목도리를 받았다. 여자가 허전한 목덜미를 더듬으며 말했다. 버티지 못할 추위는 아니었다.

# 권태기가 온 커플 느낌! 여자는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으나 직접 뱉을 용기는 아직 없는 상태. 너무 무맥락만 아니면 다 좋으니 편하게 이어줘.

289 이름 없음 (8ETXevd4WU)

2022-03-12 (파란날) 10:09:40

>>288

더이상 인생에서 보고싶지 않은 기후 중 하나였던 함박눈은, 로맨틱이란 단어를 뇌에서 슬슬 지워버리기 시작한 남자에게는 그저 기분나쁜 진눈깨비랑 별 다를 바 없었다.
가까워진 그녀 곁에서 언제 맡아도 익숙치 않은 담배 냄새가 나도 얼굴을 잠시 찡그릴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미안. 길이 좀 막혀서."

거짓말에 가깝다. 약속은 했으니 가겠다만 그에겐 슬슬 사랑하는, 아니 어쩌면 사랑했던 여자보단 아침의 잠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으니까.

왔냐는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에 슬슬 신물이 나는 그 카페로 가게 될 것 같다. 저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몇 번 바뀌었는지도 이제 알 것만 같은 남자는 오늘도 결국 여자를 데리고 카페 쪽으로 향했다. 너무도 당연하고 기계적으로.

별 다른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 것으로 여자가 기분나빠할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젠 그녀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한 것도 없었기에 묻지 않았다.
전날 밤에도, 아마 몇년 전의 그들이었다면 밤새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하고 감정을 확인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았고 알고싶은 마음도 많았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제 그렇지 않았다. 알아서 잘 살겠지. 그래, 그녀는 그럴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퍽 예쁜 편이었다. 그런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벅차, 남자는 해본적도 없는 일을 다양하게 도전해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오래도 사귀었네."

5주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애인이 되기로 선언하고서부터 5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5년. 강산이 둘다 변하진 않아도 어느 한쪽 정도는 변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얄팍한 사람의 감정과 심리가 변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 5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잊고 있었다. 디데이 위젯도 예저녁에 지워버렸으니까.

"좀 따뜻하게 입고 오지 그랬냐."

마치 동성 친구에게 막 대하듯 나오는 어투는 5년 전의 남자에게선 상상도 못할 언동이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춥다고 하면 금세 호들갑을 떨고, 손재주 하나 없던 남자가 뜨개질까지 하며 손수 짠 목도리를 자랑스레 그녀의 목에 걸어주던 지난날들은 이제 남자에게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뜨거운 도파민의 작용은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듯 했다.

남자는 외투 주머니 안에 든 뭔가를 꽉 붙잡았다. 겉으로는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었고, 스스로에게 이미 사랑따위 다 식지 않았냐며 다그쳤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잿더미 속에 빨갛게 빛나는 잔불처럼 무엇인가가 남았는지, 남자는 그것을 놓지 못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참 간사하고 한심했다. 그런 남자에게, 5년 가까운 세월간 함께한 여자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과분할 정도로 완벽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잇는다... 말투가 좀 심하게 차가운건 아닌가 걱정도 되네.

290 이름 없음 (VUMz4HXROY)

2022-03-12 (파란날) 23:03:34

아니, 세상에 죽일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어째 하루가 멀다하시고 송장들을 가져오시는 것 같네요. 워커홀릭이신가보다. 아, 허브티 마실래요? (환히 웃으며 화분들을 정리하느라 흙이 묻은 목장갑을 벗는다. 찻주전자를 찾으러 꽃집 안쪽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시체는 거기 두세요.

291 이름 없음 (ozJjSz54hU)

2022-03-12 (파란날) 23:38:48

>>290
요새 미팅이 좀 잦네……. (남자가 캡모자를 벗어 꽃화분이 여러 개 놓인 트롤리에 올렸다. 유리온실에 얼굴을 비춰 보며 눈가에 튄 피를 닦아낸다.) 어, 고마워. 따뜻한 걸로. (찻주전자를 가져오는 그를 바라보며 날서있던 눈빛을 가라앉힌다.) 오늘은 여기 그냥 둬? 영업 끝났어?

292 이름 없음 (BzosojpEu.)

2022-03-12 (파란날) 23:44:46

>>289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이런데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잖아, 또는 너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아? 울컥이며 올라오는 말들은 많았고 머릿 속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여자는 늘 그랬듯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과거에는 올라오는 생각들을 전부 뱉어내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혹은 거짓이 아니냐 의심하기도 했다. 상대의 말이 거짓일 것이라 단정한 채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상대의 잘못에 대한 분노보다는, 이만큼이나 서운하니 나를 봐달라는 신호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상대에게는 그저 귀찮고 지긋지긋한 언쟁으로 보일테지만. 조금만 더 이렇게 해줬더라면— 그 행복한 상상 속에서라면 둘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랑했겠지. 현실은 결코 꽃밭이 아니었다.

카페로 향하는 길의 정적이 무거웠다. 오늘 아침은 어땠는지, 오는 길에 별 탈은 없었는지. 먼저 꺼내기도 혹은 묻기도 하던 그 질문들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남자도 그랬겠지. 약간 느린 걸음으로 침묵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채 말하지 못한 질문들과 궁금증이 남자의 발자국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자는 천천히 남자의 발자국에 맞춰 그것을 밟아내리며, 꺾어진 기대를 시든 꽃 송이처럼 쥘 뿐이다. 남자는 오늘도 여자에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 그러게. 어릴 때부터 사귀었으니까. "

그 시절의 사랑을 한순간의 불장난이라 치부하진 않는다.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느껴진 사랑이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종종 상대를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고, 잠이 오지 않는 날 지나간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짚으며 웃고, 그러다 사랑임을 깨닫고. 평범하나 특별한 추억들이 결코 가벼운 순간의 감정일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의 무서운 점은 그리 특별하고 애틋한 감정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점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외향이 깎이고 닳을 뿐 그 본질은 영원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깎이고, 닳다가,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 것이다. 여자가 작게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첫만남의 강렬한 기억 따위 남자에게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 …그러게. 깜빡했네. "

여자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무언이 잠깐 지나간 늦은 대답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선물한 목도리가 어느순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는 단 한 번도, 그가 선물한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그 뿐이었다. 변화를 알아달라는 작은 외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는 꺼져가는 잔불을 바라볼 수 있었으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장작을 더 가져오지도, 불씨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제 손이 더러워지기 전에 먼저 불길이 꺼지기를. 그리고 무시히 그 위를 새하얀 눈더미로 덮을 수 있기를. 잿가루가 날려 애써 덮은 눈길 위를 더럽히지 않길 바랬으나 그것은 여자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새하얗게 잊을 수 있길 기도할 수 밖에.

" 너 그 날 생각 나? "

여자가 걸음을 조금 높여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우리 처음 학교에서, 마니또 하는데 너가 내 사물함에 사탕 넣다가 걸렸잖아. 근데 또 하필 화이트데이라 애들이 이상하게 몰아가고. 맞아, 동호였지. 너 친구. 그 애가 그렇게 바람을 잡는 바람에. "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추억,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는데. 여자가 넌지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에게는 잊기 아까울 애틋한 추억이었기에.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 다시 한 번 되새기고파 답지 않게 수다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 아냐 이런 분위기를 원했어!! 이어줘서 고마워!! 나이대를 어떻게 잡을까 하다가 대충 20대 초반에 사귀어서 20대 중후반이 된 나이라고 생각하고 적었는데 괜찮지...?🥺 친구로 지내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케이스겠네.

293 이름 없음 (DAUNkxhAVA)

2022-03-13 (내일 월요일) 07:34:21

>>292

서로는 지쳐갔다. 열렬한 사랑에 완전히 불타버려, 이제는 한 팔을 들어올리면 잿가루가 되어 무너질 상태가 되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녀는 서운함조차 이제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인물에게 '더 일찍 못 봐서 너무 서운해' 하진 않을테니까.

오랫동안 사귄 연인들은 어느새 두 가지로 나뉜다. 정말로 가족처럼, 부부가 그러하듯 서로가 있는 것이 너무도 편하여 그런 하나가 된 사랑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그 사랑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천천히 멀어져가거나. 우리는 후자에 가까울것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남자가 직접 짠 목도리를 하고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적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직 서로에게 남아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나 지금에 와선 한없이 평범하게만 받아들여진다. 아마 이젠 자신이 선물해준 물건마저도 거추장스럽고 부끄럽겠지.
내가 짜준 넝마같은 목도리에서 콩깍지가 벗겨질 때도 되었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날?"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식 없이, 자연스레 남자는 다가오는 여자의 몸동작에 맞춰 자신도 슬쩍 다가서서 눈을 맞췄다. 이제는 이 버릇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남자지만, 그 오랫동안 몸에 새겨진 버릇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때... 맞아. 동호였어. 난리도 아니었지... 한동안은 우리 둘이 말만 섞어도 애들이 막 사귄다느니 어쩌느니 그랬고. 그 이후로 오히려 서로 말도 많이 섞고 그랬었지. 마니또가 효과가 있긴 있던거 같더라."

덩달아 나도 말이 많아졌다. 옛날 생각은 사람의 입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나보다.
그때. 서로에 대한 존재에 관심도 딱히 없었을 때였다. 마니또인지 뭔지 잘 모르겠고 화이트데이도 의식하지 않던 그 때. 남자는 그냥 지나가다 들은 말로 '여자가 이런이런 사탕을 좋아한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과 선택은 남들의 눈에, 특히 날 놀리는걸 좋아하던 그 친구 눈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얽히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그 사건은 어쩌면 자기 실현적 예언처럼 움직였었다.

"아, 그래. 나중에 동호 그 놈, 술마시다가 나한테 그러더라. 사실 걔가 널 좋아했었다고. 그 녀석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렇게까지 말의 무게가 있진 않았지만. 그때도 여친이 있던 놈이 무슨... 쯧."

그리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지금의 나처럼 식어버린 사랑을 질질 끌어버리진 않았을거라고, 그리고 그걸로 여자를 더 괴롭히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했다.

무어라 계속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손이 여자의 손에 닿아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촉감을 의식한 남자는 슬그머니 다시 손을 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버릇. 둘의 사이는 버릇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이 버릇을 과연 씻어낼 수 있을까. 남자는 썩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나잇대도 딱 적당하고, 나도 대충 그 언저리로 생각했어. 그리고 친구에서 연인이라니 이거 참 풋풋... 했던 이야기구만(코쓱

294 이름 없음 (K0c2l3s96E)

2022-03-15 (FIRE!) 20:23:31

길고 긴 전쟁이 끝이 났고 세계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싫어하던 마족은 물론이요, 평화를 사랑하던 인간들도 모두가 두 팔 크게 벌려 만세를 외쳤고 대륙 전체에서 축제의 장이 열렸다. 목숨을 걸고 평화를 가져온 이들을 주변에선 영웅이라고 불렀으며 하나같이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저 평화롭게 마을에서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사내는 그 모습에 두 손을 휘저었으나 찬양하는 분위기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며칠이나 낮밤 할 거 없이 축제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술잔치가 열렸으며 하루하루 언제 죽을까 불안해서 살지 못했던 분위기는 이젠 너무나 평화로워 매일 밤 신나게 놀고 먹으며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웅이라고 불리던 이 중 가장 필두에 섰던 사내는 성의 복도를 정말 조용히 걷고 있었다. 주변 병사들에게 걸리지 않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나라의 왕이 마땅히 대접과 보상을 해야한다고 성으로 들어오게 한 지 어연 다섯 달. 몇 번이나 이제 충분하니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정치적 이유인지, 아니면 인재를 놓치기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이 정도 대접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는지 왕은 그 부탁을 허하지 않았다. 그저 이 성에서 앞으로 평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할 뿐, 수도를 떠나 원래 살던 고향으로 가는 것은 허하지 않았기에 결국 사내는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여기에 있으면 확실히 맛있는 것도 많고, 삶도 평화롭고 대우 자체도 상당히 좋긴 하지만...'

그야말로 왕족 수준은 아니어도 준 왕족 수준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 아마 동료들 중에선 이 삶을 택한 이도 있겠으나 애초에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였다. 역시 그때의 그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복도를 살금살금 걷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재빠르게 다른 방에 들어가고, 인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나와서 살금살금 걸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당연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당연히 그쪽에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세 달 전부터 조용히 만든 정원의 비밀통로를 통해 성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정원이 바로 코앞이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사내는 경비병들에게 걸리지 않고 정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원의 가장 가장자리 벽면의 벽돌을 빼내고 꾹 누르면 그 부분이 무너지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벽에만 도달하면 이제 이 성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그 희망을 가지며 사내는 정원을 살금살금 걸었다.

/탈출을 감행하는 영웅이라는 설정이야! 동료도 좋고 성 사람도 좋고, 탈출을 도와줘도 좋고 방해해도 괜찮아! 맥커터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295 이름 없음 (6eCObRcBnY)

2022-03-16 (水) 00:24:57

# >>294 과하게 집착하는 얀데레 왕녀로 이어도 괜찮을까? 물론 방해하는 쪽으로.

296 이름 없음 (4fD6BYm2io)

2022-03-16 (水) 00:29:55

>>295 물론 괜찮아!! 어느 쪽으로 이어줘도 크게 상관은 없으니 말이야!

297 이름 없음 (4fD6BYm2io)

2022-03-16 (水) 21:46:35

>>295 음. 일단 10시까지만 기다려보고 잇는 것이 없으면 다른 이가 이을 수 있도록 할게!

298 이름 없음 (cJwJghY3Yg)

2022-03-19 (파란날) 00:19:37

겨울내음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봄이 왔다. 오랫동안 맡아 체향같았던 병원내음도 사랑스럽게 만들던 그 사람이 잊히기도 전에 다시 봄이 온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더듬어 팔을 쓸어내렸다. 피부 위를 덮은 옷의 한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에 내려앉았다. 후. 숨 하나에 그리움 하나. 오래 전 타계한 시인은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을 세었으나 별이 저문 세상을 사는 여자는 숨결 하나에 추억과 그리움을 셌다.

머리를 가리는 니트 모자를 더욱 당겨 눌러쓰곤 품에 안은 흰국화 꽃을 세었다. 오늘도 주지 못했다는 이유가 내일도 볼 수 있는 이유가 되길 바랐다. 아직 차가 오기까지 한참 남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꽃다발을 껴안고 숨을 뱉었다. 희미한 꽃향기와 꽃잎이 숨결을 따라 코를 간질였다.

여자의 상념을 깨운건 전화소리였다. 전화벨이 울리는 걸 빤히 보기만 하다 화면은 배경화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화는 끈질기게 다시 울렸다. 갑작스러운 충동이 명치를 타고 올라왔다. 며칠째 무시하던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이유였다.

"여보세요."

쇳소리가 섞인 탁한 음색이 전자신호로 바뀌어 발신인에게 닿았다.

299 이름 없음 (0AwE7xzfj.)

2022-03-19 (파란날) 23:19:52

전쟁이 시작된지 사십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마족과 인간이 각기 자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명목도 명분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이유도 망각한 채 서로를 해할 뿐이다. 본래 열 명의 대마법사가 존재하던 제국에는 현재 단 한 명의 대마법사만이 남아 전장을 지키고 있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샤를로테 로즈. 대마법사로 임명되기 전부터 전쟁에 숱한 공을 쌓아올리던 천재 마법사. 지독한 전쟁 끝에 남은 수식어는 오직 그 뿐이었다.

" ...그러니 이제, 계획이 있으십니까? "

목소리가 들린 곳은 어두운 동굴이다. 그곳에 대마법사 샤를로테가 있었다. 밑둥이 조금 부서진 거대한 스탬프를 끌어안은 샤를로테에겐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저분한 옷가지와 크고 작은 상처들. 전투의 열세에 후퇴를 결정한지 십 분, 선두에 서있던 대마법사 샤를로테와 기사단장인 당신은 남은 전투인력들과 분산되어 외딴 산맥의 동굴로 숨어들게 되었다. 쫓아오는 마족 무리를 제압하고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샤를로테와 당신은 감탄스러울 실력으로 훌륭히 마족들을 무찔러주었다. 하지만 단 두 명의 전세는 금방 뒤집히고 말았으니 급히 도망치며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동굴인 것이었다. 아마 지금 밖은 대마법사와 기사단장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마족들이 어슬렁대고 있을테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그리고 그 동물 속에는 지쳐 기력이 떨어진 대마법사와 부상 당한 기사단장이 숨어있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뿐이다.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다소 까칠하다.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한 기사단장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테다. 그저 오늘 너무 많은 마법을 사용하였고, 마법사의 체력을 고려하지 못한 당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도망을 다니다보니 지쳤을 뿐이다. 샤를로테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동굴 내벽에 몸을 기대었다. 시커먼 먼지들이 들러붙을 게 뻔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다.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한다. 샤를로테의 머릿 속에는 오직 그 생각만이 절실했다.

"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가도 괜찮습니다. 괜찮은 수가 있다면 말해보십시오. "

섬뜩한 이야기를 눈 깜짝 하지 않고 내뱉는 샤를로테.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여태 제국에서 대마법사들의 이미지라 함은, 잘난 척 심하고 엄살 심한 샌님. 그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었다. 샤를로테는 그런 부류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으나...

" 아니면 여기서 명예롭게 죽는 게 나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괜찮은 주문들을 좀 외우고 있습니다. "

살아나갈 방법 따위 진작에 포기하고 만 것일까. 샤를로테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나지막히 말했다. 역시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동굴 밖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마족이 포위망을 가까히 좁혀온 것일까. 샤를로테의 경계가 예민해진다. 스탬프를 쥔 손이 잘게 떨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말은 담담하게 던졌으나, 아직은 죽는 게 무서운 모양이다.

# 대충 판타지 컨셉! 꼭 시리어스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성의 없이 이어주는 것만 아니면 뭐든 좋아~



300 이름 없음 (fLv9kYFIiI)

2022-03-20 (내일 월요일) 02:22:53

>>299

기사단장은 이번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간 수도 없이 많은 그러한 직감이 그의 신경 구석구석을 간지럽혔고, 다행스럽게도 여태 전부 빗나갔었다. 이번에도 부디 그 직감이 빗나가기를 단장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무가의 자제로써 전쟁이 한창때인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 제 이름을 쓸 수 있을 시절부터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졸업하여 성인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방의 기사로써 임관했고, 대부분의 초임 '기사'들이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것 대신 그는 몇 년이나 더 살아남았다.
그게 그가 기사단장이라는, 치열한 전쟁 탓에 공석일 때가 더 많은 자리에 앉은 이유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해서 촉망받는 기사단장은 인근의 하급 기사에게도 팔씨름으로 질 자신이 있었다. 그를 살아남게 만든 것은 직감, 눈치, 교활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선 결국 그게 힘보다 중요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범한 이들에 비하면 괴물같은 힘에는 다를 바 없었지만.

광택따위 내지 않은 갑옷에는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그게 몽땅 마족들의 피였음에 둘 모두 감사해도 될 것이다.
타는 듯한 목을 축이지도 못한 채 겨우 목구멍 너머에서 긁어내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내 취향의 이야기는 아닌데."

명망높고 높은 신분에 인간병기로 일컬어지던 기사란 직위는 어느새 장교나 동급의 이야기가 되었다. 더 심하면 부사관 수준으로 떨어졌고. 그런 이들 몇 명과 무기보다 농기구가 더 익숙한 민병들 대다수와 약간의 상비군들 정도를 이끌고 마족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희망이 없었다. 대부분의 기사단이 이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샤를로테의 존재였다.
장래가 촉망받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라. 그런 귀하신 분께서 굳이 이런 곳에 행차를 하셨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주 큰 의미였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이곳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 말이다.

건틀릿을 낀 손으로 샤를로테의 하얀 손을 감싸 잡는다. 두려움에서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랬다.

"대마법사께선 운이 좀 나쁜거 같군. 이것보다 더 거지같은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이번에는 그때보단 좀 덜 재밌는 광경이 될 테니까."

뭇 병사들이 그러듯,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약간의 허세를 섞어 내뱉는다. 하지만 온전히 허세인것만도 아니다.
그에겐 계책이 있다. 그게 지금까지 이 남자를 살아남게 만든 귀중한 자질이었다. 이 동굴의 이 구석으로 들어온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우선 기력을 좀 보충하는게 좋겠어. 그 동안 우리는 여기서 몸을 좀 숨기지. 아예 이쪽 가지의 입구에다 동굴 벽을 감쪽같이 만들 수 있으면 최선이겠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샤를로테에게 좀더 고생을 시켜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최소한 마족들이 현재 그들에게 혈안이 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301 이름 없음 (0CgRrViQVg)

2022-03-28 (모두 수고..) 23:58:58

미안해...내, 내가 그래서 공포 영화 보지 말자 했잖아... (불 꺼진 방, 티비엔 여전히 주인공이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엔 비명과 악력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진 리모컨이 싸늘하게 죽어있다. 민망함과 서러움,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린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당신의 팔을 잡고 있었을 테지만 일말의 이성을 잘 조절해 타겟을 바꾼 모양이다.)

302 이름 없음 (gf/hfo9QHI)

2022-03-29 (FIRE!) 00:00:20

자명종이 활기차게 울린다. 안녕, 자명종아! 그리고 따듯한 햇님아! 예쁜 우리 고양이 민트초코도, 어제도 오늘도 한 자리에 있어주는 선인장 제임스도!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신선한 공기도 좋지만, 음, 역시 아침공기엔 빠질수 없는게 있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번호를 몇개 누르고 전화를 건다. 귀여운 음악소리가 상큼하게 들려오고, 곧이어.

쾅!

순식간에 부숴지는 몇백개의 유리창 소리. 산산조각나며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들린다. 매캐한 화약냄새가 섞인, 아직은 조금 차가운 아침공기를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킨다. 아, 화약냄새 없는 아침공기를 상상할수 있을까? 아니, 나는 못해. 어느새 입가엔 예쁜 미소가 걸린다. 좋아, 오늘도 나는 최고로 예뻐.

" 좋은 아침이야!!! "

씩 웃으며 크게 소리친다. 아, 그러고보니 자기소개를 안했네. 내 이름은 벌룬, 더 해피 걸. 해피벌룬, 해피, 뭐가 됐든간에 네가 생각하는 최고로 예쁜 이름으로 불러줘. 그야 나는 이 도시의 빌런이니까.


사람들은 왜 그리도 슬픈 얼굴을 하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내고, 알수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할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건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늘은 앞으로 남은 날 중 내가 가장 어린 때잖아!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섭하지.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너무 귀여운 스미스 앤 웨슨 모델 500 권총(이름은 깜찍이), 사랑스러운 BOPE에서도 사용하는 세열 수류탄(이름은 반짝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제 가스. 한 모금만 마시면 모든 걱정도, 슬픔도, 불행도 잊어버릴수 있는, 해피 시리즈의 3번째 자신작 ' 핑크 다이아몬드 ' . 화창한 햇빛 아래, 오늘도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서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선물을 주기로 했다. 뭐, 개중에는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군가는 날 좋아하는 법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낙하산 가방을 메고 그대로 떨어진다. 빠른 속도감이 나를 덮쳐오고, 크게 웃고, 소리지르다가, 은행 건물이 보이자 반짝이를 몇개 안전장치 째로 뽑아 던진다. 우직, 하고 뽑은 뒤 슉, 펑! 그리고 생긴 구멍에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착지하며 깜찍이를 몇 발 쏴준다.

" 아헤, 모두 왜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오늘도 내가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바닥에 던지고, 나는 깜찍한 방독면을 착용한다. 음, 어찌 저렇게 행복해보이는 표정일까. 내가 준 선물을 좋아해주는걸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보이는걸. 폴짝거리며 뛰어서 그대로 은행의 금고까지 도착했다. 한 눈에 봐도 보안이 어마무시해보이지만, 반짝이 몇개면 다 해결 돼. 순식간에 그 철통같던 금고 문이 열리고, 안에 쌓인 수많은 돈다발을 본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이정도면 사람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어. 물론 나도 좀 써야지! 반짝이 몇개,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더 만들 정도의 재료들, 그리고 달콤하고 사랑스런 팬케이크, 파르페, 크레이프, 파운드 케이크... 물론 예쁜 옷도 빼 놓을 수 없겠지. 나머지는 광장에서 뿌리는거야. 다들 좋아해주겠지? 아아, 행복해. 그녀는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 어떻게 이어줘도 괜찮아~ 대환영!

303 이름 없음 (nywXcHkACY)

2022-03-29 (FIRE!) 00:39:48

>>302

자명종이 귀를 찢어놓을 기세로 울린다. 제발,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도 죽어. 시끄럽게 다투는 고양이들도...너흰 좀 가라. 귀를 꾹 막고서, 폐에서부터 끌어올린 고통에 찬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정말, 당연하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절망스럽게도, 일하기, 너무, 싫다. 밍기적밍기적. 액체화 된 수은 마냥 스르륵 몸을 침대 바깥으로 꺼내고나서는, 손가락을 일정 방향으로 휘두른다. 그 즉시, 몸이 일으켜지고 방의 불이 켜지며 온갖 손질도구가 주변에 날아든다. 거의 반쯤 수면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몸은 자연스레 화장실로 들어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몸치장을 시작한다.

“하아……쓰레기 요일. 쓰레기 출근.”

어느새 말끔히 투 버튼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아까 전 날백수 같은 모습과 완전 딴판이다. 다만, 심히 기분이 편찮아보이는 표정만큼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보온병에 커피가 담기고, TV에 전원을 켜 뉴스를 튼다. 흘러나오는 뉴스에 나오는 은행 지점 빌런 습격 뉴스를 지켜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정말 대단해. 경이로울 정도야. 월요일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가 넘치다니.”

그런 비아냥을 담은 중얼거림을 하자마자, 핫라인 전용 무전기가 울린다. 손가락을 까닥해 그것을 귓가에 가까이 가져와 연락을 받는다.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사회성 1%, 탄식 49%, 아무 생각 없음 50%에 가깝다. 아침 식사는 거른다. 체질이 안받아서. 싸우기 전에 뭔갈 먹으면 소화 안되거든. 싸워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단 히어로, 즉, 빌어먹을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은행. 안에 가스가 가득 차있어 억지로 답답한 방독면을 차고 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깔끔하게 부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깔끔한 구멍을 슥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이번 빌런도 분명 제정신 아닐걸. 이번달 월급을 걸어도 좋다.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초조해진다. 제정신 박힌 빌런이면 어쩌지? 여전히 걷는 것은 싫어하기에, 염동력으로 몸만 옮겨 둥둥 떠다닌다. 굳이 은행을 털었다면 이곳 말고 목적지는 없겠지. 독가스를 헤치고 나아가가며 중간중간 손가락질로 독가스를 마신 시민들을 건물 밖으로 내던진다. 배려가 부족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침내 금고 앞에 도달해, 그곳에서 돈을 챙기다 말고 빙글빙글 돌고있는 인영을 발견한다. 방독면이 개성적이네. 그리고 기묘한 행동을 일삼고있고. +2점. 조금 더 지켜보자 싶어 근처 부서진 기둥 위에 앉아 뻐근한 허리를 두드린다. 바닥 파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당신에게 들린 것 같아, 일부러 먼저 말을 꺼낸다.

“아, 괜찮아 괜찮아, 아가씨. 하던거 마저 해. 일단은 지금도 근무 시간인지라 뺄 수 있을 때 빼둬야하거든. 챙기던거 마저 다 챙기면 말해주고. 참고로 물어보는건데, 그 돈들 어디다 쓸 거야? 그리고 왜 하필 월요일일까?”

졸음과 피곤함에 묻힌 목소리로 물으며 등과 목을 뒤로 쭉 피며 스트레칭을 한다.

/ 이렇게 이어도 될까!?

304 이름 없음 (gv1841PaFw)

2022-03-29 (FIRE!) 00:44:19

>>301

야, 난 네가 공포 영화는 위험하다는 게 이런 '물리'적인 위험인줄은 몰랐지..힘이 세다는 건 알고있었다만... (싸늘하게 죽은 리모컨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다가 허탈함과 어이없음,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린다. 그래도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네 모습하며, 만약 네가 이성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조금 전까지 잡혀있던 팔이 저 리모컨 대신 박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뭐라고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리모컨 값은 네가 물어내라? (죽은 리모컨을 수습하면서 영화에서 잠깐 시선을 떼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도망쳐서 잘 숨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안심하는 순간 방금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직전, 네 눈을 가려주거나 널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305 이름 없음 (g5AVYOclX6)

2022-03-29 (FIRE!) 14:17:54

>>303

" 으에? "

그나저나, 돈을 어떻게 챙기지? 고민하던 그녀는 우선 주머니에 돈다발을 대충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보니 낙하산 가방이 있었지. 거기에 잔뜩 집어넣고,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가방들에도 집어넣어서 가면 되겠다. 그러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 휙 하고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던 그녀는 해맑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 안녕, 안녕! 내 이름은 해피, 네 이름은 뭐야? "

딱 봐도 피곤해보이는 목소리, 그리고 졸린 목소리네. 정말, 사람들은 왜 저리도 피곤해보이고, 또 졸려보일까? 주말이 다 지나간건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날이잖아! 새로운 태양, 새로운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도 살아있는 나. 아름답잖아? 그녀는 등과 목을 뒤로 쭉 피며 스트레칭하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 근무시간이면, 친구, 너는 히어로야? 이번엔 드디어 나를 칭찬해줄 사람인걸까? 정말이지, 전의 히어로들은 정말 무례했거든. 난 그냥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을 뿐인데, 다짜고짜 욕을 하지 않나, 때리려고 하질 않나...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기까지! 아, 너무 무서웠어. 다행스럽게도 이 깜찍이를 몇 번 쏴줬더니 도망칠수 있었지만. 아, 맞아. 물어보는거에 대답을 해 줘야지. 이 돈은~ 음... 파운드 케이크, 크레이프, 그런 사랑스러운것들을 사는데에 좀 쓰고, 깜찍이에 넣을 탄약, 그리고 행복해지는 해피 시리즈를 더 만드는데 조금. 그리고 나머지는! 광장의 높은곳에서 휙 뿌려줄거야. 그러면 다들 좋아할테니까! 내 친구인 너도 돈 좋아하지? 자, 원하는 만큼 챙겨가! 아, 그래도 다 챙겨가는건 안된다? 이런건 같이 나눠써야하니까. "

긴 말을 마치고 쌓여있는 돈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아, 네 쪽으로 던진다. 힘이 부족해서일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하고 맥없이 툭 떨어졌지만. 그녀는 쑥스러운듯 웃었다.

" 좋아좋아,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나. 최고로 사랑스러워. 음, 그리고 또 질문이 뭐였지? 아, 맞아. 왜 하필 월요일이냐고? 그야 오늘이 내게 남은 날 중 가장 어리고, 최고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날이잖아? 매일을 전력으로 즐기지 않으면 손해야~ 그렇지, 친구? 참, 이름도 물어보질 않았네.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뭘까?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음... 민트초코? 맞지? 응? "

분명 이름을 맞췄을거야! 얼마나 놀라줄까?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 아헤, 행복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크레이프나 먹으러 가지 않을래? 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최근에 돈 안내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거든. 이 깜찍이를 한번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다들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한테 전부 공짜로 준다니까? 그래서 전엔 케이크를 한가득 받아서, 배가 터지게 먹어버렸어. "

/ 좋아! 이어줘서 고마워~ 편하게 이어줘!!

306 이름 없음 (nywXcHkACY)

2022-03-29 (FIRE!) 14:56:32

>>305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금새 본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당신을 지켜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귀를 기울인다. 정확히는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소리에. 기동대가 도착하는 소리다.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움직이는 것 하나는 빨라가지고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싶나?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노동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응응, 전통적인 문구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륜적으로 좀 심하지않아? 좀 적당히 노동해서 적당히 먹고 살고 싶은게 죄야? 본질적인 문제는 그곳에 있다. 히어로라는 직업을 선택한 자신에게 있어 일을 늘리는 것은 오직 빌런들 뿐. 기동대가 투입되기 전에는 일을 마무리해야한다.

“……그렇구마안~. 빌런치고는 제법 알차게 쓰는데. 나라면 우선 노후를 위해 저축하겠지만, 뭐, 지금 이 사단을 보자니 아가씨가 존재하는 이상 어떤 은행에 저축해도 의미가 없어보이네.”

해피, 라는 이름 +1. 월요일인데 지나치게 활기찬 목소리 +1. 도덕성 및 사회성 결여 +1. 지독한 네이밍 센스 +1. 불법 폭탄 개조 및 사용 +1. 친구에게 훔친 돈을 나눠주는 상냥한 마음 +1. 이 이상 점수를 매기는 건 무의미하다. 자신의 월급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명분도 충분히 세워졌다. 맥없이 툭 떨어진 돈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거린다.

“민트초코는 맛있긴 하지만 사람 이름으로는 좀 그렇지. 뮬렌 맥워커라고 한다, 해피 아가씨. 재미없는 이름이라서 미안하네.”

아무런 감흥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평이하다. 이 사람, 정말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건 맞는건가? 이를 아득 갈고있다. 금고의 구석에 달린 통로 CCTV를 확인하자 무장한 병력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시간을 버는 건 여기까지. 어기적어기적 자리서 일어나 상체를 좌우로 짧게 기울여가며 뻐근한 허리를 풀어준다.

“오, 정말? 나도 크레이프 좋아해. 근데 아가씨랑 같이 먹으러 가기엔 아저씨는 좀 부끄러울 나이기도 하고……─쑥쓰럽다는 듯이 턱을 긁적거려보였다.─자고로 디저트는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버텨내서 갓 받은 월급을 ATM에서 인출해 내 땀과 피, 종이 냄새가 나는 뻣뻣한 지폐로 사먹는 게 제일 맛있거든. 돈 다 챙겼지?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어. 다음엔 꼭 화요일…아니, 수……음, 그냥 제압할테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해.”

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펼친 검지 손가락을 아래서 위로 슥 들어올린다. 그러자 당신이 서있는 바닥이 들썩거리더니 그대로 떠올라 천장에 충돌할 기세로 솟구친다. 범상치 않은 당신이 이정도 공격은 대처할 것을 알고있기에, 주변의 잔해들을 전부 떠오르게 해, 일제히 당신에게 맹렬한 속도로 날려보낸다. 이것 또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힘을 모아 천장에 바깥과 이어지는 커다란 구멍을 내려 하고있다. 먼저 이 끔찍한 가스를 빼내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정정하지. 월요일은 저주받은 요일이다. 내게 남은 날 중 유급 휴가를 적용하지 않은 매 월요일은 가장 괴롭고, 최고로 끔찍하며 주말과 동떨어진 최악의 날이다. 그러니 그 정신머리를 개조시켜주지. 난 다른 히어로들 처럼 무자비하지 않아. 재판에 언질을 넣어둘테니 아가씨는 실력 좋은 빌런교화센터에 들어가게 될테고, 완치될 즘이면 같이 내 단골 디저트 가게에 갈 수도 있겠지. 그러니 저항은 포기하도록.”

307 이름 없음 (74Ngo.ktVM)

2022-03-29 (FIRE!) 19:26:37

>>306

" 칭찬해주니까 부끄러워지는걸~ 그래도 날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보지는 말아줘! 다른 빌런들은 그야, 온통 재미없는 일에만 쓰잖아? 세계정복이니, 모두를 노예로 만든다느니, 죽고 죽이고... 그런건 전혀 재미없어! 기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건.. 사랑스럽지 않다는거겠지. 그렇지 않아, 내 소중한 친구? 응? "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짧게 웃었다. 그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멍청해보여, 왜 그리도 재미없는 일에 이를 물고 덤벼드는걸까? 우리가 사는 삶은 언제나 짧잖아?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늘 전력으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 손해야. 내 깜찍이, 반짝이에 죽은 사람들도, 오늘 내가 이렇게 죽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나도 그런거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나는 즐길래, 한 점의 후회도 없이, 최고로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 노후를 위해 저축해? 그거 진짜 재미없다. 친구,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오늘이 너의 가장 젊은 날이잖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싫어하는 일만 하면, 사는건 재미없잖아? 으에, 끔찍해. 나같으면 그런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다 그가 맥없이 떨어진 돈다발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리는거에 응? 돈 안가져가? 내가 주는 선물인데! 하고 얘기했다가.

" 쿠궁,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완전 충격이야, 그런 재미없는 이름이라니. 게다가 맥워커? 성에서부터 일복을 타고났잖아. 안되겠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름이야. 그냥 민트초코가 되는건 어때? 무려 우리 집 고양이랑 똑같은 이름이라구. 응! 아주 귀여워. 어라, 허리아파? 마사지라도 해줄까?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허리를 주물러주면 순식간에 나을거야. 장담은 못 하겠지만~ "

다시 짧게 웃던 그녀는,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이 밟고있는 땅을 그대로 들어올리자 길게 한숨쉬었다. 그리고 쪼그려앉으며, 자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 아아, 정말. 나랑 같이 크레이프 먹으러 가는건 부끄럽고, 나처럼 예쁘고, 최고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여자애를 공격하는건 부끄럽지 않은거야? 정말, 최악이야. 전혀 사랑스럽지 않아. 친구라고 믿었는데, 나를 배신하다니. "

정말 슬퍼. 그녀는 빠른 속도로 주머니에서 반짝이들을 꺼내 그대로 마구 흩뿌렸다. BOPE에서도 사용하는 특제 고폭 수류탄. 그리고 그대로 공중에서, 뒤로 한바퀴 돌며 뛰어내렸고, 큰 폭압에 휘말린듯 옷은 이리저리 헤지고 찢겨나가며,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큰 목소리로 보아 그녀는 나름대로 무사한듯 싶었다.

" 정말, 너무해.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선, 나중엔 데이트하자며 꼬드기는거야? 미안, 난 나쁜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이미 질릴대로 봤거든. 으응, 근데, 아저씨 친구들은 괜찮을까~? 저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봐, 천장에 구멍이 생긴 탓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뭉게뭉게, 하늘의 구름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기 경찰? 인가? 저 친구들도 위험해보이는데~ "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찰랑거리는, 분홍색 액체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겉엔 요란하고 화려한 분홍색 스티커, 반짝이 가루까지...

" 이거 던져서 깨지면, 구름이 잔뜩! 응? 근데, 지금이라면 되돌릴수 있어, 아저씨. 아직까진 수습이 가능한 단계야. "

근데 내가, 그렇게 가만히 두진 않을거야. 그녀는 바닥에 핑크 다이아몬드를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 아아, 아저씨... 일하기 싫다고 했지? 월요일을 싫어하는것도 출근때문이고? 괜찮아, 괜찮아, 민트초코. 설령 날 배신했더라도, 최고로 사랑스럽게 만들어줄게. 일 따윈 안나가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만들어줄테니까. "

그럼 우리, 지금부터 다시 친구하는거다? 응?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깜찍이를 쏘기 시작했다. 쾅, 하는 미친것처럼 시끄러운 폭약음이 귀를 때렸고, 뒤이어 큰 폭발이 금고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핑크 다이아몬드에 몇개 인화성 가스가 섞였던걸까. 그리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자기가 부쉈던 금고의 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 술래잡기 시작이야! 잡으면, 으음~ 그 센터? 거기에 들어가는거, 생각해볼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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