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1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17:34:28

situplay>1596243924>876

돌아서기 전, 그냥 인사치레로 했을지도 모르는 말이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시간낭비가 되지 않았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녀 역시 약간의 동질감 비슷한 것이 속내 한켠에 잔잔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도망쳐 온 그녀와 친지가 그래도 살았던 곳으로 온 사내와 겹쳐보기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산책 경로를 바꾸자고.

파문이 일었던 하루가 조용히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전날과 다름없는 시작에 그럼 그렇지 라며 또다시 느즈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채 앉아있으니 이웃집 할머니가 마당에 물을 뿌리는지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살짝 연 창문 사이로 들려온다. 잠시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의 여운을 물리치고, 느릿하게 움직여 남들보다 늦은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씻고, 밥을 먹고, 약간의 일을 하고. 그러고나니 다시 산책을 나갈 시간이 되었다. 챗바퀴처럼 일정하게 돌아가는 하루. 그래도 오늘은 다른 길을 산책할테니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려나 하며 집을 나섰을 때였다.

"...네, 네..? 제가요..?"

문 밖에는 누가 이미 있었는데, 전날 반찬을 가져다 준 이웃집 할머니였다. 어디 나가시는지 외출할 차림을 한 이웃집 할머니가 찬합을 들고와 그 집 사내에게 가져다줬으면 한다고 부탁해왔다. 원래는 본인이 가시려고 했지만 급히 나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며, 산책 가는 길에 잠깐 들러주지 않겠느냐고. 당황해 어물어물하며 오늘은 그쪽으로 안 갈거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여기 온 뒤로 살뜰히 챙겨주신 것에 보답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냥 가져다 주기만 하는 거면 어렵지 않으니까. 어제랑 다를 거 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녀에게 찬합을 맡기고 가셨다. 저멀리 가시는 할머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도 그녀의 일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전날과 같은 산책로였다.

가지런히 모은 손에 찬합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걷다보니 어느새 사내의 집 근처까지 다다라있었다. 늘 이런 산책이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용건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불안, 비슷한 무언가일까. 괜한 생각은 말자며 고개를 작게 젓곤 앞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길 너머 보이는 그 집을 보고 오늘도 사내가 나와있지는 않을까 싶어 집 쪽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고 있었다. 밖에 있다면 얼른 전해주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터져있어서 당황스러웠는데 새로 세워져있었네. 일단 이어둘게.

2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19:22:38

>>1

하루동안 열심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해서 겨우 사람 사는 분위기로 만들어놓은 사내는 많이 지쳤는지 마루에 누워있었다. 집 안에 누워있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집 안보다는 마루가 시원하고 경치 보기도 좋겠지 싶어 한 시간 이상 자세를 유지하며 사내는 근처 경치를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푸른 풍경이 절로 눈을 편안하게 했고,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몸에 쌓여있는 피로를 풀게 하기 딱 좋았고, 시골 특유의 맑은 공기는 지친 정신을 맑게 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쉬었다가 방 안에 만들어둔 아틀리에 정리를 마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집안 정리를 한다고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버린 바람에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혀 못 했다는 것을 떠올린 사내는 오늘이야말로 꼭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대로 인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누운 몸을 일으켜세워 마루에 똑바로 앉았다.

곧 보이는 얼굴은 어제 집 앞에서 만난 여성의 모습이었다. 옆집이 아니고서야 이틀 연속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도시에선 꽤 힘든 일이었던만큼 사내는 괜히 신기함을 느끼며 벗어둔 신발을 신고 기지개를 쭈욱 켜며 마루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 오늘도 산책 가는 길이세요?"

자신이 앞으로 살 집의 앞 길이 누군가의 산책길이라는 것은 역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허나 남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미안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며시 옆으로 치워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나도 아침에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나 역시 이어둘게!

3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21:19:10

>>2

천천히, 조금씩 가까워지는 집은 어제보다 좀더 정돈되어보였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전날과의 차이 정도는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집 안도 정리하느라 바빴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가던 중에 누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회색머리가 인상적이라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가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아, 네, 안녕하세요..."

약간의 놀람을 담은 자색 눈동자가 사내를 한번 보고 슬쩍 옆으로 피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종이봉투의 끈을 쥔 손도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가, 안 그래도 흰 손의 손등이 투명해질 것만 같다.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금 늦게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저, 오늘...은, 그쪽, 한테, 용건이 있어서요..."

산책이 맞긴 했지만 용건이 아니라면 이 길로 오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니 오늘은 사내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거라 말하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딱 봐도 직접 만든 건가 싶은 5단짜리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가지런하게 들어있었다. 사내에게 그것을 받으라는 듯 든 채로 마저 얘기했다.

"옆집, 사시는 할머니가, 여기 사시던 분하고... 친분이 있었어서.. 그래서 그쪽 주려고 챙긴건데,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제가..대신..."

띄엄띄엄에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과 왜 그녀가 이걸 가져왔는지 정도는 이해가 될 만큼은 얘기를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말은 했다는 약간의 안도감에서 나온 한숨이랄까. 이제 사내가 이걸 받기만 하면 그녀의 용건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산책로를 바꾸면 될 거라고.

4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21:52:17

>>3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단 하루만에 무슨 용건이 생겼을지 의문을 품었다.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에 뭔가 안 좋은 말이라도 하려고 온 것일까 싶어 약간의 불안감이 사내의 마음을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 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는데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있는 것은 사내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그 또한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기에 우선 용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내는 생각을 돌렸다.

손에 쥐고 있는 종이봉투를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사내는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들어있었고 자연히 사내는 왜 이것을 자신에게?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확실한건 이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자신에게 찾아온 용건임은 분명하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옆집 사는 할머니요? 이걸 저에게?"

자신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어떤 사람일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시골집에 왔을 때 여러 어르신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왔던 것 같은데. 그 중 한 분이실까? 정말로 하루빨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지으며 우선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렇게 뭔가를 주는 어르신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괜찮다면 어느 곳에 사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전해주러 와서 고마워요."

찬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먹을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며 나중에 식사를 할 때 먹으면 되겠다고 결론을 지은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말을 이었다.

"혹시 산책을 자주 즐기신다면 괜찮은 풍경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별 건 아니고 그림을 그리러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혹시 좋은 풍경이 있으면 소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5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22:57:35

>>4 좀 피곤해서 그런가 답레가 안 써지네. 내일 들고올게.

6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23:06:40

>>5 빨리 빨리 이어야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줘도 괜찮아! 물론 이야기의 끝을 맺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으니 정말로 편하게 해줘!

7 이름 없음 (KLx1EPiy5I)

2021-09-14 (FIRE!) 00:52:24

(길가 중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손은 조수석에 놓여져있는 샷건 쪽을 향해 뻗으면서 당신 앞에 세우고는 차 창문을 스르륵 내린다. 까만 미러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흘려 당신을 바라보다, 씩 웃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드문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좀아포! 급작스런 전개나 맥커터만 아니면 괜찮아~

8 이름 없음 (3GPpEJWZ8w)

2021-09-14 (FIRE!) 02:49:09

>>7 모든것이 시작되고 모든것이 끝날지 모르는 곳으로 (처량한 얼굴에 눈물,먼지 범벅이된 하얀 가운의 여자가 무거운 서류가방을 든채 샷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던 시가를 더 깊게 들이마시며 읖조린다. 옆구리에 낀 철로된 서류가방을 보여준다. 그 위로 유명 메이커가 선명하게 빛난다.)어때, 같이 가볼래? (같은 시각 그녀의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지면서 막무가내로 차에 타려든다. 그리고 큰 폭발 소리에 좀비들이 점점 모여든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 하지 문좀 열어!

9 이름 없음 (SHdse3byhc)

2021-09-14 (FIRE!) 05:07:19

>>4

사내에게 종이봉투를 넘겨주고나자 빈 손이 새삼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의 집에서 여기까지라고 해도 고작 십여분에 불과한 거리를 들은게 전부인데. 그녀는 어쩐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사내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자초지종까지는 몰라도 할머니가 그리 말하셨으니 들은 대로 전할 뿐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종이가방 내려 놓는 모습을 힐끗 시선으로만 쫓다가, 이어진 물음에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타인의 주소를 멋대로 알려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 연관도 없다면 알려주지 않겠지만, 나중에 빈 찬합을 돌려드리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해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녀가 왔던 길을 보며 간단히 길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어요. 거기..에요."

혹시 모르니 명패에 써있을 할머니의 성씨도 같이 알려주고 그럼 이만, 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다음 물음이 그녀의 말보다 빨랐다. 미처 끊지 못한 말을 그대로 들은 그녀는 풍경과 그림이란 말에 살짝 흥미가 도는 눈빛을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림...인가요. 괜찮은 풍경, 이라면..."

대답하기에 앞서 또 잠시간 시간을 들여 생각에 빠졌다. 근 1년간, 마을 밖으로 나가진 않아도 걸어갈만한 곳은 여럿 가보았다. 딱히 좋은 풍경을 찾기 위한 것도, 그만큼 산책을 즐겨서인 것도 아니었지만. 몇 군데 인상에 남는 장소는 있었다. 그곳들을 떠올린 그녀는 못다한 대답을 마저 이었다.

"일출이 잘 보이는, 절벽 같은 곳이나, 저기, 안개가 낀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정도는, 알고 있어요.."

기억나는대로 몇군데를 말하고 보니 별로 좋은 곳들은 아닌거 같아서, 그냥 흔한 곳이라고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시골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고.

10 이름 없음 (Bg1UuNSkIk)

2021-09-14 (FIRE!) 19:27:17

>>9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으며 사내의 눈동자는 그녀가 설명하는 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명패의 이름까지 알려줬으니 찾는 것은 상당히 쉬울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적어도 길치는 아니었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내는 확신하며 이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이어 자신의 질문의 답이 들려오자 사내는 자연히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안개가 낀 늪이 있다는 말에 늪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하며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꼭 가봐야겠다고 사내는 다짐했다. 물론 출발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집 정비도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겉은 어떻게든 정비했다고 해도 비가 새는 곳이 없을지, 혹여나 문제가 되는 곳은 없을지 등등 확인해야 할 곳이 많았고 아직 아틀리에 정비도 마치지 못했으니 해야 할 것은 많았다.

"이곳에선 흔할지도 모르지만 막 여기로 온 저에겐 흔한 곳이 아닌걸요. 어릴 때 여기에 여러 번 오긴 했지만 사실 이 시골집 근처에서 멀리 벗어나본 적은 없어서요.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계속 고맙다는 인사만 한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소리를 작게 내서 웃었다. 허나 그 웃음소리를 어떻게든 잠재우며 고개를 돌려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등의 위치를 상상해서 있을법한 장소로 고개를 돌리다 아래로 내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 좋아하시나요? 만약 좋아한다면, 일단 정리가 다 끝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가 다 끝나면 추천해준 장소 같은 곳에 혹시 가게 된다면 풍경화 한 장 받아보실래요? 저도 손을 풀고 싶고, 삽화가를 꿈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보일지도 궁금해서요."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사내는 두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11 이름 없음 (SHdse3byhc)

2021-09-14 (FIRE!) 20:35:13

>>10 제대로 마무리짓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안 써져서 이쯤해야 할거같아. 미안.

12 이름 없음 (Bg1UuNSkIk)

2021-09-14 (FIRE!) 20:53:42

>>11 아니야! 괜찮아! 짧지만 그래도 잇는다고 수고했고 재밌었어!

13 이름 없음 (IjxXO5lTew)

2021-09-16 (거의 끝나감) 02:01:29

" …내 이름이요? "

술기운이 오른 듯 붉어진 얼굴로 여자가 되물었다. 영 탐탁치 않아하는 어투였다. 게슴츠레 뜨인 눈으로 당신을 서너번 훑어보던 그녀는, 이내 싸구려 양주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기울인다.

" 제냐, 제냐예요.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가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 맞으니까. 정확히는 애칭이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알려주기 싫었는데. "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잔이라 그런지 술이 유난히 쓰다. 말을 멈춘 채 몇 번 숨을 들이키던 여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뭐, 처음 본 사람 치고는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재미있었으니까 알려주는거예요. 풀네임은 안 알려줄거니까 그렇게 알고. "

이국적인 이름 치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과 적당히 흰 피부. 짙은 갈색빛 눈동자에 특유의 분위기가 담긴 홑꺼풀 눈매. 평균을 겨우 웃도는 키와 여느 대한민국 20대들이 좋아할 법한, 짧은 유행을 함축한 옷가지. 여자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지갑을 챙겨드는 눈치다.

" …집 가기 전에 담배 한 대 필건데, 그 쪽도 펴요? "

여자가 나른히 물었다. 희미하게 알싸한 술냄새가 풍겨온다.

14 이름 없음 (OnJloPxmc6)

2021-09-16 (거의 끝나감) 03:07:31

>>13

"응, 당신 이름이요."

눈가에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여자는 푸슬거리며 헤프게 웃는다. 그러다 동그란 눈으로 당신 얼굴을 살핀다. 시선에 몸을 조금 움츠린다. 우물쭈물거리면서도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상한 구석에서 묘하게 고집이 있기라도 한가 보다.

제냐, 제-냐. 그 이름을 입 속에서 둥글둥글 굴려보던 여자는 당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안 봤어요! 하고 변명하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커다란 두 눈을 두어번 꿈뻑거린다.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싫었다면 미안해요...그래도, 들으니까 기쁘네요."

그리곤 예의 그 헤프고 무른 웃음을 지어보인다. 꼭 그 기쁘다는 말이 온전한 진심인 것처럼. 여자는 손을 팔락거려 옷소매를 조금 아래로 한다. 양 손으로 잔을 잡고 홀짝이며 남은 술을 마신다. 그러다 당신을 말을 하노라면 술을 내려놓고 가만히 듣다가, 한참을 고민하듯 있는다.

"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요...이상하게 본 게 아니라."

그 고민 끝에 나온 말은 실없는 종류다. 그리고, 라며 여자는 말을 잇는다.

"제 이름은 비예요. 비 온다, 할 때 그 비요. 따지자면 애칭이에요."

제냐처럼요. 짧게 덧붙인다. 여자가 작게 웃자 갈색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흔들린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빛이 닿자, 호박색에 가까운 색채로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잇대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다. 그래서인지 작은 웃음에도 쉽게 흔들려 보인다.

"음, 네. 가끔요."

조막만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한다.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괜찮다면, 불만 조금 빌려주지 않을래요?"

그러다 변명조로 중얼거린다.

"...라이터를 두고 와서요."


#이런 것도 괜찮을까?

15 이름 없음 (dJDNk9i6tI)

2021-09-17 (불탄다..!) 01:16:39

>>14

" 뭐, 미안해 할 필요는 없고. "

여자가 힐긋 당신을 바라보다 오묘히 입꼬리를 접어 올렸다. 여자는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제법 따스히 웃을 줄도 아는가보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텅 빈 술잔이 어딘가 아쉽다. 기껏 오른 취기가 곧장 사그라질 듯한 그 감각이 싫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별안간 들려온 당신의 목소리 때문이다.

" 그래요? 고마워라. "

여자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술기운이 가득한 웃음이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런 미소를 보이지 않았겠지. 평소의 여자는 웃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 여자가 길게 입술을 늘려 당신의 이름을 중얼였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당신의 이름이 톡 터져나온다.

" 좋은 이름이네.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거든. "

여자가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래서 꼭, 그녀의 눈을 볼 때면 깊이 모를 심해에 빠져드는 기분인지라, 그녀와 눈 맞추길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새카만 어둠 속에 제 속내를 읽히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을테니.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 했던가. 인간은 눈과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던데, 그녀의 눈은 아무리 들여다본들 그 무엇도 읽히질 않았다. 모든 불을 끄고 달빛 들어올세라 창문까지 닫고, 속마음이 적힌 공책을 꽁꽁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리도 투명한 눈빛을 좋아했다.

" …따라와요. "

여자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니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붉은건지, 가게의 조명이 붉은건지,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건지.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비틀이는 걸음으로 뒷쪽 출입구의 문을 밀었다. 곧장 서늘한 공기가 들이치며 세상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쇠어가는 가로등의 불빛이나, 낡은 자동차의 모터음이나, 뭐 그러한 것들.

여자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낸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살며시 깔린 시선 사이로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라이터를 몇 번 달칵대며 담배에 불을 붙인 여자가 그대로 첫 숨을 길게 내뿜어낸다. 그리곤 잠시 당신을 보고서는, 제 담배갑을 기울이며 한 대 가져가라는 듯 흔들대는 것이다.

" …솔직하게, 담배 피는 거 맞아요? "

여자가 다시 한 번 연기를 뿜어낸 뒤 물었다. 여자는 불안정한 자세로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멍하니 울려오는 머리에 여자가 잠시 몸을 비틀였다. 글쎄, 그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 아니 뭐, 꼭 한 번도 안 펴본 사람 같아서. "

입술을 오물대며 대답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 괜찮아!

16 이름 없음 (07R./bVFm6)

2021-09-18 (파란날) 00:45:18

14살. 살던 마을을 떠난 소년은 10년이 지나 24살의 청년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검술과 마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전문 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아카데미를 정식으로 졸업했다는 제국의 사자 문양이 그려진 붉은색 완장을 왼팔에 차고 있었다. 제국에서 청년의 검술과 마법 실력을 인정했다는 그 증표는 제국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자격 그 자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그 증표만 있으면 제국의 유력 가문을 지키는 기사가 될 수도 있었고, 제국 그 자체를 지키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도 있었다. 허나 사내는 아카데미에서 들어온 모든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이 살던 마을, 즉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0년만이지만 옛 모습 그대로네."

14살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지으며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나름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유력한 가문도 아니었던만큼 사내를 알아보는 이는 적어보였다. 마을 북쪽에 위치한, 귀족들이 살고 있는 거주구에 사는 작은 여러 가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이런 반응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우선 마을 북쪽으로 향하려 했다.

"앞으로 뭘할지는 일단 집에 돌아가면 생각해볼까.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야 할 곳도 많으니 말이야."

/뜬금없는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오케이야! 1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귀족 친구중 하나가 나와도 상관없고,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제국에서 몰래 미행해서 따라온 이로 이어도 별 상관없어!

17 이름 없음 (KcVvObqu.w)

2021-09-20 (모두 수고..) 01:17:17

>>15

당신의 말에 뒤늦게 따라 웃는다. 약간의 안도가 담긴 미소는 무해해 보인다. 꼭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달달한 디저트처럼, 해치는 법은 모르고 사는 이같다.

"진심이에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금도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이 무해하다 못해 순진해 보인다. 사랑 받고 자라 환히 웃는 법과 사랑 주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 사람처럼,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비오는 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해요, 제냐는?"

투명한 눈동자가 당돌하게도 당신을 마주본다. 제가 빛이니 어둠이 두렵지 않다는 양 군다. 얼마든지 읽혀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당신과는 정반대의 사람 같아 보인다. 어두운 길 가는 사람 길 잃지 말라 창문가에 불을 환히 밝혀놓았다. 어두운 밤 헤매지 말라 하늘에 별 총총 띄워놓았다. 꼭, 그런 사람 같다.

한참을 당신의 답 기다린다. 재촉하거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당신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러다 목소리가 들려오노라면, 그제서야 종종걸음으로 당신의 뒤를 따라가며 "같이 가요!"하고는 종알거린다. 띔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뒤따라가자면, 어느새 도시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저물어가는 몇몇 것들의 소리가 거리를 잔잔히 채운다. 여자는 서느다란 고요에 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러던 여자는 제 시야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내밀어진 담뱃갑의 로고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나 꺼내가려던 찰나, 저를 향한 질문에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 본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잘 안 피게 생겼다고들 하더라고요."

옅게 웃는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흐릿하다. 확실히 여자는 담배와 친하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입에 무는 것은 달달한 막대사탕이 전부일 것만 같아 보였다. 그렇 것 치곤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무는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다.

"가끔 피곤 해요."

여자는 불 좀 빌려달라 말하듯 턱을 살짝 치켜든다. 그제야 얼굴에 빛이 닿는다. 조금 지친 낯이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추석이라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너참치는 즐거운 연휴 보내고 있길 바라!

18 이름 없음 (sdN5hN8djo)

2021-09-20 (모두 수고..) 22:22:43

히어로의 삶도 만만치 않네. 힘내라, 힘내. 일단 마시고, (자연스럽게 술을 따라주고 턱을 괸 채 웃는다.) 빌런 협회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친구야. 적어도 지랄맞은 위계사회는 없더라고. (불판 위의 고기를 구워 당신의 접시에 올려주고는 자신은 집게로 집어든 고기를 입에 넣는다. 중간에 느껴지는 시선에 후드를 뒤집어쓴다.) 유명인이랑 고기 먹기 힘드네 거 참.

/ 히빌!! 맥커터 자제~

19 이름 없음 (UT1lB8JGUk)

2021-09-20 (모두 수고..) 23:20:06

>>18

아니, 저기… (두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살핀다. 다소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일단 따라주니까 마시긴 하는데요. (확신 없는 얼굴로 잔을 매만지다 단숨에 들이킨다.) …건물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나? 오늘 뒤지게 깨진 건 어떻게 알았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히 말을 받아치며 대답한다. 그러다 제 고기를 집어먹는 당신을 얼빠진 얼굴로 응시한다.) 그거 내 고기인데? 고기값 줄거예요?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산 건데? (다소 인색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한 번 볼캡을 눌러쓰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든다.) 내가 아니라, 그 쪽 문제인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얼굴 팔리지 않았나? (웅얼거리는 히어로) 근데 담력 대단하다. 어떻게 대놓고 찾아올 생각을 다 해요? 민간인 많아서 내가 깽판 못 칠 줄 알고 그러나? (불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고기를 집어먹는다.)

#이렇게 받아도 괜찮을까...!

20 이름 없음 (Oa6/ev./m6)

2021-09-21 (FIRE!) 10:56:11

>>19
/너참치 미안! 빌런을 아무 생각없고 뻔뻔하고 염치없는 캐릭터로 짠 건 아니었거든~ 찐친 사이를 바랬던 거라서 다른 참치랑 이어보도록 할게! 이어줘서 고마워~

21 이름 없음 (VVfVlMh9Cg)

2021-09-21 (FIRE!) 13:12:41

>>18

(소주를 한 번에 쭉 털어 삼킨다. 쓴 액체가 식도를 태운다.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내 신념이 잘못된 건가?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왔음에도 느껴지는 시선들에 쓰게 미소짓는다.) 너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안되는데. 룸으로 갈 걸 그랬나. (후드를 더 푹 눌러 씌워주며 얼굴을 찌푸린다.) 내 방 갈래?

22 이름 없음 (2dS/EdO/ew)

2021-09-21 (FIRE!) 14:23:15

﹘뭐야. 너 누구야.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이 맴돌기는 하지만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과 평범한 검은 눈, 그리고 평범한 학교의 교복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나풀거리며 명찰이 있을 가슴팍을 가리고 있어 이름은 확인하기 힘들었다. 평범치 않은 부분이야 이따금씩 느적거리는 꼬리 지느러미가 있는 치마 아래 부분이다. 투명하고 맑게 비치는 물 속에서 훤히 보이는 지느러미는 아마도 파랑색인 것 같았다. 빛이 비추거든 비늘이 반짝거렸다. 물 속에 있던 인어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 당신에게 들린 목소리는 울먹거리는 것 같기야 했다지만 예쁜 목소리임이 확실했다. 신기한 일이다. 인어는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인어는 곧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어 처음 봐? 대답 안 해?”

물 속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착 내려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대낮임에도 이런 모습으로 무방비하게 꼬리를 내놓았는데 난데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등장이라니 달갑지 않았다. 경계심이 말투와 목소리에 뚜렷히 드러났고, 그리고 차마 숨기지 못한 불안도 함께했다. 겁을 내고 있는지 가시를 돋친 고슴도치가 벌벌 떨고 있기라도 하는 것마냥 말투와 목소리만이 날서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그 증거였다.

23 이름 없음 (cfiavu88qo)

2021-09-21 (FIRE!) 15:11:55

>>22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씨엔 산책을 하지 않으면 역시나 곤란하단 말이지. 하지만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한가한 시간을 때우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 산책 코스가 아닌걸? 그렇게 얼핏봐도 낡아보이는 책을 들고 바닷가에 온 내게 놀랍게도 첫 시도만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 도감번호 22번, 인어. 인외의 존재이지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에 그 존재를 쉬이 눈치채기 어렵다. 가끔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상당히 아름답다고 한다. "

바닷가의 인어가 내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아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라 사람들이 인어에 왜 홀린다고하는지도 알 것 같았고. 그리고 인어들은 대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라고 여기 적혀있네.

" 안녕. 혹시 실례지만 네 그림을 여기에 좀 그려도 될까? "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던 이 책은 여러 인외의 존재들의 정보와 그림이 실려있다. 그냥 간단하게 도감이라곤 하지만 요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의미가 안좋잖아, 대부분 인간한테 무해한데. 하지만 역시 인외의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많은 그림들이 비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그림들을 채우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생이라 이 근처가 전부지만.

"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조금 특별한 인간이고 특이한 사람일뿐이니까. 여기에 그림만 그리고 갈께. "

어떻게, 안될까?

24 이름 없음 (fgwbm1mVF6)

2021-09-21 (FIRE!) 15:36:08

>>23

“뭐?”

도감번호 22번.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예로부터 인간에게 정체를 들켜서, 인간과 얽혀서 좋은 끝을 본 인어는 드물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육지에, 인간 사회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같은 인간조차 구경거리와 희롱거리로 삼아 유희를 즐기던 동물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인어의 몸이 뒤로 물러난다. 수면에 이는 파동은 작은 파도 뿐만이 아니라 몸의 떨림도 그 원인이었다. 저 인간의 손에 붙잡히면 해부당하고 마리라. 눈꼬리에 금방 굵은 물방울이 맺히더니, 아룽거리다 바다 위로 데굴 굴러 떨어진다.

“그림만 그린다는 걸 어떻게 믿어. 어린 인간은 더 잔인해.”

이제는 아예 겁을 먹어 움츠린 인어는 날이 선 목소리조차 내지 못 했다. 눈물 방울은 계속해서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하였으며, 인어는 도망칠 방법을 강구 중이었다. 바닷속으로 도망쳤다가는 바닷속 저 깊이 원래 인어들이 나고 사는 곳을 들켜버릴까 걱정되었고, 육지 위로 올라 달려보자니 자신의 인간 다리를 다루는게 서툴었다. 어설픈 뜀박질로는 금방 잡히고 말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간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데 울음 소리까지 내기 싫었다.

“이러니까 계속 바다에 살고 싶었던건데….”

이것은 인어의 목소리가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목소리가 울먹거리던 이유였을테다. 조그맣게 울먹거린 인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푸른 하늘 아래서 눈물 방울을 반짝거렸다.

25 이름 없음 (ir04qPY3N2)

2021-09-21 (FIRE!) 16:06:53

>>24

어, 우는거야? 우는거야?! 정말 단순하게 그림만 그리러 왔는데, 말 몇마디 걸었을뿐인데 갑자기 울어버린다. 아직 아무런 짓도 안했는데 울어버리면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펜을 들고 있던 손이 너를 향해 있다가 당황해 펜 끝이 살짝 떨린다.

" 너도 어리잖아! 너 교복이 근처 고등학교 교복인데, 나는 바로 옆학교에 다니고 있거든. "

어린 인간이 더 잔인하단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고 지금도 인어가 있다는 말이 들려오면 잡아가려고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도감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무조건 지켜야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조건 지켜줄 것'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내 앞으로 떨어진 막대한 유산은 그저 내가 놀고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건 목적을 갖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게 할아버지가 어떤 것과 한 약속이라고 했으니까. 그 댓가로 막대한 부를 약속 받았고 아버지까지도 그 의무를 성실히 하고 계셨다.

" 정말 그림만 그릴께. 정 못믿겠으면 어떤 방식으로 약속을 해도 좋아. 인어는 인어만의 방식이 있을테니까. "

증조할아버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도감은 이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서적으로 그 목적이 변했고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어야할 의무가 있다. 내가 채워넣을 수 있는 첫번째 페이지를 이렇게 쉽게 날려보낼 수 없지.

" 약속을 어긴다면 어떤 저주라도 달게 받을께. "

진지하게 너에게 말해본다. 그래도 여기서 도망간다면 기회는 아예 날려버리는 것이겠지만.

26 이름 없음 (fgwbm1mVF6)

2021-09-21 (FIRE!) 16:44:00

>>25

“인어 나이로는 성년 지났어!”

이제는 학교까지 들켜버렸어. 학교를 뒤져서 학생 하나 찾아내는게 어려운 일도 아닐테고, 이제 어딘가로 끌려가서 연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인어가 바닷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었다는 웃긴 이야기가 생기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인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나 싶더니,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쳐냈다. 눈가는 금방 빨갛게 올라왔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잡혀가 죽은 인어도 있는데, 인간이 바다를 오염시켜서 인간들과 섞여 살아야한다고 했다. 바다에는 쓰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아무리 깊고 머나먼 바다로 떠나봤자여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어는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온다.

“저주같은 거….”

그런 거 할 줄 알 리가 없잖아. 옛날에야 인어로서 계속 바다에 살아가니까 다들 배우고 알아뒀겠지만, 지금은 다들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오는데 저주같은게 계속 이어진다고 해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인어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너를 믿어야한다면, 너도 죽음을 감수하고 나를 믿어줘. 물기어린 손이 당신을 향해 뻗었다.

“너도 들어와서 약속해. 숨 모자르면 내 숨 나눠줄게.”

인간도 바닷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 인어의 숨을 나누면 된다. 이 방법으로 여러 인어들이 여러 인간을 살렸다. 단순히 손가락만 걸고 약속하겠지만, 바닷속에서는 쉽사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바닷속까지 따라 들어와준다면 그림만 그리겠다는 말에 대한 믿음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27 이름 없음 (ZcNQ6BSMpo)

2021-09-21 (FIRE!) 17:29:16

>>26

아, 나랑 비슷해보이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던가 .. 아니면 인어는 인간보다 성년이 되는 시간이 짧은건가? 뭐가 됐던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울어버리는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좀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들을 배척해오곤 했으니까. 호기심이던, 악의던간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라고 도감 가장 첫 페이지에 써있는 할아버지의 메모처럼 인간에 대해 무한한 적대감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곤 했다. 기본적으론 무해하다고해도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 물 안에 들어오라고? "

흠칫한다. 육지는 나의 영역이지만 물 안쪽부턴 인어의 영역, 상대가 적의를 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거기에 어릴때 강에 빠져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바다는 서서히 얕아진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물이 허리 위로 올라오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나에겐 너무나도 나쁜 제안이다.

" 아니, 정말 나는 나쁜 짓을 할 마음이 없는데. "

라곤 말해도 나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게 설득력이 없다. 상대방이 하는건 뭐든 하겠다고 해놓고 물이 무서워서, 인어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게 어이가 없기도 하다. 물에 젖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서서히 인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갈이 널린 해변을 지나서 신발에 파도가 스친다. 찰박, 찰박하던 소리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차는 느낌과 함께 사라지고 차가운 느낌이 발목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인어가 있는 곳은 더 깊은 곳이라 금방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 나 정말 물이 무섭거든? 지금도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

여러번 심호흡을 해도 심장박동이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몇발자국을 더 가야하는데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어서 그저 너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빠, 어쩌면 생각보다 아빠를 일찍 보러갈 것 같아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질끈 감고, 나는 천천히 한발자국을 내딛는다. 차가운 감촉이 서서히 상반신을 덮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보지 않으면 조금은 괜찮은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고 손을 뻗은채 네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28 이름 없음 (rH8IoGd9Yk)

2021-09-21 (FIRE!) 23:40:23

그녀는 추위로 얼어붙은 나무 사이를 다람쥐마냥 돌아다니며 습기를 머금은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크기가 있고 상태 좋은 나뭇가지들을 골라내더니,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양을 품에 안아 들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면 되려나? "

꼼꼼하게 골랐지만 그럼에도 성이 안 차는지 여자는 나뭇가지의 이곳저곳을 돌려보며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까지 향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사실 발목보다 조금 더 높게 쌓인 눈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새하얗고, 비슷한 생김새의 나무로 들어차 있었다. 이처럼 사방이 똑같은 풍경 속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지도를 꺼내지도 않고 주변 한 번 둘러보지 않는 그녀는 마치 이곳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나 왔어요-."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나무로 지어진 -그러나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듯 보이는 집의 문 앞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모닥불의 밝은 빛이 새어 나와 바닥에 쌓인 눈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작은 틈으로는 따뜻한 코코아 향기도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어깨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너무 뜬금없거나 이상한 상황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자유롭게 이어줘!

29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00:16:10

>>28

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마을 뒷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생각보다 위험한 동물들이 많아 이곳의 산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이면서도 위험하다. 마을 대대로 산장지기를 맡아온 그의 집안이었고 그도 산장지기가 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기에 겨울에는 입산을 금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 겨울에는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

눈이 오지 않아도 위험한 겨울산에 눈이 이렇게나 잔뜩 왔는데도 올라오다니. 정말 산신령님이 지켜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에겐 항상 큰 의문이었다. 자신도 돌아다니면서 곰을 종종 만나는데 어떻게 그녀는 한번도 그럴때가 없는지. 그리고 그녀는 항상 땔감이 다 떨어져갈때쯔음 땔감을 한가득 들고 오곤 했다. 마치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궁금증이 생겨가는 항목이다.

" 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

이렇게 말한 것도 수십수백번이라 톳씨도 안먹힐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하는 그였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내어주면서 그녀에게 권유한 그는 코코아 가루를 컵에 넣고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붓는다. 은은하게 퍼지던 코코아 향기가 더욱 진해지고 여자에게 코코아를 건네준 산장지기는 다시 본래 앉아있던 곳에 등을 깊숙하게 묻는다.

" 여기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을텐데 안힘들어? "

물론 야트막한 산이라 산세가 험하지는 않고 산장까지 오는 길도 잘 닦여있어서 평소엔 괜찮지만 지금은 눈이 잔뜩 와있을때다. 산장까지 올라오는 길은 대충 눈을 치워두긴 했지만 그래도 올라오는게 힘들었을텐데 항상 가벼운 몸놀림으로 슉슉 올라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30 이름 없음 (9Xy1OOj/xU)

2021-09-22 (水) 02:07:10

>>29

" 괜찮아요. 여길 누가 지켜주는데 제가 위험할까요. "

그녀는 마치 영역을 과시하는 고양이처럼 뿌듯한 표정과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가 없었으면 그가 귀찮게 나무를 구하러 나가야 했을 거라면서 뻔뻔스럽게 칭찬까지 요구했다.

" 그리고, 이렇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

상대는 심심하다는 말이나 의견을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잘도 혼자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자연스럽게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곧 불에서 얼마의 거리를 두고 천을 깔더니 모아 온 나뭇가지를 말리려는 듯 그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지금까지 잘 피해왔으니까 괜찮아요. 전 여기서 곰의 'ㄱ'자도 본 적 없는걸요? 그리고... "

가져온 땔감의 정리를 마친 그녀는 그가 권해준 의자에 앉으며 수십수백 번이나 들어온 그의 말을 수십수백 번째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곧 고맙다 말하며 코코아를 받아들고는 오히려 중요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려는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조금 숙이며 당신에게도 몸을 낮추라 팔랑팔랑 손짓을 해 보였다. 이 날씨에 이곳에 올 사람도 거의 없고 집에도 이들 이외의 외부인은 없을 테지만,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근처의 누군가가 듣는걸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실 전 눈의 요정이라서요. 곰이랑 만나도 제가 이겨요. "

어른이 되어서는 한참 작은 어린아이들이나 할법한 -심지어 이젠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농담을 진지하게 말하더니 결국 본인도 우습게 느껴졌는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 전혀요-. 음, 사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코코아만 마시면 전부 사라져서 괜찮아요. "

바로 여기 앉아서요.
자신의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앉은 자리에서 발을 톡톡 구르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어렸을 적부터 겨울만 다가오면 항상 이리저리 쏘다니며 눈을 헤치고 다녔던 탓인지 이런 날씨는 그녀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곳에 찾아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딱 한 번, 눈에 빠져 넘어질 뻔했던 날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루가 지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눈의 요정이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 듯 싶었다.

31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02:38:31

>>30

말해도 듣지를 않으니 포기를 할법도 한데 산장지기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보통의 산장지기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많이 젊어보이는 그는 이 눈 앞의 여자가 겨울에는 안전하게 따뜻한 집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엔 산장에서 지내야하는 그도 내심 그녀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숨기고 있을 뿐이다.

" 그래도 다음부턴 올라오지마. "

항상 이런식으로 잔소리가 끝이 나지만 또 다음에 올라올테고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여자가 늘어놓은 나뭇가지들을 솜씨 좋게 다시 놓는다. 조금 두께가 있는 것들은 앞쪽으로, 얇은 것들은 뒤쪽으로. 빠르게 일을 마친 산장지기는 여자가 늘어놓는 말에 헛웃음을 지어버린다. 눈의 요정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그래도 한번도 곰을 안만나는 것을 보면 정말 뭐가 있나봐. "

물론 곰을 만나는게 쉬운 일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총성을 내서 곰의 접근을 막곤 하지만 겨울이라 먹잇감이 부족한 곰이라 겨울에 몇번은 마주치곤했다. 산장지기도 약간의 긴장을 하고 지내는 곳에서 저렇게 천진난만한 태도라니 본인은 아니더라도 정말 눈의 요정이 지켜주는거 아닐까, 하고 산장지기는 생각한다. 그래도 곰이랑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하니까 내려가는 길엔 산장지기 본인이 동행할 생각이다.

" 나도 어릴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장을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가 제일 맛있었어. "

산장을 물려받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전 산장지기, 그러니까 남자의 아버지는 산속의 조난자를 구하러 갔다가 곰에게 습격 당해 명을 달리했다. 산에 가까운 마을은 산장을 지키는 자가 없으면 겨울산의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산장을 지켜야했고 결국 대를 이어서 그가 선택된 것이다. 물론 언젠간 자신이 맡아야하는 산장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도 긴 겨울을 혼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간혹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 이장님은 잘 계시니? 듣자하니 몸이 안좋으시다고 하던데. "

마을 소식은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식량을 내려놓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다. 곰의 습격에 대비해서 여러명이 우르르 몰려와 짐을 내려놓고 안부를 주고 받곤 하는데 산장지기는 그때를 가장 좋아했다. 음식이 생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하지만 이렇게 혼자 올라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거실 겸 부엌과 방 두개로 이루어져있는 작은 산장에서 그는 말린 육포를 가져와 뜨거운 물에 불린다. 산속이라 혹여 불이 날까 난방을 제외하고서 불은 최소한으로 쓰고 있었기에 주로 먹는 것도 이런 육포 같은 저장식들 뿐이다. 그러다 여자를 바라본 산장지기는 찬장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서 건네준다.

" 너가 좋아하는 과자지? "

저번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왔던 것이다.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식량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줄어서 이런 간식거리는 아끼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도 육포를 줄수는 없었으니까.

32 이름 없음 (mL4eO9bFNU)

2021-09-22 (水) 08:49:43

>>31

" 음-. 생각해 볼게요. "

진지한 척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바로 가볍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장난스레 거만한 표정을 보이면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기어코 다시 이곳까지 올라올 테니 사실상 어떤 대답이 나오든 무의미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한숨에 숨죽여 웃더니 더이상 말도 않은 채로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명화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기별로 착착 정리되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녀는 뭐가 있나보다는 그의 말에도 그저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뭐라 말해주고 싶어도 그녀 역시 자신이 곰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혹여 이곳으로 올 때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곰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산장으로 향할 때 들고 갔던 물건들을 전부 떠올려보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곤 애초에 마을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들 뿐이었다.

"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

결국 그녀가 내놓은 건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 그럼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산장지기의 특별한 코코아네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에 들린 코코아잔을 조금 들어보였다.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는 곰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또 겨울이 오면 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며 산에서 떨어진 곳으로 마을을 옮기면 곰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없고 누군가가 외롭게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장님에게 찾아가 철없이 마을을 옮기자 울며 떼를 쓰기도 했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겨울이 되면 직접 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약을 드시고, 지금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별다른 일만 없다면 이제 괜찮을 거라곤 했지만... "

그녀도 이장님의 상태가 쉽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괜찮다는 말의 대부분이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다른 계절 -이를테면 여름이나 가을보다 유독 겨울에 앓는 병들이 더 지독하고 끈질겼다. 이장님이 앓고 계신 병도 원래는 그리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큰 효과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 아, 맞아요! 좋아해요! "

그녀는 컵을 내려다보며 잠시 조용히 있다가, 그가 과자를 건네자 반가운 걸 본 것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녀의 손은 그가 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본인이 들고 온 가방을 집어 그곳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했다.

"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

" 바로, 이게 있으니까요. "

그녀는 가방 안에서 와인병과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주머니 안에는 사탕 조금과 비스킷, 아몬드와 호두, 작게 잘려 포장된 치즈 조각 따위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안주가 되려면 과자도 좋지만 육포가 더 좋지 않겠냐며 웃었다. 가져온 와인은 아직 손대지 않은 새것인지, 살짝만 흔들어도 제법 묵직한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내려갈 생각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아주 작정을 하고 가져온 듯 보였다.
끝.

Powered by lightuna v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