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33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13:15:16

>>32

어차피 그도 여자가 말을 들을거란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올라오지 않을 사람이라면 진즉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장난스럽게 보여주는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앞으로도 쭉 산을 오를 것이라는걸 누구나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산장지기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아무리 홀로 지내는데 익숙해졌다고해도 사람인 이상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내심 그녀가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남모를 걱정을 하기도 했다.

"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함께 마셨을테니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

물론 들어가는건 평범한 코코아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마시는 코코아는 특별하니까. 어릴땐 산장에 올라가는게 무섭기도 했고 힘들어서 가기 싫다고 칭얼대곤 했지만 산장에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와 아버지가 내어주시던 간식들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간혹 곰을 마주치면 정말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 이장님도 나이가 많으시니까, 슬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시면 될텐데. "

이장님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지만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정정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력이 쇠하셔서 한번 아프시기 시작하시더니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비록 산장에 올라와있었지만 그에게도 꽤나 걱정거리다. 마을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셔도 괜찮을텐데 고집만큼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 그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

요즘 같은 세상에 와인 구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묵직한걸 보면 무거울텐데 저런걸 들고 여기까지 잘 올라오다니. 산을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장지기에게도 그것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그가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조금씩 다시 내리고 있었고 바깥 기온을 보여주는 온도계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추워지려는걸까, 산장지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 컵을 두개 가져오며 말했다.

" 조금만 마시는거야. "

그녀가 가져온 여러 안주거리들은 여기선 꽤 먹기 힘든 것들이라 맛있어보이긴 했지만 산장을 지키는데 술에 취해버리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하산할때 산 입구까진 같이 내려가줄 생각이라, 적어도 제 정신을 붙잡을 정도까지만 먹어야했다. 하지만 산장에서도 혼자 술을 홀짝대며 마시는 산장지기에게 이 정도 술은 음료수에 불과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여자가 몸을 못가누면 산에서 위험해질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먹이곤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술을 받아서 코르크를 딴 그는 잔에 반 정도 채워서 여자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몫도 따라서 와인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흘리지 않게 마개를 다시 꼭 닫은채로.

" 여긴 왜 자꾸 올라오는거야, 심심해서? "

마을이 좀 더 놀기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고 그녀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다. 그리고 음식점이나 술집 같이 놀기 좋은 공간이 마을에도 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오는지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34 이름 없음 (qbY3nsMYTA)

2021-09-22 (水) 17:46:25

>>33

" 그럼 나중엔 당신의 아들도 코코아를 마시러 오려나요? "

혼자서 멋대로 당신과 작은 -그리고 당신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똑 닮은 어린아이가 그와 함께 산장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지 코코아가 담긴 자신의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대충 아이의 키 높이 즈음까지 내려보며 웃었다. 그녀는 조용함이 아니라 사람의 말소리로 가득 찬 산장을 떠올리며 컵의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쭉 마셨다.

"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분이니까요. 아마, 쉽게 놓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자리를 물려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쉬시라며 이장님과 그 아들이 실랑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탓에 생기던 그 작은 다툼마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일깨우게 만들었다. 그녀는 먹먹해진 기분으로 조용히 컵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 당연히 집에 있는걸 가져왔죠. "

그녀의 부모님이 와인을 좋아했던 탓에 집에는 온갖 종류의 와인들이 보관되어 -정확히는 수집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동생에게 나이가 차면 조금은 꺼내 마셔도 된다고 했으니 한 병 정도는 가져와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을 따라 고개를 들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가져오는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작은 허밍과 함께 주머니를 펼쳐 안에 있는 것들을 골라먹기 좋게 분류해 두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노래가, 그녀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 정말 조금만 마실게요. 걱정 마요-. "

잔을 건네받자마자 벌써 한 모금 마셔버린 그녀는 그에게 한 말과 다르게 혼자 병을 전부 비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신난 듯 보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시는 술의 양이 많지도, 속도가 빠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 음,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보러 오는 거죠. "

보려는 것이 겨울 산의 풍경인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 대상이 당신이라는 듯 분명하게 그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분명 마을에도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마주치는 마을의 친구들도 좋았지만, 좀 더 자주 -특히 겨울이 오면 보기 어려운 친구를 보러 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란 이유가 없어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좋을 대로 그를 친구라 정의하며 계속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 사실 이 귀한 것도 놓칠 수 없긴 하고요. "

그녀는 술 보다는 달콤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의 코코아만큼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없었다.

" 왜요? 설마... 내가 오는게 싫은 건 아니죠? "

그의 질문에 잘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그를 향해 불쑥 질문했다. 말투는 마치 그를 추궁하는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고 약간 장난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녀는 무슨 대답을 듣더라도 -설령 정말로 싫다는 대답이 들려오더라도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처럼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이곳에 올 터였다.

35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21:13:19

>>34

" 아들이 생기면 그렇겠지? "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귀어본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가 벌써 1년여전이고, 그렇게까지 오래 사귀어본 기억도 없다. 어쩌면 인생에 여자라고는 연이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산장지기라는 일을 대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는 그저 컵만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이장님의 아들은 남자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이장 자리 때문에 이장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여러번 보곤 했다. 큰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분도 이장님을 닮아 한 고집하셨기에 그런 자잘한 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시고 언젠간 이장 자리를 물려받으시지 않을까, 산장지기는 말없이 생각한다.

" 그 집에는 술이 많았으니까. "

아버지가 가끔 그 집에서 와인을 얻어오곤 했던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이 술도 대충 집에서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거기서 가져왔다니. 그래도 술을 좋아하시는만큼 보는 안목도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와인을 바라본다. 그렇게 와인을 따라서 건네주자 말과는 다르게 신나보여서 빠르게 다 마셔버리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보여 남자도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 보러오면 나야 좋지만. "

산장에서의 삶은 외롭기에 여자가 온다면 그에게는 좋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겨울 산길을 계속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다음부터는 올라오지말라고 하고 싶어도 외로움에 이미 지쳐버린 그가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산장 밖의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면 느껴지는 설렘도 더이상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싫은건 아니지만. "

벽난로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자신이 하는 말이 부끄러워서일까.

" 싫다고 해도 어차피 올라올거잖아. "

그가 아는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저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싫다고해도 올라올께 뻔했다. 그만큼 뻔뻔스러웠지만 그만큼 능글맞은 사람이라 산장지기가 항상 말려들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36 이름 없음 (Yvdwalg5uE)

2021-09-22 (水) 23:33:53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외국으로 떠나 바이올린 쪽으로 유학을 간 소년은 24살이 되어 7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어렸던 소년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았다. 유학을 간 동안에는 단 한번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는 나름대로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연락을 나눠 최소한의 교류는 유지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 귀국할 때 마중 나온다는 친구가 있었고 사내는 정말로 나와줄지 나름대로 기대를 하며 소속을 밟고 자신의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기고 공항을 걸었다.

"정말로 있을까."

최소한의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다시 만나는 것은 칠년만이었다. 과연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을 하며, 혹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고 아무도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며 사내는 게이트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얼굴이 눈에 보이진 않았는지 사내는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좀처럼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있다면 인사를 하겠으나, 보이지 않는다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역시 한두번은 돌아올걸 그랬나.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쭉 있긴 했는데."

/뜬끔없이 쫓아내는 전개나 맥커터만 아니면 누가 나오더라도 환영!

37 이름 없음 (oT.DHfURi.)

2021-09-23 (거의 끝나감) 06:14:15

>>36 그런 친구가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은지 7년은 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주 전화하고 톡을 주고 받아 고등학교 동창이라기보단 지인에 가까워진. 그렇다고 해도 공항 마중까진 좀 과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의미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귀국하는 날 모두들 기상천외한 일정들이 있어 마침 연주회를 마치고 쉬고 있던 수연에게 바톤이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일이고 전공을 살려 음악가가 된 친구들 말고도 졸업이며 회사에 일정이 잡힌 친구들도 않았으니까.

얘는 왜 하필 애들 졸업시즌에 귀국했담. 뭐 내 알바는 아니지만. 드뷔시의 달빛을 작게 허밍하며 버릇처럼 유리로 된 펜스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던 그는, 게이트에서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오자 준비해둔 이름 석자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사람이 어느정도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 아직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아마도 나와 동년배인 것같은 동양인 남성이 보였다. ...걘가? 마중은 나가겠다고 톡방에는 알렸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나왔을 가능성이 보다 컸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긴 하니 이상해보이지는 않겠지.

"여...여기."

아, 이거 진짜 어색해. 집에 가고 싶다.

38 이름 없음 (WFD45kwC4Q)

2021-09-23 (거의 끝나감) 07:16:07

>>37 누가 나와도 환영이라고 했지만 마중 나오는 것 자체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고 어쩔 수 없이 나왔다는 전개는 조금 애매하네. 일단 흔쾌히 나왔다는 것을 가정해서 써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 답레는 미안하지만 패스할게.

39 이름 없음 (7EILlj9wo.)

2021-09-23 (거의 끝나감) 10:30:09

코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무심코 콧물이겠거니 코 밑을 훑었고, 제대로 닦아내 손에 그 무언가 묻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코에서 무언가 흘렀고, 훌쩍거려도 계속 흐르는게 콧물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자니 퍼뜩 깨달았다. 코피다!

"우와...?"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는 피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서 다급하게 휴지가 될만한 걸 찾아보려니, 내가 있는 곳은 계단이었다. 무릎에는 내가 필기한 노트와 문제집이 놓여있었고, 옆에는 교과서 두세 권과 다른 문제집 한 권, 또 다른 노트 하나. 맨 위에는 열려있는 필통이 놓여있었는데, 어째 배가 불렀어야 하는게 텅 비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세칸 위쯤의 계단에 앉아있던 나는 그 아래를 살펴 보았다. 필통에 담겨 있어야할 펜들을 비롯한 필기구들이 죄 쏟아져있었다. 아직 취해있는 잠을 떨쳐내려 하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졸려서 계단으로 나왔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차가운 계단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짐에 따라 식고 있는 공기에 서늘함을 느끼면서, 잠이 깨는 것 같다며 공부를 이어하던 것 같은데... 깜빡 잠들며 필통을 엎고, 그것도 모르고 계속 졸다가 코피가 나서 깬 상황이라 추측한다. 그래, 지금 나는 코피가 나는 와중에 계단에다 내 짐을 어질러 놓았고 휴지가 없는 노답 상황이구나!

"오. 어. 아. 조, 좀비 아니에요!"

어이없는 상황에 실성이라도 한 것마냥 웃음이 새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노답이네! 코피 그치면 친구들한테 얘기해줘야겠다, 근데 일단 어쩌면 좋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누가 계단에 오면 이걸 치우려나. 으악, 이제 코피난 거 손에서 넘치겠는데! 얼 빠진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손으로 그칠 생각 없는 코피만 바치고 있었다. 정말 어쩌면 좋나, 주변에 휴지, 아니 그 대신할만 한 것이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다 누군가를 발견한다. 계단에 뻗어 있다가 코피 흘리며 일어나 웃음 소리를 흘린 사람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아 다급하게 외쳤다. 좀비 아니라고. 근데 나 너무 쪽팔려! 차라리 좀비할래!

40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12:27:18

>>39

도서관보다는 창고에서 신나게 기타나 치고 싶었지만 이번 시험을 망쳐버리면 내 기타의 넥이 분질러지게 생겼기에, 억지로 도서실에 나와 공부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물가물한 내용들을 붙잡고 씨름을 하자니, 적응을 하지 못한 머리가 아파 도서실을 잠깐 빠져나와서 편의점에 들러 두통약과 에너지드링크를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깥 공기를 조금 쐬니 그래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꼭대기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귀찮아 층계참을 돌아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문득 계단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무슨 일이야? 싶어서 후다닥 발걸음을 서두르는 찰나... 층계를 내딛은 발이 노트인지 코팅된 인쇄물인지 모를 뭔가를 밟고 쭐쩍 미끄러졌다. 그대로 세상이 한 바퀴 휘릭 돈다 싶더니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아이고......"

다행히 뒤로 나자빠져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고꾸라져서 책이며 노트들이 엎질러진 층계참에 헤딩을 박은 상황. 난간을 잡고 일어서도 시야가 흐릿하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슬랩스틱 코미디겠지만 1인칭으로 보면 코앞에서 폭탄이라도 하나 터진 느낌이다. 놀라운 사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점이다. 놀랍도다, 아세트아미노펜. 그 덕분에 생각보다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난간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내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나보다도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저 사람이 좀더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바라보면 온통 피에 절어있는 손이며 얼굴이.

내가 쪽팔린데다 무엇보다 엄청 실례되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난간을 붙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번엔 진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우와악."

하고 놀라서 보면, 지금 귀신이나 헛걸 보는 건 아니고.. 코피를 흘리고 있을 뿐인 그냥 사람이다. 띵한 머리로도 매우 실례했다는 자각이 들어 반사적으로 사과가 나갔다. "어... 아니 그... 죄송..." 한꺼번에 여러 일이 벌어진데다 물리적 충격까지 받아 아직 멍한 뇌를 붙잡고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휴지가 있던가? 하고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보면 잡히는 거라곤 손수건밖에. 오. 이 상황에서 쓸모있는 물건이잖아.

"저기요, 이거라도."

띵한 머리를 붙잡고, 손수건을 내민다. 그제서야 뭘 밟고 미끄러졌는지 발밑으로 시선을 돌릴 만한 정신이 든다. 노트니 참고서니 교과서니 하는 것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이것도 주워줘야겠네.

41 이름 없음 (8TY5.RrNDM)

2021-09-23 (거의 끝나감) 14:42:48

>>40

뭐, 뭐야. 좀비 아니라니까 왜 급해져? 사실 이쪽으로 발을 재촉하는 저 사람이 좀비라서, 내 피 냄새를 맡고서 여기로 오고 있던 거야? 내가 방금 소리 내서 위치 확인하고 오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좀비가 어딨겠어. 그렇지만, 지금 나와 가까워지고 있는 저 누군가 사람이든 좀비든 당황스럽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여기로 갑자기 왜 오는지, 뒤로 물러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책이고 펜이고 다 어질러놨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가는 분명 코피가 발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옷이나 책에 묻으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힉?!"

여러모로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코피 흘리면서 깬 상황도 충분히 잠이 달아날 만 했지만, 내 바로 앞에서 넘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이 사람도 그렇다. 손이 모자라서 넘어지려는 모양새를 봤음에도 잡아주지도 못하고, 크게 넘어지는 소리에는 되레 흠칫 놀라버렸다. 놀라서 크게 떠진 눈으로 보았던 것을 되새겨보자면, 저 사람 분명 계단에 머리 박았다. 으, 아프겠다. 놀랐던 표정은 머리가 띵할 고통이 상상되어 찌푸려졌다. 어, 잠깐만. 다시 되새겨보자. 내 책인지 뭔지 밟고 넘어진 거 아냐? 어?!

"저, 괜찮..."

우와악.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나의 친절은 우와악, 하고 싹둑 잘려 나갔다. 좀비 아니라고 그랬는데! 사람이라고 외칠 걸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서 엎어버린 말은 되 담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버린, 지금 내 손에 뚝뚝 떨어지는 코피처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과를 받고 나니 고갯짓이라고 세차게 해주고 싶었지만, 코피 때문에 그냥 입꼬리만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아니, 아녜요! 놀라실 만 한걸요..." 제가 좀 사연이 있거든요. 사람 놀라게 하려고 여기서 코피 흘리고 있던 것도 아니고, 누구 한번 계단에서 굴러보라고 책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렸네요. 구구절절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과가 먼저니 저 머릿속 어두컴컴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어. 괜찮...... 고맙습니다."

휴지도 아니고 물티슈도 아니고 손수건의 등장에 한사코 거절하고 싶었다. 저 손수건이 소중한 물건이면 어쩌나 싶어서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기필코 언제 피를 닦았냐는 듯 깨끗하게 빨아서, 정 안 되면 새것이라도 사서 돌려드리고 말겠다 다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피가 그쳤다는 점이다. 손과 얼굴에 있던 핏자국은 손수건으로 옮겨갔고, 여전히 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손수건으로 닦았다고 해도 화장실은 한 번 가야 할 거 같고, 계단을 난장판으로 만든 저것들도 치워야 하고, 손수건 주인 되시는 분께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고, 죄송하다는 사과도 드려야 하는데.

"저기. 제가 정말 죄송하고 정말 감사해서요... 1번, 여기서 기다리신다! 2번, 연락처를 넘기신다! 둘 중의 하나 골라주세요!"

42 이름 없음 (sacPqPwCKA)

2021-09-23 (거의 끝나감) 15:03:07

>>35

"음-. 그럼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져와야겠네요. 나중에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보고 귀엽다고 할 만큼 아-주 귀여운 인형으로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다란 인형을 가져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디자인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의 진심은 인형을 선물하는 것보다 앞으로 겪게 될 외로움이 -누군가는 끝없이 이어가게 될 산장지기의 고독함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 없이 하는 말은 그저 떼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곳이 즐거움으로 채워질 방법들을 이야기하려 했다.

" 이장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분명.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빈 컵을 쥔 그녀의 손끝은 희게 질려있었다. 곧 애써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려 했다. 붙잡고 있던 컵을 손에서 놓았음에도 금방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의 색깔은, 그녀가 가진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 마셔보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을 거예요. "

그녀는 마을 사람들도 알아주는 부모님의 와인 컬렉션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왜 이렇게 술을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후 와인의 맛을 알게 된 뒤에는 그녀도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대가 담긴 듯 보이는 그의 눈빛에 당당하고도 확신 있는 말투로 맛있을 거라며 이야기했다.

"그렇죠? 좋죠? "

놀리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싫은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마치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것 같은 그의 얼굴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가 올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요. "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우아한 -그러나 과장된 몸짓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 마을에서 올라오는게 싫으면, 차라리 나도 이 산에 집 짓고 살까요? "

여기에 집을 더 짓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태연한 말투와 모습들은 방금 꺼낸 말이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43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17:41:20

>>41

그러니까, 실수의 발단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그만 쓸모없는 오지랖이 발동해 발을 서둘러 놀린 것이고, 실수의 결정적 원인은 좀비 아니에요, 라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뭐라고 되물어보려다가 발밑을 미처 주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순간 천지가 뒤집히는 바람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잠깐 잊었고, 그 좀비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꺼낸 말인지 깨달은 것은 이미 피범벅이 된 얼굴에 괴성을 질러버린 후였다. 아, 이 무안하고 어색한 공기...

사실 이런 상황에선 휴지나 물티슈를 내미는 게 맞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 여행용 티슈와 물티슈가 한 팩씩 있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내 가방이 도서실에 있다는 거였고, 무안한 나머지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손수건부터 내민 거였다. 마침 어제 세탁하고 나서 안 쓰고 넣어만 뒀던 거라 천만다행이다.

"이러려고 들고 다니는 물건인데요 뭘."

손수건을 건네주고 나서, 손을 들어서 층계참에 들이박은 이마를 만져본다. 아야야 소리가 나올 뻔한 걸 눌러참는다. 아세트아미노펜의 진통효과는 위대했지만 고통을 전부 다 없애주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아무래도 혹이 날 것 같다. 그래도 혹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이빨이나 콧대를 들이박았으면... 끔찍한 상상을 잠깐 하다가, 얼굴의 피를 다 닦아낸 듯한 네가 건네어오는 말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잠깐 어딜 갔다오려는 것 같다. 아까 성대하게 자빠링한 게 어떻게 보였을지 마음에 걸려서, 나는 괜찮다는 의사표현도 할 겸 미소를 지으며(고통 때문에 좀 찌그러진 미소가 되긴 했다만) 선택지 1번을 의미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분히 지혈하고 오세요!"

그 동안 이 계단에 한가득 엎질러진 이것들을 정리해두면 될 것 같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는 일이고, 혹시나 나같은 칠푼이가 또 자빠질 수 있는 거고. 들이박은 데를 더 만지면 덧날까 봐서 손을 내리고, 차곡차곡 계단에 엎질러져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44 이름 없음 (1kkkxSUQfo)

2021-09-23 (거의 끝나감) 17:45:38

>>42

" 인형 같은게 있으면 밤에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는데. "

등반객들이 묵어가는 산장보다는 조난자들을 대피시키고 곰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곰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낼 수 있는 정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인형이라니 별로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밤에는 정말 조용해 벽난로만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선 그마저도 무서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산장지기에게는 그 인형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을게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 이번에 병이 다 나으시면 진지하게 이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는게 좋겠어. "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를 않으시다 이렇게까지 와버렸다. 이젠 본인도 아프셨으니까 깨달으시는게 있을거라 생각하고 산장지기는 달력을 바라본다. 벌써 아프셔서 병상에 누우신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을 오고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악화는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악화 되시면 분명 돌아가실 것이 분명했다.

" 원래 그 집의 와인 셀러에 들어가있는 것들은 고르고 고른 것들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걸. "

그가 성인이 되고나서 와인을 처음 마셨을때는 그 맛이 너무 역해서 안좋은 기억만을 심어줬지만 그것을 송두리채 바꾼게 저 집의 와인이었다. 싼 와인이 안좋은 것도, 비싼 와인이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시면서 건네준 와인 한잔의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그에겐 그때 마신 와인만큼이나 지금의 것도 마음에 들었다.

" 그래도 너무 자주는 오지마. 진짜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니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와인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켁켁거리며 잔을 황급히 내려놓는다. 휴지로 입을 닦은 산장지기는 여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기 뭐가 좋다고 집을 하나 더 지어. 할 것도 없는데. "

물론 둘이 지낸다면 덜 외롭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산속에 있고 전기도 발전기로 돌리는 곳이다. 대부분을 벽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살아야하는 곳에 온다니 그의 생각에서는 좋지 않은 짓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산장지기를 자신의 대에서 그만두고 싶어했다. 대대로 내려오고 있고 중요한 역할이지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선 한참이나 짧은 시간을 산장에서 보낸 산장지기였지만 새삼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 마을엔 재밌는 것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안전하니까. 위험한건 나 혼자로 충분해. "

마을 사람들도 그렇기에 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호의도 산장지기는 마을 사람들의 호의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45 이름 없음 (/P0NEjDf/U)

2021-09-23 (거의 끝나감) 18:52:42

>>43

"진짜 정말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당부에 당부를 하고서 자리를 비웠다. 도움만 주고서 홀랑 사라져 버릴까, 발걸음이 바빴다. 화장실에 가서 꼼꼼히 얼굴과 손을 다시 한번 닦아야 했고, 도서관에 가방만 두고서 나온 자리에 돌아가야 했다. 가방에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만한 무언가 있지 않을까 당신을 붙잡아 두었다. 그런고로 뭐가 있으려나 가방을 털어보면 죄 주전부리뿐이다. 과일 맛 젤리, 한입 크기 초콜릿, 이런저런 맛이 다 있는 사탕...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제이 좋아하는 코코넛 휘낭시에, 제삼 좋아하는 크렘 브륄레 마들렌... 공부한답시고 저녁에 집을 안 들어가니 저녁 대신으로 집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집이 베이커리라는 이점은 이런 데 있는 거고, 아무튼 저녁을 때우려고 가져온 거라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호불호를 알 수 없으니 일단 전부 다 챙겼다.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잖아! 죄송하고 고맙다며 받은 걸 먹고 알레르기로 응급실 가면 저주받는다! 어쨌든 우리 집 베이커리 종이봉투에 담긴 구움 과자들과 각각의 젤리, 초콜릿, 사탕 봉지들을 품에 다 챙기니 과자로 만들어진 마녀의 집을 발견한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리고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반창고랑... 반창고밖에 없네! 반창고라도 챙긴다.

"다녀왔, 으악!"

이걸 치우고 계시면 어떡해요! 소리치고 싶은 걸 으악, 하고 참아냈다. 이걸 먼저 치우고 갔어야 했나 싶지만, 혹시라도 미처 닦이지 못한 피가 묻는 게 싫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트 중 한 권은 공부하기 위한 필기 노트라거나 오답 노트, 정리 노트가 아니라 그림 노트여서 더욱 그랬다.

"저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례를,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 곰곰 생각해보니 아차 싶어진다. 2번, 연락처를 남기신다! 이 말이 틀렸음을 이제야 알았다. 연락처를 드리는 게 맞았다.

"3번은 어떠세요...? 제 연락처 드리기... 저 때문에 놀라시고, 저 때문에 다치시고, 저 때문에 손수건도 엉망진창에......"

나 엄청나게 사고 쳤잖아...? 새삼 저지른 잘못들을 나열해보니 쪽팔려서 좀비가 되겠다 할 때가 아니었다. 엄청 아프신 거 아냐? 아까도 말 그대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셨고, 어디 더 안 다치신 건 맞을까? 근데 어른이면 어떡하지. 내 또래면 몰라, 어른이면 학생이 해주는 답례 같은 게 성에 찰까.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세탁비랑 진료비로 쓰라면서 카드로 해결할 수가 없잖아! 자연스레 표정이 울상이 되어간다.

46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23:06:47

>>45

으악! 하는 비명소리에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다. 내 기타에 걸고 맹세컨대 방금 뒷목 털꼬랑지까지 다 곤두서면서 움찔하는 게 보였을 거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본다.

"어.. 나도 피 나요?"

무안해할까 봐 농담 한 스푼 얹어서. 근데 진짜로 피 안 나는 거 맞나? 하고 손을 들어서 어루만져본다. 찍은 데가 붓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확실히 안 난 모양. 다만.. 혹은 실시간으로 부어오르고 있다. 만지니까 아파서 후다닥 손을 뗐다. 으악 소리가 따라서 나올 뻔했다. 아직 못 주운 노트가 몇 권인가 있어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네 품에 안겨있는 익숙한 봉투가 보인다. 그리고 그게 답례라나. 어라.

"이런 걸 받자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필이면...

"내 원픽 단골 빵집.........이잖아..."
─꼬르르르륵.

나에게 있어 식사시간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로고를 보고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마냥 배꼽시계가 운다. 으악.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편의점에서 약이랑 함께 주먹밥 같은 거라도 먹는 건데 그랬어. 당황스럽게 아래로 고개를 숙이니, 교복 셔츠 웃도리의 단추가 하나 나간 것까지 보인다. 안에 티셔츠야 입고 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끝나고 집에 들러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걸! 으악! 만약 내가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면 오늘 일기로는 두 글자만 적을 거야. 으악!!!

"아니, 그 연락처라뇨,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놀라거나 다친 거야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손수건이야 다시 세탁하면 그만인걸요..."

그렇잖아도 무안해져서 빨개져 있는데 연락처를 주겠다는 말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림이 어째 이상한 것도 같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손가락 4개를 쫙 폈다.

"4번!"

그래서 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나 그 빵집 아는데 거기서 만나요. 지금 가도 괜찮고? 아니 괜찮나?"

...정말로 이런 대응으로 괜찮은가? 나? 월 수 금마다 부원들이랑 거기 들리긴 하는데, 그런 주제에 거기 언제 닫는지 모르잖아?


# 묘사를 미처 못했지만 이 캐릭터는 갈색 단발의 활기찬 밴드부 메인보컬+리드기타 고교생이며 현재 넥타이만 없는 교복 차림입니다v.v

47 이름 없음 (eFgN0RFsUA)

2021-09-24 (불탄다..!) 00:16:47

>>46

"피 나요?! 반창고를 가져오기는 했는, 아. 그전에 지혈부터, 휴지가... 가방을 가져올걸!"

이것저것 품에 죄다 끌어안은 채로 허둥거렸다. 손을 잘못 풀었다가는 분명히 이 봉지들도 계단에 미끄러질 테니 반창고를 건네지도 못하고, 휴지를 찾자니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해 가져오지도 않았고. 뒤늦게 걱정스러운 시선에 죄송한 마음까지 덧끼워서 상처 부위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어. 어... 피 안 나는 거 같은데. 그것 보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면 어떡하려고! 흉 지면 어떡하려고! 소리치기 전에 당신의 손이 먼저 아래로 향한다. 그럼 다시 생각한다. 피 정말 안 나는 거 맞지? 여간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눈치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원픽 단골 빵집'이요?"

우리 집? 우리 집 베이커리 말하는 거지? 어, 어라.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끌어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보았다가, 얼빠진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거린다. 배꼽시계 소리가 울릴 때야 정신을 차린 듯하다. 곰곰 생각해보자니 단골손님 중에 학생 손님들도 있는데, 교복을 보자니 너와 같은 학교 같더라 하고 부모님이 말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 학생 손님 중에 같은 학교인 사람이, 혹시 지금 눈앞에 이 사람인가 싶어졌다. 이제 다시 보니, 진짜 우리 학교 교복이잖아! 지금 나 교복 입고서 자기 학교 교복 못 알아본 거야? 지금 나 지금 부모님 가게 단골손님한테 민폐 3 스택 쌓은 거야?!

"이거, 이거 다 드셔도 돼요! 제 물건들은 제가 치울 테니까 이거 드세요!"

고작 그것 갖고 배 차겠냐고, 겨우 그 양으로 무슨 저녁이냐며 간식에 불과하다 가방에 더 챙겨 넣으시려던 부모님 손길을 만류한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절대 만류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직접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 사람한테는 우리 집이 당신의 원픽 단골 빵집이라는 사실을 영영 비밀로 묻고자 마음먹었다. 민폐만 끼친 자신이 싫어져서, 자신의 부모님이 하는 베이커리까지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부모님은 난데없이 단골을 잃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 도달한 결론이다.

"4, 4번?"

없던 선택지의 등장에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과 만나고서 몇 분 안에 얼이 몇 번이나 빠지는지 셀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새로운 선택지의 내용은 얼빠지게 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방금 자신과 베이커리의 관계를 당신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거기서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지금 가도 괜찮다는 말까지! 이게 바로 혼비백산인가. 지금 시간쯤이면 가게에 누가 있는가 머리를 굴려야 한다. 부모님이 있으면 낭패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 와 있어도 낭패요. 그렇게 되니 지금 상황 자체가 낭패였다. 가게 주인이 가게에 없을 리가 있냐고! 나 또 노답 상황이네!

"가, 가도는 되는데요..."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더 수상해 보일 거 같고, 4번을 거절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5번을 만들어보자니 4번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구상하지도 못했다. 원픽 단골 빵집에서 만나자는데, 심지어 지금 가도 괜찮다는데, 내가 을인 입장인데 어떻게 거절이 나오겠어요. 아빠엄마, 정말 미안. 나 단골손님 한 명 없애버릴 거 같아.


/ 교복 묘사가 없다고 사복이구나 생각해버린 채 어른이면 어쩌지 하는 걸 서술했구나 죄송합니다!!!

48 이름 없음 (O4dCYJephw)

2021-09-27 (모두 수고..) 19:31:27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마을의 유일한 시계공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위에서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일 정도로 엄청 작기는 하지만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냐고요? 당연히요! 시계탑이 고장날지도 모른다, 탑에 오르다 다치면 위험하다, 그런 이유들로 시계탑에 오르는 걸 금지해두었는데 어떻게 올라가봤느냐고요? 제가 거기에, 이곳에 사는걸요. 그 이유들은 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제가 사람을 무서워해서가 진짜 이유에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쉿. 사람들은 제가 시계를 너무 좋아하는 괴짜라서 혼자 시계탑 위에 박혀서 시계만 만드는 줄 알아요. 이것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저는 시계탑에서 혼자 살고 있고, 그건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나름 즐거워요. 저 아래에서 다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제가 만든 시계를 갖고 있거든요. 회중시계, 뻐꾸기시계, 탁상시계, 자명종시계, 째깍째깍 바쁜 초침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건 저에요. 시계들의 주인은 저를 못 알아보지만요. 사람들과 만나야할 때에는 남자인 척 변장을 하거든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꼭 모자를 쓰고, 안경도 쓰고, 망토를 둘러서 체구도 감춰요.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척 메모를 들고 다닙니다. 시계를 가져오지 못하는 손님들 위해서 가끔 정기적으로 시계를 가지러 가고, 돌려드리러 갈 때도 이 모습으로 다녀요.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정체를 들킨 것 같아요. 일단 아닌 척 무작정 잡아떼볼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당신에게 서둘러 적은 쪽지를 건넸습니다.

49 이름 없음 (aHPA5I61nc)

2021-09-28 (FIRE!) 21:20:11

붉은 사자는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가문의 문장이었다. 오랫동안 가문을 모시고 있던 집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는 6년의 시간이 흘러, 스무살이 되어 다시 자신이 태어날때부터 충성을 다 해야한다고 교육받은 가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사는 아버지가 하고 있으며, 자신의 동생이 좀 더 적성에 맞을 듯 하니, 자신은 그 가문을 지키는 검이 되고 방패가 되고자 하였고 가문을 이끄는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 사내는 교육시설에 들어가 검을 배우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길다면 긴 시간, 오로지 누구보다 강한 검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에,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도 잠깐 얼굴만 볼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단련에 힘 쓴 사내는 늠름한 자태를 보였다. 차분한 밤색 어두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입고 있는 옷의 옷깃을 정리하며 문에 들어선 그는 머지 않아 당주를 마주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돌아온 것을 보고하며,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며 앞으로 그 실력을 가문을 위해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들으며 오늘은 피곤할테니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다 들으며 사내는 꿇었던 한쪽 무릎을 펼치며 예를 갖췄다.

당주의 방 밖으로 나와 6년 전, 자신이 기억하던 풍경을 떠올리며 저택을 돌아다니던 사내는 자신이 옛날에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6년이 지나도, 이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는구나."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사내는 계단을 막 내려 1층 사용인들이 쓰는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진짜 뜬금없는 전개나 갑자기 내쫓는 그런 것이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괜찮아!

50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1:46:13

>>49
슬슬 피아노 레슨 시간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직속 하녀인 샐리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에, 마르그리트는 미련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요, 가죠." 차를 즐기고 난 흔적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하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레슨 룸을 향해 걸었다.

문득, 부진한 학문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피아노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말았던 것이 떠올라, 마르그리트는 희미하게 콧숨을 쉬었다. 한 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담담한 표정 너머로 감추며 걷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낯익은 듯 낯선 사내가 보였다. 누구더라? 분명 어딘가 낯익은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샐리가 말했다.

-"집사장의 맏아들이 새로 호위로 왔다는데, 지금 도착한 모양이네요."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몇년 전에 호위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떠난다고 했었지. 인정받았다니 실력은 그만큼 출중하면 좋겠네. 집사장도, 그 둘째 아들도 성실한 사람들이고, 저 사람도 몇년이나 성실히 수련해서 돌아왔으니, 후하게 대접한다면 그만큼 충성하겠지. 새로 들어온 사용인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 좋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르그리트는 집사의 맏이를 향해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능력을 인정받아 돌아왔으니, 앞으로 잘 일해주리라 믿어요.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섭섭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약속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자세한 업무는 시녀장이 전달해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쉬고 있어도 좋습니다."

51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1:50:43

>>50 >>49 아차차 혹시 동생도 아들이 맞을까? 무심코 아들이라고 써버렸는데 멋대로 설정에 손댄 것 같아서 좀 그러네;w;

52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1:54:41

>>51 딱히 설정은 안 정했으니까 아들로 해도 상관은 없어! 일단 지금은 내가 슬슬 자러 가야해서 내일 이을 것 같긴 한데 이은 캐릭터가 가문의 딸인걸까? 그러니까 집안 아가씨? 혹시 내가 착각했을까 싶어서 물을게!

53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2:05:31

>>52 그렇구나, 답변 고마워! 그리고 맞아, 가문 당주의 딸(영애)이라는 설정으로 이어봤어:)

54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2:07:43

>>53 그렇구나! 오케이! 그럼 답레는 내일 올릴게!

55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2:08:54

>>54 알겠어, 내일 보자!:)

56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8:00:24

>>50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이 자연히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것처럼, 사내 역시 그녀의 존재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허나 낯이 익다고 해서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간 아니었기에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녀와 함께 있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당주에게는 딸이 있었다. 6년 전, 저택을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곧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6년 만입니다. 아가씨. 말씀하신대로 제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 제 동생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미사어구를 붙이는 대신, 정말로 깔끔하고 담백하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과 충성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후,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며,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펼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다시 한 번 자신의 허리춤에 밀착시킨 후, 사내는 제대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간 별 탈 없이 평안하셨습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묻는, 말 그대로 큰 의미가 없는 안부인사를 하며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다시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말씀하신대로 시녀장이나 집사장인 제 아버님이 지시한 일에 충실할 생각입니다만, 혹여나 따로 제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검을 배우러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건 모두 이 가문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니까요."

/이렇게 이어두고 나는 다시 가볼게! 아마 다음에 잇는 것은 저녁 시간일 것 같아! 그때부턴 자유로우니 텀이 짧을거야!

57 이름 없음 (GaarwqdIiQ)

2021-09-29 (水) 10:40:07

왼쪽 귀, 피어싱 5개.

"진짜. 제발. 무릎 꿇으라면 꿇겠습니다."

오른쪽 귀, 피어싱 6개.

"손만 잡아주면 된다니까?"

타투, 3개.

"진짜 주사 맞으러 가기 싫다고오! 무섭다고!"

곧 눈물이라도 흘릴 듯 애처롭게 당신을 붙잡고 있는 이 사람, 귀에 구멍만 10개 넘게 뚫려있다.

58 이름 없음 (TPUSrHjOL2)

2021-09-29 (水) 11:12:04

" 정말... 어쩔 수 없네. "

귀에 구멍 뚫는 것보단 덜 아플텐데. 주사 맞으러 가기 싫다며 손만 잡아달라는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린다. 칭얼거리는 게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으니까.

" 내가 같이 가주는 수밖에 없나. 밥 한 번 사렴. "

당신과 같이 병원에 가주고, 손도 잡아주겠지만, 밥도 얻어먹을 요량이다.

" 주사보다 귀 뚫는 게 더 아프지 않니? "

59 이름 없음 (GaarwqdIiQ)

2021-09-29 (水) 11:40:58

"오케, 접수."

"말 바꾸면 3대가 탈모."

태도가 돌변한다. 당신의 팔에 자신의 팔을 얽어 붙들어 매려 한다.

"밥 까잇거... 편의점?"

씩 웃나 싶더니 이어진 질문을 듣고서는 어째 다시 울상이다.

"나도 몰라. 귀에 구멍을 11개 내고 타투를 3번이나 해도 주사는 진짜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무섭고 싫고 인생에서 만나고 싶지 않고 다음생에도 보고 싶지 않다."

60 이름 없음 (vqTU038XyM)

2021-09-29 (水) 12:37:44

>>59

" 그런 저주 안 해도 같이 갈 생각이거든?! "

당신의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다. 얼결에 팔을 붙들어 매져서 눈을 깜빡인다.

" 최소 분식집이지. 그리고 요즘엔 편의점이 더 비싸. "

울상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픽 웃는다.

" 이번 주사가 올해 마지막으로 맞는 주사도 아니잖아. "

아프거나 피검사할 일 생기면 또 맞아야겠지, 덧붙인다.

" 다음에는 혼자갈 수 있지? "

61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13:02:03

퍽 의욕적인 모양이다. 저만큼 의욕을 보인다면 호위든, 혹시 생길지 모를 자잘한 전투든, 성과를 기대해도 좋으리라. 기대하겠다는 말은 자칫 부담을 줄 수 있으니 높은 의욕을 보임에 치하하는 정도가 적절하겠지... 그 때 샐리가 조금 초조한 낯으로 시계를 힐끔 살피는 것이 보였다. 더 지체하면 안되겠구나. 꼭 레슨이 아니더라도, 귀족으로서 부리는 이를 오래 잡아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집사장의 맏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마르그리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심히 일해주겠다니 고마워요. 그럼,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길이니, 이만 지나갈게요. 돌아온 걸 환영해요."

어린 시절이야 신분에 관계 없이 또래라면 함께 놀 수 있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에 와서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테지. 고용주의 딸이고, 그 이전에 귀족이니. 집사장의 맏이가 비켜서기를 기다리며, 마르그리트는 문득 루로르 가의 영애와 추문이 돌던 그의 호위의 소문을 떠올렸다. 결국 해고당했다지. 우리 가문은 이 자의 일가를 고용하고 있으니, 불미스러운 건으로 이 자가 해고되면 나머지가 처신에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나 역시 어린 아이가 아니니, 그에 맞는 처신을 해야지. 경거망동하여 구설수에 올라 앞으로의 일들을 그르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62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13:02:29

>>61 >>56

63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19:59:42

>>61

사내의 눈에 자신이 방금 인사를 올린 여성의 옆에 서 있는 이가 초조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기서 인사를 하는 것이 그녀의 입장에선 그리 좋지 못한 것일까 추측하는 와중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몸을 옆으로 치웠다.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부디 수업 힘내시길 바랍니다."

초조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게 되니 절로 사내의 입에서 사과가 나왔다. 귀족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때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사내 역시 알고 있었다. 시녀가 옆에 있으니 따로 동행할 필요는 없을테고,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동행하라는 지시가 없는만큼 자신이 멋대로 움직일 순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고개를 살며시 숙인 다음 인사를 한 번 더 올렸다. 뒤이어 사내의 시선이 시녀 쪽으로 향했다.

"당신도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하는 일은 다르다고 하나, 어쨌든 한 가문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할지도 모르는만큼 기본적인 인사를 한 후, 사내는 자신이 어릴 적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오늘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며 지시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64 이름 없음 (PKbrUERYyQ)

2021-09-29 (水) 20:45:43

>>63 너참치 답레를 마지막으로 마무리지으면 될 것 같네. 수고 많았어! :)

65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20:56:02

>>64 사실상 그렇게 되겠네. 수고했어!

66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21:07:34

음. 그래도 너무 짧게 끝나버린 것 같네. 혹시 >>49에 새롭게 잇고 싶은 이는 이어줘도 괜찮아!

67 이름 없음 (BSnquSO5H6)

2021-09-30 (거의 끝나감) 00:02:16

>>47

"넹."

원픽 단골 빵집인지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그야 부정할 이유도 없으니까. 개인적으로도 많이 들리기도 했고, 월요일 목요일마다 밴드부가 단체로 가서 그 집 봉지빵 재고 3분의 1을 주기적으로 박살내고 있으니까 그 집 내외분도 나까지는 기억 못하더라도 우리 밴드부는 기억하실걸?

"어-" 잠깐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권하는데 거절하면 그것도 상대방 무안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왠지 네가 엄청 안절부절못하고 있기에 뭔가 고집부리기 애매한 상황이 되기도 했고. "이거 원래 저녁으로 드시려던 거 아니에요? 나눠 먹어요, 저녁은 적게 먹는 편이라." 정확히는 적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뭐 어때.

"네, 지금도 갈 수 있다는 말이지 지금 말고 나중이라도 좋아요─ 아 그러려면 역시 연락처 교환해야 되나?"

나는 일단 내가 간추려놓았던 노트들이며 학용품들을 내밀었다. 이것들을 정리하려면 빵봉투는 잠깐 어디 한켠에 내려놓아야 될 것 같은데. 일단 정리된 것들을 내밀고, 빵봉투를 받아든 뒤 사라져주는 게 네가 바라는 거겠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고, 일단 이 현장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야 마음편하게 자리를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은 이것들 정리 끝내고 나서 마저 이야기해요! 혹시 또 누군가 올라오다 저처럼 자빠질지도 모르고."

# 늦어져서 미안해 8ㅁ8

68 이름 없음 (dbM3CPURus)

2021-09-30 (거의 끝나감) 00:27:38

>>48
먼지투성이 각반을 두르고 있는 그 여행객은 먼 길을 가로질러왔으며,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후드를 푹 눌러쓰고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후드의 그늘에 어떤 얼굴이 숨겨져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네요. 다만 망토자락 사이로 엿보이는 가볍고 튼튼한 징박힌 가죽갑옷이나, 허리춤에 권총이 그것도 세 자루나 줄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한 상인이나 여행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마찬가지로 두건을 머리에 덮어씌운 노새를 끌고, 그 여행객은 멀리서부터 확고히 당신에게 시선을 둔 채로 당신 방향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체를 들킨 건 아닌 모양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와서 그 사람이 묻기를,

"안녕하세요, 저기 길 좀 물어볼게요."

하고 물어보았으니까요. 아마 당신이 시계공인 줄은 모르고 그냥 평범히 길을 지나가는 사람인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당신이 내밀어오는 쪽지를 받고 읽더니, 후드를 눌러쓴 사람은 당신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어갑니다.

"이 마을에 있는 시계공을 찾아왔는데 혹시 그 시계공이 어디 사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 시계공에게 꼭 물어봐야 될 게 있어서."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시계공을 찾아온 사람은 맞나 보네요.

"모르신다면 적어도 시계공이 있는 곳을 알 만한 사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사례는 해드릴 테니까."

거기다가 시계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시계공에게 뭘 물어보려고 시계공을 이렇게 찾고 있는 걸까요? 후드 차림의 여행자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닢을 짤랑짤랑 꺼내보입니다.

69 이름 없음 (N002B.amkM)

2021-09-30 (거의 끝나감) 10:07:02

>>68

히끅. 어떡하면 좋아요, 딸꾹질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정체를 들킨 것 같다고 생각해서만이 아니에요.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허리춤에 달린 권총 세 자루를요. 징이 박힌 가죽 갑옷도 입고 계시다고요! 여행을 하시는 것도, 저희 마을에 방문한 상인 같지도 않으세요. 아무래도 제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 같아요. 잘못 대처하면 저 권총이 제 머리에 들이밀어 지는 건 아닌지 불길한 상상이 떠올라요.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저런 위험한 물건은, 특히나 시계탑 꼭대기에서 숨어 사는 제가 볼 일은 드물단 말이에요. 권총이라는 건 어떻게 생긴 건지 해체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엄청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시계공의 정체는 비밀이었지만, 여전히 비밀이고, 비밀일 예정이에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깜짝 놀라버려서 딸꾹질이 멈출 줄을 몰라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제가 시계공이라고는 생각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아주 먼 타지에서 오신 것 같은데, 왜 저를 찾는 걸까요? 처음 보는 분께 제가 무슨 원한을 맺었을까요. 사실은 어느 작은 마을의 시계공이 그 실력이 아주 훌륭하더라는 소문이라도 난 거면 좋을 텐데요. 아니면 역시, 이미 제가 시계공인 걸 알고 계시는데 절 떠보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이 마을의 시계공은 시계탑 꼭대기에 살아요. 그런데 심부름꾼인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물어볼 말씀은 제가 꼭 전달해드릴게요. 사례는 괜찮아요.'

괜히 무서운 상상을 해버려서 손이 떨렸어요. 하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침착하게 새로 메모를 적은 것 같아요! 새로운 메모를 드리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딸꾹질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아서 곤란하기 그지없었지만요.

70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15:32:19

>>69
"이게 질문이 꽤 복잡한데다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서요..."

당신이 불안감을 드러낸 걸 눈치챈 건지, 여행자는 은근슬쩍 벨트를 매만져 권총들을 감추려 합니다. 두 자루는 고급스럽긴 하지만 여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볼버인데, 한 자루는 탄창이 달린 복잡한 기계식 자동권총이네요. 벨트를 돌려서 권총을 망토 안으로 감추고 나서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고쳐달라고 온 사람이 있지 않았냐고 여쭤봐 주실래요?"

다행히 시계공을 해꼬지하러 온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입니다. 며칠 전 복잡하고 비싼 손목시계 여섯 개를 회중시계 하나에 다 구겨넣은 것만큼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여관 할아버지가 맡긴 적이 있었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서 맡은 것이라고 하면서요.

대단히 아름다운 뚜껑에, 내부 부품도 고급이고 톱니바퀴를 고정하는 나사못 머리 하나마다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아름다운 예술품같은 물건이었지만 왜인지 거의 모든 부품들이 잘못 맞춰져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여관 할아버지는 그 시계를 맡긴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으로 된 큰 톱니바퀴 하나만 뒤집어 끼우면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 사람은 톱니바퀴를 뽑을 만한 도구도 없고 뽑는 방법도 몰라서 여관 할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시계공에게 맡겼다네요.

다행히 그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워주는 일은 간단했고, 그러니 잘못 맞춰진 것 같은 부품들이 그게 올바른 조립법이라는 듯이 그 모양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런데 왜인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많이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기면 계속 여행자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남으로 플레이하게 됩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친구의 목소리로 받아들인다면, 여행자는 사실 시계공의 어릴 적 소꿉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는 전개가 됩니다.
# 직접 캐릭터의 입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원하시는 전개 방향에 대해 아래쪽에 #을 붙이고 덧붙여 의견 내어주셔도 좋아요.

71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15:33:26

>>70 추가

"아, 그리고 이것 좀 드세요."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던 건지, 여행자는 허리춤 뒤로 손을 찔러넣더니 큼지막한 물병을 건네어 당신에게 내밀어줍니다.

72 이름 없음 (uZ125v8mVQ)

2021-09-30 (거의 끝나감) 19:39:34

>>70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니까 나쁜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은 선행보다 악행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에요. 당신의 행동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서,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이며 반응하는 토끼가 된 것 같아요. 권총들을 망토 안으로 감추신 건 제가 방심하기를 바라고 하신 행동일까요, 아니면 제 딸꾹질 소리의 원인이 그것인 거 같아 저를 배려했을 뿐일까요? 후자이길 간곡히 바라보겠습니다. 권총을 구경하고 싶지만, 특히 유달리 다르게 생긴 편인 복잡한 권총 한 자루가 눈에 밟혀서 자세히 보고는 싶지만 제 급소를 겨눠진 채로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여관 할아버지께서 맡기신 회중시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돌려받으러 오신 거라면 시계 주인 되시는 분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시계보다는 꼭 보석 같았거든요. 실제로 보석이 박혀있기도 했고, 시계 6개는 나올 것 같은 양의 부품들이 오밀조밀 얽혀있는 것도 신기했고요. 여관 할아버지께 시계를 맡겼다는 분이 수리 방법을 알고 있던 것도 신기했어요!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우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그걸 직접 할 수는 없다니 마치 시계를 다룰 줄은 모르는데 고치는 방법은 안다는 것 같아서요. 심지어 그 방법이 맞았어요! 잘못 맞춰져 있는 것만 같았던 부품들이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계 주인에게도 호기심이 동해서, 주인께서 직접 찾으러 오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보았는데 정말 이분이 주인 되시는 분일까요? 그 회중시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아까까지는 조금, 음, 아주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편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방긋 웃으면서 새롭게 메모를 건넬 수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딸꾹질 소리는 여전했지만요.

여관 할아버지께서 시계를 대신 맡기신 것도 그렇고,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시겠다는 것도 그렇고 마을에 이제 막 도착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구경하는 건 제 일과 중 하나이니까, 당신에게서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끼는 건 그것 때문일까요? 언뜻 당신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 걸지도 몰라요. 당신과 아는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기에는, 저는 계속 혼자 살았으니까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나는 당신이 건네준 물병을 두 손으로 쥐었습니다. 딸꾹거릴 때마다 몸은 작게 들썩거렸고, 당신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든 시계 주인이든 그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물을 마시기 전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제가 단단히 오해했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두 모금 들이켰고, 오해가 풀려서인지 물 덕분인지는 몰라도 딸꾹질은 멈추었습니다. 나는 다시 당신에게 물병을 건넵니다.


# 이왕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다는 서술이 나왔고 하니 소꿉친구 쪽으로 받을게요!
# 근데 시계공이 사람 무서워하다보니 친구가 있어도 몇 없을 거 같은데... 몇 없는 친구도 제대로 못 알아볼 거 같지는 않고 해서요! 많아도 10대 초반쯤에 헤어졌다구 해두 될까요? :3

73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21:51:58

>>72

"돌려받...?"

낮게 깔려있던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가며, 좀더 당신이 알던 것에 가까운 목소리가 됩니다...

"코스─아니, 그 회중시계가 아직 시계공의 집에 있나요?"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 화색이 돕니다. 후드 그늘에 가려 얼굴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왜인지 그 후드 아래의 얼굴이 마치 오늘은 점심 먹고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점원 같은 기쁜 기색이 역력한 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새가 투레질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 사람은 당신에게서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듭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움큼 돌풍이 불어젖힙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여행자의 후드의 끈이 풀리면서 후드가 뒤로 젖혀져 버립니다.

"아차."

하고 후드 자락을 붙잡아보지만, 높이 묶어 나부끼는 상아색 금발과 괄괄한 얼굴, 가을 하늘을 한 숟갈 퍼다가 담아놓은 듯한 푸르른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옛날, 꼭 저런 상아색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는 친구, '아티' 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당신에게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느 날 마을에 대상단의 행렬이 잠깐 들렸을 때, 자신은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당신에게 울며 말하고는, 작별을 고하고 다음 날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 여행자는, 단단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잘 발달된 다부진 체격이긴 하지만 여자입니다.

한바탕 돌풍이 지나고, 다시 후드를 덮어쓰고 망토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시계공이 낯을 굉장히 심하게 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래서 따로 심부름꾼을 두었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처럼요.

"제가 그 시계 주인은 아니지만, 시계의 주인을 대신해서 왔어요."

다시 후드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다시 잡으며 당신에게 아까 대답의 사례로 보여주었던 은화를 내밉니다.

"시계탑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그 시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상당히 수리가 필요할 거라서 시계공이랑 직접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저라면 만나줄지도 몰라요."

이상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이 여행자는 조금 전에 노새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온데다, 아직 각반이 먼지투성이라 마을 여관에 들렀다 나왔음직한 차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을 여관에 선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여관에 선술집이 딸려있는 경우가 흔하니까 그렇다 쳐도,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시계 부품들이 좀 이상하게 짜맞춰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톱니바퀴 하나를 뒤집어 끼워주는 것만으로 제법 잘 돌아갔었는데요... 왜 시계에 '상당한 수리'가 필요할 거라고 단정하고 있는 걸까요?

# 좋아요! ^.^ 시계공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고 해도 좋아요. 시계공이 내성적인 만큼 받아주시기 힘든 이야기였을 법도 한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 언젠가 상황극판에서 어렸을 때는 소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장성하고 나서 재회했더니 여자더라, 하는 클리셰를 본 적이 있어서.. 못 알아본 상황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써봤습니다

# 그런데 시계공이 아티와 함께 지냈을 때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x.x 옛날에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온 아티가 이 마을의 시계공이 그렇게 신통하다더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정말로 시계공이 됐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과 아티의 성별에 대해 조정이 필요하시다고 하면 말씀해주세요. 다시 써오겠습니다...!

74 이름 없음 (W.So/OXMHQ)

2021-09-30 (거의 끝나감) 22:12:03

>>73
# 지금 확인했습니다! 오늘 안에 답레를 써올 수 있을 지는 몰라서 말씀하신 부분만 우선 답해드릴게요 :3
# 시계공이 어릴 적 남자아이(사실은 여자아이지만)랑 친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소년인 줄 알았다 부분이 조금 걸리네요... 시계공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에 근본적 원인에 아버지가 있다는 느낌을 생각했어서요!
# 시계는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시계 뿐만 아니라 기계나 장치류는 전부 다라고 생각합니다.

75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22:16:09

>>74
# o.O ?! 그 부분이 곤란하다고 하시면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단락은 빼버리고 답레를 써주셔도 되어요! 원하시면 그 부분을 빼고 답레를 새로 올릴게요.
# 옛날부터 기계류를 좋아했다는 설정 확인했습니다 u.u 감사합니다!
# 답레는 원하시는 시간에 천천히 써주세요!

76 이름 없음 (6jCgXtKcW.)

2021-09-30 (거의 끝나감) 22:57:41

>>75
# 답레를 새로 올리는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럼 '여자아이인 줄 알았고 여자아이가 맞았다'로 괜찮을까요? 시계공이 아티를 곧 알아볼 거 같은데 혹시 알아보기를 원치 않으신가 해서요 :3c
# 감사합니다! 못해도 내일 오전 중에는 올라올 거 같아요 :D

77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23:09:57

>>76 물론 알아보기를 바라고 있어요! ^ᗜ^ 다만 그 전개에 약간 로망이 있었을 뿐... 어렸을 적부터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로 해요. 네 느긋하게 기다릴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78 이름 없음 (hg5z56b8Yk)

2021-09-30 (거의 끝나감) 23:50:52

>>73

이상한 일이에요. 계속 익숙한 느낌이 들어요. 이 목소리를 언제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들어본 목소리 중에 닮은 목소리가 있는가 봐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는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걸까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놓은 어릴 적은 달갑지는 않아요. 우연이겠거니, 기분 탓이겠거니 치부하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가 않네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고개를 저어서 다른 생각들을 떨쳐내요. 당신의 말에 나는 새로운 메모를 위해 펜을 듭니다. 기쁘게 들리는 목소리에 의아함을 담아 펜을 움직이려고 할 때,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질까 봐 모자를 붙잡았어요. 모자를 붙잡으며 당신의 목소리에 고개가 움직입니다.

"..."

눈이 동그랗게 떠질 수밖에 없었어요. 애써 떨쳐낸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라져버린 유일한 친구가 분명하니까요. 네 머리카락 색은 내 눈 색이랑 닮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아티,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다면서도 잊지는 못하고 있던 어릴 적, 그 이유입니다. 이름을 부를 뻔하다가, 소리 내서는 안 되는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만 벙긋거리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어요. 또,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 남겨졌습니다. 또 훌쩍 떠나가 버릴까 무서운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요. 나는 네가 울면서 떠난다고 말했을 때 울지 않았습니다. 네가 떠난다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다음 날 네가 사라져버리고, 마을 어디를 가도 네가 없었을 때,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아무리 찾아도 너를 볼 수 없었을 때에야 눈물이 났습니다. 다시 만났다며 마냥 기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겁쟁이예요.

'시계는 아직 시계공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탑은 잠겨 있지만, 열어 드릴게요. 사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제는 생각할 힘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시계공이 자신을 만나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시계공이 저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까는 그저 오해에서 비롯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겁먹은 것뿐이었는데, 지금은 말로 다 설명할 수조차 없어요. 엄청 많이 서운하다고 하면 될까요? 나는 내밀어진 은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이 발을 옮겼어요. 시계탑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 >>77 자러간 건 아니었어요! 일이 있었거든요 :3
# 시계공 이름은 아티와 연관있게 짓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79 이름 없음 (NS8sePuKNw)

2021-10-01 (불탄다..!) 00:34:18

# 앗.. 쓰... 쓰고 계셨어 8-8 미리 말씀드리자면 아티는 베아트리체의 애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80 이름 없음 (NS8sePuKNw)

2021-10-01 (불탄다..!) 00:57:21

>>78

"─고마워요."

후드를 꾹 눌러쓴 채로, 그 키큰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봅니다. 징 박힌 장화가 자박자박, 당신을 따라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길을 걷는 소리가 납니다. 노새를 끌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고갯짓이 감개무량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과묵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애써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탑에 도달했을 때...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시계탑 옆의 울타리에 매어두면서 시계탑을 올려다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빼고 시계탑을 찬찬히 살피듯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시계탑에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질문하려는 듯한 태도. 그러나 질문은 꺼내어지지 않고, 여행자는 잠깐 가만히 있습니다...

여행자는 약간 떨리는 손길을 조심스레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여미고 있던 두건의 끈을 풀어젖히고는 두건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옅은 금발 머리카락과,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드러낸 채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

그러나 뭐라 말은 못 하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하고 싶은 말 수백만 마디가 한꺼번에 치솟아올라 오히려 목구멍이 틀어막혀 버린 듯이.

81 이름 없음 (UtEpT84SUM)

2021-10-01 (불탄다..!) 10:00:31

>>80

말 백 마디보다 행동 한 번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선이 시계탑을 향한 후에는 내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쇠 꾸러미를 꺼냈습니다. 시계탑의 1층 열쇠를 찾기는 쉬워요. 유난히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를 찾아내면 되거든요. 잠긴 시계탑의 1층 문에 열쇠가 꽂히고, 찰칵 돌아가면 문이 열립니다. 나는 당신을 응시하다가 시계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따라오라는 의미였어요. 시계탑이 아닌 곳에서 내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큰일이지만, 여태 정체를 숨기면서 거짓말한 게 들키는 것도 무서우니까요... 사람을 무서워하는 전 남장을 하고서야 겨우 최소한의 외출을 하는데,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요. 제게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된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요.

시계탑의 1층에는 제가 만든 도르래 장치가 있어요! 마을에서 가져온 시계들을 공방에 올리거나, 다시 1층으로 내릴 때 쓰기 위해 만들었어요! 마침 마을에 시계를 고쳐달라는 분에게 시계를 받으러 갔었기 때문에, 나무함에 시계를 담아 도르래를 작동시킵니다. 시계는 저보다 훨씬 빨리 위로 올라갑니다. 시계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도르래를 정지시켜요. 그리고 안경을 벗어요. 다음에는 망토의 후드를 벗고, 그 아래 쓰고 있던 모자도 벗습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요.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면, 저는 이제부터 시계공입니다.

당신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면, 눈을 바로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시선 또한 아래를 향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만난 네게 그때 왜 그렇게 사라져버렸느냐고 원망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 얼마나 슬펐는지 말하는 것도 첫마디로 내기에는 부적절해 보여요. 하지만 엄청 서운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하고 싶은 말을 목소리로 내지 못하게 되니 다른 방법으로 새어버리고 말아요.

"안녕."

인사가 제일 무난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인사말을 건넸는데, 타이밍 나쁘게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안녕'이 아니니까요. 어디 갔었는지, 편지라도 쓸 수는 없었는지, 그런 말들이 하고 싶어요.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보고 싶었다'일까요?

# 시계공의 이름은 로빈(Robyn)입니다 :3 베아트리체의 어원을 살펴보니 나그네라는 의미가 있던데, 로빈(Robin)은 울새의 이명이에요. 울새는 나그네새(철새)이구요. 발음은 같지만 철자가 다른 이유는 여성형 이름으로 쓸 때는 Robyn 쪽을 쓰는 거 같더라구요.
# 애칭은 생각해두질 않아서 아티가 로빈에게 애칭을 썼다면 맘대로 지으셔도 됩니다 :3

82 이름 없음 (8jko9u3I2A)

2021-10-01 (불탄다..!) 11:41:48

>>81

여행자는 당신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기꺼이 당신을 따라옵니다. 아까까지 흙바닥 위에서도 뚜벅뚜벅 하고 뻐기듯이 큰 소리를 내던 징박힌 장화가 시계탑 안의 마루로 올라올 때에는 괜히 그 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마루에 올라서자, 여행자는 이젠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먼지투성이 망토를 끌러내렸습니다. 움직이기 편한 바지에 각반, 징 박힌 가죽갑옷에 두꺼운 장갑, 허리춤에 권총 세 자루와 총알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차림새. 갑옷 여밈에는 조그맣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인장이 박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 셋 달린 사자와, 교차된 두 자루 검 위에 놓인 말발굽... 황실 기병대의 인장이네요.

그런데, 분명 자신은 황실 근위기병대로서 임무를 받아 도난당한 코스모드롬 열쇠를 찾으러 왔을 텐데... 자신의 용건은 그뿐이었을 테고, 이 곳은 고향 땅 이전에 임무 지역인데... 분홍빛 머리카락을 풀어내린 당신 앞에서, 직함과 임무는 망토와 함께 벗겨져 버리고 여행자는 그만 아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와 똑같은 밀색의 금발을, 그때와 똑같이 머리 뒤쪽 높은 곳에 질끈 동여매고, 그때와 똑같은 활기찬 미소가 어울리는 선머슴애 같은 얼굴이 감정을 있는 힘껏 붙들어매려 용을 쓰는 표정으로 일그러져서는, 그때와 똑같은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당신에게 마주한 채로요.

"로비."

그때보다 다부지게 성장한 어깨며 크게 웃자란 키며 실용적으로 차려입은 갑옷이며 다 소용없습니다. 각오도 했는데,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당신이 그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입에 올린 당신의 호칭 두 음절에 그게 그만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분명 그때는 울며불며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신에게, 자신마저도 그렇게 소중한 친구가 되지는 못했었던가 하고 더 서럽게 울었었는데.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여행길을 섭섭함에 눈물로 물들였었는데. 지금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는 당신의 모습에 그만 이제서야 아티는 왜 당신이 미처 눈물을 흘리지 못했었던가 깨달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오는데, 도무지 그때처럼 울어버릴 염치가 없어서. 혼자서 울어버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떠나버린다"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에게 채 못다 전하고 떠나버려서. 아티의 눈시울도 뜨거워 옵니다. 그러나 아티는 떨리는 손으로 장갑을 조심스레 벗고는, 갑옷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서 당신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려고 합니다.

"...보, 고 싶었어..."

아티는 뭔가 말했습니다. 울음소리와 섞여서 어금니 사이로 뭉개져 나온 소리라 잘 들릴지는 의문이지만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림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고, 결국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회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83 이름 없음 (XhfRc35nDo)

2021-10-01 (불탄다..!) 15:30:14

>>82

마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간 적이 없고, 혼자가 된 이후로는 시계탑에 숨어지냈어요. 그런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인장이라면, 분명 황실의 것이겠지요. 나는 그날로부터 무언가 성장한 게 없는 것만 같은데, 아티는 아닙니다. 황실의 명을 받을 정도로 멋지게 나아간 모양이에요. 저는 여전히 사람을 무서워하고, 시계를 비롯한 기계와 장치들을 좋아할 뿐이라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요. 분명 지금 아티의 옆에는 같은 인장을 새기고 다니는 동료들이 있을 테고, 당연히 저보다 더 멋진 사람들이겠지요. 저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순간만 지나가면 수많은 어제와 같은 내일이 찾아올 테니까요.

로비, 제 애칭입니다. 아티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지요. 분명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는데, 잊고 있던 애칭으로 한 번 불렸다고 흔들리고 맙니다. 사람과 워낙 거리를 두고 지내서 그런 걸까요, 아티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혹은 둘 다 일지도 몰라요.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꼭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시계는 위에 있어."

여전히 제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시계탑의 1층 바닥입니다. 그마저도 눈물방울에 일렁거리고 있어 본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요. 눈물을 훔쳐내려고 했어요. 아티는 그 회중시계를 주인에게 가져다주러 온 것이겠지요. 아티가 왔다는 건 아마도, 황실의 사람 중 하나가 그 시계의 주인일 거예요. 그러니 시계를 돌려주면 이 만남은 끝이 날 거로 생각해요. 더 아프기 싫다면 지금 아픈 선택을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런데 내 눈물이 내 손에 닿지 않았습니다. 아티의 손수건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쓴 것을 먹기 전에 단 것을 한 입이라도 먹었다면, 더욱 쓰게 느껴지는 걸 아니까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떨리면서 담은 말은 시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제 행동도 그러합니다. 손수건이 눈가에 닿았을 때는 놀라서 아티를 바라보았지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어요. 그리고 아티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추운 것도 아닌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고 오히려 떨리는 것까지 보여요. 그래도, 난 손등으로밖에 눈물을 훔치지 못하겠지만 아티의 상냥함을 받을 자신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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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빈은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아래는 남장하고 다닐때구요 :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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