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불만은 없어." "네가 이것 하나만 기억해 준다면 말야." "내가 네 것이라면..." "너도 내 것이라는 거."
2. 『날 두고 가지마』
"...너한테서 배웠어.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항상 물리적으로 함께 있거나, 시선을 항상 너에게만 두고 있거나 할 수 없다는 거." "그렇지만 말야, 내가 네게서 눈을 뗀다면 그건 널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일 거고," "내가 네게서 떠나간다면 그렇게 해야만 다시 네게로 돌아와서 더 오래 있어줄 수 있기 때문이야." "...이기적이지. 미안해." "그래도,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너에게 돌아올 거야. 언제까지고."
3. 『널 잊어버릴거야』
"...행복했어? ......조금이라도?" "......그렇구나." "네가 더 이상 나를 갖고 싶지 않다면, 나는 너를 놓아줄게." "그렇지만 말야, 만일 나중에라도 내가 다시 기억난다면...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나를 불러줘." "달려갈게."
노을지는 바다, 백사장 위로 달리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불규칙한 자국을 남겼다. 제 덩치보다 훨씬 큰 소년을 이끄는 밀색 머리의 소녀와, 너무나도 쉽게 그에 이끌려 가는 흰 머리 소년. 둘 모두 신발 따위는 어딘가에 벗어던지고 맨발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파도소리에 묻힐 만큼 멀리 왔을 때. 새슬이 먼저 발걸음을 멈췄다.
파도가 바로 발치 근처를 더듬었다가 물러난다. 새슬이 부서지는 파도 조각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문하를 향했다. 뛰어 온 탓에 미약하게 달아오른 뺨과, 가빠진 숨소리.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도 없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ㅡ시작할까.”
아하하, 경쾌한 웃음소리가 파도에 섞여들었다. 잠시 문하의 손을 놓았던 새슬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언가에 마주대듯이, 모든 손가락을 쫙 펴서. 눈꼬리가 곱게 휜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거기에 덧대 오는 파도소리는 작은 오케스트라. 덮쳐 오는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히 빛나는 것 같은 흰색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스치는 게 예뻐서,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발 밑을 적시는 저녁 바다의 바닷물은 차갑기 그지없는데도, 그 위를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발걸음은 따뜻하다. 발바닥에 와닿는 모래는 분명 거친데, 그게 체중이 실려 패여들어갈 때면 부드럽다. 평소 로드워크를 뛸 때 내딛는 안정된 걸음에 비해 이 무게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끌려 후다닥 내닫는 발걸음은 분명 평소보다 불안한데, 이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이 발걸음 하나하나가 너무도 편안하다.
그 모순 하나하나가 너무도 선명하다. 손 끝에 와닿는 밀빛의 맥박이 너무도 선명하다. 그것에 이끌려 그는 무방비하게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피하지 못했다. 노을을 등지고, 곱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 그 순간을. 그는 피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선명히 눈에 담아버리고 말았다.
이 밤이 끝나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이제는 네가 보이겠네.
살풋 웃는 새슬을 문하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웃었다. 어설픈 웃음이 피어나면서, 무언가가 문하의 눈가에서 밀려나와 그의 뺨을 타고 굴렀다.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주 작고 사소해서 알아채지도 못할 무언가가, 그것도 아주 조금... 그렇지만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이킬 수 없도록 변해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에 섞여, 그때 하늘에게서 얻어들었던 포크 댄스를 위한 곡이라기엔 너무도 아련하고 상냥한 멜로디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문하는 조심스레 새슬의 손을 잡은 채로, 여름의 첫 스텝을 내밀었다.
새슬이 문하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곤, 문하에 눈가에서 맺혀 떨어져내린 것. 한없이 가볍지만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울 그것을 엄지로 훔쳐내었다. 왜 울어,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자기도 어쩌면 곧 울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위에 장난스레 다른 말을 덧씌웠다.
“자유부 활동 수칙. 자유롭게, 즐거운 것을 한다.”
그러니까 눈물은 규칙 위반이야. 즐거워지는 거야. 지금만큼은. 어르듯 속삭이고는, 곧 소년의 움직임에 새슬이 따라붙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빙그르르. 어깨에 걸려 있던 후드집업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살랑이는 치맛자락과 움직임에 흔들리는 머리칼, 가끔 터져나오는 가벼운 웃음소리. 가끔 파도가 찰박거리며 발목을 적시고면 물장구를 치듯 발끝으로 호선을 그리기도 하면서ㅡ 해가 지고 떠오르는 달빛을 작은 스포트라이트 삼아 춤을 추는 두 사람의 인영.
“이상하지.”
채 온전히 식지 못 한 뺨이 아직도 미약한 온기를 품고 있다. 스텝이 가까이 한 발 더 붙었을 때. 새슬이 중얼거렸다.
“마법에라도 갈린 기분이야.”
그리곤 또 다시 한 발 떨어져서, 빙글. 소년의 손에 의지해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원피스 자락이 예쁜 원을 꽃피우고는 곧 사라졌다.
문하는 돌아가는 대로 입부 신청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인 선배한테 갖다드리면 되지 않을까.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새슬에게 그것을 내맡겼다. 그것을 흘리게 한 사람이 새슬이니, 닦을 권리도 새슬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외로움으로 케케묵어 말라붙어버리고 만 과거의 고통 한 방울이, 새슬의 손끝에서 아무것도 아닌 눈물 한 방울로 아스라져 사라진다. 그는 새슬의 손을 꼭 잡았다. 이러다가 아차 하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와르르 무너져도 괜찮을지도 몰랐지만, 부 활동 중이니까. 굳이 무너뜨리지 말고 조금씩조금씩 하나씩하나씩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문하는 우는 대신에, 새슬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상하면 뭐 어때."
원피스로 곱게 하얀 원을 그리는 새슬의 손을 조심스레, 그렇지만 굳게 붙들어 잡아주면서, 문하는 새슬의 말에 나직이 답했다. 새슬이 내어준 자리에 자신의 발을 내딛고, 새슬이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건 무슨 상관일까. 지금 여기에는─
"너랑, 나뿐이잖아. 그거면 돼."
그거면 충분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는 어떤 것 같아? 마법... 마법 같아, 하는 감탄사를 어디에 쓰는 것인지 문하는 한동안, 그가 느끼기에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 같다는 감탄사는 문하의 가슴속에 아름답게 사그라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고운 달빛이 내리는 수평선의 풍경으로 새로이 정의되어 다시 주어지게 되었다.
"마법... 그러네."
문하는 손을 뻗어,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새슬의 허리를 받쳤다. 달빛이 두 사람 사이로 비쳐들고 있었다. 그 조그만 달빛이 그의 그 텅 비어있을 줄로만 알았던 눈동자에, 새슬의 얼굴과 함께 맺혀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