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내리는 바닷가에서 새슬은 평소처럼 ( ᐛ ) 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을 뿐이고, 하얗게 드러난 새슬의 어깨가 덧없어 보여서 조바심을 낸 것은 오히려 문하뿐이었다. 그렇기에 새슬이 별 거절이나 질색을 하지 않고 그것의 품에 자신을 내맡기자, 그는 소리없이 안심하는 것이다. -딱히 새슬이 그것을 거절할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새슬이라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고, 받아주지 않더라도 그냥 자신이 다시 입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문하가 걱정한 것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더럭 욕심을 내버렸다는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이 〈보기 싫다〉거나 〈걱정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다〉는 생각을 해버렸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그것이 들킬까도 두려웠기 때문이다.나는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 문하는 그게 자신에게나 새슬에게나 단순한 호의로 끝나기를 바랐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이젠 문하가 러닝셔츠 차림이 되었다. 그래도 별 걱정은 없어보인다. 피부야 원래 창백했고, 딱히 떨림도 없어 추위를 타는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그가 떠돌던 곳은 추운 겨울이었으니까. 창백한 피부와 밸런스가 맞지 않는, 강철을 단조한 듯한 몸뚱아리 때문에라도 그가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새슬의 질문에 문하는 핸드폰을 들어보인다. 너튜브가 떠 있다. 한 무리의 남녀들이 짝을 지어 강당 같은 곳에서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는 동영상이었다.
"─그냥, 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있었어. 포크 댄스라는 거."
이런 건 잘 모르겠어서- 하고 문하는 시선을 파티가 한창일 광장 쪽으로 힐끔 돌려보았다. 잘 모르는 이런 것, 이런 것들. 여름으로 가득찬 바닷가와, 콘도와, 활기찬 아이들과, 그들이 지나간 자리들과, 그들이 노는 자리들... 여름이라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서 와 봤는데, 어느 것 하나 시원한 해답이 되어주는 건 없었어.
새슬의 눈동자에 핸드폰 화면이 비추었다. [포크 댄스] 라고 쓰인 제목 위에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고, 가끔은 짝을 바꾸어 가며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아ㅡ 이게 포크 댄스구나. 그제서야 새슬이 깨달음의 탄성을 내질렀다. 포크 댄스라길래, 포크로 뭔가를 하는 건 줄 알았지 뭐야아ㅡ( ᐛ )! 천연덕스러운 능청과 함께.
새슬의 시선이 겨우 핸드폰 화면에서 떨어진 것은 영상이 온전히 다 끝난 다음에도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재생이 멈춘 검은 화면에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이 잠시 스치더니, 이번에는 고개를 들어 멀뚱히 문하를 본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왜 그래? 정도는 물어보았을 시간이 지났을 때. 새슬이 헤 웃으며 말을 꺼냈다.
“해 볼래? 포크 댄스.”
우리 둘이서. 상당히 뜬금없고 대담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재밌어 보이지. 특별 자유부 활동이야! 납득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핑계로 대충 둘러대고선, 다시금 헤죽 웃는다.
문하는 핸드폰을 그렇게 들고 서 있었다. 새슬이 천연덕스럽게 웃는 것에, 문하는 눈을 깜빡이다 새슬을 따라 웃어보였다. 딱히 우스운 건 아니었지만, 그냥 웃는 얼굴을 보니 따라해보고 싶었다. -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분좋은 웃음' 이라는 개념이 문하의 머릿속에 없기에 그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영상이 끝나 화면이 검게 변해, 새슬의 얼굴에 어려 있던 반사광이 없어졌는데도 새슬이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문하는 그것을 계속 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새슬의 모습이 화면 액정을 넘어 그의 눈에 담긴다. 그러고 보면 그의 눈은 텅 비어있는 핸드폰 화면을 퍽 닮았다.
"?"
새슬의 그 뜬금없고 대담한 제안에, 문하는 나? 하고 되묻듯이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자신을 가리켜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조금 움찔했다. 그 동영상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춤추는 사람들의 동작 위에 자신과 새슬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다고 할 수가 없었기에.새슬이 내민 손을 쥐고 따라서 춤추다 보면 여름이라는 것에 도착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네가 나를 잡고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같이 찾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 너도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걸까?
또 웃는 얼굴이네. 새슬의 눈동자가 조용히 문하의 휘어진 입꼬리를 눈에 담았다. 그러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어서, 또 금새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는 체 하는 것이다. 이건… 그래, 어디로 가야 좋을지를 살피는 행동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어설픈 자기합리화의 완성이었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ㅡ.”
포크댄스를 출 줄 모른다는 문하의 말에, 새슬이 중대한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가까이 해 달라는 손짓을 했다. 문하가 고개를 가까이 대면, 새슬은 장난스러운 속삭임을 남길 것이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거기에 더해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을 조금 흩뿌린 뒤에, 새슬이 먼저 제 고개를 뒤로 뺐다. 녹색 눈동자가 무언가로 반짝이는 것 같은 착시가 인다. 그래도, 있잖아. 그냥 즐겁게 추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무슨 춤을 추든. 얼굴에 물든 말간 웃음이 벌써부터 퍽 즐거워 보이기만 한다.
“일단, 가자.”
새슬이 천연덕스레 문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노을이 막 떨어져, 천천히 보랏빛으로 물드는 모래사장으로.
오늘은 찾아가지 못했어. 그래서 편지를 쓰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우체국도 못가네. 편지는 나중에 직접 줄게. 대신 나 없을때 읽어야해. 안그러면 편지 들고 도망갈거야. 네가 곧 멀리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아쉽긴 하지만, 너도 1년동안이나 거기에 있었으니 다른곳도 여행을 해봐야겠지? 가서 돌아오지 않는것만 아니라면, 난 웃으면서 보내줄 자신 있어. 진짜야. 너도 울면 안된다?
다음번에는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자주 갈게. 네가 떠나는 날에도 꼭 찾아갈게. 늦는다고 그냥 가지 말고, 기다려줘야해.
참, 아직 이르긴 한데 나 진학할 학교가 정해졌어. 산들고... 랬나? 뭔가 유명한 학교라더라. 난 잘 모르겠지만, 넌 알고있어? 알고있다면 나중에 편지 보낼 때 그쪽으로 보내. 우리 집 말고. 사진도 보내줘야돼.
새슬이 어디가 가장 춤추기 좋을지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문하는 새슬의 시선을 쫓다 말고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툭 뽑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아쉽게도 들고 나올 생각을 못 했다. 그러고 나서 새슬이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자신도 보려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문하는 새슬의 초록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문하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새슬의 눈동자 안에, 얼빠진 무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잘 보였기 때문에.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한 새슬의 손짓에, 문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야?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모를 질문에, 새슬은 대답했다.
"정말이지..."
새슬의 말간 웃음이 문하의 얼굴 위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실소가 문하의 얼굴에 걸렸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즐거워서...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감정을 즐거움이라고 부를 줄도 모르는 문하인데,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다...
"그래."
억세기 그지없는 손이었지만, 새슬의 훨씬 작고 여린 손에 그것은 쉽게 얽매였다. 그리고 가볍게 이끌렸다. 지금 가까이서 아무 것도 걸쳐지지 않은 문하의 손목을 보면, 어쩌면 살이 튼 자국처럼 보이는 흉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새슬이 그것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겠지- 창백한 피부 위에 창백한 색으로 남아있어 쉽게 보이지 않는. 칼로 남긴 것처럼 선명하고 깊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히 각지고 딱딱한 무언가가 쓸어내었음이 분명한 자국이. 해진 곰인형의 껍질처럼 희끗희끗하게 문하의 손목 위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일 것 같지는 않다. 손목에 남은 그것이 무색하게, 문하는 웃었다.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마치 모든 것이 뚝 멎어버린 듯했다. 소리도, 빛깔도 냉막한 정지 앞에 그 몸을 움츠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매미가 울고 있다. 어스름한 푸른빛이 아직 남아 이 도시를 파랗게 비추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다. 의미를 잃은 소리며 빛깔들은 공허하고 먹먹한 울림으로만 남아 이 정적을 흔들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그늘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늘보다 더 깊은 어둠을 머금고 있는 그 눈동자는 빛 한 점 닿지 않는 그늘 속에서도 더욱 어두워, 선명하게 초점을 잡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이토록 누군가를 선명히 증오해보기는.
말은 필요없다.
2. 『준비는 끝났어?』
그는 자전거 좌석에 걸터앉아, 태평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슥슥 밀어보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피부며, 머리카락이며, 후드티는 말갛게 부서지는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함뿍 머금어 상앗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끝모를 검은 눈동자에마저 조그만 빛무리가 맺힐 정도로 찬란한 햇살 속에서, 그는 그 까만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다. 딱히 말은 하지 않는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는 자전거 핸들에 걸어두었던 헬멧 하나를 툭 끌러서는 당신에게 가볍게 던져주었다. 그리곤 그 옆에 매달려 있던 다른 헬멧을 끌러서 자신의 머리에 뒤집어쓰곤 턱끈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