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레스를 쓰다 보니 나레이션과 문하 속마음이 섞여서 좀 알아보기 어렵나...? 해서, 문하의 속마음이 섞인 부분은 그레이 색상을 줬어. 톤 차이가 크지 않아서 알아보기 힘들 것 같지만, 너무 강하게 티가 나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쉐도우를 그레이로 넣고 글자색을 흰색으로 해볼까? u"u)
이어지는 침묵. 공허를 메우는 매미 소리. 새슬은 소년이 왜 침묵하는지 고개를 기울여 생각하는 대신에, 난간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발걸음을 떼기로 했다. 한 발, 두 발. 흐릿한 거품같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둑한 잿빛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보니 온통 하얀 아이였구나.
많이 기다렸지. 이번에는 새슬이 침묵했다. 소년이 지녔던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대답 대신, 녹색 눈동자가 검은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열 하나, 열 둘. 잘게 떨리고 있는 그것을 진정시키듯 마주하며, 괜찮아, 괜찮아. 속삭이지 않았는데도 어쩌면,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을지도 모른다. 스물 일곱, 스물 여덟. 둘의 거리가 느리면서도 빠르게 좁혀진다.
만나러 왔어. 소년이 그 말을 했을 때, 그제서야 새슬이 소년의 앞에 섰다.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을 만 한, 두어발짝 정도의 거리. 짧게 친 머리카락은 아주 조금 더 자랐지만, 나머지 것들ㅡ곳곳에 붙은 반창고 몇 장, 나른한 눈웃음, 흙을 털어 낸 자국이 남은 교복ㅡ은 그대로인 채. 기분 좋게 휜 입술 새로, 또 한 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어서 와.”
오랜만이라느니, 기다렸다느니. 그런 진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야, 중요한 건 지금 너와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 새슬이 다시 말갛게 웃고 나서, 환상이 아님을 확인시키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문하가 그것을 잡았을 때, 새슬은 힘을 주어 문하를 끌어당길 것이었다. 자리에 가만히 선 그의 발길을 가로막은 무언가의 경계를 깨어 버리려는 듯.
새슬의 눈동자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연한 녹색이었기에 음울한 빗속에서도 전혀 빛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요하고 잠잠히 빛나고 있던 그 초록색의 눈동자를. 이름만큼이나 어쩌면 이름보다도 더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을 그 눈동자를. 지금 이 초여름 점심시간의 햇살 아래서, 여전히 변함없이... 그렇지만 비오는 날의 하늘을 담았던 만큼이나 초여름의 햇살을 곱게 담아내고 있는 초록색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보고 있는 그 눈동자가 가까워오는 것도 모르고, 문하의 떨리던 눈은 가만히 새슬에게 멎었다. 구멍이 뚫려 있는 것만 같던 먹먹한 검은 눈동자 위에도 초여름의 햇살이 조그만 빛무리를 남긴다. 사람의 손을 두려워하던 비루먹은 들개의 이마를 처음으로 쓰다듬어주었을 때, 보일 만한 눈빛이었다.
음울한 빗속에서도 외로이 말갛게 있었던 네 모습이, 이 햇살을 한가득 머금고도 그러나 여전히 말개서, 나는...
"응, 왔어."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인사를. 마치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는 인사 같지 않은가.
문하는 거리낌없이 새슬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크루저급 슬러거의 팔이, 여름 햇빛을 머금은 소녀의 팔에 우스울 정도로 주욱 끌려들어왔다. 문하는 몸이 앞으로 우찔근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문하는 균형을 잡을 시도도 저항할 시도도 하지 못하고 새슬이 이끄는 대로 주욱 딸려들어갔다.
옥상 문 앞에 머물러 있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삽시간에 옥상 한 가운데로 빨려들어갔다. 무게중심을 잃은 몸이 아슬아슬하게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을 듯. 어쩌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던 불규칙한 발걸음은, 새슬이 잡은 손을 놓고 빠져나와 한 바퀴 빙글 도는 것으로 멎었다.
“못 보던 걸 잔뜩 달고 왔네.”
멋진데. 툭툭, 제 얼굴을 두드리며, 소년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반창고를 가리킨다. 아무리 둔하다 해도 단순히 넘어지거나 긁혀서 생길 만 한 상처가 아니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물론 소년에게 그 동안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새슬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순한 일이 있던 건 아니었겠구나, 하고 짐작하기만 할 따름이다. 소년의 모습과 많이 기다렸지, 하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통해 소년의 얼굴을 뒤덮은 것들이 허투루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것 또한. 음ㅡ 그래도 조금 아프겠다. 작은 중얼거림.
“마침 햇살이 좋아.”
마치 소년이 이전에도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던 것처럼, 새슬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미 소년을 옥상 한 가운데로 이끌어 왔으면서 같이 쬘래? 하고 뒤늦게 권유하는 것은 덤이다. 쬘 거면 저 쪽으로 가자. 오래 등을 못 기대면 불편하니까. 난간이 둘러진 옥상 한 켠 바닥을 가리키며, 새슬이 부스스 웃었다.
못 보던 걸 잔뜩 달고 왔네, 하는 말에 왠지 언젠가 옆 빌라 수위 아저씨가 학생이 허우대가 멀쩡해서 왜 그리 싸움질을 하고 다니냐고 걱정어린 훈계를 해왔던 일이 떠올라 문하는 뭔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새슬이 덧붙인 멋진데, 하는 뜻밖의 말에 문하의 입은 힘을 조금 잃는다.
"...경기. 싸운 거 아냐."
조금 작은 목소리. 상처들은 더러는 반창고가 더러는 거즈가 붙어있지만, 두어 군데의 상처는 반창고가 떨어져나갔거나 어쩌면 애초에 붙이지도 않은 것처럼 드러나 있었다. 얇게 찢어진 자국. 펀치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자국이다. 문하는 문득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새슬의 얼굴에 붙어있는 반창고의 표면에 조심스레 손끝을 대어 보았다. 상처에 압력이 가지 않게끔 살며시.
"너는, 어쩌다가?"
......이것도 낯설기 그지없다.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느껴보기에는 너무 낯선 감정이다. 걱정. 자신의 상처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언제 나을지 잘 알기에 누군가의 걱정을 별거 아니라고 무마시켜줄 수 있다. 그러나 새슬의 뺨에 붙어있는 이것은 어떤 연유로 붙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걱정된다. 너도, 나도, 서로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지만... 너도 권투선수는 아닐 거 아냐.
그런데 대답으로 돌아온 건 마침 햇살이 좋아, 하는 말이다. 어리둥절하면서도, 마치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손길을 주는 사람에게 꼬리를 서서히 흔들며 따라붙는 것처럼 문하는 새슬의 말에 따라붙었다. 햇살─
"선크림, 있어?"
─조건반사적으로 먼저 나온 말이 이거라는 것도, 손이 반사적으로 옆구리에 끼고 있는 가방 주머니를 쑤시고 있는 것도 참 멋대가리가 없다. 새슬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문하는 아직 조금 낯선 듯이 옥상을 두리번거리다 질문을 꺼냈다.
문하가 내민 작은 변명에 새슬이 웃는 낯으로, 그러나 조금 동그랗게 뜬 눈을 두어 번 꿈뻑거렸다. 경기? 그럼 영광의 상처네. 더 멋진데에ㅡ ( ᐛ )ㅡ 한없이 태평한 얼굴로 재잘거리다가, 뺨에 닿아오는 낯선 촉감에 반사적으로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인다. 아ㅡ. 길고 나직한 음성.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 그랬더라? 사흘 전에 나무에서 뛰어내렸을 때? 아니면 담벼락 위로 고양이를 따라다녔을 때? 새슬이 자신의 잔상처를 명확히 알아채는 것은 하루가 끝나고 화장실 거울을 봤을 때만이 전부였기에, 당연히 머리를 굴려 보아도 언제 어떤 상처가 생겼는지 따위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기억을 더듬는 대신, 새슬은 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몰라.”
누가 본다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릴 정도로 뻔뻔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하지만. 진짜로 기억이 안 나는 걸. 자유부 활동 중에 긁힌 건 맞는데. 그치만 자주 있는 일이니까 괜찮아ㅡ. 나른한 목소리로 몇 문장을 덧붙였다.
“으응, 아니. 없는데.”
선크림ㅡ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 곧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는 소년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새슬의 고개가 기울었다. 선스틱, 선크림, 선밤, 선미스트. 햇볕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선-(Sun-)]이 들어간 물건들은 새슬과는 참 멀고 먼 것임에 틀림없었다. 누군가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발라보았던 일이 전부인 선크림이다. 절대 다수의 상황에서 새슬은 피부가 탈 것을 걱정한 적도, 그것을 대비한 적도 없었다. 그저 거뭇해지면 조금 탔구나ㅡ 싶을 뿐이다. 일일히 가지고 다니는 것도 펴 바르는 것도 번거로울뿐더러, 꼭 필요한 일도 아닌데. 굳이?
“항상 정해진 시간에 있는 건 아니야.”
갑자기 옥상에 올라오고 싶을 때, 하늘을 가까이 보고 싶을 때, 그럴 때면 그냥 오는 거야. 거의 하루종일 여기 있었던 적도 있지롱ㅡ. 탄탄히 서 있는 한쪽 난간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그러고선 툭툭 옆자리를 쳤다. 여기 앉으라는 듯.
그게 분명히 어디 가서 누군가를 납득시킬 수 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몰라, 라니. 문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였어야... 했다.
그런데, 몰라, 하면서 ( ᐛ ) 모양으로 웃어버리는 새슬의 웃음이 어찌나 태평하고 유유자적하던지, 문하는 그만 뭐라 반문할 생각마저도 하지 못하고 그렇구나, 하고 새슬의 말을 덜컥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그 빗속에서 처연하니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 소녀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태평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 처연함이 이 태평함과 맞닿아 있는 것도 같아서, 조금 부러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그 태평한 미소가 따뜻했다. 그 따뜻함에 눈이 붙들려, 문하는 자기 처지를 돌아보는 버릇을 잠깐 잊게 되었다.
"...그렇구나."
문하는 주머니에서 막대형 선크림을 잡아서 꺼냈다. 아니 이건 제한제잖아. 문하는 그걸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2차 시기에서야 겨우 막대형 선크림을 찾아서 꺼냈다. 그리곤 뭐라 말도 없이 뚜껑을 톡 열더니, 새슬의 뺨과 코끝, 이마에 부드럽게 발라주고는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펴바르기 시작했다. 자기 얼굴에는 거리낌없이 퍽퍽 바를 수 있었는데 남의 얼굴에 발라주는 것은 조금 서툴렀다. 뼈와 근육, 살가죽만 남아 험상궂게 앙상한 손은 그 살가죽마저도 굳은살이 끼다 못해 돌가죽처럼 말라붙어 있었건만 그래도 그 움직임만큼은 서툰 만큼 조심스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준다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새슬의 태평함에 그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새슬은 문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잊게 했다. 비를 잊게 했고, 추위를 잊게 했고, 외로움을 잊게 했고, 밤을 잊게 했다...
그래서 옥상으로 와, 라는 한 마디만큼은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문하는 선크림을 꼭 챙겨다니고 꼬박꼬박 바르는 편이었다. 그는 햇살을 과하게 쬐면 살갖이 가무잡잡하게 타는 게 아니라 빨갛게 익어버리고 발진이 올라오며 심하면 화상까지 입는 체질이었기에, 여름이 되면 선크림을 노상 챙겨가지고 다니곤 했다. 그렇기에 문하가 누군가에게 선크림을 발라주는 것은... 아직까지 그 스스로도 뭐라 정의하지 못한 어떤 특별한 표현이었다.
팔에까지 선크림을 발라주고서야 문하는 새슬의 옆자리에 폭 주저앉았다. 그리고, 질문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