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사소하게 오늘은 일찍 자고싶다는 것도 나름의 욕망일 것이다. 그 욕망을 언젠가 실현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실행하는 사람, 아니면 남이 해줄거라 믿는 사람. 후자가 더 많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할 사람도 적다. 높이 사는 점은 이것이었고, 그는 더이상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제부터 서로의 선택이다. 그저 협력도 아니고 대화만 나눈 사이지만, 일단 욕망의 뿌리의 한부분은 같다. 그렇기에 가장 끝에서 걷어차거나 밀어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밀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것이 나락의 끝에서 지켜볼 일인지, 아니면 위에서 내려다볼 일인지, 동등하게 눈을 마주할 일인지. 어떻게 될 지는 이제 앞길 하나 알려주지 않는 야속한 운명만이 알려줄 것이다.
그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당신의 말을 듣고, 정정할 부분에는 잠시 고민한다. 지금껏 내색한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는다. 대놓고 내색한 적은 없다. 아마……. 아. 반지를 줬다. 놀랍게도 가주의 증표를 줘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건 매구의 사람에서 벗어나란 뜻이 아니지 않은가. 그가 졸업 후 수명이 다해 죽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기에 만들어둔 나름의 도주 경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는 입술 속의 살을 티나지 않게 깨물고는 생각을 마친듯 입을 연다. "그럴 일 없네." 하고는 이후의 일이 반복된다. 그는 단맛 하나 나지 않는 시나몬맛 젤리빈을 뱉었고, 끔찍하게 싫었는지 입술을 꾹 다문다. 시나몬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단맛 하나 없을 수 있을까? 이건 젤리의 수치다! 그는 젤리가 담긴 나무 그릇을 구석으로 밀어낸다. 충격이 큰듯 싶다. 맥주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는 손을 고이 내려놓는다. "글쎄, 알려줘야 할 지." 하다 당신의 은근한 시선을 마주하고는 말을 정정한다. "안 하면 내가 시달리겠군 그래."
"그래. 우리 아가를 내 당연히 싫어했지. 초면부터 크루시오를 쓰고 쓰러진 사람이 자는 거라고 착각하는 백치에게 어떻게 호감을 한번에 가질 수…… 아?"
그는 그대로 굳는다. 눈이 커지고 손을 들어 입가를 덮어 가렸다. 방금 뭐라고 했는지 한박자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그마저 무의식적으로 단어를 되기 때문이다. 작게 벌린 입을 꾹 다물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수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탄스럽게 여겼다. 당신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도 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말을 뗐다.
"……그, 러니까, 나는..아..그러니까..젠장."
그는 길쭉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린다. 얌전한 고양이는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있고, 엎질러진 발언으로 봐선 그가 그 고양이인듯 싶다.
그녀가 정정한 말에 잠시 고민하길래 이미 내색한 적이 있나 싶었다. 벌서 그런 말을 할 만큼의 사이였던건가. 별말이 없는거나 표정도 변하지 않는 걸 보면 그녀가 생각한 그런 건 아닌 듯 한데. 그냥 티를 안 내는 것 뿐일지도. 어찌됐든 더 말을 얹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발렌타인 본인이 그럴 일 없다고 했으니 알아서 잘 할거라 여기기로 했다. 비슷하다 한 것 역시 상대다. 배신할 이유 따윈 없을 터다.
일단락된 얘기는 넘기고 새롭게 꺼낸 얘기거리가 달갑지 않을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여태 꾹 눌러 참다가 꺼낸 그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모처럼의 기회, 모처럼의 자리다. 이대로는 그냥 안 넘어가줄 거란 기색을 여지없이 내비치고 있으니 안 하면 시달리겠다고 중얼거리길래, 그녀는 웃는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아무렴요."
그러니 적당히라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길 바란다, 뭐 그런 말을 직접 한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서 들은 대답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
"우리 아가... 우리 아가, 로군요...?"
발렌타인의 말이 딱 인지된 순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희비가 교차했다. 말실수를 인지한 발렌타인이 얼굴을 가리며 짤막히 중얼거리고 맞은편에선 그녀가 우와- 하는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빤히 응시한다. 그 날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교차되는 분위기에 그녀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너무 히죽대는 건 실례니까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는데, 웃는게 입만 웃는게 아니라 눈도 아주 활짝 웃고 있었으니 오히려 더 얄밉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지- 수업에까지 데려와서 대하는게 보통이 아니더라니- 아, 뭐, 그럴거 같긴 했어요? 패밀리어라면 모를까, 패밀리어도 아닌 그를 대하는게 참 그렇더라니. 아가라고 부를 정도면 뭐- 음-"
사실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아는 척 하며 말하는 건 못할 것도 없다. 그게 은근히 놀리듯 하는 거라면 더 못할 이유가 없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은 그래서, 라며 뒤를 이었다. 아직 그의 수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선고하듯이.
"어쩌다가 우리 아가까지 된 거에요? 말 하다 말면 더 궁금해지잖아요. 네? 벨 선배. 어떻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에요? 네?"
자초지종을 다 들어야만 해방시켜줄 듯 그녀의 물음은 집요했다. 아무리 그래도 테이블을 넘어올 듯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팔 하나를 대가로 순간이동 마법을 쓰고 싶은 충동이 순간 치밀었지만 그럴수도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 꼼수를 써서 상황을 타파하려 했다. 그런 일은 자신있는 분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만족할만한 대답을 내뱉는 실수를 범했다. 범인은 무의식이다. 그는 당신이 아가라고 발음하자 손으로 덮어가린 고개를 휙 들었다. 히죽히죽 웃는 것도 얄밉지만 눈까지 나는 지금 아주 기쁩니다 드러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진다.
"조, 조용히, 그러니까. 나는."
은근히 놀리는듯한 당신의 반응에 그의 창백한 낯빛이 점점 붉어진다. 부끄러운지 절벽에서 떨어졌던 상황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현궁의 사신이니 하는 칭호도, 성격 이상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모두 뒤로 한다. 평범한 그 나이의 학생이 보일 반응이다. 붉어진 얼굴을 다시 손으로 가리고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한다. 그는 당신의 질문세례에 뭔가 말하려다 기어이 혀를 씹는다. 흐윽, 하고 숨 들이키는 소리 뒤로 그가 손가락의 틈을 벌린다.
"라온, 에서."
여전히 경계가 흐리지만 아까보다 조금 촉촉해진 것 같은 눈동자로 당신을 겨우 바라보고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물우물 입을 연다. 희비가 교차하고 정신이 혼란한 와중 집요한 물음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겨우 숨을 들이킨다. 운을 뗀다. "…호의로 정보와 불, 그리고 사탕을 받았네만." 하고 말하곤 몸서리를 쳤다. 여전히 절애하는 자의 사탕은 오싹하다. 살아있는 것이 좋다지만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다른 건 아니고, 더 나아갈까 두려운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까봐. 아무리 그래도 원내에서는. 음.
"그 이후로 연이 닿아 매로 변신해서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더군. 사람인 줄 몰랐으니 당연히 아가라고 불렀을 뿐이네. 적어도 내 동물은 그런 호칭을 붙이는 몇 안 되는 존재니까. 사람으로 변할 줄은 몰랐네. 그 호칭이 좋다고 계속 불러달라 할줄도 몰랐고. 그래서 비꼴 심산으로 애정을 줄 사람이 필요하냐 했는데, 젠장."
달링도 그 이유에서 이름이 달링이지 않은가. 인간보다 몇천배는 낫다면서 그가 애지중지 한다. 마노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고, 달링은 지금 마노를 노려보며 Hate를 연신 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젠장의 젠을 뱉으며 결국 얼굴에서 손을 뗐다.
"받고 싶은 사람이 나라지 뭔가. 고작 아가라고 불렀다는게 이유라는게 말이 안 되길래 인간 취급이라도 받을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켜야겠다 싶어서 오늘 같이 좀 있어달라 하니까 대뜸 자기를 거둬달라 하고, 그래서 거뒀을 뿐인데,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젠장,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명료한 대답은 나오지 못하고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얼굴에 열이 올라 더운지 후드를 벗고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가 입을 벌린다.
그녀의 히죽이는 얼굴은 발렌타인이 고개를 들어 쳐다봐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보란 듯 당당하게 마주했으면 마주했지. 이쯤에서 성을 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되려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밀랍마냥 희던 얼굴에 붉은 기가 번지니 이게 또 사뭇 느낌이 다르다. 대답도 제대로 못 해 혀 씹는 소리까지 내는 그에게서 그녀의 시선은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어물어물, 운을 떼었을 때는 귀까지 쫑긋 기울어졌다.
"흐음."
라온에서, 라는 시작은 그녀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 했다. 그야 그녀도 라온에서 할미탈, 샤오를 만났었으니까. 여기서 스테이크를 얻어먹기도 했으니 어디서 마주쳤던들 신기하진 않다. 교류한 쪽은 좀 의아하긴 하다. 정보와 불과 사탕? 단 걸 좋아하나? 싶은데 별안간 발렌타인이 몸서리를 쳤다. 호오. 이건 또 뭔가 있어보이는데. 새로운 의문은 일단 접어 밀어두고 남은 얘기에 집중한다.
"음- 그랬었군요. 그랬었구나- 흐응-"
자세한 내막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으로는 충분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여전히 얄밉게 깐족거리고 있었지만.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시선이 더 히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표정에 한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린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냥 맥 빠진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런 귀여운 구석도 있었네요. 어쩌죠, 벨 선배? 저 조금 탐이 생기는데, 채가도 괜찮으시련지?"
아까 했던 질문과 비슷해보이지만 명백히 다른 의도, 다른 의미의 농담을 툭 던져놓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작게 키득키득 웃는다. 발렌타인과 달리 그녀는 폭소하는 일 없이 낮고 잔잔히 웃었는데 그게 또 어떻게 느껴졌을지는. 얼굴 때문인지 후드와 머리를 걷는 그를 웃으며 지켜보다가 받은 질문이 그대로 돌아오자 그녀는 별거 없다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 날만 달랑 얘기하면 이해가 좀 덜 할테니까 시간 순서대로 얘기해드릴게요. 자, 일단 숨부터 좀 돌리세요."
때마침 새로 주문한 버터맥주가 나와 한모금 마시고 진정하라며 친히 권해주었다. 어째 사는 건 발렌타인인데 생색은 그녀가 내는 것 같다. 아까부터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말하고 행동한 그녀도 새 잔을 받아 시원하고 달달한 음료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원래부터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입학해서, 그 사람을 선배로서 알게 되었을 때부터요. 그 때는 아마 선배에 대한 동경이나 호감 비슷한 무언가였는데.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변했던거 같네요. 그 때의 제가 보기엔 언제나 금방 사라질 것 같고 마음이 여기 없는 사람 같아서 어딘가 초조했거든요.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질거 같아서. 그래도 일단은 학원 내에서 보이긴 하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이게 시작된 거에요. 탈들의 습격을 비롯한 여러 일들이. 그냥 지나가는 일도 아니고 직접 공격을 맞기까지 하니까 덜컥 겁이 났어요. 이러다 그 사람을 잃으면 어쩌지. 그 와중에 의미심장한 신탁까지 들어서,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 그 다음에 만났을 때 그냥 그대로 애원했죠. 선배가 어느쪽이든 상관없으니 제 곁에서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그랬더니 알려주더라구요. 자신이 누구인지, 정말 그래도 곁에 있을건지. 저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죠. 그 날부터네요. 이런 관계가 된게. 아마 반쯤 죽어가는 마법사가 습격했던 그 다음날인가 그랬을거에요."
정말 전부를 얘기하면 밤을 새도 모자를테니, 적당히 간추린 얘기를 막힘없이 풀어놓고 이게 다라는 듯 고개를 작게 까딱인다. 그 뒤로 좀더 있긴 하지만 설마하니 그 부분까지 궁금해하진 않을거 같고. 말을 마친 그녀는 맥주를 한모금 더 마신 뒤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