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에서 불을 나눴다는 사실로 미루건대 그는 흡연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워낙 모호하게 설명했던지라 담배 불을 어떻게 나눴는지, 사탕도 어떻게 받아냈는지는 모를 것이라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만약 눈앞의 이 깐족거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여인이 그가 품어낸 자와 첫 만남부터 입맞춤에 준하는 행위를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리겠는가. 때마침 들려오는 당신의 추임새도 대단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뒤집힌 속이 다시 180° 뒤집혀 원상복귀 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정방향으로 뒤집히는게 아니라 이대로 빙빙 돌아 속을 연결하는 부분이 뚝 끊길 것 같다. 얄미운 정도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일 날 소리. 자네 사람을 더 챙겨야지."
이전처럼 진지하지도 않았고, 적대도 아니다. 당신처럼 농담으로 받아쳤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만약 일전 NE가 쳤던 장난처럼 고양이 귀가 돋아났다면 분명 옆으로 눕혀 당신을 빤히 쳐다봤을 것이다. 당신의 농담은 아까 전과 확실히 달랐지만, 지금은 깐족거리는 그 모습이 제법, 아니, 아주 얄미웠기 때문이다. 낮고 잔잔히 웃는 모습에 특히 더. 차라리 그처럼 폭소했다면 한번 앓는 소리를 내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속으로 고통받는 것이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벗어둔 모노클을 다시 썼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참 고맙군 그래." 하고 기어이 앓는 소리를 낸다. 차가운 버터맥주가 다시 나오자 그는 한모금 목 뒤로 넘겼다. 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알 정도로 서늘하고 놀라울만치 단맛이 나는 맥주가 활활 타는 속을 진정시킨다. 그렇지만 아직 뺨의 열감은 가시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시간이 약일 것이다. 맥주잔을 만지작거린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는 흠, 하고 운을 뗀다.
"놀랍군. 그렇게 잡아낼 줄이야."
요컨대 당신은 책에서나 나올법한 로맨틱한 사랑을 했다는 뜻이다. 엔딩이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써가는 야시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런 간지럽고 달달하며 애절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감성적인 부류가 아닌지라 그 자체로는 깊은 흥미를 가질 수는 없지만, 세부적인 것은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운명을 아예 개척해버린 것이 아닌가. 살아있는 자는 삶을 개척하고, 죽음을 바라보는 장의사들은 그 개척하는 행동에 많은 흥미를 가진다. 나중에 성공적으로 개척하고 후회 없이 올지, 아니면 후회 가득한 모습으로 오게 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감히 판단하건대 당신은 아마 전자지 않을까 싶다. 그는 버터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려다 잔을 쥐고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지금까지의 무관심으로 보아 외부에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것이지만, 당신의 말로써 확인하게 되는 건 더 깊은 절망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스베타는 고개를 떨구며 찻잔을 내려다본다. 고인 물은 썩듯이. 우리는 이 검은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천천히 부패해가며 악취를 풍기게 될 것이다. 문득, 스베타는 학교를 둘러싼 울타리가, 마법부가. 우리라는 물이 흘러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댐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요."
지금은, 하지만 앞으로는? 진정하라는 당신의 말에 스베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서 내려둔다. 몸 전체로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조금은 과장되었던 감정이 누그러진다. 스베타는 고개를 들며 당신과 눈을 맞춘다.
한순간이 무사히 지나간 것처럼 보여도, 그녀의 생글생글 웃는 낯과 일순간의 혼란스러움 뒤로 무슨 말, 무슨 생각이 숨겨졌을지는 그것이 드러날 때까지 모르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남매들 중에 그런 쪽으로 빠삭하며 이러한 장난을 즐기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을 배운 그녀는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이다.
"어머. 손이 하나인 것도 아니고 둘 쯤 건사하지 못 할 것도 없는데요?"
그녀는 농담으로 받아준 말에 다시금 농을 던지며 제 손을 쥐었다 펴보였다.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저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성사시켜버릴 것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매구라 불리는 이를 붙들어 놓았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장난으로 여기기도 어렵지 않을까. 또 보란듯 작게 웃는 걸 보면 그런 걱정들이 죄 허사인 듯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발렌타인이 맥주로 속을 한김 식히는 것을 기다려 그녀는 제 이야기를 했다. 많은 것이 잘려나가 짧아졌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건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고 본다. 얘기를 마친 그녀는 반지를 만지며 뭐든 말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 제 목을 쉬일 겸. 그리고 나온 짧은 감상에 재차 싱긋 웃으며 말을 얹는다.
"갖고 싶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잡는게 당연하죠. 전 다른 건 몰라도 제 욕심 하나에만큼은 솔직하거든요."
의외로 그녀는 반문을 하지 않았다.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고, 그 욕심이 같음에 대한 동의를 요할 법도 한데. 얄밉게 웃는 시선에서조차 그녀는 묻지 않고 있었다. 절대 같을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그저 가만히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마주하다가, 잔을 쥐고 하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잔을 잡아 들어올린다.
"지금이라면 사양 않죠. 그럼, 후회하기 않기 위해."
언제 돌아봐도 미련없이 나아갈 수 있기 위해, 그런 삶을 위해서, 라는 제법 거창한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기꺼이 발렌타인과 잔을 대고 맥주를 들이켰을 것이다. 그녀의 다짐은 그녀의 속에만 담아두고 잔을 내린 후에 여전히 깐족깐족 얄밉게 웃는 낯으로 조잘거렸을테다.
"그래서, 아까 듣고 생각난건데. 선배나 그 분이나 단 걸 좋아하시는 모양이에요? 마침 제 생가에서 보내준 간식거리가 제법 많아서요. 조만간 나눠 들고 현궁에 한번 찾아갈게요. 그 중에 달콤한 시럽이 든 사탕이 있는데 물고 있으면 달달하고 깨물면 톡 터져서 달달한게 진짜 맛있거든요. 두 분이 '같이' 드시면 차암 좋을거 같으니 꼭 드리러 갈게요."
그러면서 어째선지 손끝으로 제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게 마치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한번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키드득 웃는 소리가 그냥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니. 과연 이런 그녀와 공모 아닌 공모를 하게 된게 잘 된 일인가 의문을 품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을거다.
그리고 후일, 발렌타인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든 아니든 그녀는 정말로 작은 바구니에 먹음직스런 간식거리를 소복히 담아 현궁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그 역시 받았을지 내쳤을지는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만약 그녀의 작은 호의를 받아들었다면 또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꼭 같이 드세요, 네?" 하고 재빨리 내빼는 그녀를 보았겠지. 아니면 아닌대로 입을 비죽 내민 채 툴툴대며 돌아가는 그녀를 보았을거고.
//이걸로 막레 해두 되고 따로 막레 해두 되구~~ 미리 일상 수고했어 벨주! 벨은 이렇게 첼 깐족권(영구)를 얻었읍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