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나 내심 편했다. 서로 기를 세워대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짐승같이 싸운 일이 지금껏 얼마나 많았는지! 지팡이를 꺼내지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대화하기를 바랐던 적도 있다. 살면서 무뎌지고 이젠 어떻게 돼도 상관 없는 행동이 됐다. 새삼 지금 그 행동을 하고 있다는게 느껴지니 낯설다. 그렇지만 들뜨지는 않았다. 이미 들뜨기엔 오랜 시간이 지난 소망이라 자연스럽게 차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야망찬 사람을 만나는 건 아직도 큰 꿈이다! 오늘 그 소원을 이룬 것 같다. 이제 머리 셋 달린 시체를 만나보면 여한이 없겠다.
고작 소리내서 웃었다고 벌써부터 힘이 든다. 숨을 색색대고 우아하게 대화를 꺼냈다. 불안해하는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비유에 미묘해진 당신을 보며 순수한 의문을 표한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온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친다.
"당연히 칭찬일세. 그것도 지금껏 해본 칭찬 중에 손에 꼽는 칭찬이지."
포르말린과 글리세린, 그리고 마법으로 채우지 않은 시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법이다. 자연을 거스르는 존재와도 같은 시체의 시랍화 현상처럼 얼마나 획기적인 인재의 발견인가! 다른 가문원이 이 칭찬을 들었으면 기절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지만 역시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건 이 가문 사람들 뿐이지, 가문 밖 인간들은 비유를 온전히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도 의미만 통하면 됐거니 싶었다.
"말조차 하지 않았다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걸세."
이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타니아의 죽음은 그의 복학에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다줬다. 그는 그 순간을 회상한다. 곧 기숙사 점수를 채우니 본가에 잠시 방문하겠다 호언장담을 하던 타니아는 일주일도 안 지나서 시체로 돌아왔다. 블랙번 사람들은 유일한 후계자를 잃고 시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통곡했다. 천을 들추니 눈도 감지 못하고 공포에 젖은 얼굴만이 온전했다. 염을 하며 울어본 적이 없었고, 그날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인생 한번 엿같이 아름다웠다. 그가 이번 추모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쏟는 그 상황이 싫었다. 유족인 그도 울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이 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잠시 집안을 떠올린다. 타니아는 블랙번의 요구로 화장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금지옥엽이고 또래조차 없던 유일한 10대 후계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나도 딱히 요구할 생각은 없네. 단지 불안할 요소가 하나 사라졌다는 것으로 마음이 놓일 뿐이지. 무엇보다 내색하지도 않을 생각이고 말입세. 학년 대표끼리 대화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끽해야 순찰 루트 편성이나 백궁과 현궁의 말썽쟁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것 뿐이지."
그는 버터맥주를 마저 마신다. 한모금 남은 것을 마저 목 뒤로 넘기고 나서야 당신의 제안에 응한다. 손바닥 뒤집듯 지금껏 머글이니 잡종이니 혼혈이니 순혈이니 품종교배니 까내리던 태도를 뒤집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휴학은 좋은 명분이라 그나마 자제할 수단은 된다. 지병과 더이상의 언쟁이 스트레스를 촉구해 쓰러지게 만든다는 핑계로 더이상 매구를 욕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예 입을 다물어 내색하지도 않을 상황을 만들겠다 이 말이다. 적어도, 전장에서는 말이다. 이제 매서운 말은 탈에게만 갈 생각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싫으면 탈을 그만 두든지. 그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빈 잔을 보곤 턱을 괸다.
"나라고 많이 살아왔을까. 자네 말대로 하겠네. 더 습격이 일어나는건 이쪽도 사양일세."
그리고 그는 손을 든다. "버터맥주 두잔 더." 하고 주문하고는 당신이 손대지 않는 젤리를 입에 다시 넣는다. 행운의 여신은 그를 절대 비호하지 않는다. 그는 기어이 냅킨 한장을 손으로 집어올린 뒤 고개를 돌려 당신이 보지 않을 위치에서 뱉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맛이다. 단맛 하나 나지 않는 시나몬 그대로의 맛이었다. 그는 냅킨으로 뱉어낸 젤리를 꽁꽁 싸매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당신의 말대로 이런 기회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허투루 날려버리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었다. 당신을 따르던 스베타는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깜빡인다. 제 결심을 믿어주었다는 것에 조용한 미소를 띠고, 당신은 앞서 걸어가고 있기에 이 모습을 보지 못하니, 중간에 당신이 돌아서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미소는 사당에 도달하기 전까지 길게 이어질 것이었다. 열린 문안으로 들어서는 당신과 다르게 스베타는 그 앞에서 우뚝 멈춰 선다. 그 거대한 신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경외에 찬 시선으로 신당을 보던 스베타는 이내 경직된 몸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익숙하냐 묻는 당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지내온 시간이 있었기에, 조금씩 익숙해진 것이었다. 자리에 앉아 내부를 둘러보던 스베타는 손짓 한 번에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본다. 저번과 같은 차일까. 피어오르는 흰 수증기와, 은은한 차 향기는 긴장으로 경직된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변심이라도 생긴 거냐는 당신의 물음에 스베타는 시선을 들어 당신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제 마음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같을 거예요. 그저.... 지금의 상황이 너무 두려워서 그래요. 이 최악의 상황이 끝나긴 할까요? 외부에서 그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데. 저희들끼리 앞으로의 상황들을 계속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불만스럽다는 목소리는 점점 가팔라지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변한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어차피 그러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그녀가 품은 생각을 과연 야망이라 부르는게 옳을까. 발렌타인이 기꺼이 그녀를 야망에 찬 살아있는 사람이라 칭하는 걸 들으며 최근 읽었던 가문의 수기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수기 속 선조와 같은 일인 것만 같았다. 달리 방법이 있을텐데 그것을 찾지 않고 당장 눈 앞의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 선조가 끝끝내 후회한 그 길과 겹쳐보였다. 선조는 목적을 이뤘음에도 결국 후회한다 하지 않았는가. 그녀도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결국 후회하게 된다면? 과연 이 순간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 혼자만이 후회하는 때가 온다면, 만약.
"...본인이 그렇다 하니 그런 줄 알게요."
그 비유가 손에 꼽을 정도의 칭찬이었다는 말에 대꾸하며 그 김에 머릿속을 흐트러뜨리는 생각을 밀어내었다. 심지가 당겨진 이상 걱정도 고민도 무의미하다. 이제 할 것은 택한 길을 나아가는 것 뿐.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만이 그녀에게 남은 일이다. 때마침 발렌타인이 한 말이 꽤나 정곡을 찌르기도 했고.
"아- 아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단 낫겠죠. 뭐든 하는게."
무심코 내심이 흘러나갈 뻔 한 걸 적당히 수습해 흘려넘긴다. 과정이 어찌됐든 도발하고, 끌어들인 것은 그녀다. 그녀가 먼저 후회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째서일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또다시 잡념을 끌어오려는 정신을 붙들어 테이블로 되돌렸다. 현실에서 발렌타인은 순순히 그녀가 하는 말들을 듣고 그리 하겠다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말의 전달에 미스가 있었던 거 같아 한부분은 정정해야 했다.
"제가 말한 건 선배가 데리고 있는 그에게 내색하지 말란 거에요. 전 선배가 그렇게 가볍게 얘기해버릴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선배의 곁에 있는 그는 모르잖아요? 무의식이라는 거, 무시하면 큰일 날 때도 있으니까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발렌타인의 곁에 있는 탈은 딱 한번 본 그 우는 남자일거란 예감이 들었다. 만약 맞다면 정말 생각없이 의도없이 말을 흘려버릴지도 모르니 아예 의식하지 않게 하는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 그 부분을 주의해달라 말을 덧붙이고, 선뜻 맥주를 주문해주는 것에 싱긋 웃어보였다. 무슨 맛이었는지 모를 젤리를 뱉어내는 걸 보고 작게 킥킥대는 웃음으로 바뀌긴 했지만.
"주는 걸 사양하라 배운 적은 없으니, 잘 마실게요. 벨 선배."
그녀는 매우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빈 잔을 옆으로 슬쩍 밀어놓았다. 빈 자리에 팔을 올리고 몸을 테이블에 살짝 기대어 어느새 흥미로 반짝이는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모처럼의 자리를 공모하는 것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는 듯이.
"딱딱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른 걸로 넘어가죠. 이제. 저 아까부터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어쩌다 선배가 곁에 그를 두게 된 건지."
일단 선배니까 예의상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궁금한 건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다. 혹시라도 발렌타인이 이 자리를 피하려 한다면 기꺼이 저 소매자락을 낚아채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 속내의 은근함이 시선에 빤히 드러났을 것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사소하게 오늘은 일찍 자고싶다는 것도 나름의 욕망일 것이다. 그 욕망을 언젠가 실현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실행하는 사람, 아니면 남이 해줄거라 믿는 사람. 후자가 더 많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할 사람도 적다. 높이 사는 점은 이것이었고, 그는 더이상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제부터 서로의 선택이다. 그저 협력도 아니고 대화만 나눈 사이지만, 일단 욕망의 뿌리의 한부분은 같다. 그렇기에 가장 끝에서 걷어차거나 밀어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밀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것이 나락의 끝에서 지켜볼 일인지, 아니면 위에서 내려다볼 일인지, 동등하게 눈을 마주할 일인지. 어떻게 될 지는 이제 앞길 하나 알려주지 않는 야속한 운명만이 알려줄 것이다.
그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당신의 말을 듣고, 정정할 부분에는 잠시 고민한다. 지금껏 내색한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는다. 대놓고 내색한 적은 없다. 아마……. 아. 반지를 줬다. 놀랍게도 가주의 증표를 줘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건 매구의 사람에서 벗어나란 뜻이 아니지 않은가. 그가 졸업 후 수명이 다해 죽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기에 만들어둔 나름의 도주 경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는 입술 속의 살을 티나지 않게 깨물고는 생각을 마친듯 입을 연다. "그럴 일 없네." 하고는 이후의 일이 반복된다. 그는 단맛 하나 나지 않는 시나몬맛 젤리빈을 뱉었고, 끔찍하게 싫었는지 입술을 꾹 다문다. 시나몬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단맛 하나 없을 수 있을까? 이건 젤리의 수치다! 그는 젤리가 담긴 나무 그릇을 구석으로 밀어낸다. 충격이 큰듯 싶다. 맥주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는 손을 고이 내려놓는다. "글쎄, 알려줘야 할 지." 하다 당신의 은근한 시선을 마주하고는 말을 정정한다. "안 하면 내가 시달리겠군 그래."
"그래. 우리 아가를 내 당연히 싫어했지. 초면부터 크루시오를 쓰고 쓰러진 사람이 자는 거라고 착각하는 백치에게 어떻게 호감을 한번에 가질 수…… 아?"
그는 그대로 굳는다. 눈이 커지고 손을 들어 입가를 덮어 가렸다. 방금 뭐라고 했는지 한박자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그마저 무의식적으로 단어를 되기 때문이다. 작게 벌린 입을 꾹 다물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수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탄스럽게 여겼다. 당신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도 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말을 뗐다.
"……그, 러니까, 나는..아..그러니까..젠장."
그는 길쭉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린다. 얌전한 고양이는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있고, 엎질러진 발언으로 봐선 그가 그 고양이인듯 싶다.
그녀가 정정한 말에 잠시 고민하길래 이미 내색한 적이 있나 싶었다. 벌서 그런 말을 할 만큼의 사이였던건가. 별말이 없는거나 표정도 변하지 않는 걸 보면 그녀가 생각한 그런 건 아닌 듯 한데. 그냥 티를 안 내는 것 뿐일지도. 어찌됐든 더 말을 얹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발렌타인 본인이 그럴 일 없다고 했으니 알아서 잘 할거라 여기기로 했다. 비슷하다 한 것 역시 상대다. 배신할 이유 따윈 없을 터다.
일단락된 얘기는 넘기고 새롭게 꺼낸 얘기거리가 달갑지 않을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여태 꾹 눌러 참다가 꺼낸 그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모처럼의 기회, 모처럼의 자리다. 이대로는 그냥 안 넘어가줄 거란 기색을 여지없이 내비치고 있으니 안 하면 시달리겠다고 중얼거리길래, 그녀는 웃는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아무렴요."
그러니 적당히라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길 바란다, 뭐 그런 말을 직접 한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서 들은 대답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
"우리 아가... 우리 아가, 로군요...?"
발렌타인의 말이 딱 인지된 순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희비가 교차했다. 말실수를 인지한 발렌타인이 얼굴을 가리며 짤막히 중얼거리고 맞은편에선 그녀가 우와- 하는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빤히 응시한다. 그 날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교차되는 분위기에 그녀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너무 히죽대는 건 실례니까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는데, 웃는게 입만 웃는게 아니라 눈도 아주 활짝 웃고 있었으니 오히려 더 얄밉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지- 수업에까지 데려와서 대하는게 보통이 아니더라니- 아, 뭐, 그럴거 같긴 했어요? 패밀리어라면 모를까, 패밀리어도 아닌 그를 대하는게 참 그렇더라니. 아가라고 부를 정도면 뭐- 음-"
사실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아는 척 하며 말하는 건 못할 것도 없다. 그게 은근히 놀리듯 하는 거라면 더 못할 이유가 없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은 그래서, 라며 뒤를 이었다. 아직 그의 수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선고하듯이.
"어쩌다가 우리 아가까지 된 거에요? 말 하다 말면 더 궁금해지잖아요. 네? 벨 선배. 어떻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에요? 네?"
자초지종을 다 들어야만 해방시켜줄 듯 그녀의 물음은 집요했다. 아무리 그래도 테이블을 넘어올 듯 들이대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