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을 시작한 뒤 발렌타인은 생각보다 여러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냥 듣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생각은 한참 짧다는 듯 조금은 당황스러울만한 반응도 나왔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좋은 방향이었음은 틀림없으리라.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는 말이 의외였는지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하면서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입이 꿰였다며 농담 같은 말을 툭 던지더니 그녀의 잘못을 이해한다고도 했다. 그의 반응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 다소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발렌타인이 침묵했을 때 이번엔 그녀가 밀랍인형 비스무리한 상태가 되어 슬금 눈치를 보았다.
"...?, ???"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고 기다리니 대뜸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아니었다. 발렌타인에게서였다. 그는 참기 힘들다는 듯 폭소했고 숨쉬는 것까지 힘들어했다. 그녀의 말 중에 우스운 부분이 있었나? 아니면 저렇게 웃을만큼 어이없었나? 그의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녀는 불안과 의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었다. 웃음을 멈춘 발렌타인이 턱을 괴며 말을 하고서야 겨우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나 싶었지만 그의 비유가 다시금 그녀의 표정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그...거 칭찬이죠? 시체랑 비교당하니까 기분이 묘하긴 한데, 음..."
시랍화 20년산 시체를 봤을 때보다 놀랍다 하니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모욕인가 싶다가도 전혀 그런 기미가 없는 저 표정을 보면 아닌거 같다. 그, 언더테이커 식 농담인걸까. 아까도 시체가 언급되지 않는 농담은 이해를 못 한다고도 했으니까.
"잘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요."
여태 생각만 하던 걸 처음으로 입 밖에 낸 거니 아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그녀의 입이 테이블 한가운데에 열린 로켓으로 인해 다물렸다. 로켓 안에는 물빛 머리카락이 고이 담겨있었다. 유려하게 담긴 그것의 의미를 그녀는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떠올리는게 늦었고, 그나마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선명하게 만든 건 발렌타인의 말이었다. 그 날 희생자 중에 있었다는 그 말, 물빛 머리카락, 고인의 머리카락을 담는 로켓, 주변 사람의 죽음. 아. 그녀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며 동시에 눈 역시 감았다. 행여나 눈에 내비칠 동정과 미안함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 날, 그녀가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희생자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라는 생각이 거칠게 속내를 후려쳐 쓰라리다. 동시에 조금 더 결심이 굳어진다. 이 이상 무의미한 죽음은 늘리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
조금 뒤 그녀가 눈을 뜨고 본 건 깊은 수심 대신 미소를 내보이는 발렌타인의 얼굴이었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오싹한 느낌이 든다. 저도 모르게 팔을 한번 쓸어내린 그녀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젤리들을 보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은 건 싫은거다. 대신 잔을 들어 몇모금을 들이키고서 말했다.
"슬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비슷한건지, 아닌지. 협력이라고 해도 딱히 뭘 해달라고 하진 않을거에요. 그가 선배를 선택하게 하는 건 온전히 선배에게 달린거니까요. 이제 제가 무슨 계획을 갖고 어떻게 하려는지 대강 알게 되었으니 그 다음은 선배가 알아서 하시겠죠. 혹시 모르니까 그에게는 절대, 절대 내색하지 마세요. 만에 하나 이 계획으로 제가 그 사람에게 밉보여서 내쳐지게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을거에요."
남은 맥주를 마시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렸지만 손잡이를 쥔 채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직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는 어린애를 너무 높게 평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개인적인 복수도 저는 관여하지 않을거지만, 최소한 모든 상황이 끝난 후로 해주시면 좋겠어요. 도중에 또다시 쓸모있는 탈이 죽어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수를 쓸지 몰라요. 이전의 습격도, 그래서 일어난거니까."
순간적으로 떠오르려는 이매와 짐승들의 잔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작게 흔든 그녀는 다시 맥주를 마시려 했지만 잔이 빈 걸 깨닫고 발렌타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말하지 않아도 잔을 쥐고 빤히 보는 모습이 한잔 더, 를 표현하고 있었다.
본능이 반응한다라. 본능적으로 남이 고민에 빠져 있음을 당신은 감지할 수 있다는 걸까. 그것이 그저 사소한 고민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결국 그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지. 방금 전의 당신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본능을 거역하는 것은 쉽지 않을 테고, 그럴 때마다 당신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사당으로 가자는 당신의 말에 스베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구겨진 옷을 펴낸다. 아무래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이곳에서 면담을 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두 번이나 사당에 오를 수 있다니. 영광이네요."
스베타는 그리 말하며 당신이 앞서 걸음을 옮기면, 그 뒤를 조용히 뒤따르기 시작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