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팔 하나를 대가로 순간이동 마법을 쓰고 싶은 충동이 순간 치밀었지만 그럴수도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 꼼수를 써서 상황을 타파하려 했다. 그런 일은 자신있는 분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만족할만한 대답을 내뱉는 실수를 범했다. 범인은 무의식이다. 그는 당신이 아가라고 발음하자 손으로 덮어가린 고개를 휙 들었다. 히죽히죽 웃는 것도 얄밉지만 눈까지 나는 지금 아주 기쁩니다 드러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진다.
"조, 조용히, 그러니까. 나는."
은근히 놀리는듯한 당신의 반응에 그의 창백한 낯빛이 점점 붉어진다. 부끄러운지 절벽에서 떨어졌던 상황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현궁의 사신이니 하는 칭호도, 성격 이상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모두 뒤로 한다. 평범한 그 나이의 학생이 보일 반응이다. 붉어진 얼굴을 다시 손으로 가리고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한다. 그는 당신의 질문세례에 뭔가 말하려다 기어이 혀를 씹는다. 흐윽, 하고 숨 들이키는 소리 뒤로 그가 손가락의 틈을 벌린다.
"라온, 에서."
여전히 경계가 흐리지만 아까보다 조금 촉촉해진 것 같은 눈동자로 당신을 겨우 바라보고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물우물 입을 연다. 희비가 교차하고 정신이 혼란한 와중 집요한 물음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겨우 숨을 들이킨다. 운을 뗀다. "…호의로 정보와 불, 그리고 사탕을 받았네만." 하고 말하곤 몸서리를 쳤다. 여전히 절애하는 자의 사탕은 오싹하다. 살아있는 것이 좋다지만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다른 건 아니고, 더 나아갈까 두려운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까봐. 아무리 그래도 원내에서는. 음.
"그 이후로 연이 닿아 매로 변신해서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더군. 사람인 줄 몰랐으니 당연히 아가라고 불렀을 뿐이네. 적어도 내 동물은 그런 호칭을 붙이는 몇 안 되는 존재니까. 사람으로 변할 줄은 몰랐네. 그 호칭이 좋다고 계속 불러달라 할줄도 몰랐고. 그래서 비꼴 심산으로 애정을 줄 사람이 필요하냐 했는데, 젠장."
달링도 그 이유에서 이름이 달링이지 않은가. 인간보다 몇천배는 낫다면서 그가 애지중지 한다. 마노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고, 달링은 지금 마노를 노려보며 Hate를 연신 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젠장의 젠을 뱉으며 결국 얼굴에서 손을 뗐다.
"받고 싶은 사람이 나라지 뭔가. 고작 아가라고 불렀다는게 이유라는게 말이 안 되길래 인간 취급이라도 받을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켜야겠다 싶어서 오늘 같이 좀 있어달라 하니까 대뜸 자기를 거둬달라 하고, 그래서 거뒀을 뿐인데,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젠장,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명료한 대답은 나오지 못하고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얼굴에 열이 올라 더운지 후드를 벗고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가 입을 벌린다.
그녀의 히죽이는 얼굴은 발렌타인이 고개를 들어 쳐다봐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보란 듯 당당하게 마주했으면 마주했지. 이쯤에서 성을 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되려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밀랍마냥 희던 얼굴에 붉은 기가 번지니 이게 또 사뭇 느낌이 다르다. 대답도 제대로 못 해 혀 씹는 소리까지 내는 그에게서 그녀의 시선은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어물어물, 운을 떼었을 때는 귀까지 쫑긋 기울어졌다.
"흐음."
라온에서, 라는 시작은 그녀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 했다. 그야 그녀도 라온에서 할미탈, 샤오를 만났었으니까. 여기서 스테이크를 얻어먹기도 했으니 어디서 마주쳤던들 신기하진 않다. 교류한 쪽은 좀 의아하긴 하다. 정보와 불과 사탕? 단 걸 좋아하나? 싶은데 별안간 발렌타인이 몸서리를 쳤다. 호오. 이건 또 뭔가 있어보이는데. 새로운 의문은 일단 접어 밀어두고 남은 얘기에 집중한다.
"음- 그랬었군요. 그랬었구나- 흐응-"
자세한 내막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으로는 충분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여전히 얄밉게 깐족거리고 있었지만.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시선이 더 히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표정에 한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린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냥 맥 빠진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런 귀여운 구석도 있었네요. 어쩌죠, 벨 선배? 저 조금 탐이 생기는데, 채가도 괜찮으시련지?"
아까 했던 질문과 비슷해보이지만 명백히 다른 의도, 다른 의미의 농담을 툭 던져놓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작게 키득키득 웃는다. 발렌타인과 달리 그녀는 폭소하는 일 없이 낮고 잔잔히 웃었는데 그게 또 어떻게 느껴졌을지는. 얼굴 때문인지 후드와 머리를 걷는 그를 웃으며 지켜보다가 받은 질문이 그대로 돌아오자 그녀는 별거 없다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 날만 달랑 얘기하면 이해가 좀 덜 할테니까 시간 순서대로 얘기해드릴게요. 자, 일단 숨부터 좀 돌리세요."
때마침 새로 주문한 버터맥주가 나와 한모금 마시고 진정하라며 친히 권해주었다. 어째 사는 건 발렌타인인데 생색은 그녀가 내는 것 같다. 아까부터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말하고 행동한 그녀도 새 잔을 받아 시원하고 달달한 음료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원래부터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입학해서, 그 사람을 선배로서 알게 되었을 때부터요. 그 때는 아마 선배에 대한 동경이나 호감 비슷한 무언가였는데.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변했던거 같네요. 그 때의 제가 보기엔 언제나 금방 사라질 것 같고 마음이 여기 없는 사람 같아서 어딘가 초조했거든요.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질거 같아서. 그래도 일단은 학원 내에서 보이긴 하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이게 시작된 거에요. 탈들의 습격을 비롯한 여러 일들이. 그냥 지나가는 일도 아니고 직접 공격을 맞기까지 하니까 덜컥 겁이 났어요. 이러다 그 사람을 잃으면 어쩌지. 그 와중에 의미심장한 신탁까지 들어서,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 그 다음에 만났을 때 그냥 그대로 애원했죠. 선배가 어느쪽이든 상관없으니 제 곁에서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그랬더니 알려주더라구요. 자신이 누구인지, 정말 그래도 곁에 있을건지. 저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죠. 그 날부터네요. 이런 관계가 된게. 아마 반쯤 죽어가는 마법사가 습격했던 그 다음날인가 그랬을거에요."
정말 전부를 얘기하면 밤을 새도 모자를테니, 적당히 간추린 얘기를 막힘없이 풀어놓고 이게 다라는 듯 고개를 작게 까딱인다. 그 뒤로 좀더 있긴 하지만 설마하니 그 부분까지 궁금해하진 않을거 같고. 말을 마친 그녀는 맥주를 한모금 더 마신 뒤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라온에서 불을 나눴다는 사실로 미루건대 그는 흡연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워낙 모호하게 설명했던지라 담배 불을 어떻게 나눴는지, 사탕도 어떻게 받아냈는지는 모를 것이라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만약 눈앞의 이 깐족거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여인이 그가 품어낸 자와 첫 만남부터 입맞춤에 준하는 행위를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리겠는가. 때마침 들려오는 당신의 추임새도 대단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뒤집힌 속이 다시 180° 뒤집혀 원상복귀 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정방향으로 뒤집히는게 아니라 이대로 빙빙 돌아 속을 연결하는 부분이 뚝 끊길 것 같다. 얄미운 정도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일 날 소리. 자네 사람을 더 챙겨야지."
이전처럼 진지하지도 않았고, 적대도 아니다. 당신처럼 농담으로 받아쳤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만약 일전 NE가 쳤던 장난처럼 고양이 귀가 돋아났다면 분명 옆으로 눕혀 당신을 빤히 쳐다봤을 것이다. 당신의 농담은 아까 전과 확실히 달랐지만, 지금은 깐족거리는 그 모습이 제법, 아니, 아주 얄미웠기 때문이다. 낮고 잔잔히 웃는 모습에 특히 더. 차라리 그처럼 폭소했다면 한번 앓는 소리를 내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속으로 고통받는 것이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벗어둔 모노클을 다시 썼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참 고맙군 그래." 하고 기어이 앓는 소리를 낸다. 차가운 버터맥주가 다시 나오자 그는 한모금 목 뒤로 넘겼다. 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알 정도로 서늘하고 놀라울만치 단맛이 나는 맥주가 활활 타는 속을 진정시킨다. 그렇지만 아직 뺨의 열감은 가시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시간이 약일 것이다. 맥주잔을 만지작거린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는 흠, 하고 운을 뗀다.
"놀랍군. 그렇게 잡아낼 줄이야."
요컨대 당신은 책에서나 나올법한 로맨틱한 사랑을 했다는 뜻이다. 엔딩이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써가는 야시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런 간지럽고 달달하며 애절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감성적인 부류가 아닌지라 그 자체로는 깊은 흥미를 가질 수는 없지만, 세부적인 것은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운명을 아예 개척해버린 것이 아닌가. 살아있는 자는 삶을 개척하고, 죽음을 바라보는 장의사들은 그 개척하는 행동에 많은 흥미를 가진다. 나중에 성공적으로 개척하고 후회 없이 올지, 아니면 후회 가득한 모습으로 오게 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감히 판단하건대 당신은 아마 전자지 않을까 싶다. 그는 버터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려다 잔을 쥐고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지금까지의 무관심으로 보아 외부에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것이지만, 당신의 말로써 확인하게 되는 건 더 깊은 절망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스베타는 고개를 떨구며 찻잔을 내려다본다. 고인 물은 썩듯이. 우리는 이 검은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천천히 부패해가며 악취를 풍기게 될 것이다. 문득, 스베타는 학교를 둘러싼 울타리가, 마법부가. 우리라는 물이 흘러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댐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요."
지금은, 하지만 앞으로는? 진정하라는 당신의 말에 스베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서 내려둔다. 몸 전체로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조금은 과장되었던 감정이 누그러진다. 스베타는 고개를 들며 당신과 눈을 맞춘다.
한순간이 무사히 지나간 것처럼 보여도, 그녀의 생글생글 웃는 낯과 일순간의 혼란스러움 뒤로 무슨 말, 무슨 생각이 숨겨졌을지는 그것이 드러날 때까지 모르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남매들 중에 그런 쪽으로 빠삭하며 이러한 장난을 즐기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을 배운 그녀는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이다.
"어머. 손이 하나인 것도 아니고 둘 쯤 건사하지 못 할 것도 없는데요?"
그녀는 농담으로 받아준 말에 다시금 농을 던지며 제 손을 쥐었다 펴보였다.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저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성사시켜버릴 것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매구라 불리는 이를 붙들어 놓았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장난으로 여기기도 어렵지 않을까. 또 보란듯 작게 웃는 걸 보면 그런 걱정들이 죄 허사인 듯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발렌타인이 맥주로 속을 한김 식히는 것을 기다려 그녀는 제 이야기를 했다. 많은 것이 잘려나가 짧아졌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건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고 본다. 얘기를 마친 그녀는 반지를 만지며 뭐든 말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 제 목을 쉬일 겸. 그리고 나온 짧은 감상에 재차 싱긋 웃으며 말을 얹는다.
"갖고 싶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잡는게 당연하죠. 전 다른 건 몰라도 제 욕심 하나에만큼은 솔직하거든요."
의외로 그녀는 반문을 하지 않았다.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고, 그 욕심이 같음에 대한 동의를 요할 법도 한데. 얄밉게 웃는 시선에서조차 그녀는 묻지 않고 있었다. 절대 같을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그저 가만히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마주하다가, 잔을 쥐고 하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잔을 잡아 들어올린다.
"지금이라면 사양 않죠. 그럼, 후회하기 않기 위해."
언제 돌아봐도 미련없이 나아갈 수 있기 위해, 그런 삶을 위해서, 라는 제법 거창한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기꺼이 발렌타인과 잔을 대고 맥주를 들이켰을 것이다. 그녀의 다짐은 그녀의 속에만 담아두고 잔을 내린 후에 여전히 깐족깐족 얄밉게 웃는 낯으로 조잘거렸을테다.
"그래서, 아까 듣고 생각난건데. 선배나 그 분이나 단 걸 좋아하시는 모양이에요? 마침 제 생가에서 보내준 간식거리가 제법 많아서요. 조만간 나눠 들고 현궁에 한번 찾아갈게요. 그 중에 달콤한 시럽이 든 사탕이 있는데 물고 있으면 달달하고 깨물면 톡 터져서 달달한게 진짜 맛있거든요. 두 분이 '같이' 드시면 차암 좋을거 같으니 꼭 드리러 갈게요."
그러면서 어째선지 손끝으로 제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게 마치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한번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키드득 웃는 소리가 그냥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니. 과연 이런 그녀와 공모 아닌 공모를 하게 된게 잘 된 일인가 의문을 품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을거다.
그리고 후일, 발렌타인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든 아니든 그녀는 정말로 작은 바구니에 먹음직스런 간식거리를 소복히 담아 현궁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그 역시 받았을지 내쳤을지는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만약 그녀의 작은 호의를 받아들었다면 또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꼭 같이 드세요, 네?" 하고 재빨리 내빼는 그녀를 보았겠지. 아니면 아닌대로 입을 비죽 내민 채 툴툴대며 돌아가는 그녀를 보았을거고.
//이걸로 막레 해두 되고 따로 막레 해두 되구~~ 미리 일상 수고했어 벨주! 벨은 이렇게 첼 깐족권(영구)를 얻었읍니다...ㅋㅋㅋㅋ...!!